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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우리에게 은혜가 필요한 이유 (엡 2:8~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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웨슬리 형제와 함께 초기 감리교 운동을 하였던 조지 화이트필드(George Whitefield 1714∼1770)는 교수대로 가는 사형수를 보고 “하나님의 은혜로 말미암지 않았다면 그곳에 갈 자가 바로 나였을 것인데”라고 했다고 합니다. 이는 그가 원래 흉악한 사람이었는데 개과천선했다는 말이 아닐 것입니다. 아담의 후손은 누구나 타락한 본성을 지니고 있으므로 하나님의 은혜가 아니라면 그 자신도 무서운 죄에 빠질 수 있다는 뜻입니다. 따라서 화이트필드의 고백은 저를 포함해서 모든 그리스도인의 고백이 되어야 마땅할 것입니다.

그리스도인이 되기 위한 필수 조건은 올바른 행실이 아니라 자신이 구제받을 수 없는 흉악한 죄인이라는 사실을 솔직히 인정하는 것입니다. 이 사실을 부인하는 사람은 기독교인은 될 수 있어도 그리스도인이 될 수는 없습니다.

“그러면 그리스도인들은 다 죄인들이라는 말이군요” 맞습니다. 그리스도인은 주님을 믿기 전에는 흉악한 죄인이었고 주님을 믿은 후로는 용서받은 죄인입니다. 전에는 멸망 받을 죄인이었는데 이제는 구원 받은 죄인이 되었습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미쁘다 모든 사람이 받을만한 이 말이여 그리스도 예수께서 죄인을 구원하시려고 세상에 임하셨다 하였도다 죄인 중에 내가 괴수니라”(딤전 1:15)고 하였던 것입니다.

어떤 사람이 기독교에 호감을 갖고 교회에 등록을 했습니다. 얼마 동안 교회에 나오던 그 사람이 어느 날부터 돌연 교회 출석을 하지 않았습니다. 심방을 해서 무슨 일이 있느냐고 물었더니 그 사람은 기독교인들에게 실망했기 때문에 이제부터 교회에 다니지 않겠다고 했습니다. 그 사람은 교회에는 성자들만 모여 있는 줄로 알았나 봅니다. 만일 그 사람이 자기 자신을 비롯해서 모든 사람이 죄인이라는 사실을 알았다면 그런 결정을 내리지 않았을 것입니다.

예수 믿는다고 해서 하루아침에 성자가 되는 것이 아닙니다. 그리스도인들도 인간적인 결점을 갖고 있습니다. 그뿐 아니라, 교회 안에는 거듭나긴 했지만 이전의 생활을 완전히 청산하지 못한 신자들도 있고, 단지 종교생활로 만족하는 거듭나지 못한 사람들도 있습니다. 그러므로 교회에 나왔다가 사람 때문에 시험에 들어 교회를 떠나는 것은 기독교의 본질을 전혀 모르는 처사라고 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오늘 저는 “우리에게 은혜가 필요한 이유”가 무엇인지 성도님들과 함께 살펴봄으로 은혜를 나누려고 합니다.

첫 번째로, 사람은 누구나 죄인이기 때문에 하나님의 은혜가 필요합니다.

성경 창세기 3장에 보면, 아담의 타락에 관한 내용이 나옵니다. 하나님께서는 인류의 조상 아담과 하와를 창조하시고 그들을 상함도 없고 해함도 없으며 평화롭고 풍요로운 에덴에서 살게 하셨습니다. 그 때 하나님께서는 아담에게 한 가지 법을 세우셨습니다. “16)…동산 각종 나무의 실과는 네가 임의로 먹되 17)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실과는 먹지 말라 네가 먹는 날에는 정녕 죽으리라”(창 2:)고 하셨습니다.

예로부터, 법이 적을수록 좋은 세상입니다. 우리민족의 최초의 국가에 해당하는 고조선은 ‘8조법금’(八條犯禁)이라는 8개 조항으로 된 법을 갖고 있었다고 합니다. 한서(漢書) 지리지(地理志)에는 그 중 3개 조항만 남아 전하는데 그 내용은 이와 같습니다. 1)살인자는 사형에 처한다. 2)남을 상해한 자는 곡물로써 보상한다. 3)도둑질한 자는 노예로 삼는다. 사람들은 법조항이 8개밖에 없었던 고조선 시대를 황금시대라고 동경합니다. 그도 그럴 것이 현대는 법조항이 너무나 많아서 그것을 다 읽어볼 수도 없을 정도입니다. 그만큼 세상이 악해졌고 복잡하고 살기 어렵게 되었다는 증거입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아담에게 단 한 가지의 법을 주셨을 뿐이니 이처럼 좋은 세상이 어디에 있겠습니까? 그러므로 왜 하나님께서 선악과를 만드셔서 아담이 범죄하도록 하셨는가 라고 반문하는 것은 억지에 불과합니다.

우리가 죄인이라는 사실을 아는 방법은 아담의 타락을 언급하지 않고서도 얼마든지 입증할 수 있습니다. 무엇보다도 우리 스스로가 자신의 생각을 살펴보면 알 수 있습니다. 우리의 말과 행동은 다 생각에서 나옵니다. 그런가하면 밖으로 표현되지 않고 마음속에 남아 있는 생각도 있습니다. 법이란 드러난 행위에 대해서 처벌하지 마음의 생각은 처벌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마음속으로 악한 생각을 하는 것도 죄가 됩니다. 악한 생각을 할 때 우리 양심이 가책을 받는 것은 그 같은 생각이 죄라는 사실을 말해 줍니다. 그러므로 실제로 범죄하지 않았다고 해서 자기를 깨끗한 사람이라고 자부하는 것은 타당하지 않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말씀하시기를 남을 미워하는 사람은 이미 살인한 자요, 여자를 보고 마음속에 음욕을 품는 자는 이미 간음한 자라고 하셨습니다. 결국, 세상 사람들과 그리스도인들은 범죄에 적용하는 법의 기준이 다르다고 할 수 있습니다.

인간이 죄인이라는 사실은 오늘날 인간들의 사악함을 보아서도 알 수 있습니다. 지금도 세계 도처에서 전쟁이 일어나 수많은 사람이 죽어가고 있습니다. 누가 전쟁을 일으킵니까? 인간들이 일으킵니다. 그토록 수많은 생명을 죽이면서까지 전쟁을 하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그것은 사악한 정복욕을 만족시키기 위해서거나, 복수심 때문이거나, 경제적인 이익을 위해서인 경우가 대부분입니다. 지금 이라크에서는 같은 이슬람이면서 종파가 다르다고 서로를 죽이기까지 합니다. 또한 사람들은 약간의 돈을 뺏기 위해 무고한 사람을 납치하고 죽이는 일도 서슴지 않으며, 돈벌이가 된다면 인신매매도 주저하지 않습니다.

대부분의 살인범의 어머니는 자기 자식의 사악함을 인정하지 않고 어쩌다가 그토록 착했던 자식이 사람을 죽였는고 라고 절규합니다. 그 어머니의 눈에는 선량하고 순진한 자식으로밖에 보이지 않는 것이지요. 그러나 어머니의 눈이 미치지 않는 곳에서 그 사람은 전혀 다른 악인이 되어서 살아온 것을 그 어머니는 알지 못합니다.

이 시간, 인간들의 추악함을 들추어내자면 한이 없을 것입니다. 인간들의 타락한 실상을 보면서 우리는 인간의 끝없는 사악함에 탄식을 발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우리가 그 같은 범죄를 저지르지 않았다고 해서 결백하다고 할 수 있을까요? 아니면 직접 악을 행하는 저들은 우리와 전혀 다른 종류의 사람들일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무엇보다도 우리는 하나님의 법에 자신을 비추어 보아야 합니다. 사람들에게 선량한 사람이라는 인정을 받을지라도 하나님의 법에 의하면 죄인일 수밖에 없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법을 알면 알수록 우리 자신이 형편없는 죄인이라는 사실을 인정하게 됩니다. 물론, 우리는 선을 행하려는 욕구를 갖고 있습니다. 항상 우리 속에서 두 마음이 싸웁니다.

그러나 대부분의 경우에 우리는 “내가 원하는 바 선은 하지 아니하고 도리어 원치 아니하는바 악은 행하는구나” 라고 탄식하는 자신을 발견합니다. 이에 대하여 사도 바울은 말씀하기를 “21)그러므로 내가 한 법을 깨달았노니 곧 선을 행하기 원하는 나에게 악이 함께 있는 것이로다 22)내 속 사람으로는 하나님의 법을 즐거워하되 23)내 지체 속에서 한 다른 법이 내 마음의 법과 싸워 내 지체 속에 있는 죄의 법 아래로 나를 사로잡아 오는 것을 보는도다 24)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로다 이 사망의 몸에서 누가 나를 건져 내랴”

지금 사도 바울은 불신자로서 이 같은 탄식을 한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을 믿는 사람으로서 자신의 부족함을 탄식한 것입니다. 하물며 하나님을 모르고 살아가는 세상 사람들이야 더 말할 나위가 없습니다. 그들은 죄 앞에서 무력한 자신을 탄식하기는커녕 죄를 즐깁니다. 우리 사회에 떳떳하지 못한 사업들이 번창하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그러한 곳을 찾는 사람들이 그만큼 많기 때문입니다.

지금까지 살펴본 바와 같이, 사람은 누구나 죄인입니다. 혹 수양을 하고 교양을 쌓으면 점점 선량하게 되지 않을까요? 인간의 착한 심성을 개발하면 되지 않을까요? 성경은 인간에게서 희망의 근거를 찾지 않습니다. 성경이 우리에게 말씀하는 것은 인간의 전적인 타락과 전적인 무능입니다. 성경은 인간이 스스로를 개선할 수 있다는 주장을 지지하지 않습니다.

이에 대하여 로마서 3장 10절 이하에는 이 같이 말씀합니다. “10)기록한바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으며 11)깨닫는 자도 없고 하나님을 찾는 자도 없고 12)다 치우쳐 한가지로 무익하게 되고 선을 행하는 자는 없나니 하나도 없도다 13)저희 목구멍은 열린 무덤이요 그 혀로는 속임을 베풀며 그 입술에는 독사의 독이 있고 14)그 입에는 저주와 악독이 가득하고 15)그 발은 피 흘리는데 빠른지라 16)파멸과 고생이 그 길에 있어 17)평강의 길을 알지 못하였고 18)저희 눈앞에 하나님을 두려워함이 없느니라 함과 같으니라”

이처럼 인간은 가망이 없습니다. 오직 하나님 한 분 만이 범죄한 인간들에게 희망을 주실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은혜가 우리에게 필요한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두 번째로, 우리가 구원을 얻기 위해서 하나님의 은혜가 필요합니다.

우리는 로마서 3장 12절에서 이미 “선을 행하는 자는 없나니 하나도 없도다”라고 선언한 것을 보았습니다. 이사야 선지자는 “대저 우리는 다 부정한 자 같아서 우리의 의는 다 더러운 옷 같으며 우리는 다 쇠패함이 잎사귀 같으므로 우리의 죄악이 바람 같이 우리를 몰아가나이다”(사 64:6)라고 말했습니다.

아담과 하와는 범죄하고 나자 그만 눈이 밝아져서 자기들이 벌거벗은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두 사람은 무화과 나뭇잎으로 치마를 만들어 수치를 가렸습니다. 그러나 무화과 나뭇잎은 금방 말라버리고 그들의 수치는 드러날 수밖에 없습니다. 이 나뭇잎으로 만든 치마는 곧 인간의 의를 의미합니다. 인간이 만든 예의, 도덕, 선행, 종교 등은 다 나뭇잎과 같아서 임시방편에 불과할 뿐, 우리의 죄를 영구히 없이하지 못합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아담과 하와를 위하여 가죽옷을 지어 입히셨습니다. 이 가죽옷은 무화과 나뭇잎으로 만든 옷과 대조적입니다. 전자는 하나님의 의를 의미하고 후자는 인간의 의를 의미합니다. 인간의 의는 잠시 자기를 의로운 척 꾸미는 것에 불과하지만, 하나님의 의는 우리를 하나님 앞에서 의로운 자로 만들어 줍니다.

이 가죽옷은 메시야에 대한 예표입니다. 아담과 하와에게 가죽옷을 입히기 위해서 하나님께서는 짐승을 잡아 가죽을 벗기셨을 것입니다. 아무 죄도 없는 짐승이 아담과 하와를 위해서 죽임을 당한 것입니다. 이 죽임 당한 짐승은 인간들에게 의로움을 선물로 주시기 위해 자기의 생명을 희생하신 예수 그리스도를 상징합니다. “…피 흘림이 없은즉 사함이 없느니라”(히 9:22) 하신 말씀과 같이, 생명은 생명으로만 속할 수가 있습니다.

구원은 오직 하나님의 은혜로 받습니다. 하나님만이 죄인들에게 구원의 길을 열어주셨습니다. 하나님께서 인간들을 위해 마련하신 구원의 길이 무엇입니까? 그것은 독생자를 죄 있는 사람의 모양으로 이 땅에 보내셔서 십자가에 달려 대속의 죽음을 당케 하시고, 그를 믿는 자들에게 구원을 주시는 것입니다. 한 마디로, 믿음으로 구원 받는 길을 열어주셨습니다. 믿음으로 구원을 받게 하신 것은 우리의 행위로는 구원을 받을 수 없기 때문입니다.

이에 대하여 로마서 3장 20절로 24절에 이 같이 말씀합니다. “20)그러므로 율법의 행위로 그의 앞에 의롭다 하심을 얻을 육체가 없나니 율법으로는 죄를 깨달음이니라 21)이제는 율법 외에 하나님의 한 의가 나타났으니 율법과 선지자들에게 증거를 받은 것이라 22)곧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아 모든 믿는 자에게 미치는 하나님의 의니 차별이 없느니라 23)모든 사람이 죄를 범하였으매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하더니 24)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구속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은혜로 값없이 의롭다 하심을 얻은 자 되었느니라”

사랑하는 성도님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요구하시는 것은 의로운 행위가 아닙니다. 왜냐하면 율법을 지켜서 의롭다 인정받을 사람이 아무도 없기 때문입니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이 세상에는 의로운 행실을 해서 구원을 받을 수 있다고 고집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여러분, 사람이 착하게 살려고 노력하는 것이 나쁜 것이 아닙니다. 우리는 할 수 있는 대로 선하게 살아야 합니다. 그러나 자신의 의로운 행실로 구원을 받을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은 잘못된 것입니다. 기독교는 도덕이나 윤리를 무시하는 종교가 아닙니다. 다만, 그런 것으로 구원을 받을 수 없다는 것입니다. 그런데도 도덕이나 윤리를 지킴으로써 또는 무슨 종교적인 수양을 통해서 구원을 얻을 수 있다고 주장한다면 그것은 거짓된 가르침이 아닐 수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의 구원을 위해 요구하시는 것은 오직 믿음입니다. 우리는 율법을 지켜서 의롭다는 인정을 받을 수는 없지만 믿음으로 의롭게 되는 길이 열려있습니다. 누구든지 하나님의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사람은 구원을 받습니다. 믿는데 힘이 들거나 노력이 필요하지 않습니다. 그저 믿으면 됩니다.

로마서 10장 9절로 10절에 이르기를 “9)네가 만일 네 입으로 예수를 주로 시인하며 또 하나님께서 그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것을 네 마음에 믿으면 구원을 얻으리니 10)사람이 마음으로 믿어 의에 이르고 입으로 시인하여 구원에 이르느니라”고 했습니다.

이 하나님의 구원에의 초청은 남녀노소, 빈부귀천의 차별이 없습니다. 누구나 하나님의 초청에 응하기만 하면 구원을 받습니다. 구원의 문은 인류 모두를 향하여 활짝 열려 있습니다. “11)성경에 이르되 누구든지 저를 믿는 자는 부끄러움을 당하지 아니하리라 하니 12)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차별이 없음이라 한 주께서 모든 사람의 주가 되사 저를 부르는 모든 사람에게 부요하시도다 13)누구든지 주의 이름을 부르는 자는 구원을 얻으리라”(롬 10:)

병석에 누워서도 주의 이름을 부르면 구원을 받습니다. 극단적으로 말해서, 죽어가면서도 주의 이름을 부르면 구원을 받습니다. 예수님과 나란히 십자가에 달렸던 두 강도 중 하나는  예수님이 메시야이심을 믿고 “예수여, 당신의 나라에 임하실 때 나를 생각하소서”라고 자기의 운명을 부탁했습니다. 그 때 예수님께서 이르시기를 “내가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오늘 네가 나와 함께 낙원에 있으리라”고 하셨습니다. 십자가에 달려 고통당하는 순간에도 한 가련한 강도의 믿음을 보시고 그를 구원해 주셨습니다.

사랑하는 성도님들, 믿음으로 구원 얻었다 함은 곧 은혜로 구원을 얻었다는 뜻입니다. 왜냐하면 믿음은 우리의 공로가 될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믿음을 하나님의 선물이라고 합니다. 물론, 믿음으로 받은 구원도 하나님의 선물입니다. 구원을 은혜로, 선물로 주신 것은 그러지 않으면 구원 받을 자가 아무도 없기 때문입니다.

세 번째로, 우리가 능력있는 그리스도인으로 살기 위해서 하나님의 은혜가 필요합니다.

이제 구원 받은 성도들은 그 영적 신분이 달라졌습니다. 베드로전서 2장 9절에 “오직 너희는 택하신 족속이요 왕 같은 제사장들이요 거룩한 나라요 그의 소유된 백성”이라고 하였고, 로마서 8장 16절로 17절에는 “16)성령이 친히 우리 영으로 더불어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인 것을 증거하시나니 17)자녀이면 또한 후사 곧 하나님의 후사요 그리스도와 함께한 후사”라고 하였습니다. 얼마나 영광스러운 신분입니까?

이제 우리가 할 일은 우리 자신의 이 같은 신분을 인식하고 신분에 합당한 삶을 살아가는 것입니다. “세상에서는 너희가 환난을 당하나 담대하라 내가 세상을 이기었노라”(요 16:33) 하신 주님의 말씀과 같이 환난을 이기고 세상 유혹을 이기는 능력 있는 신앙인이 되어야 합니다. 작은 시험이 다가와도 맥없이 쓰러지는 연약한 성도가 되면 안 됩니다. 그러나 마음으로는 그렇게 살기를 원하지만 실제로는 되지 않는 것을 어떻게 합니까?

사랑하는 성도님들, 능력 있는 그리스도인은 우리의 결심이나 노력만으로 될 수 없으며 먼저 하나님의 은혜가 필요합니다. 그러기에 사도 바울은 “내게 능력 주시는 자 안에서 내가 모든 것을 할 수 있느니라”(빌 4:13)고 했습니다.

그가 복음을 전하기 위해 숱한 어려움을 만났으나 너끈히 이겨낼 수 있었던 것은 그의 의지가 강해서가 아니라 하나님께서 그에게 감당할 능력을 주셨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그는 결코 자기를 자랑하지 않았습니다. 그는 말하기를 “… 나의 나 된 것은 하나님의 은혜로 된 것이니 내게 주신 그의 은혜가 헛되지 아니하여 내가 모든 사도보다 더 많이 수고하였으나 내가 아니요 오직 나와 함께하신 하나님의 은혜로라”(고전 15:10)고 했습니다.

구원 받은 것도 하나님의 은혜요, 사도가 된 것도 하나님의 은혜요, 복음을 전한 것도 하나님의 은혜였다고 간증했습니다. 이와 같은 신앙의 원칙은 우리에게도 적용되는 것입니다.

먼저 알아 두어야 할 점은, 그리스도인들은 흑암의 세력 곧 마귀와 영적 싸움을 싸우는 사람들이라는 사실입니다. 마귀는 우는 사자 같이 삼킬 자를 찾아 헤맵니다. 마귀가 가장 미워하는 자가 누굴까요? 예, 구원 받은 그리스도인들입니다. 그러므로 주님을 섬기는 데 전혀 시험이 없고 핍박이 없다면 그것이 이상한 일입니다.

마귀의 시험을 물리치기 위해서 우리에게 필요한 것이 무엇입니까? 하나님의 은혜를 힘입어 우리 속사람이 강건해 지는 것입니다. 갓 주님을 믿었을 때는 영적으로 갓난아이여서 자주 시험에 들고 넘어집니다. 그러나 신앙생활을 해 나감에 따라서 점점 영적으로 성숙한 성도로 자라나야 합니다. 이 때 반드시 필요한 것이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이를 위해서 우리는 은혜를 간절히 사모해야 합니다. 구원은 선물로 받는 것이지만, 구원 받은 성도들이 능력있는 신앙생활을 하기 위해서 필요한 은혜는 간절히 사모하고 구해야 받습니다.

믿음에 향상이 없는 것은 하나님께 은혜를 구하지 아니했기 때문임을 알아야 합니다. 그것은 회개해야 할 일입니다. 예수님께서도 말씀하시기를 “11)너희 중에 아비된 자 누가 아들이 생선을 달라 하면 생선 대신에 뱀을 주며 12)알을 달라 하면 전갈을 주겠느냐 13)너희가 악할지라도 좋은 것을 자식에게 줄줄 알거든 하물며 너희 천부께서 구하는 자에게 성령을 주시지 않겠느냐”(눅 11:)고 하셨습니다.

그뿐 아니라, 우리가 맡은 직분을 감당하기 위해서도 하나님의 은혜가 절대로 필요합니다. 주의 일은 하나부터 열까지 하나님의 은혜로 해야지 교회에 덕을 세우지 인간적인 방법으로 하면 결국 말썽이 나고 맙니다. 그러므로 직분자들은 더욱 더 은혜를 사모하고 구해야 합니다. 하나님의 원칙은 은혜를 사모하는 자에게 더 많은 은혜를 주시는 것입니다.

그런가하면 은혜를 사모하지 않으면 당연히 은혜를 받지 못합니다. 이에 대하여 예수님께서는 말씀하시기를 “무릇 있는 자는 받아 넉넉하게 되되 무릇 없는 자는 그 있는 것도 빼앗기리라”(마 13:12)고 하셨습니다. 그런즉 성도님들께서는 은혜를 사모하시기 바랍니다.

사랑하는 성도님들, 그리스도인은 하나님의 은혜를 힘입어 사는 사람임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본문에 “8)너희가 그 은혜를 인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얻었나니 이것이 너희에게서 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선물이라 9)행위에서 난 것이 아니니 이는 누구든지 자랑치 못하게 함이니라”고 했습니다. 이 말씀과 같이, 구원은 전적으로 하나님의 은혜로, 선물로 받은 것입니다.

이제 독생자를 아낌없이 내어주시기까지 우리를 사랑하신 하나님께서는 구원 받은 성도들에게 더 큰 은혜를 주셔서 날마다 승리의 삶을 살기를 원하십니다. 소낙비가 쏟아져도 그릇을 준비하지 않으면 물을 받을 수 없듯이, 하나님께서 은혜를 주시려고 하셔도 우리가 믿음의 그릇을 준비하지 않으면 받을 수 없습니다.

은혜를 받으려면 먼저 은혜를 사모해야 합니다. 그리고 열심히 모이기에 힘써야 합니다. 성도들이 주의 이름으로 모인 그곳에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함께 하시겠다고 약속하셨습니다(마 18:20). 오늘 설교를 경청하신 성도님마다 날이 갈수록 점점 더 패역해 져 가는 이 세상에서 오직 하나님의 은혜를 힘입어 능력있는 그리스도인의 삶을 영위하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김양인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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