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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봄기운은 마른 땅에서도 새싹을 움트게 합니다 (대하 29:1-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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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마 전 잘 나가는 한 국회의원이 술을 먹고 여기자를 성추행하였다고 해서 언론에 오르내리면 수많은 사람들로부터 비난을 받았습니다. 술집 여주인인줄 알고 그런 성추행을 했다고 변명해서 “술집 여주인은 그렇게 해도 되냐?”라며 더 비난을 받았습니다. 이런 가족 경험을 한 그 국회의원의 자녀들은 어떻게 이 상황을 받아들일까요? 아주 부정적으로 받아들인다면 어디에 얼굴 내밀기 힘들 것이고 어느 의원이 자신의 아버지라는 것을 밝히기 꺼릴 것입니다. 아주 오래 전에 가정이 행복하지 못한 한 사람이 있었습니다. 아버지가 큰형을 신에게 제사들인다고 산채로 불태워 죽여 버렸습니다. 자신도 그렇게 되지 않을까 공포의 날을 보내었을 것입니다. 할아버지 때 아주 넓은 땅을 차지하고 살았는데 아버지는 그 땅을 모두 잃어 버렸습니다. 경쟁사가 하나씩 하나씩 거래처를 접수해 가 버렸습니다. 할아버지 때 지배하던 불레셋과 에돔 나라가 독립하였습니다. 북쪽 이스라엘과 전쟁에서 12만 명이 하루 아침에 죽고 20만 명이 포로로 잡혀가는 경험을 하였습니다. 아버지가 죽자 백성들은 열왕의 묘실에도 들여 보내지 않았습니다. 이런 불행한 가족 경험을 한 사람은 어떻게 살아가겠습니까? 유다 13대 왕 히스기야가 겪었던 가족 경험입니다.

덴마크의 고독한 실존주의 철학의 창설자라 불리는 키에르케고르(Kierkegaard)는 불행한 가족 경험 때문에 많은 고통을 받고 살았다고 합니다. 아버지는 황량한 벌판에서 양을 치며 살았는데 추위와 굶주림으로 자신에게 가혹한 삶을 주신 하나님을 저주하였답니다. 그리고 아내가 일찍 병으로 죽자 성적 욕구를 참지 못하고 한 하녀를 강간하여 하녀와 살면서 8명의 자녀를 두었답니다. 그 하녀가 낳은 막내가 키에르케고르였답니다. 그 형제 다섯명이 일찍 죽었습니다. 그것은 하나님이 주신 벌이라고 생각했답니다. 자신도 하나님의 저주를 받아 34살 이전에 죽을 것으로 생각했다고 합니다. 그는 아버지의 수치스러운 삶으로 인하여 걷잡을 수 없는 타락의 세계로 빠져들게 되었답니다. 아버지를 원망하고 탕아생활을 계속하던 중 죄책감에 못 견디어 자살을 기도하기도 하였습니다. 우울증에 빠졌습니다. 척추병(?)이라고 추측되는 질병의 공포와 함께 아버지의 죄로 인하여 자신의 가문이 하나님의 저주를 받은 집이라고 생각했던 심리적 불안으로 말미암아, 고독하게 살아야 만 했답니다. 거리의 여인이 되는 사람 중에는 불행한 가족 경험을 가지고 사는 사람들이 많다고 합니다. 사형수 중에도 불량배들 중에도 불행한 가족 경험을 한 사람이 많다고 합니다.

그러나 히스기야는 달랐습니다. 그는 불행한 가족 경험을 승화시켜 유다 나라 왕 중에 가장 하나님의 사랑받은 왕으로 역사 속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마른 땅을 회복시키는 신앙
히스기야가 왕으로 있을 때 나라는 참으로 위태로웠습니다. 아버지는 친 앗수르 정책을 썼지만 앗수르에게 이용만 당하였고 북쪽 이스라엘은 앗수르에게 망해 버렸습니다. 하루 아침에 12만 명이 전쟁으로 인하여 전사하여 백성 중에는 아들을 잃고 남편과 아버지를 잃고 슬퍼하며 원한으로 살아가는 사람들이 많았습니다. 이 십만 명이 이스라엘 나라에 사로잡혀 고통을 당했던 사람들은 왕을 불신하고 반정부적인 삶을 살았을 것입니다. 할아버지 때 차지했던 유다의 최대의 국토는 형편없이 외적의 침입으로 무너져 버렸습니다. 아버지는 큰 아들을 불로 태워 이방신에게 제사를 드렸으니 얼마나 백성들로부터 비난을 받았겠습니까?전국에 산당을 짓고 산당 제사를 드렸고, 성전 기물을 앗수르에게 바쳤습니다. 성소에 들어가는 문을 폐쇄해 버리고 성전에서 이방신에게 제사를 드렸습니다. 종교 면이나 정치면이나 썩을 대로 썩어 버렸습니다. 경제적으로 형편없게 되어 버렸고 군사적으로 아주 약체가 되어 버렸습니다. 나라는 회복 불능 상태처럼 되어 버렸습니다. 희망이 없는 상태입니다.

이 때 히스기야가 왕이 되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절망하지 않았습니다. 포기하지 않았습니다. 불행한 가족 경험으로 인생을 망치지 않았습니다. 오늘 성경 기자는 히스기야의 생을 한 마디로 이렇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1,2절을 읽어 보십시오. 이십 오세에 왕이 되어 이십 구년을 치리하였는데 다윗의 모든 행위와 같이 여호와 보시기에 정직히 행하였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아버지와는 달랐습니다. 아버지는 “다윗과 같지 아니하여 여호와 보시기에 정직히 행하지 아니하였다”라고 평가를 받았습니다. 유다 왕 중에 아사(왕상15:11), 여호사밧(17:3), 요시야(왕하22:2) 왕이 히스기야처럼 평가를 받았습니다. 그 중 히스기야가 역대 왕들 중에 가장 좋은 개혁적인 왕으로 평가를 받고 있습니다. 그는 역대 왕이 제거하지 못한 산당까지 제거할 정도로 유다 나라에 큰 업적을 남긴 왕입니다. 그야 말로 마른 땅에 꽃을 피운 왕입니다. 단점이 없었던 것이 아닙니다. 잘못이 없었던 것이 아닙니다. 단점과 잘못이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인생에 대한 총평을 이렇게 받는 것입니다.

우리에게 허물과 죄가 있는데도 불구하고 우리 하나님을 우리를 위해 십자가에 돌아가신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우리를 왕같은 제사장으로 거룩한 나라로 하나님의 소유된 백성으로 평가해 주시는 것입니다.

우리는 어떤 불행한 가족 경험을 가지고 있다고 할지라도 결코 포기하거나 좌절해서는 안됩니다. 우리가 어떤 것을 부모로부터 물려 받았다하여도 결코 포기하거나 원망하거나 좌절해서는 안됩니다. 하나님의 사람들은 어떤 경우에도 포기하거나 원망하며 무너질 사람들이 아닙니다. 어떤 환경, 어떤 경제적 처지, 어떤 조건이든지 우리는 그곳에서 죽음을 깨뜨리고 부활하신 그리스도의 생명력을 드러내야 합니다. 어떻게 하든지 하나님의 사람들은 가정을 살리고 교회를 살리고 시대를 살리고 민족을 살리는 사람들이 되어야 합니다. 마른 땅에도 꽃을 피우게 하고 사막에도 물이 흐르게 하여야 합니다. 무너지는 가정을 살리어 신앙의 명문 가정을 만들고 쓰러지는 기업을 살리어 하나님의 뜻을 이 땅에 이루게 만드는 사람들이 되어야 합니다. 아브라함 불행한 가족 경험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요셉은 어머니가 4명인 불행한 가족 경험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모세도 마찬가지입니다. 호세아는 창녀와 결혼한 불행한 가족경험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이들을 이것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을 만나 하나님을 가까이 하고 하나님의 능력으로 일어섰습니다.

베토벤의 아버지는 알콜 중독자였습니다. 아버지는 매독에 걸렸고 어머니는 폐결핵으로 시름하였습니다. 아들이 넷이 있었는데 하나는 병으로 죽었고 나머지 셋은 결핵에 걸렸습니다. 이 때 임신한 아들이 베토벤입니다. 그는 17세 때 어머니가 폐결핵으로 세상을 떠나자 아직 어린 소년이 동생까지 부양해야 했던 사람입니다. 30세부터 음악가의 생명인 귀가 이상하기 시작하여 만년에는 완전히 듣지 못했습니다. 그러나 그는 불행한 가족 경험으로 절망하지 않았습니다. 그는 아무도 모르는 넘치는 행복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는 말하기를 "나는 괴로움을 뚫고 나아가 기쁨을 발견했다"고 했습니다. 베토벤은 젊어서는 신앙이 없었으나 나이를 먹을수록 신앙의 깊은 세계로 들어갔습니다. 예수님을 만나면 가정의 불행한 경험은 문제가 되지 않습니다. 예수님을 만나면 불행한 가족 경험은 성숙을 위한 발판과 미래를 위한 교훈이 됩니다. 숨겨 놓고 불행의 씨를 키우는 오물이 아니라 그리스도를 만나 변화된 삶의 간증거리가 될 수 있습니다. 주님 안에서는 모든 것이 용서되면 새롭게 변화될 수 있습니다.

마른 땅에 대한 정확한 원인 진단
유다 나라가 광야처럼 황폐하게 된 원이 무엇일까요? 마른 땅처럼 굳어진 이유가 무엇일까요? 사람이 병이 들면 정확한 진단이 필요합니다. 정확하게 진단하면 많은 경우는 치료의 길이 열립니다. “내가 왜 불행한지? 왜 기업이 부도가 났는지? 왜 부부 사이가 좋지 않은지? 왜 경제가 발전하지 못하는지? 왜 실력이 향상되지 못하는지? 왜 영적 침체를 맞이했는지? 왜 예배가 지루하고 즐거움이 없는지? 우리 가정이 왜 즐거움이 없는지?” 등 정확한 진단이 필요합니다. 히스기야 왕은 자신의 나라가 마른 광야처럼 피폐하게 된 원인이 무엇이라고 진단하고 있습니까? 정치력의 부족이라고 생각합니까? 자원의 부족, 군사력의 약화라고 생각합니까? 아닙니다. 자신의 민족이 수치를 당하고 멸시를 당한 이유가 무엇이라고 말하고 있습니까?

6절을 보십시오.
우리 열조가 범죄한 것입니다. 그 범죄로 인하여 댓가를 받았다는 것입니다. 구체적으로 무슨 범죄를 했다는 것입니까?
여호와 보시기에 악을 행하였습니다. 그 악이 무엇입니까?
하나님을 버리고 얼굴을 돌이켰습니다. 여호와의 성소를 등졌습니다. 그 낭실 문을 닫았습니다. 등불을 꺼버렸습니다. 성소에서 분향하지 않았습니다. 번제를 드리지 않았습니다. 한마디로 하나님께 예배드리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 경배드리는 삶이 끊어졌다는 말입니다. 하나님과 상관없는 나라가 되어 버렸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의식하지 않고 하나님이 공급하시는 풍성함을 누리지 못하는 나라가 되어 버린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어떻게 하셨다는 것입니까? 8절을 보십시오.
유다와 예루살렘을 진노하였습니다. 내어 버렸습니다. 두려움과 놀람과 비웃음 거리가 되게 하였습니다. 우리 열조가 칼에 엎드러졌습니다. 자녀와 아내가 사로잡혀갔습니다.
이것이 바로 히스기야의 원인 진단입니다. 히스기야의 역사의식이며 신앙관입니다. 하나님 중심으로 역사를 보고 하나님 중심의 신앙을 가진 것입니다.
자신의 민족이 수치를 당하고 갖은 고난을 겪으면 젓과 꿀이 흐르는 가나안이 황무지로 변한 원인은 바로 하나님의 성소를 더럽힌 데 있었다는 것입니다. 거룩한 곳에서 우상숭배하는데 있었다는 것입니다. 정치력의 부족도, 경제문제도, 교육 문제도 아니라는 것입니다. 신앙 문제라는 것입니다. 먼저 그의 나라와 그 의에 대하여 관심을 가지지 않은데 문제가 있었다는 것입니다. 섬겨야 할 하나님을 섬기지 않고 우상을 섬기는데 문제가 있다는 것입니다. 예배에 문제가 있다는 것입니다.

새싹을 돋게 하는 살리는 처방
히스기야는 정확히 불행의 원인을 알았기 때문에 정확하게 민족을 살리게 하는 정확한 처방전은 내립니다.
그가 무너진 나라를 살리기 위해 가장 먼저 한 것은 무엇입니까?
이제라는 말을 주의하여 보시기 바랍니다. 3절에 원년 정월에, 5절에 이제, 10절에 이제 이렇게 연결되어 있습니다.
3절을 보십시오. 자신이 실권을 쥐자마자 아버지 때 닫혔던 여호와의 전 문을 열었습니다. 아버지가 죽기를 기다렸다가 바람 난 것 아닙니다. 자신이 실권을 잡자 마자 교만해 진 것이 아닙니다. 아버지 때에 앗스르에게 선물을 드린다고, 이방신을 섬긴다고 파괴해 버린 성전을 수리하였습니다. 하나님이 무엇을 원하는가를 생각한 것입니다. 자신이 왕이 된 것이 하나님이 주신 기회의 선물임을 알았습니다. 분명한 목적 의식이 있었습니다. 왜 왕이 되었는지 분명하게 인식하였습니다. 왜 자신에게 그 큰 권력을 주었는지 그 이유를 분명히 알고 있었습니다. 문제의 중심은 예배에 있다는 사실을 알았습니다.

4절을 보십시오. 성전 봉사자들인 제사장들과 레위인들을 동편 광장에 모으게 하였습니다. 정확하게 이일을 맡길 사람을 알고 있습니다. 일을 추진하는데 그 일을 추진할 수 있는 사람을 정확하게 배치합니다. 예배를 회복시킬 사람이 누구인지를 정확히 안 것입니다.
히스기야 왕은 그들에게 명령하였습니다. 어떤 명령을 합니까? 5절을 보십시오.
“이제 너희는 성결케 하고 또 너희 열조의 하나님 여호와의 전을 성결케 하여 그 더러운 것을 성소에서 없이하라”라고 말씀합니다.
우선 순위가 분명합니다. 제사장과 레위인들부터 회개하라는 것입니다. 그들은 성전 봉사자들입니다. 예배 봉사자들입니다. 그런데 그들 마음이 부패해 있습니다. 하나님으로부터 멀리 떨어져 있습니다. 그들은 아버지의 명령에 항거하지 못하고 어용 종교 지도자가 되어 나라를 부패하게 만들어 버렸습니다. 그래서 종교지도자들을 향하여 과거 지었던 죄를 회개하고 성결하게 하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나서 여호아의 전을 성결케하라는 것입니다. 여호와의 전을 성결케하는 방법은 바로 더러운 것들을 성소에서 없애라는 것입니다.

제도를 바뀌기 전에 그 제도를 운용하는 사람이 바뀌어야 합니다. 사람의 마음과 태도 자세가 바뀌지 않은 상태에서 제도만 바뀐다고 나라가 새로워지는 것은 아닙니다. 개혁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것은 정신을 바르게 바꾸는 것입니다. 마음에 그 중심 문제가 있었습니다.
잘못을 회개하게 합니다. 하나님이 가장 싫어하는 것은 죄입니다. 회개하지 않는 마음입니다. 우리 하나님은 우리를 사랑하십니다. 그러나 죄는 싫어하십니다. 죄의 삯은 결국 사망이 됩니다. 죄의 문제를 해결해야 합니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 나오면 우리 죄는 다 용서함을 받습니다. 우리의 죄가 주홍같이 붉을지라도 양털같이 희게 됩니다. 회개는 바로 성결의 첫 걸음입니다. 하나님이 기뻐하신 예배를 드리는 첫걸음입니다. 우리는 예배 때마다 나와 하나님께 모든 죄를 아뢰고 깨끗하게 용서함을 받아야 합니다. 그 어떤 죄도 회개하면 용서받을 수 있습니다. 자꾸 무엇을 얻음으로 만족을 누리려고 하지말고 나의 죄를 하나님께 회개하는 것입니다.

5절의 이제가 다시 10절의 이제로 연결이 됩니다. 두 번째 처방전이 나옵니다.
민족의 최고 지도자인 자신이 어떻게 하겠다는 것입니까?
자신의 의지가 분명하지 않으면 아무것도 안됩니다. 지도자의 의지가 중요합니다. 히스기야는 이스라에게 내린 진노를 거두게 하겠다는 분명한 마음이 있었습니다. 꼭 이스라엘을 정상적으로 회복하겠다는 마음이 있었습니다. 회복하게 하는 방법은 무엇입니까? 마른 땅에서 새싹이 나게 하는 방법은 무엇입니까? 이스라엘 하나님 여호와로 더불어 언약을 세우는 것입니다. 그 맹렬한 진노를 우리에게 떠나게 하기 위해서 언약을 세우겠다는 것입니다. 언약은 하나님께서 이스라엘과 맺으신 관계성 확립의 방법입니다. 언약을 맺는다는 것은 쌍방간에 책임과 의무가 있음을 의미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과 언약을 맺으시고 무엇이라고 했습니까?

“세계가 다 내게 속하였나니 너희가 내 말을 잘 듣고 내 언약을 지키면 너희는 열국 중에서 내 소유가 되겠고 너희가 내게 대하여 제사장 나라가 되며 거룩한 백성이 되리라 너는 이 말을 이스라엘 자손에게 고할지니라 (출 19:5-6)”
하나님께서는 언약을 이행하여 그들에게 가나안 땅을 주고 보호하시고 열국 위에 뛰어나게 하시고 제사장 나라가 되게 하였습니다. 그런데 그들은 하나님과의 언약을 파괴하고 이방신을 섬긴 것입니다. 하나님께 예배를 드리지 않은 것입니다. 히스기야는 하나님의 말씀을 붙들고 백성들로 하여금 하나님을 섬기는 예배를 회복시키겠다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예배를 주관하는 레위인과 제사장들에게 무엇을 말씀합니까? 제사장과 레위인들을 향하여 ‘내 아들들아’라고 말씀합니다. 강압적으로 왕의 권력으로 억지로 시키는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예배는 강압적으로 되는 것이 아니고 그런 예배는 하나님이 받지도 않기 때문입니다.
이제는 게으르지 말라는 것입니다. 방종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이유가 무엇입니까? 여호와게서 이미 너희를 택하사 그 앞에 서서 수종들어 섬기며 분향하게 하셨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그들은 어떻게 합니까? 그대로 시행을 합니다(12-19).

15절을 보십시오. 형제들을 모아 성결케 합니다. 여호와의 말씀대로 여호와의 전을 깨끗하게 하였습니다. 17절 보십시오. 16일만에 성전 정화를 마쳤습니다.
그리고 무엇을 하였습니까? 왕이 먼저 속죄제를 드렸습니다(20-24). 20절을 보십시오. 온백성이 경배하였습니다(25-30). 28절을 보십시오. 온 회중이 경배하며 노래하는 자들은 노래하고 나팔 부는 자들은 나팔을 불었습니다. 29절을 보십시오. 왕과 함께 있는 자들이 자 경배하였습니다. 유다 온 백성들이 감사제를 드렸습니다.(31-36)

36절을 보십시오. 이렇게 되어진 일이 누구에 의해 이루어진 것이라고 성경 기자는 말씀하고 있습니까? 이 일이 인간 보기에는 갑자기 되어진 일같지만 하나님이 백성을 위해 예비하셨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 예배를 드린 후 히스기야가 백성으로 더불어 기뻐하였습니다. 진정 신령과 진정으로 드리는 기쁨의 예배가 회복된 것입니다.

어떤 불행한 가족 경험이 있다고 할지라도 마른 땅에서도 새싹을 움트게 하는 첩경은 얘배의 회복에 있습니다.
유다 나라에 영적 침체가 있었던 이유는 무엇입니까? 유다 백성에게 경제적, 정치적 어려움이 왔던 이유가 무엇입니까? 예배의 실패입니다. 바른 예배의 대상에게 신령과 진정으로 경배드리는 일에 실패한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십니다. "아버지께서는 이렇게 자기에게 예배하는 자들을 찾으시느니라 (요 4:23)" 예배는 마치 질병이 걸린 사람이 음식을 먹고 기력을 회복하는 것과 같은 것입니다. 우리가 질병에 걸려 무기력해지면 다가 오는 현상이 무엇입니까? 입맛이 없어지고 음식을 먹지 못합니다. 그래서 병원에 가면 포도당을 줍니다. 기력을 회복할 수 있도록 말입니다. 예배를 통하여 영적인 하나님의 말씀을 먹어야 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살아 역사합니다. 죽은 영혼에게 생명을 줍니다.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죽은 자들이 하나님의 아들의 음성을 들을 때가 오나니 곧 이 때라 듣는 자는 살아나리라 (요 5:25)"
위로를 줍니다. "이 말씀은 나의 곤란 중에 위로라 주의 말씀이 나를 살리셨음이니이다 (시 119:50)"
말씀을 들을 때 능력을 받습니다. "내게는 도략과 참 지식이 있으며 나는 명철이라 내게 능력이 있으므로 (잠 8:14)"
소망을 잃은 자들이 소망을 발견하게 됩니다. 절망하는 자들에게 희망을 줍니다. 길은 잃은 자들이 바른 길로 인도받습니다.

예배가 타락하면 망하게 되어있습니다. 러시아가 그러했습니다. 로마가 그랬습니다. 영국이 40내에 기독교가 없어질 것이라고 말하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이제 예배를 중요하게 생각하지 않습니다. 예배가 참된 안식이 아니라 힘겨운 노동으로 생각을 합니다. 예배가 감상의 대상이 되고 있습니다. 예배가 공연화되고 있습니다. 쾌락의 우상을 섬깁니다. 경제의 우상을 섬깁니다. 건강의 우상을 숭배합니다. 그러나 경제 회복도 도덕회복도 가정의 행복의 회복도 국민 건강의 회복도 예배 회복이 될 때 이루어집니다.

정신위생계에 있어서 세계적인 학자인 데이비드 핑크 박사는 "안정을 위한 4박자 균형"이라고 하는 논문에서 인간에게 시급한 것은 정신적인 안정이라고 했습니다. 경제적 안정이나 정치적 안정보다 더 중요한 것은 정신적인 안정이라는 것입니다. 정신적인 안정을 위해서는 네 가지가 균형을 잡아야 하는데 첫째가 일(Work), 둘째가 놀이(Play), 셋째가 사랑( Love), 넷째가 예배(Worship)이라고 했습니다. 약자로 WPLW라고 했습니다. 그분은 성직자가 아닙니다. 이 방면에 학자일 뿐이요 교수입니다. 그런데 이 중에서 가장 근본적인 것이 예배라고 했습니다. 그는 말합니다. “자기 자신을 하나님께 맡기는 온전히 위탁하는 그런 예배적 행위, 예배적 정신 자세가 아니면은 인간은 결코 안정을 얻을 수 없다”는 것입니다.
육신의 건강도 예배가 중요하다는 것입니다.

미국 캘리포니아주 버클리에 있는 인간연구소(HPL)의 윌리엄 J 스트로브리지 박사팀이 지난 30년간의 연구에 의하면 예배에 자주 참석하는 사람들이 그렇지 않은 사람들에 비해 사망율이 낮다고 합니다. 영국의 일간지 더 타임스가 주일 예배에 매주 나가는 사람이 그렇지 않는 사람보다 훨씬 장수한다고 보도했습니다. 예배에 매주 한 차례 나가는 사람들의 예상 평균 수명은 82세, 그렇지 않는 사람들은 75세로 나타났다는 것입니다. 해럴드 쾨니히박사도 "예배에 자주 참석하는 사람은 사망률도 그렇지 않은 사람보다 46%나 낮았다"고 밝혔습니다. 미 국립 건강연구센터 소장 데이빗 라슨박사는 "예배에 참여하는 것이 고혈압 뇌일혈 등의 발병률을 줄이고 약물처방을 잘 받아들이게 하며 장수에 기여하는 것"이라고 말했습니다.

예배에 참석하는 사람들이 그렇지 않은 사람보다 행복하게 산다는 것입니다.
어느 통계에 보니까 매주 교회에 나가고 있는 사람들의 경우 47%가 매우 행복하다고 답한 반면 교회에 나가지 않는 사람은 27%만이 매우 행복하다고 대답했다는 것입니다.

예배가 회복되어야 합니다. 예배에 참석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바른 예배를 드려야 합니다.죄인이 하나님께 나온 것입니다. 하나님을 만나는 시간이 되어야 합니다. 예배는 최상의 가치를 최상의 하나님께 올려 드리는 최상의 행위입니다. 예배를 통하여 하나님을 영화롭게 합니다. 예배는 교회의 최대 사명이고 예배 중에 성도의 교제와 사랑이 이루어집니다. 예배는 성도에게 축복을 가져다 줍니다. 예배를 통하여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은혜를 누리게 되고 부활의 소망을 갖게 됩니다. 예배는 하나님께 드리는 시간입니다. 말씀을 들을 때 하나님께서 나에게 주시는 말씀을 들어야 합니다. 예배는 감상하는 것이 아닙니다. 사람의 말로 듣는 것이 아닙니다. 예배를 통하여 은혜를 누리는 방법은 간단합니다. 사모해야 합니다. "저가 사모하는 영혼을 만족케 하시며 주린 영혼에게 좋은 것으로 채워주심이로다 (시 107:9)" 신학자 칼 바르트는 사람들이 하나님을 진정으로 예배하지 않는 이유에 대해서 "자신을 하나님으로 착각하고 있기 때문이다"라고 말했습니다. 진정으로 하나님을 예배하려면 내 속에 있는 자아를 깨뜨려야 하는 것입니다.

지미 카터 대통령이 대통령 출마 선거 유세를 하고 있을 때, 얼마나 바쁘겠습니까? 웬만하면은 표를 얻기 위해서 큰 교회에 나가야 하겠지만 아니요. 그는 그 바쁜 일정에도 고향으로 돌아가 조지아주에 있는 작은 교회, 자기 나가던 교회에 나가서 23년 동안을 개근하며 아이들을 가르쳐 왔는데 20명을 앞에 놓고 성경을 가르치고 하나님 앞에 경건히 예배했습니다. 그 바쁜 시간에도……. 했더니 기자들이 70명이 몰려왔어요. 기자들과 만나면서 이런 이야기를 했다고 합니다. "이렇게 찾아 주시니 고맙기는 합니다 만은 다음 주일부터는 다 당신들이 나가는 교회에 나가십시오."라고 부탁했답니다.

"주는 그를 예배하고 그의 사랑을 신뢰하는 자들을 기뻐하신다" (시 147:11).

예배는 우리의 유익 전에 하나님의 유익을 위해 예배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예배를 드릴 때 우리의 목적은 우리 자신이 아닌 하나님께 기쁨을 드리는 것입니다. 만일 "오늘 예배에서는 아무것도 얻지 못했어"라고 말한 적이 있다면 그것은 잘못된 이유로 예배를 드린 것입니다. 예배는 우리를 위한 것이 아니다 하나님을 위한 것입니다. 예배는 삶의 일부가 아니라 삶 그 자체입니다. 우리의 창조주가 우리와 교제하기를 원하십니다. 예배의 중심은 하나님께 나를 드리는 것입니다. 하나님께 기쁨을 드리는 것은 우리가 하나님께 우리 자신을 완전히 내어드렸을 때 가능합니다. 하나님은 삶의 전부를 원하십니다. 90%로는 절대로 충분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예배가 진실할 때 기뻐하십니다. 바른말보다 진심으로 하는 말이 더 중요합니다. 예배드릴 때 하나님은 우리의 말이 아니라 우리 마음의 태도를 보십니다. "사람은 외모를 보거니와 나 여호와는 중심을 보느니라" (삼상 16:17)라고 말씀하십니다.

음악 때문에 감동받는 것을 성령에 의해 감동받는 것는 다릅니다. 분위기 좋은 곳을 찾는 예배가 아닙니다. 진정 나를 드리는 예배가 중요합니다. 하나님은 생각 없이 찬송을 부르고, 상투적인 말로 기도하며, 감사 없이 헌금하는 것을 기뻐하지 않습니다.

예배는 하나님과의 관계에 있어서 영적 탯줄과 같은 것입니다. 아무나 예배드리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크신 은총으로 구원받은 우리가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은혜의 보좌에 나갈 수 있게 되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긍휼하심을 받고 때를 따라 돕는 은혜를 얻기 위하여 은혜의 보좌 앞에 담대히 나아갈 것이니라 (히 4:16)”
(김필곤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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