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그인

  • 목록
  • 아래로
  • 위로
  • 쓰기
  • 검색

설교 아모스와 아마샤 (암 7:10-17)

  • 잡초 잡초
  • 936
  • 0

첨부 1


오늘 본문에는 아마샤라는 사람과 아모스라는 사람이 등장합니다.
이 둘은 같거나 비슷한 점이 많습니다.
이 둘은 같은 시대의 사람입니다. 기원전 8세기의 인물입니다.
오늘 본문은 기원전 약 760년경에 있었던 일입니다.
활동한 장소도 같습니다. 북왕국 이스라엘의 종교중심지인 벧엘이 이들의 활동무대였습니다.
신분이 비슷합니다. 아마샤는 벧엘의 제사장, 아모스는 예언자, 둘 다 종교지도자였습니다.
이름도 비슷합니다.
그러니까 무늬는 거의 같습니다. 그러나 속은 달랐습니다.
그들의 인격이 달랐습니다. 신앙양심도 달랐습니다. 따라서 메시지도 달랐습니다.
무엇보다도 이 둘에 대한  평가가 정반대입니다.
아먀샤는 옳지 못한 종교지도자들을 대표하는 이름이 되었습니다.
아모스는 참 종교지도자들을 대표하는 이름으로 알려지고 있습니다.
잘 아시는 대로 아모스는 ‘정의의 예언자’로 유명합니다.
성경에는 아마샤의 이름이 먼저 나옵니다. 가나다순으로 해도 아마샤가 먼저입니다.
그리고 오늘은 아마샤 이야기를 많이 할 것입니다.
그렇지만 설교제목을 정하는데 옳지 못한 종교지도자의 이름을 먼저 내세울 수 없어서 아모스의 이름을 앞에 두었습니다.

이 때 이스라엘의 왕은 여로보암 2세입니다.
여로보암 2세 때는 위대한 번영의 시대였습니다.
그러나 동시에 심한 부패의 시대였습니다.
드고아의 목자 출신인 예언자 아모스는 이 심한 부패를 신랄하게 공격했습니다.
하나님이 이스라엘을 벌하실 것이라고 했습니다.
하나님께서 메뚜기가 땅의 풀을 다 먹는 환상을 내게 보여주셨다고 했습니다.
또 불이 바다를 삼키고 육지까지 먹으려 하는 환상을 보여주셨다고 했습니다.
하나님이, 주님이 다림줄을 잡고 서 있는 환상도 보여주셨다고 했습니다.
다림줄은 추를 달아서 담벽이 수직으로 바른가, 굽지 않았나, 알아보는 도구입니다.
다림줄의 환상은 심판이 가까웠다는 뜻입니다.

벧엘의 제사장 아마샤가 아모스의 이런 예언활동을 막으려고 했습니다.
아먀사는 왕에게 사람을 보내 아모스가 왕을 모반한다고 하였습니다.
아먀사는 또 아모스에게 여기에서 예언활동을 하지 말라고 했습니다.
여기에 대해 아모스는 자기 소명의 근거를 밝힙니다.
그리고 아마샤가 무서운 벌을 받을 것을 예언했습니다. 
이것이 오늘 본문을 포함한 아모스서 7장 전부의 내용입니다.

아마샤 타입의 종교지도자들은 이때만 있었던 것이 아닙니다.
앞으로 다시 한 번 말씀드리겠지만  아마샤 타입의 종교지도자는 성경 여러 곳에 나오고, 교회 역사에도 많이 있었고, 지금도 있습니다.

어떤 종교지도자를 아마샤 타입의 종교지도자라고 할 수 있을까요?
본문을 살피면 몇 가지 대답을 발견하게 됩니다.

먼저, 진실을 왜곡하고, 한걸음 더 나가 진실을 막으려고 하는 사람들입니다. 

아마샤는 왕에게 바로 사람을 보내 아모스가 왕을 모반한다고 했습니다.
아모스가 왕을 모반한다고 한 것은 사실이 아닙니다. 이것은 모함입니다.
아모스는 모반을 꾀한 일이 없습니다.
다만 하나님께서 시키시는 대로, 보여주시는 대로 말했을 따름입니다.
아마샤는 아모스를 정치범으로 몰았습니다.
양심적인 신앙인들을 정치범으로 몰아 박해하는 것은 예수님 때부터 기독교를 박해하는 국가들이 흔히 쓰는 수법입니다.

아마샤는 한 걸음 더 나가 아모스에게 벧엘에서 예언하지 말라고 했습니다.
아모스가 진실을 말하는 것이 두려웠기 때문입니다.

그 다음, 하나님 중심이 아니고 세상 권력 중심인 사람들입니다.
오늘 본문에서 아마샤가 한 말들을 살펴보세요.
아마샤는 여로보암에게 사람을 보내 이렇게 전합니다.

이스라엘 족속 중에 아모스가 왕을 모반하나니 그 모든 말을 이 땅이 견딜 수 없나이다 아모스가 말하기를 여로보암은 칼에 죽겠고 이스라엘은 반드시 사로잡혀 그 땅에서 떠나겠다 하나이다(암7: 10b~11)

왕에게 바로 사람을 보낼 수 있었던 것을 보아 아마샤는 왕과 가까운 사이었던 것이 분명합니다.

아마샤는 또 아모스에게 이렇게 말합니다.

선견자야 너는 유다 땅으로 도망하여 가서 거기서나 떡을 먹으며 거기서나 예언하고 다시는 벧엘에서 예언하지 말라 이는 왕의 성소요 나라의 궁궐이니라(암 7: 12b~13)

이 두 말을 잘 살펴보세요. 여호와란 말이 나오지 않습니다.
관심이 왕에 가 있습니다.
한 걸음 더 나가서 여호와란 말을 써야 할 곳에 왕이란 말을 쓰고 있습니다.
벧엘을 “왕의 성소”라고 했습니다.
성소는 거룩한 곳이라는 뜻입니다. 하나님이 계신 곳이 성소입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의 성소“라고 해야 합니다. 그런데 왕의 성소라고 했습니다.
어떤 의미에서는 맞는 말입니다.
벧엘은 북왕국 이스라엘의 왕들이 필요해서 만든 종교적 중심지였기 때문입니다.
이스라엘이 남왕국과 북왕국으로 갈라졌을 때 성전이 있는 예루살렘은 남왕국에 속해 있었습니다.  북왕국의 왕은 사람들의 마음이 예루살렘으로 쏠릴 것을 두려워했습니다.
그래서 금송아지 둘을 만들어 하나는 단에 두고 하나는 벧엘에 두었습니다.
그리고 “너희가 다시는 예루살렘에 올라갈 것이 없도다 이스라엘아 이는 너희를 애굽 땅에서 인도하여 올린 너희들의 신이라”하였습니다.
유다의 절기와 비슷하게 절기를 만들고 벧엘에 제단을 쌓고 제사장을 두었습니다.(왕상 12: 25~33)
이와 같이 벧엘의 성소는 왕이 권력을 유지하는데 필요해서 만든 성소였습니다.
그러니까 아마샤는 무심중에 “왕의 성소”라고 한 것 같습니다.
아마샤는 제사장입니다. 제사장은 하나님께 제사 드리는 일을 맡은 사람입니다.
그런데 아마샤는 자기가 왕을 위해 제사 드리는 사람으로 여기고 있었습니다.
권력을 위해 봉사하는 사람으로 알고 있었습니다. 본분을 망각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 다음, 성직을 생계의 수단으로 여기는 사람들입니다.

아마샤는 아모스에게  유다 땅으로 도망하여 가서 거기서나 떡을 먹으며 거기서나 예언하라고 했습니다.
이것은 ‘고향 땅에 가서 예언을 하는 것으로 밥벌이를 해라.’는 뜻입니다. 
그 당시에는 선지자들이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고 보수를 받아 생계를 유지하는 일이 많았습니다.
아모스는 여기에 대해 ‘나는 직업적인 예언자가 아니다.’ 했습니다.
‘나는 목자요, 뽕나무를 재배하던 사람이었다, 나는 양 떼를 따르던 사람이었다.’라고 했습니다.
성경학자들은 아모스가 하나님의 부름에 의해 예언활동을 한 다음에는 다시 이와 같은 생활로 돌아갔을 것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성직도 하나의 직업입니다. 그러나 생계를 위한 직업이 되어서는 안 됩니다.
소명이면서 동시에 직업이 되어야 하지, 직업이면서 동시에 소명이 되어서는, 직업이 먼저 와서는 안 됩니다.

그 다음, 시대의 표면만, 그리고 지금만 보는 사람들입니다.

아까 말씀 드린 것과 같이 여로보암 2세 때 이스라엘은 대단히 번성했습니다.
아마샤는 그것만 보았습니다.
그 번영의 밑바닥에 있는 것들은 보지 못했습니다.
은을 받고 팔려가는 의인들, 신 한 켤레 값에 팔려가는 가난한 사람들, 티끌 먼지 속에 머리를 밟히는 연약한 사람들을 보지 못했습니다.
아버지와 아들이 같은 젊은 여인과 어울리는 도덕적인 타락도 보지 못했습니다.
종교가 위선과 형식에 빠진 것도 보지 못했습니다.

아마샤는 지금의 그런 번영이 계속될 것으로 믿었습니다.
아모스는 앞도 보았습니다.
본문에 이어 8장에 아모스가 여름 과일 한 광주리의 환상을 보는 것이 나옵니다.
히브리말은 여름 과일이라는 말과 끝이란 말의 음이 비슷합니다.
여름 과일은 ‘카이츠’이고 끝은 ‘케츠’입니다.
그런 번영은 이제 곧 끝나고 하나님의 심판이 임할 것을 보았습니다.

지금까지 어떤 종교지도자가 아마샤 타입의 사람들인가 하는 것을 살펴보았습니다.
우리는 성경에 여러 곳에서 이와 같은 모습의 종교지도자들을 만날 수 있습니다.

아합 왕 때 남왕국 유다와 북왕국 이스라엘이 연합해서 아람을 치려고 했습니다.
왕은 선지자 사백 명쯤을 모아 이 싸움을 할까, 말까 물었습니다.
그들은 한 목소리로  올라가서 싸우라고 했습니다.
그 가운데는 철로 뿔을 만들어서 ‘하나님이 이것으로 아람 사람들을 찔러 진멸하라고 하십니다.’ 하는 선지자도 있었습니다.  요즘 말로 하면 퍼포먼스를 한 것입니다.
이 사백 명의 선지자들도 아마샤와 같은 사람들입니다.
오직 한 사람, 미가야만이 이 선지자들은 거짓 영을 받아 이런 말을 한다고 바른 말을 하다가 옥에 갇힙니다.
미가야는 하나님의 뜻을 정확하게 분별할 줄 아는 사람이었습니다.
왕은 사백 명 선지자들의 거짓 예언에 따라 출전했다가 비참하게 죽었습니다.
아모스보다 150년 쯤 뒤에 예언활동을 한 예레미야는 바벨론에게 항복하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라고 외치다가 심한 고난을 겪습니다.
그래서 예레미야의 별명이 ‘고난의 예언자’입니다.
예레미야를 괴롭히는데 앞장선 사람들이 바로 당시의 종교지도자들이었습니다.
성전 총감독인 바스홀이라는 사람은 예레미야를 때리고 성전 문 위층에 예레미야를 목에 씌우는 나무 고랑으로 묶어 두었습니다(렘20: 3).
또 다른 바스홀이라는 제사장이 있었는데 이 사람은 예레미야를 잡아 감옥 뜰에 있는 진창 구덩이에 던지는 일에 앞장섰습니다(렘 38: 1~6).
예레미야는 자기의 예언을 효과적으로 전하기 위해 멍에를 메고 나타나서 이와 같이 바벨론 왕의 멍에를 메야 한다고 했습니다.
하나냐라는 선지자가 예레미야의 목에서 멍에를 빼앗아 꺾었습니다.
그리고 예레미야의 예언은 사실이 아니라고 했습니다(렘28: 1~17).
두 바스홀, 하나냐, 모두 아마샤와 같은 계열의 거짓 종교지도자들입니다.

신약성경에서 예수님을 십자가에 다는데 앞장섰던 바리새인들, 사두개인들, 서기관들도 마찬가지입니다.

아마샤 타입의 같은 거짓 종교지도자들은 교회의 역사에도 많이 찾아볼 수 있습니다.
중세에 교회는 세상 권력 위에 있었습니다.
이 때 교회는 심하게 타락하고 백성들을 잘못된 길로 이끌고 갔습니다.
위클리프, 후스, 이런 선구자들이 일어나서 바른 진리를 전했습니다.
후스는 화형을 당했습니다.
위클리프는 보호해 주는 사람들이 있어서 세상을 떠날 때는 안전했습니다.
얼마의 시간이 흐른 뒤 위클리프를 보호해 주던 사람들이 사라지자 그의 무덤은 파헤쳐지고 유골은 불태워 져서 가루가 되어서 강에 뿌려졌습니다.
이런 일을 한 당시의 종교지도자들도 아마샤의 전통을 이어 받은 사람들입니다.
마르틴 루터가 종교개혁운동을 할 때 루터를 조롱하고, 파문한 지도자들도 마찬가지입니다.

아마샤 타입의 종교 지도자들은 우리나라 교회의 역사에서도 많이 찾을 수 있습니다.
일제 때 우리나라의 많은 종교지도자들이 변절을 하고 앞장서서 일본에 협력했습니다.
그들은 일제에 굴복하지 않고 신사참배를 거부하는 양심적인 목사님들을 파문하고 교회에서 축출했습니다.
북한에 1945년 공산정권이 들어섰을 때 그들은 조선기독교도연맹이라는 단체를 만들어서 교회가 공산정권에 협력하도록 하는 일을 하게 했습니다.
조선기독교도연맹에 앞장섰던 분들도 마찬가지입니다.
여기에 관한 중요한 논문을 하나 쓰면서 잘 조사해 보니까 조선기독교도연맹에 앞장섰던 교회 지도자들 가운데 많은 분들이 일제 때 친일을 한 분들입니다.

아마샤 타입의 종교지도자들은 오늘날에도 많이 찾아볼 수 있습니다.
종교지도자가 하는 중요한 일 가운데 하나가 하나님이 말씀을 선포하는 것인데, 설교인데 오늘 우리에게는 아마샤 타입의 설교와 아모스 타입의 설교를 분별하는 지혜가 필요합니다.

먼저, 그 지도자, 그 설교의 중심에 무엇이 있는가, 살펴야합니다.
그 지도자, 그 설교가 무엇을 따르고 무엇에 잡혀 있는가, 살펴야합니다.

오늘 본문에서 아모스가 한 말을 살펴보세요.

나는 선지자가 아니며 선지자의 아들도 아니라 나는 목자요 뽕나무를 재배하는 자로서 양 떼를 따를 때에 여호와께서 나를 데려다가 여호와께서 내게 이르시기를 가서 내 백성 이스라엘에게 예언하라 하셨나니 이제 너는 여호와의 말씀을 들을지니라 네가 이르기를 이스라엘에 대하여 예언하지 말며 이삭의 집을 향하여 경고하지 말라 하므로 여호와께서 이와 같이 말씀하시기를 네 아내는  성읍 가운데서 창녀가 될 것이요 네 자녀들은 칼에 엎드려지며 네 땅은 측량하여 나누어질 것이며  너는 더러운 땅에서 죽을 것이요 이스라엘은 반드시 사로잡혀 그의 땅에서 떠나리라 하셨느니라(암7: 14b~17)

여호와란 말이 네 번 나옵니다.
여호와에서 시작해서 여호와로 끝난다고 할 수 있습니다.
아마샤는 왕 중심, 아모스는 여호와 중심이었습니다.

아모스는 “여호와께서 나를 데려다가”라고 했습니다.
이것은 “여호와께 잡혀서”라는 뜻입니다.
「공동번역」은 이 부분을 “나는 양떼를 몰고 다니다가 야훼께 잡힌 사람이다.”라고 번역했고, 「새번역」은 “그러나 주님께서 나를 양떼를 몰던 곳에서 붙잡아 내셔서 주님의 백성 이스라엘에게로 가서 예언하라고 명하셨소.”라고 번역했습니다.
아모스는 하나님께 잡힌 예언자였습니다.
사명에 잡힌 예언자였습니다.

요즘 청년들의 사랑을 받고 있는 복음성가 가운데 “오직 주의 사랑에 매여”라는 것이 있습니다. 이런 가사인데요,

오직 주의 사랑에 매여 내 영 기뻐 노래합니다.
이 소망의 언덕 기쁨의 땅에서 주께 사랑 드립니다.
오직 주의 임재 안에 갇혀 내 영 기뻐 찬양합니다.
이 소명의 언덕 거룩한 땅에서 주께 경배 드립니다.
주께서 주신 모든 은혜 나는 말할 수 없네
내 영혼 즐거이 주 따르렵니다 주께 내 삶 드립니다.

아모스는 오직 여호와 하나님의 부름에 매인 사람이었습니다.
하나님이 말씀하시면 나아가고, 하나님의 뜻이 아니면 멈춰서고, 하나님 이끄시는 대로 순종하며 산 사람이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연약한 자기, 목자이면서 뽕나무를 재배하던 평범한 소시민인 자기를 통해서 일하시는 것을 감사하면서 따른 사람이었습니다.

지금 인기를 중요하게 여기는 설교자들이 있습니다.
인기를 끌고 유지하려면 성도들이 듣기 좋은 이야기만 골라 하게 됩니다.
성도들의 관심을 끌기 위해 여러 가지 방법을 동원합니다.
성도들을 될 수 있는 대로 웃기려고 하는 것도 그 가운데 하나입니다.
설교에 유머가 들어가는 것은 좋은 일입니다.
지금 저희 교회에서 알파코스라는 전도와 양육 시스템을 실시하기 위해서 여러 가지 준비를 하고 있습니다.
저도 강습을 받았고 교역자들이 돌아가면서 강습을 받고 있습니다.
감리교 신문인 「기독교타임즈」 이번 호에 알파코스에 대한 전면 기사를 실었는데 ‘감리교회에 더욱 적합한 알파 코스’라는 제목의 기사도 있었습니다. 
이 알파코스는 모임을 진행하는데 모임의 한 순서로 유머를 반드시 넣도록 하고 있습니다.
유머는 그만큼 필요한 것입니다.
그러나 말씀 속에 들어가는 유머는 격조가 있어야 합니다.
그리고 말씀을 돕는 것이어야 합니다.
듣고 난 다음에 그 유머 대신에 그 유머를 통해 얻은 교훈이 살아남아야 합니다.
그런데 대중의 환심을 사기 위해 코미디와 같은 기법을 사용하는 것, 그것도 천박한 코미디를 계속해서 사용하는 것은 바른 일이 절대로 아닙니다.
유머와 코미디는 다릅니다.
그저 웃기고 즐겁게 만드는 설교를 대하면 ‘아, 여러 형태의 설교 가운데 이런 설교도 하나, 둘 필요한가 보구나!’ 하세요.
그것이 표준이 되어서는 안 됩니다.
‘왜 다른 목사님들을 이렇게 하지 못할까?’ 해서는 결코 안 됩니다.

아마샤 타입의 종교지도자들의 첫 번째 특징은 권력과 가까웠다는 것입니다.
그들은 권력 잡은 자들의 비위를 맞추고, 권력 잡은 사람들이 듣기 좋은 이야기를 했습니다. 권력 잡은 사람들이 하는 일이 옳고, 우리는 그들을 따라야 한다는 메시지를 선포했습니다.
아마샤 타입의 종교 지도자들은 그에 따라 안정된 지위와 많은 혜택을 받았을 것입니다.
우리나라에서도 권위주의 정권들이 다스리고 있을 때 정부와 가까이 하면서 정부로부터 여러 가지 편의를 제공 받던 교회지도자들도 있었습니다.

대중인기에 너무 집착하는 것은 아지 못하는 사이에 자신이 새로운 형태의 권력에 굴종하는 것이 됩니다.
지금은 대중이 많은 권력을 가지고 있기 때문입니다.
피풀 파워가 강한 영향력을 행사하고 시민단체들의 발언권이 큽니다.
무슨 일이 일어나면 ‘네티즌들은 무엇이라고 말하나?’ 살피게 됩니다.
교회도 예외는 아닙니다.
바로 이 대중들의 인기를 끌고, 환심을 사고, 지지를 받는 일에 몰두해 있는 설교자들, 교회 지도자들은 권력을 추종하는, 아마샤 타입의 전통을 이어 받고 있는 것입니다.
교회는 그 시대 사람들의 앞에 서서 그 시대 사람들을 바른 방향으로 끌고 가야 하는 책임이 있습니다.
대중인기를 중요하게 생각하다보면 오히려 그 시대 사람들의 뒤에서 그 시대 사람들에 끌려가게 됩니다.
이것은 아주 비극적인 모습입니다.

설교자에게는 설교자가 지녀야할, 그리고 지켜야 할 품위가 있습니다.
대중의 인기를 얻기 위해 이 품위를 저버리는 것도 아마샤 타입의 설교자들이 흔히 쓰는 방법입니다.
이런 설교일수록 박수를 받는다면 한국교회의 강단은 큰 위기를 만난 것입니다.

우리는 교회와 선교 매스컴에서 수없이 많은 설교를 대하고 있습니다.
설교는 모두가 다 유익한 것입니다.
설교에는 설교자가 영적으로, 정신적으로, 육신적으로 최선을 다 한 준비가 숨어 있습니다.
그래도 그 가운데에서 어떤 설교가 좋은 설교인가 분별하고 싶으면 한 번 필기구를 마련하고서 그 설교의 요점, 심령에 와 닿고 심령을 찌르는 부분들을 메모해 보시라고 권하고 싶습니다.
그것이 부담스러우면 그냥 마음속으로 메모하셔도 좋습니다.
그 때 많은 것이 메모되는 설교가  좋은 설교입니다.
이미 대개 알고 있는 일이지만 저는 부목사님들이 설교할 때 그것을 메모합니다.
그 이유는 세 가지입니다.
하나는 제가 그 예배를 정리하는 기도를 해야 하는데 그 날 설교의 요점을 기도를 통해서 다시 한 번 전달하기 위해서입니다.
하나는 저희 교회에서 행해지는 설교들은 그 원고가 거의 모두 홈페이지에 올려 집니다.
홈페이지에 올리기 전에 그 원고들을 살피게 됩니다.
미리 내용을 파악해 두면 그 작업을 하기 쉽기 때문입니다.
또 하나 이유는 양해하세요, 제가 졸지 않기 위해서입니다.
목사생활의  애로 가운데 하나가 수면이 부족한 것입니다.
이런 일을 늘 하고 있기 때문에 체험을 통해 자신 있게 말할 수 있는데 많은 것을 메모할 수 있는 설교가 유익한 설교입니다.
이런 작업을 몇 번 해 보시면 인기 있는 설교자의 설교, 시청률이 아주 높은 것으로 알려진 설교자의 설교, 제스처가 요란한 설교자의 설교들 가운데서 메모할 것이 별로 없는 경우를 발견하고 놀라게 되는 일이 아주 많을 것입니다.
얼마나 많은 것을 메모할 수 있느냐 하는 것은 사실은 그 날 나의 영적인 갈급함과도 관계가 있습니다.
내가 영적으로 갈급하면 평범해 보이는 설교에서도 많은 것을 메모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그런 설교들 가운데는 영적으로 갈급하더라도 별로 메모할 것이 없는 경우가 많습니다.

말씀의 초점이 예수님께 있지 않은 설교 역시 경계해야 합니다.
오늘날, 종교지도자의 관심과 초점은 예수 그리스도에 있어야 합니다.
이것이 경건이고, 이것이 영성입니다.

바울 사도는 빌립보서 1장 18절에서

그러면 무엇이냐 겉치레로 하나 참으로 하나 무슨 방도로 하든지 전파되는 것은 그리스도니 이로써 나는 기뻐하고 또한 기뻐하리라

라고 하였습니다.
“무슨 방도로 하든지 전파되는 것은 그리스도” 이 말씀은 설교에서 특히 적용되어야할 원칙입니다.

황군벽(黃君壁)이라고 폭포를 잘 그리는 것으로 유명한 대만의 화가 한 분이 한국을 방문했습니다.
이 사람이 어느 미술대학을 방문해서 사람들 앞에서 폭포그림을 그립니다.
사람들은 그가 언제 폭포를 그리나 숨을 죽이고 지켜보았습니다.
그런데 이 화가는 폭포는 그리지 않고 산을 그리고, 나무를 그리고, 바위를 그리고 새를 그렸습니다.
사람들은 기대에 어긋난다는 듯이 서로 눈짓을 했습니다.
그런데 그림이 완성되었을 때 지금까지 그린 것들 사이로 웅장한 폭포가 드러났습니다.
사람들은 ‘아-’ 하고 탄성을 발했습니다.
설교도 그렇습니다.
이것저것, 많은 것을 이야기 합니다.
그것들을 통해서 예수 그리스도, 그리고 그의 십자가가 선명하게 드러나야 합니다.
실컷 웃기고, 흥미 있는 세상 이야기 하다가 끝나고 마는 것은 바른 설교가 아닙니다.

재미있어도 예수님이 없는 설교는 가짜입니다.
재미없어도 예수님이 있는 설교가 진짜입니다.

예수님이 있다는 것은 꼭 예수님이라는 말이  많이 나와야 한다는 뜻이 아닙니다.
예수님이라는 말이 한 번도 나오지 않아도 예수님의 향기, 예수님의 가르침이 진하게 배어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성도 여러분, 아마샤 타입과 아모스 타입을 구별하는 지혜를 가지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아모스 타입의 지도자에게 ‘아멘!’ 하는 용기를 가지시기 바랍니다.

지금 참 많은 사람들이 아마샤 타입에게 박수를 보내고 ‘아멘!’ 하고 있습니다.
지금은 좀 뜸한 것 같은데 가끔 불건전한 집단이 잠실 실내체육관에서 집회를 여는 일들이 있습니다.
거기 왜 그렇게 많이들 몰려가는지 이해가 되지 않습니다.
그리고 염려가 됩니다.
교리, 교육배경, 도덕적인 면, 여러 면에서 허점이 많고 문제가 많은 것으로 밝혀진 인사가  서는 강단에 그렇게 많은 사람들이 몰리는 현상이 과연 건전한 것인가, 의문을 갖게 됩니다.

성도 여러분, 또 설교자가 아모스로 출발했다가 아마샤로 변하는 일이 없도록 기도하며 지키셔야 합니다.
신학교 입학할 때는 누구나 아모스입니다.
젊은이들은 예언자들 가운데에서도 아모스를 특히 좋아합니다.
졸업할 때도 아직 아모스입니다.
예전에는 신학교에 이런 농담이 있었습니다.
‘1학년 때는 누구나 목사이고, 2학년 때는 장로이고, 3학년 때는 평신도이고, 졸업할 때는 무신론자가 된다.’
그러나 그것은 신앙과 신학의 관계에 대한 이해가 미숙할 때의 이야기입니다.
이제는 그런 것은 많이 극복되었습니다.
신학은 신앙을 위해 봉사해야 하며 신앙에는 학문적인 체계성도 필요합니다.
목사 안수 받을 때 다시 한 번 아모스가 됩니다.
그런데 지도자 생활을 오래하다 보면 자기도 모르게 인기에 관심을 갖게 됩니다.
교권에 집착하게 됩니다.
그 때문에 메시지가 변질됩니다.
이런 일이 없도록 지켜야 합니다.

나 자신이 아모스로 출발했다가 아마샤로 끝나는 일이 없어야 합니다.

‘목사님, 오늘 설교가 왜 그렇게 재미가 없었습니까? 왜 내가 듣기 싫은 소리만 그렇게 많이 하셨습니까?’
이것은 바른 평가가 아닙니다.
오늘 설교에 하나님이 계시지 않고 예수님이 계시지 않았다고 여겨지면 그것을 말해야합니다.

성도 여러분, 무엇보다도 목양의 강단이 아마샤의 강단이 아니라 아모스의 강단으로 굳게 서 가도록 기도하시기 바랍니다.
그래야 이 교회가 경건의 모범을 보이는 교회가 될 수 있습니다.
그래야 북한선교를 바로 할 수 있습니다.
선교라는 것은 바른 복음을 전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야 이 교회가 기독교문화라는 맑은 샘물을 이 세상에 보낼 수 있습니다.

이제 말씀을 맺습니다.

아마샤 타입과 아모스 타입을 분별하는 지혜를 갖고 아모스 타입의 메시지에 ‘아멘!’하면서 따르는 여러분이 되고 제가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유관지 목사)

이런 글도 찾아보세요!

추천인 1

공유

facebooktwitterpinterestbandkakao story
퍼머링크

댓글 0

권한이 없습니다. 로그인

신고

"님의 댓글"

이 댓글을 신고 하시겠습니까?

삭제

"님의 댓글"

이 댓글을 삭제하시겠습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