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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핍박받는 성도의 자세 (마 10:16-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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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주에는 ‘전도인의 자세’에 대해 생각해보았습니다. 오늘은 ‘핍박받는 성도의 자세’에 대해서 생각해보고자 합니다. 먼저 본문에서 말하고 있는 ‘핍박’이란 이 땅에서 겪게 되는 모든 종류의 고난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을 믿기 때문에 당하는 고난, 예수님을 믿지 않는다면 받지 않아도 될 애매한 고난을 말한다는 것을 분명히 하고 시작하도록 하겠습니다.

‘예수 믿고 복 받아라’는 형태의 전도가 난무하는 세상 속에서 살다보면, 예수님만 믿으면 고생이 끝나고 평안한 낙원에 살 것 같은 기대감을 가지기 쉽습니다. 그러나 이런 낭만적인 생각은 전혀 성경적인 근거가 없습니다. 오히려 예수님은 12명의 사도를 파송하시면서 “내가 너희를 보냄이 양을 이리 가운데 보냄과 같도다”고 하셨습니다(16a). 약육강식의 냉혹한 세상 속에 있는 양의 존재는 자칫하면 회복 불능의 치명적인 상처를 입을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 주님은 이리가 전혀 접근할 수 없도록 양을 품안에 안고 키우시는 것이 아니라, 당신님의 뜻에 따라 때로는 이리떼 가운데 보내십니다.

‘이리떼가 득실거리는 곳에 존재 하는 양’의 이미지는 섬뜩한 긴장감을 줍니다. 예수님은 사도들이 전도인의 삶을 시작하면서 이러한 긴장감을 가지기를 원하셨습니다. 이것은 또한 이 땅에 살아가는 예수님의 모든 제자들이 가져야 할 심성입니다. 사단의 활동은 지금도 계속되고 있기 때문입니다: “근신하라 깨어라 너희 대적 마귀가 우는 사자 같이 두루 다니며 삼킬 자를 찾나니”(벧전 5:8) 오늘날 제자라는 이름을 가진 많은 사람들이 주변의 이리떼를 심각하게 의식하며 긴장하지 않기 때문에, 핍박의 때에 혹은 넘쳐나는 죄의 유혹에 속수무책으로 잡아먹히고 맙니다. 주님은 양을 이리떼 가운데로 보내면서도 그들이 이리떼의 공격을 받아 상처투성이가 되기를 원치 않으십니다. 걸핏하면 공격을 받아서 상처를 입고, 늘 징징거리는 숙맥의 모습으로 살기를 원치 않으신다는 것입니다.

오히려 우리 주님은 “너희는 뱀같이 지혜롭고 비둘기같이 순결하라”(16b) 말씀하십니다. 이리를 만난 뱀은 매우 신중하게 처신할 것입니다. 멍청하게 공격을 허용하지 않고 재빠르게 피하여 위험을 벗어날 것입니다. 박해를 예상하고서도 무대책으로 당하는 것은 어리석은 것입니다. 가능한 상황에 지혜롭게 대처해서 불필요한 박해를 줄여야 합니다. 그러나 약삭빠른 기회주의자처럼 행하는 것이 아니라 신앙의 양심을 벗어나지 않는 범위 내에서 해야 합니다. 곧 지혜가 순결함을 갖추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비둘기는 이리떼가 온다고 닭처럼 정신없이 뛰어다니지 않습니다. 땅을 박차고 유유히 창공을 날아오릅니다. 비둘기는 잠시 땅을 디디며 살지라도 근본 자신이 땅에 속한 존재가 아님을 알고 위기 속에서 하늘에 속한 모습답게 행동합니다.

‘지혜’가 없는 ‘순결’은 어리석음이 되고 ‘순결’을 잃어버린 ‘지혜’는 교활함이 됩니다. 두 가지를 조화시킨다는 것이 쉬운 일은 아닙니다. 그러나 이 땅에서 살아가는 모든 제자들은 이리떼 속의 양과 같은 존재이기 때문에, 주님께서 주신 사명을 잘 감당하기 위해서는 ‘지혜’와 ‘순결’을 적절히 조화시키는 일이 필수적입니다. 그리고 이러한 지혜와 순결을 위해서는 성경을 읽고 기도하는 일이 빠질 수 없을 것입니다.

지혜롭고 순결한 삶을 살도록 하기 위해서 예수님께서 구체적으로 제시해 주신 것은 세 가지입니다. 첫째는 “사람들을 삼가라”(17)는 것입니다. 그들은 제자들의 언행을 호시탐탐 엿보고 있다가 여차하면 사법 당국인 공회에 넘겨서 재판을 받게 할 것입니다. 성도들은 불신자들 사이에서 언행을 삼갈 필요가 있습니다. 둘째는 “너희를 넘겨 줄 때에 어떻게 또는 무엇을 말할까 염려치 말라”(19)는 것입니다. 이는 속수무책으로 가만히 있으라는 말은 아닙니다. 다만 성령께서 가장 합당한 지혜를 주실 것을 믿고 조악한 꾀를 궁리하지 말라는 말입니다. 셋째는 “나중까지 견디는 자는 구원을 얻으리라”(22)는 것입니다. 많은 성도들이 ‘능력’과 ‘은사’를 구하지만 사실 이리떼 같은 세상 속에서 성도에게 부단히 요청되는 것은 ‘인내’입니다. 인내가 없으면 악인의 교활한 꾀를 따르기 쉽고 순결을 잃어버리기 쉽습니다. 순결을 잃어버린 능력과 은사보다 무서운 것은 없습니다. 예수님께서 “이 동네에서 너희를 핍박하거든 저 동네로 피하라”(23)고 하신 것을 보면 인내가 단지 한 자리에 오래 버티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 아님을 알 수 있습니다. 신앙의 순결을 유지할 수 있는 적절한 방편과 장소를 찾는 것은 지혜에 속합니다.

이상을 볼 때, 예수님의 제자가 되고 예수님의 제자로 산다는 것은 만만하고 쉬운 일이 아님을 생각하게 됩니다. 과연 이러한 어려움을 각오하고서라도 예수님을 따라야만 할 것인지를 다시 생각하게끔 합니다. 24-42절은 예수님의 제자로 산다는 것이 어떤 것인지 3부분으로 나누어 말해주고 있습니다. 이 부분의 핵심 주제는 복음 사역자들이 예수님과 하나가 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첫째 부분인 24-28절은 복음 사역자들이 핍박 속에서 예수님과 하나로 취급될 것임을 보여줍니다. 제자는 선생보다 높을 수 없고, 노예가 그 상전보다 결코 높지 못합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제자가 그 선생 같고 종이 그 상전 같으면 족하도다”고 하셨습니다. 이 말씀이 의미하는 바가 무엇입니까? 예수님으로 말미암아 핍박을 받을 때, 그것은 예수님과 한통속, 곧 예수님과 같은 부류로 취급을 받는 것이라는 의미입니다. 성도들에게 있어서 ‘예수님 닮았다’는 말을 듣는 것보다 더 큰 칭찬은 없을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핍박을 겪으셨으므로 예수님을 닮았을수록 핍박을 받는 것이 당연합니다. 핍박을 받는다면 예수님과 동일한 대우를 받은 것으로 알아서 족하게 생각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핍박 받을 때에 두려워할 것이 아니라 오히려 감사해야 합니다.

예수님은 “저희를 두려워하지 말라 감추인 것이 드러나지 않을 것이 없고 숨은 것이 알려지지 않을 것이 없느니라”(26) 하셨습니다. 예수님의 세계 구속 사역은 말구유에 감추어진 채 은밀하게 시작되었습니다. 그분께서 살아계시는 동안의 사역도 세상에 별로 드러나지 않고 감추어져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분께서 가르치신 모든 것이 지금은 세상 가운데 분명히 드러나 있습니다. 예수께서 십자가의 길을 걸어 부활의 영광에 들어가신 것처럼 그 분의 제자들도 십자가적 삶을 통해 영광의 날을 맛볼 것입니다.

때때로 내가 이렇게 홀로 진리의 길을 걷는답시고 고생하며 손해 봤자 누가 알아줄까 생각될 때가 있습니다. ‘이런들 어떠하리 저런들 어떠하리’하며 다른 사람들처럼 적당히 타협도하고, 대충 자기의 이기적인 욕심도 만족시켜가면서 살아버리고 싶을 때가 있습니다. 어차피 완벽하게 살 수 없는 인생인데 꼬장꼬장하게 살려다가는 나 혼자 욕먹고 손해 본다는 생각을 하게 되기도 합니다. 그러나 그렇게 해서 핍박과 손해를 피하는 것은 ‘지혜’가 아닙니다. 성도는 진리의 길을 걷는 것에 대해 두려워하지 말아야합니다. 오히려 어두운 데서 이르는 것을 담대하게 광명한 데서 말하며 귓속으로 듣는 것을 집 위에서 전파해야 합니다.

둘째 부분인 29-33절은 복음 사역자들이 핍박 속에서 하나님을 더 두려워해야 함을 말하고 있습니다. 핍박을 받을 때에 핍박하는 사람들이 두렵긴 합니다만, 그들이 할 수 있는 최고의 수단 그리고 최후의 수단은 ‘몸을 죽이는 것’입니다. 그 이상은 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몸과 영혼을 함께 영원토록 지옥에 멸하실 수 있는 분입니다(28).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않는 사람은 세상 사람들을 두려워하여 진리의 길을 인내함으로 걷지 못합니다. 그러면서도 진리의 길을 온전히 떠날 수는 없기 때문에 순결을 잃어버린 사악한 지혜로 가지고 살아갑니다. 경건의 모양은 가졌으나 경건의 능력은 부인하는 외식자가 되어버립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심판을 면치 못합니다. 참으로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자만이‘지혜와 순결’을 함께 유지합니다.

교회사에는 끝가지 지혜와 순결을 지키며 인내한 많은 사람들이 있습니다. 성령께서는 그들의 입에 지혜로운 말을 주심으로 후세에 그 이름이 길이 빛나게 하셨습니다. 대표적으로 사도 요한의 제자였던 폴리캅은 순교하면서 ‘그 분은 살아평생 나를 부인한 적이 없는데, 내가 어찌 그분을 부인하겠느냐’는 말을 남겼습니다. 그는 하나님을 더 두려워하였기에 진정한 지혜와 순결이 무엇인지 그 본을 후세 성도들에게 남겨주었습니다.

진리를 위해 핍박을 받는 사람들은 ‘고독과 외로움’을 느낍니다. 세상 속에 홀로 버려진 것 같은 기분이 됩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허락하지 않으시면 참새 한 마리도 그냥 땅에 떨어지는 법이 없습니다(29). 그만큼 하나님의 전지하시며 전능하십니다. 특히 그 분은 당신의 자녀들에 대해서 “머리털까지 다 세신 바”되었습니다(30). 즉 우리에게 닥치는 핍박과 고난은 우연히 그냥 닥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허락 하에 되어졌다는 것입니다. 그분은 핍박받는 성도, 주님을 위해 고난을 겪는 성도에 대해서 머리털 하나까지 헤아리실 정도로 섬세한 관심을 가지시고 지켜보십니다. 그러므로 진리를 지키려 함에 있어서 두려워할 필요가 없습니다. 반면 고난을 피하고 핍박을 피하기 위해 주님을 부인하고 양심을 위반하려는 생각이 들 때는 모든 것을 보고 계시는 그 분을 참으로 두려워하여야 할 것입니다.

셋째 부분인 34-42절까지는 복음 사역자들이 세상과의 관계에서 생각해야 할 점을 말하고 있습니다: “내가 세상에 화평을 주러 온 줄로 생각지 말라 화평이 아니요 검을 주러 왔노라”(34) 예수님을 믿는 다는 것은 주님의 통치를 받는 천국의 시민으로서 주님의 영광을 위해 살겠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정치적ㆍ경제적 풍요를 바라며 이 땅의 영광을 위해 살아가는 사람들과는 필연적으로 충돌이 생길 수밖에 없습니다. 이러한 투쟁의 상황 속에서 분명히 붙들어야 할 것은 모든 것보다 ‘주님을 더 사랑’하고자 하는 결단입니다. 성경은 가족의 중요성과 한 생명의 중요성을 매우 강조합니다. 그럼에도 가족의 뜻과 개인의 생명을 주님의 뜻보다 우선하는 사람은 제자로서 합당치 않습니다.

지혜와 순결을 지키며 주님을 가장 사랑하는 제자로 살아갈 수 있기를 바랍니다. 
(최동규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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