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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하나님의 충만으로 (엡 3:14-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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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우리가 사는 사회를 후기 산업사회라고 말합니다. 후기 산업사회를 정보화사회 또는 탈공업사회와 같은 말로 쓰입니다. 우리의 사회는 끊임없이 변화 해 왔고 또 변화 해 갈 것입니다. 농경사회에서 산업사회로, 산업사회에서 다시 후기산업사회로 발전하여 오늘에 이르게 되었습니다.
후기산업사회는 정보사회인 동시에 지식사회입니다. 후기 산업사회의 정보 및 지식 산업의 발달은 우리 삶의 형태를 획기적으로 바꾸어 놓았습니다.

요즈음 딩크족이라는 신조어가 나왔습니다. 이십대, 삼십대 젊은 부부들에게서 많이 나타나는 신조어입니다. 결혼은 하되 자식은 두지 아니하려는 부부들을 가리키는 말입니다. ‘Double income no kids’의 머리글자를 따서 붙인 말입니다. 두 사람이 함께 직업을 갖고 돈을 벌면서 아기는 낳아 기르지 않는 부류란 의미로 통합니다.
이 딩크족 의 가치관은 육아에 대한 부담에서 출발했습니다.

과거 군부시대에는 잘 따라주기만 하면 착하게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지금은 자기의 주관을 분명하게 표현하는 시대입니다. 인터넷에 댓글을 다는 것이 하나의 문화로 정착을 했습니다. 그러다 보니 인터넷 글에 자기주장을 쓰는 것을 아르바이트로 하는 사람들도 생겼습니다. 이런 사람들을 슈퍼리플족이라고 합니다.

코쿤족(Cocoon)이라는 신조어도 생겼습니다. 코쿤은 누에고치라는 의미로 복잡한 현실에서 벗어나 편안함과 자신만의 공간을 추구하는 이들을 가리킵니다. 밖으로 나오기를 싫어하는 자들입니다. 대표적인 특징은 쇼핑, 문화생활 등을 인터넷과 첨단 장비를 통해 가정에서 모두 해결한다는 것입니다.

또 업글족이라는 것이 있는데 좋은 제품이 나오면 무조건 뉴모델로 바꿔버립니다. 차나, 기계나, 휴대폰, 디카 . . 나도 잘나가는 사람이라는 것을 보이고 싶은 욕구충동에서 나오는 것이라는 것입니다. 이런 구매, 작은 사치를 통해 일시적인 만족감이라도 갖고 싶은 것입니다. 내 안에 있는 공허함 때문입니다. 소유의 욕구 때문입니다.
인생이 그 심중에 공허감을 느낄 때 고독하게 되며, 그 고독을 메우기 위하여 무엇을 채우기 원합니다. 그리할 때 탐욕, 정욕, 향락 등의 유혹을 받게 되는 것입니다.

시인 엘리어트는 말하기를 “현대인의 심중에 없어야 할 것은 차고 넘치고 있으며, 있어야 할 것은 텅 텅 비어있다”라고 했습니다. 이와 같이 인간의 마음속에 있어야 할 것이 없고 없어야 할 것이 차고 넘칠 때 인간 영혼은 공허를 느낀 나머지 몸부림치며 부르짖지 않을 수 없게 됩니다.

파스칼은 “인간의 가슴엔 다만 하나님만이 채울 수 있는 하나님의 공백이 있다”고 말했습니다. 그리고 어거스틴은 기도하기를, “오주여, 우리 마음이 당신 안에서 쉬기까지는 우리에겐 휴식이 없나이다”라고 했습니다. 인간의 공허감은 하나님으로 채워야만 해결될 수 있고 거기에 참된 쉼이 있을 수 있음을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우리의 마음에는 세상의 것으로 채워질 수 없는 하나님의 공간이 있습니다. 그러므로 여기에는 반드시 하나님으로만 채워져야 합니다.

요즘 한국이 WBC 야구에 전승을 하는 일로 살맛을 되찾은 것 같습니다.
온통 야구 열기에 사로잡혀 있습니다. 오늘도 경기가 있죠? 혹시 이시간도 야구 생각에 젖어 있는 성도가 있을 지 모릅니다. 하나님께 집중하시기 바랍니다.
오늘 이런 공허감에 살아가는 현대인들에게는 스포츠가 종교가 되고 있습니다. 인간의 공허함을 이런 스포츠가 달래 주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런 스포츠 잔치가 끝나게 되면 많은 사람들의 마음은 또 허전해지고 무기력해지며 삶의 보람을 잃어버리고 방황하기 쉽게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러한 마음의 공허함을 달래기 위해서 또 다른 강력한 자극, 즉 술이나 마약, 섹스 혹은 폭력을 추구하게 될 위험의 소지가 큰 것입니다. 그러나 그런 것들은 일시적인 것들입니다.

그러면 인생의 이 영적 공허를 채울 수 있는 길은 무엇일까요? 사람이 동물과 전혀 다른 한 가지가 있는데 그것은 바로 종교성이 있다는 것입니다. 어떤 사람들은 인간을 동물과 구분해서 ‘도구를 사용하는 존재’, 또는 ‘이성적 존재’라 말합니다. 그런데 이런 표현만으로는 사람과 동물을 완전하게 구별하지 못합니다.

그러나 종교라는 것은 오직 인간에게만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인간을 ‘종교적 존재’(Homo Religius)라고 표현을 하는 것입니다. 이 종교성은 누구에게나 다 있습니다. 다만 정도의 차이가 있을 뿐입니다.
우리의 목마름을 해결할 수 있습니까? 바로 주님이십니다. 주님만이 우리의 공허감을 기쁨으로 바꾸실 수 있습니다.
현대인의 병인 삶의 공허함이 우리의 생활이 편리함과 물질적인 풍요와 상관없이 해결되지 않고 더욱 심각해지는 것은 단 한가지가 부족하기 때문입니다. 생수의 근원이신 예수그리스도, 빛이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계시지 않기 때문입니다.

아무리 좋은 자동차를 수만 개의 부품으로 조립했다고 해도 거기에 없어서는 안 되는 휘발유가 없다고 한다면 그 화려함은 공허함을 더 깊게 할 것입니다.

본문은 에베소 교회를 위한 바울 사도의 기도입니다. 바울은 자신이 세우고 양육한 에베소 교회를 위해 간절한 기도를 드립니다.
기도의 사람 바울은 옥중의 환란 중에 있었지만 오히려 밖에 있는 에베소 교회 성도들에게 낙심하지 말라고 용기를 북돋우고 있습니다. 에베소교회를 위해서 영적으로 강건한 사람들이 되기 위해 기도하고 있습니다.

1. 속사람이 건강해야 합니다(16).

현대인의 최고의 관심은 건강입니다. 웰비식사, 헬쓰, 다이어트, 건강식품은 필수입니다. 그러나 육체의 건강만을 알았지 속사람의 건강에 대해서는 속수무책입니다. 오늘 현대인들은 건강을 위해 온갖 노력을 다 하고 있습니다만 실상은 너무 허합니다. 공허합니다. 내 영혼이 건강하고 내가 가진 것들이 온전하려면 하나님과 올바른 관계를 맺고 살아야 합니다.

중국 동부의 한 농부가 자신의 농장에 대나무를 심고서 기다렸습니다. 첫 해에는 아무것도 올라오지 않았습니다. 두 번째 해에도 역시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습니다. 세 번째, 네 번째 해에도 마찬가지였습니다.
하지만 다섯 번째 해가 되었을 때 수백 평방미터의 땅 밑에서 대나무 뿌리가 빽빽히 퍼져 있었고, 마침내 헤아릴 수조차 없는 수많은 대나무 싹들이 지면을 뚫고 올라오기 시작했습니다. 마치 마술을 보는 것 같았습니다.
대나무들은 하루에 한 자가 넘게 자랐습니다. 불과 여섯 주만에 대나무들은 15미터 이상씩 키가 커졌습니다. 그래서 농부는 대나무들을 잘라다 팔아 큰 부자가 되었습니다.

사실 그것은 마술이 아닙니다. 이 대나무는 중국 동부에 자라는 것으로 ‘모소’라는 것인데 싹을 내기 전에 뿌리가 사방 수십미터까지 뻗어갑니다. 그래서 일단 싹을 내면 뿌리에서 보내주는 거대한 양의 자양분 덕분에 순식간에 키가 자라는 것입니다. 5년이라는 기간은 말하자면 뿌리를 내리기 위한 준비 기간인 셈입니다.

실제로 나무를 자라게 하는 것은 토양이나 그 뿌리가 아닙니다. 보이지 않는 어떤 생명력이 나무를 자라게 합니다. 우리의 속사람을 자라게 하는 것도 그렇습니다. 속사람을 자라게 하는 것은 성령의 능력인 것입니다. 생명의 영이신 성령을 통해서 흘러나오는 그 생명력이 우리의 속사람을 자라게 합니다.

우리의 속사람이 자라지 못하는 여러 가지 방해물들이 많이 있습니다. 그것은 죄의 힘입니다. 성령의 능력은 그 죄의 힘에서 우리의 속사람을 해방시키고, 치유하시어 자라게 하십니다.

16절을 보면 “너희 속 사람을 능력으로 강건하게 하옵시며”라고 했습니다. 겉사람은 육체를 말하고 속사람은 영혼을 말합니다. 영혼은 언제나 육체를 통제하고 조절합니다. 그러기 때문에 영혼이 건강해야 육체도 건강하게 되는 것입니다.
사도 요한은 “영혼이 잘됨같이 범사가 잘되고 강건하기를 원한다”고 했습니다. 속이 건강하면 겉도 건강해집니다. 옷보다 중요한 것은 몸이고 몸보다 중요한 것은 내장이고 내장보다 중요한 것은 마음이고 마음보다 중요한 것은 영혼입니다. 바울의 기도는 에베소 성도들에게 성령으로 충만하여 속사람이 강건해 지기를 위하여 기도하고 있습니다.

2. 주님께 뿌리를 내리십시오.

뉴욕 시내에서 버스를 운전하던 한 운전기사의 이야기입니다. 그는 벌써 몇 년째 뉴욕 시내에서 바둑판 같은 노선을 매일 똑같이 운전하며 살아왔습니다. 밤이나 낮이나 같은 일을 반복합니다. 그러면서 그의 마음속에 이 일이 얼마나 따분하고 무의미한 일인가 생각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이었습니다. 그는 마음속에 찬 허탈감을 견딜 수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그 버스를 몰고 그 길로 저 멀리 플로리다주까지 도망을 갔습니다. 잠시의 해방감을 느꼈지만, 결국 버스 한 대가 실종된 것이 발견되었고 얼마 되지 않아 경찰에 체포되었습니다. 법정에 선 그에게 판사가 물었습니다.
“당신은 도대체 왜 그런 일을 저질렀습니까?”
“도대체 공허하고 답답해서 살 수 없어서 그랬습니다.”
이 운전기사의 행동에 미국의 법정도 판결을 쉽게 내리지 못했다고 합니다.

이것이 오늘을 살아가고 있는 현대인들의 마음입니다. 틀에 박힌 현실속에서 다람쥐 쳇바퀴 돌아가는 듯한 일상에서 탈출하고 싶은 마음들이 누구에게든지 가득하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돈많은 사람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래서 세상의 모든 영광을 다 누려 본 솔로몬도 말년에 너무나도 허무해서 “ 헛되고 헛되며 헛되고 헛되니 모든 것이 헛되도다”(전1:2)라고 부르짖었던 것입니다.
허무하고 공허한 이유가 무엇입니까? 바로 우리에게 주님을 향한 온전한 영성이 부족하기 때문입니다. 주님보다 세상을 더 사랑하고 집착했기 때문입니다.

인간은 영적인 존재입니다. 영혼의 만족을 얻기 위해서는 영적인 만나를 공급받아야 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세상에 뿌리를 내리고사는 사람의 성공이 행복의 전부인양 부러워할 필요는 없을 것입니다.
예수님은 남편을 다섯이나 갈아치우고도 모자라 다른 남자와 살고 있던 사마리아 여인을 만났을 때 여인의 마음속 깊은 곳에 있던 갈급함, 그 상처를 주님은 보셨습니다. 육체적 만족이 아니라 영혼의 만족에 목말라 하는 여인을 보셨습니다.
그 때 뭐라고 말씀하셨습니까? “내가 주는 물을 먹는 자는 영원히 목마르지 아니하리니 나의 주는 물은 그 속에서 영생하도록 솟아나는 샘물이 되리라”(요4:14)

우리 한국 교회의 자랑은 뜨거움에 있습니다. 열정이 있습니다. 힘찬 박수가 있습니다. 호소하는 기도가 있습니다. 많은 체험도 있습니다. 그런데 세상 사람들의 비난이 강도는 더해갑니다. 세상에 별로 빛이 되지 못합니다.
나름대로 예배도 잘 참석합니다. 봉사도 합니다. 성경공부도 합니다. 기도회도 참석합니다. 세상에 대한 집착을 버리고 신앙으로 살려고 노력도 합니다. 그런데 무언가 부족합니다. 아직도 완전히 채워지지 않은 허전한 부분이 있는 것입니다. 무엇이 문제입니까? 왜, 변화되지 않습니까? 왜 풍성한 열매를 맺지 못합니까? 주님께 믿음의 뿌리를 내리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너희가 그리스도 예수를 주로 받았으니 그 안에서 행하되 그 안에 뿌리를 박으며 세움을 입어 교훈을 받은대로 믿음에 굳게 서서 감사함을 넘치게 하라”(골 2:6-7)

주님께 뿌리를 내리라고 말씀합니다. 주님의 가치관, 주님의 뜻, 주님의 성품에 나를 온전히 거하게 하라는 말입니다. 주님의 생각처럼 생각하는 것입니다. 주님의 삶처럼 살라는 것입니다.
십자가를 지는 일 대신에 영광을 얻으려는데 목적을 둡니다. 신앙을 감사와 감격으로 하는 것이 아니라 복 받기 위한 수단으로 변질되고 있습니다. 본질이 흐려졌습니다. 그러다 보니 이상하게도 십자가를 질 힘도 없어지는 것입니다. 소금이 될 능력도 상실해 버린 것입니다. 주님께 깊이 뿌리를 내리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주님의 가르침과 주님의 뜻에 뿌리를 온전히 내리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17절 “너희가 사랑 가운데서 뿌리가 박히고 터가 굳어져서”라고 했습니다. 큰 나무는 뿌리가 깊습니다. 이런 나무는 세찬 바람에도 전혀 요동하지 않습니다. 높은 고층빌딩일수록 기초깊이가 깊습니다.
내 인생이 흔들리지 않고 내 삶이 흔들려도 무너지지 않으려면 그리스도께서 내 마음속에 계셔야 합니다. 내 믿음의 뿌리가 그리스도에게 깊이 뿌리를 내려야 합니다. 우리도 바울처럼 기도하는 성도가 됩시다.

3. 하나님의 모든 것을 간구하십시오.

19절 “하나님의 모든 충만하신 것으로 너희에게 충만하게 하시기를 구하노라” 바울은 하나님의 모든 충만으로 충만케 되기를 간구하고 있습니다. 이 기도가 우리의 기도가 되기를 원합니다.
하나님의 특징은 충만하신 하나님이십니다. 풍성하신 하나님이십니다. 하나님에게는 부족함이 없습니다. “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니 내가 부족함이 없으리로다” 하나님은 다함이 없는 풍성한 저수지와 같습니다. 모든 것이 하나님에게로부터 임합니다.

태초에 하나님이 하늘 땅 바다, 짐승, 나무 등 물질을 만드셨습니다. 이 말은 물질의 주인이 하나님이시라는 것입니다. 주인은 주실 수도 있고, 가져가실 수도 있는 것입니다.
이 진리를 일찍이 깨달은 다윗 왕은 대상29:11 “하늘과 땅에 있는 것이 다 주의 것이로소이다” “부와 귀가 주께로 말미암고 . . 크게 하심과 강하게 하심이 주의 손에 있나이다”라고 했습니다.
풍성한 삶, 충만한 삶은 그리스도께서 온전히 나의 목자가 될 때 주인이 될 때 올 수 있는 것입니다.

성도 여러분 풍성한 삶을 원하십니까? 충만한 삶을 원합니까? 그리스도께서 우리의 마음을 주장하시도록, 주님이 나의 주인이 되시도록 맡기시고 복종하시기 바랍니다.
우리가 믿는 우리의 하나님은 충만한 은혜와 충만한 성령과 충만한 축복을 주시는 풍성한 은혜의 하나님이십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은혜가 얼마나 큰가를 실감하지 못하고 살아가는 신앙생활이 재미가 없습니다. 감격이 없습니다. 습관적 태도와 종교적 의무감만 남게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성도가 간절히 구할 때 은혜를 베푸시고 응답을 주시는 것입니다. 소용대로 주십니다.(눅11:8) 필요한 만큼, 만족할 만큼 주십니다. 각자 능력에 따라 은사도 주십니다. 빌4:19 “나의 하나님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영광 가운데 그 풍성한 대로 너희 쓸 것을 채우시리라”.

시107:9 “저가 사모하는 영혼을 만족케 하시며 주린 영혼에게 좋은 것으로 채워주심이로다”

하나님은 사모하는 영혼을 만족시켜 주십니다. 하나님은 소원을 만족시켜 주시는 분이십니다.
공허함으로 가득한 세상에서도 하나님으로 만족하며 감사하며 살아가는 성도들이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임경택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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