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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아브라함의 믿음(2) (히 11:17-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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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대인의 삶은 대단히 복잡하고 분주하다.
나는 아침에 나올 때 종종 한 두 번씩 현관을 들락날락하는 경우가 있다. 그럴 때마다 아내가 묻는다.
- 또 뭐요? 시계? 핸드폰? 열쇠? 지갑? 안경? 젊은이들은 챙겨야 할 것이 몇 가지 더 있어야 할 것이다. MP-3, 이어폰등등..

아브라함처럼 나그네 인식을 가지고 살아보려고 애를 쓰지만 질머진 것들이 너무 많다. 할 일도 많고, 갈 곳도 많고, 만날 사람도 많다. 저녁에 잠자리에 들 때 여러분의 기도는 무엇인가?
- “오늘 하루도 주님과 함께 동행하면서 승리했습니다 감사합니다.” 아니면 “피곤해 죽겠는데 기도할 여유가 어디 있습니까?”

연약한 모습으로 푸념과 원망을 늘어 놓는 패배스러운 삶을 위해서 우리를 부르신 것이 아니다.
엡2:10 우리는 그의 만드신 바라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선한 일을 위하여 지으심을 받은 자니 이 일은 하나님이 전에 예비하사 우리로 그 가운데서 행하게 하려 하심이니라

우리를 향하신 하나님의 놀라운 계획과 목적이 있다.
그것을 위해서 우리는 모였고 또 말씀을 듣는 것이다. 하나님의 뜻, 하나님의 목적을 발견하고 그것을 위해서 달려 갈 때 우리의 삶에 기쁨이 있고 생명력이 나타나는 것이다.

그러나 우리의 삶의 목적이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삶의 목표에 정확히 맞지 않을 때 우리의 삶은 쉽게 무너져 내릴 수 있다.
1988년 서울 올림픽에서 미국의 사격선수가 금메달을 놓친 사건이 있었다고 한다. 9발을 쏠 때까지 만점으로 유력한 금메달 후보였다. 그러나 결과는 맨 꼴찌였다. 조사한 결과 마지막 한 발을 그녀는 옆의 선수의 과격에다 쏘아 넣었던 것이다. 아무리 잘 쏴도 자기 표적이 아닌 곳에 쏘면 소용이 없다.

무엇 때문에 분주하며, 무엇 때문에 일하는가? 목적이 분명치 않으면 우리의 인생은 복잡하고 분주할 뿐이지 행복하지 않다. 아브라함은 당시에 세상적으로도 성공하였고, 부자였으나 땅에 매이지 않았다. 나그네로서 천성을 바라보면서 살아갔다. 그랬기에 그는 모든 믿는 사람의 조상이 될 수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아브라함이 처음부터 믿음이 좋았던 사람은 아니었다.
가나안 땅에 정착한 후 가뭄으로 애굽에 피신해서 자기 아내를 누이라고 속였다가 사라를 애굽왕에게 빼앗길 뻔하기도 했다. 그의 삶 속에 실수와 패배도 있었다. 그러나 그런 가운데서도 그는 약속의 말씀을 붙잡았다. 가나안에 정착한 후 25년의 세월이 흘러 그의 나이 100세 되던 해 아들을 얻었다. 그 아이의 이름이 이삭이었다. 아브라함의 기쁨은 이삭을 얻은 후부터였다. 한 동안 아브라함 부부는 정말 해피 데이였다.

그러던 어느날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을 부르셨다.
창22:1-2, 그 일 후에 하나님이 아브라함을 시험하시려고 그를 부르시되 아브라함아 하시니 그가 가로되 내가 여기 있나이다. 여호와께서 가라사대 네 아들 네 사랑하는 독자 이삭을 데리고 모리아 땅으로 가서 내가 네게 지시하는 한 산 거기서 그를 번제로 드리라.

이 음성을 들은 아브라함의 심정이 어떠했을까요? - 충격 충격 충격!
어떻게 얻은 아들인가? 아브라함에게 있어서 아들 이삭은 아브라함의 인생에 전부였다. 아브라함에게는 이삭 말고도 이스마엘이라는 아들이 있었다. 이스마엘을 드리라 했어도 역시 자신의 아들이기에 충격이었을 것이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번제로 드리라 하실 때, “네 아들, 네 사랑하는 독자 이삭”이라고 분명히 지목하셨다. 그렇게 힘들게 주시더니 이제와서 번제로 드리라는 말씀에 아브라함은 생각이 정리가 되질 않았다. 이게 도대체 어떻게 된 거지. 그가 더욱 깊은 고민에 빠지게 된 것은 다름아니라 이삭은 약속의 자녀였기 때문이었다.
<창15:2-5>
15:2 아브람이 가로되 주 여호와여 무엇을 내게 주시려나이까 나는 무자하오니 나의 상속자는 이 다메섹 엘리에셀이니이다
15:3 아브람이 또 가로되 주께서 내게 씨를 아니주셨으니 내 집에서 길리운 자가 나의 후사가 될 것이니이다
15:4 여호와의 말씀이 그에게 임하여 가라사대 그 사람은 너의 후사가 아니라 네 몸에서 날 자가 네 후사가 되리라 하시고
15:5 그를 이끌고 밖으로 나가 가라사대 하늘을 우러러 뭇 별을 셀 수 있나 보라 또 그에게 이르시되 네 자손이 이와 같으리라

<창17:15-19>
17:15 하나님이 또 아브라함에게 이르시되 네 아내 사래는 이름을 사래라 하지 말고 그 이름을 사라라 하라
17:16 내가 그에게 복을 주어 그로 네게 아들을 낳아주게 하며 내가 그에게 복을 주어 그로 열국의 어미가 되게 하리니 민족의 열왕이 그에게서 나리라
17:17 아브라함이 엎드리어 웃으며 심중에 이르되 백 세 된 사람이 어찌 자식을 낳을까 사라는 구십 세니 어찌 생산하리요 하고
17:18 아브라함이 이에 하나님께 고하되 이스마엘이나 하나님 앞에 살기를 원하나이다
17:19 하나님이 가라사대 아니라 네 아내 사라가 정녕 네게 아들을 낳으리니 너는 그 이름을 이삭이라 하라 내가 그와 내 언약을 세우리니 그의 후손에게 영원한 언약이 되리라.

번제란? - 제물의 가죽을 벗기고 각을 뜨고 내장과 정강이를 물로 씻고 그 전부를 단 위에 불사르는 제사이다(레1:3-9). 하나님의 약속으로 받은 아들 이삭이요 또 그를 통해서 자손이 번성해야 만 할 사명을 가진 아이였다. 그러나 이삭이 언약의 씨라는 중대한 역할은 뒤로하고 인간으로서, 아버지로서 도저히 할 수 없는 짓이었다.

그런데 왜?
하나님께서는 하나님의 거룩한 성품에도 맞지 않는 이 일을 요구하셨는가? 이해가 되지 않는다. 이와 같은 인신제사는 이방의 왕들이 전쟁에서 이기기 위해 자기 아들을 희생시켜 번제를 드렸던 극단적인 방법이었다. 성경은 인신제사를 용납하지 않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께서 명령을 내리신 이유는 무엇일까?

히11:17 아브라함은 시험을 받을 때에...
창22:1, 그 일 후에 하나님이 아브라함을 시험하시려고 그를 부르시되...

그는 지금 하나님의 시험장에 들어와 있는 것이다. 시험치고는 상식을 벗어난 어처구니 없는 주제임에 틀림없다. 그렇다면 하나님께서는 왜 이런 방법의 시험을 선택하셨을까?
아브라함의 믿음을 검증하기 위해서 라고 말할 수 있다.

시험이란?
시험 받는 사람의 속에 들어 있는 생각이나 태도를 알아내기 위해 어떤 어려움을 주는 것이다. 시험에도 여러 유형의 시험이 있고, 강도의 차이도 있다. 요즘 좋은 회사의 입사시험에는 기상천외한 시험 방법들이 동원되고 있다.
예)참좋은교회 조목사의 둘째 아들 - 입사시험, 필기시험, 면접시험을 치루는 과정에서 마지막 날 회식하는 자리를 가졌다고 한다. 그 회식 자리에서 면접관이 내일 9시까지 회사로 나오라고 했다. 수험생들은 긴장이 풀어지고 술을 마셨다고 한다. 새벽 3시까지 술을 마시게 한 후 귀가시켰다. 조목사님의 아들은 술을 마시지 않았기 때문에 9시까지 출근할 수 있었고 합격했다.

이와 같은 시험의 목적은 그 회사가 요구하는 사람을 선발하기 위해 시행하는 것이다.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비윤리적이고, 모순되고, 극단적인 방법으로 시험하신 것도 하나님께서 목적하신 바를 이루시기 위해 특별한 방법이었다고 생각한다. 적어도 아브라함을 통해 모든 민족이 구원을 받고, 복을 받게 할 사람이라면, 그의 이름에 걸맞는 열국의 아비가 되기 위해서라면 이와 같은 시험도 통과해야 만 했던 것이다.

아브라함의 반응
인간적으로 납득이 되지 않는 이 엄청난 시험에 대하여 아브라함의 반응은 어떠했는가?
창22:3 아브라함이 아침에 일찌기 일어나 나귀에 안장을 지우고 두 사환과 그 아들 이삭을 데리고 번제에 쓸 나무를 쪼개어 가지고 떠나 하나님의 자기에게 지시하시는 곳으로 가더니

그는 하나님을 향하여 따져 보지도 않고, 거부하지도 않은채 묵묵히 순종하였다. 이와 같은 태도를 “묵종”이라 한다.

만약 여러분이 이와 같은 경우를 당했다면 어떻게 하겠는가? 나는 그런 하나님 안 믿어!

창22:3, 아브라함이 아침에 일찍이 일어나...
그러나 전 날, 말씀을 받은 날, 그날 밤 늦게까지 고민했을 것이다.
“아브라함은 믿음이 있는 사람이니까 또 그의 믿음의 핵심은 순종이니까 무조건 순종했을거야.” 이렇게 단순하게 생각하면 안된다. 본문에는 고민의 흔적이 기록되지 않았지만 우리는 능히 그 상황을 짐작할 수가 있다.
“내 사랑하는 아들 이삭을 내 손으로 잡아야 된단 말인가!?” “주실 때는 언제고 이제와서 번제로 드리라니...” 원망스러운 마음으로 절규하며 기도했을 것이다.

그러나 그는 이 문제에 대한 해답을 얻었다.
그리고 잠자리에 들 수 있었다. 만약 그렇지 못했다면 아침에 일찍 일어날 수 없었을 것이다. 아니 뜬 눈으로 고민하며 밤을 지재웠을 것이다.

그러면 어떻게 해답을 얻었는가? 약속의 말씀에서 해답을 얻었다.
창12:2, 내가 너로 큰 민족을 이루고 네게 복을 주어 네 이름을 창대케 하리니 너는 복의 근원이 될지라

창15:4-5, 여호와의 말씀이 그에게 임하여 가라사대 그 사람은 너의 후사가 아니라 네 몸에서 날 자가 네 후사가 되리라 하시고, 그를 이끌고 밖으로 나가 가라사대 하늘을 우러러 뭇 별을 셀 수 있나 보라 또 그에게 이르시되 네 자손이 이와 같으리라.

창17:19, 하나님이 가라사대 아니라 네 아내 사라가 정녕 네게 아들을 낳으리니 너는 그 이름을 이삭이라 하라 내가 그와 내 언약을 세우리니 그의 후손에게 영원한 언약이 되리라

그는 약속의 말씀을 기억해 내고 그 말씀을 붙잡았다. 그리고 그 말씀에 의지하여 마음에 확신이 생겼다.
-“내 아들 이삭은 죽지 않는다. 죽어도 하나님께서 다시 살리실 것이다.”

약속의 말씀을 받은 후에 그는 비로소 잠자리에 들수 있었다.
히브리서 기자는 아브라함의 신앙을 두 가지로 요약하였다. 첫째는 말씀을 붙잡는 신앙이고, 둘째는 부활신앙이었다. 그 증거가 바로 18-19절의 말씀이다.
11:18 저에게 이미 말씀하시기를 네 자손이라 칭할 자는 이삭으로 말미암으리라 하셨으니
11:19 저가 하나님이 능히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리실 줄로 생각한지라 비유컨대 죽은 자 가운데서 도로 받은 것이니라

그의 생애 가장 큰 위기적인 상황을 말씀을 붙잡음으로 풀 수 있었던 것이다.
말씀과 아들 둘 중에 하나를 택해야만 하는 입장에서 아브라함은 아들을 버리고 말씀을 택했다.

그리고 설령 내 손으로 내 아들을 잡아 죽인다 해도 하나님께서 반드시 다시 살려주실 것이라는 믿음이 그에게 있었다. 그는 이렇게 하인들에게 말했다.
창22:4-5, 제 삼 일에 아브라함이 눈을 들어 그 곳을 멀리 바라본지라. 이에 아브라함이 사환에게 이르되 너희는 나귀와 함께 여기서 기다리라 내가 아이와 함께 저기 가서 경배하고 너희에게로 돌아오리라 하고

아브라함은 100세에 얻은 아들 이삭을 포기하고 하나님의 약속의 말씀을 붙잡았다. 그리고 그는 시험에 통과했다. 합격!
창22:12-14, 사자가 가라사대 그 아이에게 네 손을 대지 말라. 아무 일도 그에게 하지 말라. 네가 네 아들 네 독자라도 내게 아끼지 아니하였으니 내가 이제야 네가 하나님을 경외하는 줄을 아노라.
아브라함이 눈을 들어 살펴본즉 한 숫양이 뒤에 있는데 뿔이 수풀에 걸렸는지라 아브라함이 가서 그 숫양을 가져다가 아들을 대신하여 번제로 드렸더라. 아브라함이 그 땅 이름을 여호와이레라 하였으므로 오늘까지 사람들이 이르기를 여호와의 산에서 준비되리라 하더라

여호와 이레의 역사는 현실의 욕구를 포기하고 하나님의 말씀을 붙잡는 자에게 예비된 것이다. 그가 아들을 포기할 때 하나님께서 아들을 주셨다. 그는 두 가지를 동시에 얻게 되었다.
히11:19 저가 하나님이 능히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리실 줄로 생각한지라 비유컨대 죽은 자 가운데서 도로 받은 것이니라.


여러분 너무 겁먹지 말라.
아브라함에게 닥쳐온 그런 시험이 여러분에게는 결코 일어나지 않을 것이다. 왜냐하면 열국의 아비는 아브라함 한 사람으로 족하기 때문이다. 여러분의 자녀를 번제로 드리라는 극단적인 시험은 없을 것이다.

그러나 우리는 우리의 삶의 정황 속에서 여러 가지 다양한 시험거리를 만나게 된다. 그럴 때 우리는 말씀과 현실 사이에서 끝 없는 갈등과 번민에 빠지게 된다. 왜 갈등하며 번민하게 되는가? 두 개 다 놓칠 수 없는 것들이기 때문이다.

현실은 우리에게 많은 것들을 붙들 것을 요구한다. 나의 사업, 미래, 나의 직장, 나의 친구, 나의 취미등등. 놓칠 수 없는 것들이다. 그러나 둘 중에 하나를 선택해야 만 하는 상황에 놓였다면 아브라함을 생각하기 바란다. 고민에 빠지지 말고 아브라함을 생각하라.

아브라함의 지혜를 배우라. 육신적으로 들려오는 마음의 욕구를 과감히 버리라. 그리고 말씀을 붙잡으라. 말씀 앞에 순종하라. 주님의 뜻 앞에 순종하라. 그러면 문제가 해결될 것이다.

명심하라.
양다리 걸친 자에게는 결코 여호와 이레의 역사, 하나님의 도우심의 역사는 없다.
말씀과 현실 사이에서 고민하고 갈등하지 말라. 좋은 결과가 나오질 않는다. 아브라함처럼 약속의 말씀을 붙잡으라. 그리하면 여호와 이레의 놀라운 은혜를 경험하게 될 것이다. (원영대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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