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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소망이 되는 교인 (살전 2: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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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전 2:19) 우리의 소망이나 기쁨이나 자랑의 면류관이 무엇이냐 그의 강림하실 때 우리 주 예수 앞에 너희가 아니냐

많은 사람을 태우고 바다를 건너던 배가 갑자기 거센 폭풍우를 만났습니다. 비바람에 흔들리던 배는 요동을 치기 시작했습니다. 그러자 배 안의 사람들은 모두 살려달라고 아우성을 쳤습니다. 그런데 그들 중 한 노인은 평화로운 얼굴로 기도만 드리고 있었습니다. 사람들은 그에게 지금 배가 뒤집혀 다 죽게 되었는데 당신은 두렵지 않느냐고 물었습니다. 노인은 조용히 대답했습니다. “내게는 딸이 둘 있습니다. 큰딸은 몇 년 전에 죽었고 지금은 작은딸을 찾아가고 있는 길입니다. 만약 이 배가 뒤집혀 죽게 되면 천국에 있는 큰딸을 만나게 될 것이고 다행히 배가 무사히 항구에 닿게 되면 작은딸을 만나게 될 것입니다. 이런 소망을 가지고 있으니 두렵지 않습니다.
우리는 풍랑이 높이 이는 삶의 바다를 항해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소망은 이 모든 것을 이기게 합니다. 믿음은 소망입니다. 동행하시는 예수 그리스도를 바라보는 믿음의 눈을 가질 때 소망의 바다를 항해할 수 있을 것입니다. (예화뱅크-풍랑을 이기는 소망)

바울은 2차 전도 여행 때 데살로니가에 들러 복음을 전하고 예수께서 그리스도이심을 전했습니다(행 17:5). 그러자 유대인들은 소요를 일으켰고 바울은 어쩔 수 없이 데살로니가를 떠나 베뢰아를 거쳐 아덴으로 갈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리하여 바울은 디모데만을 데살로니가에 보내어 그들의 믿음을 굳게 하고 위로하게 했습니다(살전 3:2). 그러나 그러한 중에도 바울의 마음은 말씀을 간절히 사모한 데살로니가에 있었고 그들의 얼굴 보기를 열정으로 힘썼습니다. 바울이 데살로니가에 가기를 한 번 두 번 가고자 했다고 했습니다(18절). 사실 데살로니가 교인들은 이제 막 눈을 떠서 겨우 어머니의 얼굴을 알아보는 그리스도 안의 영아와 같은 존재였습니다. 그러기에 바울의 마음은 더욱 안타까웠을 것입니다. 그래서 바울은 어머니와 같은 사랑을 가지고(7절) 영아와 같은 데살로니가 교인들을 돌볼 수 있기를 진실로 원했으며, 비록 데살로니가에서 개인적인 위험에 직면하게 된다고 하더라도 이 일이 이루어지기를 바랐습니다.

바울은 데살로니가 교인들에 대한 그의 열정적인 노력에도 결국 데살로니가에는 갈 수가 없었습니다. 바울은 그 이유를 '사탄이 우리를 막았도다'라고 했습니다. 바울은 데살로니가에 가고자 하는 계획을 몇 번 세웠으나 그때마다 방해하는 요소들이 등장했던 것 같습니다.
그래도 바울 일행은 데살로니가 교인들에 대하여 소망을 갖고 있었습니다. 소망이 없이는 우리들은 현재의 괴로움을 잘 참아내기 어렵습니다. 그런데 바울의 일행은 데살로니가 교인들에게서 소망뿐만 아니라 기쁨도 갖고 있었습니다. 그들은 소망하는 것으로 인하여 기뻐하였습니다. 즉 그들은 영광의 면류관을 받게 될 것을 기대하며 살았습니다.
경주자가 상금을 바라보고 달리듯이 이들은 영광의 면류관을 바라보며 신앙의 경주를 한 것입니다. 바울의 일행에게는 그들이 전도하여 개종하거나 새로이 입교한 교인들이 곧 그들의 면류관이 된 것입니다. 바울은 그것을 강조하기 위하여 그리스도의 강림 때에 자신들이 받을 수 있는 최고의 복이 무엇인지를 묻습니다.

'영광의 면류관이 무엇이냐.' 그것은 다름 아닌 데살로니가 교인들이었습니다. 바울이 데살로니가 교인들을 보고 싶어 한 이유도 여기에 있습니다. 그들은 바울의 기쁨의 근거였습니다. 그들은 바울의 소망이었습니다.
부모가 자녀들이 성숙하여 또 자녀를 낳고 잘 사는 것을 보기 위하여 수고하듯이 바울은 그들의 발전을 위하여 살았습니다. 그들은 그의 기쁨이었습니다. 그가 데살로니가 교인들의 과거와 하나님의 은혜로 말미암아 현격히 변화된 현재와 영광된 미래의 모습을 생각할 때마다 그의 마음은 기쁨의 광채로 충만했습니다. 그들은 그의 수고로 얻어진 면류관이었습니다. 그들이야말로 바울의 삶과 사역에 대한 하나님의 복의 상징이었던 것입니다. 이것은 비단 바울의 것만은 아닙니다. 그리스도의 복음을 위해 수고하고 그리스도 안에서 영적 자녀를 생산한 모든 전도자들이 누릴 복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들도 힘써 이 사역에 수고해야겠습니다.
소망은 데살로니가 교인들에게 싹튼 신앙이 성숙하게 자랄 것이라는 기대감에서 온 것이며, 기쁨이라 함은 그들의 믿음의 진정성에서 나온 것이고, 자랑이라 함은 그리스도 앞에 그들이 바울의 전도사역의 열매로 나타날 것이라는 확신에서 온 것입니다.

'자랑의 면류관'이란 말 속에는 운동 경기에서 우승자가 받았던 월계관의 뜻이 있습니다(Bruce). 바울은 그리스도인의 삶, 특히 자신의 사도적 사역을 표현함에 있어서 운동 경기 용어를 자주 사용하였습니다(고전 9:25;갈 2:2).
바울사도는 '그리스도의 날' 대신에 '그리스도의 강림'이란 말을 쓰고 있습니다. '강림'(파루시아)은 고위 관리가 어느 지역을 방문할 때 사용되었는데 특히 거의 신적인 존재로 추앙받는 황제와 같은 지배자가 방문할 때 쓰여졌습니다. 바울은 '파루시아'를 쓸 때에 이와 같이 황제의 방문을 연상하여 그리스도의 날에 나타날 더 크고 화려한 영광을 염두에 두었을 것입니다.
바울은 데살로니가 교인들이 그리스도 앞에서 자신들의 영광이요 기쁨이요 소망이라고 확신하였습니다.
 
교육하고 선교하고 봉사하는 교회가 소망으로 인내하는 교회  소망중에 즐거워하는 교회 소망을 하나님께 두는 교인 소망의 풍성함에 이르는 교인 소망을 움직이지 않는 교인 소망을 가지는 교인 소망이 되는 교인이 되자는 목표를 세웠습니다.
세계 야구 시합을 보면서 야구만 같았으면 좋겠다는 말들을 하면서 야구가 민족의 소망이 되고 있습니다. 우리 모두도  모두에게 소망이 되는 교인이 되어야 하겠습니다.
부부간에 소망이 되어야 합니다,
고대 문헌에는 이렇게 기록되어 있습니다. “남자는 자기의 옆구리에서 없어진 갈빗대를 찾기 전까지는 몸부림을 친다. 그리고 여자 또한 남자의 품 안에 들어가기 전까지는 몸부림을 치게 된다. 왜냐하면 그녀는 그곳에서 나왔기 때문이다.”

종교 개혁가 마르틴 루터는 자기의 아내를 이렇게 불렀다고 합니다. “나의 갈빗대, 키티.”
부부가 서로의 부족함을 절실히 깨닫고 서로 아끼며 상대방의 필요를 충족시켜 주려고 최선의 노력을 기울일 때 그들은 타인과 하나님의 인정을 받아, 타인과 하나님의 복을 받는 부부가 될 것입니다. 결혼한 이상 부부는 둘이 아니라 한 몸인 것입니다. 어떤 문제가 생겨도 서로 상의할 수가 있습니다. 서로는 지상의 그 누구보다도 가까운 것입니다. 실패할 때나 행운을 차지했을 때나 배필과 그것을 나눌 수가 있습니다. 부부가 평소에 대화나 의사소통을 한다면 어떤 문제도 무난히 해결할 수가 있습니다. 마음과 몸을 배필에게 보여줄 수 있습니다. 만일 그렇지 않는다면 결혼의 진정한 의미를 알고 있다고 볼 수가 없습니다. 부부는 서로의 것입니다. 비밀과 위선이 있을 수 없습니다. 배필을 포옹하면서 이렇게 말해도 수치가 아닌 것입니다. “당신은 내 것입니다. 그리고 나는 당신의 것입니다.”

어떤 목사님은 자다가 황당한 경우를 몇 번씩 당했답니다. 자고 있는데 갑자기 옆에서 사모님이 깨우면서 막 바가지를 긁는 것입니다. 잠결에 도대체 이 사람이 왜 이러나 해서 왜 그러냐고 하니까, 꿈에 목사님 막 멀리 도망가고 그러더래요. 그래서 깨워서는 그럴 수가 있냐고 따지는 것이었다 합니다.  그러니 뭘 잘못했다고 얘기해야 될것인가? “당신 꿈에 나타나서 내가 도망가서 진짜 잘못했소.” 그렇게 해야 될것인가? 어이가 없었답니다. 그런데 가끔 그러한 일이 일어나는 게 참 약이 되었다 합니다. “아, 없어서는 안 되는 존재구나.” 하고 생각해서 더 잘 할 것 아니겠는가 생각되더랍니다.

서로 부부 관계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서로 갈등이 있을 때가 있습니다. 마음이 안 맞을 때가 있습니다. 그럴 때 한번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만약에 저 사람이 없다면….” 하고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그것은 안 됩니다. 바가지를 긁어도 내 앞에 있어야지 없다면 그건 안 되지요. 그러니까 언제나 관계에 문제가 생길 때 잘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남편의 하는 일이 영 못 미덥고 시원찮아도 “그래도 저 사람이 없으면 안 된다” , 아내가 하는 일이 못 마땅해도 “저 사람이 없으면 내가 안 된다” 실제로 다시 한번 확인해 보시기 바랍니다. 만약에 없다면 상당히 곤란할것입니다. 어려운 일이 많을 것입니다.

남편을 먼저 하늘나라에 보낸 분과 함께 이야기를 하는데 그 분이 그러더랍니다. “참 우리 남편, 일생 제 속을 썩였습니다. 여자가 몇 명인지 모르고, 집 안에서 같이 산 적이 별로 없습니다. 실컷 돌아다니다가 늙고 병드니까 집에 돌아온 거에요. 병들어서 안방에 누워있는데 제가 참 구박 많이 했습니다. 그런데 막상 죽고 나서 보니까 그저 거적데기 덮어서 윗목에 누워있어도 살아 있는 게 나았습니다.”
그렇습니다. 아무리 속 썩이는 사람이래도 있는 게 낫습니다. 그렇습니다. 그 부부 관계뿐만이 아닙니다. 모든 부부가 서로 소망이 되어야 할 줄로 믿습니다.

과학자 아인슈타인이 세상을 떠난 다음, 어떤 신문기자가 그의 부인과 인터뷰를 하면서 부인, 아인슈타인의 상대성원리를 아십니까? 라고 물었습니다. 나는 모릅니다. 내가 어떻게 그 원리를 알겠습니까?  부인의 대답에 기자는 그러면 아인슈타인에 대해 무엇을 아십니까 라고 다시 물었습니다. 그러자 부인이 이렇게 말했습니다. 내가 분명히 아는 것은 그가 내 남편이라는 사실입니다. 나는 그가 열심히 연구했다는 것과 그의 진실한 인품을 압니다. 그런 까닭에 상대성원리는 모르지만 남편 아인슈타인을 사랑합니다.
그렇습니다. 믿고 의지하고 소망이 되는 부부가 됩시다.

부모와 자식 간에 소망이 되어야 합니다,
1989년의 일이었다. 중공의 외교부장 화국봉이 일본을 방문했을 때 화국봉 일행의 얼굴이 미국 텔레비젼 화면에 잠깐 비쳐진 일이 있었습니다. 그때 로스앤젤레스에서 텔레비젼을 보고 있던 70세의 한국 노인 한 분이 벌떡 일어나면서 저 사람 내 자식이다 하면서 흥분을 감추지 못했습니다. 그때 그 집 아들과 며느리는 어머니께서 70세가 넘으셔서 혹시 노망이 드신 게 아닐까 하고 염려를 했습니다. 그도 그럴 수밖에 없는 것이 텔레비젼 화면에 나타났던 사람은 중공정부의 고위 관리인 중국 사람들이요, 70이 넘은 노파는 한국 사람인데 어떻게 중국 관리가 한국 사람의 자식이 될 수 있단 말인가요? 그러나 그 어머니는 아들에게 텔레비젼에 비친 사람 하나가 네 형이 틀림없으니 어서 속히 형의 소식을 알아보라고 하는 것이었습니다. 어머니 성화에 견딜 수 없어 그 아들은 형의 소식을 수소문하기 시작했습니다. 그 가정의 내력인즉 그들이 중국에 살고 있었던 1945년에 해방을 맞았고, 큰아들은 대학 졸업반에 있어 대학을 졸업하고 귀국하기로 하고 가족들만 먼저 서울로 왔으며, 중국은 모택동 세상이 되어 그 아들은 대학을 졸업하고서도 중국을 벗어날 수 없어 서로 이산가족이 되었던 것입니다. 그 후 중국에 남아 있던 아들은 시간이 흐름에 따라 중국에 동화되었고 중공 외교부의 고위직에 올라 화국봉을 수행하고 일본을 공식방문하게 되었던 것이며, 서울로 온 가족은 둘째 아들을 따라 미국으로 이민을 와서 로스앤젤레스에 살고 있는 중이었습니다. 그들이 헤어진지 35년의 세월이 흘렀습니다. 그 70고령의 어머니는 어떻게 텔레비젼에 비쳐진 순간의 모습을 보고서 자기 자식인 줄을 알았을까요? 어머니는 내 자식을 아는 법입니다. 하나님 아버지도 자신의 자녀들을 아시는 것입니다.
육신의 보모가 육신의 자식을 알아보듯이 영적인 아버지이신 하나님께서도 우리를 아십니다. 영육 간에 소망이 되어야 합니다. 
바울 사도는  믿음 안에서 참 아들 된 디모데에게 편지하노니 하나님 아버지와 그리스도 예수 우리 주께로부터 은혜와 긍휼과 평강이 네게 있을지어다(딤전 1:2)  아들 디모데야 내가 네게 이 경계로써 명하노니 전에 너를 지도한 예언을 따라 그것으로 선한 싸움을 싸우며(딤전 1:18) 합니다.
부모와 자식간에 소망이 되어야 합니다.

  성도 간에 서로 소망이 되어야 합니다,
구역에서 속회에서 기관 모임에서 에서 서로 소망이 되어야 합니다.
서로 어렵고 힘들 때가 있습니다. 서로 마음이 안 맞을 때가 있고, 시끄러운 소리가 날 때가 있습니다. 그렇지만 우리가 그 때마다 언제나 상기해야 될 것은 우리는 서로 소망이 되는 관계가 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어디서든지 서로 사랑하고 자랑하고 기뻐할 수 있게 되어야 합니다.

바울 사도는 너희가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나의 동역자 들인 브리스가와 아굴라에게 문안하라(롬 16:3)합니다.
브리스길라와 아굴라는 장막제조를 업으로 하는 부부였는데, 실로 이상적인 크리스찬 부부였습니다. 그들 부부는 성경에 정통했습니다. 행18:26에 보면 "그가(아볼로) 회당에서 담대히 말하기를 시작하거늘 브리스길라와 아굴라가 듣고 데려다가 하나님의 도를 자세히 풀어 이르더라"고 씌여 있습니다. 이들 부부는 성경에 정통하여, 전도자 아볼로를 집에 청해 보다 깊은 하나님의 진리를 가르쳐 인도했던 것입니다.

그들 부부는 집 교회 창설자입니다. "아굴라와 브리스길라와 및 그 집에 있는 교회" (고전16:19)라고 합니다. 현대의 가정 집회와 같은 것으로 여겨집니다. 부근의 사람들이라든가 신자들을 청하여 집회를 열어, 한 교회가 되었습니다. 이러한 "집의 교회"를 이 부부는 가는 곳 어디에서나 만들고 복음 선교를 위해 힘썼습니다.
부부가 한가지로, 자기들의 생명까지 내어 놓고 남을 위해, 복음을 위해, 하나님의 종을 위해 진력했습니다. "저희는 내 목숨을 위하여 자기의 목이라도 내어 놓았나니" (롬16:4)라고 바울 사도는 말하고 있습니다.  "친구를 위하여 목숨을 버리는 일" (요15:13)을 땅에서 행한 사랑의 부부였습니다.

이외에도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의 동역자인 우르바노와 나의 사랑하는 스다구에게 문안하라(롬 16:9) 나의 동역자 디모데와 나의 친척 누기오와 야손과 소시바더가 너희에게 문안하느니라(롬 16:21) 디도로 말하면 나의 동무요 너희를 위한 나의 동역자요 우리 형제들로 말하면 여러 교회의 사자들이요 그리스도의 영광이니라(고후 8:23) 또 참으로 나와 멍에를 같이한 자 네게 구하노니 복음에 나와 함께 힘쓰던 저 부녀들을 돕고 또한 글레멘드와 그 위에 나의 동역자들을 도우라 그 이름들이 생명책에 있느니라(빌 4:3)  그리스도 예수를 위하여 갇힌 자 된 바울과 및 형제 디모데는 우리의 사랑을 받는 자요 동역자인 빌레몬과(몬 1:1) 또한 나의 동역자 마가, 아리스다고, 데마, 누가가 문안하느니라(몬 1:24) 한 모두가 바울 사도의 소망이 된 줄로 믿습니다.

신앙생활에서 행복을 느끼는 것은 서로 도와 줄 때입니다. 진정한 자랑, 진정한 기쁨을 누리기를 원하십니까?  부부의 심정 부모 자식의 심정 목자의 심정으로 서로를 대하시기 바랍니다. 다른 사람을 사랑하고 그 사람에게 사랑을 주어 보시기 바랍니다. 그 때 누리는 것이 성경에서 이야기하는 기쁨입니다. 부부간에 부자간에 목자와 성도 간에 성도 서로 간에 누리는 기쁨, 곧 다른 사람을 돌볼 때 누리는 기쁨은 오직 예수님 믿는 사람이 가질 수 있는 기쁨입니다. 이것이 진짜 신앙의 기쁨입니다.
부부간에 서로의 소망이 되고 부모와 자식 간에도 소망이 되고 성도 간에 기쁨이요, 자랑의 면류관이요 소망이 됩시다. (강성찬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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