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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그리스도인의 학교생활 (딤전 1:3-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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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마게도냐로 갈 때에 너를 권하여 에베소에 머물라 한 것은 어떤 사람들을 명하여 다른 교훈을 가르치지 말며 신화와 족보에 끝없이 몰두하지 말게 하려 함이라. 이런 것은 믿음 안에 있는 하나님의 경륜을 이룸보다 도리어 변론을 내는 것이라. 이 교훈의 목적은 청결한 마음과 선한 양심과 거짓이 없는 믿음에서 나오는 사랑이거늘, 사람들이 이에서 벗어나 헛된 말에 빠져 율법의 선생이 되려 하나, 자기가 말하는 것이나 자기가 확증하는 것도 깨닫지 못하는 도다. 그러나 율법은 사람이 그것을 적법하게만 쓰면 선한 것임을 우리는 아노라. 알 것은 이것이니, 율법은 옳은 사람을 위하여 세운 것이 아니요 오직 불법한 자와 복종하지 아니하는 자와 경건하지 아니한 자와 죄인과 거룩하지 아니한 자와 망령된 자와 아버지를 죽이는 자와 어머니를 죽이는 자와 살인하는 자며 음행하는 자와 남색 하는 자와 인신매매를 하는 자와 거짓말 하는 자와 거짓 맹세하는 자와 기타 바른 교훈을 거스르는 자를 위함이니, 이 교훈은 내게 맡기신바 복되신 하나님의 영광의 복음을 따름이니라.

1. 다른 교훈을 가르치지 말라.
예수 그리스도와 생명의 길에 대하여 잘못된 것을 말하지 말라는 뜻입니다. 하나님 말씀을 바로 알아야 합니다. 우리의 이기적인 목적이 성경말씀을 왜곡시키는 일이 없어야 하겠습니다.

2. 신화와 족보에 끝없이 몰두하지 말게 하라.
이런 것들은 하나님의 경륜이 아니라 변론을 냅니다. 신화는 거짓입니다. 실재가 아닌 상상의 세계입니다. 족보는 인간적 배경에 초점을 둡니다. 유대인들이 자랑하는 것이지만, 하나님께서는 족보를 따라 심판하지 않으십니다. 각 사람은 각각 하나님 앞에 서야 할 것입니다. 

참 교훈의 목적은
청결한 마음과 선한 양심과 거짓이 없는 믿음에서 나오는 사랑입니다.
율법은 옳지 못한 사람들을 위하여 세운 것입니다.

오늘은 크리스찬의 교육 이야기를 전하려고 합니다. 한국 기독교는 ‘기독교 교육’과 함께 시작되었습니다. 한국 기독교가 1885년에 시작되었는데, 바로 그 해 선교사요 의사였던 알렌은 한국 최초의 서구식 의과대학인 광혜원을 설립해서 인재를 양성했습니다. 이것이 세브란스의 전신이요, 세브란스는 연세대학의 전신입니다. 또한, 배재학당, 이화학당 등의 교육기관이 들어섰습니다. 한국 사립학교의 50% 가량이 기독교 사학이라고 들었습니다.

본문은 다음과 같이 네 가지로 요약할 수 있습니다.

1. 하나님의 진리 가르치는 것에 주안점을 두라.
2. 신화와 족보 같은 데 몰두하지 말라.
3. 참 교육자는 청결한 마음과 선한 양심과 거짓이 없는 믿음에서 나오는 사랑을 품으라.
4. 성경의 가르침은 옳지 못한 삶을 교정하는 것이다.

1. 하나님의 진리 가르치는 데 주안점 두기
다른 모든 것은 변합니다. 상황에 따른 지혜입니다. 어제 배운 것을 오늘 써먹기 어렵습니다. 그러나 하나님 말씀은 영원합니다. 우리는 하나님 말씀을 가르치는 데 초점을 두어야 합니다.

2. 신화와 족보 같은 데 몰두하지 말기
인간적인 자랑거리는 신화와 족보로 요약할 수 있습니다.

신화. 무슨 영웅담 같은 것, 부풀린 이야기
족보. 집안 이야기

3. 청결한 마음, 선한 양심, 거짓 없는 믿음에서 나는 사랑 품기
마음이 깨끗하다는 것
양심이 선하다는 것
믿음이 거짓이 없다는 것, 거기서 나는 사랑

3. 잘못된 삶을 교정하기

4월 2일 주일은 올해 첫 번째 “교육 세미나”를 엽니다. 주일 오후 1:30에 시작하는데, 여러분은 미리 그 시간을 비워 주시기 바랍니다. 

교육은 참 중요합니다. 천연자원이 거의 없는, 그리고 분단의 고통에 시달리는 대한민국이 세계 10대 경제대국 안에 들어설 수 있었던 데는 여러 이유가 있습니다. 그중에 ‘교육’이 주된 이유라고 생각합니다. 어머니들이 먹을 것 안 먹고 자녀들 교육에 최선을 다했습니다. 그 결과 세계를 이끌어가는 주류 대열에 들어섰습니다.

미국은 참 특이합니다. 중남미나 중동, 아시아 등에 나쁜 짓도 많이 했지만, 확실히 훌륭한 점이 많은 나라입니다. 미국이라는 나라도 역시 ‘교육’ 대국입니다.

최근 어떤 지파예배 때 나는 “미국 교육의 핵심 몇 가지 중 하나는 community college라”고 말했습니다. 2002년 가을학기, 나는 훌타임으로 DVC에서 공부하고 있었습니다. 어떤 영어 클라스에서의 일입니다. 한 사람씩 자기가 어떤 직업을 가지고 살아갈 것인지 나누는 순서가 있었습니다.

그때 어떤 20대 초반의 잘 생긴 백인 청년이 말했습니다. “나는 이 2년제 커뮤니티 칼리지를 졸업하면 곧 소방관이 되겠습니다.” 두 가지 점에서 놀랐습니다. 하나는 대학 공부를 2년만 하겠다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소방관이 목적이라는 것이었습니다. 말하자면 내 생각에 그의 영어, 그의 인종, 그의 건강, 그의 체격, 그의 모든 것이 다 아까웠습니다. 더 공부하면 더 좋은 직장을 얻을 수 있을 텐데.

그러나 그것은 나의 편견이었습니다. 학교를 오래 다녀야 좋은 교육이 아니고, 월급 많이 받고 대우 받는 직업이어야 좋은 직장이 아니라는 것이었습니다. 

약혼을 앞두고 순직한 고 박준우 소방대원의 어머니 김원숙 씨(64)는 아들이 죽은 지 3년이 지나는 해에 집 마당에 아들을 기리는 기념비를 세웠습니다. 아들이 기억 속에서 점점 무뎌져 가고 또 세상으로부터 잊혀져 가는 것이 너무 두려웠기 때문이라고 했습니다. 어머니는 매일 아침 기념비를 닦으며 거룩한 죽음으로 세상을 떠난 아들을 죽는 날까지 가슴에 묻고 갈 것을 다짐했습니다. 어머니가 어루만지는 기념비에는 아들이 남기고 간 업적 대신 “소방관의 기도”라는 시가 새겨져 있다고 했습니다. 

여러분께 소개해 드립니다. 한 가지, “신”이라고 부른 것을 “하나님”으로 바꾸었습니다. 가만 읽어 보니 기독교인 소방관이 쓴 것 같은데, 다시 ‘하나님’으로 되돌리는 것이 자연스러워 보였습니다.

<소방관의 기도>

하나님
제가 부름을 받을 때에는
아무리 강렬한 화염 속에서도
한 생명을 구할 수 있는 힘을 저에게 주소서.
너무 늦기 전에 어린아이를
감싸 안을 수 있게 하시고
공포에 떨고 있는 노인을 구하게 하소서.
격렬한 화염 속에서도 저의 귀를 지켜주시어
가냘픈 외침까지 들을 수 있게 하시고
신속하게 화재를 진압하여
어려운 이웃의 재산을 지키게 하소서.
제가 모든 일에 최선을 다할 수 있게 하시어
우리들의 이웃이 편안한 마음으로
숙면할 수 있도록 지키게 하여 주소서.
그리고 하나님의 뜻을 따라
저의 영혼이 육신으로부터 떠나게 되면
하나님의 은총으로 속세에 홀로 남을
저의 아내와 가족을 돌보아 주소서.

이 시는 5년 전 홍제동 화재 당시 순직한 고 김철홍 소방관의 책상에서 발견되어 유명해졌다고 합니다.

요즘 나는 매일 아침저녁으로 가정예배 때 여호수아 후반부를 읽고 있습니다.
잘 아시는 대로 여호수아는 모두 24장으로 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각각 12장씩 두 섹션으로 구분이 가능합니다. 첫 번째 섹션, 즉 1-12장은 ‘정복’ 이야기입니다. 두 번째 섹션, 즉 13-24장은 ‘땅 분배’ 이야기입니다.

[세계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나고 세계는 자본주의와 공산주의로 양분되었습니다. 자본주의는 어떻게 소유할 것인가에 초점을 두었다면, 공산주의는 어떻게 나눌 것인가에 중심을 두었습니다.]

땅을 각 지파에게 분배하는 여호수아 두 번째 섹션을 매일 묵상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참 공평하신 분이시라는 것을 날마다 느끼고 있습니다.

우리는 교육에서 하나님의 분배를 의식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교육은 ‘학교교육’과 ‘개인교육’을 모두 포함합니다. 교육이 ‘소유’에만 초점을 둔다면 그건 ‘전쟁’입니다. 교육처럼 훌륭하고 아름다운 것이 전쟁의 자리가 된다면 그것보다 더 비극적인 것을 찾아내기가 어렵겠습니다.

무조건 사회적으로 지위가 높고 월급이 많은 자리를 차지하기 위한 ‘직업교육’으로 전락한다면 모든 교육을 받는 학생들은 불행할 수밖에 없습니다. 교육의 장은 싸움터가 아닙니다. 가르치고 배우는 것은 ‘즐거움’입니다. 즐거움의 차원을 상실하지 말아야 합니다.

맹자는 세상을 살아가면서 세 가지 낙이 있다고 했습니다. 그중 하나가 “세상에서 뛰어난 영재를 얻어 교육하는 즐거움”이라고 했습니다. 입장을 바꾸어 생각해 봅시다. “학생이 좋은 선생을 만나 배우게 되는 것” 또한 얼마나 큰 즐거움입니까?

다시 ‘분배’의 차원으로 돌아갑시다.
하나님께서 우리 각자를 어떤 자리에 가라고 하시는가? 그걸 알고, 그를 위한 준비가 있어야 합니다. 그런 교육은 참 즐겁고 행복합니다. 그렇게 준비하여 얻은 ‘직업’은 job이 아닙니다. 그것은 vocation입니다. 영어의 두 가지 용례 중에 vocation은 “부르심”이라는 뜻을 품었습니다. 그냥 조건이 좋기 때문에 택한 직업이 아니라, 남들에게 밀려서 차선으로 선택한 직업이 아니라, 바로 ‘나의 하나님께서 나를 위해 준비해 두신 직업’이기 때문에 택했습니다. 이것이 vocation입니다.

여러분 가운데 학교에 다니는 자녀를 두신 분들은 세상이나, 학교, 직장이나 월급 등이 아니라 하나님을 먼저 생각해 보십시오. 과연 하나님께서는 여러분의 아이들에게 무엇을 원하실까? 어떤 땅을 얼마만큼, 어떻게 나누어 주실 것인가?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이제 학교에서 공부하고 있는 젊은이들, 혹은 직장을 찾아 구하는 여러분, 여러분은 여러분을 부르신 하나님을 만나 뵈어야 합니다. 세상 사람들이 찾아 구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것을 찾아가야 합니다. 그것을 위해 준비해야 합니다. 그래야 좋은 교육을 받을 수 있습니다.

머리가 좋다고 다 법대에 들어가고 의대에 들어간다면 그건 참 큰 문제입니다. 특별한 사명감 가지고 가야 할 학교들입니다.

법관이나 변호사는 사회를 이끌어가야 할 양심이어야 합니다. 돈을 더 벌기 위해 법대에 진학한다면 법을 이용하는 사람들이 되고 말 것입니다. 그래서 미국에는 ‘법대생이라고 하면존경하다가도 변호사라고 하면 멸시 한다’는 말이 있습니다.

몇 차례 말씀드렸지만, 의사야 말로 사명감이 절대로 필요한 직업입니다. 수학 잘한다고 의대를 지원했다가는 낭패를 면할 수 없습니다. 한 밤중에도 on-call 전화를 받아야 하고, 또 응급실로 달려가야 합니다. 고통에 신음하는 환자들의 불안한 신경을 누그러뜨릴 수 있는 미소와 사랑이 있어야 합니다. 그게 어디 공부 잘 하는 것으로 되는 문제입니까? 사명감 없이 머리만 좋으면 의료사고를 냅니다. 아픈 몸을 담보로 돈을 벌겠다면 그 얼마나 나쁜 일입니까?

이솝 이야기에 포도나무에 올라간 여우 이야기가 있어요. 다른 여우들은 다 실패했는데 어떤 여우는 성공했습니다. 다들 부러워하면서 둘러서 있는데, 올라간 여우는 포도를 한 알 따서 우아하게 먹었습니다. 친구들이 침을 삼키면서 “맛있어? 맛있겠지, 맛있을 거야!!” 그랬습니다. 그런데 실제로는 시어서 먹을 수가 없는 지경이었습니다. 그렇지만 나무 위에 올라간 여우는 계속해서 우아하게 그 포도를 다 먹었다는 이야깁니다. 그리고 배탈이 나서 곧 죽었다지요, 아마?

직장 혹은 자리에다가 초점을 맞춘 비극적 예가 또 하나 있습니다. 최근에 한국 초등교육을 기획하는 자리에 있는 어떤 분을 만나 이야기할 기회가 있었습니다. 그분의 말이, 지금 한국에서는 서울대 법대와 의대 빼고는 서울교육대학이 들어가기 어렵다고 했습니다. 물론 초등교육이 중요합니다. 그러나 전국의 수재들이 교육대학에 들어가서 어떻게 되겠습니까? 대학의 교수가 된다면 모르지만, 초등학교 교사가 되어 일생을 살아간다면 그건 분명히 인력의 낭비 아닙니까? 어쩌면 그래서 전교조 같은 교사들 활동이 대단한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냥 순수하게 교육에 전념하면 될 텐데, 좋은 머리를 가지고 모여서 이익 극대화를 위한 노력을 기울입니다. 비정상입니다. 고등학교 때까지 선생님들은 교육내용보다 함께 어울리는 ‘삶’을 가르칠 수 있어야 합니다. 이건 정말 어느 정도 목회자와 비슷한 사명감이 요구되는 일입니다.

내 생각입니다. 우수한 두뇌집단은 평생 연구하는 직업을 가져야 합니다. 기초과학 같은 학문에 매진해 주어야 합니다. 머리 좋은 사람이 의사가 되는 것은 바람직하지만, 정말 머리 좋은 사람은 연구실에서 연구할 수 있는 여건이 마련되어야 합니다. 환자를 돌보는 일은 조금 머리가 떨어지더라도 사람을 좋아하고 사명감이 있어야 합니다.

정치하는 사람도 지나치게 머리가 좋으면 문제가 많습니다. 국민의 종 아닙니까? 그러니까 시키는 대로 잘 하는 정도의 머리를 가진 사람이 필요한 자리입니다.

법과대학도 중간만 조금 넘으면 들어갈 수 있어야 합니다. 보통의 두뇌를 가진 정치인들이 입법하지 않습니까? 사법기관에서 일하는 사람들이 지나치게 머리가 좋아 버리면 법을 운용할 때 문제가 생깁니다.

기왕에 말이 났으니, 신학대학은 어때야 하는가 생각해 봅시다. 목회자가 사명이라면 좋은 머리 아니더라도 됩니다. 보통이면 된다고 생각합니다. 정말 하나님께서 부르셨다는 사명감이 절대로 필요합니다. 지금 신학교 들어가기가 참 어려워요. 그게 목회를 직업으로 보아서 그런 것 같습니다. 직업으로 보아도 그렇지, 한국 교회에 대형교회가 많으니까 다 그런 줄 아는 모양이지요? 들으니 한국 전국 교회의 80% 이상이 출석교인 300명 이하의 교회라는 겁니다. 목회자는 보통 머리면 되는데, 사명이 있어야 합니다.

그렇지만 학자가 될 사명이라면 상황이 다르겠지요. 신학공부를 해 보니까 정말 공부할 게 많아요. 머리도 머리지만 하루 종일 책상에 붙어 앉아 연구하는 게 즐거워야 하겠습니다. 또 가르치는 즐거움을 누릴 수 있어야 합니다. 

모두 알맞은 자리에 서야 합니다. 그래야 나라에 장래가 있고, 인류가 미래를 내다 볼 수 있습니다. 초등학교 교사 같은 안전한 직장을 확보하는 데 중고등학교 때부터 혈안이 되어 있다는 것은 결코 정상적인 나라에서 찾아 볼 수 없는 일입니다.

다시 분배로 돌아갑니다. 세상은 제한되어 있는 공간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 각 사람을 하나님의 뜻에 따라 각각의 자리에 배치시키시고 계십니다. 이런 때, “아닙니다, 하나님. 저는 그 일 말고 다른 일을 해야겠습니다.” 그렇게 항거할 것입니까?

내가 마게도냐로 갈 때에 너를 권하여 에베소에 머물라 한 것은 어떤 사람들을 명하여 다른 교훈을 가르치지 말며 신화와 족보에 끝없이 몰두하지 말게 하려 함이라. 이런 것은 믿음 안에 있는 하나님의 경륜을 이룸보다 도리어 변론을 내는 것이라. 이 교훈의 목적은 청결한 마음과 선한 양심과 거짓이 없는 믿음에서 나오는 사랑이거늘, 사람들이 이에서 벗어나 헛된 말에 빠져 율법의 선생이 되려 하나, 자기가 말하는 것이나 자기가 확증하는 것도 깨닫지 못하는 도다. 그러나 율법은 사람이 그것을 적법하게만 쓰면 선한 것임을 우리는 아노라. 알 것은 이것이니, 율법은 옳은 사람을 위하여 세운 것이 아니요 오직 불법한 자와 복종하지 아니하는 자와 경건하지 아니한 자와 죄인과 거룩하지 아니한 자와 망령된 자와 아버지를 죽이는 자와 어머니를 죽이는 자와 살인하는 자며 음행하는 자와 남색 하는 자와 인신매매를 하는 자와 거짓말 하는 자와 거짓 맹세하는 자와 기타 바른 교훈을 거스르는 자를 위함이니, 이 교훈은 내게 맡기신바 복되신 하나님의 영광의 복음을 따름이니라.

디모데전서는 사도 바울이 믿음의 아들 디모데에게 보내는 첫 번째 편지입니다. 디모데는 초대교회 지도자 몇 사람 중 하나였습니다. 디모데를 보면 사도 바울은 교육에 성공한 교육자였습니다.

1. 디모데는 에베소에서 사역하도록 부르심 받았습니다. 사도 바울을 통하여 하나님께서 그렇게 부르신 것입니다.
2. 에베소에서 할 일이 있었습니다. 다른 교훈을 가르치지 못하게 하고, 신화와 족보에 끝없이 몰두하게 하지 말도록 가르치기 위함이었습니다.
3. 청결한 마음과 선한 양심과 거짓이 없는 믿음에서 나는 사랑을 가르치기 위함이었습니다.
4. 율법을 가르쳐서 잘못된 길로 가는 사람들을 바르게 교육해야 했습니다. 불법한 자들, 복종하지 않는 자들, 경건하지 않은 자들, 거룩하지 않은 자들, 망령된 자들, 어머니 아버지를 죽이는 자들, 살인하는 자들, 음행하며 동성연애하며 인신매매 하는 자들, 거짓말 하는 자들, 거짓맹세 하는 자들, 그밖에 바른 교훈을 따르지 않는 자들을 가르쳐 바르게 이끄는 사명입니다.

하나님께서 디모데에게 요구하신 것은 1. 목회자, 2. 교사, 3. 진정한 그리스도인 등이 되라는 것이었습니다.

오늘 이 말씀은 우리 모두에게 해당되는 말씀입니다. 그리스도인 된 여러분은 세상에서 잘못된 길로 가는 모든 사람들에게 말씀을 가르쳐 지키게 해야 할 의무가 있습니다. 1. 여러분의 때에, 2. 여러분의 자리에서, 3. 여러분이 받은 달란트대로 성실하게 일해야 합니다. 

진정한 교육은 “참된 그리스도인이 되는 길”에 있습니다.
그리스도인은 의사 슈바이처처럼 아프리카로 가기도 하고, 세계 곳곳에 나가 있는 선교사들처럼 여건과 지위를 따지지 않고 위험한 곳, 불리한 곳으로 갑니다. 또 우리처럼 미국에 오기도 합니다. 앞으로도 우리는 하나님께서 부르시면 어디든지 달려갈 준비를 해야 합니다. 그를 위한 모든 준비를 ‘교육’이라고 부릅니다. 우리는 이 교육에 성공해야 하겠습니다.

함께 기도드리겠습니다.
사랑하는 주님. 주님께서 저희들을 쓰시려 하실 때, 마땅히 귀하게 쓰임 받을 수 있도록 준비하게 하옵소서. 주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조은석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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