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그인

  • 목록
  • 아래로
  • 위로
  • 쓰기
  • 검색

설교 [사순절] 십자가의 발자취를 따라서 (마 27:27~44)

  • 잡초 잡초
  • 252
  • 0

첨부 1


은혜의 성지순례

하나님의 은혜로 성지순례를 잘 다녀왔습니다. 14박 15일 일정으로 이스라엘 이집트 요르단 터키 그리스 5개국을 다니면서 정말 많은 것을 깨닫고 체험했습니다. 저는 이번 성지순례를 다니면서 세 가지 이유에서 “나는 정말 행복한 사람이다”라고 느꼈습니다. 첫째는 교회의 전적인 배려로 이렇게 성지순례를 오게 되어 행복한 사람이요, 둘째는 특별히 성지순례를 사순절 기간에 오게 되었으니 행복한 사람이요, 세 번째는 성지순례를 통해 모세와 사도 바울의 발자취, 예수님의 발자취를 직접 따르고 느끼고 만져보며 체험하게 되었으니 내 어찌 행복한 사람이 아니리오 하는 이유입니다.

이번 성지순례를 통해 제일 먼저 애굽과 시내산에서 모세의 발자취를 따라가 보았습니다. 다음으로는 이스라엘 땅에서 예수님의 발자취를 따라가 보았습니다. 마지막으로는 터키의 소아시아 일곱 교회와 그리스의 아테네 아레오바고 언덕에서 사도 바울 선생의 발자취를 따라가 보았습니다. 그런데 개인적으로는 성지순례 일정에서 어떤 장소가 가장 감격적이었는가? 갈릴리 호수에 갔을 때였습니다. 아무래도 갈릴 리가 주님의 발자취가 가장 많이 남아있는 곳이며, 2천 년 전이나 지금이나 별 다름 없이 자연 그대로 남아 있는 장소였기 때문입니다. 갈릴리, 정말 좋습니다.

실망스러운 십자가의 길(Via Dolorosa)

그러나 성지순례에서 가장 하이라이트는 역시 Via Dolorosa입니다. 오늘 본문 27절에도 나왔지만 예루살렘에 가면 예수님이 사형선고를 받은 장소인 안토니오 요새(본문에는 ‘관정’ 즉 총독의 관저라고 나옴) 터가 있습니다. 지금 이곳은 아랍인 학교가 되었지만 여기서부터 시작해서 예수님이 십자가를 지고 오르시다가 넘어지시던 곳, 어머니를 만나던 곳, 구레네 시몬이 억지로 십자가를 대신 지던 곳 등을 거쳐 마지막으로 십자가에 못 박히시고 무덤에 모셔진 곳까지의 행로가 지금도 남아 있는데 이곳을 라틴어로 ‘슬픔의 길’이라는 뜻을 가진 Via Dolorosa라고 부릅니다. 바로 ‘십자가의 길’입니다.

이곳은 성지순례의 가장 하이라이트가 되는 장소이므로 지금도 수많은 사람들이 찾아와 함께 따라 올라가곤 합니다. 저도 개인적으로는 많은 기대를 가지고 찾아 갔습니다. 하지만 기대가 너무 컸을까요? 사실은 상당히 실망도 컸습니다. 실망한 이유가 세 가지인데, 첫째로는 여기를 골고다 언덕이라고 부르는데 제가 기대한 그런 언덕은 보이지 않고 그저 완만한 경사를 따라 올라가는 골목길뿐이었습니다. 두 번째로는 그 완만한 골목길이 온통 아랍인들 가게로 가득 찬 시장 길이었다는 사실입니다. 우리로 치면 무슨 동대문 시장이나 죽도 시장처럼 이 Via Dolorosa 길 양 옆에는 아랍 상인들이 벌려 놓은 각종 물건과 기념품이 즐비한 가게들만 가득 차 있습니다. 십자가의 길이라기보다 좁은 시장 길을 걸어 올라가는 느낌이었고 사방에서 기념품을 파는 아랍인들의 호객하는 소리, 한국말로 “일 달러, 싸다 싸다” 하는 소리만 들려오는 아주 소란한 장소였습니다. 세 번째로 그 좁은 시장통 길을 따라 올라가노라면 중간 중간에 돌에 글씨가 쓰여 있거나 성화가 새겨져 있는데 그곳이 바로 Via Dolorosa의 열네 군데의 기념처소라고 합니다. 하지만 그 열네 개의 기념처소라는 것이 그냥 길바닥 위입니다. 간혹 로마 가톨릭에서 세운 기념교회들이 있지만 이곳이 정말 Via Dolorosa인가, 십자가의 길인가라는 실망감이 드는 그런 장소였습니다. 물론 성지순례 가기 전에 이런 이야기를 듣고 갔지만 생각보다는 훨씬 실망스러운 수준이었습니다.

여러분들도 마찬가지일 것입니다. 이번에 성지순례를 가서 느낀 것이 성도라면 모름지기 일생에 성지순례 한두 번은 꼭 와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회교 신자들은 일생에 반드시 성지인 사우디아라비아 메카에 꼭 한번은 성지순례를 다녀와야 정식 신자로 인정해 준다는데 우리 기독교 신자들도 반드시 한번 이상은 성지순례를 해야 신앙이 더 자라겠다고 생각해서 저는 앞으로 저희 교회에서도 2~3년에 한번 씩은 성도들을 모집해 성지순례를 가야 하겠다고 결심했습니다. 하지만 여러분, 적어도 예루살렘에 있는 Via Dolorosa에 갈 때만은 너무 기대를 크게 하지 마십시오. 성지순례 가기 전에 그곳에 가면 골고다 언덕이 서있고 마치 예수님이 지셨던 십자가라도 거기 남아있을 것 같은 생각을 하지만 이런 기대를 하고 갔다가는 실망하기 딱 알맞습니다. 그냥 시장통 길바닥 위에 몇 개의 기념처소가 있을 뿐이고, 갈보리 십자가 자리 위에 세워졌다는 기념교회에는 제단에 뚫린 어둡고 자그마한 구멍 속으로 잘 보이지도 않는 바위가 하나 있어 그 위에 십자가가 세워졌다고 할뿐입니다. 예수님이 장사 지내졌다고 하는 동굴무덤 위에 세워진 성묘교회에도 가보면 동굴의 형체는 아예 찾아 볼 수도 없습니다. 그나마 그곳에 남아 있는 기념교회들은 모두 우리 개신교와는 너무나 거리가 멀고 생소한 로만 가톨릭이나 동방정교회 교회들뿐이지 개신교 교회는 찾아볼 수가 없습니다. 적어도 겉으로 볼 때는 이렇게 실망스러운 곳이 Via Dolorosa이고 십자가의 길입니다.

겉모습보다 중요한 것

그런데 말입니다. 참 이상한 일이 있습니다. 이렇게 겉으로 볼 때는 참 별 볼일 없고 실망스러운 곳이 Via Dolorosa, 십자가의 길인데 놀랍게도 그곳에 가본 사람들은 누구나 엄청난 은혜와 감동을 받습니다. 왜 그럴까요? 왜 그 소란스럽고 번잡한 시장통에서 사람들은 감격의 눈물을 흘리게 되는 것일까요? 왜 우리와는 너무도 거리가 멀어 보이는 가톨릭교회 한 가운데 서서 모든 성지순례자들은 가슴이 한 없이 뜨거워지는 경험을 하는 것일까요?

그 이유는 이것입니다. 비록 지금은 그 흔적이 거의 남아있지는 않지만, 이곳이, 내가 지금 서 있는 곳이 예수님이 십자가를 지고 걸어가셨던 그 길이구나 하고 생각하니 감격이 되는 것입니다. 겉모습이야 어찌 되었던, 지금 어떤 유물이 남아있고 어떤 흔적이 남아있느냐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내가 서있는 이 자리에 예수님의 십자가의 정신이 서려있기 때문에 Via Dolorosa가, 십자가의 길이 중요한 것입니다. 어떤 분들은 Via Dolorosa에 가서 이런 말씀을 합니다. “에게, 이게 뭐야? 앞으로 좀 우리 개신교도 여기에 교회를 세우고 기념관도 세우면 좋겠어.” 하지만 저는 반대합니다. 그곳에 기념관을 세우고 교회를 세우는 일은 그리 중요하지 않습니다. 그 장소를 잘 꾸미고 겉모습을 그럴싸하게 포장하는 것보다 그곳에 지금도 남아있는 십자가의 정신이 더 중요하기 때문입니다.

지금의 터키에 남아있는 소아시아 일곱 교회도 마찬가지입니다. 요한계시록 2장과 3장에 보면 에서버두사빌라, 에베소 서머나 버가모 두아디라 사데 빌라델비아 라오디게아 일곱 교회가 나오는데 이 일곱 교회는 오늘날 터키의 소아시아 지역에 남아있습니다. 그런데 그곳을 애써 찾아가보면 정말 실망할 수밖에 없습니다. 한 두 교회는 지금도 그 웅장했던 교회의 터가 잘 남아있지만 대부분은 기둥과 돌 몇 개만 뒹구는 터만 덩그러니 남아있습니다. 심지어 어떤 교회는 교회 터조차 정확히 어디인지 알기 어려운 경우도 있습니다. 그래서 사람들이 “이게 뭐야?” 하고 실망합니다. 거리는 좀 멀어야지요. 일곱 교회가 우리나라처럼 자동차로 한 두 시간 거리에 모여 있는 것이 아니라 어떤 경우는 일곱 시간 여덟 시간 차타고 가야 하는 먼 거리에 있는데 차멀미 해가며 애써 찾아가보니 터만 덩그러니 남아있어 실망은 더욱 커집니다. 그래서 이런 곳에 뭐 그렇게까지 고생을 하며 찾아오나 싶을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저는 그 터를 보고 은혜를 더 많이 받았습니다. 편안한 시대가 아닌, 핍박과 환란의 받던 시대에 소아시아 일곱 교회 성도들이 바로 이 터 위에서 생명을 걸고 신앙생활을 했다고 생각하니 정말 감격적이었습니다. 더 의미 있는 것은 그토록 번성하던 그 교회들이 지금은 터만 남아 있다는 사실입니다. 한때 사도 바울의 선교여행을 통해 온 소아시아가 다 복음화 되고 수많은 교회들이 세워졌는데 지금은 이슬람 국가가 되어 교회는 다 사라지고 일곱 교회는 터만 남아있습니다. 정말 서글프고 안타까운 일입니다. 하지만 만약 거기에 기념하기 위해 대대적으로 교회를 다시 재건하고 큰돈을 들여 기념관을 세운다면 이런 의미는 다 사라지고 단순히 관광지로 남게 될 것이기에 저는 개인적으로 그 터를 그대로 방치해 두었으면 하고 생각합니다. 겉모습보다 정신과 의미가 더 중요하기 때문입니다.

십자가의 길의 의미

아무튼 이렇게 겉모습보다 중요한 것이 십자가의 의미이기에 저는 여러분도 꼭 한 번 이상 Via Dolorosa에 가보기를 바랍니다. 그러면 이 Via Dolorosa에 서려있는 십자가의 정신은 무엇인지 세 가지로 생각해 보기로 합시다.

첫째, 이 십자가의 길은 고통과 수치의 길입니다. 오늘 본문 27절부터 보면 빌라도 총독의 관저에서 예수님에게 사형선고를 내린 후 어떻게 합니까? 예수님의 옷을 벗기고 홍포, 즉 진홍색(scarlet) 옷을 입힙니다. 진홍색 옷을 입히기 전에 잔인한 채찍질로 이미 예수님의 몸은 갈기갈기 찢겨 있는 상태입니다. 그런데 그 찢기고 패인 몸에 홍포를 입힌 것입니다. 이 홍포란 아마 로마의 군병들이 입던 짧고 붉은 망토였을 것으로 생각됩니다. 이 홍포를 입히니 이미 채찍질로 찢겨 있던 몸에 이 홍포가 달라붙어 흘러나온 피와 더불어 응고된 상태가 되었던 것입니다. 군병들은 예수님을 조롱한 후 이 홍포를 벗기는데 이때 응고된 피와 함께 달라붙어 있던 홍포가 벗겨지면서 상처가 다시 터져 또 한 번 극심한 고통을 겪게 됩니다. 이렇게 예수님은 잔인한 채찍질로 인해 이미 죽음 직전까지 가는 고통을 당한 상태인데 고통은 이것으로 끝나지 않습니다. 그 다음에는 조롱이 이어집니다. 군병들은 가시로 면류관을 만들어 왕관 대신 예수님의 머리에 씌우고, 갈대를 왕의 홀 대신 예수님의 손에 쥐어주며 그 앞에 무릎 꿇고 희롱합니다. “네가 유대인의 왕이라며? 유대인의 왕이여 평안할지어다.” 그러더니 군병들은 예수님에게 침을 뱉고 갈대를 빼앗아 예수님의 머리를 탁탁 칩니다. 요한복음 19:3에 보면 군병들이 예수님의 뺨을 손바닥으로 때리기까지 했습니다. 오늘 본문에 보면 이 로마 군병들뿐 아니라 지나가는 사람들과, 또 대제사장과 서기관과 장로들도, 심지어 예수님과 함께 십자가에 못 박힌 좌우의 살인강도들까지도 예수님을 조롱하고 모욕했습니다. 이 얼마나 끔찍한 조롱이며 견디기 힘든 모욕입니까? 도대체 왜 아무 죄 없는 분이 이런 고통을 당해야 하며, 왜 존귀하신 하나님의 아들이 이런 모욕과 수치를 당해야 했을까요?

둘째, 이 십자가의 길은 고통과 수치를 통해 나는 죽고 남을 살리는 길입니다. 앞서 말한 대로 예수님이 왜 그런 엄청난 고통과 수치를 당해야 했는가? 그것은 십자가가 바로 내가 고통 받고 내가 수치와 모욕을 당하고 내가 죽음으로 남을 살리는 길이기 때문입니다. 사실 예수님이 우리를 구원하실 때 다른 방법을 택할 수도 있었을 것입니다. 말씀만으로도 천지를 창조하신 분이 얼마든지 말씀만으로도, 손 하나 까딱하지 않는 방법으로도 우리를 구원할 수 있었을 텐데 왜 굳이 이렇게 자기를 희생하는 방법을 택하신 것일까요? 세상에서 남을 돕고 살리는 방법은 여러 가지입니다. 며칠 전 신문에 어려서부터 당뇨와 만성신부전을 앓아온 약혼녀에게 자신의 신장과 췌장을 기증한 사람 이야기가 나왔습니다. 사랑하는 사람을 돕기 위해 돈 내고 다른 장기 기증자를 찾을 수도 있었을 텐데 굳이 내 장기를 이식한 것은 이 사람이 참 사랑의 의미를 알았기 때문입니다. 참 사랑은 내가 조금도 희생하지 않고 말로만 겉으로만 하는 것이 아닙니다. 참 사랑이란 사랑하는 사람을 돕기 위해 내가 얼마든지 희생할 수 있고 얼마든지 내 생명도 줄 수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사랑하는 우리를 구원하기 위해 쉽고 편한 길을 택하지 않으셨습니다. 가장 어려운 길, 가장 힘들고 고통스럽고 수치스러운 길, 그러나 가장 큰 사랑의 길을 택하셨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34절에서 쓸개 탄 포도주를 거부한 것입니다. 이 쓸개 탄 포도주는 일종의 마취제로서 십자가형을 받는 죄수가 워낙 고통이 심하니까 자비를 베푸는 의미에서 주는 것인데 예수님은 이것마저 거부하며 우리를 위해 당하는 고통을 하나도 남김없이 받으신 것입니다. 이 길이 바로 십자가의 길입니다.

셋째, 이 십자가의 길은 우리도 반드시 따라가야 할 길입니다. 오늘 설교 마치고 부를 찬송이 136장 ‘거기 너 있었는가 그 때에’입니다. 저는 이번에 성지순례를 통해 예수님의 십자가 현장을 방문했습니다. 이것만 해도 감격스러운데 이 찬송 136장은 한술 더 떠서 우리가 그 때에, 예수님이 십자가에 달리시던 바로 그 때 그 현장에도 우리가 서있어야 한다고 말합니다. 우리고 그 십자가의 현장에 동참해야 한다는 뜻입니다. 그런데 십자가의 길은 여기서 한발 더 나아가 그 십자가의 현장에 우리가 서있기만 하는 것이 아니라 그 십자가를 우리도 지고 우리도 그 Via Dolorosa, 십자가의 길을 주님과 함께 걸어가야 한다고 요구합니다. 그 까닭은 마태 16:24에 나옵니다. “이에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아무든지 나를 따라 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좇을 것이니라.” 앞서 말한 대로 십자가의 길은 철저한 자기희생의 길입니다. 자기를 희생한다는 것은 자기를 부인하는 것입니다. 내 욕심, 내 주장, 나를 지키고 보호하려는, 내가 편해지려는 본능, 내가 높아지고 드러나려는 생각을 다 부인해야만 십자가를 질 수 있습니다. 저는 이번에 Via Dolorosa의 길을 걸으며, 그 갈보리 언덕에 서서 나도 이 십자가를 지고 가야 한다는 사실을 절실하게 깨닫고, 결코 편한 길, 쉬운 길이 아닌 주님을 위해 험하고 힘든 자기 부인의 길을 가야 함을 깨닫고 돌아왔습니다.

이번에 성지순례의 맨 마지막 여정으로 터키의 이스탄불을 가보았습니다. 이스탄불은 한때 동로마제국의 수도인 콘스탄티노플로서 거기에는 찬란한 기독교의 유산인 성 소피아 교회당이 세워져 있습니다. 그런데 지금 이 성 소피아 교회는 더 이상 교회가 아닙니다. 회교도들이 이곳을 점령한 후 단 7일 만에 이 찬란하고 장엄한 기독교의 유산을 회교사원으로 바꾸어 놓았습니다. 이번에 가보니 회교도들은 이곳에 있는 모든 십자가를 파내고 파괴해 버렸더군요. 비록 우리 입장에서 볼 때 끔찍한 만행이지만 적어도 회교도들은 이 사실 하나만은 분명히 알고 있었던 것입니다. 바로 “십자가 없이는 구원도 없고, 십자가 없이는 기독교도 없다”는 진리입니다. 그래서 이들은 그토록 애써 십자가를 제거한 것입니다. 오늘날 마귀 사탄도 이 사실을 잘 알고 있기에 어떻게든 이 땅 위에서, 그리고 우리 믿는 자들의 마음속에서 십자가를 파내고 제거하려 애쓰고 있습니다. 그래야 기독교가 뿌리 뽑힐 테니까요. 여러분, 십자가 없이는 구원도 없고 기독교도 없습니다. 오늘 이 사순절 넷째 주일을 맞으며 우리는 예수님의 십자가의 길, Via Dolorosa의 발자취를 따라가며 그가 지신 십자가를 그 누구도 빼앗거나 제거할 수 없게 우리 마음속 깊이 되새겨야 할 것입니다.
(이하준 목사)

이런 글도 찾아보세요!

공유

facebooktwitterpinterestbandkakao story
퍼머링크

댓글 0

권한이 없습니다. 로그인

신고

"님의 댓글"

이 댓글을 신고 하시겠습니까?

삭제

"님의 댓글"

이 댓글을 삭제하시겠습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