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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내 기도대로 되지 않을 때 (행 16:6-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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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기도대로 되지 않을 때’라는 제목으로 증거 하겠습니다.

1) 이루지 못한 소망은 이상한 것이 아니다.

오늘 말씀을 보면 바울이 복음을 전하기 위해 아시아로 가고 싶은 마음이 있었습니다. 하지만 하나님은 그가 아시아로 가는 것을 원치 않으셨습니다. 대신에 그를 유럽으로 보내십니다. 물론 그가 아시아를 가든 유럽을 가든 매한가지일 겁니다. 사실 제자된 사람으로, 복음 증거하는 것이 목표인 사람으로, 아시아든, 유럽이든 믿지 않는 이방인이기는 마찬가지인 점에서 이래도 그만, 저래도 그만일 것입니다.

하지만 바울의 속내는 사실 아시아에서 전도하는 것이었습니다.
어떤 분은 아시아, 즉 터키보다는 유럽 쪽이 더 잘사지 않는가? 오히려 더 좋은 곳으로 하나님이 보내 주신 것 아닌가? 생각할지 모릅니다. 하지만 사실은 그렇지 않습니다. 오늘이야 유럽이 잘살지만, 그 당시에는 발칸반도, 그리스에 못지 않게 아시아쪽도 잘살았습니다. 당시 로마제국의 중심지가 대략 3군데가 있었는데, 그중 하나가 바로 아시아, 터키지역이었습니다. 3개의 중심지에 해당되는 지역으로는 로마, 이집트의 알렉산드리아 그리고 소아시아가 있었습니다.

물론 바울이 아시아를 선호한 이유가 이런 경제적인 이유와 연결되는 것은 아닙니다. 대신에 그가 아시아에 관심한 것은 그 자신이 이 아시아 출신이었기 때문일 겁니다. 그는 소아시아, 다소사람입니다. 그는 다소에서 태어났습니다. 이 다소는 당시 소아시아의 수도와도 같은 곳이었습니다. 그러니 그는 무엇보다도 소아시아를 잘 아는 사람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자신은 이 아시아에서 전도하는 것이 유익하리라 생각했던 것입니다.

하지만 하나님은 이러한 바울의 야무진 소망을 이루어 주시지 않습니다.
6절을 보면 성령이 그가 전하지 못하게 했다고 합니다.
6절입니다. 성령이 아시아에서 말씀을 전하지 못하게 하시거늘

바울은 소아시아에서 자리잡지 못하고, 그 땅을 지나갑니다. 그리고 결국에는 소아시아의 북단에 위치한 무시아 땅에 이르게 됩니다. 이 무시아땅은 유럽과 아시아땅이 만나는 지역입니다. 즉 바울이 품었던 소망의 마지막 미련과도 같은 땅입니다. 이제 조금만 더 밖으로 밀려가면 이제 아시아가 아닙니다. 그래서 차선책으로 소아시아의 변두리와도 같은 주변부 비두니아에서라도 복음을 전하고 싶은 심정입니다.

그런데요 7절을 보면 그러한 바울의 마지막 미련조차도 주님이 허락하지 않음을 보게 됩니다. 7절입니다. “무시아 앞에 이르러 비두니아로 가고자 애쓰되 예수의 영이 허락지 아니하시는지라”

한번 곰곰이 생각해 보십시오. 지금 바울이 뭘하력고 하는 것입니까? 그가 할려는 것이 하나님 보시기에 그렇게도 나쁜 것입니까? 그가 무슨 죄라도 짓는 것이라서 하나님이 성령을 통해,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그렇게 막을 이유가 있겠느냐는 것입니다.
사실 지금 바울의 계획은 그래도 나름대로 현명하고, 지혜로운 방법이지 않습니까? 그가 그래도 다소 사람이니 그곳에서 배운 학문을 통해 전도를 하면 그 지역 사람들이 아 그렇구나 하고 조금이라도 쉽게 전하지 않겠습니까? 또한 적어도 자신이 자란 그 지역이니, 풍습이나 음식 뭐하나 불편할 것이 없을 것이니 전적으로 복음 증거에 매달릴 수 있지 않겠습니까? 그뿐입니까? 혹시라도 다소에서 닦은 인맥과 이어지는 사람이라도 있다면 얼마나 유리한 상황이 전개되겠습니까?

그런데 하나님은 정말 낯설고, 물설고, 이목구비 다른 사람들에게 가서 전하라고 하시는 것은 어찌보면 바울에게는 감당하기 힘든 부담일 수 있었을 것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6, 7절에 나타나는 바울의 모습은 할 수만 있다면 어떻게든 이 아시아에 남기를 원하는 마음의 표시일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때로는 우리에게도 이러한 일이 있을 수 있다고 봅니다. 우리가 나름대로 신앙적으로 좋은 뜻을 품고, 애써가면서 일을 해보지만 그것만으로 모든 일들이 척척 들어맞고, 이루어지지만은 않을 때도 있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착하고 성령 충만하다는 이유로 모든 꿈이 다 이루어진다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하지만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하고 하나님을 위하여 열심히 살았다는 이유로 모든 꿈들이 다 이루어지는 않습니다.

하지만 이루어지지 않은 꿈 때문에 하나님께 불평을 해서는 안 됩니다. <내가 이렇게 충성했는데, 내가 이렇게 헌신했는데, 내가 이렇게 하나님을 사랑했는데--- 왜? 나의 꿈이 이루어지지 않았지> 라는 생각은 하나님이 주시는 생각이 아니라, 사단이 주는 생각입니다.

어찌보면 바울은 정말 불평하고, 원망할 만한 길을 걷습니다. 물건너 유럽에 왔는데, 그 땅 빌립보에서 점치는 여자아이를 불쌍하게 여겨 고쳐주었다가 된통당하고, 심지어는 옥살이도 하지 않습니까? 시체말로 되는 것 하나도 없고 속상해 미칠 지경이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바울은 자신이 무얼 해야 하는 지를 정확히 알았습니다. 그는 원망이 아닌 하나님을 신뢰합니다. 그 시간에 하나님께 기도하고, 찬양드립니다.

2) 기도하지 않게 되는 것이 가장 큰 손해다.

우리 속담에 모로 가도 한양에만 가면 된다라는 말이 있습니다. 우리들은 종종 이런 생각을 즐겨합니다.
바울의 경우를 예로 들면 바울이 아시아에서 전도하든, 유럽에서 전도하든 뭐가 다르냐는 것입니다. 결국은 전도하는 일이고, 두 지역 모두다 하나님을 모르는 이방인이니 다를 것이 없다는 식의 생각을 갖습니다.

더 나아가서 심지어는 하나님이 너무하신 것 아닌가 하는 논리를 펴기도 합니다. 이럴 수도 있고, 저럴 수도 있지 왜 하나님이 시시콜콜 유럽에 가라, 아시아에 가지 말라 말할 것까지는 없지 않느냐는 것입니다.
세상 말로 융통성도 없이 그렇게 강압적으로 끌고 다니시는 하나님 너무 하시는 것 아닌가 싶을 것입니다. 때로는 별차이 없는 일이라면 왠만하면 알아서 하도록 하나님이 참으시고, 양보하셔야 하리라 생각합니다.

그런데요, 이런 생각이 가지고 있는 함정이 있습니다.
대부분 사람들은 큰 차이를 보이는 경우에는 함부로, 쉽게 움직이지 않습니다. 우선은요 두렵고 떨리는 마음으로 먼저 하나님께 엎드리고, 하나님의 뜻을 묻습니다.
그런데요, 작은 차이를 보이는 일이나, 혹은 나무나 당연하고 흔한 일이어서 그 결과가 뻔하다고 생각되는 일을 만나면 잘 기도하려 하지 않는 경우가 너무나 많습니다. 내가 보기에는 기도하나, 안하나 전혀 차이가 나지 않겠다고 생각되니 하나님과는 상관없이 일하고 싶어들 한다는 것입니다.

그런데요, 이런 생활이 반복되면 어떤 경우를 만나게 되는지 아십니까? 뭐든지, 보이는 것마다 다 이래도 괜찮고, 저래도 그만이라는 식으로만 보이게 된다는 것입니다. 즉 두 눈에 뭐가 씌여서 기도하지 않고, 엎드리지 않고 내 맘대로 하려고만 들게 된다는 것입니다.

우리 생각에요, 이정도 쯤이야 할 때가 위험한 것입니다. 이 정도는 에누리야? 이 정도의 융통성은 괜찮아라고 생각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유대인들은요, 서기관을 통해서 하나님의 말씀을 기록하고 전하는 일을 감당하게 했답니다. 그런데요, 이 서기관들을 선발하는 과정에서 지나치게, 굉장히, 탁월하게 똑똑한 사람은 뽑지 않았답니다. 왜냐면요, 너무 자신의 머리를 과신해서 하나님의 말씀을 쓱싹쓱싹 조금씩 바꾸는 똑똑한 척하는 미련함이 나오지 않게 하기 위해서라는 겁니다.
즉 자신이 보기에는 이런 표현이 더 좋다고 맘대로 바꾸고, 이것은 실수로 적힌 것이라 판단하여 맘대로 고치고 하면 하나님의 말씀이 그 미련한 자의 자란체를 통해, 교만함을 통해 가려질 것을 걱정했기 때문이라는 겁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항상 우리의 불순종의 문제는 원론보다는 각론입니다. 웬만한 그리스도인이라면 원론은 잘 지킵니다. 주일성수나 기도생활, 헌금생활, 말씀을 듣는 일 등 원론을 전혀 안 지키는 신앙인은 없습니다. 다만 어떻게 주일성수를 하고, 헌금을 드리느냐가 문제입니다. 원론도 각론도 모두 하나님의 뜻대로 해야 합니다.

그리스도인에게 있어 생각을 바꾼다는 말은 어떤 면에서 아주 세밀한 부분에서도 주님의 방법을 따르기로 하는 결단입니다.
예수님의 말씀으로 결론을 삼고아야 합니다. [마12:30] “나와 함께 아니하는 자는 나를 반대하는 자요 나와 함께 모으지 아니하는 자는 헤치는 자니라”

3) 막고 여시는 하나님

또한 우리들이 주목해야 할 놀라운 사실이 있습니다. 그것은 바울의 길을 막으시고, 그의 꿈을 접게 하신 이유가 사실은 하나님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즉 말 그대로 하나님이 바울의 길을 막아야만 했다는 것입니다.

우리들이 생각해 보아야 할 것은 성령님께서 어떻게 바울의 길을 막으셨을까? 라는 것입니다. 우리들이 쉽게 얻을 수 있는 답은 바울에게 주어진 질병입니다. 바울이 아시아 지역으로 나가려고 준비하고 출발하려고만 하면 바울이 몹시 아프기 시작한 것입니다. 10절을 보면 "바울이 환상을 본 후에 우리가 곧 마게도니야로 떠나기를 힘쓰니"라고 했는데 여기에 사용된 "우리"는 바울이 지금 의사 누가와 함께 한다는 의미입니다. 성령님을 통해 바울을 막으신 이유 중 우선 하나님 바울을 회복시키셔서 그를 더 큰일에 사용하시기 위한 하나님의 섭리라는 것입니다.

또한 여러분이 잘 아시다시피 바울을 통해 유럽으로 보내시기 위함이었습니다. 성서를 보면 소아시아는 다른 제자들도 감당할 수 있는 지역입니다. 갈라디아서 2장을 보면 실제로 베드로가 안디옥에도 왔던 적이 있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바울만큼 멀리나가 전할 준비가 된 사도가 그리 많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즉 바울은 하나님이 유럽을 위해 준비한 전도자라는 것입니다.
가고 싶은 길이 막혀 있었던 바울은 하나님이 보여주시는 환상을 보게 됩니다. 그 환상을 통해 그의 서운하고, 답답한 마음이 풀어집니다.

그리고 이러한 바울의 선교지의 변화는 기독교 역사상 가장 놀라운 전화점이 되었습니다. 많은 역사가들은 만약 바울이 자신의 소원처럼 소아시아로 진출했다면 기독교는 지금처럼 전 세계에 확산되지 않았을 것이라고들 말합니다. 바울이 소아시아를 포기하고 마게도나야아 지역으로 나아갔기에 복음이 세계 제일의 나라였던 로마를 정복하게 되었고, 복음의 로마 정복이 오늘날의 거대한 기독교를 낳는 씨앗이 되었다는 의견에 많은 학자들이 동의합니다.

바울의 꿈이 이루어지지 않은 것은 결국은 잘 된 일입니다. 바울의 꿈을 막으신 하나님께서 바울을 통하여 더 좋은 일들을 이루셨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들은 분명한 믿음을 가져야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한 문을 닫으시면 반드시 더 좋은 문을 여신다는 진리를 굳게 붙잡아야 합니다. 바울의 꿈은 이루어지지 않았지만, 다른 문을 여신 하나님 때문에 바울은 더 위대한 일, 꿈꾸어보지 못한 일들을 행하게 되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더 좋은 일들을 이루시기 위해서 우리들의 꿈을 막으십니다.
모든 것을 다 잃었다고 생각하고 다시 고기잡이가 되어야겠다는 베드로의 결심은 텅 빈 그물로 인해 이루어지지 않았지만, 하나님께서는 그에게 새로운 문을 여시고 위대한 사도의 삶을 살아가게 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세리 마태를 부르셔서 물질의 부요함을 막으시고 새로운 길인 영적 부요함을 주셨습니다. 하나님께서 그의 삶을 중간에 막지 않으셨다면 그는 추악한 이름만을 남기게 되었을 것인데 마태는 한 쪽문을 닫으시고 새 문을 여신 하나님의 은혜로 가장 위대한 책 중에 하나인 마태 복음서를 남기게 되었습니다. 그는 죄인 중에 죄인의 자리에서 영광스러운 예수 그리스도의 제자의 자리에 서게 되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참으로 좋은 문을 열어 주시기 위해서 우리들의 소원의 문들을 때때로 닫으시는 하나님 아버지이십니다. (김병연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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