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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시련을 이기는 신앙인 (히 10:19~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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크리스천의 결단

존 번연이 지은 천로역정은 전 세계적으로 성경 다음으로 많이 번역된 책입니다. 천로역정은 시대를 초월하여 우리에게 신앙생활에 유익한 권면을 줍니다. 이 책의 주인공인 크리스천은 성경책을 읽던 중 자신의 죄를 깨닫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이상한 일입니다. 자기 죄를 깨달은 순간부터 그의 등에는 무거운 짐이 항상 매달려 있게 되었습니다. 이 짐은 죄책을 의미합니다. 또 그는 성경을 읽는 중에 이 세상이 머지않아 유황불로 심판 받아 멸망할 것이라는 사실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는 식음을 전폐하고 어떻게 하면 아내와 자식들을 데리고 이 멸망의 도시를 빠져나갈 것인가 궁리합니다.

하루는 아내와 자식들에게 이 모든 사실을 알리고 함께 도망가자고 말합니다. 그러자 그들은 깜짝 놀랍니다. 그들은 크리스천이 미친 줄로 알고 정신이 돌아오게 하려고 거칠고 쌀쌀맞게 대하는가 하면 야단도 치고 무시하기도 했습니다. 그러던 중 크리스천은 전도자를 만나 좁은 문으로 가는 길을 지시 받고는 그리로 향하여 달음질칩니다. 아내와 자식들이 뒤에서 돌아오라고 소리 지르자 그는 두 손으로 귀를 막고 “생명! 생명! 영원한 생명!”이라고 외치면서 달려갑니다.

크리스천은 여행을 하면서 여러 부류의 길동무를 만나서 때로는 도움을 받기도 하고 때로는 손해를 보기도 합니다. 길을 잘못 들어 절망의 수렁에 빠진 적도 있고, 속세 현자를 만나서 생명의 길이 아닌 사망의 길로 갈 번한 적도 있었습니다. 그러나 드디어 그가 좁은 문을 통과하여 언덕 위에 세워진 십자가 앞에 섰을 때 어깨로부터 짐이 저절로 풀어졌습니다. 이에 크리스천은 뛸 듯이 기뻐합니다.

그 때 광채를 발하는 세 사람이 나타나서 그에게 축복해 줍니다. 그 중 한 사람이 “당신의 죄는 사함을 받았소” 라고 말해 주었고, 둘째 사람은 크리스천의 누더기 옷을 벗기고 새 옷으로 갈아입혔고, 셋째 사람은 크리스천의 이마에 표를 붙여 주고는 도장이 찍힌 족자를 한 개 주면서 길을 가면서 읽고 하늘나라 대문에 이르러 제시하라고 했습니다.

여기까지의 내용은 사람이 전도를 받고 성경 말씀을 통하여 죄를 깨닫고 회개하고 하나님의 백성이 되는 과정을 보여줍니다.  이 과정은 천성을 향한 첫 단계이기 때문에 중요합니다. 이 첫 관문을 통과한 사람은 그 사실만으로도 멸망의 도시에 사는 불신자들과는 비교 할 수 없이 행복한 사람입니다. 그 사람은 천국으로 가는 길로 들어선 것입니다.

그런데 천로역정을 계속 읽다 보면 크리스천의 시련이 여기서 끝나지 않습니다. 천국 문에 이르기까지 수많은 시련을 겪습니다. 그 천국으로 향하여 가는 동안 그는 때로는 실패도 하고 낙심도 하지만 다시금 용기를 내서 믿음으로 모든 공포와 어려움을 극복하면서 전진해 나갑니다.

성도들이 겪게 되는 여러 종류의 시련

사랑하는 성도님들, 우리가 신앙생활을 하노라면 갖가지 시련을 만납니다. 처음 신앙생활을 시작한 사람들은 자기들의 기대와 다른 점을 알고는 실망합니다. 예수 믿으면 마음에 평안이 있는 줄 알았는데, 오히려 자신이 추악한 죄인임을 깨닫고 한숨짓게 됩니다. 마음에 평안은 고사하고 영의 생각과 육신의 생각이 치열하게 싸우니 너무나 괴로워서 이 과정을 극복하지 못하고 중도 탈락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병을 치료받기 위해서는 의사의 지시에 순종해야 하듯이, 우리도 영혼의 의사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말씀에 순종하여 죄의 문제를 해결 받고 하나님과 화해를 이룰 때 비로소 심령의 평안을 누리게 되는 것입니다.

먼저 믿은 형제들로 인한 시험

그런가하면 갓 신앙생활을 시작한 사람들은 기독교인들로 인해 시험을 받기도 합니다. 적어도 기독교인이면 이 정도의 도덕성과 이 정도의 아량과 이 정도의 친절은 갖고 있을 것으로 기대했는데, 정작 기독교인들을 대해보니 그렇지가 않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완전무결한 사람이 아니다보니 말과 행동에 실수가 있기 마련입니다. 따라서 실족케 하는 일이 없을 수 없습니다.

우리가 어린 신자의 마음에 상처를 주는 것은 잘못된 것입니다. 그러나 그런 일이 전혀 생기지 않는다고 보장할 수는 없습니다. 우리가 알아두어야 할 것은 어떤 이유에서건 사람 때문에 시험에 들어 신앙생활을 포기하는 것처럼 어리석은 일은 없다는 사실입니다. 우리는 꼭 기억해야 합니다. 기독교 신앙은 하나님을 믿는 것이지 사람을 믿는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말입니다.

세상 재미로 인한 시험

그리고 세상 재미를 추구하느라 신앙에서 이탈하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그런 사람은 가시떨기가 우거진 밭과 같아서 하나님의 말씀을 들어도 세상 즐거움에 마음을 빼앗겨서 결실하지 못합니다(눅 8:14). 세상 재미가 너무 좋아서 하나님을 섬기는 데 열심을 내지 못합니다. 그러나 디모데전서 5장 6절에 “일락을 좋아하는 이는 살았으나 죽었느니라”고 하였고, 요한일서 2장 15절로 17절에는 “15)이 세상이나 세상에 있는 것들을 사랑치 말라 누구든지 세상을 사랑하면 아버지의 사랑이 그 속에 있지 아니하니 16)이는 세상에 있는 모든 것이 육신의 정욕과 안목의 정욕과 이생의 자랑이니 다 아버지께로 좇아 온 것이 아니요 세상으로 좇아 온 것이라 17)이 세상도, 그 정욕도 지나가되 오직 하나님의 뜻을 행하는 이는 영원히 거하느니라”고 말씀합니다.

데마는 한 때 사도 바울의 동역자로서 열심히 복음을 전했습니다. 그의 이름은 바울 서신에 세 번 언급되어 있습니다. 두 번은 사도 바울의 동역자로서 성도들을 문안하는 것이고, 마지막 한번은 사도의 슬픈 탄식 속에서 언급되었습니다. 사도는 말하기를 ‘데마는 이 세상을 사랑하여 나를 버리고 데살로니가로 갔다’(딤후 4:10)고 했습니다.

재물로 인한 시험

재물에 대한 욕심 때문에 신앙생활을 등한히 하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이들 역시 가시떨기가 자라는 밭과 같아서 결실하지 못합니다. 그러나 우리가 알아둘 점은, 돈은 우리 생활에 반드시 필요한 것이지만 돈이 전부가 아니라는 사실입니다. 우리는 경제적으로 여유가 있으면 있는 대로, 없으면 없는 대로 자족할 줄 알아야지, 돈 때문에 신앙생활을 등한히 하는 것은 어리석은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성경은 “돈을 사랑함이 일만 악의 뿌리가 되나니 이것을 사모하는 자들이 미혹을 받아 믿음에서 떠나 많은 근심으로써 자기를 찔렀도다”(딤전 6:10)라고 말씀합니다. 돈은 생활의 편의를 위한 도구로 사용하는 것이지 돈이 목적이 되고 사랑의 대상이 되면 그는 이미 하나님을 떠나 우상 숭배자가 된 것입니다.

그러므로 ‘아굴’이라는 성도는 이렇게 기도했습니다. “내가 두 가지 일을 주께 구하였사오니 나의 죽기 전에 주시옵소서 곧 허탄과 거짓말을 내게서 멀리 하옵시며 나로 가난하게도 마옵시고 부하게도 마옵시고 오직 필요한 양식으로 내게 먹이시옵소서 혹 내가 배불러서 하나님을 모른다 여호와가 누구냐 할까 하오며 혹 내가 가난하여 도적질하고 내 하나님의 이름을 욕되게 할까 두려워함이니이다”(잠 30:7-9)

취미와 사회활동으로 인한 시험

혹은 개인의 성취감을 만족시키기 위해서 사회봉사라든가 취미 활동에 몰두하느라 신앙생활을 등한히 하는 경우도 있습니다. 그리스도인들도 사회봉사를 하고 취미 생활을 할 필요가 있습니다. 사회 봉사자들 가운데는 기독교인들의 비율이 가장 높습니다.  그리고 취미생활은 우리 생활에 활력소가 됩니다. 그러나 그러한 활동 때문에 신앙생활에 방해를 받으면 안 됩니다.

솔로몬을 보십시오. 그는 전무후무한 지혜와 부귀공명을 누렸습니다. 하고픈 일을 모두 다 해보았습니다. 전도서를 읽어보시면 그가 얼마나 정열적으로 사업을 추진하고, 예술에 탐닉하고, 학문에 정진했는가를 알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 모든 것을 다 해본 후에 그가 한 말은 “헛되고 헛되며 헛되고 헛되니 모든 것이 헛되도다 내가 해 아래서 행하는 모든 일을 본즉 다 헛되어 바람을 잡으려는 것이로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런즉 인간적인 성취를 위해 힘쓰지 말고 영원히 가치 있고 썩지 아니할 천국의 상급을 위하여 힘쓰는 성도님들이 되시기 바랍니다.

이단에 의한 시험

그리고 가장 불행한 예로서, 이단의 미혹에 넘어가서 교회를 떠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이단에 빠지는 가장 큰 원인은 이단이 다가올 때 호기심을 갖고 사귐을 갖거나 자기의 성경 지식을 과신하는데 있습니다. 신앙은 죽느냐 사느냐, 영벌이나 영생이냐의 문제입니다. 호기심의 대상이 될 수 없습니다. 나는 이단을 만나 사귀어도 넘어지지 않을 자신이 있다고 생각하는 것은 교만입니다. 성경은 우리에게 이단에 속한 자들과는 인사도 하지 말라고 했습니다.

불신 가족으로 인한 시험

또한 가족의 핍박 때문에 신앙생활에 시련을 겪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들이 핍박하는 것은 기독교 신앙이 무엇인지 알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불쌍히 여기는 마음을 갖고 그들을 위해 기도해야 합니다. 고린도전서 7장 16절에 보면, 불신 배우자를 둔 성도에게 이렇게 권면합니다. “아내 된 자여 네가 남편을 구원할는지 어찌 알 수 있으며, 남편 된 자여 네가 네 아내를 구원할는지 어찌 알 수 있으리요”

배우자가 핍박자로 변하면 마음의 고충이 이만 저만이 아니지만, 그럴수록 진실하게 상대방을 사랑하고 친절하게 대해야 합니다. 그와 동시에 핍박에 흔들리지 않는 꿋꿋한 신앙인의 모습을 보여주어야 합니다. 왜냐하면 이것은 남편과 아내의 문제이기 이전에 우리의 믿음을 훼방하려는 사탄의 도전이기 때문입니다. 영적인 차원에서 문제를 풀지 않으면 이러한 핍박을 이겨내지 못합니다.

저는 설교를 준비하면서 이슬람에서 기독교로 개종했다는 이유로 사형위기에 처한 41살 난 아프가니스탄인 압둘 라흐만이 CNN 기자와 인터뷰하는 장면을 보았습니다. 아프카니스탄은 이슬람국가로서 개종자를 배교자라고 정죄하고 처형합니다. 그러나 그는 조금도 두려워하는 기색이 없이 성경책을 내보이면서 자기는 크리스천이라고 당당하게 말했습니다. 저는 그의 진지하고 담대한 태도를 보면서 큰 감명을 받았습니다.

이 일로 미국과 유럽 연합이 아프카니스탄 정부에 항의하고 있으므로 그를 처형하기는 쉽지 않을 것으로 보이지만 석방이 되더라도 언제 누구에게 살해당할는지 알 수 없는 처지에 놓여 있습니다. 이처럼 이슬람 국가에서 사는 사람들은 목숨을 잃을 각오를 하지 않으면 주님을 믿을 수 없습니다. 그런 점에서, 우리가 자유롭게 주님을 섬길 수 있다는 사실에 대하여 하나님께 감사해야 할 줄 압니다. 우리가 신앙의 자유를 누리는 것은 하나님의 은총입니다. 이를 하찮게 여기지 말고 신앙의 자유가 있을 때 열심히 주님을 섬기시기 바랍니다.

담대함이 필요한 이유

기독교 신앙을 지켜나가려면 담대함이 필요합니다. 천로역정에 보면, 크리스천이 좁은 문을 지나서 어느 산꼭대기에 다다랐을 때 황급히 마주 달려오는 두 사람을 만났습니다. 그들의 이름은 겁쟁이와 회의였습니다. “아니, 웬일이십니까? 반대 방향으로 뛰어들 오시다니” 그러자 겁쟁이가 대답했습니다. “시온 성으로 가려고 험난한 산길을 올라왔는데 저편 쪽으로 더 가면 갈수록 더 위험한 것을 만났기 때문에 되돌아가는 길이라오”

그 말에 회의가 맞장구를 치면서 “그렇고 말구. 바로 우리 앞에 사자 두 마리가 길을 막고 누워 있는데, 그 놈들이 잠들었는지 깨어 있는지 꼭이 알 수 없지만, 가까이 가면 그만 우리 몸을 갈가리 찢어 버릴 것만 같아서 혼비백산한 거요.”라고 말했습니다.

그들에게 크리스천은 이렇게 대답합니다. “당신들의 말을 들으니 나도 무척 무섭습니다. 허나 안전을 찾으려면 어디로 도망가야 할까요? 내 고향으로 돌아가자니 그곳은 유황불로 멸망시키기로 예정된 곳이기 때문에 반드시 죽을 것이요, 하늘나라로 가기만 하면 안전할 것이 확실하니 모험을 무릅쓰고 그곳으로 가야지요. 집으로 돌아가면 죽음밖에 남는 것이 없으나, 앞으로 가면 죽음에 대한 공포만 있을 따름이요, 공포를 극복하고 목적지에 다다르면 영원한 생명을 얻게 될 것입니다. 그러니까 나는 그냥 앞으로 가려 하오.”

과연, 산 위에 올라가니 저쪽에 아름다운 궁궐이 보이는데, 문지기가 사는 집으로 가는 길에 사자 두 마리가 길을 가로막고 누워 있었습니다. 크리스천이 멈칫거리면서 되돌아가려고 하자 문지기가 그를 보고 소리칩니다. “당신은 그렇게 용기가 없는 사람입니까? 사자들은 사슬에 매어 있으니 두려워하지 마시오. 사자들을 거기에 매 둔 목적은 믿음이 있는 사람과 없는 사람을 가려내는데 있습니다. 길 한 가운데로 오시면 조금도 위험하지 않습니다.” 사자들이 으르렁거리는 사이로 지나가는 것이 무서웠지만 크리스천은 그 두려움을 이기고 그 사이를 통과하여 그 밤을 궁궐에서 지내게 되었습니다.

마귀의 시험을 이기려면

우리의 신앙생활에 시련이 다가오는 것은 조금도 이상한 일이 아니고 당연한 일입니다. 이 길은 생명의 길이기 때문에 마귀의 도전과 방해가 있기 마련입니다. 그 뿐 아니라, 생명의 길이기 때문에 이 길을 가려면 우리 스스로 절제하고 버려야 할 것들도 있기 마련입니다. 마귀는 우는 사자처럼 덤벼들지만 복음의 진리 가운데 바로 서서 전진하는 성도들을 해할 수 없습니다.

성경은 우리에게 “너희는 하나님께 순복할지어다 마귀를 대적하라 그리하면 너희를 피하리라”(약 4:7)고 하였지, 마귀와 타협하거나 마귀를 겁내서 뒤로 물러가라고 하지 않았습니다. 우리는 천국에 다다르는 그 순간까지 끊임없이 다가오는 영적인 시련을 극복하고 전진해야지, 만약에 시련에서 져서 믿음을 포기하면 영원한 수치를 당하게 되고 마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이유

먼저, 우리가 시련을 이기려면, 왜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것인지, 그리고 구원받은 성도들이 누리게 될 복이 무엇인지 알아야 합니다. 가장 궁극적인 복은 죄 많은 우리가 거룩하신 하나님의 보좌 앞에 나아갈 수 있는 은총을 입었다는 것입니다.

이에 대하여 히브리서 10장 19절과 20절에는 “그러므로 형제들아 우리가 예수의 피를 힘입어 성소에 들어갈 담력을 얻었나니, 그 길은 우리를 위하여 휘장 가운데로 열어 놓으신 새롭고 산 길이요 휘장은 곧 저의 육체니라”고 했습니다. 이 말씀과 같이,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달려 살 찢고 피 흘려 죽으심으로 말미암아 그를 믿는 성도들이 하나님의 보좌 앞에 담대히 나아갈 수 있게 된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달려 “다 이루었다”고 하시고 운명하시자, 성전의 성소와 지성소를 가로막았던 휘장이 위에서 아래로 찢어져 둘이 되었는데, 이 휘장은 예수 그리스도의 육체를 상징합니다. 본디 우리는 하나님과 원수 된 자들이었기 때문에 거룩하신 하나님 앞에 감히 나아갈 수가 없었습니다. 그런데 예수 그리스도의 희생으로 말미암아 우리가 하나님과 화목을 이루게 되었고, 예수의 피를 힘입어 성소 곧 하나님의 보좌 앞에 나아갈 담력을 얻게 되었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아버지로 부를 수 있게 되었고,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하나님께 기도할 수 있게 된 이 사실은 실로 위대한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그리스도인의 행복과 특권을 이 보다 더 실감나게 표현할 수가 있을까요?

기독교는 본디 내세 지향적인 종교입니다. 예수님께서 공생애를 시작하시면서 외치신 첫 말씀은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웠다”는 것이었습니다. 예수님께서 병자들을 고쳐 주셨고, 귀신을 내쫓으셨으며, 기적의 떡을 무리에게 먹이신 것은 그 자체에 목적이 있었던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께서 행하신 모든 이적은 그 분이 그리스도이심을 입증하기 위한 방편에 불과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사람들이 병 고침 받기 위해서 혹은 떡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나왔더라도 병 고침 받고 떡 문제를 해결 받음으로써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이심을 깨닫게 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만약에 이 일에 실패한다면 아무리 주님께 나와서 불치의 병을 고침 받고 물질적으로 큰 부자가 되었더라도 그 사람은 가련한 인생에 불과한 것입니다.

기도의 특권을 활용해야

사랑하는 성도님들, 여러분은 예수 그리스도의 피로 뿌림을 받은 사람들임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예수의 피가 우리의 마음에 뿌려졌습니다. 그러므로 히브리서 10장 22절 말씀과 같이, 양심을 더럽히는 온갖 악을 버리고 참 마음과 온전한 믿음으로 하나님께 나아가야 합니다. 우리는 시험에 굴복하면 안 됩니다. 시험을 이기기 위해 우리는 기도의 특권을 적극적으로 활용해야 합니다.

그러나 기도에도 원칙이 있습니다. 정욕으로 쓰려고 구하거나 허탄한 자랑을 위하여 구하면 안 됩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구해야 합니다. 기도 응답에 관해서도 구한 대로 응답되면 감사할 일이지만, 혹 구한 대로 응답이 되지 않아도 감사할 줄 알아야 합니다. 일단 하나님께 사정을 아뢨으면 우리가 할 일은 끝난 것입니다. 그 다음은 하나님께서 최선의 길로 인도해 주실 것을 믿고 맡겨야 합니다. 그리할 때 기도하고 시험에 드는 일이 생기지 않게 될 것입니다.

이 세 가지를 힘씁시다

그리고 우리가 신앙의 시련을 이기려면 “약속하신 이는 미쁘시니 우리가 믿는 도리의 소망을 움직이지 말고 굳게 잡아, 서로 돌아보아 사랑과 선행을 격려하며, 모이기를 폐하는 어떤 사람들의 습관과 같이 하지 말고 오직 권하여 그 날이 가까움을 볼수록 더욱 그리하자” 하신 말씀에 순종해야 합니다.

첫째로, 하나님의 신실하심을 믿어야 합니다. 민수기 23장 19절에 “하나님은 인생이 아니시니 식언치 않으시고 인자가 아니시니 후회가 없으시도다 어찌 그 말씀하신 바를 행치 않으시며 하신 말씀을 실행치 않으시랴”고 했습니다. 하나님께 거짓이나 변덕스러움이 있을 리 없습니다. 우리는 하나님께서 그 하신 약속을 반드시 이루실 것을 굳게 믿어야 합니다.

둘째로, 믿음의 형제들이 서로 서로 신앙을 격려하고 돌보아야 합니다. 나만 잘 믿으면 됐지 다른 사람이야 어떻게 믿든지 내 알 바가 아니라고 생각하는 것은 잘못된 것입니다. 그런 사람은 교회가 그리스도의 몸이고 성도들이 몸의 지체들임을 알지 못하는 사람입니다. 한 지체가 아프면 온 몸이 함께 아파하고, 몸의 어느 한 지체가 영광을 얻으면 온 몸이 함께 즐거워합니다. 이와 같이 교회의 지체된 형제들은 서로의 아픔과 기쁨을 함께 나누어야 마땅한 것입니다. 교회에 여러 직분을 세운 것은 이 일을 잘 감당하라고 세우신 것입니다.

셋째로, 주님의 재림이 가까울수록 더욱 모이기에 힘써야 합니다. 성도들이 모이는 목적은 세상 사람들과 다릅니다. 우리는 하나님을 예배하고, 기도하고, 사랑의 교제를 나누기 위해서 모입니다. 아무리 큰 시련을 만났을지라도 그 사람이 하나님을 예배하는 일에 실패하지 않는 한 소망이 있음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그것은 예배에 힘쓰는 것이 곧 인생의 목적을 달성하는 행위가 되기 때문입니다.

예배생활은 우리 믿음의 척도와 같습니다. 단적으로 말해서, 모이기에 힘쓰는 것과 믿음의 성장은 정비례한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시험이 다가올 때 예배 생활에 더욱 힘쓰심으로 여러분의 믿음을 하나님 앞에 나타내 보이시기 바랍니다.

배교의 죄를 피합시다

그리고 히브리서 10장 26절로 31절까지의 말씀은, 배교의 죄가 얼마나 무서운 것인가를 설명해 줍니다. “우리가 진리를 아는 지식을 받은 후 짐짓 죄를 범한즉 다시 속죄하는 제사가 없고, 오직 무서운 마음으로 심판을 기다리는 것과 대적하는 자를 소멸할 맹렬한 불만 있으리라”고 했습니다.

배교의 죄란 결심을 하고 고의적으로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멸시하고 배척하는 죄를 말합니다. 그 죄는 ‘하나님 아들을 밟고 자기를 거룩하게 한 언약의 피를 부정한 것으로 여기고 은혜의 성령을 욕되게 하는 죄’가 되기 때문에 용서받을 수 없는 무서운 죄가 되는 것입니다. 바로 이것이 성령을 훼방하는 죄입니다. 성령님은 우리를 감화하셔서 죄를 깨닫게 하시며 회개케 하시는 분이신데 성령님을 훼방하면 회개할 수 없으므로 사죄의 은총을 받지 못하는 것입니다.

영원한 상급을 바라고 시험을 이깁시다

사도는 성도들을 향하여 그들이 지난날 신앙을 위해 큰 고난을 이겨냈던 일을 기억하라고 권면했습니다. 초대 교회 당시의 신자들은 신앙을 지키기 위해서 많은 핍박과 환난을 당했습니다. 때로는 사람들에게 비방거리와 구경거리가 되기도 하고, 때로는 옥에 갇히기도 하고, 때로는 재산을 몰수당하기도 하였고, 심지어는 순교하기도 했습니다. 그렇지만 그들은 기쁨으로 그 모든 환난과 시련을 이겨냈습니다.

그들에 비하면 우리가 지금 당하는 시련은 너무나 약소한 것이 아닐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여러분은 믿음의 담대함을 잃어버리지 마시고 끝까지 인내하심으로 시련의 때를 이겨내시기 바랍니다. “십자가 없이 면류관 없다”는 말과 같이, 시련을 이기지 않는 한 신앙의 성장이 있을 수 없고 깊은 은혜를 맛볼 수 없음을 알아야 합니다. 절대로 신앙의 시련을 두려워하지 마십시오.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감당할 시험 밖에는 우리에게 허락하지 않으십니다.

그리고 히브리서 10장 37절에 “잠시 잠깐 후면 오실 이가 오시리니 지체하지 아니하시리라”고 하신 대로,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의 강림을 사모해야 합니다. 성도들은 두 종류의 종말을 염두에 두고 살아야 하는데, 그 하나는 개인적인 종말이요, 다른 하나는 우주적인  종말입니다. 전자는 우리가 이 땅의 삶을 끝내고 주님의 부르심을 받는 것을 말합니다.

그 날이 언제일는지 정확히 모르지만 수십 년 이내에 우리 각자에게 임할 것이 분명합니다. 그야말로 잠시 잠깐 후면 주님을 만나게 될 것입니다.

그런가 하면, 우주적 종말이 있습니다. 주님의 재림 일시는 천사들도, 아들도 모르고 오직 하나님 아버지께서만 아신다고 했습니다. 그러나 그 날이 점점 가까워 오는 것이 사실입니다. 그 날 우리는 주님을 위해 당한 핍박과 시련에 대하여 영광스러운 보상을 받게 될 것입니다.

우리가 영원한 상급을 바라고 신앙생활을 할 때 어떤 시련도 이겨낼 수 있음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주님을 믿는 데는 휴식이나 후퇴가 있을 수 없습니다. “오직 나의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또한 뒤로 물러가면 내 마음이 저를 기뻐하지 아니하리라 하셨느니라” 하신 대로, 오직 믿음의 전진만을 계속해 나가야 합니다.

맺는 말

히브리서 10장 39절에 “우리는 뒤로 물러가 침륜에 빠질 자가 아니요 오직 영혼을 구원함에 이르는 믿음을 가진 자니라”고 했습니다. 침륜이란 기가 꺾여서 움츠러들고 드디어는 패망하는 것을 말합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보혈로 구속받은 성도들은 뒤로 물러가 침륜에 빠질 자가 아닌 것이 주님께서 강하신 팔로 우리를 붙들어주시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믿음의 시련을 만나 지레 겁을 먹고 뒤로 물러설 것이 아니라 핍박을 각오하고 담대하게 전진하시기 바랍니다.

세상을 이기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영원한 천국에 들어가는 그 순간까지 모든 시험으로부터 성도님들의 믿음을 지켜주실 것입니다. (김양인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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