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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행복과 자유에 이르는 길(마 6:25-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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봄이 오는 소리가 우리 마음에 들립니다. 우리 마음을 열면 꽃망울 부푸는 소리, 나뭇잎새 그 끝을 내미는 소리도 바람결에 우리 귀에 들리기도 합니다. 비가 온 후에 다시 추워진다고 하지만 이미 와 버린 봄의 형상을 지울 수는 없습니다. 이제 우리는 무엇인가 새롭게 봄의 이미지처럼 용수철 같이 튀어나가는 활력적인 기분과 또 활기를 찾아야합니다. 겨우내 무거운 일이나 마음에 근심하고 염려했던 일이 있으면 우리 삶에 있었던 희귀한 모든 그와 같은 모든 염려를 떨쳐버리고 새로운 활기와 소망을 가지고 우리의 봄을 맞이하여야 할 것입니다.

이전에 가졌던 생각들을 다시 한 번 정리해보았습니다. 첫 번째, 건강을 위해 노력하자. 이제는 어떤 형태든 투자가 필요하다. 두 번째, 현재의 상태와 능력을 파악하여 과욕을 버리자. 세 번째, 기본적이고 필수적인 것은 반드시 할 수 있도록 반드시 배열하자. 이제는 지혜가 필요한 때이다. 네 번째, 내게 주어진 각종 여건을 가지고 할 수 있는 최선의 일이 무엇인가 생각하자. 이제는 시간을 아껴야할 때이다. 다섯 번째, 그러나 진취적인 기상을 포기하는 것은 삶을 포기하는 것이니 어떠한 경우든 마음을 꺾지 말자. 언젠가는 흘러가지만 그 순간까지는 최선을 다하자. 이와 같이 제 나름대로 정한 원칙을 다시 한 번 생각해 보았습니다.
우리 삶에는 이처럼 누구든지 자유해지고 행복해지기 위해서 나름대로의 원칙을 세워놓고 또 마음을 다시금 다져보기도 합니다. 오늘 우리는 주님이 우리에게 허락하시는 자유와 참된 행복을 누리기 위해서 어떠한 마음으로 우리에게 주어진 삶의 여정들을 이루어 나갈까 생각을 해봅니다.

오늘 본문은 예수님께서 산상수훈으로 주신 말씀입니다. 산상수훈을 통해서 근본적인 우리 삶에 가장 문제가 되는 의식주에 대한 지나친 염려 그것으로 말미암아 우리 삶이 왜곡될 것을 말씀해주심으로 말미암아 우리는 세상에 있지만 기본적인 의식주 문제를 염려하다 사라지고 날아가는 이와 같은 세상이 아니라 하나님의 은혜 가운데 먼저 그 나라와 그 의를 추구하다 이 모든 것을 더해지는 축복을 누려야할 사람이라는 것을 말씀해 주고 있는 것입니다. 주님께서는 그것을 통해서 공중에 나는 새나 그리고 들판에 있는 꽃이나 그리고 들판에 있는 모든 풀들을 예로 드시면서 그들은 뿌리지도 않고 거두지도 않고 그리고 쌓아두지도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모든 것을 먹고 지내고 있으며, 뿐만 아니라 그들은 옷감을 짜지 않아도 가장 화려한 아름다운 영광보다 더 아름다운 옷을 입고 있음을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염려나 근심걱정 대신에 하나님의 나라와 그 의를 구하는 이 모든 것을 더하시는 하나님의 축복을 추구하면서 살아야 할 의의 백성임을 말씀하고 계신 것입니다. 이제 오늘 우리가 새봄을 맞이하면서 어떻게 우리 삶이 활력적으로 근심과 걱정과 염려대신에 하나님의 은혜가운데 기쁨으로 살아갈 것인가 하는 것에 대해서 생각을 해보고자 합니다.

우리가 오늘 첫 번째 생각을 하는 것은 오늘 본문의 요약으로서 행복과 자유를 얻으려면 지나친 삶에 대한 염려는 버려야 한다는 사실입니다.
우리는 살아가면서 사실 너무 많은 염려와 걱정과 근심을 하니 그것이 문제가 될 때 있습니다. 우리가 왜 염려와 근심 걱정을 할까요? 사실은 죄 때문에 그렇습니다. 죄가 없다면 우리는 쓸데없는 근심이나 염려는 하지 않습니다. 그런데 죄가 있으니 우리는 그것으로 인하여 염려하고 근심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인간이 죄로 말미암아 가지게 되는 것은 두려움입니다. 죄로 말미암아 염려하고 숨게 되고 걱정하고 근심하게 되는 것 바로 두려움의 이유 때문입니다. 아담과 하와가 범죄함으로 말미암아 하나님께 대한 두려운 마음이 들게 되자 그들은 태양 볕 아래에 있지 못하고 하나님의 눈길을 피해보고자 동산 수풀에 숨게 됩니다. 죄는 우리 마음에 근심과 염려를 가져옵니다. 우리 마음속에 걱정을 가져다줍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살아가면서 걱정과 근심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는 죄의 문제를 해결해야 합니다. 특별히 우리의 죄를 해결해 주실 수 있는 분은 예수 그리스도밖에 없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보혈의 공로로 인하여 우리의 영원한 죄가 사하여져 구원의 백성 되었고, 우리 삶에 있어지는 크고 작은 모든 죄들이 하나님의 은혜 가운데 자유함을 얻을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매일매일 이루어지는 삶의 크고 작은 우리의 죄성들로 인한 잘못들도 주님의 은혜로 말미암아 회개하고 씻음 받아 정한 하나님의 은혜의 역사로 전환하게 되는 것을 봅니다.

사실 근심과 걱정이 많은 사람들은 잘못해 놓은 게 많으니 근심과 걱정이 많은 것은 분명합니다. 언젠가 내 잘못과 걱정이 드러나겠지 하는 것이 그 마음에 초조함과 긴장을 줄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죄 때문에 이루어지는 잘못된 것 때문에 이루어지는 이와 같은 근심과 걱정들에 대해서 이제는 주님 앞에 통회하고 회개하고 자복함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은혜로 씻음 받고 새로운 기회를 부여받아 하나님의 역사 속에 주의 뜻을 이루는 은총의 백성이 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더욱이 필요이상 많은 염려를 하게 되는 것은 내가 가지고 있는 혹은 세상에 대한 지나친 집착 때문입니다. 이것 놓으면 어떻게 살지 이것 놓으면 나는 살지 못해 혹시 빼앗길까봐 여러 가지 근심과 걱정을 하게 되는 것입니다.
어리석은 부자의 비유를 압니다. 들판의 곡식이 가득 찼어요. 하나님이 나에게 축복을 하셨구나. 내가 내 창고에 쌓고 그래도 남는 것이 있으면 어려운 사람 도와주어야지 생각하면 근심도 없습니다. 그런데 들판에 곡식이 가득하니까 내 창고가 너무 좁다. 저것을 어떻게 하지. 근심 걱정 한 후에 생각해 낸 것이 창고를 더 짓자 그리고 쌓아두고 평생 먹고 누리고 지내자라는 것입니다. 그가 가진 근심과 걱정은 그에게 좋은 일을 이루지 못했습니다. 하나님이 말씀하십니다. 오늘밤에 그 영혼을 취하면 그 모든 것이 뉘 것이 되겠느냐. 어리석은 부자인 것입니다.

그러니 우리의 삶에 있어서 정말 지나친 집착 필요 없는 욕심 이와 같은 것들이 우리들로 하여금 염려와 근심을 가져오는 것입니다. 더욱이 우리의 염려를 능가할만한 기쁨의 근원을 가지고 있다면 우리는 염려와 근심의 순간에도 우리는 그것을 넘어 은혜가운데 갈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그런 기쁨의 근원을 가지고 있지 못하니까 염려와 기쁨의 우리의 발목이 잡히게 되는 것입니다. 이 세상에 염려가 생겨도 이 세상에 근심이 생겨도 그것을 능가할 수 있는 유일한 기쁨이 무엇입니까? 이 세상에 그 모든 것을 능가할 수 있는 유일한 기쁨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밖에 없음을 우리는 알게 되는 것입니다. 결국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로 인하여 우리 마음에 새로운 소망을 가지게 됨으로 말미암아 염려 속에서도 근심 속에서도 하나님의 은혜와 위로를 받을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근심하는 경우가 있는데 그것은 또 더욱 우리에게 아무런 유익과 효과를 끼치지 못하기 때문에 근심해봐야 소용이 없다는 것입니다.

오늘 27절에 말씀하기를 “너희중에 누가 염려함으로 그 키를 한자나 더할 수 있느냐” 성경에 다른 구절을 보면 “근심 걱정함으로 생명을 한 시간이라도 더 연장할 수 있겠느냐”라고 말씀하시면서 우리에게 필요 없는 근심은 아무 유익이 되지 않는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세상의 모든 문제는 염려하고 근심함으로 해결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은혜로 말미암아 해결되는 것입니다. 차라리 우리는 염려 근심보다는 능력을 가진 주님 앞에 나아가는 것이 더 나은 것입니다.

아담과 하와가 죄를 범한 후에 하나님 앞에 찾아가 “저희가 잘못했습니다. 저희를 용서해 주십시오.” 하면 인류의 역사를 달라졌을 것입니다. 가인과 아벨이 하나님께 제사를 드립니다. 하나님이 아벨의 제사만 받으십니다. 가인은 화가 났어요. 질투가 났습니다. 아벨에게 가서 아벨에 “미안하다. 왜 내 제사를 안 받았는지 네가 좀 알려다오” 하고 그 동생에게 배워서 더 나은 제사를 드렸으면 좋았을 텐데 질투심으로 동생을 죽였던 것입니다. 그러니까 우리의 삶에 있어서 죄를 범하게 되면 이와 같이 또 하나님을 피하고 하나님께 항거하게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가인에게 묻지 않겠습니까? “네 아우가 어디 있느냐?” 그때 가인은 “하나님 내가 내 아우를 지키는 사람입니까? 왜 나에게 물어봅니까?”라고 하나님께 대드는 모습을 보게 됩니다. 우리의 삶에 있어서 분명히 염려와 근심 그리고 우리의 삶에 있어서 여러 가지 그릇된 생각들로 인하여서 우리의 삶이 망가지게 되는 것을 봅니다.

우리는 탕자의 지혜를 압니다. 탕자가 잘한 것 아무것도 없습니다. 아버지를 아주 협박하다시피 해서 그의 재산을 반분 받아서 나갔습니다. 돈도 탕진하는 과정에서 얼마나 나빠졌겠습니까. 탕진하는 과정가운데 사람이 다 망가졌습니다. 그리고 나중에는 돼지 먹는 쥐염 열매를 먹는 정말 처참한 지경가운데 처하게 되었습니다. 그때 탕자가 잘한 것이 한 가지 있었습니다. 아버지의 사랑을 그는 알고 있었습니다. ‘내가 아버지한테 가면 나를 뭐라고 하지 않고 종 가운데 하나로 써주시겠지. 적어도 아버지는 자비로운 분이야.’ 탕자의 아버지에 대한 이와 같은 자비와 사랑에 대한 깨달음과 인식이 탕자의 삶을 다시 변화시켜 그에게 아들의 자리를 찾게 했던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들에게 선을 행할 수 있는 이와 같은 지혜가 없다면 우리는 하나님의 은혜와 자비를 생각할 수 있는 이와 같은 지혜라도 있다면 하나님의 은혜를 실현할 수 있는 것을 봅니다. 염려는 우리는 유익하게 하는 것이 아니라 망가트릴 뿐입니다.

오늘 본문에서 염려의 뜻은 마음을 쪼갠다는 뜻입니다. 여러분 생각해보세요. 여러분 사단이 우리에게 일반적으로 공략하는 방법 중에서 가장 보편적인 방법이 뭔지 압니까? 염려 근심하게 되면 생각이 분산됩니다. 그리고 어떤 생각이 결론을 못내고 밤새 고민 고민하다가 아침 되면 어떤 결론을 내지요? ‘아무것도 모르겠어. 나는 도대체 어떻게 해야 될지 모르겠어. 에이 될 대로 되라.’ 이게 염려하고 근심이 지나친 경우입니다.

여러분 염려하고 근심해서 아주 정확한 좋은 결과에 이르는 경우는 거의 없습니다. 하나님이 인도하시는 생각은 깊은 묵상 끝에 ‘하나님이 나에게 이것을 원하시는 것 같다. 혹시 내가 하나님의 뜻을 잘못 알아서 잘못 했다하더라도 나로서는 전혀 후회가 없고 하나님 감사합니다라는 마음을 가질 것이다’라고 우리들에게 마음의 생각을 정돈시켜주십니다. 기도하면 내 뜻과는 달라도 마음에 결정이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결국 그것이 하나님의 뜻을 이루고 우리 마음에 기쁨을 이루게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염려는 생각을 분산시켜서 결국 아무 결론도 못 내고 결국은 모르겠다 라는 것은 사단이 나를 이끌어 가리라는 말과 같은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염려한다는 것은 우리에게 도움이 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염려하는 것과 준비하고 대책하는 것과는 무엇이 다를까요? 생산적이냐 아니면 아무런 유익이 없는 일인가에 따라 달라집니다. 염려하고 근심하는 것은 어떤 준비나 대책은 세우지 않고 그냥 걱정만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어떤 일을 정확히 분별하고 판단해서 준비하고 대책을 세워서 그 일을 진행해 나가는 것은 전혀 다른 것입니다. 우리는 초조하고 근심하고 염려하는 것뿐 아니라 그것이 우리들에게 유익한 것이 아니라 우리는 하나님 앞에 정확히 판별하고 하나님 앞에 분별을 이루어 우리는 준비하고 대비책을 세워나가고 그것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은혜를 체험하는 것이 우리의 모습이어야 합니다.

우리 잘 아는 무디라고 하는 대 전도자는 이렇게 이야기하였습니다. “염려의 끝은 신앙이고 신앙의 끝은 염려다” 이것은 염려가 마쳐지게 되는 것은 우리가 믿음으로 사는 것이라는 뜻입니다. 그러니까 염려 버리면 믿음으로 살고 믿음 버리면 염려하게 되는 것입니다.

여러분 믿음으로 사시겠습니까? 염려하시며 사시겠습니까? 우리는 믿음으로 살아야 합니다. 염려가 있다면 나는 믿음이 고갈된 상태입니다. 믿음이 충만하면 염려는 우리에게 저기 떨어져 나가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가 믿음이 충만하게 되었을 때 왠지 모르게 염려가 사라지고 용기가 생깁니다. 무엇이든지 시도하려는 의욕이 생기게 됩니다. 그런데 믿음이 땅에 떨어지면 염려 근심이 생기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 못하면 어떻게 하지. 앞으로 큰 어려움이 있을 텐데. 여러분 왜 이런 일이 일어나지요? 본질과 우선권을 파악하지 못해서 그렇습니다. 오늘 성경에서 25절에 뭐라고 말씀하십니까? “목숨이 음식보다 중하고 몸이 의복보다 중하지 아니하냐?” 이 말씀은 우리들에게 본질은 목숨과 몸이라는 뜻입니다. 그러니까 비본질적인 이와 같이 추정되는 음식과 옷 때문에 우리가 걱정을 한다면 그것으로 말미암아 우리의 몸도 상하고 우리의 목숨까지도 잃어버리게 된다면 그것이 무슨 의미가 있겠느냐는 것입니다. 너희는 본질파악을 해라. 쓸데없는 것에 염려하지 말고 너희 본질을 위해서 살라는 말씀입니다. 그러니 우리는 우리 목숨에 가장 중요한 것이 무엇인가를 생각하고 염려하지 않고 그 일을 위하여 달려가고 하나님 나라와 그 의를 구하는 삶을 살아야 되고 우리의 몸에 정말 무엇이 유익한가를 생각해서 내가 의복 때문에 잠자리 때문에 걱정하는 것이 아니라 정말 내 몸에 유익한 것이 무엇인가 하나님의 뜻을 이루며 그 뜻대로 사는 것이 아닌가 생각하며 그것을 이루어야 할 것이라는 것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우리 이런 방법이 있지요. 목표를 정하고 그 목표를 이루기 위해서 어떤 방법을 사용할 것인가 하는 것이 보통 우리에게 바른 길입니다. 그런데 우린 자칫 잘못하면요 내가 어떤 방법을 가지고 있는데 이 방법에 맞는 어떤 일을 무엇일까 생각해서 거꾸로 생각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물론 그렇게 생각할 수 있지만 이런 경우는 자칫 그릇된 목표를 설정하게 되는 경우가 많습니다. 우리는 목표를 결정하고 그 목표를 이룰 수 있는 방법을 선택해야 합니다. 그런데 방법을 선택하고 그 방법을 이룰 수 있는 일이 무엇인가를 선택해서 목표를 정하면 때로는 그 일을 이루어도 그 목표 자체가 그릇된 일일 수 있습니다. 우리에게 있어서 우선권의 문제는 매우 중요합니다. 먼저 하는 일이 과연 옳은가? 늘 말씀드리지만 열심히 잘하는 것보다 더 중요한 것은 옳은 일을 하고 있는가? 하는 것이 문제입니다. 내가 과연 하나님 앞에 정말 바른 염려 근심을 하고 있는가? 아니면 내가 정말 하나님 앞에 정말 올바른 일을 위해서 힘을 쏟고 있는 것인가 하는 것입니다. 내가 먼저 그 나라와 그 의를 위하여 수고하고 애쓰는 것이 옳은 일인가 아니면 내 삶에 있어서 엉뚱하게 수고하고 애쓰지 않아도 되고, 근심하지 않아도 될 일 때문에 내가 없는 것 때문에 고통당하고 있는 것은 아닌가하는 것을 우리는 생각을 해야 합니다.

염려는 결국 믿음이 적어서 하는 것이라고 말씀합니다. 오늘 30절에 “이 믿음이 적은 자들아” 하면서 염려근심에 대해서 꾸짖고 있습니다. 32절을 보면 “이는 다 이방인들이 구하는 것이다”라고 말씀합니다. 우리가 예수 믿으면 무엇인가 달라야 되는데 왜 그들과 똑같이 염려만하고 사느냐는 말씀입니다. 염려걱정 시키면 우리의 삶은 우리가 예상하지 못했던 새로운 삶이 열립니다.

어제 황사가 좀 심했지요. 바깥에 나가보니까 자동차마다 노란 먼지가 쌓이는 것이 좀 마음에 부담이 되었습니다. 밖에 나갔다가 오니 괜히 부석부석하는 것 같았습니다. 깨끗이 씻었더니 좀 마음이 깨끗해지는 것 같아요. 그저 우리 느낌이겠지만 그래도 또 사실도 있겠지요? 우리 마음에 염려와 근심이 들 때 그것을 깨끗이 씻어 내야 합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로 예수 그리스도의 보혈로 우리의 죄를 씻고 지나친 집착을 씻고 세상의 근심과 하지 않아도 될 염려를 씻어낼 때 우리의 마음에 하나님의 믿음의 은혜의 역사가 이루어지게 되는 것입니다. 염려는 우리들에게 도움이 되지 않습니다.

두 번째 삶에 대한 염려에서 해방되어 자유와 행복을 누린다는 것은 우리가 전적인 능력과 하나님의 전적인 능력과 우리를 사랑하셔서 인도하심을 믿는 것입니다.
우리에게 염려와 걱정 근심 사라진다는 것은 내가 예수님을 믿고 확실하게 그의 능력을 믿고 하나님이 나를 보호하고 인도하심을 믿는다는 믿음의 확신을 의미합니다.
오늘 32절을 보니 하나님이 우리에게 무엇이 있어야 될지를 다 아신다고 말씀하셨습니다. 능력있는 사람이 안다라는 것은 그 문제를 해결해 주신다 라는 것을 의미하고 있지 않습니까? 하나님은 세상 만물을 주관하시는 하나님인데 하나님이 내 모든 사정을 알고 계시고 하나님이 내 모든 사정을 안타까이 여기신다면 그것이 하나님이 우리들에게 그 문제를 해결해 주시는 것입니다.

보다 구체적으로 하나님을 신뢰하고 염려를 버리는 것이 무엇입니까? 내가 하나님을 신뢰한다는 외적표현이 무엇입니까? 내가 하나님을 믿고 신뢰한다는 외적표현이 우리 믿음의 사람에게 무엇으로 나타나죠? 하나님께 기도하는 것으로 나타납니다. 나는 염려하고 근심하고 낙심하는 대신에 하나님께 기도하여 그 뜻을 이루리라 믿음의 지경으로 나아가는 것입니다.

누가복음 18장 1절을 보면 “항상 기도하고 낙망치 말아야 될 것을”이라는 것은 무슨 뜻입니까? 기도하면 낙심한다는 뜻입니다. 그러니까 낙심치 말고 기도해야 한다는 뜻이 아닙니까? 우리가 낙심과 낙망과 염려를 극복하기 위해서 하나님께 기도하는 것이 우리 삶의 주가 되어야 합니다.

더욱이 우리가 하나님을 믿고 신뢰한다는 것을 어떻게 표현하죠? 기뻐하기를 힘써야 한다는 것입니다. 빌립보서 4장 4절을 보면 “주안에서 항상 기뻐하라 내가 다시 말하노니 기뻐하라”라고 명령하고 있습니다. 너희에게 권한다가 아니라 명령형입니다. 우리는 슬프고 근심할 수 있는 상태에만 해도 우리에게 큰 축복의 상태가 아닙니까? 여러분 생각해 보세요. 몸이 크게 아픈 사람은 근심하고 염려하는 것조차 귀찮아합니다. 내가 근심하고 염려할 정도가 된다는 것은 내가 그래도 정서적으로 모든 구조가 움직이고 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러니까 염려하고 근심하는 나를 볼 때 ‘아, 나는 축복 받은 상태야, 내가 왜 염려하고 근심하지?’ 하고 생각해야 하는 것입니다. 여러분 생각해 보세요. 선을 행하는데 바쁘면 악을 행할 틈이 없습니다. 기뻐하는데 바쁘면 슬퍼할 틈이 없습니다. 여러분 기쁜 일을 써보세요. 1부터 100까지 쭉 금방 쓰실 거예요. 또 슬픈 일을 써보세요. 1,2,3,4,5… 다 쓸 것입니다. 그런데 그 중에서 어떤 것을 택하느냐에 따라 다릅니다. 우리 삶의 시간은 모든 것을 다 행하고 모든 것을 다 누리고 살 수는 없습니다.

제가 분당에 와서 이렇게 강단에서 말씀을 전한지 벌써 15년이 되었습니다. 어떻게 그렇게 시간이 흘렀을까? 이런 생각이 듭니다. 이제 앞으로 15년이 지나면 저도 제 모든 것을 마쳐야 하지 않을까하는 생각이 듭니다. 정말 우리들에게 주어진 시간이 짧은 것 같습니다. 우리가 좋은 일 다 누리고 나쁜 일 다 누리고 그럴 수 없는 것 같습니다. 시간이 그렇게 없습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무엇을 누릴 것인가? 기쁜 일 누리기도 바쁜데 우리의 시간 다 낭비하시겠습니까? 여러분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것이 기쁨이라면 우리는 그 기쁨을 누리다가 이 세상 가는 것도 우리의 시간이 짧은 것입니다.

우리가 무슨 일에 전력하고 있다는 것 자체가 내 삶의 용기와 소망을 주지 않습니까? 하나님께서 우리들에게 은혜를 주시고 나는 하나님 때문에 기뻐하여 슬퍼할 틈이 없다 이것이 성도의 삶이 되어야 합니다. 어찌 하늘에 해뜨고 비 오고 눈 오고 흐린 날 다 골고루가 아니라 한가지이겠습니까? 여러분 햇빛만 쨍쨍 째면 사막이 되어버립니다. 비만 오면 홍수가 납니다. 여러분 날마다 흐리면 곡식이 되겠습니까? 이 모든 것이 다 한가지로 어우러져 우리에게 기쁨이 되듯이 기쁨과 슬픔이 있을 때 그것을 합하여 기쁨으로 바라볼 때 우리에게 하나님의 은혜를 누릴 수 있는 것입니다. 우리는 어떤 상황 속에서도 우리는 염려 근심대신에 하나님을 기대하고 바라는 것입니다.

여러분 나가다 보시면 에스라 축구단 4번째 승리 이런 비슷한 내용을 보실 수 있으실 텐데 보셨는지 모르겠습니다. 저희 교회 남성도 에스라 축구 선교단이 있는데 몇 백 개의 축구단이 CBS배 축구대회에 많이 참여하는데 거기에서 4차전까지 승리하였습니다. 제가 어제 결혼 주례를 끝내고 와서 그곳에 갔습니다. 잠깐 들려서 기도해드리자, 우리 성도들 열심히 하시니까 목사가 한번 가서 기도해드리면 마음에 기쁘시겠지 하고 제가 잠깐 들려서 기도해드렸습니다. 그리고 제가 교회로 돌아왔습니다. 경기는 2시에 있다고 하셨습니다. 저녁이 되서 잠깐 나가다가 보니 ‘승리! 수원월드컵 경기장에서 경기한다.’라고 쓰여 있더라고요. 그래서 자세히 보니 수원월드컵경기장이 아니라 수원월드컵보조경기장 이렇게 되어 있더라고요. 그리고 제가 또 깜짝 놀랐습니다. 왜냐하면 2시에 경기하는데 그때가 저녁 6시쯤 되었던 것 같은데 어느새 가서 플래카드를 만들어서 인쇄해서 왔을까? 그렇죠? 그새 동작도 빠르구나. 그런데 가만히 생각해보니까 아닌 것 같아요. 축구 끝나고 가서 신청해서 해 오신 것 같지는 않아요. 미리 만들어 놓은 것 같습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이길 것을 확신하면서 미리 만들어 놓은 것 같더라고요. ‘우리 이길 거야. 이거 하나 미리 만들어 놓자.’ 어제 제가 축구장에 갔더니 ‘목사님, 큰일이에요. 저희 교회가 5월 5일에 15주년 체육대회가 있는데 상암 월드컵 경기장에서 결승전을 하는데 그 날이 5월 5일이에요.’ 이렇게 걱정하시는 것입니다. ‘아, 겹쳐도 결승전에 나가야죠.’ 제가 그랬는데 결승전까지는 몇 번을 더 이겨야할지는 잘 모르겠습니다. 그런데 이길지도 질지도 모르는 경기에 플래카드는 먼저 만들어 놓았던 것입니다. 이길 것을 믿고, 그런데 옆에 있던 사람이 이런 말을 할지 모르겠습니다. ‘우리 이길지도 질지도 모르는데 그거 만들어놓고 지면 어떻게 해.’ 뭐라고 대답했을 것 같습니까? ‘걱정하지마. 우리 반드시 이길거야.’ 그리고 또 뭐라고 얘기했겠습니까? ‘지면 그까지 것 버리면 되지, 뭐.’

우리의 삶도 마찬가지가 아닐까 생각됩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이김 주심을 믿고 기뻐하며 모든 것을 준비해 나아가고 살아가는 것입니다. 그리고 어려움이 있으면 어려움이 있는 것이 뭐 대수인가 하고 생각하고 살아가는 것이 우리의 믿음이 아니겠습니까? 우리에게 하나님이 이러저러한 일을 주시지만 근심하고 걱정하고 늘 사는 것 보다 하나님의 은혜 가운데 기쁨으로 사는 것이 우리의 즐거움입니다.

우리 예배 시간 매일 같은 시간에 예배를 드리잖아요. 오늘 혹시 예배 시간 바뀌었어? 지난 주일에 안 나왔는데, 또 달라지는 것 아니야 라고 걱정 안합니다. 우리는 이런 걱정을 기우라고 합니다. 하늘이 무너질 때 걱정하는 것이라 생각합니다. 우리는 하나님이 이제까지 우리를 인도하셨는데 앞으로도 어떻게 인도하실까하고 마음에 기대하고 소망하는 것입니다. 시편 40편을 보면 이제까지 베풀어주신 하나님의 은혜가 너무 많아서 그 수를 손으로 헤아릴 수 없다고 말씀합니다. 이제까지 우리는 많은 어려움을 겪었습니다. 그렇지만 그 어려움 속에서도 하나님이 우리에게 어려운 가운데 구조해주셨기 때문에 우리는 이 자리에 있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어떤 사람은 이렇게 낙심합니다. ‘나 구두가 다 떨어졌어. 그래서 새 구두 하나 사고 싶은데 아, 내 인생을 어떻게 이래. 구두하나 새것 살 수가 없어. 왜 이렇게 어렵지?’ 너무너무 낙심이 되는 것입니다. 그 까짓것이 뭐 중요한 것이라고 구두 한 켤레 사는 것도 내 마음대로 할 수 없다고 괜히 낙심했어요. 그리고 자기 삶을 정말 자괴하면서 스스로 괴로워했습니다. 그런데 갑자기 눈에 띄는 것이 있었는데, 자기가 너무 죄송하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동안 자기 옆에 있는 사람을 이렇게 보니까 다리가 없어요. ‘야, 나는 구두하나 새 것으로 바꾸지 못한다고 괜히 이렇게 낙심하고 있었는데 내 앞에 있는 저분은 다리 없이도 씩씩하게 살아가고 있지 않은가?’ 저분에게 구두라는 것은 아무 의미가 없습니다. 발이 없는데 구두가 무슨 의미가 있겠습니까? 그런데 나는 구두가 헌 것이라 해도 나는 이렇게 건강한 발이 있는데 내가 이렇게 내 인생을 낙심하고 낙망하고 얼마나 부끄러운가? 여러분 인도의 간디라는 사람 알죠? 참 대단한 사람이잖아요. 이 간디라는 사람이 어느 날 기차를 탔습니다. 그는 변호사이기도 하니까 그래서 구두를 신고 양복을 입을 정도로 충분히 유족했던 사람이었습니다. 기차를 탔는데 그만 구두가 벗겨졌습니다. 기차 밖으로 뚝 떨어졌습니다. 사람들이 걱정하고 그러는데 기차는 떠났다 이 말입니다. 거기서 구두 찾으려고 뛰어내릴 수도 없고 사람들이 안타까워합니다. 아, 간디 선생님 구두가 어떻게 하다가 이렇게 떨어졌네요. 기차 타다가 이렇게 됐다 이 말입니다. 그랬더니 간디가 갑자기 자기의 남은 그 발의 구두를 벗어 밖에 던져 버립니다. 사람들은 거기서 더 놀랍니다. 어떻게 갑자기 구두가 떨어졌는데 남은 한 짝 구두까지 벗어서 밖으로 던질까? 우리는 그 이유를 알지 않습니까? 내가 어차피 한 짝 구두 벗겨져서 밖에 떨어졌으니 나는 지금 이 구두를 못 신는데 혹시라도 밖에 가난한 사람이 그 구두 한 짝 주워서 야 구두하나 주웠다고 기뻐하는데 한 짝만 주우면 무슨 소용이 있겠는가? 차라리 어차피 나도 못 신는 것이니까 그냥 밖으로 던져버리면 그 사람이 한 짝 주운 후에 마저 주우면 혹시 가난한 사람이 그 구두라도 신고 싶어 해서 신으면 두 짝 다 있어야 신을 것이 아니냐. 그러니까 어차피 나도 못 신는 것인데 그 사람에게 도움이 되면 되지 않겠는가? 그래서 던진 것입니다.

여러분 우리의 삶이라는 것은 오늘날 내가 어느 날 무엇을 잃었다 해서 그것으로 내 모든 기쁨이 사라지는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내 모든 것을 잃음으로 말미암아 그것이 다른 사람의 기쁨이 될 수 있고 또 내가 있는 것 까지 더 주어서 다른 사람에게 더 큰 기쁨이 되고 나도 다른 사람이게 더 큰 즐거움을 주었다는 기쁨 때문에 더 즐거울 수 있다면 그것은 하나를 잃어버린 것보다 더 큰 하나님의 은혜의 선물을 받을 수 있지 않습니까? 마음이 기쁘고 감사하고 나는 구두하나 잃어버림으로 말미암아 그렇게 낡은 구두라도 하나 필요한 사람에게 줄 수 있다는 마음을 가지면 우리 삶은 얼마나 큰 기쁨이겠습니까? 세상에는 평생 주고 가는 사람이 있고 어떤 사람은 받지 못해서 애쓰다 가는 사람 있습니다. 어떤 사람 평생 근심만 하다가 가는 사람이 있고, 어떤 사람 평생 행복해 하고 감사해하다 가는 사람 있습니다. 살아가면서 왜 어려운 일 없고 왜 기쁜 일이 없겠습니까? 그래도 평생 부족해서 힘들어 하는 사람 있고 평생 기쁨과 감사가 넘쳐서 다른 사람에게 주지 못해서 안타까워하는 사람들도 있다 이 말입니다.

염려와 근심, 지나치게 집착해버리면 우리는 의외로 더 넓은 세계로 다가가지 못합니다. 아름다운 그림이라는 것은 밝은 색만을 쓴 것이 아닙니다. 어두운 색, 밝은 색을 같이 배합해서 그것으로 말미암아 아름다움을 연출한 것입니다. 우리의 삶에 정말 최악의 어려움에 빠졌다고 생각할 때 여러분 이런 생각하면 어떻겠습니까? 내가 이 최악의 어려움에 빠졌는데 내가 이 최악의 어려움을 가장 아름답게 극복해내면 정말 수많은 어려움 가운데 있는 사람이 얼마나 용기를 얻을까? 내가 최악의 상태에서 일어난다면 이것을 통해서 하나님이 얼마나 큰 영광을 받으실까를 생각하면 우리는 오히려 용기와 사명과 마음속에 힘이 나지 않습니까? 요즘 우리 성도님들이 전도하는 것 같습니다. 그런데 교회가면 주차장도 없고 그런데 주차장이 부족한 것이 아니라 거의 없잖아요. 그런데 사실 주변에 민폐를 끼치는 것도 굉장히 죄송한 것 같아요. 그래서 해결하기 위해서 준비도 했지 않습니까? 그런데 지금도 주차장이 거의 없어서 우리 성도들이 굉장히 고생하잖아요. 그런데 저는 그런 얘기하는 분 같으면 안 오셔도 된다고 그래요. 왜냐하면 주차장 없어서 고생하시기 때문에 성도들이 더 강해지는 것 같아요. 여러분 주차하시려면 아주 고생하시잖아요. 삥삥 돌고, 제가 보니까 예배당에 오시는데 30분 늦는 분이 있어요. 이런 분은 30분 늦게 온 사람이 아닙니다. 한 10분 늦었는데 주차하려다가 20분 더 늦어져서 30분 늦은 분입니다. 제가 압니다. 너무 미안해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제가 다 압니다. 물론 안 그렇게 30분 늦은 분도 있는 것을 압니다. 주차를 해야 하니까 평상시보다 20분 빨리 나와야 해요. 그러니까 그 믿음이 얼마나 강해집니까? 20분이나 걸려서 주차했는데 내가 한 말씀이라도 듣고 내가 하나님께 정성을 드리고 가야지 고생해서 왔는데 이런 마음이 더 강해지는 거잖아요. ‘아, 교회가기 싫어.’ 이런 사람 너무 근심하지 마세요. 이렇게 얘기하세요. 올해까지만 시험 안보고 오고 내년부터는 시험봐야 옵니다. 그렇죠? 저희 교회 내년부터는 좌석이 좁아서 올해도 비좁은데 내년부터는 좌석이 더 비좁아서 교인들 시험봐서 뽑아야 합니다. 한 사람 이사가면 대기자 10명 있으면 시험봐서 10대 1정도로 그 중에서 한명 뽑아야 합니다. 여러분 눈에 보이지 않습니까? 저희 교회가 몇 년 내에 예배당을 짓겠습니까? 몇 년 동안은 시험을 봐야 된다니까요. 여러분 굉장히 중요한 자리에 와 있다고요. 그러니 여러분 낙심하지 마세요. 다음 주에 전도 집회인데 저는 전도 하나도 못했는데요. 근심걱정하지 마세요. 그럼 안 해도 되냐고요? 그럼 안 되죠. 해야죠. 그런데 근심걱정하지 마시고 그저 하나님 앞에 맡기고 하면 되는 것입니다. 근심걱정보다 더 중요한 것은 마음에 기쁨을 가지고 하면 되는 것입니다.

저는 늘 그런 생각을 하는데 여러 가지 상태가 나쁜 것은 우리에게 얼마나 기쁘고 당당한 자부심과 용기와 자신감을 줍니까? 저는 늘 그런 생각을 하는데요. 전에 이곳에 비가 뚝뚝 샜는데 얼마나 기쁘고 감사해요. 비가 뚝뚝 새는데도 성도들은 가득 온다는 것이 얼마나 큰 기쁨입니까? 비도 안 새고 예배당 장소도 넓은데 텅텅 비는 것 보다 비가 옴에도 불구하고 이렇게 성도들이 시간마다 꽉꽉 차서 앉았다는 것은 하나님의 축복과 은혜가 여기에 더 임한다는 것을 말씀하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그러니 우리는 얼마나 자신있고 기뻐해요? 여러분 내가 부족하고 결핍이 있다라는 것은 이것은 창피한 일이 아닙니다. 나는 부족하고 결핍속에서도 자신있고 당당하게 살아갈 수 있는 능력이 있다는 뜻이고, 그러므로 우리는 자신감 있고 오히려 더욱더 하나님 앞에 감사할 일이라 이 말입니다. 왜 감사 할 일로 위축이 됩니까? 왜 더 기쁘고 우리가 하나님 앞에서 축복받고 있다는 사실을 가지고 위축이 됩니까? 그럴 필요가 전혀 없습니다. 우리는 하나님 앞에 자신 있고 담대하고 당당하게 살아가는 거죠.

우리의 삶 속에 염려와 근심이 있을 때, 이것이 내가 염려할 것인가? 기뻐하고 감사할 것인가? 생각하면 우리는 의외로 염려할 것이 아니라 기쁘고 감사할 것 괜히 염려하고 있는 것을 우리는 발견하게 됩니다. 하나님의 전적인 인도하심과 섭리하심을 믿을진대 우리는 염려대신 평안과 기쁨을 느낄 수 있습니다. 자연 만물을 운행하시는 하나님의 역사하심을 볼 때 우리는 언제나 하나님의 능력을 기대합니다.

마지막 세 번째 입니다. 삶의 염려보다 먼저 “하나님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할 때 우리의 필요한 모든 것을 더해주시는 하나님의 은총을 체험하게 됩니다.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 그리하면 이 모든 것을 더하시리라” 하나님을 의뢰하는 것은 하나님 나라를 구하는 것입니다. 그 의미는 먼저 무엇보다도 하나님이 원하시는 일을 우선적으로 처리하는 것입니다. 우리의 영적인 성숙도를 측정하는 가장 중요한 것은 우선권을 어떻게 설정하느냐, 두 번째는 어떻게 시간을 활용하느냐? 하는 것입니다. 영적으로 성숙한 사람은 시간을 잘 낭비하지 않고 활용합니다. 그리고 우선권의 문제가 해결된 것입니다. 우리 인생에 모든 일을 다 할 수는 없습니다. 시간이 제한되어 있습니다. 내가 몇 가지하다가는 것이라 이 말입니다. 그런데 그 몇 가지를 무엇으로 정할 것인가? 기쁜 일, 감사한 일, 할 것인가? 늘 속상한 일 하다가 갈 것인가? 하는 것이지요. 우리들의 삶에 있어서 내 뜻은 사실 중요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뜻이 우리들에게 더욱 중요하지요. 내가 ‘나는 난데 내 뜻이 중요하지 않습니까?’ 그러나 우리는 내 뜻을 통해서 결국 하나님의 뜻을 이루게 되니까요. 그러니까 지혜로운 사람은 먼저 하나님의 뜻이 무엇인지를 생각하고 그것을 이루는 것이 우리의 삶이 될 때 날마다 하나님의 기쁨 속에 살아가는 것이죠.

사람들은 영적 요구나 도전이 있을 때 쉽게 응답하지 못합니다. 부담스럽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그것을 부담으로 여기지 않고 하나님의 초청으로 여길 때 그는 삶의 큰 진보를 보게 됩니다. 제가 교회에서 봉사하시는 것을 보니까 봉사하는 것 사실 어렵잖아요, 일주일 내내 세상에서 일하는 데 이렇게 주일날 나와서 또 시간대서 봉사하는 것 쉽지 않습니다. 그런데 봉사하는 것은 다 어렵습니다. 쉽지 않습니다. 그런데 그 가운데서 또 이렇게 좀 더 어려운 봉사들이 있겠죠. 지난번에 제가 교회에 이렇게 소식지를 보니까 우리 식당봉사위원회가 나왔던데요. 식당 봉사도 어려운 일중에 하나이겠죠? 거기 보니까 여자분들이 앞에 쭉 서고 남자 분들이 쭉 섰습니다. 저희교회 식당 봉사는 남자분들이 더 많은 것 같습니다. 그래서 제가 이 교회 남자들은 꽤 괜찮다 이렇게 생각했습니다. 제가 보니까 참 감사하더라고요. 제가 전에 식당봉사위원들과 같이 식사를 했거든요. 그리고 위로하고 말씀드렸는데 어려운 것이 있으면 얘기하세요, 그랬더니 보통 봉사하시는 분들은 어려운 얘기 잘 안하시잖아요. 괜찮아요. 제가 들어야 할 필요가 있으니 어려운 것을 얘기하세요. 그랬더니 목사 앞에서는 순한 마음이 드셔서 몇 가지 얘기하시는데 어려운 것을 얘기하는 것이 아니라 지내면서 느꼈던 경험담들을 얘기하시더라고요. 무슨 얘기를 하시냐하면 이분들 다 직장다니시는 분들인데 주일날 아침부터 나와서 봉사를 하시는데 이거 부엌에서 일하는 것이 이렇게 힘든 일인 줄을 정말 몰랐다고 그래요. 안 해보면 몰라요. 그래서 뭐라고 얘기 하냐하면 아침에서 저녁까지 식당에서 봉사하고 설거지하고 나르고 닦고 이런 일들을 주로 하잖아요. 음식은 잘 못하니까 주로 보조적으로 도와주시는 일을 하잖아요. 앞치마 입고. 그런데 저녁에 집에 가면 그때부터 축 늘어져서 자서 아침에 출근할 때까지 정신없이 잔다고 그러시더라고요. 그리고 어떤 분이 하루 종일 남자들 장갑 안 끼고 맨손으로 많이 하시는데 손이 쪼글쪼글해지는 것이 월요일에도 안 풀어진다고 그래요. 이 쪼글쪼글 해지는 것이 물에 오래 불어서 그런 것인데 월요일에도 이것이 안 물어진다고 그래요. 그래서 저는 속으로 장갑 끼고 하셔야할텐데 그런데 장갑이 불편해서 맨손으로 하는 분들이 많아서 그러더라고요, 정말 자매님들 대단하시다고 그래요. 그러면서 남자들도 이렇게 힘이 드는데 그것을 어떻게들 하셨는지 모르겠다고 그러면서 하시는 말씀이 절대 그만두지 못합니다. 그런 말씀을 하시더라고요, 절대 그만 두지 못한다고 계속하실 거라고요. 왜냐하면 제가 봉사하는 가운데 어려운 일은 못 그만두시더라고요. 쉬운 일은 내가 그만두면 다른 사람이 들어오겠지 하는데 어려운 일은 내가 그만두면 누구 올 사람 없으면 다른 사람이 더 어려워지겠다! 해서 못 그만두시더라고요. 어려운 일일수록 봉사하는 기간이 계속 오래 가시더라고요. 정말 우리의 생활 가운데 무엇인가 하나님께 기쁨과 감사함으로 우리가 수고하면 우리들에게 있어서 오히려 고통스러운 것이 아니라 더 큰 기쁨이 있습니다. 하나님의 나라와 그 의를 구하는 것은 우리들에게 있어서 고행이 아니에요. 우리에게 예수 믿는 것이 고행이면 어떻게 그 예수를 믿겠습니까? 우리가 헌신하고 봉사하는 것이 고행이면 어떻게 그것을 하겠습니까?

우리가 그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는 것은 최우선 권을 가지고 있는 것이지만 또 그것은 우리에게 기쁨도 주기 때문입니다. 먼저 그 나라와 그 의를 구하는 백성은 하나님이 이 모든 것을 더하여 주시는 것입니다. 여러분 믿으십니까? 자 우리 따라서 합시다. 내가 주님의 일을 하면 주님이 내 일을 해주십니다. 여러분 한번 그렇게 해보시지 않겠습니까? 얼마나 신나는 일이겠습니까? 하나님의 큰손으로 축복하시게 하십시다. 내가 이 작은 손으로 움켜봐야 뭘 얼마나 움키겠습니까? 하나님의 큰 손으로, 그래 네가 나를 위해 수고 하는구나 네 자리가 비어있으니 내가 잠시 가서 앉아 있을게. 그리고 주님이 그 큰손으로 한줌 쥐어주시면 우리 평생 감당치 못할 큰 은혜와 축복을 주십니다. 저는 우리 성도님들이 하나님의 축복을 받을 수 있기를 바랍니다.

오늘의 말씀을 마치고자 합니다. 염려를 버리고 하나님의 전적인 보호와 인도를 확신함으로 평안을 얻어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함으로 이 모든 것을 더해주시는 하나님의 축복을 누려야 합니다. 성경에는 염려하지 말라는 말이 550번 나옵니다. 인간들이 얼마나 염려를 하면 염려하지 말라는 말이 550번이나 사용했겠습니다. 또 그 말은 하나님께서 염려하지 말라는 강력한 의지가 나옵니다. 우리는 모든 근심, 걱정, 염려로부터 자유로워지고 행복해지는 주의 성도들이 되어야 하는데 정말 우리는 염려하지 말고 하나님께 맡기고 의지하여 자유와 행복과 기쁨을 누리고 우리는 그 나라와 그의 의를 추구하는 백성들이 되어야 합니다. 우리는 전전 긍긍하거나 안달복달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알아서 해주시겠지라고 믿으며 우리에게 주어지는 최선의 길을 갈 수 있는 주의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방금도 말씀드렸습니다. 그냥 걱정 근심 많은 사람은 죽을 때 가지 걱정 근심하다가 죽어요. 그런데 기쁨과 감사함속에서 늘 하나님께 감사한 마음으로 사람들에게 감사한 마음으로 사는 사람들은 마지막 순간까지 감사하며 산다 이 말입니다. 이제 우리 때가 됐으니 바뀌어야 되지 않겠습니까? 하나님의 은혜 가운데 기쁨과 감사로 살아야 하지 않겠습니까? 오늘도 소망 속에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여 이 모든 것을 더하시는 축복을 누리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 드립니다.
(최종천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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