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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하나님이 내게 주셨느니라 (창 30:25 - 창 31: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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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비타(Evita)'라는 제목의 아주 유명한 뮤지컬이 있습니다.
  이것은 아르헨티나에 실존했던 에바 페론이라는 한 여인의 파란만장했던 인생을 소재로 해서 만든 작품입니다.
  그녀는 원래 아주 가난한 집안에서 태어나서 술집 접대부 등을 전전하다가 기회를 붙잡아서 단역배우와 라디오 아나운서의 자리까지 얻게 됩니다.
  그러던 와중에 후안 페론이라는 대령 군인을 만나서 그의 두 번째 부인이 되고, 그 둘은 당시 정치적으로 혼란의 연속이었던 아르헨티나의 대권 경쟁에 뛰어들어 결국 대통령 자리에 오르게 되는 것입니다.

  그 선거에서 결정적인 역할을 한 사람이 바로 에바 페론인데, 그녀는 선거운동을 하면서 "나는 여러분들과 꼭 같이 가난한 계급 출신이기 때문에 여러분들의 형편을 누구보다도 잘 압니다. 제 남편이 대통령이 되면 오직 빈자와 노동자들을 위한 정치를 하겠습니다."라는 공약으로 아르헨티나의 노동자층을 정치적 후원조직 단체로 만들고 서민들의 마음을 완전히 사로잡아 버렸던 것이었습니다.
  하지만 그들이 그 공약대로 노동자 중심, 사회보장제도 강화, 외국 자본의 국유화, 국가 주도하의 공업화 등 사회주의적 정책을 펼쳐나가기 시작할 때부터, 20세기 초까지만 해도 황금기를 누리고 있었던 아르헨티나의 경제는 기울어지기 시작합니다.

  부자들은 돈을 외국으로 빼돌리게 되고 실업률은 계속 증가하면서 경제상황은 악화일로로 치닫게 되고 결국 국민의 지지를 잃게 된 페론 대통령은 독재 집권 11년 후에 쿠데타에 의하여 쫓겨나게 됩니다.
  에바 페론은 남편 재임 중에 암으로 조사(早死)하게 되었는데, 그 직전까지 그녀는 부자들로 하여금 자기 재단에 강제기부를 하게 만들고 대통령 관저 부근의 골목에 가난한 사람들을 위한 공짜 빵 광주리를 설치해 둠으로써 엄청난 대중의 인기를 한 몸에 받았지만, 그녀 자신은 여왕보다 더 사치스러웠던 생활했던 것이 나중에 정권이 바뀐 후에 만천하에 드러나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아르헨티나는 그때로부터 지금까지 만성적인 경제 침체와 수차례의 쿠데타 집권의 혼란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는 것입니다.

  '부자는 나쁜 사람이다. 가난한 사람은 부자 때문에 가난하게 되었다. 그러니 부자의 돈을 빼앗아서 가난한 사람에게 나누어주어야 공평한 사회가 된다.'라는 에바 페론 식의 선동은 그 원조는 물론 공산주의이지만 오늘날 후진 민주주의 국가 안에서도 아주 흔히 듣게 되는 소리입니다.
  집권을 위해서라면 수단방법을 가리지 않는 저질 정치가들이 유권자의 절대다수를 차지하는 서민들의 표를 얻는 데에는 이런 선동이 최고로 효과적이라는 것을 잘 알기 때문입니다.

  과연 '부(富)'라는 것이 자본주의가 만들어 낸 사회악이겠습니까?
  과연 부자는 가난한 사람의 원수이며 미움 받아 마땅한 나쁜 사람이겠습니까?
  우리의 신앙은 물론 행위에 있어서도 유일한 규범이 되는 성경은 결코 그렇게 말씀하지 않습니다.
  성경은 부를 부정한 방법으로 축적하고 나쁜 목적으로 사용하는 것을 엄금하고 '돈을 사랑하는 것이 일만 악의 뿌리'라고 책망하고 있을 뿐, 그 어디에서도 부 그 자체를 정죄하지는 않습니다.
  그와 정반대로, 부야말로 신자가 이 세상에서 받아 누리게 되는 대표적인 축복임을 성경 곳곳에서 선언하고 있는 것입니다.

  야곱은 그처럼 '부의 축복'을 받은 대표적인 믿음의 조상입니다.
  오늘 우리는 그 야곱이 부자가 되기 시작했던 시점의 사건을 통하여, 왜 부는 선한 것이며 왜 우리 기독신자들은 모두가 부자가 되려고 해야 하는지 그 이유들을 세 가지로 함께 상고해 보고자 합니다.

  1. '부(富)'는 열심히 수고하고 노력한 일에 대한 '정당한 대가'이기 때문입니다.

  30장 25절부터 30절에 "라헬이 요셉을 낳은 때에 야곱이 라반에게 이르되 나를 보내어 내 고향 내 본토로 가게 하시되 / 내가 외삼촌에게서 일하고 얻은 처자를 내게 주어 나로 가게 하소서 내가 외삼촌께 한 일은 외삼촌이 아시나이다 / 라반이 그에게 이르되 여호와께서 너로 인하여 내게 복 주신 줄을 내가 깨달았노니 네가 나를 사랑스럽게 여기거든 유하라 / 또 가로되 네 품삯을 정하라 내가 그것을 주리라 / 야곱이 그에게 이르되 내가 어떻게 외삼촌을 섬겼는지, 어떻게 외삼촌의 짐승을 쳤는지 외삼촌이 아시나이다 / 내가 오기 전에는 외삼촌의 소유가 적더니 번성하여 떼를 이루었나이다 나의 공력을 따라 여호와께서 외삼촌에게 복을 주셨나이다 그러나 나는 어느 때에나 내 집을 세우리이까"고 기록했습니다.

  이 사건이 일어났을 때, 야곱은 자기 외삼촌 라반의 집에 와서 살기 시작한지 최소한 14년 이상의 세월이 흘렀을 때였습니다.
  원래는 라반의 딸 라헬을 자기 아내로 맞아들이기 위해서 7년 동안을 약속했지만 라반에게 속아서 레아와 결혼하게 되는 바람에 도합 14년의 세월을 공짜로 일해 주게 되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야곱은 이제 외삼촌 밑에 사는 더부살이를 청산하고 고향으로 돌아가서 독립하겠다고 마음을 먹었던 것입니다.
  야곱이 그런 뜻을 비쳐오자 당황한 라반은 그제야 "여호와께서 너로 인하여 내게 복 주신 줄을 내가 깨달았노니"라고 자기 재산 증식에 대한 야곱의 공로를 인정하면서 "네 품삯을 정하라 내가 그것을 주리라"고 하면서 그를 붙잡아두려 했습니다.

  그 품삯은 야곱의 편에서 볼 때에는 결코 외삼촌의 선심공세가 아니라 어디까지나 당연히 받아야 할 대가였습니다.
  30절에서 야곱이 "내가 오기 전에는 외삼촌의 소유가 적더니 번성하여 떼를 이루었나이다 나의 공력을 따라 여호와께서 외삼촌에게 복을 주셨나이다"라고 말하고 있는 대로, 라반이 현재 누리게 된 부는 순전히 야곱의 '공력' 즉 노동의 결과로 나타난 것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야곱은 "내 집을 세우는" 일, 즉 경제적으로 독립을 하지 못하고 있다가 이제 와서야 그 마땅한 대가를 받고 사유재산을 가지게 됨으로써 그 꿈을 이루게 되었던 것입니다.

  라반 역시 만약 일찍부터 야곱에게 그러한 정당한 대가를 지불해 주었더라면 그도 아무 비난 받을 일 없었을 것이고, '야곱의 공력을 따라서 여호와께서 그의 기업에 주신 부' 역시 정당하게 누릴 수 있었을 것입니다.
  형을 피해 도망쳐 왔던 야곱에게 의식주를 제공해 주었고 가정을 이루게 해 주었을 뿐 아니라 무일푼이던 그에게 일자리를 제공해 준 공이 분명히 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라반은 그동안 야곱에게 마땅히 돌아가야 할 대가까지도 가로채어 치부하다가 이제 와서야 뒷수습을 하려고 나섰던 것이었습니다.

  열심히 일을 하고 그 대가로 '자기 집을 세우는 것'은 모든 사람에게 주어진 정당한 권리입니다.
  '일찍 일어난 새가 벌레를 잡는다.'는 속담처럼, 열심히 일한만큼 자기가 먹고 살 재산을 모으는 것은 하나님께서 주신 삶의 기본 철칙 중에 하나인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재산의 축적을 죄악시한 것이 바로 로마천주교였습니다.
  참으로 아이러니컬한 것은, 그래서 중세의 수도승들은 '아무 것도 소유하지 않는 것'을 최고의 미덕으로 여기고 살았지만, 교황은 서민들과는 아예 담을 쌓고 오직 부자와 권력자들 사이에만 둘러싸여서 황제와 같은 부와 권력을 누렸다는 사실입니다.

  그처럼 서로 모순된 천주교의 교리와 실제 행동은 오늘날 공산주의자들에게서 그대로 답습되고 있습니다.
  이들은 사유재산이야말로 최고의 사회악이며 부자를 없애버려야 모든 사람이 평등하게 잘 사는 유토피아를 건설할 수 있다고 입에 침을 튀기면서 인민들을 선동해 왔습니다. 하지만 그런 공산주의자들의 약속이 비슷하게라도 성취된 나라가 이 지구상에 단 한 곳이라도 있습니까?
  오히려 레닌 혁명은 소련 인민들을 구 러시아 왕조 때의 농노들보다도 더 못 먹게 만들었고, 김일성에서 김정일로 이어지는 공산주의 독재는 북한을 지금 지구상의 최악의 거지 나라로 만들고 있지 않습니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처럼 부를 죄악시하고 부자를 증오한다는 공산주의 독재자와 인민 사이에는, 세상의 그 어떤 재벌과 서민 사이와는 비교도 되지 않는 최대의 빈부의 차이가 존재하고 있으며, 로마천주교회 역시 중세 때부터 지금까지 아무도 파악도 할 수 없는 엄청난 부를 축적하고 있는 것입니다.

  부를 곧 악이라고 여긴 천주교와는 달리, 노동을 신성하게 여기고 그 결과로 개인의 부를 누리는 것이 지극히 정당하다는 사실을 성경에서 발견하고 가르친 사람이 바로 요한 칼빈이었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자유경쟁 원칙에 따른 모든 경제활동과 그 결과 개인적으로 모으게 된 사유재산을 국가가 철저하게 보호해 주어야 한다는 이 자본주의 사상의 시조가 되었던 사람이 바로 칼빈이었다는 사실에 대해서는 불신 학자들까지도 동의하고 있습니다.
  노동자의 권리는 물론 경영자의 노력과 권리 역시 꼭 같이 인정하고 보호해 주는 것이야말로 진짜 공정하고 평등한 경제원칙인 것입니다.

  국가가 부자의 돈을 빼앗아서 가난한 사람에게 나누어 주는 것을 정당한 부의 분배라고 주장하는 소리는 어디까지나 서민 선동정치이지 결코 부국(富國) 경제원리가 아닙니다.
  그것은 지극히 비민주적일 뿐 아니라 부의 근원이 되는 노동의지와 생산성 자체를 없애버림으로써 망국을 스스로 부르는, 실로 어리석은 짓이라는 사실은 공산주의 국가들의 현실을 통하여 이미 검증이 끝나도 한참 전에 끝난 일입니다.
  분배만 외치고 생산성을 높이지 않으면 모든 사람이 부(富)가 아니라 빈(貧)을 나눌 수밖에 없는 것이며, 부자를 증오하고 없애버리고 나면 그 사회 전체는 분배할 부 그 자체가 사라져버리게 될 뿐인 것입니다.
  잠언 10장 4절에 "손을 게으르게 놀리는 자는 가난하게 되고 손이 부지런한 자는 부하게 되느니라"는 말씀대로, 개인의 노력에 따라 재물을 얻게 되는 것이야말로 가장 정당한 부의 분배인 것을 기억하면서, 하나님께서 모든 사람에게 공평하게 주신 이 '부자 되는 길'을 따라서 각각 '자기의 집을 부하게 세우는' 성도들 되시기를 바랍니다.

  2. '부(富)'는 하나님의 약속이 성취되어지는 '축복의 결과'이기 때문입니다.

  31장 4절부터 10절까지의 말씀에 "야곱이 보내어 라헬과 레아를 자기 양떼 있는 들로 불러다가 / 그들에게 이르되 내가 그대들의 아버지의 안색을 본즉 내게 대하여 전과 같지 아니하도다 그러할지라도 내 아버지의 하나님은 나와 함께 계셨느니라 / 그대들도 알거니와 내가 힘을 다하여 그대들의 아버지를 섬겼거늘 / 그대들의 아버지가 나를 속여 품삯을 열번이나 변역하였느니라 그러나 하나님이 그를 금하사 나를 해치 못하게 하셨으며 / 그가 이르기를 점 있는 것이 네 삯이 되리라 하면 온 양떼의 낳은 것이 점 있는 것이요 또 얼룩무늬 있는 것이 네 삯이 되리라 하면 온 양떼의 낳은 것이 얼룩무늬 있는 것이니 / 하나님이 이같이 그대들의 아버지의 짐승을 빼앗아 내게 주셨느니라 / 그 양떼가 새끼 밸 때에 내가 꿈에 눈을 들어 보니 양떼를 탄 수양은 다 얼룩무늬 있는 것, 점 있는 것, 아롱진 것이었더라"고 기록했습니다.

  라반이 야곱에게 지금까지 공짜로 일해 준 것을 어떻게 갚아 주면 좋겠느냐고 하자, 야곱은 그런 것은 바라지 않고 그저 앞으로 새로 태어날 양 새끼들 중에서 "아롱진 자와 점 있는 자와 검은 자," 그리고 염소 새끼들 중에서는 "아롱진 자와 점 있는 자"들만 자기 것으로 계산해 달라고 요구합니다.
  양은 주로 흰색, 그리고 염소는 흑색이나 갈색 등, 어쨌든 단색이 월등히 많기 때문에, 이것은 확률적으로 보아도 라반에게는 조금도 불리할 것이 없는 제안이었습니다.
  하지만 교활한 라반은 일단 그 제안에 동의한 후에, 야곱에게 약속한 새끼를 낳을 수 있는 무늬와 색깔을 가진 모든 양과 염소들을 다 따로 빼돌려서 자기 아들들에게 맡겨 놓았던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야곱이 치고 있는 가축들이 새끼를 낳게 될 때 좋고 실한 것들은 다 '아롱지고 점 있고 검은 것'들로만 태어나게 되면서 야곱은 약 6년 가까운 기간 동안에 "심히 풍부한" 부자가 됩니다.
  그 과정에 대해서는 30장 37절 이하 43절까지에 자세히 기록되어 있는데, 어떤 주석가들은 야곱의 그런 행동을 두고, 오늘날 소위 '멘델의 유전법칙'이라는 것을 야곱이 오랜 목축 경험을 통하여 절로 알고 있었기 때문이었다고 해석하기도 합니다.
  즉 서로 다른 종류의 형질을 교잡하는 경우에 제1대에서는 우성형질만 나타나고 열성형질은 잠재만 되어 있다가, 제2대에 가서는 그 잠재형질이 나타나게 되는 현상입니다.

  즉 야곱은 라반의 계책으로 인하여 단색의 가축만 거느리고 있었지만, 그 중에도 점이나 무늬나 색깔이 있는 열성형질을 잠재하고 있는 것들이 나중에 그런 새끼들을 낳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물론 그런 설명도 가능하기는 하지만, 진짜 중요한 것은 오늘 본문에서 야곱이 자기 아내들에게 간증하고 있듯이 하나님께서 그렇게 되게 해 주시겠다고 야곱에게 약속하셨다는 사실입니다.
  라반은 야곱이 거느리고 있는 가축 떼에서는 상식적으로 그런 새끼가 나오지 못하도록 완벽한 방해 공작을 해 두었지만, 하나님께서는 야곱의 가축에서 새로 태어날 새끼들은 다 "얼룩무늬 있는 것, 점 있는 것, 아롱진 것"이 되도록 해 놓으시고 그것을 야곱의 꿈으로 보여 주셨습니다.
  라반은 그 외에도 야곱을 "속여 품삯을 열 번이나 변역"하는 등 온갖 수단을 다 부렸지만, "그를 금하사" 야곱을 "해치 못하게" 즉 경제적으로 손해를 당하지 않게 지켜 주셨고 결국 라반이 부당하게 착취하고 있던 "짐승을 빼앗아"서 야곱에게 "주셨던" 것이었습니다.
  라반의 아들들은 '야곱이 우리 아버지의 소유로 인하여 거부가 되었다.'고 비난했고 라반 역시 그렇게 생각했겠지만, 야곱이 얻은 것은 어디까지나 정당한 것일 뿐 아니라, 하나님께서 친히 그에게 주신 축복, 특히 오랫동안 인내하고 꾸준히 노력한 자에게 내려주신 상급일 뿐이었습니다.

  결코 부 자체가 악한 것이 아니라 부당하게 부를 축적하는 사람이 나쁩니다.
  그것은 가난 자체가 미덕이 아니라 가난해도 원망하거나 불신하지 않는 것이 미덕인 것과 꼭 같은 것입니다.
  물론 부자들 중에는 '나쁜 부자'도 분명히 있습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모든 부자를 나쁜 사람으로 몰아붙이는 사람, 그리고 바로 그런 정치적인 선동으로써 가난한 사람들의 마음을 끌어들여서 결국 자기 개인의 권력과 부를 누리려는 정치가, 그런 자들이야말로 진짜 나쁘고 악한 사람이 아니겠습니까?

  왜 우리나라의 일부 정치가들은 소위 '강남 죽이기'라는 것을 무슨 정책처럼 행하는 것입니까?
  최근에 여당 원내대표라는 사람은 어느 실업고를 방문하여 "실업고에 다니는 학생이 강남의 일류고교에 다니는 학생에 비해 성공할 기회를 덜 갖게 된다는 것은 잘못된 것"이라고 하면서 "잘사는 사람은 계속 자기들끼리 잘살고 못사는 사람은 점점 어려워질 수밖에 없는 사회는 잘못된 것이고 결국 망하게 된다."라고 어린 학생들 앞에서 강연이라고 했습니다.
  실업고 학생들을 두고 "못사는 집 아이, 공부 못하는 아이'들로 싸잡아서 낙인을 찍은 그 당의 의장이라는 사람과 꼭 같이, 은근히 실업고 학생들 전체를 비하시키면서 그 화살을 강남의 부자들에게 날리는, 실로 믿기 어려울 정도로 교활하고도 유치한 정치 선동이 아닐 수 없습니다.

  내가 부자 되면 열심히 일해서이지만 남이 부자 되면 부정축재 때문이고, 내 자식이 일류대학에 가면 노력 때문이지만 남의 자식이 일류대학 가면 기회의 불평등 때문이고, 내가 국회의원이 되면 선거민의 지지 때문이지만 남이 국회의원 되면 다 부정선거 때문이라는 말입니까?
  가난한 사람도 누구나 다 언젠가는 자기도 부자가 되고 싶어 합니다.
  그러면서도 나보다 먼저 부자 된 사람은 다 나쁘다고 몰아붙이고, 강남이 이 대한민국의 부정부패의 소굴이나 되는 것처럼 비난하는 것은 도대체 무슨 논리입니까?
  그러니 부자들은 자연히 자기 재산 지키려고 돈을 국내에 투자를 하지 않고 외국으로만 빼돌리게 되니 경기 침체로 이어지는 것은 당연하고, 그 결과 바로 그런 정치가들이 그토록 위해 준다고 주장하는 서민들이 오히려 진짜로 죽어나게 되는 것입니다.

  공부 열심히 한 학생을 칭찬하고 철전팔기 끝에 국회의원 당선된 사람을 존경해야 한다면, 돈 버는 일에 성공한 사람 역시 높이 평가해 주어야 하는 것이 당연하지 않겠습니까?
  그래서 미국이나 일본 같이 자본주의에 성공한 나라에서는 재벌들이 사회에서 존경을 받는 인물이 되고 것입니다.
  성경 역시 잠언 10장 22절에 보면 "여호와께서 복을 주시므로 사람으로 부하게 하시고"라고 했습니다.
  하나님께서 사람에게 물질적인 면에서 축복하실 때에는 가난으로가 아니라 부로 복을 주시는 분이신 것을 기억하면서, 정당한 방법을 통하여 하나님께서 내려 주시는 재물 축복의 약속을 꼭 체험하는 성도들 되시기를 바랍니다.

  3. '부(富)'는 하나님 앞에서의 서원을 지키는 '선한 수단'이 되기 때문입니다.

  11절 이하 16절까지에 기록하기를 "꿈에 하나님의 사자가 내게 말씀하시기를 야곱아 하기로 내가 대답하기를 여기 있나이다 하매 / 가라사대 네 눈을 들어 보라 양떼를 탄 수양은 다 얼룩무늬 있는 것, 점 있는 것, 아롱진 것이니라 라반이 네게 행한 모든 것을 내가 보았노라 / 나는 벧엘 하나님이라 네가 거기서 기둥에 기름을 붓고 거기서 내게 서원하였으니 지금 일어나 이곳을 떠나서 네 출생지로 돌아가라 하셨느니라 / 라헬과 레아가 그에게 대답하여 가로되 우리가 우리 아버지 집에서 무슨 분깃이나 유업이나 있으리요 / 아버지가 우리를 팔고 우리의 돈을 다 먹었으니 아버지가 우리를 외인으로 여기는 것이 아닌가 / 하나님이 우리 아버지에게서 취하신 재물은 우리와 우리 자식의 것이니 이제 하나님이 당신에게 이르신 일을 다 준행하라"고 했습니다.

  여기서 우리는 하나님께서 야곱을 부자로 만드신 이유를 분명히 알 수 있게 됩니다.
  그것은 야곱으로 하여금 그가 서원했던 것을 지키도록 하시기 위함이었습니다.
  우리가 잘 아는 대로 야곱은 형 에서의 손에서 도망쳐 나와서 밧단아람으로 오는 도중에 벧엘에서 하나님을 만나서 "너 누운 땅을 내가 너와 네 자손에게 주리라, 땅의 모든 족속이 너와 네 자손을 인하여 복을 얻으리라, 내가 네게 허락한 것을 다 이루기까지 너를 떠나지 아니하리라"는 놀라운 축복의 약속을 받았습니다.
  그때 야곱은 바로 자기가 베고 잤던 돌을 바로 그 자리에 세워 제단을 쌓으면서, 하나님께서 그 모든 약속을 이루어 주시고 평안히 돌아오게 해 주시면 "내가 기둥으로 세운 이 돌이 하나님의 전이 될 것이요 하나님께서 내게 주신 모든 것에서 십분 일을 내가 반드시 하나님께 드리겠나이다"라고 서원했던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바로 그 약속을 성취해 주시면서 이제는 야곱 편에서 그 서원을 지키게 하셨습니다.
  즉 아곱이 그냥 밧단아람에서 행복하게 살라고 부자 되게 해 주신 것이 결코 아니라, 가나안 땅으로 돌아가서 하나님 앞에서 반드시 행해야 할 일이 있었기 때문에 그 수단으로 부를 주셨던 것입니다.
  그래서 야곱은 외삼촌의 딸인 자기 아내들을 설득할 때에도 바로 그 점을 강조했던 것이고, 레아와 라헬 역시 자기 남편의 재물은 바로 하나님께서 자기 아버지에게서 취하여 주신 재물인 줄을 깨닫고 "이제 하나님이 당신에게 이르신 일을 다 준행하라"고 동의하게 됩니다.
  결국 야곱의 부는 개인의 부귀영화를 위한 것이 되지 아니하고, 약속의 땅 가나안에서 열두 아들들을 중심으로 신앙의 큰 가족을 계속 번성시켜 감으로써 결국 이스라엘이라는 하나님의 선민을 완성해 내는 선한 수단으로 사용되었던 것입니다.

  아까 모든 사람이 다 부자가 되고 싶어 한다고 말씀드렸지만, 기독신자가 부자 되려 하는 것과 불신자가 부자 되려 하는 것에는 그 목적에 있어서 결정적인 차이가 있습니다.
  불신자들은 어디까지나 '내 영혼아, 평안이 먹고 즐기자.'라는 순전히 이기적인 욕심 때문에 돈 벌려고 아옹다옹하지만, 우리 신자들은 '모든 것이 주께로부터 온 줄'을 알고 '주의 제단 앞에 모두 바친 후에 주와 온전히 사귀기 위한' 이 놀랍도록 고귀하고 차원 높은 목적 때문에 물질 축복 받기를 위하여 기도하며 노력하는 것입니다.
  불신자들은 그처럼 재산을 모으는 과정에서 스스로 돈의 노예가 되어 버리지만, 우리 기독신자들은 '한 사람이 두 주인을 섬기지 못한다'라는 예수님의 교훈을 끝까지 잊어버리지 아니하고 그 재물을 오직 한 주인이신 하나님만을 기쁘시게 하기 위하여 선용할 줄 아는 것입니다.

  현실적으로 볼 때에도, 사람이 하나님을 섬기는 방법 중에 제일 큰 것은 바로 자기 몸 전체를 헌신하는 풀타임 복음 사역자가 되는 것이지만, 그 외의 평신도들에게 있어서 가장 대표적인 헌신은 역시 물질로 하는 것입니다.
  자기의 노력 봉사를 통한 헌신도 물론 중요한 것은 두말할 필요 없지만 역시 시간과 공간에 많은 제한을 받을 수밖에 없습니다.
  하지만 헌금은 전도자들의 생활비를 제공하고 성전을 짓고 관리하며 문서와 방송을 통하여 선교하며 멀리 개척교회들과 선교지 교회들에 이르기까지, 이 복음사업, 예수 그리스도의 왕국 운동 구석구석까지 안 쓰이는 곳이 없는 것입니다.

  모름지기 기독신자들은 하나님께로부터 물질의 축복을 받게 될 때, 그것을 바로 이런 선한 목적을 위한 선한 수단으로 사용하는 것을 결코 잊어버려서는 아니 됩니다.
  불신자들 세계에서도 아무리 부자가 되었다 해도 사회사업 등을 통해서 재산의 환원을 행할 줄 모르면 '졸부(猝富), 벼락부자'라는 핀잔을 들을 수밖에 없지 않습니까?
  하물며 자기에게 재물 얻을 능을 주시고 약속한 기업 축복을 베풀어 주신 하나님께 보은할 줄 모르고 서원을 잊는다면 그 사람은 그야말로 '졸렬(拙劣)한, 쓸모없고 못난 부자'로만 살다가 하나님께서 그 잠시 주신 것을 도로 거두어 가시는 날에는 아무 남긴 것도, 쥔 것도 없이 세상을 떠날 수밖에 없게 될 것 아니겠습니까?
  그래서 잠언 11장 24절에서도 "흩어 구제하여도 더욱 부하게 되는 일이 있나니 과도히 아껴도 가난하게 될 뿐이니라"고 하신 것입니다.
  자기밖에 모르는 '졸렬한 부자(拙富)'가 되어서 오히려 그 번 돈에 자신의 영혼까지 팔아먹는 비참한 부자가 아니라, '먹든지 마시든지 무엇을 하든지 오직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라고 하는 이 위대하고 차원 높은 서원을 하나님 앞에 세우고 그것을 꼭 실행하는, 진짜 멋지고 훌륭한 부의 축복을 누리는 성도들 되시기를 바랍니다.

  성도님 여러분, 이 세상의 모든 피조물들이 '다 주에게서 나오고 주로 말미암고 주께로 돌아가는 것'들입니다.
  재물 역시 본질적으로는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선한 것'입니다.
  하지만 사람이 타락함으로써 만물도 함께 저주를 받았듯이, 사람의 욕심과 악이 재물을 부정하게 모으고 나쁘게 사용함으로써, 마치 돈 그 자체가 더럽고 부의 축적 그 자체가 죄나 되는 것처럼 오해되어지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바른 개혁주의 신앙에 뿌리박은 기독신자는 이처럼 사람의 타락 때문에 자기의 뜻과는 달리 "허무한 데 굴복하며" 그 때문에 "탄식하며 함께 고통하는" 피조물들로 하여금 "그 썩어짐에서 종노릇한 데서 해방되어 하나님의 자녀들의 영광의 자유에 이르게 하는" 실로 차원 높은 물질관을 가지고 살아가야 하는 것입니다.
  많은 종교인들과 소위 성인들이라는 자들이 '청빈(淸貧)'이라는 말을 가지고 자신도 속고 또 남들도 미혹시켜 왔습니다.
  그 때문에 대부분의 사람들은 '깨끗한 가난'이라는 것이 마치 물질 문제에 있어서는 최고의 덕목, 부동의 제1위 자리에 있는 것처럼 생각하게 된 것입니다.
  물론 잠언 19장 22하반절에서 "가난한 자는 거짓말하는 자보다 나으니라"고 말씀하는 대로, '깨끗한 가난뱅이'는 '더러운 부자'보다는 분명히 백배 더 낫습니다.

  하지만 우리 기독신자들은 그 '깨끗한 가난'보다 또 훨씬 더 좋은 것이 바로 '깨끗한 부자'라는 것을 깨달아야 합니다.
  "부자의 재물은 그의 견고한 성이요 가난한 자의 궁핍은 그의 패망이니라"는 잠언 10장 15절 말씀이 바로 그런 맥락입니다.
  즉 물질 문제에 있어서 개혁주의 신자들의 최고 덕목과 제일의 지향점은 '청빈'이 아니라 오로지 '청부(淸富)'가 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남을 속여서 치부하고 자기가 벌었다고 자만하고 하나님께 감사치도 아니하는 '더러운 부자'가 아니라, 열심히 노력하여 정당한 부를 쌓고 그 얻은 것 모두가 오직 하나님의 은혜인 줄로 깨닫고 그 주신 재물로 거룩한 서원들을 이행함으로써, '하나님께서 내게 주신 것'들을 가지고 결코 썩지도 없어지지도 아니할 하늘 창고에 영원한 재물을 쌓아가는, 진짜 '깨끗한 부자'의 복을 누리는 성도들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아멘. (석기현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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