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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주님 가신 길 위에서 (눅 9:28~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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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누구나 한 번쯤은 부부간에 또는 친한 친구 간에 사소한 말다툼으로 인해 좋았던 관계가 한 순간에 흐트러지는 것을 경험해 보았을 것입니다.

괜히 말하는 것도 어색해지고 침묵이 흐릅니다. 그리고 앞서서 세워놓았던 멋지고 좋은 계획들이 있었다면 모두 다 까맣게 수포로 돌아가는 듯 합니다. 먼저 사과하고 오해를 풀려고 하는 시도 대신에 분한 감정에 속으로 잘잘못을 계산하기도 합니다.

또 둘 중에 한 사람이 명백하게 잘못 판단했거나 실수를 했다면, 관계의 실타래가 쉽게 풀릴 수 있는 가능성이 있습니다.

그러나 둘 다 자신의 생각과 뜻이 맞다고 생각하면 할수록 그 긴장관계는 더 팽팽해지고 어색한 침묵의 시간이 오래도록 흐를 수 있습니다.

더구나 상대방이 정말 믿었던 사람이고 존경했던 사람이라면 더 힘이 들 수 있습니다.

  오늘 본문에서도 3년 동안 동거 동락했던 예수님과 제자들 사이에 말다툼이 있었습니다. 특별히 사랑과 존경으로 유지되었던 스승과 제자의 관계였기 때문에 상당히 어색하고 힘든 시간이 흐르게 되었습니다.




나의 뜻과 주님의 뜻이 상충될 때

28절에 보면, ‘이 말씀을 하신 후 팔일쯤 되어’ 라는 구절이 나옵니다. 여기에서 ‘이 말씀’이 무엇일까요? 바로 직전에 나왔던 베드로와 예수님의 대화입니다.

예수님이 “사람들은 나를 누구라하느냐?” 라고 물으셨을 때 다른 제자들은 세례요한, 엘리야, 선지자중 한 사람이라고 대답했지만 베드로는 “주는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대답합니다.

범상치 않은 베드로의 통찰력에 예수님이 칭찬을 하십니다. 그리고 비로소 자신이 고난 받으실 것과 죽으시고 부활하실 것을 말씀하십니다. 22절과 23절을 읽어보겠습니다. 

“인자가 많은 고난을 받고 장로들과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에게 버린바 되어 죽임을 당하고 제 삼일에 살아나야 하리라. 또 무리에게 이르시되 아무든지 나를 따라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날마다 제 십자가를 지고 나를 좇을 것이니라.”

죽임을 당하는 것은 무엇이고 삼 일만에 살아난다는 것은 또 무슨 말입니까? 날마다 제 십자가를 지고 좇아야한다는 말씀은 더 이해가 안 갔습니다.

그래서 베드로는 강력하게 반대하며 말합니다.

“주여 그리 마옵소서! 이일이 결코 주에게 미치지 아니하리이다.”

즉, 이 말은 “안 됩니다. 결코 하나님의 아들이신 당신은 죽음으로 끝나서는 안 됩니다.”라는 뜻입니다.

그때 예수님은 베드로에게 “사단아, 내 뒤로 물러가라. 너는 나를 넘어지게 하는 자로다. 너는 하나님의 일을 생각지 아니하고 도리어 사람의 일을 생각하는도다.”하고 강하게 책망하십니다. 여기서 사단은 ‘대적하는 자’라는 뜻입니다.

이렇게 예수님과 베드로 간에 말다툼이 오고갔습니다. 예수님은 자신이 걸어가야 할 십자가의 고난과 죽음, 또 부활을 말씀했고, 베드로는 결코 죽음으로 끝나서는 안 된다는 의견으로 팽팽히 맞서게 된 것입니다.

한 순간, 나머지 제자들은 이 냉랭한 분위기 속에서 말 한마디 못하고 숨죽이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이러한 제자들과 예수님과의 서먹하고 어색한 분위기가 일주일 이상 계속되었습니다.

이 기간동안 예수님은 철저하게 혼자되셨습니다. 제자들도 자신의 십자가의 길을 지지하며 힘을 실어주지 못했기 때문에, 아니 이해하지 못했기 때문에 고독 속에서 힘든 날을 보내셨습니다.

우리의 삶 속에서도 예수님과 나의 뜻이 상충되어 나타나는 경우가 있습니다. 평소에 주님의 뜻대로 살려고 노력하고 순종하며 살아왔는데 정말 중요한 일을 앞두고 예수님은 NO라고 하시는 것입니다. 서운합니다. 그때 나는 어떻게 예수님께 말합니까?

“주님, 이번 일 만큼은 주님이 틀렸습니다. 그렇게 나가면 안 되는 것 아시잖아요? 왜 일이 안되게끔 몰아가십니까?”

이렇게 말다툼에서 시작해서 어색한 침묵으로 흘러갈 때 대부분의 우리들은 스스로 다음 행동을 결정합니다.

내 뜻대로 밀어붙이거나, 이 침묵과 소원한 관계를 오래도록 방치시키는 것입니다.

“아니야, 주님도 나중에 잘했다고 하실 거야. 이번만큼은 내 뜻대로 밀어붙이겠어.”,

또는 “주님, 이제 좀 쉬어야겠습니다. 한 몇 달 교회를 좀 쉬면서 우리 관계를 생각해보면 좋을 것 같습니다.”




28절을 보면, 베드로와 주님과의 이 대화 후에 8일이 흘렀습니다. 서로의 오해는 명확하게 풀리지 않았습니다. 자, 이제 예수님이 이러한 상황 속에서 제자들과의 관계를 어떻게 풀어 나가시는지 주목해 보십시오.




부활의 영광을 보여주시다.

예수님은 8일쯤 지났을 때, 베드로와 요한과 야고보를 데리고 기도하러 산으로 올라가십니다. 사복음서는 8일이라는 그 기간 중에 어떠한 일이 있었는지 아무것도 기록하지 않고 있습니다.

아마 제자들은 그 침묵의 기간 중에 ‘예수님이 말씀하신 고난과 죽음이 우리 모두의 끝이 되지는 않을까...’ 내심 걱정하면서 힘들어했을 것입니다.

그런 상황에서 예수님은 베드로와 요한과 야고보를 기도하러 가자고 산으로 데리고 가십니다. 그 산 위에서 놀라운 광경이 펼쳐집니다.

바로 예수님이 기도하실 때 용모가 변화되고 그 옷이 희어져 광채가 나는 사건이 발생했습니다. 평소에 보던 예수님의 모습이 아니라 영광 중에 빛나는 모습이었습니다. 도저히 그 앞에서 한 마디의 말도 꺼낼 수 없는 위엄과 권위가 느껴졌습니다.

또 하나 놀라운 것은 예수님과 대화하는 두 사람이 있었는데 모세와 엘리야였습니다. 성경은 제자들이 모세와 엘리야를 어떻게 알아보았는지 기록하지 않고 있습니다.

모세와 엘리야 사진을 가지고 있었던 것도 아니고 그들의 신상명세서나 특징, 이력서를 외우고 있었던 것도 아닌데 한눈에 알아보았습니다.

우리도 나중에 영광 중에 주님과 같이 있을 때 서로가 서로를 알아보게 될 것입니다. 지금, 있을 때 잘 해야 됩니다.

 

이 장면은 나중에 우리와 같은 평범한 사람도 주님과 같이 영광 중에 있게 될 것을 보여주는 장면이기도 합니다. 모세와 엘리야는 평범하고 지극히 인간적이고 실수 많은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들이 주님과 같이 빛나는 영광 중에 있었다는 사실은 우리에게 큰 위로가 됩니다. 나도 나중에는 주님과 같이 영광 중에 대화하게 되리라는 확신을 갖게 됩니다.

자, 그러면 왜 예수님은 산에서 이러한 광경을 제자들에게 나타내 보여주셨을까요? 왜 제자들과의 의견이 상충되고 힘든 그 시점에서 영광스런 모습을 보여주셨을까요?

그것은 십자가의 고난과 죽음을 받아드리지 못하고 반대하던 제자들에게 그 ‘고난과 죽음’이 마지막이 아니라 ‘고난과 죽음너머의 영광’이 있다는 것을 보여주시고자 함이었습니다.

예수그리스도는 이 땅에 오셔서 사역하시고 힘없이 죽음으로 끝나는 운명이 아니었습니다.

사망과 죽음을 이기시고 사셔서 부활의 영광 중에 계실 우리의 구원자이십니다. 하나님의 계획은 이렇게 인간들이 이해하지 못하고 측량하지 못할 놀라운 섭리 가운데 진행되고 있었습니다.

인간적인 생각으로 십자가의 길을 강하게 거부했던 제자들에게 산 위에서 영광스러운 부활의 이미지를 보여주심으로 인해 소망을 얻게 하셨습니다. 그래야 십자가를 지고 날마다 자기를 부인하고 자신을 좇아올 힘을 얻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31절 말씀을 보면, 모세와 엘리야와 함께 죽음에 대해 얘기를 나누시는 장면이 나옵니다. 예수님도 위로와 격려를 얻었습니다.

사망권세를 이기시고 하나님의 놀라운 구원의 계획을, 며칠 후면 완성하실 것을 얘기하시고 모세와 엘리야와 함께 미리 기뻐했을 것입니다.

그때 하나님의 임재가 구름으로 나타났습니다. 구름 속에 예수님과 두 사람이 덮일 때에 제자들은 두려워 떨며 자세를 낮출 수 밖에 없었습니다.

하나님의 임재 앞에 서면 누구나 두려움 속에 임하게 됩니다. 죄인인 우리가 하나님의 신성 앞에 노출되면 엎드려지게 되어있습니다. 그리고 고백합니다. “우리는 죄인이로소이다. 나를 떠나소서....”

그러나 우리 곁에 예수님이 계시다는 사실이 얼마나 다행인지 모릅니다.

그 위엄과 영광의 하나님의 임재 앞에 우리가 담대히 나갈 수 있게 된 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보혈의 피 때문이기 때문입니다.

제자들도 예수님이 곁에 있어서 이 두려운 상황이 조금이나마 안심이 되었을 것입니다.

그때 구름 속에서 소리가 났습니다. 우리 35절 말씀을 다같이 읽어보겠습니다.

“구름 속에서 소리가 나서 가로되 이는 나의 아들 곧 택함을 받은 자니 너희는 저의 말을 들으라하고.”

하나님의 음성이 베드로와 요한과 야고보에게 직접 들렸습니다. 그 음성은 예수님의 고난과 죽음예고가 하나님의 뜻임을 깨닫게 하였습니다. 하나님은 특별히 예수님이 베드로에게 하신 말씀인, 22절, 23절의 말씀이 내가 택한 아들의 말이니 그 말대로 순종하라는 것입니다. 무엇이죠?

누구든지 예수를 따라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날마다 제 십자가를 지고 예수그리스도를 좇을 것이니라.

이렇게 자기부정과 순종은 제자 된 사람의 가장 본질적인 부분임을 알 수 있습니다.

“너희의 뜻과 계획은 나의 생각과 다르다. 너희는 자신을 부정하고 예수그리스도의 말을 따르라”라고 말씀하십니다.




주님의 가신 길 위에서

우리의 불순종의 대부분은 내가 여전히 살아있기 때문에 나타납니다. 그래서 자기를 부인하는 것이 정말 어렵습니다.

베드로가 한번은 밤새도록 고기를 잡으려고 노력했는데 예수님이 그물을 깊은 데로 던지라고 했습니다. 자존심이 상했습니다. 왜요?

자기가 고기 잡는데는 더 전문가이기 때문입니다. 바다의 상태와 깊이와 고기들이 어느 깊이에 많이 몰리는가는 경험상 자신이 더 잘 알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자아가 살아있으면 막상 순종하기 어렵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말씀대로 순종했을 때 그는 놀라운 경험을 합니다. 천지만물을 다스리시는 주님의 권세와 영광을 목격하게 됩니다.

그러나 베드로는 십자가사건 직전 예수님을 세 번 부인했습니다. 자신을 부인하지 못하고 예수님을 부인하는 모습을 보입니다. 그러나 부활하신 주님을 눈앞에서 만났을 때 변화산의 모습이 떠오르면서 영광 중에 계신 주님을 찬양했습니다. 그리고 불순종을 회개하고 자기를 완전부인하면서 십자가의 길을 좇았습니다. 생명 다해 복음을 증거하고 자신도 십자가에서 죽었습니다.

여러분, 순종의 클라이막스는 사랑하는 주님과 고난까지도 함께 하는 것입니다.

내 의견과 똑같아서 주님을 따르는 것이 순종이 아니라 내 의견과 틀리더라도 고난이 따르더라도 예수님을 전적으로 신뢰하고 나아가는 것이 순종입니다. “예수님밖에 대안이 없다”라고 고백하는 것이 순종입니다.

우리는 주님이 가신 십자가 길 위에서 왜 항상 머뭇머뭇 거리고 있습니까?

내 자신의 생각과 계획이 강하기 때문입니다. 주님의 뜻과 상충될 때 결코 자신을 부정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주님, 자녀교육에 관한한 제가 더 잘 알지 않겠습니까? 신앙교육은 나중에 할 수 있지만 내신 등급은 지금이 더 급하다구요”

“주님, 사업상 이번 투자는 정말 제가 몇 달 동안 고민했습니다. 이번 기회를 놓치면 전 망합니다. 그래도 포기하라구요? 말도 안 됩니다.”

“주님, 이 자매는 아무리 따져 봐도 제 스타일입니다. 단지 신앙이 없어서 그렇지. 모든 부분에서 제 수준에 맞습니다. 계속 밀어붙이는 것이 주님의 뜻인 줄로 믿습니다.” 청년들만 이렇게 기도하는 게 아니라는 것이 더 문제입니다. 요즘은 유부남, 국회의원들도 한몫합니다.

“주님 요즘 여러 가지로 힘이 들어서 예배로 나아가지 못하겠습니다. 어디든지 계시는 주님, 오늘은 안방에서 티브이를 통해 만나 뵙겠습니다.” 그러다가 깜박 드라마, 쇼프로를 보다가 주님을 놓칩니다.

“주님, 이 한 사람만은 주님도 용서하지 못할 종자입니다. 보셨죠? 저를 얼마나 힘들게 했는지? 이 사람을 용서하고 사랑하라는 말씀만은 결단코 안 됩니다.

여러분, 우리에게 이렇게 주님이 가신 길 위에서 주님과 다투고 있는 모습이 있지 않습니까? 그렇게 주님과 나 사이에 어색한 침묵과 소원한 관계가 계속 될 때...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내 뜻대로 하시겠습니까? 아니면 회피하시겠습니까?

중요한 것은, 나와 주님의 뜻이 맞지 않는다 할지라도 “그럼에도 불구하고 주님 곁에서 떠나지 않고 나의 권리를 포기하고 그분께 순종하는 것.”입니다.

만약, 베드로와 야고보와 요한이 주님과의 의견이 자신들과 상충되었을 때 제자의 삶을 버리고 집으로 돌아갔더라면 죽음 너머에 기다리고 있는 부활의 영광을 미리 보지도 경험하지도 못했을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십자가의 길이 부담스럽고 주님의 뜻이 무엇인지 모르는 상황이 우리에게 올 수 있습니다. 그래도 먼저 주님 곁에 붙어있으시길 바랍니다. 말씀보고 찬양하고 기도하십시오. 그리고 내 권리를 포기하시고 순종하십시오.

그러면 주님께서 주님의 때에 우리의 고난 뒤에 숨겨진 영광의 비젼을, 변화산에서처럼 보여주실 것입니다.




권리포기

제가 아주 어렸을 적에 아끼는 장난감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항상 그 장난감을 가지고 놀기가 두려웠던 것은 4살 아래의 여동생 때문이었습니다.

다른 것 다 놔두고 내가 제일 아끼는 장난감만 보면 울며불며 달라는 것입니다. 그 장난감만 가지고 있으면 어찌나 긴장되던지...

그래서 하루는 “딱 1분만이야!”라고 약속을 하고 빌려줍니다. 근데 어린아이가 시간관념이 있겠습니까? 그때부터 그 장난감을 가지고 싸우게 됩니다. “왜 1분이 지났는데 더 가지고 노느냐?”면서 뺏으려다 싸움이 커집니다.

그때 어머니가 중재하십니다. “문찬아, 내가 더 좋은 거 사 줄 테니까 그거 동생 줘라! 그 장난감, 오빠인 네가 포기해라!” 순간 머리가 회전하기 시작합니다. ‘과연 엄마는 더 좋은 장난감을 빠른 시간 안에 사주실 것인가?’

저의 대답은 “NO”였습니다. 의심스럽다는 거죠.

시간이 지나고 정말 더 좋은 장난감이 제게 주어졌습니다. 그때야 비로소 저는 사랑스런 표정을 하고 동생에게 가서 말합니다. “이거 너 가져, 오빠는 괜찮아!” 하면서 생색을 냈습니다.

이것은 권리포기가 아닙니다. 진정한 자기부인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더 좋은 것을 약속하셨습니다. 그리고 그분은 모든 것을 가지고 계신 전능하신 아버지이십니다.

진정한 권리포기는 하나님이 알아서 해주실 줄 믿고, 더 좋은 길로 인도하실 줄 믿고 내가 가장 소중하게 생각하는 것도 버리는 것입니다.

우리는 왜 포기하지 못하고 있습니까? 왜 내 자신을 부인하지 못하고 있습니까? 혹시 하나님의 전능하심과 은혜를 의심하기 때문은 아닙니까?

주님의 뜻과 상충될 때 십자가의 길 위에서, 나를 포기하시고 순종하시기 바랍니다.  우리 아버지께서 더 큰 은혜와 축복을 이미 준비해주신 줄 믿습니다. 




변화산을 내려온 후에

예수님이 변화산에서 내려오신 직후에 하신 일은 무엇입니까? 하나님 영광의 놀라운 엑스타시를 경험하고 일상으로 돌아간 후에 제일 처음 한 일은 귀신들린 아이를 고쳐주신 일이었습니다. 그것은 매번 하셨던 일입니다. 이제 더 큰 일을 이루실 것이기 때문에 더 이상 신경 쓸 수 없는 일일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귀신들린 아이를 고쳐주신 일은 십자가를 완성하는 길 위에 놓인 주님의 현재 사명이자 맡겨진 일이었기 때문에 결코 사소한 일이 아니었던 것입니다.

우리도 예수님께서 주신 소망과 은혜를 체험하고 나서부터가 더 중요합니다. 사람들은 부흥회 기간 동안 놀라운 은혜와 회개를 맛보았다고 자랑합니다. 그러나 그 변화산을 내려온 후에는 자신의 사명을 더 충성되이 감당하지 않고 현실에 충실하지 못합니다. 마치 가치없는 사소한 일을 다시 하는 것처럼 생각합니다.

또 예전보다 더한 영적 게으름 속에 빠져들게 됩니다.


사랑하는 성도여러분, 주님은 사순절 기간을 맞아 우리가 이 기간에만 주님의 고난과 십자가를 묵상하지 않기를 바라십니다. 

은혜를 경험하고 난 다음 일상 속에서도 제 십자가를 지고 날마다! 예수님을 좇아가시길 바랍니다. 현재의 사명에 충실하시기 바랍니다. 그것이 복된 길인 줄 믿습니다.


오늘 말씀을 통해서 주님가신 길 위에서 제자로서의 삶의 자세를 생각해 보았습니다. 본문에서 보여주시는 4가지 단계를 통해서 우리의 지금 사명에 힘을 얻어 각자의 자리에서 승리하며 나아가야 하겠습니다.

첫 번째는 주님과 함께 동행하며 먹고 마시며 대화하는 단계입니다. 이렇게 함께 하는 삶이 없다면, 기도하는 삶이 없다면 예수님의 뜻과 상충되는지 일치하는지 알기도 어렵습니다. 대화가 없는데 주님과 싸울 일도 없지 않겠습니까? 먼저 주님과 살며 대화하십시오.

두 번째는 주님과의 대화 중에 나와 상충되는 부분이 있더라도 끝까지 붙어있으면서 권리를 포기하고 순종하는 단계입니다. 그때는 잘 모릅니다. 왜 그렇게 나의 계획과 생각이 잘 못 되었는지를...그러나 인내하고 기다리는 자에게 주님이 구체적으로 말씀하실 것이기 때문에 붙어있어 순종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세 번째는 인내와 기도 속에서 주님의 뜻에 순종하는 자에게 ‘영광과 소망’을 바라보게 하시는 단계입니다. 변화산에서 부활의 주님을 영광 중에 바라보게 하셨듯이 우리에게 말씀하십니다. “이것이 끝이 아니다. 사랑하는 내 아들아, 내 딸아, 나는 너를 위해 더 좋은 계획을 가지고 있다. 날마다 너 자신을 부인하고 너의 십자가를 지고 따라오너라.” 하는 말씀을 듣게 됩니다.

마지막 단계는 그 비젼과 소망의 시간을 경험하고 나서 현재의 사명에 더 충성되게 일하게 되는 단계입니다. 주님은 결코 고난과 죽음의 길을 건너뛰지 않으셨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제자 된 우리도 똑같이 주님가신 길을 걸어가면서 현재 나에게 맡겨주신 일들을 감사함으로 긍정적으로 감당해야 할 줄로 믿습니다.

이 시간 주님의 길 위에 선 우리가 머뭇거리지 말고, 뒷걸음치지 말고, 의심을 버리길 원합니다. 전능하신 하나님의 능력과 그분의 영광을 바라보길 원합니다.

또한 주님가신 길 위에서 예수님처럼 온전히 순종함으로 십자가를 지고 전진해서 하나님의 복과 은혜를 누리는 귀한 백성들 되길 간절히 축원합니다 (이하준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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