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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웰빙의 복음 (요일 1: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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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재 우리 사회의 키워드 중 가장 관심거리를 꼽는다면 웰빙(well-being)입니다. 의식주는 물론 생활의 모든 영역에 웰빙 문화가 자리를 차지하고 있습니다. 메모리폼 침구에 친환경 소재로 만든 아파트에서 잠을 자고, 아로마 입욕제로 반신욕을 즐기며, 유기농 야채를 먹고, 공기청정기로 실내공기의 오염물질을 깨끗하게 거른 청정구역에서 하루 일과를 시작하고 마무리하는 계층, ‘웰빙족’이라고 합니다.

웰빙족의 근원을 살펴보면 15세기 체코의 보헤미아 지방에는 다른 유럽 국가와 마찬가지로 유랑하는 집시들이 많았습니다. 당시 프랑스인들은 자유를 추구하는 그들을 ‘보헤미안’이라고 불렀습니다. 보헤미안의 정신적 흐름은 20세기에 들어서면서 자본주의 체제 속에서 물질적 풍요를 누리던 미국의 상류층을 일컫는 말 ‘보보스’(Bobos)에 반영됩니다. 보보스의 ‘보보’는 자본주의의 풍요를 상징하는 부르주아(Bourgeois)의 앞글자 보(Bo)와 유랑하던 집시들의 정신적 자유를 상징하는 보헤미안(Bohemian)의 앞글자 보(Bo)의 합성어입니다. 그래서 웰빙족이란 그들의 삶의 방식을 지칭하는 용어로 사용되고 있습니다. 정의하자면 웰빙이란 물질적 풍요를 기반으로 하되 정신적인 여유와 자연친화적 삶의 태도를 추구하며 자기의 삶을 즐기며 생명과 자연의 가치를 존중하는 삶을 말합니다.

웰빙의 본래적 의미에선 물질적 향유가 목적이 아니라, 정신적 건강이나 내면세계의 만족을 추구합니다. 그러나 오늘날 우리 사회에 펼쳐지고 있는 웰빙의 문화적 풍경은 대중적 소비와 상업주의가 교묘하게 연계되어 있습니다. 그러니 이 대열에 참여할 수 없는 사람들에게는 다가갈 수 없는 문화적 장벽으로 느껴집니다.

그럼 성경에서는 이 문제를 어떻게 바라보아야 하는가? 딤전4:8절에 [ 육체의 연습은 약간의 유익이 있으나 경건은 범사에 유익하니 금생과 내생에 약속이 있느니라 ] 성경은 육체적 건강보다 신앙의 건강을 더 중요시 하고 있습니다. 내적인 영성의 건강성을 유지하는 것을 더 우선시 하고 있습니다. 즉 영혼의 웰빙을 더 강조하고 있습니다.영혼의 웰빙은 돈을 주고 교환할 수 있거나 특정한 공간 속에서 누리는 것이 아닙니다. 영혼의 웰빙은 오직 영원한 생명 되신 예수 안에 있습니다.  그래서 오늘 말씀의 제목을 웰빙의 복음이라 정해 보았습니다. 찬13:3절 가사같이 [ 삶의 기쁜 샘이 되어 바다처럼 넘치는 ] 주님 주시는 웰빙의 복된 삶이되시기 바랍니다.

요한1서의 저자는 사도 요한입니다. 사도 요한은 요한복음과 요한1,2,3서 그리고 요한 계시록을 기록했습니다. 사도 요한이 요한복음을 통해서는 요20:31절 말씀같이 사람들이 어떻게 영생을 얻을 수 있는가를 말한다면 요한 1서를 통해서는 요1서5:13절 말씀같이 우리가 얻은 영생이 어떤 것인가? 를 말해주고 있습니다. 오늘 진정한 웰빙, 즉 영원한 생명에 눈이 뜨여지는 은혜의 시간되시기 바랍니다.

그럼 먼저 사도 요한이 요한1서를 기록한 목적이 무엇이겠습니까?

1. 요한1서를 기록한 목적이 무엇이겠습니까?(참조/요1서2:18-26절)
요한일서는 사도 요한 자신이 직접 체험했던 그리스도의 사랑과 가르침을 바탕으로 기록한 그의 첫 번째 편지입니다. 당시 초대교회에는 성도들의 신앙을 흔들어 변질케 하는 3가지 요소가 있었습니다. 이것은 지금도 마찬가지입니다.

1) 환난과 핍박입니다. 2) 세속화입니다. 3) 이단 사상입니다.
초대교회가 세워지고 세대가 바뀌어져 가니 각종 이단이 나타나 신앙이 변질이 생깁니다. 특히 예수님의 신성과 인성을 부인하는 영지주의 이단은 심각한 문제를 일으키고 있었습니다. 이에 요한은 그들의 잘못된 가르침을 반박하여 예수 그리스도가 하나님의 참 아들이시며 인간의 구원을 위해 이 땅에 사람으로 오신 참된 구주이심을 제시함으로써 성도들로 하여금 올바른 신앙을 정립하도록 하는 게 목적입니다.
그러기 위해선 성도들이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서로 교제하기를 원했던 것입니다. 즉 예수 공동체가 되기를 원했던 것입니다. 예수 공동체 즉 교회 안에 들어와야만이 신앙이 변질되지 않습니다. 그래서 오늘 본문말씀은 요한 1서의 서론으로서 예수 공동체의 중심인 교회의 주인되시는 예수님에 관하여 증거하고 있는 것입니다.

요한1서는 이렇게 시작하고 있습니다.
2. 사도 요한이 말하는 “태초부터 있는 생명의 말씀”은 누구를 말합니까?(1절)
1절 [ 태초부터 있는 생명의 말씀에 관하여는 우리가 들은 바요 눈으로 본 바요 주목하고 우리 손으로 만진 바라 ] 태초부터 있는 생명의 말씀이란 누구를 말합니까? 생명의 말씀은 바로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말합니다. 왜? 예수님을 생명의 말씀이라고 합니까? 성경에서 말씀은 하나님이 자신을 세상에 나타내실 때 사용하는 표현입니다. '여호와께서 말씀하시기를' 하실 때 그 입의 말씀으로 자신의 모든 것을 나타내신 것입니다. 말씀은 곧 진리요 진리는 예수님 자신입니다. 하나님은 그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그의 말씀을 우리에게 주신 것입니다. 그래서 사도 요한은 이 말씀이란 말을 인격화 시켜 그리스도와 연결시킨 것입니다. 말씀은 곧 하나님의 입의 말씀이기 때문에 하나님과 떠나서 존재할 수 없습니다. 예수님은 말씀이 육신이 되셨기 때문에 그는 하나님이 사람으로 세상에 오신 분입니다. 이런 의미에서 요1:1절 말씀은

그리스도의 하나님 되심을 증거하는 결정적 증거인 것입니다. 요1:1절 [ 태초에 말씀이 계시니라 이 말씀이 하나님과 함께 계셨으니 이 말씀은 곧 하나님이시니라 ] 그리스도를 말씀이란 이름으로 부른 것은 그리스도가 곧 하나님과 동일하신 분이심을 나타내기 위해 사용한 것입니다. 그래서 요한복음에는 다른 복음서보다 예수님의 하나님 되심의 신성을 더욱 많이 증거해 주고 있는 것입니다. 요한은 예수님은 '말씀' '생명의 말씀' '영원한 생명'이라고 한 것입니다. 요한은 자신은 이 말씀의 목격자임을 증거합니다. 생명의 말씀에 관하여는

1) 우리가 들은 바요. 2) 눈으로 본 바요. 3) 우리 손으로 만진 바라 고 합니다. 예수님을 확실히 증거할 수 있는 자는 바로 목격자입니다. 사도 요한이 왜 이것을 강조하는가 하면 사도시대에 예수님을 본 사람들에게는 이런 말을 할 필요가 없었습니다. 지금 사도 요한의 어려움은 세월이 지나니 예수님의 삶이나 이적을 친히 보지 않은 사람, 예수님이 누구신지 모르는 사람들에게 자신이 보고 들은 것을 전해야 하는 것이었습니다. 지금도 어르신들께서는 보리고개 운운 하면 우리의 자녀들은 양식 떨어지면 슈퍼 가서 라면 싸 먹으면 될게 아니냐 고 합니다. 이와 마찬가지로 예수님과 함께 다니시면서 <4> 무덤 속에서 냄새나는 나사로를 살리신 모습을 본 사람들이나 베세다 광야에서 수많은 사람들을 먹이신 모습을 본 사람들, 물로서 포도주를 만드시고 바다를 잔잔케하신 모습을 본 사람들에게는 예수님을 증거하는 것은 쉽지만 그 세대가 지난 후의 사람들에게 전할 때 그들은 실감나게 받아들이지 못합니다.

그래서 사도요한은 [ 우리가 보았다 ] 고 직접 경험한 것을 말하고 있습니다. 사도 요한이 강조하는 것은 그들이 생생하게 그 현장에 있었다는 것입니다. 이것을 너희에게 전한다는 것입니다. 사도요한은 얼마나 자신이 산 증인임을 강조하고 있습니까? 이것이 주님이 우리에게 남기신 말입니다.

그런 면에서 오늘날 교회는 사도 요한의 증거같이 예수님의 목격자, 예수의 증인이 되어야 합니다. 교회는 예수 그리스도 안에 나타난 생명의 말씀을 교리와 신학과 설교로서 설명하고 가르치는 공동체이기 전에, 세상 사람들로 하여금 와서 듣고, 보고, 만지고, 체험하도록 성령공동체로서 거듭나야 합니다. 교회처음 나오신 성도나 새교우가 교회 공동체 안에 들어와 앉기만 하면, 마치 전기자기장 안에 들어와 앉은 사람이 느끼듯이, 성령의 새로운 기운과 그 새로운 존재의 기운을 듣고, 보고, 만지고, 체험하는 감성적 증언공동체가 되어야 한다는 말입니다. 다시 말해서, 교회라는 이 생명공동체 안에서 분위기가 다르고, 공기가 다르고, 생명온도가 다르고, 은혜와 생명기운이 빛처럼, 전기흐름처럼 가득 차 있는 것을 감지하게 되는 공동체이어야 한다는 말입니다. 더 나아가 교회당을 앞을 지나가는 사람들이 어쩐지 교회당 안에 들어가 보고 싶고, 저기에는 인간애와 사랑과 진리와 치유와 사귐과 생수가 있을 것 같다고 직감적으로 느껴져서 끌려들어가는 느낌을 가지도록 교회가 영적 자기장 공동체가 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것이 성령 공동체로서 그리스도의 영적 몸이 되어 예수를 들려주고 보여주고 체험케 하는 구체적인 방법입니다.

그럼 사도 요한은 자신이 직접 목격한 예수님은 어떤 분이라고 증거합니까?
3. 사도 요한은 예수님이 어떤 분이라고 전합니까?(2절)

2절 하반절 [ 이는 아버지와 함께 계시다가 우리에게 나타내신바 된 자니라 ] 즉 예수님은 하나님이시란 말입니다. 요한복음이나 요한 1서에서 예수님을 말씀이라고 하는 것은 <5> 바로 예수님의 선재성, 영원성을 나타낼 때 쓰는 말이기도 합니다. 요한은 예수님은 영원한 생명의 근원으로서 하나님과 함께 계셨던 성령님과 함께 3위1체 하나님이란 진리를 말하는 것입니다. 신학적으로 예수님의 존재양식에 대해서 3부분으로 나눕니다.
1) 선재 라고 합니다. 창세전부터 하나님과 함께 하늘에 계셨던 분이십니다.
2) 성육신이라 합니다. 인류를 구원하시기 위해서 육신을 입으시고 세상에 오셔서 십자가를 지신 분이십니다.
3) 승천입니다. 죽은 지 사흘 만에 부활하셔서 승천하시고 다시 심판의 주로 재림하시는 분이십니다.
사도요한이 그리스도의 선재를 중요하게 생각하는 이유는, 그것이 그리스도의 본질을 증거하는 결정적인 근거가 되기 때문입니다.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아들이요, 메시야요, 하나님이시라고 고백하는 근거가 되기 때문입니다. 요한은 아버지와 함께 계시다가 육체로 나타내신 이 주님을 목격하고 체험했다고 증거합니다.

여기 이 "나타내셨다"는 낱말은 "주석하다"는 것이 원래의 뜻입니다. "주석하다"는 것은 말을 하나, 하나 자세히 설명하여 그 뜻을 드러내는 것을 말합니다. 이와 같이 본래 하나님을 본 사람이 없으되 하나님과 함께 계셨던 예수님이 이 땅에 오셔서 자신이 하나님이신 것을 자세히 나타내셨다는 말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은 요14:9절에서 [ 주여 아버지를 우리에게 보여 주옵소서 ] 라고 한 제자 빌립에게 [ 나를 본 자는 아버지를 보았거늘 어찌하여 아버지를 보이라 하느냐 ] 고 오히려 반문하셨습니다. 이와 같은 예수님은 영존하시는 하나님으로서 우리에게 영원한 생명을 주시는 분이십니다. 예수님은 이 땅에 상업적인 웰빙이 아니라 영원한 웰빙을 주시는 분이십니다.

사도 요한이 왜 이렇게 자신의 체험을 강조하며 예수님을 증거합니까?
4. 사도 요한이 이렇게 예수님을 증거하는 목적이 무엇이라고 합니까?

(3절 [ 우리가 보고 들은 바를 너희에게 전함은 너희로 우리와 사귐이 있게 하려 함이니 우리의 사귐은 아버지와 그 아들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함이라 ] 요한이 이 메시지를 전함은 우리가 영적인 깊은 교제 속에서 하나가 되어 그리스도의 유업을 함께 얻게 하려는데 목적이 있습니다. 그리스도를 통해 우리가 얻는 유업, 저는 이것을 진정한 웰빙이라고 말하고 싶습니다. 그리스도인의 웰빙은 바로 코이노니아 라는 사귐을 통해 주어집니다. 사귐’으로 번역된 헬라어 ‘코이노니아’는 한 목적아래 공동체생활에 함께 참여하여 가족이 된다는 뜻입니다. 이러한 영적 교제 가운데서 참된 치유와 회복이 가능케 됩니다. 이처럼 ‘복음’은 ‘코이노니아’를 낳고,
‘코이노니아’는 ‘기쁨’의 충만을 가져옵니다. 코이노니아를 낳지 못하는 복음은 복음이라 할 수 없습니다. 그런데 불행하게도 요즘, 참다운 코이노니아가 상실되어가는 것을 보게 됩니다. 참다운 성도간의 영적 교제와 진정한 섬김은 점차 사라지고 일 중심, 행정 중심, 사역 중심의 목회 현장만이 늘어가고 있습니다. 나아가 소위 패거리 의식만 늘어가고 있다는 것입니다.

구속받은 성도들의 가장 큰 특권 중의 하나는 아버지 하나님과 그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하는 사귐입니다. 우리들에게 하나님 아버지와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교제하는 사귐보다 더 큰 기쁨은 없습니다. 친교라는 것이 그렇지요.
저희 교역자들 함께 운동을 합니다. 그런데 제가 없으면 잘 안해요. 왜 의욕도 없고 재미도 없데요. 그래서 제가 있어야 한 답니다. 교제에 있어서 누가 중심이 되느냐? 중요한 문제인 것 있지요. 하물며 성도의 교제에 하나님이 없고 예수님이 없고 성령님이 없으면 모여도 진정한 교제가 이뤄질 수 없는 것입니다. 우리의 예친 모임 가운데 예수님이 주인이 되어야 합니다. 강한 믿음은 하나님 우리 아버지와의 사귐을 더욱 친밀하게 해줍니다. 복음은 우리를 성숙한 사귐으로 인도해 줍니다. 그래서 초대교회 성도들은 복음을 받자마자 교제 정도가 아니라 하나님의 가족으로 출발하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먼저 하나님을 찾아야 합니다. 예수님을 만나야 합니다. 하나님을 찾기 전에는 먼저 성공과 승리를 찾지 마십시오. 여러분들이 먼저 그리스도를 만나면 축복과 번영 즉 웰빙의 삶은 나의 것으로 소유하게 될 것입니다. 우리 하나님은 우리가 하나님과 함께 사귐을 갖기를 간절히 원하십니다. 하나님은 우리 아버지시기 때문입니다. 우리 주님은 우리가 주님과 함께 사귐을 갖기를 간절히 원하십니다. 예수님은 나의 구주시오 주인이시기 때문입니다.

그리스도인들은 인간적으로 끌려서 함께 모인 집단이 아닙니다. 예수님 안에서 살아가고 있다는 공통점이 있고 예수님 가족의 구성원들로서 서로를 사랑하는 법을 배우기 위해 모이는 공동체입니다.

그럼 우리가 어떻게 하면 영원한 생명이 주는 기쁨이 있는 삶, 즉 진정한 웰빙의 삶을 누릴 수 있겠습니까? 5. 우리가 기쁨(웰빙)을 누릴 수 있는 비결이 무엇이겠습니까?(4절)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그 말씀 속에 영생이 있고 천국이 있습니다. 이 사실을 증거하는 일은 우리의 기쁨을 충만케 합니다. 그래서 요한은 [ 우리가 이것을 씀은 우리의 기쁨이 충만케 하려 함이로라 ] 고 한 것입니다. 사도 요한이 이렇게 예수님을 전함은,
1) 첫 번째 3절에 예수 안에서 우리와 사귐이 있게 하기 위함이라 합니다.
2) 그리고 요한이 말하는 두 번째 목적은 우리 안에 기쁨이 충만케 하려 함입니다.
사도요한이 증거한 생명의 말씀되신 예수님을 믿습니까? 그렇다면 우리는 영원한 생명과 큰 기쁨을 갖게 됩니다. 세계적인 트럼펫 연주가 루이 암스토롱이 이런 말을 말했습니다. [ 당신 속에 음악이 있다면 음악에 대한 정의가 필요 없습니다.

그러나 당신 속에 음악이 없다면, 아무리 음악에 대한 훌륭한 정의를 내린다 하더라도 당신에겐 아무런 소용이 없습니다 ] 음악이 무엇인지를 알고 자 한다면 내속에 음악이 있어야 한다는 뜻입니다. 마찬가지로 웰빙의 삶이 어떤 것인가를 맛보기를 원한다면 웰빙의 정의가 무엇이고 웰빙족이란 어떤 사람들인가? 공부하고 연구한다고 웰빙의 삶을 누리는 것이 아니라 우리 인생의 영원한 생명과 참된 삶의 의미를 주시는 생명의 말씀되신 예수님을 마음에 모시고 예수를 구주로 고백하는 사람들이 한 가족이 되어 예수님이 우리의 구주시오 웰빙의 근원이라는 진리를 선포할 때 나의 삶에 기쁨이 충만할 줄 믿습니다.
나의 삶에 진정한 삶의 의미와 기쁨을 주실 수 있는 분은 하나님 한 분 밖에 없습니다. 나의 삶에 진정한 웰빙의 삶을 안겨다 주실 수 있는 분은 기쁨의 근원 되시는 예수님 밖에 없습니다. 시 4:7-8절에 다윗은 고백합니다. [ 주께서 내 마음에 두신 기쁨은 저희의 곡식과 새 포도주의 풍성할 때보다 더하나이다. 내가 평안히 눕고 자기도 하리니 나를 안전히 거하게 하시는 이는 오직 여호와시니 이다 ] 내게 웰빙의 삶을 안겨다 주실 분은 오직 여호와 밖에 없음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그런데 문제는 나도 예수님을 믿기 때문에 오늘도 교회 나와 하나님 앞에 예배를 드리는데 왜 내게는 삶의 기쁨이 없는가? 이것은 대부분 교회 안에 직분자들의 푸념이요 넋두리입니다. 이유는 마음속에 기쁨의 샘이 없기 때문입니다. 세상이 주는 기쁨은 오래가지 못합니다. 아무리 즐거운 것도 오래하면 싫증이 납니다. 아무리 하고 싶은 일이라도 오랫동안 하면 기쁨이 줄어듭니다. 그러나 내 마음 속에 기쁨의 샘이 마련되어 있으면 항상 솟아납니다.
샘물은 퍼면 또 솟아나고 퍼면 또 그만큼 솟아납니다. 4절 말씀을 자세히 읽어 봅시다. [ 우리가 이것을 씀은 우리의 기쁨이 충만케 하려 함이라 ] 기쁨의 근원 되시는 예수님을 마음속에만 가두어 놓지 아니하고 퍼 주니깐 마치 샘에서 샘물이 자꾸 자꾸 솟아나듯이 기쁨이 솟아날 줄 믿습니다.

저는 근간에 깨닫게 된 삶의 노하우 가운데 하나가 무슨 일이든지 해야 할 일이라면 즐겁게 하자. 이것은 생리학에서도 증명되고 있는 사실입니다. 인간의 뇌에는 열여덟 가지 신기한 성분을 생성해 내는데 그중 대표적인 것 둘을 든다면 하나는 엔돌핀이고 다른 하나는 아드레날린이라는 것입니다. 엔돌핀은 우리가 감사한 마음이나 기쁜 마음이 가득할 때 생성되어 흘러나오는 성분입니다. 엔돌핀은 암균이나 결핵균 같은 것들을 잡아먹을 뿐 아니라 진통 내지 마취효과가 있어 운동을 즐겁게 해보면 몸은 힘 드는것 같은데 마음은 기쁜 것 있지요. 그런데 아드레날린은 그와는 반대로  인간이 슬퍼하거나 괴로워하며 근심과 걱정에 사로잡히고 원망하고 시기하며 특히 열 받으면 생성되는 것으로 이는 암을 유발하고 소화불량이나 기능장애 를 일으키고 기타 해로운 요소들이 나타나 건강상에 매우 해롭다고 합니다. 이런 면에서 보면 우리를 만드신 하나님께서 우야든지 감사하고 기뻐해라 고 한 말씀 - 다 일리가 있는 말씀이지요. 화가 나서 씩씩거리며 호흡을 할 때 나오는 공기를 시험관에 담아서 영하 120도로 온도를 낮추면 액체공기 가 된다고 합니다. 그런데 이 분노의 액을 쥐에 주사하면 즉사해 버린다고 합니다. 우리가 흥분하면 맥박수가 늘어나고 신장의 기능이 저하되고 생체기능도 떨어집니다. 결국 제 명대로 못삽니다. 그러므로 할 수만 있으면 우리가 감사함으로 기쁨으로 살아야 합니다.

유진 피터슨이 이렇게 말합니다. [ 기쁨의 향유는 지루함을 탈피하는데 있지 않고 하나님의 사역에 흠뻑 빠져드는 데 있다 ] 그러니 섬기는 삶과 나누는 삶을 통해 새로운 사랑의 네트웍을 형성하게 될 때 그리스도인에게 참된 웰빙의 삶이 주어질 줄 믿습니다. 우리 내일교회도 복음의 나눔, 사랑의 나눔을 통해 기쁨이 충만한 교회가 되기를 바랍니다.
(김성덕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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