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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세상이 줄 수도 없고 알 수도 없는 것 (요 14: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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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나라 시사 풍자 코미디 개척자이자 1인자였던 고 김형곤씨의 장례가 13일 있었습니다. 유해는 운구차에 실려 여의도 KBS, MBC 주변을 한 바퀴 돈 뒤 고인의 뜻에 따라 대학 병원에 기증되었습니다. 김형곤씨는 99년 시신 기증을 서약했다고 합니다.
살아서는 사람들에게 웃음을 주더니 숨진 뒤에는 잔잔한 감동을 주니 아름다운 모습이 아닐 수 없습니다.

그는 서슬퍼런 군사정권 때 코미디 TV프로의 ‘회장님 회장님 우리 회장님’ ‘탱자 가라사대’의 코너에서 ‘잘 되야 할테데’ ‘잘 될 턱이 있나’라는 유행어를 만들어내며 정치인들과 재벌들을 통렬하게 풍자해 최고의 전성기를 누렸습니다.

유언이 되어 버렸지만 그가 숨지기 하루 전날 개인 홈피에 올린 ‘온 국민이 웃다가 잠들게 하라’는 글에는 공감가는 부분이 많습니다.
밤 10시 이후에는 정치인들 얼굴이 절대 방송에 나오지 않도록 하고 코미디 프로를 고정 편성해야 국민들의 잠자리가 편안해질 것이라는 말이 특히 그렇습니다. 아울러 웃음의 날을 제정하고 대통령 유머 특보를 제정하자는 독특한 아이디어도 새삼 눈길을 끕니다.

슬퍼하는 동려 가수의 말이 생각납니다. ‘이렇게 죽음이 가까이에 있는지 몰랐어요. 이렇게 살다 가는 것이라니 새삼 인생의 허무함을 느끼게 해요.’

그의 죽음을 통해서 다시 돌연사에 대한 이야기가 관심거리가 되고 있습니다.
돌연사의 주범은 비만과 스트레스라고 합니다. 이것들이 얼마나 무서운 것인지를 깨닫지만 스트레스의 문제는 여간 해결하기가 쉽지 않습니다.

저는 김형곤씨의 죽음을 보면서 세상에서 얻을 수 있는 웃음, 사람이 줄 수 있는 웃음의 한계를 깨달을 수 있었습니다. 
진정한 삶의 평안을 누리지 못하는 현대인들의 안타까운 삶의 비애를 느끼게 됩니다.
사람들은 세상의 절망스러운 상황속에서 위로받기를 원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세상이 줄 수 있는 위로는 한계가 있습니다. 진정한 위로와 기쁨을 주지 못합니다.

웃음이 총이라는 짧은 글이 있습니다.
어떤 소년이 조그만 구멍가게에서 물총을 샀어요. 그런데 그 물총은 신기하게도 사람들을 향해 빈총을 쏘면 모두가 웃는 것이에요. 아이는 신기해서 온 동네를 다니며 사람들에게 마구 총을 쏘는 거예요. 그러면 총에 맞은 사람들은 울다가도 웃고, 싸우다가도 웃고, 앉아있다가도 웃고 하는 거예요. 얼마 지나지 않아 그 동네는 모두가 함께 웃는 좋은 동네가 되었다는 이야기입니다.
이런 신비한 총이 있다면 좋겠지만 사실 그 웃음도 진정한 평안에서 나오는 웃음은 아니지 싶습니다.
어떤 청년이 그의 생을 통해서 꼭 소유하고 싶은 것을 종이에 적어 보았습니다.
건강, 지식, 명예, 사랑, 권력, 돈 이런 것들을 기록해 가지고 그가 평소에 존경하는 경험 많으신 어른을 찾아가 그가 적은 것을 보여 드렸습니다.  이 어른은 청년이 적어온 목록을 한참 동안 들여다보시더니 그 청년을 향해 "여보게, 자네가 여기 적어온 것은 훌륭한 소원이야. 그리고 일리 있는 목록이라고 생각하네. 그런데 자네는 여기 가장 중요한 것을 빠뜨렸어. 그것이 없으면 자네의 소유는 오히려 참을 수 없는 괴로움이 될 걸세."
그래서 이 청년은 "선생님, 제가 무엇을 빠뜨렸습니까?" 하고 물었습니다.

이 청년이 묻는 말에 노인은 연필로 청년이 써온 목록을 벅 그어버렸습니다. 그리고 그 밑에다가 '마음의 평화'라고 써 주었습니다.
이 청년은 신선한 충격을 받고 크게 깨달았습니다. 건강보다, 지식보다, 명예보다, 사랑보다, 권력이나 돈보다 더 중요한 것이 마음의 평화라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이 청년은 나중에 {마음의 평화}라는 제목의 책을 써서 수백만 부가 팔린 베스트셀러 작가가 되었습니다. 그 청년의 이름이 죠수아 리브만입니다.

사람들이 방황하고 있습니다. 세상에서 평안을 구하며 위로를 구하고 있습니다.
그들은 무지개를 찾아 나선 사람들처럼 헤메이고 여기저기 기웃거리고 있지만,  때로는 권력과 명예와 물질로 위로를 얻어 보려고 하지만 위로받지 못하고 평안을 누리지 목하고 있습니다.

세상 물질이 평안을 줄 수 없고 위로할 수 없습니다. 세상의 쾌락과 정욕을 좇아 보아도 거기 평안이 없습니다. 혹 세상에서 얻을 수 있는 위로와 평안이 있다하더라도 세상에서 얻는 위로나 평안은 일시적인 것이고 결국은 파괴적인 것들임을 알게 됩니다.

사업에 망한 사업가가 절망에 빠져있었습니다. 심한 우울증으로 고생하고 있던 어느 날
의사가 집에만 있지 말고 기분전환을 위해 산에도 가보고 툭 터진 바닷바람도 쏘여 보라고 했습니다. 사업가는 의사의 말을 따라 어느 날 높은 산에 올라갔습니다.
올라갈 땐 몰랐는데 정상에 올라가 밑을 내려다보니 고공공포증과 함께 나무며 바위들이 일제히 소리를 질러댑니다. "뛰어 내려라, 뛰어 내려라."

그는 겁이 덜컥 나 부들부들 떨며 산을 내려왔습니다. 며칠 후 바닷가를 찾았습니다. 밀려왔다 밀려나가는 바닷물이 장관이었습니다.
그런데 바닷물 소리가 갑자기 "들어오너라, 들어오너라."고 소리를 치는 바람에 깜짝 놀라 바다를 떠났습니다.

어느 날 교회를 찾아왔습니다. 그 날 설교제목은 "길은 있습니다."였고, 설교 후 부른 찬송은 "낭패와 실망 당한 뒤에 예수께로 나옵니다. 십자가 은혜 받으려고 주께로 옵니다. 슬프던 마음 위로 받고 이생의 풍파 잔잔하며 영광의 찬송 부르려고 주께로 옵니다."라는 찬송이었습니다.

산꼭대기에서 떨어져 죽어라. 바다에 뛰어내려 죽어라. 너는 살 가치도 존재할 가치도 없다는 것은 사탄의 소리였습니다. 그러나 주님의 음성은 길이 있다 고통을 피하고 슬픔을 이기고 낭패와 실망을 벗어날 길이 있다 내게로 오라는 것입니다.

사람들은 자기의 지혜로 평안을 찾으려 합니다. 그러나 아무리 머리가 좋아도 찾을 수 없습니다. 아무리 노력해도 참 평안을 누릴 수 없습니다. 사람이 아무리 마음을 비우고 욕심을 버려도 마음의 참 평안은 만들어 낼 수 없습니다.

참 평안은 하나님만이 주실 수 있습니다. 하나님이 주시는 평안은 사람의 모든 지각을 뛰어 넘는 완벽한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이 시간 하나님이 주시는 평안을 맛보시기를 바랍니다.

우리에게 평안을 주시기 위해 오신 분이 예수님이십니다. 예수님은 우리를 죄에서 건져내신 구원자이실 뿐 아니라 참 평안을 주시는 분이십니다. 예수님 안에는 참 평안이 있습니다. 예수님은 우리에게 참 평안을 주시겠다고 약속하셨습니다.
"나의 평안을 너희에게 주노라. 내가 주는 평안은 세상이 주는 것과 같지 아니하다."라고 하셨습니다.
또 말씀하시기를 "세상에서 너희가 환란을 당하나 담대하라 내가 세상을 이기었노라."라고 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세상에서 사람의 노력과 지혜로 얻을 수 없는 참 평안을 주겠다고 하셨습니다.
그리고 환란을 만날 때에도 빼앗기지 않는 평안 곧 예수님이 우리와 함께 계시며 대신 싸워주시고 대적으로부터 보호해주시는 가운데 누릴 수 있는 진정한 평안을 약속하십니다.

평안을 약속하신 예수님은 사람들이 세상에서 평안을 누리지 못하고 얼마나 두려워하며 불안해하고 지쳐 있는지 아시고 피곤한 이들을 지친 이들을 모두 초청하십니다.
"수고하고 무거운 짐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세상에서 평안을 찾아 방황하다가 쓰러지지 말고 참 평안을 주시는 예수께로 나오시기 바랍니다. 잠시 고통과 두려움을 잊게 하는 세상의 평안을 쫓아 쾌락과 방종의 파괴적인 삶에 헤메이지 말고 참된 위로와 평안을 주시는 예수님을 마음에 모시기를 바랍니다.
진정한 평안은 우리를 죄에서 구원하시기 위해 십자가에 죽으시고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만 얻을 수 있는 것입니다.

천사가 세상에서 가장 평화로운 모습이 무엇인지를 찾아 헤메다가 발견한 것은 어머니의 품속에서 젖을 물고 잠든 어린 아이의 모습이었다고 합니다.

토마스 아킴퍼스가 말한 대로 예수 그리스도의 품을 떠나서는 평안이 없습니다.
그의 품안에 안기우기 전에는 참 평안이 없습니다. 쉴 새 없이 불안하고 불만 걱정 그칠 사이가 없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예수님의 품안에서 쉼을 얻고 평안을 누리며 사시기 바랍니다. 세상이 줄 수도 없고 알 수도 없는 평안은 예수께서 주시는 평안입니다.
예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요14:27 “평안을 너희에게 끼치노니 곧 나의 평안을 너희에게 주노라 내가 너희에게 주는 것은 세상이 주는 것 같지 아니하니라 너는 마음에 근심하지도 말고 두려워하지도 말라.”
또 말씀하셨습니다.
요 16:33 "이것을 너희에게 이름은 너희로 내 안에서 평안을 누리게 하려 함이라 세상에서는 너희가 환난을 당하나 담대하라 내가 세상을 이기었노라 하시니라 "

예수께서 주시는 평안을 얻기 위해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은 그냥 예수님의 넓은 품에 안기는 것입니다.
나의 안에 거하라 나는 네 하나님이니 모든 환란 가운데 너를 지키는 자라 두려워하지 말라 내가 널 도와주리니 놀라지 말라 네 손 잡아 주리라....

성도 여러분, 근심하지 마십시오. 두려워하지 마십시오. 환란을 당하나 담대하십시오.
근심 가운데, 두려움 가운데, 환란 가운데 임하시며 위로하시고 평안을 주시는 예수님을 바라보시시오. 그 분의 넓은 품에 거하십시오. 주님의 위로를 받고 평안을 누리시기 바랍니다.

한 부자가 있었습니다. 그는 돈이 많아 호화롭게 살았지만, 그의 마음은 늘 불안하고 초조했습니다. 어떠한 방법으로도 안정을 찾을 수 없었던 그는 궁리 끝에 마음을 평안하게 해주는 그림을 구하기로 하였습니다. 그래서 화가들에게 거액의 돈을 주고 평안을 주는 그림을 그리게 했습니다.

드디어 화가들이 그린 그림을 전시하는 날이 되었습니다. 그는 전시장에서 작품을 하나하나 주의 깊게 감상했습니다. 아름다운 산 밑에 호수가 있고, 두둥실 흰 구름이 떠 있는 그림이 있었지만, 그는 이 그림을 그냥 지나쳤습니다. 또 평화스러운 시골 마을의 정경을 그린 그림도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이 그림도 지나쳐 갔습니다. 평안을 주제로 한 그 많은 그림들 중 그의 마음에 진정한 평안을 주는 그림은 하나도 없었습니다.

그런데 맨 마지막에 걸려 있는 그림 앞에서 그는 발걸음을 멈추었습니다. 그 그림은 평안과는 거리가 멀어 보였습니다. 그것은 거대한 폭포수가 쏟아져 내리는 암벽 한 쪽 틈새로 로빈새가 둥지를 틀고 알을 품고 있는 그림이었습니다. 금방이라도 바람이 불면 폭포수에 휩싸여 천 길 만길 아래로 떨어지고 말 것 같은 둥지인데도 알을 품고 있는 로빈새의 눈에서는 불안과 공포의 그림자는 전혀 보이지 않았습니다. 그는 이 그림을 택했습니다.

사람들은 의아해 하며 물었습니다. "좋은 그림은 다 놔두고 하필 그런 그림을 사는 이유는 무엇입니까?" 그러자 그는 분명한 어조로 대답했습니다. "이 세상에 평안한 환경이란 있을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진정한 평안을 얻는 길은 이 로빈새처럼 불안한 상황에서도 요동치 않고 평안을 유지하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우리가 평안을 찾을 수 있는 환경은 이 세상 어디에도 없습니다.
따라서 환경에서 평안을 찾으려 하면 우리에게 남는 것은 불안과 좌절뿐입니다.
성도들이 얻는 평안은 무풍지대에서의 평안함이 아니라, 폭풍 속에서도 누릴 수 있는 평안입니다.

예수님이 주시는 평안은 고난과 절망과 문제가 없는 평안이 아닙니다. 
고난도 역경도 절망도 있습니다. 질병도 있고 아픔도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누릴 수 있는 평안입니다.
그러므로 예수께서 주시는 평안은 근심과 두려움 속에서도 누리는 평안입니다.

옥중에서도 깊은 잠을 잘 수 있었던 베드로가 누렸던 평안이 바로 그것입니다.
옥중에서 찬송을 부르며 바울과 실라가 누렸던 평안입니다.
스테반 집사가 죽음 앞에서도 잃지 않았던 평안입니다.
그 평안이 주님이 주시는 참 평안입니다. 여러분들에게 이 평안이 임하시기를 축복합니다.
이 시간 사랑의 주님께서 여러분들에게 이 신비로운 평안을 주시기를 축복합니다.
그리하여 고난 중에도 눈물과 한 숨 가운데서도 평안을 누리며 살게 되기를 축복합니다.

이 평안을 받은 사람은 근심하지도 두려워하지도 않을 것입니다. 강하고 담대할 것입니다.
왜냐하면 주님이 주시는 평안이 그 마음에 가득하기 때문입니다. 주님이 주시는 평안이 그 심령을 새롭게 하고 기쁨으로 충만케 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그는 어디서든지 웃을 수 있고 기쁨으로 춤출 수 있습니다. 춤의 왕 예수님과 함께 즐거운 춤을 추는 평안을 누리며 살게 되는 것입니다.
‘춤춰라 어디서든지 신나게 멋있게 춤춰라 나는 춤의 왕 너 어디 있든지 나의 춤 속에 너 인도하리라’
예수께서 주시는 참 평안이 여러분의 삶에 충만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2006년 3월19일 주일낮예배
기도합니다.
어느 한 순간도 걱정과 근심에서 벗어날 수 없습니다.
문제는 사라질 줄 모르고 꼬리를 물고 생겨나며 위험은 여기저기 복병처럼 숨어 있나이다.
우리의 허약함과 무지함은 이 모든 것들을 감당할 수 없습니다.
삶의 온갖 막힘들 속에서 좌절이라는 것이 마음을 지배하고 있습니다.
주님, 푸른 초장으로 쉴만한 물가로 인도하시마 하신, 주님의 약속을 기억하며
여기 머리 숙인 주님의 백성들에게 주님만이 주시는 참 평안을 주시옵소서.
주님의 날개 아래서만  얻게 되는, 하늘의 평안을 모든 이웃들이 다 누리게 하시고
우리들의 일상이 폭풍과 격랑으로 출렁거려도 주님의 평안으로 능히 감당케 하옵소서.
오늘로부터 영원토록 주님이 주시는 평안 속에서 맡기신 일들을 잘 감당하게 하옵시고
주님의 사랑으로 위로받고 새 힘을 얻게 하옵소서.
2006년 3월19일 주일낮예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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