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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하나님의 레이더 (시 34:8~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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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얼마 전 신문에서 119구조대와 119구급대에 관한 기사를 본 적이 있습니다. 소방방재청이 발표한 통계 자료였는데, 119 구조대는 지난 1년 동안 19만 2천여 회 출동해서 6만 5천여 명의 인명을 구조했다고 합니다. 자연재난, 산악사고, 교통사고 등에서 구조한 것입니다. 119 구급대는 149만 3천여 회 출동해서 응급환자 110만여 명을 이송했다고 합니다. 그러니까 평균 8분 8초당 1명을 구조하고, 29초당 1명의 환자를 이송한 셈입니다.

  이 기사를 보면서 이런 생각들을 해 보았습니다. “우리가 모르는 가운데 119가 엄청 많은 일을 하는구나!” “세상이 참 복잡하고 위험하구나!” 그렇습니다. 세상의 단면만 봐도 이럴진대, 우리가 얼마나 복잡하고 위험한 세상에서 살아가고 있는지 모릅니다. 언제 어디서 발생할지 모르는 사건과 사고, 질병과 고통이 호심탐탐 우리를 노리고 있습니다.
 
여러분, 이런 세상을 살아갈 때 과연 무엇이 우리를 안전하게 지켜주고 보호해줄 수 있겠습니까? 물론 119 구조대처럼 고마운 것들이 있기는 합니다. 그러나 그런 것들이 과연 완전한 보호 장치가 될 수 있을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인간의 장치나 제도가 얼마나 무력한지 웅변적으로 말해준 사건이 있었죠. 수년 전에 있었던 ‘911 테러’입니다. 세계의 심장부요 가장 안전하게 여겨지던 뉴욕에서 세계무역센터와 펜타곤이 어이없이 공격을 당하고 말았습니다. 그날 우리나라의 119에 해당되는 911(나인 원 원)도 속수무책이었습니다. 날짜가 기가 막혔죠. 9.11과 911 ... 불행한 일이지만 어쩌면 인간 세계에 주는 메시지였는지 모릅니다. 인간적인 어떤 장치도 각종 위험을 완전하게 탐지하고, 보호해 줄 수 없다는 사실입니다. 오직 하나님만이 그 어떤 레이더보다 철저하게 각종 위험을 탐지해 주십니다. 그리고 그 어떤 119구조대보다 완벽하게 보호하시고, 구원해 주십니다.

  오늘 본문 성경이 바로 그런 사실을 우리에게 증거해 줍니다. 아무쪼록 이 말씀을 상고하면서 험한 세상 살지라도 매 순간 우리를 보호해 주시는 하나님의 사랑을 확인하시기 바랍니다. 그래서 그 사랑 안에서 담대하게 승리하는 저와 여러분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시편34편은 다윗이 쓴 감사 찬송의 시입니다. 그는 인간적으로 볼 때 도저히 살아남을 수 없는 위기 상황에 처해 있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놀라운 사랑으로 그 위기에서 벗어날 수 있었습니다. 

  잘 아시는 대로 다윗은 조국 이스라엘이 블레셋의 침략을 받았을 때 혁혁한 공을 세웠습니다. 백성들에게 칭송을 받고 사울 왕의 사위가 되었습니다. 그런데 시간이 가면서 다윗에게 왕권이 넘어갈 것을 염려한 사울 왕이 다윗을 핍박하기 시작합니다. 다윗은 하는 수 없이 이러 저리 피신해 다녔는데, 너무 힘듭니다. 잘 버텼지만 그도 연약한 인간인지라 국경을 넘어 블레셋까지 피신해 갑니다. 그런데 공교롭게도 블레셋의 아비멕렉 ‘아기스’ 왕 일행과 마주치게 됩니다. 신하들이 다윗을 알아보고 아기스 왕에게 보고합니다. 블레셋에게 다윗은 불구대천의 원수입니다. 대장군 골리앗을 죽였고, 수많은 블레셋 군대를 격파한 이스라엘의 장수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순간 지혜를 주셔서 기지를 발휘합니다. 침을 흘리고 벽에 낙서를 하는 등 미치광이 흉내를 냄으로써 위기를 모면합니다. 아기스 왕은 그 모습을 보고 무슨 저런 자가 다윗이냐며 신하들을 나무라면서 풀어줍니다. 다윗은 하나님의 도우심으로 일촉즉발의 위기에서 구원 받았던 것입니다.

  그것은 놀라운 체험이었습니다. 그래서 그는 너무 감격스러워서 이 시를 썼습니다. 그리고  백성들도 자기처럼 하나님의 그 놀라운 사랑을 체험해 보라고 권면합니다. 요즘 식으로 말하면 간증을 하면서 하나님을 증거한 것입니다. 여기서 우리는 몇 가지 중요한 교훈을 얻게 됩니다.

[1] 다윗의 체험 신앙 : 위기 가운데 만난 하나님의 사랑

  기독교는 ‘체험의 종교’입니다. 물론 성경을 읽고 공부하는 것이 기본적으로 중요합니다. 성경 말씀의 기초가 없으면 왜곡된 신비주의에 빠질 수 있습니다. 하지만 성경을 이론적으로 공부하고, 지식적으로 알아도 체험이 없으면 신앙이 냉랭해지고 무기력해지기 쉽습니다. 기도하다가 말씀에 순종하다가 체험한 것들이 있으면 능력 있고 역동적인 신앙이 됩니다. 이게 신앙생활의 맛입니다. 신앙은 맛을 보아야 합니다. 설명으로만 되는 게 아닙니다. 예를 들어 사과 맛을 어떻게 설명합니까? 설명하기가 너무 어렵습니다. 설사 설명을 잘한다 해도 이해가 됩니까? 맛을 보지 않으면 아무리 사과에 대해 많이 공부해도 소용없습니다. 그것은 결코 사과를 아는 게 아닙니다.

  마찬가지 아무리 하나님에 관해, 하나님의 사랑과 능력에 대해 많이 들어도, 지식적으로  공부해도 소용이 없습니다. 아마 여러분 중에도 체험이 있는 분들은 신앙이 확실하고 힘이 있을 겁니다. 그런데 체험이 없으면 신앙이 늘 흔들리고 약해집니다. 혹시 여러분 중에 그런 분이 계시다면 하나님 앞에 체험을 달라고 기도하시기 바랍니다. 말씀대로 실천해 보시기 바랍니다. 그러면 하나님께서 체험을 주실 것입니다.

  여러분, 다윗은 신앙이 참 좋은 사람입니다. 그 이유가 뭘까요? 물론 말씀을 많이 알고 있으니까 그럴 수 있었습니다. 그런데 또 한 가지 중요한 사실을 빠뜨리면 안 됩니다. 그것이 곧 신앙 체험입니다. 살아계신 하나님을 만나고, 하나님의 사랑과 능력, 역사를 생생하게 체험한 것입니다.

  예를 들어 골리앗과 싸울 때의 경우를 보면 이런 사실을 확인하게 됩니다. 다윗이 참전 중인 형들을 면회하러 갔을 때의 일입니다. 블레셋과 이스라엘이 대치하고 있는데. 골리앗이 나와 싸움을 겁니다. 이스라엘에서 맞설 자가 나가야 하는데 골리앗의 위세에 눌려 아무도 나서질 않습니다. 그 광경을 보고 의분을 느낀 다윗이 싸우러 나가겠다고 말합니다. 그러자 형들이 핀잔을 줍니다. 이런 모습이 사울 왕에게 전해졌고, 다윗이 왕 앞으로 불려갑니다. 그때 다윗이 당당하게 말하는 것을 보십시오. 삼상17:34~36 “ ... 주의 종이 아비의 양을 지킬 때에 사자나 곰이 와서 양 떼에서 새끼를 움키면 내가 따라가서 그것을 치고 그 입에서 새끼를 건져내었고 그것이 일어나 나를 해하고자 하면 내가 그 수염을 잡고 그것을 쳐죽였었나이다 주의 종이 사자와 곰도 쳤은즉 사시는 하나님의 군대를 모욕한 이 할례 없는 블레셋 사람이리이까 그가 그 짐승의 하나와 같이 되리이다” 하도 당당하니까 사울 왕이 허락했고, 다윗은 나아가 물맷돌로 골리앗을 해치웁니다. 다윗은 목동으로 양들을 보호하기 위해 맹수들을 쳐부수었던 그 체험으로 굳센 신앙을 갖게 된 겁니다. 이처럼 체험은 신앙은 강화시킵니다. 

  시편을 보면 다윗이 쓴 게 많은데, 그 중에서 1인칭으로 기록된 게 적지 않습니다. 왜 그럴까요? 그의 체험 신앙을 노래했기 때문입니다. 시23:1 “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니 내가 부족함이 없으리로다” 시18:1~2 “나의 힘이 되신 여호와여 내가 주를 사랑하나이다 여호와는 나의 반석이시요 나의 요새시요 나를 건지시는 자시요 나의 하나님이시요 나의 피할 바위시요 나의 방패시요 나의 구원의 뿔이시요 나의 산성이시로다” 이런 표현들은 그냥 수사법으로 쓴 게 아닙니다. 자신이 체험이 녹아있는 생생한 표현입니다. 

  본문에도 보면 다윗이 그 절체절명의 위기 상황 가운데 하나님의 놀라운 역사를 체험한 감격을 엿볼 수 있습니다. 너무 감격스러워서 백성들에게 증거하지 않고는 견딜 수 없어 하는 모습이 역력합니다. 8절을 보십시오, “너희는 여호와의 선하심을 맛보아 알지어다 그에게 피하는 자는 복이 있도다” 여기서 맛본다는 것은 체험을 가리킵니다. 다윗은 자신의 체험을 증거하며 백성들도 그런 체험을 할 것을 권면하고 있습니다.
  저와 여러분도 이런 신앙 체험과 간증을 많이 가지시기 바랍니다. 그래서 다윗처럼 역동적인 신앙으로 승리하시고, 하나님의 놀라운 사랑을 증거하시기 바랍니다.

[2] 다윗에게 나타난 하나님의 사랑 : 하나님의 눈과 귀

  그러면 다윗이 체험한 하나님의 사랑은 어떤 것이었습니까? 15절을 보시기 바랍니다.
“여호와의 눈은 의인을 향하시고 그 귀는 저희 부르짖음에 기울이시는도다” 다윗은 ‘하나님의 눈’과 ‘하나님이 귀’를 언급합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육체를 갖고 계시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영이십니다. 그러면 눈과 귀를 갖고 계신 게 아닙니다. 이것은 의인법인데, 육체가 없는 하나님을 왜 육체적인 것으로 표현할까요? 그것은 우매한 인간들에게 하나님에 관해 쉽게 설명하려고 사용하는 수사법입니다. 이런 것을 가리켜 ‘신인동형동성론’(神人同形同性論, Anthropomorphism)적 표현이라고 말합니다. 

  마치 레이더를 통해 동행을 살피고 적절한 조치를 취하는 것처럼 하나님은 항상 우리의 삶을 살펴주시고, 도와주십니다. 위험한 일을 당할 때 탐지해 주시고, 그것은 이겨낼 수 있도록 역사해 주십니다. 이런 것들을 설명하기 위해 하나님의 눈과 귀라는 표현을 동원한 겁니다. 

  ① 하나님의 눈 : 
 
  하나님의 눈이란 ‘전지성’(全知性)을 나타냅니다. 하나님은 전지성을 갖고 우리를 늘 살펴보십니다. 혹시 어려움은 없는지, 위험한 일은 없는지, 아프지는 않은지, .. 그리고 우리를 도와주십니다. 지구상에 60억이 넘는 사람들이 살고 있지만, 하나님은 그 모든 사람을 동시에 보실 수 있습니다. 인간은 육체의 한계 때문에 동시에 여러 사람을 볼 수 없습니다. 반면에 하나님은 마치 한 사람을 보시는 것처럼 나를 정확히 파악하고 계십니다. 일거수일투족을 다 보시고 보호해 주십니다. 

  어느 학교에서 미술 시간에 선생님이 아이들에게 자유 주제로 그림을 그려 보라고 했습니다. 그랬더니 한 아이가 도화지에 눈을 가득 그렸습니다. 선생님이 놀라서 왜 이렇게 그렸냐고 물었습니다. 주일학교 선생님께 배웠는데, 하나님은 모든 사람들을 다 보고 계시다는 겁니다. 그러니까 눈이 많아야 할 것 같아서 그렇게 그렸다는 겁니다. 물론 아이의 유치하고 단순한 발상이지만 그 의미를 충분히 이해할 만합니다.
  그렇습니다! 하나님은 온 천지에 눈이 가득한 것처럼 우주만물을 살펴보시고, 우리 인간 한 사람 한 사람을 살펴보십니다. 그것이 우리 성도들에게는 큰 위로와 힘이 됩니다. 

  옛날 어린 시절 시골에 놀러 가면 다 좋은데, 한 가지 불편한 게 있었습니다. 밤에 화장실(측간)에 가는 일입니다. 보통 측간이 집에서 멀리 떨어져 있으니까 밤에 가려면 무섭습니다. 그래서 혼자 못 가고 아버지나 어머니를 졸라 함께 갑니다. 한참 볼 일을 보다 보면 사방이 조용해 집니다. 무서운 생가이 듭니다. 혹시 아버지가 가버리셨나 걱정이 되서 “아버지!” 하고 불러봅니다. 그러면 이렇게 대답합니다. “걱정 마! 내가 다 보고 있으니까 ... ” 이 한 마디만 들으면 마음이 푹 놓입니다. 그렇죠. 아버지가 보고 계신데 무슨 걱정이 있겠습니까?

  하나님은 우리를 정말 사랑하십니다. 독생자를 대속물로 주실 정도입니다. 그래서 잊을 수가 없습니다.  사49:15~16 “여인이 어찌 그 젖 먹는 자식을 잊겠으며 자기 태에서 난 아들을 긍휼히 여기지 않겠느냐 그들은 혹시 잊을지라도 나는 너를 잊지 아니할 것이라 내가 너를 내 손바닥에 새겼고 너의 성벽이 항상 내 앞에 있나니” 나를 손바닥에 적어놓은 것처럼 항상 들여다보고 살펴주십니다. 어려움이 있으면 당장 다가와서 도와주십니다. 이것은 마치 공군 기지에서 레이더를 보다가 적기가 출현하면 무전을 쳐서 전투기를 출격 시키고, 적기를 격추시키는 것과 같습니다. 

  영국의 빅토리아 여왕의 이야기입니다. 당시는 대영제국의 최전성기였습니다. 여왕이 지방 순시를 갈 때는 기차를 이용했습니다. 그날 밤 유난히 안개가 짙게 끼었습니다. 노련한 1등 기관사가 운전했지만 정신을 집중해서 조심조심 운전을 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갑자기 앞에서 헤드라이트 불빛에 사람 모양이 나타나 철로 중간에서 신호하듯 양팔을 흔드는 것이었습니다. 기관사는 놀라서 급정거를 합니다. 그리고 조수와 함께 내려가서 그 자리를 살펴보았는데, 아무 것도 없었습니다. 이상히 여겨 앞으로 가보니까 놀라운 일이 벌어져 있었습니다. 수십 미터 앞에 작은 철교가 비로 불어난 강물에 떠내려가고 없었습니다. 만일 정거하지 달렸다면 여왕을 비롯해서 모든 승객이 죽고 말았을 겁니다. 천만다행이었죠. 나중에 알고 보니까, 헤드라이트 유리에 나방 한 마리가 붙어서 날개를 펄럭거리며 있었던 것입니다. 이 사실을 알게 된 여왕은 하나님께 감사하며 찬양을 했습니다.

  여러분, 하나님은 항상 우리를 향해 주목하고 계십니다. 나의 작은 움직임 하나까지 탐지하고 계십니다. 그러다가 도움이 필요하다 싶으면 즉시 다가오셔서 도와주십니다. 이런 사랑이 있기에 우리는 안심할 수 있고, 고난 중에도 위로받고 담대할 수 있습니다. 

② 하나님의 귀 :
  하나님의 귀는 우리를 향한 관심과 사랑, 기도의 응답 등을 의미합니다. 17절 봅니다. “의인이 외치매 여호와께서 들으시고 저희의 모든 환란에서 건지셨도다” 우리가 괴로워서 부르짖으면 하나님이 응답하시고 도와주십니다. 그런데 때때로 기도조차 하기 힘들 정도로 힘들 때가 있습니다. “아버지~!” “주여~!” 외마디 소리만 내도 응답해 주십니다. 심지어 우리의 신음조차 들으십니다. 아니 신음소리조차 낼 수 없을지라도 우리의 형편을 아시고 도와주십니다. 놀라운 사랑, 완전한 사랑이 아닐 수 없습니다.

  어린 아이를 둔 엄마는 항상 아이에게 귀를 기울입니다. 예를 들어 아이가 잠들어서 누워있을 때 집안일을 하면서도 귀는 아이를 향합니다. 레이더가 24시간 돌아가는 것처럼 말입니다. 그러다가 “응애~” 하고 아이가 소리를 내면 총알같이 달려갑니다. 신기한 것은 아이의 울음소리, 칭얼거리는 소리만 들어도 어디가 아픈지, 지저귀를 갈아줘야 되는지 다 압니다. 하나님은 이보다 더 세밀하게 우리를 향해 귀를 기울이시고 도와주십니다. 사 58:9 “네가 부를 때에는 나 여호와가 응답하겠고 네가 부르짖을 때에는 말하기를 내가 여기 있다 하리라 ... ” 마치 대기하고 있듯이 우리가 기도하면, 부르짖으면 “오냐, 나 여기 있다!” 하면서 도와주십니다. 

[3] 다윗의 권면 : 하나님의 사랑에 대한 확신

  다윗은 이와 같은 하나님이 사랑이 있기에 자신이 고난 중에도 승리했음을 증거합니다. 그리고 그 사랑 때문에 부족함이 없는 삶을 살아갈 수 있다고 증거합니다. 그러면서 백성들도 그 사랑을 확신하고, 그 사랑을 바라봄으로 승리하는 삶을 살라고 권면합니다. 본문  9절~10절을 보십시오. “너희 성도들아 여호와를 경외하라 저를 경외하는 자에게는 부족함이 없도다 젊은 사자는 궁핍하여 주릴지라도 여호와를 찾는 자는 모든 좋은 것에 부족함이 없으리로다”

  여러분! 우리가 살아가는 이 세상은 험하고 악한 세상입니다. 하나님의 이 놀라운 사랑이 없다면, 도우심이 없다면 과연 어떻게 살아갈지 모릅니다. 우리에게 하나님의 눈과 귀, 하나님의 레이더가 있기에 안심할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고난이 닥친다고 결코 낙심하지 마십시오. 본문 19절 보면, 뭐라고 말씀합니까? “의인은 고난이 많으나 여호와께서 그 모든 고난에서 건지시는도다” 의인도, 신앙생활을 잘 하는 사람도 고난을 당할 수 있다는 겁니다. 이 세상은 천국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하나님이 우리를 살펴주시고 도와주시는 한 승리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레이더에 걸리지 않는 일은 하나도 없습니다. 부디 이런 확신을 가지고 담대히 기도하며 승리를 체험하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다윗처럼 기뻐하며 하나님을 자랑하는 저와 여러분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홍문수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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