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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사람을 아는 방법 (마 7:15-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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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사람이 이 세상을 살아가는데 있어서 필수적인 것이 있다면 그것은 가르침을 받아야 한다는 사실입니다. 그래서 기회만 되려면 배우려고 하는 것입니다. 이러한 배움의 모든 모습들을 한마디로 말해서 교육이라고 합니다. 우리는 알게 모르게 이러한 앎을 위한 수고와 노력을 합니다. 비단 학교에 다니지는 않더라도 신문이나 인터넷을 찾아 많은 정보를 갖고자 하는 것 역시, 바로 알아야 한다는 사실을 우리가 스스로 인정하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사람은 이러한 교육이라는 과정만을 통해서는 뭔가 부족함을 느끼기도 합니다. 그래서 종교생활을 통해서 그러한 부족함을 채우려고 하기도 합니다. 그것은 종교가 일반 교육에서는 채워주지 못하는 또 다른 무엇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것은 종교가 가지고 있는 일종의 초자연적인 현상입니다. 인간의 이성을 기초로 하는 교육에서는 이러한 이성으로 규명할 수 없는 초자연적인 현상이나 문제는 거의 취급하고 있지 않습니다. 반면에 종교에서는 초자연적인 현상을 거부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권장하기도 합니다. 뿐만 아니라, 이러한 초자연적인 현상을 통해서 종교를 전파하기도 하고, 선전하기도 하는 경우도 많이 봅니다. 그렇다고 이성적인 측면도 거부하진 않습니다. 각각의 종교에서는 자기들의 교리를 이성적으로 설명하고, 가르치려는 노력도 하고 있습니다. 이런 점에서 종교는 이성적인 측면과 초자연적인 측면을 다 포괄하고 있다고 말할 수 있을 것입니다. 이렇게 이성적인 측면과 초자연적인 측면을 함께 강조하는 모습을 특히 우리 기독교에서는 아주 당연하게 여기고 받아들이고 있습니다.

오늘 우리가 읽은 본문의 말씀은 예수님께서 예수님을 따르는 제자들에게 조심해야 할 모습이 무엇인가를 가르치는 내용의 말씀입니다. “거짓 선지자들을 삼가라”라는 말씀으로 예수님은 주의해야 할 내용의 말씀을 시작하고 계십니다. 예수님께서 이러한 주의의 말씀을 하시는 골자가 무엇인고 하면 “사람을 바로 알아야 한다”는 사람에 대한 분별력인 것입니다. 오늘 본문의 말씀에서 예수님은 “안다”라는 표현을 결론적으로 사용하시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20절에 나오는 결론적인 말씀에도 “이러므로 그의 열매로 그들을 알리라”라고 하시고, 23절에 나오는 결론적인 말씀에서도 이 “안다”라는 단어가 나옵니다. “그때에 내가 저희에게 밝히 말하되, ‘내가 너희를 도무지 알지 못하니, 불법을 행하는 자들아, 내게서 떠나가라’ 하리라.” 이렇게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분별할 수 있는 시각을 가질 수 있기를 간절히 바라고 계십니다. 그리고 이러한 분별력은 다른 어떤 것에서보다 하나님의 시각에서 이루어져야 함을 분명하게 말씀해주고 계시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오늘 본문에서 우리는 예수님께서 이러한 분별력을 지닐 수 있는 방법으로 두 가지를 말씀한다고 볼 수 있습니다. 하나는 “좋은 나무가 아름다운 열매를 맺고, 못된 나무가 나쁜 열매를 맺는다”는 자연의 법칙에 따른 방법입니다. “가시나무에서 포도를, 또는 엉겅퀴에서 무화과를 따겠느냐?”는 16절에서 보는 바와 같이 이러한 자연의 법칙에 따른 안목을 갖기를 원하십니다. 그 이유는 “그 열매로 그 사람을 알 수 있기”때문입니다. 이러한 자연의 법칙을 통해서 알 수 있기 위해서는 무엇보다도 이성적으로 잘 파악할 수 있는 성실한 노력이 필요합니다. 왜냐하면, 열매가 나타나는 데에는 상당한 시일이 걸리기 때문입니다. 일반 나무의 열매라면 1년을 기다리면 된다 하지만, 사람이 맺을 수 있는 열매란 평생이 걸릴지도 모르는 길고 긴 작업이기 때문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어떤 사람에 대해서 바로 잘 알기 위해서는 우리 스스로 양심적이고 성실한 마음과 자세를 가지고 이성적으로 잘 파악하고 분석할 수 있는 노력을 해야 할 것입니다. 이러한 노력과 모습을 굳이 다른 말로 표현한다면 “역사의식”이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오래 전에, 신학대학원을 졸업하면서 목사가 되기 위해 목사고시를 준비할 때입니다. 목사고시를 보기 위해 여러 과목을 준비해야 했습니다. 그런데 목사 고시 과목에 “교회사” 시험이 있는 것이었습니다. 그 당시, 저는 목사고시에서 왜 교회사 시험을 봐야 하는지 그 이유를 잘 몰랐습니다. 하지만, 오랜 후에 왜 목사가 되려면 교회사 시험을 치러야 하는지 그 이유를 알게 되었습니다. 그것은 현실 속에서 목회하는 가운데 나타나는 여러 가지 문제들이 오늘날의 현실에서 갑자기 일어나는 새로운 일이 아니라, 이미 오래 전부터 교회 안에 이미 나타났던 일이라는 사실을 알게 되었기 때문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이러한 교회사의 교훈을 잘 간직하고 있다면, 현실 속에서 어떠한 자세와 모습으로 결정하고 행해야 하는가를 바르게 판단할 수 있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목사가 되기 위해서는 꼭 교회사를 시험 치러야 했던 것입니다.

이는 비단 목사에게만 해당되는 일은 아니라고 봅니다. 우리가 살아가는 현실 속에서 우리는 사람을 바로 알아야 되는 일들이 많이 있습니다. 사업장에서 일꾼을 뽑는 일에서부터 크게는 국회의원이나 대통령 선거까지 우리가 사람을 바로 알아야만 하는 일들이 많이 있습니다. 이럴 때마다 우리는 무슨 근거에 의해서 사람을 뽑아야 하는가를 고민하게 됩니다. 이럴 때마다 우리가 과거의 역사의 도움을 받게 된다면, 우리의 판단을 그르치지 않게 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기 위해서 우리는 역사 공부를 해야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러한 역사 공부는 대학에서나 할 수 있는 전문적인 것이나 학문적으로 해야 하는 그러한 것을 의미하지는 않습니다. 나 자신을 깊이 성찰하는 가운데 해야 하는 일종의 훈련인 것입니다. 나 자신 스스로 어떤 결정을 해야 할 때, 순간의 현실적인 이익이나 감정에 의해서가 아니라, 지나온 삶을 진지하게 되내겨 보면서 결정할 줄 아는 데에서 이러한 역사의식은 마련될 수 있는 것입니다. 특히 우리 기독인들은 무엇보다도 자기 자신의 지나온 역사를 솔직하고 객관적으로 하나님 앞에서 되내겨 볼 수 있는 훈련이 필요한 것입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궁극적으로는 하나님 앞에 서야 할 사람들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다른 사람을 바로 잘 알기 위해서는 무엇보다도 먼저 나 자신을 바로 잘 알 수 있는 훈련된 자세가 필요한 것입니다.

두 번째로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내용은 초자연적인 현상을 일으키는 사람에 대하여 우리는 어떤 안목을 가져야 하는가에 대한 말씀입니다. 예수님은 이 말씀을 하시면서, 우리들에게 어떤 특별한 방법은 말씀하시기 보다는, 궁극적으로 하나님의 보좌 앞에서 벌어질 일을 미리 말씀해 주심으로써 우리로 하여금 깨닫게 하십니다. “그 날에 많은 사람이 나더러 이르되, ‘주여, 주여, 우리가 주의 이름으로 선지자 노릇하며, 주의 이름으로 귀신을 쫓아내며, 주의 이름으로 많은 권능을 행치 아니하였나이까?’ 하리니, 그때에 내가 저희에게 밝히 말하되, ‘내가 너희를 도무지 알지 못하니 불법을 행하는 자들아, 내게서 떠나가라’ 하리라.” 여기서 예수님은 이러한 초자연적인 현상에 대한 문제를 다루시면서, 그것에 대한 인간의 마음의 자세를 다루고 있습니다. 왜 사람들이 초자연적인 현상, 이른바 기적이라고 말하는 일들을 행하는가 하는 점을 지적하고 계십니다. 물론 종교적인 행위에는 이러한 초자연적인 현상이 있습니다. 그렇지만 이러한 초자연적인 일에 대해서는 이러한 일을 수행하는 사람들의 자세와 마음가짐이 무엇보다 중요하다는 것입니다.

흔히 사람들은 이러한 기적과 같은 일들을 통해서 하나님께서 살아 계시다는 사실을 체험하곤 합니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만이 이러한 기적과 같은 일들을 하실 수 있다고 믿고 받아들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어떤 사람들은 이러한 기적이나 초자연적인 현상이 나타나기를 간절히 바라고 사모합니다. 왜냐하면, 사람들 사이에서 일어날 수 있는 그러한 일을 가지고는 사람들의 마음을 하나님께로 향하게 할 수 없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만일 어떤 사람이 이러한 기적을 행한다면, 많은 사람들이 그 사람의 말을 쉽게 믿고 따르게 될 것은 빤한 사실입니다. 그것뿐만 아니라, 사람들은 기적을 행하는 그 사람을 지도자로 삼고 우러러 섬기기까지 할 것입니다. 만일, 제게 이러한 초자연적인 일을 행할 수 있는 능력이 있어서 그런 일들을 실제로 수행한다면, 아마 저를 대하시는 여러분들의 태도가 많이 달라지실 것입니다. 실제로, 우리 기독교계의 어떤 교단이나 또는 사이비 종교라고 알려진 곳은 대부분 그 시작이 이러한 초자연적인 일들로 말미암은 경우가 많이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이렇게 초자연적인 일을 행할 수 있게 되는 것은 대부분의 종교 지도자들에게 있어서 하나의 희망사항이기도 합니다. 그래서 한국에서 보면, 기도원 같은 곳에 들어가 이러한 능력을 받기 위해 금식기도하며 나름대로 수고하는 모습들도 많이 보게 됩니다. 왜냐하면, 일단 능력을 받아 이러한 일을 행할 수 있게 된다면 교회의 목회나 모든 선교활동을 수행하는데 있어서 많은 사람들로부터 지지를 얻을 수 있을 뿐만 아니라, 심지어는 굉장한 섬김을 받을 수도 있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초자연적인 일을 행할 수 있다는 것은 사실  종교지도자에게 있어서 상당히 매력적인 것입니다.

물론 성경에 나타난 예수님의 활동을 보면, 예수님도 이러한 초자연적인 일을 많이 행하신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고치기 어려운 병들을 고치신 것이라든지, 귀신을 쫓아내신 일이라든지, 장님의 눈을 뜨게 한 일이라든지, 앉은뱅이를 일으키신 일이라든지, 바다의 광풍을 말 한마디로 잠잠케 하신 일 등, 많은 기적들을 행하신 것을 우리는 복음서에서 볼 수 있습니다. 그래서 많은 사람들이 이러한 예수님을 믿고 따르게도 되었습니다. 그런데 복음서를 쓴 사람들은 이러한 초자연적인 일들을 표현하면서 기적(miracle)이라는 말로 표현하지 않고, “이적 혹은 표적(sign)”이라는 말로 표현하고 있음을 우리는 알아야 합니다. 기적이라고 표현하지 않고 표적이라고 표현한 이 사실은 참으로 중요한 내용을 시사하고 있습니다. 이러한 초자연적인 일들은 하나님께서 역사하시는 모습의 하나의 수단이라고 하는 점에서 표적이라고 표현하는 것입니다. 이는 이러한 초자연적인 사건 자체가 어떤 의미가 있는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즉, 이러한 초자연적인 일 자체에 의미를 두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예수님을 통해서 이러한 일을 하심으로서, 하나님의 뜻과 의지가 그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드러내고자 하는데 그 의미가 있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때로는 주객이 전도된다는 이야기를 합니다. 주인과 손님의 입장을 뒤바꿔 생각함으로 오해하는 경우입니다. 이럴 때 쓰는 말로 이런 말들이 있습니다. “손가락으로 달을 가리키는데, 보라는 달은 안 보고 손가락만 본다.”또 “선물을 준 사람보다는 선물 자체에 관심이 있다.” “제사보다는 젯밥에 더 마음이 있다.” 이러한 모습은 이러한 초자연적인 일이 나타나는 것에서도 볼 수 있습니다. 초자연적인 일은 사람들의 마음을 빼앗을 수 있는 매력이 있기 때문에, 자칫 잘못하면 주객이 전도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이러한 초자연적인 일을 통해서 하나님을 드러내고 하나님의 사랑과 살아계심을 드러내야 하는데, 이러한 기적 자체에 관심을 갖게 되는 경우로 빠지게 된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많은 기적과 같은 일들을 행하셨지만, 그 일을 통해서 하나님을 드러내고자 하셨지, 자기를 드러내어 사람들의 마음을 뺏고자 하시지 않았다는 사실을 우리는 잘 알아야 할 것입니다. 오히려 사람들이 이러한 예수님을 오해하여, 왕으로 섬기고자 하여 따르려고 했을 때, 예수님은 오히려 이들을 피해서 도망한 사실을 우리는 알아야 할 것입니다.

이러한 초자연적인 일들이 가져다주는 사람의 마음을 사로잡는 힘을 예수님께서는 아시기 때문에, 이러한 초자연적인 일을 행함으로 사람들로부터 환심을 사고자 하는 일들이 있음을 예수님은 아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러한 사람을 조심하고 경계하라고 주의를 주시는 것입니다. 그리고 어느 누구도 예수님의 이름으로 이러한 초자연적인 일을 행함으로 사람들에게 영광을 얻고자 하는 일은 바로 불법을 행하는 일임을 강력하게 시사하시는 것입니다. 실제로 교회역사에서 보면, 이러한 초자연적인 일로 인하여 시작된 공동체의 경우 결과적으로는 사이비로 전락하게 된 경우가 상당히 많이 있다는 사실도 발견되는 것을 본다면, 이러한 예수님의 경고를 무시하는 것은 곧 자기 자신과 주변의 사람들, 나아가서는 다른 교회 공동체에까지 많은 피해를 입힌다는 사실을 알 필요가 있겠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러한 초자연적인 일을 행하는 것 자체보다 하나님을 향한 바른 마음가짐을 지니는 것이 더 중요하다는 사실을 깨달아야 하겠습니다. 

그렇다면 오늘 본문의 말씀을 통해서 우리가 지녀야 할 자세에 대해서 생각해 보도록 하십시다. 첫째로 우리는 올바른 열매를 맺어야 하겠다는 것입니다. 하지만 올바른 열매를 맺기 위해서는 무엇보다도 올바른 나무가 되어야 한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올바른 나무가 된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는 것이겠습니까? 그것은 우리의 마음가짐을 바로 잡는다는 것입니다. 우리들의 마음의 밭이 하나님의 말씀이 들어와 변화되어 아름다운 열매를 맺을 수 있는 옥토가 되는 것이 바로 올바른 나무가 되는 길입니다. 그러기 위해서 우리의 마음 밭에 있는 돌덩어리와 같이 굳어진 부분들을 잘 깨어 부수어야 할 것이고, 가시덤불 같은 잡초를 제거하는데 힘을 써야 할 것입니다. 특히 우리 마음의 밭에 오래되고 깊이 박힌 쓴 뿌리는 없는지 잘 살펴서, 있다면 반드시 제거하도록 해야 할 것입니다. 좋은 열매는 좋은 나무로부터만 나오기 때문입니다.

둘째로, 우리는 하나님과 친근해지도록 해야 하겠습니다. 하나님의 아신 바 되는 사람이 되어야 할 것입니다. 이것은 초자연적인 일을 행하는 것보다 더 중요하고 더 앞선 일인 것임을 인정해야 할 것입니다. 우리의 모든 신앙의 행위의 기본적인 방향이 하나님을 향한 것, 곧 하나님과 친해지고자 하는 데 있도록 해야 할 것입니다. 나의 어떤 목적을 이루기위해서나 어떤 일을 수행하는 것이 먼저가 아니라, 하나님과의 깊이 있는 사귐이 무엇보다도 선행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러한 모습을 오늘 본문에서 예수님은 “오직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대로 행하는 자라야 천국에 들어가느니라”라는 말씀으로 표현하고 있습니다. 우리 각자가 나 스스로 이러한 자리에 속한 모습이 되도록 해야 할 것입니다.

이러한 모습들, 곧 나의 마음의 밭을 잘 가다듬어 좋은 나무가 되고, 하나님의 아신 바 되는 그러한 모습으로 하나님과 친밀함을 지닐 수 있는 데에 바로 사람을 바로 분별할 수 있는 시각이 열려질 수 있는 것입니다. 우리 속담에 “열길 물속은 알아도, 한길 사람의 속은 모른다”는 말이 있습니다. 하지만 하나님은 우리 마음 깊은 곳을 보시고 또 아시는 분이십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주의 이름으로 큰일을 행한다고 하는 사람들의 마음을 보셨기에, 이들을 책망하기도 하신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 마음 깊은 곳까지도 보시고 또 아십니다. 이제 우리는 이러한 하나님의 시선을 의식하고, 이 하나님 앞에 사심 없이 그리고 숨김없이 나아가는 자세를 지녀야 합니다. 이러한 모습과 자세가 바로 다른 사람을 바로 잘 알 수 있는 그 비결의 첫걸음이 될 것입니다. 우리는 이러한 분별력을 간직함으로 우리의 모든 사회생활과 교회 생활 그리고 모든 신앙생활에 있어서 어그러짐이 없도록 하는 지혜로운 제자들이 되어야 하겠습니다.

<기도>

하나님 아버지,
오늘의 말씀을 들으면서, 나 자신을 살펴보게 됩니다. 내 마음이 어디로 향하고 있는지, 나는 어떠한 일에 내 마음을 빼앗기는지를 생각해 봅니다. 혹, 우리가 하나님보다도 어떤 기적과 같은 일에 더 큰 의미나 비중을 두지는 않는지 반성해 봅니다. 또 사람들의 마음을 내게로 향하게 하기 위해 하나님을 이용하고자 하지는 않는지도 반성해 봅니다. 저희들에게 성령으로 늘 인도하여 주셔서, 우리의 마음의 밭이 옥토와 같이 될 수 있도록 하여 주시옵소서. 특히 우리 마음의 고질적인 쓴 뿌리가 있다면 그것을 제거하는데 있는 힘을 다 하도록 인도하여 주시옵소서. 뿐만 아니라, 하나님만으로 만족할 수 있도록 인도하여 주셔서, 어떤 기적적인 일에 의존하고자 하는 우리의 마음도 바로 잡아 주시옵소서. 우리의 모든 기도와 하나님을 향한 우리의 모든 모습이 하나님과 깊이 친해지는 모습으로 향하도록 인도하여 주시옵소서.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드리옵나이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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