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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주님께 인정받은 사람 (요 1:43-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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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으로 한국에는 교회도 많고 교인도 많습니다.
매우 축복된 일입니다.
문제는 교회다운 교회, 성도다운 성도가 얼마나 되느냐가 중요합니다.
탈선한 기차나,  짖지 못하는 개나, 기능이 상실된 것 같은 이 교회도 마찬가지입니다.
이 시대에 교회가 무엇을 해야 할 것인가를 바로 깨달아야 합니다.

매일 보도되는 이 사회는 날로 흉악해져 가고 있고 환경만 오염된 것이 아니라 사람들의 마음과 영혼과 정신은 더 오염되어 가고 있습니다.
휘황찬란한 밤거리의 불빛들이 번쩍번쩍하지만 진정한 희망을 주고 생명을 살리는 빛은 없습니다.

정치 경제 사회 문화 어느 분야나 그리스도인이 없는 곳이 없습니다.
그러나 어느 곳 하나 성한 것 없이 병들어 있고 썩어 냄새가 나고 있습니다.
그러나 정작 방부제 역할을 할 소금이 없다는데 문제가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우리를 보고 세상의 소금이요 빛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렇다면 교회가 많은 수록 세상이 달라져야 합니다.
성도가 많을수록 방부제와 같은 소금의 역할을 잘 해서 건강한 사회가 이루어져야 합니다.
그런데 현실은 그렇지가 않습니다.
오히려 교회가 빛을 잃고 소금의 맛을 잃어가고 있습니다.

우리는 교회가 이 시대에 무엇을 해야 할 것인가를 찾기 위하여 거룩한 고민을 해야 합니다.
이제 한국 교회는 6만 교회니 천만 성도니 이런 숫자를 자랑할 것이 아니라 이 시대의 아픔을 치유해주고 신음하는 백성들에게 희망을 줄 수 있으며 그늘진 곳에 사랑을 전하고 맛을 잃은 곳에 맛을 내는 그리스도인들로 다시 태어나야 한다는 사실입니다.

오늘 말씀에 빌립을 통해 전도를 받고 예수를 영접한 사람이 있습니다.
나다나엘이란 사람인데 이 사람의 신앙과 인격이 잘 소개되어 있습니다.
특히 예수님은 나다나엘을 만나고 그의 신앙 인격을 칭찬하시면서 “이는 참 이스라엘 사람이라 그 속에 간사한 것이 없도다.”라고 하셨습니다.

참된 그리스도인이란 바른 인격을 소유한 자입니다
바른 신앙은 바른 인격에서 열매로 나타나게 됩니다.
뿌리가 건강한 나무가 좋은 열매를 맺는 것처럼, 하나님 앞에 바른 뿌리를 가진 사람은, 사람다운 사람으로, 양심을 갖춘 인격으로, 그 생활에서 나타난다고 하는 사실입니다.

예수님께서도 열매를 보면 그 나무의 질을 알 수가 있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주님께 인정받은 사람 나다나엘의 인격을 통해서 4가지의 믿음의 본을 받고자 합니다.

첫째로, 나다나엘은 주님께 인정받은 신앙인입니다.

47절에 “예수께서 나다나엘이 자기에게 오는 것을 보시고 그를 가리켜 가라사대 보라 이는 참 이스라엘 사람이라 그 속에 간사한 것이 없도다.”(47절)하고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은 나다나엘을 보시고 첫 말씀으로 “이는 참 이스라엘 사람”이라고 인정하셨습니다.

사람이 인정받는다는 것은 대단히 가치 있고 중요한 것입니다.
가정에서든 사회에서든 불신을 받는 것보다 더 불행한 일은 없습니다.
특히 그리스도인은 두 가지에서 인정받아야 합니다.

첫째,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인정받아야 합니다.
아무리 외적으로 신앙생활을 잘하는 것 같이 보여도 하나님께 인정받지 못한다면 가장 비참한 신앙입니다.

천국에 가보았더니 꼭 올 줄 알았던 사람이 안와 있더랍니다.
반대로 못 올 줄 알았던 사람이 그곳에 와 있더랍니다.

다른 사람의 신앙을 함부로 평가해서는 안 됩니다.
그것은 하나님만이 아시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 인정받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하나님께 인정받는 것이 바로 은혜요 축복입니다.
성경에 욥을 보십시오.
마귀가 욥을 환난 가운데서 시험해 보겠다고 할 때에 하나님께서 욥의 신앙을 보장해주셨습니다.
욥과 같이 순전하고 정직하여 하나님을 경외하며 악에서 떠난 자가 세상에 없다고 하나님이 욥을 인정하셨습니다.(욥1:8)

욥은 말할 수 없는 환난 중에도 어리석게 하나님을 원망하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환난과 풍랑이 다가올 때에 무릎을 꿇고 이렇게 기도했습니다.
“내가 모태에서 적신이 나왔사온즉 또한 적신이 그리로 돌아가올지라. 주신자도 여호와시오, 취하신자도 여호와시니, 여호와의 이름이 찬송을 받으실 지니이다.”(욥1:21절)

하나님은 훗날 두 배의 복을 주셨습니다.
괴로웠던 지난날의 환난들이 마치 흘러간 물과 같이 기억도 나지 않을 정도로 하나님이 큰 복을 주셨습니다.
하나님께 인정을 받았기 때문입니다.

또한 아브라함을 보십시오.
자식을 번제로 드리라고 할 때 왜 드리라고 하는지 이유를 몰랐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명령이기에 이유 없이 그대로 순종을 했습니다.
아브라함이 이삭을 드릴 때 아브라함은 두 가지 좋은 신앙을 우리에게 보여줍니다.

하나는 타협이 없는 신앙입니다.
자식을 드리면서도 부인과 의논을 하지 않았습니다.
자식과도 타협하지 않았습니다.
왜 그랬습니까?
아브라함의 고집 때문입니까?
아닙니다.
절대자의 명령 앞에서 그 누구도 이 세상에서 타협의 대상이 될 수 없었기 때문입니다.
아브라함은 타협 없는 신앙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또 하나는 변치 않는 신앙입니다.
모리아 산까지 삼일 길을 걸어가면서도 아브라함은 처음에 먹은 마음이 변하지 않습니다.
우리들의 모습을 보십시오.
아침에 먹은 마음이 저녁에 변하고, 아니 저녁이 아니라 한 두 시간도 못가는 것 같습니다.
칼을 들어 제물로 자식을 드리려는 순간에 이르러서야 침묵하시던 하나님의 음성이 들려왔습니다.
“아브라함아! 이제 네가 나를 경외하는 줄을 알았다”하고 인정하셨습니다.

하나님이 아브라함의 신앙을 인정하는 시간에 하나님은 숫양을 이미 예비해 놓고 기다리고 계셨습니다.
아브라함이 인정받는 순간 하나님은 예비하신 숫양을 공궤해 주셨습니다.
성도는 무엇보다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인정을 받아야 합니다.

둘째, 사람과의 관계에서도 인정을 받아야 합니다.
성경은 하나님과의 관계와 동시에 사람과의 관계도 매우 중요하게 말씀합니다.
그래서 땅에서 매면 하늘에서도 매이게 된다고 했습니다.
마 5장에 예물을 드리려고 제단으로 가다가 형제에게 원망들을 일이 생각나거든 그 예물을 놔두고 먼저 화해하고 와서 드리라고 말씀하셨습니다.(마5:23-24)
하나님과의 관계 못지않게 인간관계가 중요하다는 것을 보여주는 말씀입니다.

무엇보다도 가장 가까운 사람으로부터 인정을 받아야 합니다.
부부간에도 신뢰가 있어야 합니다.
부모와 자식 간에도 신앙을 서로 인정을 해야 합니다.
“우리 아빠는 진짜 집사님이다. 우리 엄마는 진짜 하나님과 동행하는 분이여”라고 인정받을 수 있어야 합니다.
 
또 이웃에게도 인정을 받아야 합니다.
예수 믿는 사람은 무엇인가 달라야 합니다.
예수 믿는 집사님 주변이 다르고, 권사님 주변이 다르고, 장로님 주변이 달라야 합니다.

딤후 3:7절은 외인에게도 인정받아야 된다고 말씀합니다.
“또한 외인에게서도 선한 증거를 얻은 자라야 할지니 비방과 마귀의 올무에 빠질까 염려하라”(딤후3:7)
신뢰성이라든가 정직성이라든가 또는 말에 대한 책임성을 인정받아야 합니다.
주님은 나다나엘을 참 이스라엘 사람이라고 인정해주셨습니다.
바로 이것이 은혜요 축복인 것입니다.

둘째로, 나다나엘은 중심이 바로 된 사람입니다.

예수님이 나다나엘을 칭찬하실 때에 “그 속에 간사한 것이 없다”(요1:47)고하셨습니다.
저는 이 말씀을 보다가 얼마나 은혜를 받았는지 모릅니다.
그 속에 간사한 것이 없는 사람, 이 사람이 은혜의 사람이요, 축복의 사람인 것입니다.
간사함이란 이중성을 말합니다.
주님이 가장 싫어하시는 것이 간사한 마음을 가진 사람들입니다.
창녀보다도, 살인강도보다도, 예수님 당시에 가장 책망을 많이 받은 사람들이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입니다.

이 사람들은 옷깃에다 성경구절을 써 붙이고 다녔고, 주일을 잘 지키고, 십일조도 잘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이들을 무섭게 책망하셨습니다.
왜 그랬습니까?
중심을 보셨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외식하는 바리새인아 너희 속은 마치 열린 무덤 속과 같구나 하셨습니다.

무덤이 어떻습니까?
겉은 아름다운 잔디로 꾸며져 있지만 그 속을 파헤쳐 보면 썩은 송장이 들어 있습니다.
그것처럼 겉은 성경구절을 써 붙이고 외식을 하고 있지만, 그 마음속에는 간사함과 외식으로 썩은 송장 같은 것들이 들어있다는 책망입니다.     

외식이란 겉과 속이 다르다는 말입니다.
우리는 안과 밖을 다 보시는 하나님 앞에서 어디를 더 꾸며야 합니까?
속을 더 꾸밀 줄 알아야 합니다.
하나님 앞에 봉사를 해도 중심으로 해야 합니다.
기도도 중심으로 해야 합니다.
주의 일을 해도 중심으로 해야 하나님이 받으십니다.

속이 바로 되어야 복을 받습니다.
중심은 곧 마음입니다.
마음은 하나님의 축복을 담은 그릇과 같습니다.
마음의 자세가 바로 되어야 양심이 기능을 잃지 않게 되고 하나님이 복을 주십니다.

삼상 16:7절에 이스라엘의 2대 왕을 뽑을 때에 하나님이 보시던 기준이 나와 있습니다.
“나의 보는 것은 사람과 같지 아니하니 사람은 외모를 보거니와 나 여호와는 사람의 중심을 보느니라.”(삼상 16:7절)
하나님께서 보시는 것과 사람이 보는 기준이 달랐습니다.

사람은 겉만 보고 평가하기 때문에 실수하는 일들이 너무 많습니다.
진실을 말해도 거짓말로 인정하고 거짓말을 해도 진짜로 받아들이는 실수를 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안과 밖을 다 보시고 평가하시기 때문에 하나님의 평가는 정확합니다.
시 94:9절에 “귀를 지으신 자가 듣지 아니하시랴. 눈을 만드신 자가 보지 아니하시랴”고 하셨습니다.
하나님 앞에 바로 살아야 합니다.

중심으로 하나님을 사랑하고, 중심으로 기도하고, 중심으로 충성하고, 중심으로 봉사해야 하나님이 받으십니다.
예수님은 천국 복음을 전하기 위해서 많은 일꾼이 필요하셨습니다.
그때에 글 잘 쓰는 문필가를 찾지 않았습니다.
많고 많은 사람들, 말 잘하는 정치가를 부르시지도 않으셨습니다.
많고 많은 사람 중에 기교도 방법도 없지만, 다만 정직하고 우직하고 진실함을 가졌던 베드로 같은 어부를 불러다가 예수님의 수제자로 삼았습니다.
이것이 주님의 방법입니다.

구약에도 보면 하나님은 농부였던 기드온 같은 사람, 뽕나무나 가꾸고 살던 아모스 같은 사람을 불러서 하나님의 사람으로 귀하게 쓰셨습니다.

하나님은 순수한 사람, 거짓이 없는 사람, 자기의 실력도 잔꾀도 없는 그런 사람을 찾으셨습니다.
어리석을 정도로 ‘예, 아멘’ 할 수 있는 사람, 주님의 뜻이라면 죽기까지라도 순종해 보려고 하는 이런 사람들이 하나님의 사람이요, 믿음의 사람입니다.

나무는, 보이지 않지만 뿌리가 중요하듯이, 사람은, 보이지 않지만 중심이 바로 되어야 합니다.
사람다운 사람, 성도다운 성도는 그 중심이 바로 된 사람이라는 것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예수님은 나다나엘의 중심을 보시고 그 속에 간사함이 없는 사람인 것을 아셨습니다.
그러기에 참 이스라엘 사람이라고 주님이 인정하신 것입니다.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정치, 경제, 문화계 속에 있습니다.
이 사회 어느 분야에나 다 있습니다.
그러나 중심이 바로 되지 않아서 그리스도의 빛이 없습니다.
맛이 나지 않습니다.
여기에서 교회의 기능이 상실되어 가고 있는 것입니다.

셋째로, 나다나엘은 신앙을 바로 고백한 사람입니다.

49절에 “당신은 하나님의 아들이시오 당신은 이스라엘의 임금이로소이다”라고 고백했습니다.
예수님을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고백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하나님의 아들로 알아보는 눈이 열려 있었습니다.

신앙의 가장 중요한 것은 바르게 신앙을 고백하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나의 구주로 영접하고 믿는 다는 신앙을 고백하는 그 시간에,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겨지고, 지옥의 길에서 영생의 길로 바뀌는 것입니다.

그래서 요 5:24에 예수님께서 “내가 진실로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내 말을 듣고 또 나 보내신 이를 믿는 자는 영생을 얻었고 심판에 이르지 아니하나니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겼느니라.”(요 5:24절)고 하셨습니다.

사람이 임종이 올 때 반드시 묻는 질문이 있습니다.
당신은 예수 그리스도를 믿습니까?
이 질문의 대답은 영생과 형벌의 갈림길이 됩니다.
믿는다고 하면 영원한 생명이요, 안 믿는다고 하면 영원한 멸망입니다.

그래서 이 세상에서 가장 큰 죄는 강도가 아닙니다.
창녀도 아닙니다.
믿지 않는 죄입니다.
예수를 믿지 않고 죽은 사람은 아무리 선하고 의롭게 살았다고 자부할지라도 영생이 없습니다.
천국에 갈수 없습니다.
천국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사람만이 가는 나라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가장 큰 복이 예수 잘 믿는 것입니다.

여러분의 가정에 믿지 않는 사람들이 있다면 그 영혼을 위해서 특별히 기도하시기 바랍니다.
구원을 위해 전력하시기 바랍니다.

나다나엘은 신앙고백을 바로 한 사람입니다.
성경의 모든 역사는 이러한 신앙고백을 통해서 나타났습니다.
여러분도 신앙을 바로 고백한 나다나엘처럼 항상 신앙을 고백하며 살아가시기를 바랍니다.

끝으로 앞으로의 큰 소망을 얻었습니다.

50절 끝 부분에 주님은 신앙고백을 하는 나다나엘을 향해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이 보다 더 큰일을 보리라.”(50절)
앞으로 주님이 행하실 큰 비전을 보리라는 소망이었습니다.
주님은 나다나엘에게 꿈을 주셨습니다.

사람은 항상 꿈이 있어야 합니다.
꿈을 품고 사는 것은 큰 축복입니다.
아침에 일어날 때 그 날의 할 일에 대한 꿈에 설레어야 합니다.
한 달에 꿈을 바라보며 설레이고, 내년에 이룰 꿈을 바라보며 설레임이 있어야 합니다.
사람은 무엇이 되기 이전에 무엇이 되겠다는 꿈이 있어야 합니다.
믿음의 사람은 항상 꿈과 소망을 갖고 사는 사람입니다.
아무리 어려운 환경이 다가와도 앞을 바라보며 극복해 가는 것이 믿음입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인은 어떤 문제를 만나든 동굴로 들어가는 자가 아니라 터널을 지나가고 있을 뿐입니다.

동굴은 막혀있지만 터널은 인내하고 나가면 반드시 새로운 세계가 뚫려져 있습니다.
아무리 예측할 수 없는 천년의 변화라 할지라도 그리스도인은 불안해하지 않습니다.
염려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희망을 갖고 앞으로 전진해가며 믿음으로 나아가는 것입니다.

나다나엘을 향해서 더 큰일을 보리라고 주님께서 비전을 주신 것처럼, 주님께서 앞으로 전진해나가는 여러분에게 더 큰 소망을 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아멘- (박영준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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