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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사순절①] : 겟세마네의 기도(눅 22:39~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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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지금은 교회 절기 상 사순절(四旬節)입니다. 사순절이란 열흘 순(旬) 자를 써서 부활절 직전 40일을 기념하는 절기를 의미합니다. 주일을 제외하고 계산해서 40일이므로 주일을 포함하면 47일에 걸쳐진 절기입니다. 사순절을 시작하는 날을 가리켜 ‘재의 수요일’(Ash Wednesday)라고 부릅니다.(금년의 경우 3월 1일이고, 부활절은 4월 16일임.) ‘재’는 회개를 상징합니다. 구약 이스라엘은 하나님 앞에 회개할 때 상징적 제스처로 재를 뒤집어쓰고 기도했습니다. 그러니까 사순절은 그리스도의 십자가 고난을 묵상하며 자신의 신앙을 돌아보는 기간입니다. 혹시 우리 신앙이 나태해졌던 회개하고 다시 회복해야 됩니다. 더 나아가 한 단계 성숙해지는 기회로 삼아야 할 것입니다.
  그래서 오늘부터 4회에 걸쳐 예수님의 수난과 관련된 말씀을 살펴보며 우리 신앙을 점검해 봅니다. 이 기회를 통해 우리 신앙이 더욱 새로워지기를 소원합니다.

  오늘은 그 첫 번째 순서로 예수님의 겟세마네 기도에 관해 살펴봅니다. 겟세마네의 기도는 우리에게 크게 두 가지를 교훈해 줍니다. 첫째는 대속의 고통, 둘째는 위대한 기도의 모델입니다. 

[1] 대속의 고통 : 구원의 확신, 사랑의 헌신으로 승화시키라 
  겟세마네의 기도는 ‘십자가 고난의 예고편’과 같은 것이었습니다. 예수님은 이미 십자가 죽음을 예견하시고 제자들과 함께 최후의 만찬을 가지셨습니다. 그런데 바로 그 자리에서  가룟 유다가 자리를 박차고 나갑니다. 예수님을 팔아넘기기로 약조한 것을 실행하기 위함이었습니다. 예수님은 그 사실을 잘 알고 계셨습니다. 유다가 군병들을 데리고 와서 체포할 것은 불을 본 듯 뻔한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어떻게 하셨습니까? 39절 보니까, 보통 때의 습관대로 제자들을 데리고 감람산(예루살렘 동편에 위치한 해발 810미터의 산)으로 가십니다. 감람산은 예루살렘 동편에 위치한 산으로 감람 즉 올리브가 많이 있어 ‘감람산’이란 이름을 붙여졌습니다. 주님이 예루살렘에 머무실 때면 대개 이곳에서 쉬기도 하고 기도도 하셨습니다. 특히 예수님 일행이 자주 가던 곳은 그 가운데서도 서쪽 기슭에 있는 겟세마네 동산입니다. 본문에는 그 이름이 나와 있지 않지만 마태복음이나 마가복음을 보면 명시되어 있습니다.

  ‘겟세마네’라는 지명이 ‘기름을 짜는 틀’이란 뜻입니다. 거기에 기름을 짜는 기구가 많이 설치되어 감람유(올리브기름)를 짜던 곳이 아닌가 짐작됩니다. 감람유는 무거운 돌로 짓눌러 짰습니다. 바로 여기서 예수님이 기름을 짜내듯 모든 진액을 뽑아내는 고통을 겪으며 기도하셨던 것입니다. 그 이름이 묘하게도 예수님의 고통을 미리 예언한 셈입니다.

  그날 밤 예수님은 그곳에서 밤새 기도하셨습니다. 그 모습을 마음속에 상상해 보십시오. 얼마나 처절한 고통을 당하고 계신지! 그때의 상황을 자세히 살펴보기 위해서는 본문뿐만 아니라 병행 구절인 마태복음(마26:36~46)이나 마가복음(막14:32~42)의 기록을 함께 보면 좋습니다. 본문에는 한번만 기록되어 있지만, 마태복음과 마가복음을 보면 세 번에 걸쳐 기도하신 것으로 되어 있습니다.

  그 기도는 대충대충 하는 기도가 아닙니다. 41절을 보면, 무릎을 꿇고 얼굴을 땅에 대고 통곡하면서 마치 사투하듯 기도했던 것입니다. 기도 내용도 42절(상) 보면 정말 처절합니다. 할 수만 있으면 ‘잔’을 옮겨 달라고 간청합니다. 여기서 ‘잔’은 십자가 고난과 죽음을 가리킵니다. 이제 곧 닥쳐올 십자가를 바라보면서 얼마나 고통스러워 하셨는지 짐작해 볼 수 있습니다. 막14:33~34 보면 더욱 적나라하게 기록되어 있습니다. “ .... 심히 놀라시며 슬퍼하사 말씀하시되 내 마음이 심히 고민하여 죽게 되었으니 너희는 여기 머물러 깨어 있으라 ...” 한 마디로 말해서 죽을 지경이라는 겁니다. 그래서 제자들에게 함께 기도하자고 말씀하십니다.

  이런 모습을 보면서 혹시 이런 생각을 하는 분이 계실지 모르겠습니다.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이라면서 왜 이렇게 나약한 모습을 보이지?” 그런 생각을 할 만합니다. 각종 병을 고치시고, 죽은 자도 살리시고, 숱한 기적을 행하신 분답지 않습니다. 그러나 여러분, 우리가 기억할 사실이 있습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아들로 신성을 갖고 계십니다. 그러면서 동시에 이 세상에 인간의 모습으로 오셨기에 인성을 갖고 계십니다. 신인(神人, God-Man) 양성(兩性)을 갖고 있는 겁니다. 그래서 우리 인간과 동일하게 느끼십니다. 피곤함도 느끼시고, 고통도, 슬픔도, ... 다 느끼십니다. 다만 죄만 없으실 뿐이지 우리와 모든 것을 공감하십니다.(히4:15 참조)

  그렇다면 그날 밤 겟세마네 동산에서 예수님이 겪으신 고통이 과연 어떤 것이었을까요? 아직 체포된 것도 아니고, 채찍질을 당한 것도 아니고, 십자가에 못 박힌 것도 아닌데 얼마나 고통스러웠을까 의미하게 생각한다면 이런 예를 생각해 보십시오.

  우리말에 “매도 먼저 맞는 게 낫다”는 말이 있습니다. 옛날 학생 시절 단체 기합 받을 때 보면 먼저 매를 맞는 게 훨씬 나았습니다. 뒤에서 차례를 기다리면 남이 맞는 것 보면서 얼마나 아플까 상상하니까 미리 고통을 느끼게 됩니다. 결국 이중삼중으로 고통을 받게 되는 겁니다. 예수님은 십자가를 생각하면서 큰 고통을 느끼셨던 것입니다.
  여러분, 그 당시 십자가는 무엇입니까? 사형 틀입니다. 그것도 보통 사형수가 아니라 흉악범(반역 죄인이나 살인강도 등)만 매달아 죽이는 기구입니다. 당시 사람들은 누구나 십자가 고통을 잘 알고 있었습니다. 로마제국은 이스라엘을 통치하면서 십자가형을 통해 공포 정치를 자행하고 있었습니다. 여러분, 십자가형 집행 장소가 어디죠? 골고다 언덕입니다. 성문 근처에 위치한 언덕으로 출입하는 사람들이 쉽게 볼 수 있는 위치입니다. 그리고 많은 사람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사형수가 골고다 형장까지 직접 십자가(대개 45kg 정도)를 메고 수치스런 행진을 하게 됩니다. 그러니까 그 수치와 고통은 이루 말할 수 없습니다. 이처럼 십자가는 생각만 해도 끔찍한 것입니다.

  예수님도 그걸 잘 알고 계셨고, 생각만 해도 너무 고통스러우셨을 겁니다. 게다가 죄도 없으신 분이니 그 수치와 고통이 더욱 심각하게 느껴졌으리라 생각됩니다. 그래서 극도로 긴장하고 두렵고 ... 그랬던 것입니다. 더욱이 늘 함께 해 주시는 하나님 아버지께서 십자가에 달리도록 방치한다는 사실이 견디기 힘들었을 것입니다.

  그때 예수님의 고통이 얼마나 컸을까 우리는 정확히 알 수 없습니다. 우리가 아무리 상상해 보지만 아마 우리의 상상 그 이상이었을 겁니다. 그저 약간 감을 잡게 해주는 구절이 본문에 있습니다. 44절. “ ... 땀이 땅이 떨어지는 피 방울 같이 되더라” 이런 기록은 마태복음이나 마가복음에는 없습니다. 아마 본문의 저자인 누가가 의사였기 때문에 이런 모습까지 세밀하게 기록한 게 아닌가 생각됩니다. 그리고 그가 의사인 그가 기록한 것으로 보아 이것은 비유적인 표현이 아니라 실제로 예수님의 몸에서 땀이 나면서 피가 섞여 나온 것임을 알 수 있습니다. 의학자들의 말에 의하면 사람이 극도로 긴장하면 피하에 있는 모세혈관이 터져서 땀구멍으로 피가 섞여 나올 수 있다고 합니다. 그러니까 얼마나 영적으로 정신적으로, 그리고 육체적으로 고통스러우셨을지 짐작이 갑니다.

  예수님이 이처럼 처참하게 고통을 당하신 이유가 무엇일까? 한 마디로 ‘대속의 고통’입니다. 무슨 뜻인가요?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이 죄로 인해 당할 고통과 죽음을 예수님이 대신 당하신 겁니다. 겟세마네 동산에서의 긴장, 불안, 고통은 우리가 죽음 앞에 당할 수밖에 없는 것들입니다. 십자가상에서 당하신 고통과 죽음은 우리가 마땅히 당할 심판입니다. 그런데 그것을 모면케 해주시려고, 그 고통과 죽음으로부터 구원해주려고 대신 당하신 것입니다. 그분은 십자가 고통을 피할 생각만 했다면 얼마든지 피할 수 있었을 겁니다. 가룟 유다가 겟세마네 동산으로 올 것이 뻔한데 그곳에 가신 것을 보면 자진해서 가신 게 분명합니다. 하지만 너무 고통스러웠기에 아버지 하나님께 잔을 피할 수 있는지 간구해 본 겁니다. 그러면서도 예수님은 어떻게 기도하셨습니까? 42절(하). “ ... 그러나 내 원대로 마옵시고 아버지의 원대로 하옵소서” 결국 하나님 아버지의 뜻대로 대속의 십자가를 지기로 하셨습니다. 이것은 사53:5 말씀의 성취입니다. “그가 찔림은 우리의 허물을 인함이요 그가 상함을 우리의 죄악은 인함이라 그가 징계를 받음으로 우리가 평화를 누리고 그가 채찍에 맞음으로 우리가 나음을 입었도다”
  우리는 겟세마네의 고통과 십자가의 죽음 앞에서 분명한 신앙의 결단을 하고 바른 신앙 자세를 확립해야 됩니다.

  ① 구원의 확신 :
  예수님은 분명 우리 죄를 짊어지고 대속의 고난을 당하셨습니다. 요1:29 보면 세례 요한이 예수님을 가리켜 증거한 말씀이 나옵니다. “보라 세상 죄를 지고 가는 어린 양이로다”  예수님이 마치 아사셀 염소처럼 우리 죄를 완전하게 담당해 주셨습니다. 마치 동이 서에서 먼 것 같이 우리가 죄에 대해 책임을 지지 않도록 말입니다. 아사셀 염소는 대속죄일에 죽여서 피를 흘리게 하는 염소 외에 죄를 전가시켜 산 채로 광야에 내보내는 염소인데 무인지경에 가서 영영 돌아오지 않습니다.(레위기 16장 참조) 마치 그런 것처럼 죄가 우리에게서 영원히 떠나간다는 겁니다. 그렇습니다. 예수님의 대속의 공로를 믿으면 결코 정죄함이 없습니다.(롬8:1 참조)

  그러므로 우리는 이 사순절에 다시 한번 구원 받은 사실을 재확인하시기 바랍니다. 요5:24 “내(=예수 그리스도)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내 말을 듣고 또 내 보내신 이를 믿는 자는 영생을 얻었고 심판에 이르지 아니하나니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겼느니라” 여러분! 신앙생활 하면서 이 감격이 사라지면 영적으로 병든 겁니다. 혹시라도 그 감격을 잃어버린 분이 있다면 다시 회복하시기 바랍니다. 그래서 날마다 뜨거운 감격을 가지고 살아가는 저와 여러분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② 사랑의 헌신 :
  십자가 구원에 감사하며 감격하면 우리는 저절로 주님께 헌신하게 됩니다. 가만히 있을 수가 없습니다. 사도 바울을 보십시오. 그는 인간적으로 누구에게도 빠지지 않는 사람입니다. 학자요 부자요 귀족이요 로마 시민권자요 권세자요 ... 인간 조건으로 보면 정말 뭐 하나 부족한 게 없는 사람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모든 것을 배설물처럼 포기하고세계 각지를 누비고 다녔습니다. 누가 호텔 잡아놓고 환영하는 것도 아닙니다. 가는 데마다 핍박이요, 걸핏하면 감옥행입니다. 그러나 그는 십자가 복음을 위해 열심히 뛰었습니다. 어떻게 그럴 수 있었습니까? 그의 고백을 들어보면 알 수 있습니다. 고후5:14 “그리스도의 사랑이 우리를 강권하는도다” 여기서 ‘강권한다’는 단어는 본래 ‘이끈다’ ‘끌어당긴다’ 등의 뜻을 가집니다. 바울은 주님의 사랑에 감복되어 사명을 감당할 수밖에 없었던 것입니다.

  사순절에 많이 부르는 찬송 중에 141장이 있습니다. “ ... 내 지은 죄 다 지시고 못 박히셨으니 웬일인가 웬 은혠가 그 사랑 크셔라 ... 늘 울어도 눈물로써 못 갚을 줄 알아 몸밖에 드릴 것 없어 이 몸 바칩니다” 우리가 이 찬송을 정말 진심으로 부를 수 있다면 주님을 위해 몸을 사리지 않을 수 있습니다. 사실 이게 진정한 행복입니다. 흔히 세상 소유를 갖고 누리면 행복할 줄 압니다. 결코 그렇지 않습니다. 세상 것은 부족하면 짜증나고, 채워지면 이내 공허해집니다. 결국 세상의 행복은 신기루일 뿐입니다. 인간은 영적인 존재이기 때문에 육신적인 것만으로 만족을 얻을 수 없기 때문입니다. 진정한 행복은 인생을 걸만한 일, 목숨을 바칠만한 목적을 발견한 사람에게 주어집니다.

  여러분, 바울이 행복한 사람인가요? 불행한 사람인가요? 예수 믿고 오히려 망했나요? 육신적으로 보면 그렇게 생각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는 목숨을 걸만한 인생의 목적, 사명을 발견한 사람입니다. 참수형으로 순교를 당했지만 기쁨으로 천국에 들어갈 수 있었습니다. 영적인 면에서, 영원을 두고 생각하면 바울보다 행복한 사람이 어디 있겠습니까?

여러분, 스데반을 불행하다고 생각합니까? 그는 비록 요절했고 돌에 맞아 피투성이가 되어 죽었지만 천사처럼 평안한 모습으로 주님 품에 안겼습니다. 사명을 위해 살고, 사명을 위해 죽는 게 인생의 진정한 행복입니다.
  이번 사순절에는 정말 주님의 사랑을 깊이 체험하시기 바라고, 그 사랑 때문에 주의 주신 복음의 사명을 위해 헌신하는 결단과 실천이 있기를 소원합니다. 그래서 세상이 주는 얕은 만족이 아니라 인생의 가치와 의미를 발견하는 진정한 행복을 누리시기 바랍니다.

[2] 위대한 기도의 모델 : 겟세마네 기도의 봉우리에 올라가라

  성경에 보면 예수님의 기도도 그러고, 많은 인물들의 기도가 여러 형태로 나옵니다. 그런데 그 중에 가장 위대한 기도는 겟세마네 기도입니다. 가위 기도의 최고봉이라 말할 수 있습니다. 위대한 일 앞에는 항상 위대한 기도가 있습니다. 가장 위대한 십자가 앞에 겟세마네 기도가 있었던 것입니다. 겟세마네 기도는 기도의 여러 가지 사실을 우리에게 가르쳐 줍니다. 오늘은 그 중에 두 가지만 살펴봅니다.

  ① 간구의 기도 : 기도의 기본형
  예수님은 먼저 아버지께 잔을 옮겨달라고 기도하셨습니다. 이것은 자신의 소원을 아뢰는 것으로 간구의 기도입니다. 간구의 기도는 기도의 기본형이라 말할 수 있습니다. 가장 기본적이고 보편적인 기도 형태입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드리는 간구의 기도에 응답하십니다. 물론 예수님의 경우는 하나님의 더 좋은 뜻이 따로 있었기에 그대로 응답하지 않았지만 말입니다. 우리가 간구할 때 문제가 해결됩니다. 환경과 상황이 변화되고, 기적이 일어납니다. 혹시 우리의 간구대로 응답되지 않는다면 더 좋은 하나님이 뜻과 계획이 있는 경우임을 알고 감사함으로 받아들여야 합니다. 

  간구의 기도는 마치 지렛대와 같습니다. 큰 바위를 들어올릴 때 내 힘으로는 꼼짝도 안 합니다. 그때 지렛대를 사용하면 번쩍 들어올릴 수 있습니다. 지렛대의 원리를 이용해서 만든 기계가 바로 기중기(crane)입니다. 얼마나 큰일을 하는지 모릅니다. 그와 마찬가지로 우리가 비록 작은 기도를 드리지만 하나님은 큰 역사로 응답해 주십니다. 그렇습니다! 세상 사람들이 보기에는 쭈그리고 앉아서 기도하는 게 약해 빠진 패배자의 모습으로 보일지 모르지만 사실은 가장 강력한 인생의 무기입니다. 간구의 기도야말로 문제 해결의 가장 좋은 지름길인 줄로 믿습니다. 

  출애굽기 17장을 보면 모세의 간구가 나옵니다. 광야를 통과하던 이스라엘이 아말렉 족속과 전투를 벌입니다. 여러 면에서 열세였지만 모세가 산꼭대기에 올라가 두 손 들고 기도할 때 이스라엘이 당당히 승리했습니다. 인간적으로 이해가 잘 안 됩니다. 그러나 전능자 하나님이 함께 해 주시면 얼마든지 가능한 일입니다. 렘33:3 “너는 내게 부르짖으라 내가 네게 응답하겠고 네가 알지 못하는 크고 비밀한 일을 네게 보이리라” 아무쪼록 이 사순절에 우리 모두 간구의 기도를 많이 드려서 하나님의 놀라운 역사를 체험하기를 축원합니다.

  ② 순종의 기도 : 기도의 고급형
  예수님은 자신의 소원을 아뢴 후 이어서 아버지 하나님의 뜻을 구합니다. “내 뜻대로 하지 마옵시고, 아버지의 뜻대로 하옵소서!” 이것이 겟세마네 기도의 클라이맥스입니다. 이 기도를 위해 주님은 피땀을 흘려 기도하셨습니다. 이것은 자신의 뜻과 소원을 갖고 기도하다가 마침내 아버지의 뜻을 헤아리며 기도하는 것입니다.

  기도는 쌍방적 대화입니다. 그러므로 내가 일방적으로 소원을 아뢰고 끝나는 게 아닙니다. 인간관계에서 마찬가지입니다. 대화는 어디까지나 쌍방 관계입니다. 그런데 한 사람이 상대방에게 일방적으로 자기 용건을 말하고 일어나서 가버린다면 얼마나 황당하겠습니까?
하나님 앞에 기도하면서 간구의 기도만 따발총 쏘듯이 잔뜩 하고 그친다면 하나님이 이렇게 말씀하실 겁니다. “네 말만 하고 가버리면 어떻게 하냐?” 우리가 기도할 때 내 소원을 아뢰는 것 이상으로 하나님의 뜻이 무엇인지 마음의 귀를 기울여 듣는 게 중요합니다. 그래서 그 뜻에 순종할 때 하나님이 가장 좋은 것을 이루어 주십니다.

  우리가 흔히 주변의 환경이나 상황, 혹은 주위 사람들을 문제로 인식하기 쉽습니다. 그래서 그런 것들만 변화시켜 달라고 간구합니다. 그러나 우리의 생각이 잘못되어 있는 경우가 허다합니다. 잠19:3 “사람이 미련하므로 자기 길을 굽게 하고 마음으로 여호와를 원망하느니라.” 잠14:12 “어떤 길은 사람의 보기에 바르나 필경은 사망의 길이니라.” 그런 점에서 보면 문제의 핵심은 ‘나 자신’입니다. 때로는 나 자신이 변화되면 모든 게 해결되기도 합니다. 어쩌면 인간의 불행이 잘못된 자기 소원, 자기 뜻을 고수하기 때문에 생기는 것인지 모릅니다. 내 소원을 꺾어 버리고 포기하는 게 더 좋은 길일 수 있습니다. 나 자신을 하나님의 뜻에 복종시키면 모든 게 합력하여 선을 이루게 됩니다. ‘하나님의 최선’을 얻을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면 반드시 승리합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우리 소원을 간구할 때 때때로 거절하시기도 합니다. 당장은 섭섭하지만 하나님의 뜻을 잠잠히 구하며 순종의 기도를 드리면 더 좋은 결과를 얻게 됩니다. 

  여러분이 잘 아시는 마더 테레사의 이야기입니다. 그는 인도 캘커타에서 빈자와 병자를 위해 큰 사역을 펼쳤습니다. 그 작은 체구로 어떻게 그 큰 사역을 감당할 수 있었을까요? 기도의 힘입니다. 한번은 기자가 그에게 질문을 했습니다. “당신은 요즘 무엇을 위해 기도하십니까?" 그랬더니 전혀 뜻밖의 대답을 하더랍니다. “저는 기도 시간이 주로 듣습니다.”

자신이 무엇을 하려고 애를 쓰고 그것을 이루기 위해 하나님께 간구하기보다 먼저 하나님의 뜻이 무엇인지 그 음성을 듣기 위해 기도한다는 것입니다. 이런 기도를 가리켜 경청 기도라고 합니다. 경청 기도가 곧 순종의 기도입니다. 하나님의 음성을 경청하는 이유가 순종하기 위함이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의 경우도 보십시오. 십자가의 고통을 앞에 두고 인간적으로 그 ‘쓴 잔’을 피하고 싶었습니다. 그러나 아버지의 뜻은 십자가를 지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그 뜻을 헤아렸고 순종했습니다. 그러자 어떤 결과가 나타났습니까? 인류 구원의 역사를 이루실 뿐 아니라 예수님 자신도 가장 존귀한 이름을 얻게 되셨습니다. 빌2:9~11 “이러므로 하나님이 그를 지극히 높여 모든 이름 위에 뛰어난 이름을 주사 하늘에 있는 자들과 땅에 있는 자들과 땅 아래 있는 자들로 모든 무릎을 예수의 이름에 꿇게 하시고 모든 입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주라 시인하여 하나님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셨느니라”

  성도 여러분! 금년에도 우리가 사순절을 보내고 있습니다. 이번에는 정말 연례적인 절기가 아니라, 신앙이 더욱 새로워지고 성숙해지는 기회가 되기를 바랍니다. 겟세마네 동산에서 피땀 흘려 기도하시던 예수님의 모습을 우리 마음의 스크린에 영상으로 담아두시기 바랍니다. 그래서 대속의 고통을 당하신 주님을 바라보며 구원의 감격을 회복하고, 사랑으로 헌신하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이 기간 동안 기도에 힘쓰는 가운데 하나님의 선한 역사를 체험하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홍문수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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