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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선택된 자의 선택 (창 13:1-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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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주일에는 하나님께서 아브람을 부르셔서 “고향, 친척 아비 집을 떠나 내가 네게 지시할 땅으로 가라”고 말씀하신 일에 대해서 그리고 이러한 하나님의 부르심에 아브람은 순종하여 나아가게 된 사실에 대해서 생각하는 시간을 가졌습니다. 이는 우리 인간들이 하나님을 제외하고도 행복해지거나 성공할 수 있다는 바벨탑 쌓는 계획이 실패한 데 따른 새로운 구원의 계획이 한 인간을 부르시는 데에서 시작된다는 의미가 있다고 말씀 드렸습니다.

이렇게 아브람을 부르신 하나님은 아브람에게 세 가지 귀한 복을 약속하셨습니다. 하나는 땅의 복입니다. 또 하나는 자손의 복입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는 복의 근원이 될 것이라는 복입니다. 사실, 구약성경은 이러한 아브람에게 주신 하나님의 복이 이스라엘 역사에서 어떻게 이루어져 나아가는 가를 보여주는 말씀입니다. 이러한 하나님의 복의 약속이 어떻게 역사 속에서 현실화되어가는 가를 나타내주는 말씀이 구약성경의 전체적인 조망이라는 것입니다. 결론적으로 말씀드리면, 땅의 복은 여호수아 시대에 가나안 땅을 차지하게 되는 것으로 이루어진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리고 자손의 복은 야곱의 12 아들들이 각 지파의 족장이 되어 이스라엘이라는 국가가 형성되는 모습으로 이루어짐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그리고 복의 근원으로서의 복은 결국 이스라엘이 감당하지 못하여 하나님께서는 예수 그리스도라는 메시아를 통해 이 복의 약속을 신약 시대로 이어갈 수 있게 해 주신다는 사실을 우리는 알고 있습니다. 이렇게 전체적으로 이 하나님의 복이 이루어지는 것을 발견하지만, 이와 더불어 이스라엘의 각 시대 시대를 통해서도 이루어져 나가고 있음을 우리는 알 수 있습니다. 오늘 본문의 이야기도 바로 이러한 하나님의 복이 아브람 시대에 어떻게 이루어지고 있는가를 보여주는 말씀인 것입니다. 오늘 본문은 특히 땅을 주시겠다는 하나님의 복의 약속이 어떻게 아브람에게 이루어지는가를 보여주는 내용입니다. 오늘 본문의 이야기는 평범한 우리들이 그냥 읽어서도 쉽게 알 수 있는 그러한 이야기입니다. 즉, 세상에서 이렇게 양보하고 살면 결국 복 받는다고 이해할 수 있는 당연한 말씀처럼 보이기도 합니다. 하지만 여기에는 이러한 당연한 모습을 넘어서는 다른 메시지가 담겨 있기도 합니다.

사실 오늘 본문의 땅으로 오기까지에는 약간의 곡절이 있었습니다. 그것은 오늘 본문의 앞부분인 창 12:10 이하에 나와 있는 이야기입니다. 아브람이 자기의 조카 롯과 함께 고향을 떠나 약속의 땅 가나안 땅에 들어왔지만, 마침 그 가나안 땅에 기근이 들었기 때문에 거기서 살 수 없었습니다. 이에 아브람과 그 일행은 멀리 애굽으로 갔습니다. 하지만 거기서 온갖 수모를 당하며 어려운 생활을 하였다는 이야기입니다. 그러다가 다시 하나님이 약속하신 땅으로 돌아와서 여기서 열심히 살면서 드디어 자리를 잡게 되었습니다. 이제는 어느 정도 재산과 소유가 풍부해지게 되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이러한 풍부함으로 인하여 이 아브람과 롯의 두 가정 사이에 다툼이 생겨지게 되었습니다. 이런 와중에서 아브람이 조카 롯에게 제안을 하였습니다. “이제 우리는 서로 함께 살기에는 이 지역이 너무 좁구나. 이렇게 좁은 데서 우리 두 가정이 아옹다옹 싸우며 지낼 필요가 어디 있느냐? 이제 우리가 각각 독립하는 것이 좋겠다. 이제 너는 네 갈 길을 택하여라. 나는 네가 오른쪽으로 가면 왼쪽 지역으로 가겠고, 네가 오른 쪽 지역으로 가면 나는 왼 쪽 지역으로 가겠다”라고 제안을 하였습니다. 이에 롯은 아브람의 제안을 받아 들였습니다. 롯이 눈을 들어 멀리 보니 요단 강 지역의 들판이 보이는데 물도 풍족하고 살기에 좋은 땅으로 여겨졌습니다. 그래서 롯은 “나는 저 요단강 지역이 맘에 드니까 그리로 가겠습니다” 하고 아브람의 곁을 떠나게 되었다는 이야기입니다.  결국 아브람은 본래 하나님이 약속하신 가나안 땅을 택하여 거기에 거하기로 하였습니다. 그런데 이렇게 롯과 헤어져 혼자 남게 되었을 때 여호와 하나님께서 나타나셔서 복의 말씀을 주시는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이 말씀은 새로운 말씀이 아니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이전에 이미 아브람에게 복을 주시기로 한 그 약속을 다시 한번 확인해 주신 말씀이었습니다. “너는 눈을 들어 너 있는 곳에서 동서남북을 바라보라. 보이는 땅을 내가 너와 네 자손에게 주리니 영원히 이르리라. 내가 네 자손으로 땅의 티끌 같게 하리니 사람이 땅의 티끌을 능히 셀 수 있을진대 네 자손도 세리라. 너는 일어나 그 땅을 종과 횡으로 행하여 보라. 내가 그것을 네게 주리라”라는 이미 약속하신 바 있는 복의 말씀입니다.

우리 크리스천들은 보편적으로 하나님의 뜻을 따라 살고자 노력하는 사람들입니다. 그런데 어떤 커다란 원칙적인 면에서는 하나님의 뜻을 안다고 할 수 있다고 보지만, 작은 지엽적인 생활에 들어가서는 하나님의 뜻이 어디에 있는지 종잡기가 어려운 경우가 많습니다. 가정에서나 학교 혹은 사업관계나 인간관계에서 벌어지는 일들에서 과연 하나님의 뜻이 어디에 있는지 알기 어려울 때가 많습니다. 그래서 자신은 하나님의 뜻대로 하고자 하는데 그 결과가 안 좋게 나타남으로 하나님의 뜻을 다시 묻게 되는 경우가 많이 있습니다.

오늘 본문의 아브람과 롯의 경우도 이러한 경우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땅에서 이러한 다툼이나 갈등이 나타나지 말아야 하는데, 이런 갈등이 나타나게 되는 경우 어떻게 해야 하는가 하는 지혜가 필요하게 될 것입니다. 사실, 어떤 크리스천은 이런 상황 속에서 지혜롭지 못하게 처신할 때가 있는 듯 합니다. “믿음으로 하면 되지!” 하지만, 이 “믿음으로”가 지혜롭지 못하여 본인이나 다른 사람에게 유익하지 않게 나타나는 경우도 많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예수님도 “때로는 이 세상의 자녀들이 자기 시대에 있어서는 빛의 자녀들보다 더 지혜로울 때가 있다”(눅 16:8)고 말씀하신 것으로 압니다.

그러면 왜 이런 지혜가 필요할까요? 그것은 이러한 난처하거나 난감한 일이 닥친 그 순간에 하나님께서는 침묵하시기 때문입니다. 오늘 본문에 하나님은 아브람에게 “네가 먼저 양보해라” 하고 지시(coach)하시지 않으셨습니다. 그냥 두고 보고 계셨습니다. 또 창 12:10 이하에서 아브람이 애굽에서 아내가 미인인고로 남이 아내를 삣기 위해 자기를 죽일까 염려하여 아내가 되어서 아내를 누이라 속였습니다. 그러다가 아내를 빼앗기게 되었습니다. 하지만 그 순간까지도 하나님은 가만히 계셨습니다. 그러다가 애굽의 바로 왕이 사래를 아내로 삼으려고 하는 그 순간에, 그제서야 하나님은 바로에게 그렇게 하지 못하도록 압력을 가하셨습니다. 이렇게 하나님은 아브람이 난처한 상황에서도 침묵하셨습니다. 그리고 오늘 본문에서도 보니 롯이 아브람의 곁을 떠난 후에야 하나님은 비로소 나타나 약속의 말씀을 다시 확인시켜 주시는 것이었습니다.

이런 점에서 오늘 우리는 갈등의 상황에서 이를 해결하고자 하는 아브람과 롯의 모습에서 이러한 지혜와 믿음이 어우러지는 모습을 발견할 수 있으면 좋겠습니다. 왜냐하면 이러한 지혜와 함께한 믿음이 있을 때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땅의 복을 받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면 무엇이 아브람으로 하여금 이러한 하나님의 음성을 들을 수 있게 해 주었습니까? 아브람이 이렇게 하나님의 귀한 복의 말씀을 다시 들을 수 있게 된 비결이 무엇이었을까요? 인간적인 생각으로는 아브람이 조카인 롯보다도 나이도 많고 어른이었음에도 불구하고 먼저 좋은 땅을 택하도록 양보하였기 때문이라고 하겠지요. 사실 우리는 아브람과 롯이 같은 장소에서 함께 살면서 각자의 산업이 발전함에 따라 서로 보이지 않게 경쟁하게 된 사실을 본문에서 알 수 있습니다. 이러한 가운데에서 양보할 수 있다는 것은 쉽지 않았을 것입니다. 이런 와중에서 아브람이 양보할 수 있다는 것 자체가 참 훌륭한 자세일 수 있습니다. 하지만 우리는 이보다 좀 더 깊이 보아야 할 것입니다. 그것은 하나님께서 아브람을 택하셨다는 사실입니다. 즉, 아브람은 택함 받은 사람이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아브람에게 복을 주시기 위해서 택하셨습니다. 하지만 아브람과 함께 떠나온 롯도 택함 받았습니다. 하지만 롯은 하나님의 복을 받지 못하였습니다. 이렇게 아브람과 롯은 똑같이 택함을 받았습니다. 하지만 택함 받은 사람으로서 무엇인가 선택해야 할 때의 그 모습에 따라 택함 받았다고 하는 진정한 모습이 나타난다는 것입니다. 따라서 우리는 여기서 뭔가를 발견해 낼 수 있는 영적인 안목이 필요합니다. 그것은 “선택받은 자는 선택받은 자답게 선택할 수 있어야 한다는 사실”입니다. 즉, 택함 받은 자는 택함 받은 자다운 자세와 모습이 그 무언가를 선택하는 그 내용보다 더 중요하다는 사실입니다.

롯을 보십시다. 롯은 아브람의 제의를 받고 곧 땅 조사를 시작했습니다. 요단강이 흐르는 주변의 평야가 아주 기름져 보이고, 푸른 초장에, 시원하게 보였습니다. 얼마만큼 좋아 보였는고 하면, “여호와의 동산 같다”고까지 표현합니다. 이렇게 땅 조사를 마친 롯은 아무런 주저함이 없이 이 땅을 선택하였습니다. 이러한 롯의 선택에 무엇이 잘못되었습니까? 우리는 롯이 나이 많은 삼촌이 이러한 제안을 하였을 때 “삼촌이 먼저 택하시지요?”라고 양보할 수 없었던 자세에서 롯의 어떤 조급함의 모습을 봅니다. 그런데 이러한 조급한 모습은 현실의 경쟁 사회에서 높은 고지를 먼저 차지하고자 하는 마음에서 생겨진 것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이런 점에서 “그저 눈에 좋은 대로 택한 것이 흠이라”고 말할 수도 있겠습니다. 땅만 보고 그 땅에 사는 사람들의 삶의 자세는 눈여겨보지 못한 것이 잘못이라는 말입니다. 맞는 말씀입니다. 오늘 본문 13절에서도 “소돔 사람은 악하여 여호와 앞에 큰 죄인이었더라”고 설명해 주고 있는 것을 보면 더욱 그리합니다. 우리는 여기서 눈에 보이는 현실에 얽매이게 되면 정작 중요하고 본질적인 것은 보지 못하는 조급함에 사로잡힘으로 올바른 선택을 할 수 없다는 사실을 발견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는 좀 더 심도 있게 이 문제를 생각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그것은 무엇인고 하면, 롯과 아브람의 결정적인 차이는 이들에게 주어졌던 과거의 실패와 실수를 반복했다는 것과 그렇지 않았다는 차이입니다. 아브람과 롯은 똑같은 과거의 실수와 실패가 있었습니다. 하지만 아브람은 이러한 실패와 실수를 반복하지 않았고, 롯은 반복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았을 때, 아브람과 롯은 고향 땅을 등지고 하나님께서 지시하는 땅으로 갔습니다. 이렇게 하나님의 부르심에 따라 지시하신 땅에 왔지만, 공교롭게도 이 가나안 땅에는 기근이 들어서 먹고살기가 어려웠습니다. 특히 다른 지방에서 온 이민자들로서 이들이 가나안 땅에 발붙이기가 아주 어려웠습니다. 그 당시 이들이 택한 방법은 애굽으로 피난 가는 일이었습니다. 하나님의 약속하신 땅을 뒤로하고 이들은 애굽으로 떠난 것이었습니다.

이러한 모습에 대해서 “상황이 이러니 어쩔 수 없었던 것 아니냐?”고 할 수도 있겠습니다. 하지만 이러한 애굽 행이 결국 바른 선택이 아니었다는 사실은 이들의 애굽에서의 삶의 모습에서 발견할 수 있습니다. 애굽 땅에 내려간 아브람의 삶의 자세와 모습은 정말 비참한 삶이었습니다. 아내 사래를 빼앗길까봐 자기 누이 동생이라고 속여야 할 만큼 나약하고 비참한 모습의 아브람이었습니다. 우리는 여기서 하나님의 택함을 받고 하나님의 약속을 받은 아브람의 애굽 행의 선택은 선택받은 자로서 잘못 선택한 모습이라는 것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약속한 땅에 도달해 보니 기근이 들린 땅이었기에 하나님의 섭리와 계획은 염두에 두지 않고 자기 급한 대로 곧바로 애굽으로 내려가고자 스스로 선택한 사실은 오늘날 우리들의 표현대로 한다면 “믿음 없는 행동이고 선택”이었다는 것입니다. 물론 이는 그 당시 이들이 예측할 수 없었던 삶의 결과였겠지요. 하지만 애굽으로 내려간 일이 잘못된 선택이었다는 것은 애굽에서의 이들의 삶의 결과로 알 수 있습니다.

이런 점에서 오늘 본문의 1절의 말씀이 상당히 중요한 역할을 하지 않나 생각이 됩니다: “아브람이 애굽에서 나올새 그와 그 아내와 모든 소유며 롯도 함께하여 남방으로 올라가니...” 이 1절의 말씀은 무엇을 시사하고 있습니까? 그것은 바로 아브람의 실패했던 사실을 시사해 주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오늘 본문 창 13장은 이렇게 실패한 경험을 가진 자로서 맞이하는 상황이라는 것입니다. 우리도 때로는 삶 속에서 실패를 맛볼 때가 있습니다. 하지만 이러한 실패가 되풀이되게 해서는 안 된다는 사실도 잘 알고 있습니다. 특히 택함 받은 백성으로서의 자세는 더욱 그리해야 할 것입니다. 이런 배경에서 볼 때 창 13장에서의 아브람과 롯의 자세는 단순히 어떤 땅을 선택하느냐는 선택의 차이를 넘어서서 어떤 본질적인 차이가 있다는 사실을 분명히 알 수 있습니다. 특히 눈에 보이는 것에 준해서 결정을 내린 롯의 경우는 애굽에서의 실패를 망각한 자세요, 이러한 모습은 결국 하나님의 선택받은 백성으로서의 권위와 자세를 상실한 모습일 수 있다는 것입니다.

복을 받을 수 없는 모습은 실패와 실수의 경험을 현실에 얽매여 금방 잊어버리고 그 실수와 실패를 반복하는데 있는 것입니다. 개인적으로나 교회적으로 그리고 국가적으로도 이러한 모습을 극복하지 않으면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땅의 복을 받을 수가 없는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출애굽 하여 광야에서 생활할 때, 하나님께서 제일 듣기 싫어하신 말씀이 무엇입니까? “애굽 때 생활이 좋았지. 거기는 물도 풍부하고, 때로는 고기도 먹었잖아” 하면서 조금만 힘들어도 애굽으로 돌아가자고 하는 그 불평을 하나님은 제일 싫어하셨습니다. 그래서 이런 말을 한 사람들에게는 가나안 땅을 결코 허락하지 않으신 것입니다. 오늘날 사람들도 흔히 새로운 지도자를 뽑아놓고도 “구관이 명관이다” 하면서 현실을 긍정하지 않으려고 하는 자세를 볼 수 있습니다. 또 “예전에는 이러지 않았는데” 하면서 과거에 얽매이는 그 모습들이 있다고 한다면 이러한 자세는 깊이 생각해 보아야 할 태도라고 봅니다.

그러면 우리는 과연 무엇을 근거로 하여 우리의 행동지침을 결정해야 지혜로우면서도 믿음 있는 결정이 될까요? 그것은 다른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약속이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롯이 떠난 후 하나님께서 아브람에게 나타나서 확인시키고 주지시킨 사실이 다름 아닌 바로 이 하나님의 약속이었다는 사실에서도 우리는 이를 확인할 수 있습니다. 사실 하나님은 우리에게 매일 약속하시거나 하시지 않으십니다. 하지만 우리는 하나님의 약속을 매일매일 듣고 간직할 수 있어야 합니다. 이것이 바로 영성훈련입니다. 그리고 이러한 모습이 바로 성령의 충만한 모습입니다. 우리가 이렇게 하나님의 약속을 늘 간직할 때에야 우리들의 현실 속에서 이 하나님의 약속을 지침으로 해서 행동할 수 있는 모습을 지닐 수 있게 됩니다.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이러한 하나님의 약속을 받은 하나님의 택함 받은 백성들입니다. 그러므로 이 하나님의 약속을 믿고 우리의 현실을 헤쳐 나가야 합니다. 예수님도 “너희는 먼저 하나님의 나라와 그 의를 구하라”고 말씀하셨습니다(마 6:33). 여기서 “먼저”라는 말에 유의하십시다. 이는 “하나님의 뜻이 보이지 않더라도”, “하나님의 뜻이 무엇인지 모르더라도”라는 의미가 숨겨져 있는 말씀입니다. 상황이 어떠하더라도 하나님의 약속을 믿는 믿음을 먼저 추구하라는 말씀입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하나님의 약속에 따르는 삶이란 나 중심의 모습에 근거한 것이 아닌 삶을 말합니다. 오히려 하나님의 약속이 나 중심의 자리에 들어서도록 하는 모습인 것입니다. 영성신학자인 유진 피터슨(Eugene Peterson) 목사는 이런 말을 하였습니다. “인류에게 깊이 뿌리박힌 ‘내가 최고’라는 자기중심적인 이러한 자세는 경제학에도 제도적으로 깊이 스며들었고, 심리학에서도 이미 인정을 받았다. 이제 종교까지 비슷한 유형이 되어 우리는 종교 안에서 인간의 잠재력을 키우고 스스로가 괜찮은 사람이라고 느낀다.” 그러므로 우리가 하나님의 약속에 근거하며 산다는 뜻은 이렇게 자기중심적인 자세를 버리는 것을 말하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선택된 자들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이 모습을 지키고 간직할 때 아브람처럼 약속의 메아리를 들을 수 있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이 약속의 음성은 우리의 삶의 순간순간에서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이라는 최선의 선택을 하는 자들에게만 주어지는 선물이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하나님의 약속에 대한 재확인의 음성만이 우리의 모든 현실의 삶에서 주어지는 모든 경쟁과, 경제생활 등 모든 것에서 우리를 온전히 보존하고 지켜줄 것입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선택된 자들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선택받은 자로서 우리는 바른 선택을 할 수 있어야 하겠습니다. 여기에 삶의 귀하고 복된 결실이 주어지는 것입니다. 그것을 성경에서는 “복”이라고 지칭하는 것입니다. 이러한 복을 다 누리시게 되는 우리 모두가 되십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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