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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절망의 또 다른 이름 (눅 16:19-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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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남을 원망하고 핑계하는 것에 너무나 익숙한 민족인 것 같습니다. 속담을 가만히 보게 되면 유달리 남을 원망하거나 핑계하는 내용이 많습니다.“잘 되면 내 탓, 잘못되면 조상 탓”이라는 속담이 있습니다.“처녀가 애를 낳아도 할말이 있다.”는 속담도 있습니다. 그 중에 가장 대표적인 말은“핑계 없는 무덤이 없다.”는 말일 것입니다. 이처럼 죽을 때까지 할말이 많은 사람들이 우리들입니다. 그런데 왜 그럴까요? 어쩌다가 이 지경이 되었습니까? 가만히 생각해보면 어릴 때부터 교육받아온 산물입니다. 아이가 넘어지면 대부분의 어른들이“조심해야지 어서 일어나!”해야 정상인데 우리는 어떻게 합니까? 돌부리를 치면서“떼-찌”그럽니다. 그러면 아이는 그때부터 무슨 생각을 할까요? 내가 문제가 아니라 돌부리가 문제라고 탓을 합니다. 이렇게 자라서 어른이 된 우리들이 어떻겠습니까? 남을 원망하고 탓을 하는 게 당연한 결과입니다. 심지어는 부부끼리도 얼마나 원망하고 탓을 하며 삽니까? 대한민국 부부들의 부부싸움의 단골 메뉴가 무엇입니까?“내가 너 같은 인간을 만나지만 않았어도 이런 고생은 하지 않는다.”혹은“내가 그때 눈이 삐었지 당신 같은 사람만 만나지 않았어도 내가 왕비처럼 살텐데...”라는 말이라고 합니다. 그런데 여러분, 우리가 평생을 이렇게 원망하고 핑계하며 남을 탓하고 살다가 죽는다면 얼마나 불행한 일입니까? 모든 것을 하나님의 섭리로 볼 줄 아는 신앙인들은 여기에서 벗어나야 합니다. 하나하나 원망하고 핑계하며 탓을 하자면 끝이 없습니다. 그리고 만사를 그런 눈으로 보면 사람 사는 세상이란 것이 원망의 대상이 아닌 것이 없고요, 핑계거리 아닌 것이 없고요, 탓할 제목이 아닌 것이 없습니다. 살다보면 어려운 시기도 있고, 가난할 때도 있고, 병들 때도 있는 것입니다. 이럴 때마다 원망하고 탓한다면 어떻게 살겠습니까? 더욱이 오늘 우리 신앙인들이 빠지지 말아야 할 것이 있습니다. 고난에 대한 원망입니다. 주어지는 고통이 있을지라도 남을 원망하거나 다른 사람을 탓하는 것은 정말 신앙 없는 행위입니다. 곧 하나님을 원망하고 하나님을 탓하는 것이 되기 때문입니다. 신앙인이라면 고난 너머에 있는 하나님의 소망을 볼 줄 알아야합니다. 정말 믿음 있는 사람이라면 원치 않는 고난이지만 불가항력적인 그것마저도 원망과 핑계와 탓으로 삼기 보다는 그 너머에 있는 하나님의 은혜로 받을 줄 아는 사람입니다. 이런 사람을 하나님은 도우십니다. 절망으로 끝나버릴 고난이 아니요, 또 다른 소망의 시작이라는 것을 아는 것이 지혜 있는 사람이요, 스스로 행복할 수 있는 사람입니다.

오늘 읽은 본문을 보면 나사로라는 사람이 나오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 나사로야 말고 원망할 수밖에 없고, 절망할 수밖에 없는 완벽한 조건들을 갖추고 있는 사람입니다. 그는 우선 가난한 사람입니다. 거지라고 했습니다. 어느 정도로 가난했냐하면 먹을 식량이 없어서 부자들이 먹고 남은 부스러기를 기다려야 할 정도였습니다. 거기다 건강도 없었습니다. 병들었다고 했습니다. 그 병이 어느 정도였느냐 하면 온몸에 부스러기가 나서 개들이 와서 핥았다고 할 정도로 심각한 병입니다. 거기다 가족도 없이 버려진 처량한 인생입니다. 뿐만 아니라 어느 누구도 그에게 관심을 가지지 않는 고독하고 이처럼 외로운 사람입니다. 세상에서 철저하게 실패한 인생으로 조상을 탓하든가, 부자를 원망하든가, 가난을 저주할 만한 모든 환경들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야말로 지독하리 만치 불행한 사람입니다. 오늘 우리가 만약에 이 나사로의 입장으로 돌아가 본다면 할말이 참 많을 것입니다. 무슨 말을 하겠습니까? 생각해 보십시오.

우선은<자기 자신에게>할말이 많았을 것입니다. 사람이 이쯤 되면“내가 왜 태어나서 이 모양으로 살아야 하느냐”고 자신의 운명을 저주하고 자기 자신을 마구 학대하고 욕하고 증오하고 그럴 것입니다. 성경에 나오는 욥을 기억하십니까? 자식들을 잃고, 재산도 잃고, 건강도 상실하고 절망적인 가운데서 욥3장을 보면 얼마나 자기의 생일날을 저주합니까?“어찌하여 내가 태에서 죽어나오지 아니 하였던가, 왜 내가 태어나자마자 젖을 빨았던가, 나를 받는 사람이 엎어 놓았었더라면”하고 자기가 태어난 것을 스스로 저주합니다. 그런데 오늘 나사로는 말이 없습니다. 아무런 반응이 없습니다. 오죽 할말이 많을 텐데도 말 한마디가 없습니다.

또<부모에게>도 할말이 많았을 것입니다.“왜 나 같은 것을 세상에 내 놓아 가지고 이렇게 비참하게 살아가게 만들었느냐”고 탓하는 사람들을 종종 봅니다. 요즘 젊은이들은 유산 없는 것을 아쉬워하고 부모가 무능하다고 유감이 많습니다. 그래서 부모 탓을 많이 하게 됩니다. 나사로 역시 부모 탓을 하자면 누구보다도 할말이 많은 사람입니다.“왜 나를 거지꼴로 살게 만들었냐고, 재산이라도 좀 물려주든지 아니면 오래 같이 살아 주기라도 하든지..”할말이 얼마나 많았겠습니까마는 그건 우리의 생각일 뿐이요, 나사로는 그런 말이 없습니다. 탓이 없습니다. 원망이 없습니다. 여전히 조용할 뿐입니다. 이것이 우리들과 다른 점입니다.

또<세상을 향해서>도 할 말이 많았을 것입니다. 사람이란 극도의 가난이나 극한의 고난에 부딪치면 성격이 이상해집니다. 괜히 부자들을 보면 부아가 치밀어 오릅니다. 그래서 좋은 집을 보면 저 집이 폭삭 무너져 내렸으면 하는 마음이 생깁니다. 좋은 차를 봐도 마음이 편치가 않습니다.  그래서 흠집을 내 놓거나 침을 뱉고 지나갑니다. 불특정 다수를 향해서 해코지를 하는 사람들이 모두 이런 심리에서 나온 행동들입니다.

나사로가 말을 하자면 얼마나 할말이 많았겠습니까? 주인 영감은 왕이나 귀족들이 입는 자색 옷과 고운 베옷을 입었고 매일 같이 연락을 즐겼다고 했습니다. 부자가 자기 돈 가지고 즐기며 살아가는데 죄 될 것은 없지만 그 집 문간에서 그런 모습을 매일같이 보며 빌어먹고 사는 나사로가 볼 때 왜 불평의 말이 없었겠습니까?“나 참 더러워서 못살겠다. 가지면 다야! 어느 놈은 날마다 배터지게 먹고 어느 놈은 부스러기나 주워 먹고 세상 참 불공평하다.”우리가 흔히 하는 불평들 아닙니까? 그런데도 나사로는 조용합니다. 한 마디도 하지 않습니다.

그리고 더욱 중요한 것은 마지막<천국에 가서>도 할말이 있을 법 합니다. 어느 날 나사로도 죽었고 부자 영감도 죽었습니다. 그런데 나사로는 아브라함의 품 즉, 낙원에 갔고 부자영감은 음부 즉, 지옥으로 갔습니다. 음부로 간 영감이 낙원에 있는 아브라함에게 탄원을 하고 있습니다.“내가 지금 목말라 죽게 생겼으니 나사로를 보내서 물 좀 마시게 해 달라”고 애원을 하고 있습니다. 그 모습을 옆에서 나사로가 지켜보고 있습니다. 그때 나사로의 마음에 어떤 생각이 들었겠습니까? 세상에 있을 때와는 정반대 입장입니다. 그때 나사로의 입에서 말 한마디쯤은 나올 법합니다.“싸다 싸 세상에 있을 때 그렇게 나 같은 것에는 관심도 없더니 당신이 당해 보니까 고통이 어떤 것인지 알겠지?”하고 비아냥거리기라도 할 만 합니다. 아니 우리 같았으면 한마디쯤 했을 것입니다. 그런데도 나사로는 끝까지 아무 말을 하지 않습니다. 그에게는 탓도 원망도 없었습니다.

오늘 세상을 살아가고 있는 우리들은 할말이 너무나 많습니다. 내 고난이 있다고 너무 탓을 많이 하고, 내 아픔이 있다고 너무 원망을 많이 하고, 불평을 많이 합니다. 우리들이 나사로보다 형편이 못해서 그런 것은 아닙니다. 모두 좋은 환경에서 살고 있음에도 불평이 많고 원망이 많습니다.

여러분은 살아가는데 있어서 가장 기본이 되는 자본이 무엇이라고 생각하십니까? 어느 조사통계에 의하면 세 가지를 들었는데 첫째가<건강>이라고 했습니다.‘모두를 얻고서도 건강을 잃으면 소용없다’는 말처럼 건강은 자본 중의 자본입니다. 두 번째로는<행복한 가정>이 살아가는 자본이라고 했습니다. 그리고 세 번째로<경제>라고 했습니다. 이걸 보면 우리나라 사람들도 이제는 의식이 건강해져 가고 있다는 것을 느끼게 됩니다. 사람답게 사는 자본의 첫 번째가 물질이 아니라는 것이죠. 하여간 이 세 가지는 사람이 살아가는데 있어서 가장 기본이 되는 재산이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 세가지중 한가지만이라도 상실하거나 부족하게 되면 사람들은 용기를 잃게 되고 의기소침하게 되고 불평을 하게 됩니다.

그런데 보세요. 오늘 나사로는 그 어느 것도 없습니다. 완전한 절망입니다. 그가 원망했더라면 우리 또한 동정할만하고, 그가 탓을 했더라도 우리가 동정할 만한 사람입니다. 그런데 놀라운 것은 단 한마디의 원망도, 불평도, 탓도 하지 않았고 오직 하나님만을 의지했다는 사실입니다. 물론 본문에는 나사로가 하나님을 믿었다는 어떤 이야기도 없습니다. 그러나 무엇을 보고 압니까? 그가 죽어 낙원에 갔다는 사실로 알 수 있습니다. 여러분, 천국은 아무나 가는 곳이 아닙니다. 누가 갑니까? 하나님을 믿고 의지하며 전적으로 그 분의 나라에 살던 사람이 죽어서 가는 곳이 천국입니다.

오늘 나사로는 그의 삶이 절망적이었지만 절망하지 않았고 원망하지도 않았으며, 탓하지도 않았습니다. 다만 자신의 형편과 처지를 거부하지 아니하고 피해 가려고도 하지 않았고 받아들이면서 하나님의 도우심만 바라고 살았던 것이 전부입니다. 그랬더니 과연 그의 이름의 의미대로 하나님의 도우심을 받았고 마침내 그 소망의 궁극을 이루었습니다. 우리의 궁극이 무엇입니까? 흔히 우리들은 생각합니다. 이 세상에서 누릴 것 다 누리고, 이 세상에서 할 것 다해보고, 부러울 것 없이 살다가 죽는 것이 소원이라고...그러나 우리의 궁극적인 소망은 마지막에 완성되는 것임을 알아야합니다. 그것이 고난 너머에 있는 소망을 보는 믿음입니다. 고로 우리의 궁극적인 소망은 죽어서 천국에 가는 것입니다. 죽음이 끝이 아님을 아는 것이 믿음 아닙니까? 그걸 위해 우리는 달려가는 것이고요. 그 길을 가는 동안 닥쳐오는 현실의 고난들을 어떻게 받아들이며 믿음으로 이겨 나아가느냐는 것이 천국을 소유할 것인가를 못할 것인가를 결정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 땅에서 뭔가를 가졌고 많은 것을 누린다고 교만할 것도 아니요, 가난하고 고통스럽다고 좌절하지 말 것입니다.

아무리 살기 좋은 세상이 되었다 할지라도 가난 때문에 남모르게 좌절하며 아파하는 분들이 있지는 않습니까? 아니 어쩌면 우리의 욕심이란 늘 끝이 없어서 채워도 부족하여 늘 가난하다고 생각하며 삽니다.
가난에는 두 가지가 있습니다. 하나는 저주 받은 가난이 있을 수 있습니다. 스스로 지은 죄로 인해 가난해 지는 경우가 있습니다. 게을러서 가난해지는 것은 마땅한 것입니다. 누구를 원망도 탓할 필요도 없는 가난입니다. 또 하나는 하나님의 뜻대로 살려고 애쓰고 깨끗하게 살려고 하는 가운데 겪게 되는 하나님의 은혜의 가난이 있습니다. 나도 남들처럼 그렇게 죄를 지으며 부자가 되고자한다면 얼마든지 될 수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뜻이 아니기 때문에 그렇게 하지 않는 것입니다. 아니 거들떠보지도 않기로 작심하고 살아갑니다. 그러다보니 세상으로부터 당하는 어려움이 있고요, 불신앙적인 것으로부터 찾아오는 유혹들이 구름처럼 밀려드는 것입니다. 그러나 세상 궁정에서의 천 날보다 하나님 나라에서의 문지기가 좋다는 신앙으로 스스로 택한 가치 있는 가난입니다. 주님께서는 산상수훈의 팔복에서 이것을 심령의 가난이라고 말씀하십니다. 혹시 이 가난 속에 있다면 절망하지 마십시오. 행복한 것입니다.

또한 질병으로 인하여 고난 가운데 있습니까? 욥과 같은 처지요, 오늘 나사로를 동정할 만한 육신의 아픔 때문에 절망하고 있지는 않습니까? 하나님의 도우심에 맡기시기 바랍니다. 분명히 하시고자 하는 뜻이 있을 것입니다. 남을 원망하지 마시고, 지나간 날들을 탓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오직 미래에 하나님께서 하실 일에 소망을 두시기 바랍니다. 모든 일에 있어서 과거란 소용없는 일들입니다.[패트 윌리암스]라는 사람이 말하기를 “과거만을 생각하고 안타까워하는 사람은 운전하는 사람이 백미러만 쳐다보고 운전하는 것과 같다”고 했습니다. 또한[F. 셰드]라는 사람은 말하기를“이미 톱질이 끝난 톱밥을 다시 톱질 할 수는 없다. 과거란 톱밥과 같은 것이다 이미 끝난 일을 근심하고 슬퍼하는 것은 톱밥을 다시 톱질하듯 소용없는 것이다.”고 했습니다. 우리에겐 소망만 있을 뿐입니다.

사랑하는 성도여러분!
근심 되는 일이 없을 수 없으나 분명히 절망은 소망의 또 다른 이름입니다. 오늘 고난이 있다면 내일의 영광이 있을 것입니다. 다만 고난과 고통 속에서 얼마나 하나님을 의지하고 그 하나님을 바라보느냐가 중요합니다. 가난 때문에 괴로워하십니까? 질병으로 고난당하십니까? 이 외에 어떤 형편과 처지로 인하여 낙심하고 계십니까? 지금 내가 겪고 있는 이 절망은 하나님이 주시고자하는 소망의 또 다른 이름입니다. 우리에게 바라 볼 소망이 없다면 우리가 겪는 고통은 아무 의미가 없는 것이요, 우리가 겪는 고난 또한 아무런 가치가 없는 것이고 말 것입니다. 오늘 절망하고 있다면<절망의 또 다른 이름인 소망>을 발견하시기 바랍니다. (김철현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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