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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위대한 사랑 (마 5:38-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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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사합니다. 오늘도 하나님 앞에 믿음으로 구원받고 우리의 삶을 드려 예배를 드리길 소원하는 모든 주의 성도님들에게 하나님의 은혜와 은총이 함께 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 드립니다.

우리가 예수를 믿고 구원을 얻어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다는 것은 우리들에게 필연적인 한 가지 사실을 부여합니다. 그것은 바로 우리가 이전과는 다른 사랑의 사람이 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전에는 내가 좋아하는 것과 그리고 내가 싫어하는 것의 차이가 명확했습니다. 그런데 내가 예수를 믿어 구원의 백성이 되었다는 순간부터 시작해서는 내가 좋아하는 것과 싫어하는 것에 간격이 매우 좁아진다는 사실입니다. 즉 내 마음에 싫어해도 내 마음에 좋아해도 그것을 다 합해서 같이 사랑할 수 있을 때 우리가 온전한 하나님의 사랑이 된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우리 인간이 가지고 있는 기본적인 성정의 수준을 넘어서는 것입니다. 과연 이러한 것이 가능할까? 나도 인간의 성품을 가지고 있고 나도 인간의 모든 느낌과 정서를 가지고 있는데 과연 그것이 가능할까 우리는 생각해 봅니다. 그러나 수많은 믿음의 선조들은 바로 그와 같은 인간 자신이 가지고 있는 인간적인 한계들을 넘었고, 그것이 결국 우리들에게 성경의 아름다운 말씀을 지켜 내려온 아름다운 역사로 이어져 오고 있는 것을 봅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위대한 사랑을 생각합니다.

우리가 요나서를 보게 되면 요나는 하나님의 명령을 거절합니다. 하나님의 명령은 요나에게 니느웨라는 도성에 가서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전해서 그들이 하나님 앞에 바로 서고 하나님의 구원의 은혜를 받기를 소원했던 것입니다. 요나는 왜 니느웨로 가서 복음을 전하라는 하나님의 말씀을 거절했을까요? 그것은 다름이 아니라 니느웨는 바로 하나님의 백성 이스라엘을 괴롭히는 앗수르라는 나라의 수도였기 때문입니다. 하나님 나라 백성을 괴롭히는 앗수르라는 나라의 수도 니느웨에 가서 복음을 전하라는 것은 즉 이스라엘 백성의 원수인 그 백성에서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고 그들이 하나님의 축복을 받을 자리에 세우라는 것입니다. 요나가 거절합니다. 이와 같은 거절에 대하여 이러저러한 과정을 거쳐 결국은 요나는 니느웨로 가게 됩니다. 하나님께서 요나에게 뭐라고 말씀하십니까? 니느웨에는 앞뒤 분간하지 못하는 백성들이 얼마나 많으며 심지어는 육축들이 얼마나 많은가 하고 하나님께서 말씀하십니다. 즉 하나님은 심지어 자기 백성인 이스라엘 백성을 괴롭히고 있는 이 니느웨 백성들까지도 사랑하시며 거기에 있는 육축까지도 사랑하심을 우리들에게 보여주시는 장면입니다.

하나님의 사랑은 하나님을 경배하는 사람들에게만 제한되어 있는 것이 아닙니다. 심지어는 하나님을 모르고 하나님을 배역하는 자들까지 하나님은 그들을 사랑하시고 그들을 기대하시고 품으시며 그들에게 은혜의 기회를 부여하시는 것입니다. 심지어는 그곳에 있는 육축까지도 사랑하시는 하나님의 은혜를 생각해 볼 때 우리는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의 크기에 얼마큼인가 하는 것들을 생각을 합니다.
우리가 예수를 믿으면서부터 우리들에게 달라지는 것은 우리는 인간적인 성정 속에서 느낄 수 있는, 누릴 수 있는 가능할 수 있는 사랑을 넘어서는 위대한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을 닮아 사랑을 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더욱이 오늘 본문을 보게 되면 우리가 누구든 오른뺨을 때리면 왼뺨까지도 돌려대며, 누가 송사하여 속옷을 가지고자 하면 겉옷까지도 주고, 누가 억지로 오리를 가고자 하면 10리까지도 그 사람과 동행하라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리고 아버지 하나님의 온전하심같이 너희도 온전하라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도대체 이것이 가능한 것인가? 이 말씀을 드림은 우리들에게 왜 주셨는가 생각을 하게 됩니다. 우리 주님께서 우리들을 부담스럽게 하기 위해서, 우리들은 이것을 할 수 없기 때문에 정말 마음속에 좌절을 느끼게 하기 위해서, 아니면 우리들에게 너희는 이런 일도 못하는 사람들이니까 할 수 없이 나를 따라와야 된다라고 우리들에게 어떤 고리로 걸기 위해서 이 말씀을 주셨겠느냐 하는 것입니다. 주님의 의도는 그것이 아닙니다. 이 말씀을 우리에게 주신 의도는 우리는 그 말씀을 실행할 수 있고 또 우리는 그 말씀을 실행함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은혜와 축복의 자리에 이를 수 있고, 우리에게 하나님의 축복과 은혜와 행복을 누리라고 오늘 우리들에게 이 말씀을 주신 것입니다.

오늘 이와 같은 내용을 보면서 우리가 생각하게 되는 것은 성경이 기록된 모든 말씀은 우리들에게 실현 불가능한 말씀이 아니라 우리들에게 그것을 실현시키겠다는 하나님의 의지를 실현한 것이고 우리들에게 그것을 통해서 하나님의 축복과 행복의 자리에 이르게 하시는 하나님의 은총인 것을 생각할 때 우리는 이 말씀이 멀리 있는 말씀이 아니라 그 위대한 사랑이 우리들에게 임할 수 있는 사실이라는 것을 생각하게 됩니다.

이제 이 말씀을 생각해 보면서 우리는 첫 번째로 이런 생각을 합니다. 이해하고 배려하려는 큰마음과 큰 능력을 가져야 우리는 위대한 사랑을 이룰 수 있습니다. 큰마음과 큰 능력은 무엇입니까? 바로 이해하고 배려하려는 마음입니다. 이해하려고 하고 배려하려고 할 때 우리는 큰마음과 능력을 가지게 되며 그러한 큰 능력을 가질 때 우리는 주님께서 우리에게 베풀어 주셨던 위대한 사랑을 소유하여 하나님의 역사를 이룰 수 있는 것입니다.

입장을 바꾸고 이해하려고 작심하고 결단하면 이해할 수 있고 배려할 수 있습니다. 우리는 정말 입장을 바꿔서 생각해 보면 이해할 수 없었던 사람을 이해할 수 있으며 배려하고 또 이해하기 위해서 결단할 수 있는 것입니다. 이해와 사랑은 마음 흘러가는 대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닌 의지적인 결단임을 우리는 생각합니다. 내가 좋은 것 좋아하고 내가 싫은 것 싫다 말하면 그것은 세상에 그 누구도 할 수 있다고 말합니다. 이해와 사랑에 대해서는 결단과 결심이 필요하다고 우리가 계속 말씀을 드렸습니다. 과연 우리는 내 마음에 이해되지 않는 일이 있을 때 이해하고 사랑할 수 있게 해달라고 기도하십니까? 아니면 내 마음에 이해되지 않고 사랑할 수 없을 때 내 원한을 풀어달라고 하나님께 기도하십니까? 우리는 매우 중요해요. ‘하나님 내 마음이 이해할 수 없는데 이해할 수 없는 이 사실에 대해서 하나님께서 이해하고 용납하고 받아들일 수 있도록 하나님께서 내 마음에 은혜를 주십시오’라고 기도하십니까? 아니면 내 마음이 들지 않는 이 사실들이 다 내 눈 앞에 없어지고 내 눈 앞에 다 괴멸될 수 있도록 우리는 하나님 앞에 원수 갚도록 기도하고 있는 것입니까? 주님은 그를 십자가에 못 박은 사람들을 용서하심으로 인류를 구원하셨습니다. 만약에 주님께서 그 마음에 한이 맺히도록 그 마음에 정말 손가락질하고 비방하는 사람들에 대하여 용서할 수 없었다면 이해하고 배려할 수 없었다면 주님은 십자가의 사역을 이루실 수 없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인생은 영원한 원수를 삼아 끝없는 쟁투와 전쟁을 벌이고 있는 것을 봅니다.

우리의 남은 일은 이해할 수 없고 싫어할 수밖에 없는 일들이 어느 날 우리들에게 기쁨으로 다가올 수 있도록 우리의 마음이 이해의 심정이 되게 하기 위하여 결심하고 결단하는 것입니다. 우리의 마음을 하나님의 은혜의 사랑에 꽃밭으로 만들고 어떤 약한 씨앗도 우리에게 던져질 때 그것이 뿌리를 내리고 싹을 틔울 수 있도록 우리의 마음을 부드럽게 하나님의 은혜로 가꾸어 놓아야하는 것입니다. 큰 사랑과 그리고 큰 배려를 이루는 성도에게 하나님은 큰 능력과 마음주심을 봅니다. 우리의 힘만으로 이해와 사랑을 이룰 수 없는 것을 우리는 압니다. 우리의 소원을 가지고 하나님 앞에 나아갈 때 우리의 소원을 통해서 하나님은 주의 역사를 이루시는 것을 봅니다. 우리가 위대한 사랑을 할 수 있다면 주님께서 우리 인류를 인하여 죽으신 것처럼 우리가 내 주변을 이해하고 내 주변을 사랑하고 그리고 내 주변에 있는 모든 것을 내가 포용할 수 있도록 마음에 결심을 하기로 작정한다면 주님께서는 연약한 우리의 딱딱하게 굳어진 마음일지라도 은혜를 이루어 주셔서 그 일을 이루어 주신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우리의 갈 길이 어디인지 알고 분명한 삶의 길을 정해야합니다. 오늘의 말씀은 우리를 축복하시는 말씀입니다. ‘너희는 이와 같은 사람이 될 수 있어. 너희는 이와 같은 위대한 사랑을 할 수 있어. 너희는 이와 같은 사랑을 통하여 훨씬 더 자유로울 수 있다’라는 말씀입니다. 미워함에 대한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가장 최선의 방법은 사랑함입니다. 원수 갚는 것이 아닙니다. 나에게 해코지 하는 사람에 대한 가장 최선의 길은 그를 사랑하고 용서하고 그가 훌륭한 사람이 되도록 만들어 줄 수 있는 능력의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오늘은 큰 은혜의 사람이 되게 하겠다는 하나님의 축복의 의지라고 말씀드렸습니다. 속옷을 달라고 하는 사람들에게 겉옷까지 줄 수 있을 정도의 여유, 오른뺨을 때리는 사람에게 왼뺨을 댈 정도의 이와 같은 담대함, 오리를 가고자 하는 자에게 십리까지 가줄 수 있는 이와 같은 든든함이 우리에게 있다면 그와 같은 것은 우리에게 별문제가 되지 않을 것입니다. 이해하고 사랑하리라고 작정하고 은혜를 받는 순간 이 세상은 전혀 다른 세상으로 달라 보입니다.

여러분 이 세상은 두 가지 세상이 있습니다. 하나는 우리한번 따라해 봅시다. “영원히 이해하고 기쁘게 살아가는 세상”, “영원히 오해하고 괴로워하며 살아가는 세상” 우리는 이 세상에 두 가지 세상이 공존하고 있습니다. 영원히 이해하고 기쁘게 살아가는가 아니면 영원히 오해하고 괴롭게 살아가는가? 두 가지 세상이 공존하고 있는데 우리는 어떤 것을 선택하느냐에 따라서 우리의 삶이 결정되는 것입니다. 이해하기로 작정하면 우리는 모든 것을 이해할 수 있습니다. 오해하기로 작심하면 모든 것이 괴롭고 오해가 되는 것입니다. 제가 여러분께 이런 말 쉽게 드리잖아요. 예배시간에 주무시는 분들이 있습니다. 그것을 이해하기 시작하면 ‘얼마나 피곤할까?’ 그리고 정말 ‘설교 말씀 들으니까 그 마음이 정말 편안해져서 주무시는구나’라고 생각하면 됩니다. 그 부분이 또 은혜가 됩니다. 원래 사람은 마음이 불편하면 잠을 못 자게 되는데 마음 편하니까 자게 되잖아요. 얼마나 목사를 믿어주고 내가 졸아도 목사님 이해를 해주시겠지. 하고 목사를 믿는 마음에서 자는 거잖아요. 그렇지요? 아닌가요? 저는 그렇게 믿습니다.

그런데 혹시라도 주무시는 분 없나 두리번거리면서 찾아봐서 ‘괘씸하게 말이야. 그 예배시간 한 시간을 못 참아서 졸다니’ 이렇게 생각하면 속이 부글부글 끓어올라서 설교하다가 어디하는지도 잊어버린다면 우리가 행복할 수 있겠습니까? 이해하려고 작심하면 정말 이해할 수 있는 것입니다. 제가 지난번에 보니까 앞에서 두 부부가 조는데 머리를 부딪치고 주무시는 것입니다. 제가 뒤에 있다가 잠깐 남으십시오 하고 같이 손잡고 기도해 드렸습니다. 얼마나 은혜가 됩니까.

이해의 심정을 가지게 되면 한없이 이해가 됩니다. 그런데 우리가 오해의 심정을 가지게 되면 우리가 한없는 오해를 하게 되는 것이 이세상의 일입니다. 우리는 주님의 사랑을 봅니다. 주님은 십자가의 길을 가게 되시는데 가룟 유다의 배반을 아셨습니다. 그리고 가장 사랑하는 제자 베드로가 면전에서 세 번이나 부인하며 예수님을 욕할 것을 아셨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십자가의 길을 가야 합니다. 십자가의 길을 가는 그 고통도 있는데 그 가운데 정말 내 앞에서 같이 성찬을 떼는 제자들 중에 나를 배반하여 팔고 나를 면전에서 욕하고 부인하는 사람을 볼 때 예수님의 마음이 얼마나 쓰리겠습니까? 그런데 예수님은 그것을 정말 그들에게 발견하면서 그들에게 성을 내며 그것에 걸려 넘어지지 않았습니다. 만약에 예수님이 십자가의 길을 가면서 가룟 유다를 책망하고 후려치며 베드로에 대해서 네가 이렇게 할 것이냐라고 말했다면 예수님의 십자가의 길이 그렇게 순탄하진 않았을 것입니다. 예수님은 가룟 유다의 배반을 가슴아파하면서 속으로 품으셨고 정말 사랑하는 제자 베드로가 면전에서 그를 욕하고 부인하는 것을 볼 때 가슴아파하며 그들을 물끄러미 바라보고 지나가셨습니다. 그것이 바로 십자가의 길을 순연히 갈 수 있게 만드셨던 것입니다.

길을 가다보면 본질이 아닌 다른 것에 걸려서 넘어지는 경우가 너무나 많습니다. 예를 들면 우리 성가대원들이 성가연습 열심히 했습니다. 그런데 하다가 마음이 상해서 성가대 안 와버리면 어떻게 하겠어요. 그 성가 연습한 것, 아무런 소용이 없는 것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본질 외적인 것으로 말미암아 사람의 영향을 너무나 많이 받는다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본질적인 것은 성가대가 하나님께 찬양을 드리는 것이 본질입니다. 그런데 괜히 인간관계로 말미암아 마음이 상하면 성가대 안나와버립니다. 그렇게 되면 성가대에 아무런 의미가 없어져 버리잖아요. 그러니까 예수님의 본질은 십자가를 지고 가는 것입니다. 그런데 본질 외적인 요소, 예를 들면 가룟 유다가 배반을 한다든지 아니면 베드로가 부인한다든지 하는 것을 보고 예수님은 그의 길을 흩트려 트리지 않으셨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그 문제를 어떻게 해결하셨는가 하면 이해하고 사랑하셨습니다. 정말 그럴 수밖에 없는 연약한 인생들을 예수님께서는 품으셨습니다. “아버지여 저들의 죄를 용서하옵소서. 저들은 저들의 죄를 알지 못합니다.” 주님은 그들을 이해하셨고 품으셨고 사랑하셨기 때문에 위대한 사랑을 이룰 수 있는 것입니다. 우리는 예수님을 아니까 그러지 못한다고요. 아니요. 예수님이 우리 안에 계시기 때문에 우리는 그런 일을 할 수 있는 것입니다. 오늘 말씀은 우리에게 부담을 주시는 것이 아니라 너희도 이와 같이 할 수 있고 내가 그렇게 만들리라는 우리 주님의 의지를 우리들에게 말씀해 주시고 계시는 것입니다.

우리는 사도 바울을 봅니다. 마음에 많은 아픔을 겪지요. 사도 바울이 누구지요? 예수님 믿는 사람을 핍박하던 사람입니다. 다메섹도상에서 예수님을 만나고 은혜를 받고 이제 복음을 전하게 되니까 사람들은 사도 바울을 믿지를 않습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을 복음사회의 입증해 준 사람이 누구냐하면 바나바라는 사람이었습니다. 바나바는 사랑이 많은 사람이에요. 그래서 사도바울을 보증해서 기독사회에 그를 등장시켜 주었습니다. 둘이 같이 안디옥에서 이제 교회를 섬깁니다. 그리고 둘이 같이 선교를 떠납니다. 그런데 두 번째 여행에서 둘이 문제가 생겼어요. 이 마가라는 사람에 의해서 둘이 문제가 생겨서 둘이 갈라졌어요. 얼마나 마음이 아팠겠습니까?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도 바울은 끊임없이 그에게 주어진 복음 사역을 이루어 갔던 것입니다. 가는 곳곳마다 복음을 전하고 교회를 세우고 하나님의 사람들을 보내서 그것을 목양하고 모든 것을 이루는 가운데 전해오는 소식은 모두가 걱정이 되는 소식밖에 없었습니다. 그러니까 거기에다 편지를 쓰고 사람을 보내고 이와 같은 일을 평생 동안 했습니다. 그러니까 인간적으로 생각하면 편할 날이 없는 삶이었습니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끊임없이 이해하고 사랑하고 배려하고 끊임없이 양육하는 마음을 가지고 있었던 것입니다. 우리의 삶의 승패 여부는 결국 우리가 작은 마음 씀에 걸려 넘어지느냐 그것을 넘어갈 수 있느냐 하는 것입니다. 여러분 우리가 가야할 목적지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작은 일에 너무 마음 쓰면 결국 우리는 가보지도 못하고 도중에 그만두게 되는 것을 봅니다. 사단은 자꾸만 이런 것으로 우리에게 시험을 거는 것입니다.

여러분 우리는 위대한 사랑을 마음속에 품을 수 있어야 합니다. 이제는 용서할 수 있어야 합니다. 이제는 품을 수 있어야 합니다. 이제는 용납할 수 있어야 합니다. 내 마음에 넘어갈 수 없었던 것을 이제는 넘어갈 수 있어야 합니다. 우리 하루하루 삶의 시간이 마감되어 가지 않습니까? 우리에게 얼마큼의 기회가 있다고 생각하십니까? 우리에게 시간이 흘러가면서 우리들에 온전히 완성되어져 갈 때 그 완성의 의미가 무엇이라고 생각하십니까? 우리는 하나님의 은혜 가운데 이제는 점차적으로 이해하고 이해하기로 결심하고 우리는 마음에 배려함, 용납하고 용서하고 우리는 하나님의 은혜 가운데 사랑하는 이와 같은 존재로 나아가야 하지 않겠습니까? 내가 예수를 믿는다는 의미가 무엇이겠습니까? 이제는 받아들일 수 없는 것을 받아들이고 나를 해코지 하는 사람에게 가엾음이 생기는 것입니다. 전에는 그렇게 밉고 원수 갚아 주고 싶었는데 이제는 가엾어보인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우리가 은혜를 받으면 처음 생기는 것이 뭐냐하면 사람들에 대한 가엾음입니다. 그렇게 안돼 보이고 가엾게 보입니다. 우리 옆에 있는 사람 한번 봅시다. 가엾어요? 괘씸해요? 얼마나 많은 수고를 할까? 하고 가엾고 안돼 보이십니까? 밖에 나가서 좋은 것 다하고 오나? 하면서 괘씸한 생각이 드십니까? 우리가 살아가는 삶에 있어서 가엾어 보이는 것과 괘씸해 보이는 것은 전혀 다릅니다. 우리 옆에 있는 사람에게 얘기해봅시다. ‘당신이 너무 가엾어 보여요.’ ‘나는 그렇게 불쌍한 사람이 아닙니다.’ 여러분 그렇게 생각하지 마세요. 가엾어 보인다라는 것은 사랑의 시초입니다. 그래야 사랑이 시작되는 것입니다. 우리의 마음속에 우리 인생이 정말 가엾지 않습니까? 매일 고생하면서 하루하루 살아야 되고 여기 있는 사람 중에서 수고하고 애쓰지 않고 살아갈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누구 편안한 것 같다고요? 천만에요. 가장 편안해 보이는 것 같은 사람이 실은 가장 어렵고 초조한 사람일 수 있습니다. 그러니 우리의 삶 속에서 언제나 가엾이 여기는 이런 마음이 있어야 합니다.

두 번째 생각해보고자 하는 것은 이해하고 배려하는 큰 마음과 능력은 하루아침에 일어나지 않습니다. 성령의 인도하심 속에 이루어지는 끊임없는 결단과 갈고닦음의 경건의 훈련에 의해서 이루어집니다. 내 한계를 넘어서려는 움직임이 우리에게 필요합니다. 좋아하는 것 좋아하고 싫어하는 것 싫어하면 누가 그것을 못하겠습니까? 문제는 그것을 넘어서는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에게 감사한 것은 우리의 능력은 고정되어 있지 않습니다. 날마다 능력이 달라집니다. 여러분 우리의 능력은 지능뿐만이 아니라 마음에 방향이 더 중요합니다. 여러분 제가 성가대에 얘기했지만 성가대가 노래를 아주 잘합니다. 기능적으로 우수합니다. 그러나 마음이 달라지면 나오지 않으면 그 기능이 무슨 의미가 있겠습니까? ‘영력, 지력, 체력, 업무능력, 인격 및 매너’ 이 모두가 다 합하여 능력이라고 말씀드렸습니다. 능력이라는 것은 어떤 일에 기능적인 문제만을 따지는 것이 아니라 영력도 있어야 되고 지혜와 지식도 있어야 되고 체력도 있어야 합니다. 모든 것을 다 갖추어도 못 나가면 그날 그 일을 이루지 못하잖아요. 또 우리가 어떤 일을 보면 업무에 대한 능력도 있어야 되고 마지막으로 인격과 매너가 없으면 우리 그 사람이 싫은 것을 어떻게 해요. 그 사람이 능력이 있어도 대하기 싫은데 그 사람이 만나서 같이 일하겠습니까? 결국 우리들에게 능력이라는 것은 모든 것이 다 포함된 것이 능력입니다. 중요한 것은 우리의 마음의 방향이 능력입니다. 내가 무엇인가를 하고 싶다, 자고 일어났더니 세상이 달라졌다. 매우 중요한 말입니다. 정말 어느 날 꿈속에서라도 하나님의 은혜를 체험하고 어젯밤에 간절히 기도했는데 아침에 일어났더니 모든 사람이 사랑스러워져요. 그렇게 미워하던 사람이 가엾어 보여요. 오죽하면 그렇게 행동했겠나, 오죽하면 내 물건 훔쳐갔겠는가? 오죽하면 나에게 손해를 끼쳤겠는가? 그도 가슴아파하며 이렇게 했겠지? 가슴 아픈 것도 모르는 저 굳은 마음을 정말 가슴아파하며 기도하는 이와 같은 심정들이 될 때 우리는 이 세상이 달라 보이는 것입니다.
여러분 생각해 보세요.
세상에 원하는 것이 다 이루어질 때 행복할까요? 아니면 이 세상이 다 불쌍해 보여서 내가 그들에게 뭔가를 주고 싶다고 생각할 때 우리가 정말 행복한 사람일까요? 세상에 모든 것이 다 내 것인 것 보다 더 많은 것은 세상의 모두가 다 불쌍해서 내가 내 모든 것을 다 주고 싶을 때 우리는 더 많이 가진 것입니다. 우리의 삶 속에 하나님의 은혜를 이룬다라는 것은 우리들에게 하나님의 은총과 능력으로 말미암아 이 세상이 아름다워 보이고 가엾어 보이고 하나님의 은혜로 말미암아 정말 긍휼히 여김을 가지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가 과연 절실히 애쓰는가가 중요합니다. 내 한계를 넘어서려는 마음에 결단이 필요합니다. 왜 나는 항상 믿음의 진보를 이루지 못할까? 왜 나는 항상 사랑을 이루지 못할까? 왜 내 마음에는 위대한 사랑이 없을까? 왜 누구든지 사랑하지 못하고, 왜 나는 분별하고, 왜 나는 시기해야 하고, 왜 나는 질투해야 되고, 왜 나는 미워해야 될까? 왜 내 마음에 끝없는 사랑이 없을까? 라고 우리는 안타까워할 것입니다. 죄악의 근본을 제거하지 못해서 그렇습니다. 이기적인 나의 자아를 벗어나지 못하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작은 유익에 집착해서 하나님의 그 나라를 보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좋아하고 하고 싶은 대로 살고자 하는 우리 인간적인 어리석음 때문인 것입니다. 이제 우리는 내가 하고 싶은 대로 살아가는 것이 우리의 기쁨이 아니라 하나님의 원하심을 입을 때가 우리의 기쁨이지 않겠습니까? 여러분 주일날 하나님 앞에 정성을 드려서 예배를 드렸다고 합시다. 마음에 느껴지는 영적인 기쁨이 있죠? 여러분 내 마음속에 정성을 다해서 하나님께 기도했어요. 아무런 잡념도 들지 않고 정말 내가 집중해서 하나님께 기도했다고 생각해보세요. 그때 마음이 기쁘죠? 찬송을 내가 부를 때 정말 감격스러웠어요. 하나님께 영광도 되지만 내 마음에도 기쁘지 않습니까? 여러분 우리가 하나님의 은혜를 받게 되었을 때 내 마음에 은혜가 넘치게 되면 동시에 이루어지는 것이 무엇입니까? 다른 사람에 대한 애틋함입니다. 안타까움이 드는 것입니다.

항상 우리는 우리 자신과 하나님의 뜻을 비교해보고 수정해가는 자세가 있어야 합니다. 우리 인생의 가장 큰 적은 결국 우리 안에 있는 교만함입니다. ‘내 생각이 틀릴 수 있지. 하나님의 뜻에 나를 맞춰야지. 스스로 내가 수정되어 가야지.’ 내 기준은 하나님의 온전하심입니다. 나는 인간인데 어쩔 수 없어라고 핑계하는 것은 그것은 하나님의 마음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우리 마음에 하나님의 은혜를 주셨을진대 하나님의 온전함을 따르도록 하신 것입니다.

마지막 세 번째입니다. 우리 마음에 온전한 사랑이 이루어지는 순간 이 세상의 모든 적은 우리 눈앞에 없어지고 우리 눈앞에 사랑할 수밖에 없는 동지와 애틋한 동료들만 남는 것입니다.
여러분 어떤 세상에서 살기 원하십니까? 세상에 모두가 내 마음에 안 들어요. 그런데 어느 날 탁 눈을 떠보니까 세상의 모든 사람이 다 가엾어요. 다 내 동지 같고 내 동료에요. 여러분 내가 사랑의 심정을 품게 되면 이 세상이 달라 보이는 것입니다. 갑자기 세상이 다 따뜻하게 보이는 것입니다. 전만해도 모든 사람이 다 나에게 대적하는 사람 같고 모든 사람이 다 나에게 손해 끼치는 사람 같고 나는 전투적인, 호전적인 자세를 가지고 살아가야 겨우 내가 이 세상 버티고 살아갈 수 있을 것 같았는데 하나님의 은혜를 입고 보니 모든 사람이 다 따뜻해 보이는 것입니다. 모든 사람이 다 나에게 도움이 되는 것 같고 모든 사람이 다 따사롭게 보이는 것입니다. 여러분 은혜를 받고 나면 이 세상이 달라 보이는 것 아시죠? 세상이 아름답게 보여요. 여러분께 한번 여쭤보겠습니다. 세상이 아름답습니까? 아니면 세상이 추악해 보입니까? 여러분 은혜를 받으면 세상은 아름다운데 내 마음이 피폐해지면 세상은 추악해 보여요. 여러분 세상보다 더 악한 것은 마음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은혜를 받아 이 세상을 아름답게 볼 수 있다면 우리 마음에 하나님의 위대한 사랑을 가질 수 있다면 우리는 하나님의 축복 속에 거하는 은혜의 백성이 되는 것입니다. 그때는 가장 편안한 때이고 가장 행복하고 안전한 때입니다. 가장 편안한 정서의 상태는 사랑의 상태입니다. 사랑하면 마음이 평안해져요. 평안 속에 이루어지는 판단이 가장 정확합니다.

여러분 우리가 어떤 일을 하는데 가장 중요한 것은 정확히 분별하는 것 판단하는 것 결정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 결정이 틀리는 경우가 많이 있습니다. 왜 그런지 제가 한번 이유를 설명해 드리겠습니다. 대부분 우리는 결정할 때 이 결정이 바른 결정인가 틀린 결정인가를 생각할 때 먼저 우선해야 될 것이 있습니다. 내가 어떤 상태에서 결정하는가입니다. 대부분 사람이 결정하는데 아주 편안하고 정서적으로 안정되고 확신이 있는 상태에서 결정하지 않습니다. 한참 고민하다가 머리가 혼미해질 때 ‘에라, 모르겠다. 이렇게 결정하자.’라고 결정합니다. 분이 나는 상태에서 결정해버립니다. ‘이제 끝내자.’ 이렇게 결정해 버립니다. 그리고 결정하는 데 있어서 번민하다가 번민 속에서 결정합니다. 그러니까 그 결정이 잘 되겠습니까? 그 결정은 거의 실패하는 결정입니다. 그러면 어떤 때에 결정해야 하느냐 하면 우리 마음이 기쁘고 감사하고 평안하고 그리고 우리 마음속이 기쁨과 감사가 넘칠 때 결정하셔야 합니다. 여러분 제 말씀에 동의하십니까? 여러분 중요한 것은 내가 지혜와 지식이 부족해서 결정을 잘못하는 것이 아니라 내 마음의 상태가 좋지 않은 상태에서 결정하기 때문에 반드시 틀린 결정을 하게 되는 것입니다. 여러분 생각해 보세요. 왜 화가 난 상태에서 결정하십니까? ‘에이 모르겠다.’ 하고 결정하십니까? 왜 내 마음이 슬픈 상태에서 결정하십니까? 그러니 그것이 정상적인 결정이 되겠습니까? 그러니 우리는 항상 정서적으로 가장 편안한 상태에서 결정해야 합니다. 그 때까지 기다리시고 내 마음의 상태를 그러한 상태로 만드셔야 합니다. 그 때가 언제인지 압니까? 어떤 결과가 주어져도 나는 기쁘고 감사함으로 받아들일 수 있다고 하면 그때가 가장 편안한 상태의 정서입니다. 그때가 언제냐 하면 모두를 사랑할 수 있는 위대한 사랑의 상태입니다. 내가 어떤 일이 있어도 내가 여기서 손해를 봐도 내가 손해 봄으로 유익을 본 사람이 있다면 감사하고 또 하나님이 나에게 유익을 주신다면 그것을 통해서 주의 뜻을 이루기 위함이 있으니 감사하다고 생각하면 우리는 어떤 결과라도 받아들일 수 있으며 그때 이루는 판단은 매우 정확할 수 있습니다. 불안 속에 이루어지는 모든 것은 거의 실패합니다. 혼돈 속에 이루어지는 것은 것의 실패합니다. 우리는 따라서 어떤 일을 결정하기 전에 마음의 상태를 봐야 합니다. 가장 불안한 정서 상태는 미움과 시기와 질투와 분노의 상태입니다. 미워하면 우리는 불안해집니다. 시기하고 질투하고 분노하면 불안해져요. 상태가 바르지 못합니다. 여러분 생각해보세요. 여러분 흔들리는 상태에서 어떤 일을 결정한다고 생각해 보세요. 아니면 여러분 그저 든든히 서있는 상태에서 어떤 일을 결정한다고 생각해 보세요. 그 두 가지가 차이가 있죠?

왜 우리는 이해하고 사랑해야 할까요? 주님의 뜻이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그것이 행복의 근원이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그것을 통해서 우리는 삶의 완성을 이루는 것입니다. 언제까지 우리는 이러한 삶을 살아갈 것인가 하고 우리 자신의 한계에 대해서 절감할 때가 있을 것입니다.
저는 요즘에 그런 생각이 듭니다. 우리 삶의 기회는 그렇게 길지 않은 것 같습니다. 여러분 길지 않은 삶의 기회 속에서 우리는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을 누릴 수 있는 은혜의 백성이 되려면 이제는 마음에 결심을 해야 될 것 같습니다.

저는 요즘 신앙이라는 것에 대해서 믿음이라는 것에 대해서 점점 이런 생각이 많이 듭니다. 믿음이라는 것은 내 마음에 가만히 있는데 어느 날 하나님께서 바람처럼 은혜를 주셔서 마음이 저절로 그렇게 뭉클뭉클 드는 것이다라는 생각이 점점 드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은혜를 주셔서 내 마음속에 어떤 의도와 의욕이 생기는 것입니다. ‘야, 내가 이렇게 살아야지’ 하는 의욕이 생기는 것입니다. ‘내가 이렇게 해야지.’ 여러분 우리 마음속에 하나님의 위대한 사랑, 원대한 사랑이 생기는 것은 가만히 있는데 모두가 다 평화롭고 은혜롭게 보이는 것이 아니라 어느 날 내 마음에 내가 이렇게 살아서는 안 되지 내가 언제까지 이런 삶을 살 것인가? 내 마음에 결심도 하고 내 마음에 결단도 하는 것입니다. 어제까지 우리를 알았던 사람이 ‘어, 달라졌어. 이제 새로운 사람이 됐네? 뭐가 당신을 이렇게 다르게 했을까?’라고 우리에게 어떤 변화되는 시점이 있고 그것을 통해서 우리에게 새로운 은혜의 시대가 열려지는 것을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저는 오늘의 말씀을 맺고자 합니다. 성도들은 행복하게 살아야 합니다. 왜냐하면 주님께서 그것을 원하시기 때문입니다. 주님께서 우리가 불행하게 살기를 원하셨다면 십자가에 못 박혀 죽이시지도 않으셨을 것입니다. 주님이 우리가 고통스럽게 살기 원했다면 주님께서 이 세상에서 병든 자를 고치시지도 않았을 것입니다. 눈먼 자를 눈뜨게 하지도 않으셨을 것이고, 배고픈 자를 먹이지도 않으셨을 것입니다. 주님은 배고픈 자를 먹이셨습니다. 눈먼 자는 뜨게 하셨습니다. 귀가 들리지 않는 자는 들리게 해주셨습니다. 귀신들린 자는 귀신을 쫓아주셨습니다. 마음에 불편한 자들에게는 그들의 마음에 평안을 주셨습니다. 주님이 우리들에게 주시기 원하시는 것은 행복과 기쁨과 평안과 은혜였습니다. 그리고 주님은 그것을 통해서 하나님의 은혜의 사랑을 보여주셨던 것입니다. 그러면 구원을 받은 우리라면 주님의 사랑과 은혜를 누릴 수 있어야 되지 않겠습니까? 우리는 아름답게 살기를 원합니다. 이제는 우리가 이만큼 됐으면 우아하게 살아야 되지 않겠습니까? 미움이나 시기나 질투나 분노를 버려야 하지 않겠습니까? 사랑과 아낌과 배려와 애틋함 속에서 살아가야 하지 않겠습니까? 전에는 작은 실수와 실책도 용납하지 못하고 산적이 있지 않습니까? 열 가지 잘해도 한 가지 잘못하면 그것을 지적해서 집요하게 공격해야 우리 마음에 속이 시원하지 않았습니까? 그런데 이제는 열 가지 잘못해도 한 가지 잘하는 것 있으면 그것을 보고 기뻐하고 격려해줄 수 있는 마음이 이제 우리에게 다가오지 않습니까? 전하고 달라졌죠? 자, 우리 옆에 사람한테 얘기해봅시다. 제가 전하고 달라졌죠? 우리 정말 전하고 달라져야 합니다.

여러분 우리에게 얼마의 시간이 있다고 생각하십니까? 제가 분당에 온지가 15년이 됐습니다. 저는 그렇게 시간이 된지 몰랐는데 15년이 됐습니다. 앞으로 15년의 기회가 있을까? 하는 생각이 들 정도입니다. 그런데 그 시간이 들면서 우리들에게 어떤 마음이 달라졌는가를 생각해 봅니다. 결국 우리 인생의 완성이라는 것은 지난주에 말씀드렸습니다. 생각이 완성되고 그 생각이 행동을 완성하는 것입니다. 그것을 통해서 우리 삶이 완성되는 것입니다. 여러분 큰 사람이 되기 싫어하는 사람도 있고 큰 사람이 되고 싶은 사람도 있습니다. ‘나는 끝까지 원수는 원수로 갚을 거야.’ ‘나는 원수라는 감정을 넘어서서 끝까지 사랑하는 그런 사람이 될 거야.’ 여러분 마음속에 이미 선택하셨을 것입니다. 여러분 어느 선택을 하셨습니까? 문제는 우리가 믿음의 사람이라는 것입니다. 여러분이 어떠한 선택을 하셔도 우리는 가야할 길이 분명히 하나라는 사실입니다. 내가 예수를 믿는다는 것은 내 마음의 기호에 의해서 ‘아, 나는 싫어. 나는 나야. 나는 그냥 내 감정에 솔직하고 싶어. 나는 원수 갚는 것 원수 갚아야 해.’ 우리가 아무리 그렇게 원해도 우리에게는 분명히 예수를 믿는 순간 갈 길은 정해진 것입니다.

요새 보면 겨울에 반팔 옷 입고 있는 사람 있습니다. 그런 사람 없어요? 요새는 좀 따뜻해지니까 겨울에 반팔 옷 입고 긴팔 옷 걸치는 사람도 있습니다. 지난번에도 청년들 만남의 축제할 때 보니까 겨울인데 반팔옷을 입고 있어요. 그런데 보니까 좀 어색하더라고요. 그래서 ‘너 왜 이렇게 반팔 옷 입고 있느냐?’ 그랬더니 ‘저는 괜찮아요.’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아마도 겨울에 여름옷을 입으면 어색한 것 같습니다. 그런데 여름에 겨울옷을 입고 해봐요. 그것도 어색하지 않겠습니까? 제 철에 맞는 옷을 입는 것이 그것이 좀 어울리는 것 같아요.

예수 믿으면 예수 믿는 것 답게 사는 것이 어울립니다. 자, 따라서 합시다. ‘예수 믿는데 아직까지도 화내고 아직까지 분노하고 아직까지도 미워하고 아직까지도 시기하고 아직까지도 질투한다면 잘 어울리지 않습니다.’ 참 안 어울려요. 이제 우리는 주님이 우리에게 가르쳐주시는 원대한 사랑을 품을 수 있어야 합니다. 저는 우리 모든 성도들을 기대합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들에게 구원의 은혜를 주셨기 때문에 이미 그 위대한 사랑을 이룰 수 있는 은혜를 우리들에게 주셨습니다. 우리 사랑하는 모든 성도님들 마음에 내 감정대로 행복하게 사는 것이 아니라 믿음대로 행복하게 사는 은혜의 백성 되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 드립니다. (최종천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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