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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잃어버린 보석, 찾도록 찾으라 (롬 1: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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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마서는 바울이 로마교회에 보낸 편지입니다.
당시 로마는 세계의 중심지였고 권력, 물질, 지식의 중심지였기에 사람들이 몰려들었습니다.
그러니 그곳에 세워진 로마 교회도 자연스럽게 영향력을 행사했습니다.
그래서 예루살렘 교회 이후, 로마교회와 그리스의 교회, 이 두 교회가 쌍벽을 이루고 있었습니다.
그런 교회의 영적 상태는 어떠했을까요? "하나님의 진노가 불의로 진리를 막는 사람들의 모든 경건치 않음과 불의에 대하여 하늘로 좇아 나타나나니"(롬1:18)

"다만 네 고집과 회개치 아니한 마음을 따라 진노의 날 곧 하나님의 의로우신 판단이 나타나는 그 날에 임한 진노를 네게 쌓는도다"(롬2:5)

저들은 '진노'를 쌓고 있었습니다. 대단히 우려할만한 심각한 상태로 보입니다.
때문에 바울은 이 로마교회를 가슴에 품고 안타까운 마음으로 중보기도를 드릴 수 밖에 없습니다.
"내가 그의 아들의 복음 안에서 내 심령으로 섬기는 하나님이 나의 증인이 되시거니와 항상 내 기도에 쉬지 않고 너희를 말하며"(롬1:9)

그러나 바울은 멀리서 무릎꿇고 기도하는 것만으로 만족할 수 없었습니다.
당장 그곳으로 달려가 직접 저들을 대면하며 하나님의 뜻을 전하고 싶었습니다.
그래서 그는 로마에 가려고 여러 번 시도했습니다. 그런데 이상하게 하나님은 길을 막으셨습니다.
왜 성령께서 바울이 로마로 가려는 길을 막으셨을까요? 그가 로마로 가려고 한 이유는 오직 주의 일을 하기 위해, 주의 몸된 교회를 위한 순수한 열정 때문입니다.

그런데 성령께서 이상하게 길을 막으십니다. 바울의 가는 길을 막으신 이유는 무엇일까요? 바로 로마서 때문입니다.
만일 바울이 자기의 소원대로 로마로 갔다면 로마에서 직접 설교를 했을 것입니다.
그렇다면 설교를 들은 로마교회 성도들은 큰 은혜를 받았을 것입니다.
그러나 '로마서'라는 책은 세상에 존재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바울이 로마서를 쓸 필요를 느끼지 않았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로마서를 슈페너라는 학자는 '성경을 하나의 반지라고 한다면, 로마서는 그 반지의 보석과 같다'고 말할 정도입니다.
그래서 어떤 이는 '성경 65권이 없어도 로마서만 있으면 구원을 얻는데 조금도 지장이 없다'고 까지 말하기도 합니다. 로마서는 보석과 같은 책입니다.
어거스틴이 방황할 때, 로마서를 통해서 주님께 돌아왔습니다.
이 로마서는 16세기 마틴 루터를 종교개혁의 선봉에 서게 하였던 책입니다.
이 로마서는 18세기 요한 웨슬레를 회심시켰던 바로 그 위대한 말씀입니다.
그리고 그 놀라운 위력이 오늘 우리에게까지 이어지고 있습니다.

이 귀한 말씀을 우리에게도 주시기 위해 하나님께서는 바울의 간절한 열망을 묵살하시고, 그의 걸음을 막으셨습니다.
그래서 바울은 하는 수 없이 주후 57년경 고린도에 석달을 머물면서 이 로마서를 쓰게 됩니다.
그리고 그 책을 자매 뵈뵈의 손에 들려 로마교회에 보냅니다. (롬16:1)
바울은 이 편지속에서 당시 로마교회가 안고 있던 영적문제를 한 단어로 지적합니다. "저들에게 열매가 없었다"(13절) 바로 이것입니다.
그러면 이 로마교회가 열매를 맺지 못한 이유가 무엇일까요? 1절을 보면 이 교회가 왜 열매를 맺지 못했는지, 그 이유를 발견할 수 있습니다.
1절은 단순한 편지의 서론이 아닙니다. 발신자가 자신을 소개하는 것도 아닙니다.

바울은 저들이 왜 열매를 맺지 못하고 있는지 그 이유를 지적하고 있습니다.
열매 맺지 못하는 이유는 세 가지로 첫째는 저들은 자신들이 누구인지 정확히 알지 못한 정체성의 문제를 안고 있습니다.
바울은 자신을 '예수 그리스도의 종'이라고 소개하고 있습니다.
세상의 어떤 권세 있는 자의 종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의종이라고 소개합니다.
여기에 종은 노예를 뜻합니다. 당시 노예는 공장의 기계와 다를 바 없는 단지 생산 수단에 불과했습니다.
바울은 자신을 바로 이 노예, 그리스도의 노예라고 소개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당시 로마교회 성도들은 남을 판단하며 살았습니다. 판단하는 것은 남보다 높은 위치에 있다는 것을 뜻합니다. 이것은 종의 모습이 아닙니다.
노예라면 상상할 수도 없는 행동입니다. 저들은 자기 자신이 누구인지를 모르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열매가 없었던 것입니다.

두 번째, 저들이 열매를 맺지 못했던 이유는 복음을 위해 살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바울은 사도로 부르심을 받아, 복음을 위하여 살도록 부르심을 받았습니다.
그러나 로마교회성도들은 복음을 위하여 살지 아니했습니다. 저들은 하나님 보시기에 악한 일만 행하고 있었습니다.
저들이 열매를 맺지 못한 세 번째 결정적 이유는 복음이 무엇인지를 전혀 알지 못하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나는 할 수 있는 대로 로마에 있는 너희에게도 복음 전하기를 원하노라"(롬1:15) 복음이 무엇인지를 알지 못하였기 때문에 '복음'을 부끄러워하기 까지 하였습니다.(16절)
때문에 바울은 처음부터 복음에 대해 열정적으로 설명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로마서에서 바울은 '복음'이라는 단어가 나오자 자제심을 잃고, 주체하지 못하면서 글을 이어가고 있습니다.

원래 당시 편지를 쓰는 양식은 발신자를 먼저 밝히고, 이어서 수신자를 밝힌 후에 인사를 하는 형식이 일반적입니다. (고전1:1~3) 그런데 본문에서는 '복음은...' 하다가 편지의 틀, 양식도 잠시 무시해 버리고선 글을 이어가고 있습니다.
그러다가 7절에 와서 비로소 감정을 정리하고, 수신자를 언급합니다.
그리고 이어서 간단한 인사를 하고 다시 열정적으로 복음을 설명합니다. 처음부터 끝까지 복음을 설명하고 있습니다.
사실 바울이 로마서를 쓴 동기는 로마에 있는 사람들에게 복음을 전하고 싶었는데 가는 길이 막혔기에 글을 사용해서라도 복음을 전하기 위해 로마서를 기록한 것입니다.
이렇게 볼 때 로마교회는 겉으로는 그럴듯 해 보였지만, 가장 귀중한 보석들은 잃어버리고 있었습니다. 정체성, 사명, 복음.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주님이 우리에게 원하시는 열매는 전도의 열매입니다.
복음의 열정을 갖고 사명자로서 전하기를 원하고 계십니다.
오늘 대각성전도집회의 출정식을 하면서 제목을 "잃어버린 보석을 찾도록 찾자"로 잡았습니다.
여기 잃어버린 보석이란 다양한 의미를 함축하고 있습니다.
먼저, 예수 믿는 우리가 잃어버린 보석이 있습니다.
예수를 믿지 않는 자들도 예수라는 보석을 잃어버렸습니다. 굳이 '대 각성'이라고 하는 이유는 로마교회 성도처럼 우리가 먼저 각성해야 할 부분이 있기 때문입니다.
내가 누구인가? 복음이란 과연 무엇인가? 예수는 과연 어떤 분이신가? 나는 과연 열매를 맺고 있는가? 우리가 먼저 각성하여, 잃어버린 보석이 무엇인지를 찾아야겠습니다.
주님이 기뻐하시는 것은 단 한 가지, 열매를 맺는 것입니다. 금년 '대각성집회'를 계기로 우리 모두가 주님이 진정 원하시는 열매를 맺는 나무들이 다 될 수 있기를 바랍니다. (옥성석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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