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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소망을 가지는 교인 (롬 1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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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엇이든지 전에 기록한 바'는 하나님의 말씀 곧 '성경'을 가리킨다. 성경은 성도로 하여금 인내로 또는 성경의 안위로 소망을 가지게 합니다. 성경이 가르치는 진정한 목적은 영생에 대한 위대한 소망을 갖는데 있습니다

(요 5:39) 너희가 성경에서 영생을 얻는 줄 생각하고 성경을 상고하거니와 이 성경이 곧 내게 대하여 증거하는 것이로다
영생에 대한 소망을 위해서 '인내'와 '성경의 안위'가 필요함을 역설합니다. 이 두 가지 요소가 소망과 밀접한 연관을 맺는 것은 인내가 영광스런 영생으로 가는 과정에서 반드시 있어야 할 요소라면, 성경의 안위는 그러한 소망을 얻을 수 있도록 확신을 주기 때문입니다(E.F. Harrison).

성경은 과거와 현재 그리고 장래의 모든 성도들을 교훈하기 위해 기록되었다
(딤후3:16,17)모든 성경은 하나님의 감동으로 된 것으로 교훈과 책망과 바르게 함과 의로 교육하기에 유익하니  이는 하나님의 사람으로 온전케 하며 모든 선한 일을 행하기에 온전케 하려 함이니라
특히 구약성경이 기록된 목적을 밝히는데 구약성경은 우리에게 교훈을 주기 위해서 기록된 것이기 때문에 우리는 성경을 통하여서만이 안위를 얻게 괴고 소망을 갖게 된다는 것입니다.

  바울은 성경의 특수한 성격을 성도에게 상기시킵니다.
  인내입니다. 이는 고난을 견디는 인내를 말합니다.(반즈'(Barnes) 사실 진실한 성도에게는 반드시 고난이 따릅니다. 고난이 따르지 않는 성도는 올바른 성도가 아닙니다. 그렇기 때문에 바울은 종종 성도가 당하는 고난을 말하며 자신도 엄청난 고난 가운데 있음을 밝혔는데, 이 고난을 견뎌낼 수 있는 힘, 즉 인내는 성경 말씀을 통해서만 주어지게 된다는 것입니다.

  안위입니다. 이 안위는 원어에서 여러 가지로 번역이 가능하나 여기서는 '권면'이나 '권고'라는 의미보다는 '위로'라는 뜻으로 해석하는 것이 전자의 '인내'라는 표현과도 상통한다 하겠습니다. 그래서 '칼빈'(Calvin)은 위로를 통해서 하나님에 대한 소망을 갖는 자만이 인내할 수 있으며, 이 위로 역시 인내와 마찬가지로 성경을 통해서만 가능하다고 말합니다.

  바울 사도는 성경의 소망을 갖는데 유익함을 강조합니다.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것이 성도의 생애의 최고의 목표라고 한다면 그 방법은 성경의 교훈을 따르는 것입니다. 성경은 곧 하나님의 말씀이기 때문입니다. 바울 사도는 '무엇이든지 전에 기록한 바는 우리의 교훈을 위하여 기록된 것이니'라고 하였습니다. 여기서 '전에 기록한바'는 구약성경을 의미합니다. 그런데 지금 우리에게는 신약성경까지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더욱 성경의 유익성을 재발견하며 성경을 가까이하여 소망을 가지고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아름다운 성도의 생애를 살아야 하겠습니다.
교육하고 선교하며 봉사하며 소망으로 인내하며 소망으로 즐거워 하되 소망을 하나님께 두고 소망의 풍성함에 이르고 소망을 움직이지 않고 소망을 가지는 교인이 되자는 목표가 있습니다.

  성경 교훈의 유익함으로 소망을 가지는 교인
성경은 구원의 길을 가르쳐 줍니다. 요한 사도는 성경이 기록된 목적을 요약하여 말씀했습니다. '오직 이것을 기록함은 너희로 예수께서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임을 믿게 하려 함이요 또 너희로 믿고 그 이름을 힘입어 생명을 얻게 하려 함이니라'(요 20:31).

성경은 그 전체를 통하여, 예수는 그리스도요 살아 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믿게 합니다. 그래서 궁극적으로는 영생을 얻게 합니다. 성경의 소중함은 본질적으로 여기에 있습니다. 성경을 접하는 자마다 영생으로 인도됩니다. 성경을 접하는 자마다 진리를 만나게 되며 자유함과 구원함을 얻습니다.

  하나님의 사람으로 양육합니다. 바울 사도는 디모데에게 유익한 훈계를 했습니다. '또한 네가 청년의 정욕을 피하고 주를 깨끗한 마음으로 부르는 자들과 함께 의의 믿음과 사랑과 화평을 좇으라'(딤후 2:22).
자신을 억제키 어려운 인생이 본성으로 믿음과 사랑과 화평을 좇아 살기는 어려운 일입니다. 그것은 무슨 사상이나 교훈으로 되는 것이 아닙니다. 이에 바울 사도는 디모데후서에서 다시 이렇게 깨우쳐 주었습니다. '모든 성경은 하나님의 감동으로 된 것으로 교훈과 책망과 바르게 함과 의로 교육하기에 유익하니'(딤후 3:16).

진정한 교훈은 하나님의 말씀에서 위대한 힘을 발휘합니다. 책망도 하나님의 말씀으로 할 때 감화력이 있습니다. 사람을 바른길로 인도하는 위력도 성경인 하나님의 말씀에 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능력을 가지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능동적으로 우리를 교육시키며 그리스도 예수의 사람으로 변화시킵니다. 말씀은 교육의 도구가 아닙니다. 교육의 주체이며 주관자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하나의 도구로 여기는 교회 교육이 실패할 수밖에 없는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성경에는 우리를 끝까지 소망으로 인도하는 크나큰 위로의 말씀이 있습니다.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나의 멍에를 메고 내게 배우라 그러면 너희 마음이 쉼을 얻으리니 이는 내 멍에는 쉽고 내 짐은 가벼움이라'(마 11:28-30).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사람, 그래서 지치고 방황하는 사람에게 예수의 이 말씀은 큰 소망이 아닐 수 없습니다. 2000년 전 예수님 시대의 사람들에게만이 아니라 지금 우리에게도 이 말씀은 위로가 되고 그래서 소망을 잃지 않게 합니다. 주님의 이 말씀을 믿고 의지하는 자들에게 실로 평안과 소망이 넘치는 역사가 일어나게 마련입니다. 그의 사랑은 어제나 오늘이나 영원토록 변함이 없습니다. 그의 능력도 변함이 없습니다. 때문에 성경의 안위를 사모하는 자에게는 결코 소망의 등불이 꺼지지 않습니다. 비록 연약하고 수많은 실수가 있는 자라 할지라도 그를 향한 그리스도의 위로와 격려의 말씀은 그치지 않습니다. '상한 갈대를 꺾지 아니하며 꺼져 가는 등불을 끄지 아니하고…'(사42:3). 하나님의 말씀은 믿음이 연약한 자들, 곤고한 자들을 결코 쓰러지게 아니하신다고 안위의 약속을 합니다. 

이필주 목사님은 정동제일교회에서 목회하시던 중, 1919년 3.1운동 때 민족대표 33인 중한 사람으로 참여하였다가 감옥에 갇혔습니다. 난생 처음 독방에 갇힌 목사님은 불안과 공포에 사로잡혔습니다. 그러다가 불안을 떨치기 위해 기도하기 시작했습니다. 사흘째 되는 날, 기도하는 중 음성이 들렸습니다. 하나님을 찾으라!  목사님은 깜짝 놀라 눈을 뜨고 사방을 둘러보았습니다. 그러나 아무 것도 없었습니다.  잘못 들었거니  생각하고 다시 기도를 시작했는데 같은 음성이 다시 들렸습니다. 눈을 떠 보니 역시 아무도 없었습니다. 그리고 기도를 하려고만 하면 그 음성이 들렸습니다. 목사님은 이것이 하나님의 계시인 것으로 깨닫고 성경을 펴서 마태복음 7장 28절,  내가 스스로 온 것이 아니로라, 나를 보내신 이는 참이시니 라는 말씀에 이르러 갑자기 전류에 감전된 것 같은 떨림과 어두운 방 안에 전깃불이환하게 비취는 체험을 하였습니다. 목사님은 감옥에 들어 온 것이 하나님의 뜻이었음을 깨달았고, 기도하는 중 과거 교만했던 것과 목회하면서 교인들을 진심으로 사랑하지 못한 것을 회개하였습니다. 그리고 이후로 얼마를 살더라도 하나님께서 보내는 곳에서 조선 백성을 사랑하며 살겠다는 각오를 다졌습니다. 이필주 목사님에게 서대문 감옥은 천국처럼 느껴졌습니다. 말씀이 주는 힘이 그를 사로잡았던 것입니다.(감옥에서 읽은 성경이야기)

성경의 교훈의 유익함으로 소망을 가지는 모두가 됩시다.

  인내로 소망을 가지는 교인
  '인내'(휘포모네)는 고난당하는 자가 수동적인 자세로 체념에 빠지는 것이 아니라 혹독한 시련과 고난 속에서도 용맹스런 군인처럼 흔들리지 않고 자신의 목적과 신앙에 대한 충성을 지키는 것을 의미합니다(Findlay). 이러한 자세는 약한 자들의 약점을 돌보아 주는 자들에게 필요합니다(Lenski). 약한 자들은 한 두 번 도움을 받는 것으로 바로 서지 못하므로 인내를 가지고 그들을 돌보아 주어 소망을 가지도록 도와 주어야 하는 것입니다.

인간의 삶은 고난과 유혹으로 인하여 쉽게 죄악에 빠지게 됩니다. 그리고 이때에 인간의 본성이 노출됩니다. 자신을 억제하지 못하고 죄에 빠진 인간은 후회와 자학으로 괴로워합니다. 그러나 성경은 하나님의 백성들로 하여금 이 고난과 유혹을 참도록 용기를 북돋아 줍니다. 그래서 그의 소망이 흔들리지 않게 합니다.
야고보 사도는 이렇게 용기를 주고 있습니다. '내 형제들아 너희가 여러 가지 시험을 만나거든 온전히 기쁘게 여기라 이는 너희 믿음의 시련이 인내를 만들어 내는 줄 너희가 앎이라 인내를 온전히 이루라 이는 너희로 온전하고 구비하여 조금도 부족함이 없게 하려 함이라'(약 1:2-4).
덧붙여 성경은 인내의 목적을 분명히 밝혀 주고 있습니다. '온전하고 구비하여 조금도 부족함이 없게 하려 함이라.' 성경은 우리로 소망 있는 사람이 되게 합니다. 환난을 능히 견디는 능력의 사람으로 만들어 줍니다.

빌리 그래함 목사의 친구되는 한 사람은 어려서부터 산간지방에서 자라났고 그 지역의 산에 대하여는 아주 잘 아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런데 하루는 산에 올랐다가 길을 잃었습니다. 미국의 산은 매우 거대하기 때문에 산에서 길을 잃으면 목숨을 잃기 쉬운 것을 잘 아는 그 사람은 당황해졌습니다. 그는 있는 힘을 다하여 노력하는 중에 마침 다행스럽게도 산속 오두막집에서 혼자 살고 있는 노인을 만나 그의 도움으로 살아나왔던 것입니다. 그런데 그 사람은 노인이 남겨준 다음과 같은 말을 결코 잊을 수 없다고 했습니다.  "젊은이, 산에서 길을 잃으면 보통으로 사람들이 얼른 내려가서 동리나 길을 찾아야 겠다고 산 밑으로 내려가는데 그것이 죽는 길이라오. 산중에서 길을 잃으면 반대로 위로 올라 가야만 사는 것이라오. 위로 올라가서 자기의 위치를 발견하고 어디에 길이 있는지, 어떤 쪽에 마을이 있는지 분명히 방향을 확인하고 내려가야만 사는 것이라오." 하나님의 백성된 사람들은 언제나 (마 6:33)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 그리하면 이 모든 것 는 말씀의 원칙을 따라서 살아야 합니다. 문제가 생기고 어려움이 올 때라도 하나님의 은혜와 봉사를 저버리고 세상으로 조급히 내려갈 것이 아니라, 더욱 위를 사모하며 고낭을 참고 인내하며 주님께 가까이 가며 문제와 역경이 전능자의 손에 의해 해결된다는 것을 믿어야 합니다.(위로 올라 가야만 산다-예화뱅크)
고난 중에도 위로 향하며 인내로 소망을 가져야 합니다.

감리교의 창시자 존 웨슬리가 한번은 시골교회를 방문했습니다. 그 교회의 젊은 목사는 가정과 목회문제 때문에 큰 좌절감에 빠져있었습니다. 웨슬리가 이 젊은 목사와 함께 기도를 하고 나오는데 마침 외양간에 소가 있어 바라보니 소는 고개를 한껏 쳐들고 외양간 벽을 올려다보고 있었습니다. 웨슬리는 젊은 목사에게 “저 소가 어째서 고개를 들고 있는지 아십니까?”하고 물었다.웨슬리는 젊은 목사의 어깨에 손을 얹으면서 이렇게 말했습니다.“벽이 있기 때문이죠. 사람도 앞에 벽이 있으면 고개를 들어야 합니다. 눈이 제일 위에 있는 것은 빨리 위로 눈을 들도록 하기 위함입니다.” 어려울 때일수록 믿음을 가져야 합니다. 믿는다는 것은 앞에 벽이 있다고 체념하는 것이 아니라 벽이 있기 때문에 위를 바라다볼 수 있는 것입니다. 성경은 “우리가 소망으로 구원을 얻었나니 보이는 소망이 소망이 아니니 보이는 것을 누가 바라리요. 만일 우리가 보지 못하는 것을 바라면 참음으로 기다릴지니라”(롬 8:24∼25)고 말씀하십니다.(인터넷정보클럽-눈을 들어 높은 곳을 바라보자)
고난이 앞을 가려도 위를 바라보며 인내로 소망을 가l지는 모두가 됩시다.

  안위로 소망을 가지는 교인
'안위'(파라클레시스)는 보통 '권고', '위로'를 뜻합니다. 바울 서신에서 이 단어는 하나님께서 현재와 미래에 하나님을 믿는 성도들에게 구원을 보장해 주시고 확신케 해주심을 의미합니다. 특히 본절에서는 안위가 성경을 통하여 온다는 사실과 이 안위는 우리가 믿음으로 소유한 영생을 소망하는데 힘을 주고 확신을 갖게 해줌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인내가 인간이 수고하는 것이라면 안위는 하나님이 주시는 것입니다.

  설교가 트루엣 박사란 분은 텍사스 주의 달라스 제일 침례교회에서 50년동안 목회했습니다. 그의 설교 중에 한번은 어떤 한 믿지 않는 부부의 갓난아이가 갑자기 죽은 사실에 대해 이야기했습니다. 트루엣 박사가 그 아이의 장례식을 집례했는데, 그 후에 그 부부가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하는 모습을 보게 되었다고 했습니다. 수개월이 지난 후, 또 다른 젊은 여인이 갓난아이를 잃게 되었기에 다시 트루엣 박사는 그녀를 위로하기 위해 찾아갔습니다. 그러나 트루엣 박사의 말은 그녀에게 아무런 위로도 되지 못했습니다. 그런데 아기의 장례식 때, 얼마 전 어린아이를 잃음으로 인해 믿게 됐던 그 어머니가 이 여인에게 다가가 말했습니다. "저는 당신과 똑같은 일을 겪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저를 불러 주셨습니다. 저는 암흑 가운데서 하나님께 나아갔습니다. 그러자 하나님께서는 저를 위로해 주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당신께도 큰 위로를 주실 것입니다." 트루엣 박사는 말하기를, "그 여인은 내가 여러 날, 아니 여러 달 걸려야 할 수 있었을 일을 해냈습니다. 자기와 똑같은 아픔을 겪고 있는 한 어머니를 위해서 말입니다. 이는 그녀 자신이 그 고통의 길을 몸소 걸었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었읍니다"라고 했습니다. 만일 우리가 하나님의 위로를 체험했다면, 우리는 "모든 환난 중에 있는 자들을 능히 위로할" 수 있습니다. 물론 우리가 비슷한 종류의 고난을 경험했다면, 우리는 그들의 입장에 서서 그들의 느낌을 보다 잘 이해 할 수 있을 것이지만, 그렇다고 우리의 경험이 하나님의 위로를 대신할 수는 없습니다. 우리의 과거의 경험이 어떠했든지 간에 하나님의 위로는 그것 자체로 충분하여 결코 부족함이 없는 것입니다.(하나님의 위로-예화뱅크)

  기차를 타고 미국 죠지아 주의 어느 조그마한 도시를 지나면 수선 가게의 벽에다 “슬픔에 잠긴 마음을 제외한 모든 것을 고칠 수 있음”이라고 쓰여진 큰 간판을 볼 수가 있습니다.  이 간판은 약간 과장이 있기는 해도 영리한 선전이었습니다. 이 간판은 사람들에게 중요한 문제를 제시하고 있습니다. 그것은 마치 이렇게 묻는 것 같습니다. “슬픔에 잠긴 사람들을 치료할 방법이 있습니까?”  그렇습니다. 슬픔이 하루하루의 삶을 어둡게 하고 절망 속에 빠지게 할 때, 우리는 어디에서 위로와 구원을 얻어야 합니까? 친구나, 가족이나, 직장 동료의 보편적인 지혜가 효과적인 치료 방법을 제시해 줄 수 있느냐는 것입니다. 우리는 이들에게서 해답을 얻을 수 없다는 사실을 금방 깨닫게 됩니다. 그러나 비탄에 젖은 마음을 달래줄 수 있는 단 한 사람이 있습니다. 그 분은 바로 “자비의 아버지시요. 모든 위로의 하나님” 이십니다. 하나님이 얼마나 우리들을 보살펴 주시는가를 알기 위하여는. 하나님께서 우리들을 위하여 벌써 무엇을 하셨는가를 보기만 하면 됩니다.  큰 슬픔에 잠긴 이 세상에서 살기 위하여 친히 천국의 좋은 환경을 버리시고. 하나님은 그 아들로서 인간의 몸으로 이 세상에 오셨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은 “모든 일에 우리와 한결같이 시험을 받은 자로되 죄는 없으시므로(히4:15) 우리 연약함을 체휼 할 수가 있었습니다. 시편 저자는, 하나님은 상심한 자를 고치시며 저희 상처를 싸매시는도다(시147:3)라고 노래하였습니다. 만일 지금 뼈를 아리는 듯한 슬픔 속에서 몸부림치고 있다면 네 짐을 여호와께 맡겨 버리라 너를 붙드시고 의인의 요동함을 영영히 허락지 아니하시리로다(시55:22) 하신 “모든 위로의 하나님께” 슬픔을 쏟아 놓으면 그 분만이 고통 받는 영혼을 달랠 수 있으며,  상처받은 마음을 낫게 하여 주실 수 있습니다.(위로의 하나님-예화뱅크)

교육하고 선교하고 봉사하며  소망으로 인내하며 소망으로 즐거워하되 소망을 가지는 교인이 되어야 합니다. 성경의 교훈의 유익으로 인내로 안위로 소망을 가지는 모두가 됩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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