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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섬기기 위해 구원받은 존재 (갈 5:13~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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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모두 하나님의 은혜로 구원을 받았습니다. 이것은 하나님이 주신 최고의 선물이고 은혜입니다. 우리는 이것을 너무 경시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하나님을 믿고 싶어도 믿어지지 않아서 믿지 못하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그래서 구원받음은 하나님이 주시는 선물이라고 했습니다. 이 구원받음으로 우리에게 몇 가지 은혜가 주어졌습니다.

자신의 값을 발견하게 된 은혜

칼 바르트라는 신학자는 “나는 십자가를 바라볼 때마다 나의 값을 발견하게 된다”고 했습니다. 그리고 사도 바울은 “나의 나됨은 주의 은혜”라고 고백하였습니다. “예수님은 나의 구주시고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입니다”라고 고백할 수 있다는 것은 작은 일이 아닙니다. 이것은 참 위대한 발견이고 가장 큰 은혜입니다. 이 발견이 있어야 이 세상에서 더 귀한 것이 무엇인가를 알고 발견하게 됩니다.

사도바울은 예수를 알기 전에 수단과 방법과 조건들에 대해서 상당한 미련을 가지고 살았던 사람입니다. 그래서 세속적인 성공과 바리새인 사회에서 유명해지는 것을 기대했습니다. 그러다가 어느 날 예수를 만나고 나서 바울은 지금까지 추구했던 것들이 모두 부질없는 것이라는 것을 비로소 알게 됩니다. 그것들은 예수를 모를 때 소중하게 여겼던 것들이었습니다. 그래서 고백하기를 “나는 이제부터 예수만 알기로 작정했다”고 하였습니다. 알고 보니까 예수를 알게 된 것이 은혜 중의 은혜라는 고백입니다.

여러분, 예수가 최고입니다. 예수를 알게 된 것이 은혜이고 축복입니다. 사람들이 보이고 만져지고 힘 있는 것을 의지하고 믿으려고 하지만 그것은 아닙니다. 정말 인생의 결정적인 순간에는 예수밖에는 아무 것도 없습니다. 이 세상을 살아갈 때 가장 중요할 때, 가장 소중한 순간, 가장 화급할 때는 예수밖에 아무 것도 없습니다. 그래서 예수가 최고입니다. 예수를 알게 된 것이 은혜이고 복이고 은총이고 가장 큰 선물입니다.

어떤 이에게 세 친구가 있었습니다. 그에게 제일 친한 친구가 하나 있었고 그런대로 좋은 친구가 하나 있었고 그냥 있어도 없어도 괜찮은 친구가 하나 있었습니다. 어느 날 임금님이 그를 불렀습니다. 이 친구는 겁이 났습니다. 두려웠습니다. 내가 뭘 잘못했나를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가장 친한 친구에게 내가 뭘 잘못한 일이 있어 임금님이 나를 부르시는 것 같은데 나와 함께 동행하여 달라고 부탁했습니다. 두려움이 있을 때는 친구가 가장 필요합니다. 그랬더니 가장 가깝고 친한 친구가 일언지하에 못 가겠다고 거절합니다. 어떻게 그럴 수가 있습니까. 이 사람은 크게 실망했습니다. 그래서 두 번째 친한 친구에게 같이 가 달라고 부탁했습니다. 그랬더니 궁궐 입구까지만 같이 가주겠으니 이해해 달라 미안하다고 말합니다. 그래서 평소 별로 기대도 안하던 친구에게 같이 가 달라고 부탁했습니다. 그랬더니 아주 흔쾌히 내가 같이 가서 자네의 결백을 주장해 주겠다고 합니다. 이 세 번째 친구는 그런 기대도 상상도 하지 않았는데 이 사람이 위험에 처했을 때 가장 필요한 친구가 되어주었습니다. 그래서 진정한 친구는 내가 어려움에 처했을 때 보아야 알 수 있습니다. 평상시나 내가 좀 어려움이 없이 살아갈 때에는 모릅니다.

이 이야기는 비유입니다. 여기 임금님은 재판장이신 하나님입니다. 재판장이신 하나님이 언젠가 나의 종말 때 나를 부르십니다. 그때는 참 겁날 때입니다. 그래서 제일 친한 친구에게 같이 가 달라고 했습니다. 여기 제일 친한 첫번째 친구는 돈입니다. 돈은 내가 가장 사랑하지만 그 돈도 나의 종말 때에는 아무런 힘을 발휘하지 못합니다. 두번째 친구는 가족입니다. 가족은 나의 종말 때에 장례식까지는 치러 주지만 그 이상은 할 일이 없습니다. 세번째 친구는 예수님입니다. 예수님은 평소에는 별로인 것 같은데 그래서 사람들이 가끔씩 믿어도 시큰둥하게 믿고 모른 체하기도 하는데 나의 종말 때가 되면 가장 내 곁에서 나의 변호자로 나의 인도자로 내게 다가오시는 분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그 주님의 값을 발견해야 합니다. 그를 발견하고 나면 곧 나의 값도 발견하게 됩니다. 우리의 인생 가운데서 예수를 알게 된 것이 가장 큰 은혜이고 축복입니다.

자유함의 삶

본문을 보면 “형제들아 너희가 자유를 위하여 부르심을 입었다“고 했습니다. 예수를 알고 난 후 주어진 또 하나의 선물은 진정한 자유함의 삶을 살게 된 것입니다. 이 자유함의 삶이 중요합니다. 자유에도 종류가 있습니다. 하나는 “육체적인 자유”입니다. 이 육체적인 자유가 인간으로 하여금 인간답게 살아가도록 만들어 줍니다. 그래서 사람답게 살지 않으면 먼저 이 자유부터 빼앗고 구속하고 억류합니다. 그런데 우리는 이 자유를 너무 남용하고 살아갑니다. 그래서 방종하고 무질서하게 살아갑니다. 무엇이든 남용하면 부작용이 나타납니다. 약도 좋지만 남용하면 약화를 불러옵니다. 음식도 좋지만 무절제하면 만병을 불러옵니다. 육신적인 자유도 참 중요한 자유인데 이 자유를 남용하면 방종을 불러옵니다.

본문을 보면 “이 주어진 자유로 육체의 기회로 삼지 말라”고 했습니다. 육신은 자꾸만 욕망을 부채질합니다. 육신은 자꾸만 육신의 도구로 사용하려는 유혹을 받게 됩니다. 그래서 그 좋은 자유를 방종에 사용하지 말라고 가르칩니다. 이 육신적인 자유도 중요하지만 더 중요한 자유는 정신적인 자유입니다. 몸이 자유해도 정신이 부자유하면 그 생활도 감옥에 갇힌 것이나 다름없습니다. 창살 없는 감옥생활을 하게 됩니다. 지난날의 과거에 매여 살아가는 분, 마음에 분노를 품고 살아가는 분, 돈에 매여 하늘이 푸른 줄도 모르고 살아가는 분, 죄책감 때문에 기쁨을 잃고 살아가는 분들 모두 정신의 자유를 빼앗기고 살아가는 분들입니다. 이 정신의 자유를 모르고 살아가는 분들은 기쁨이나 즐거움이나 행복함을 느끼고 누릴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이 정신의 자유가 참 중요한 것입니다. 예수를 알게 되면 제일 먼저 주어지는 은혜가 마음의 평화입니다. 그것은 정신적 자유함이 주어짐에서 오는 은혜입니다. 정신적 자유가 좋은 은혜입니다.

또 이보다 더 중요한 자유는 영적인 자유입니다. 이 영적인 자유는 무한한 자유입니다. 이 영적인 자유는 눈앞에 종말이 다가와도 자유함을 누릴 수 있는 자유입니다. 그러니까 이 영적 자유가 하나님이 주신 최고의 선물입니다. 자유의 극치가 영적 자유입니다. 종말 때가 되어 보십시오. 이 영적 자유처럼 소중한 것도 없습니다. 종말 때에 이 영적 자유가 있으면 든든해질 수가 있습니다. 우리들이 예수를 알고 구원받은 후 주어진 두 번째 은혜가 자유함을 누리는 삶입니다.

신분의 변화

예수를 알고 나면 급격한 신분의 변화를 이루게 됩니다. 그때부터는 함부로 살아갈 수가 없습니다. 그때부터는 곧 책임감을 가지게 되고, 할 일을 발견하게 되고, 의무감을 가지게 됩니다. 그것이 신분의 변화입니다. 우리 그리스도인의 책임감은 “섬김의 삶”입니다. 하나님이 나를 선택하시고 구원하신 이유는 섬김의 삶을 살아가게 하시기 위해서 입니다. 세상에서 섬김의 삶이 가장 아름다운 삶입니다.

그래서 본문을 보면 “사랑으로 서로 종노릇하라”고 했습니다. 이것이 공동체를 살리는 데 가장 요긴한 섬김의 요소입니다. 그래서 고린도전서 13장 3절에서 “내게 있는 모든 것으로 구제하고 내 몸을 불사를지라도 사랑이 없으면 무의미하다”고 했습니다. 여기 “종노릇하라”는 말은 “섬기라는 말”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얼마나 많이 일을 하고 큰 일을 했느냐”를 묻지 않으십니다. “왜 그 일을 했느냐”를 따지십니다. “얼마나 섬겼느냐”를 묻지 않으시고 “어떻게 섬겼느냐”를 물으십니다. 섬기는 삶을 살게 하시기 위해서 우리를 부르셨습니다. 그리고 섬기는 삶을 살게 되면 그것이 곧 주께 영광 돌리는 삶이 됩니다.

섬김의 삶이 중요한 이유

그 삶이 구원받은 자의 삶이기 때문입니다. 배운 사람은 배운 값을 해야 합니다. 아는 사람은 전파해야 합니다. 알고 있으면서도 모른 체하고 그냥 있으면 직무유기입니다. 그리고 하려고 하면 하나님께서 힘을 주십니다. 또 그때 이 섬김의 삶이 주어집니다. 구원받고 보니 구원받은 삶을 살아야 하는데 그 삶이 섬기는 삶입니다. 또 이 삶이 하나님이 원하시는 삶입니다. 하나님은 이 세상을 사랑하십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이 세상을 온전히 세우는 것에 관심을 가지십니다. 하나님은 누구도 멸망 당하는 것을 원치 않으십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우리를 사용하시려고 부르셨습니다. 이 세상이 아무리 타락하고 병들었어도 우리를 통해 구원하시려고 기다리십니다.

또 이 섬기는 삶이 예수님을 가장 많이 닮는 삶입니다. 예수님이 제자의 발을 씻기셨습니다. 그리고 “내가 행한 것 같이 너희도 행하도록 본을 보였노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래서 섬기는 삶은 예수를 닮아가는 삶입니다. 예수를 닮아가는 삶을 살아갈 때 진정한 그리스도인의 삶이 이루어집니다. 그렇게 살아갈 때 하나님의 뜻을 이루게 되고 이 세상에서 빛이 되고, 그렇게 살아갈 때 구원받은 우리의 삶을 다 이루며 살아가게 됩니다. 그때 우리는 하나님으로부터 복을 받고 힘을 받고 은혜를 입게 되는 것입니다. 여러분, 한번 시도해 보십시오. 한번 섬겨보십시오. 그러면 은혜가 주어질 것입니다. 그리고 복을 받게 될 것입니다.

어떤 권사님은 평생 성도들을 위로하고 기도해주려고 찾아 다녔습니다. 몸이 귀찮아도 누가 병원에 입원했다 하면 마다하지 않고 찾아 다녔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그분에게 84세까지 건강의 복을 주셨습니다. 그 분이 노년을 그렇게 건강하게 활동할 수 있었던 것은 순전히 하나님이 주신 은혜의 결과였습니다. 그렇게 사람들을 세우고 섬기고 헌신하니까 하나님이 그렇게 건강의 복을 주신 것입니다. 그 분이 그렇게 사시다가 엊그제 서울에 있는 딸네 집에 들러 어린 손자들에게 기도해주시고, 어지럽다 하며 소파에 기대자마자 운명했다고 합니다. 자기 몸을 아끼지 않고 병자들을 심방하고 어려움 당하는 사람들을 세우려 그렇게 몸을 아끼지 않고 다니시더니 하나님이 그를 불러 가실 때 그렇게 불러가셨습니다. 얼마나 큰 은혜입니까.

우리들이 그렇게 살아갈 때 그 섬기는 삶이 이 세상을 세우고 세상을 건강하게 만드는 것입니다. 우리는 그렇게 섬기며 살아가도록 부름 받은 사람들입니다. 그 부르심에 합당하게 살아갈 때 하나님께는 영광이고 나도 영광을 입고 이 세상은 건강해지는 것입니다. 우리는 섬기며 헌신하기 위해서 부름 받았고 선택받았고 태어난 사람들입니다. 부르심을 받고 눈을 뜨고 보니까 우리는 내가 할 일이 무엇인가를 알게 된 것입니다. 높은 곳에서 아래를 내려다보면 인간의 존재가 아무것도 아니라는 것을 발견하게 되듯이 저 높은 뜻을 알고 하나님의 뜻의 세계를 보고 알게 되니까 이 섬김의 삶의 뜻을 알게 되는 것입니다. 그렇지 않고 낮은 곳만 보고 낮은 곳에서 나를 보기 때문에 나에게 초점이 맞추어지고 나를 고집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교만해지기도 하고 자랑도 하고 내가 섬김을 받고 싶어지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그 하나님의 세계를 보고 깨달아 알게 된 후에 비로소 그동안의 추구하던 일들이 얼마나 무모하고 하찮은 것인가를 뼈저리게 느끼게 됩니다. 그래서 그는 그때부터 섬김의 삶을 살아가게 됩니다. 그리고 철두철미하게 주를 섬기고 민족을 섬기고 하나님의 뜻을 이루기 위해서 동분서주합니다. 그리고 오늘 본문에서 말씀하기를 “형제들아 너희가 자유를 위하여 부르심을 입었으나 그러나 그 자유로 육체의 기회로 삼지 말고 오직 사랑으로 서로 종노릇하라“고 당부했습니다. 그 말은 ”주신 자유함으로 섬기고 헌신하며 살아가라“는 말씀입니다.

우리들이 구원받고 부르심을 받은 사람이면서도 낮은 곳만 바라보고 나만 바라보게 되면 여전히 우리는 나의 안에 갇힌 사람으로 살아갈 수밖에 없습니다. 그래서 그리스도인은 더 높은 곳을 바라보아야 합니다. 더 높은 뜻을 바라보아야 합니다. 그리고 나를 부르신 그 깊으신 뜻을 알아야 합니다. 그러면 그때 우리는 나의 할 일을 발견하게 되고 나의 사명을 발견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때 나는 비로소 섬김의 삶이 무엇이며 섬김의 삶에서 주어지는 밝은 에너지를 체험하고 느끼게 될 것입니다.

이것을 알아야 그 인생이 엄숙해지고 뜻을 발휘할 수가 있습니다. 그때 나의 옆에 있는 사람이 얼마나 소중하고 그 사람이 나에게 보내신 하나님의 섭리를 이루는 사람이라는 점을 발견하게 될 것입니다. 그런 안목이 없으면 우리는 여전히 나를 강조하게 될 것이고 나와 너와의 갈등은 치유되지 않고 계속될 것입니다. 그래서 그리스도인은 저 높은 뜻을 알고 나를 부르신 그 깊으신 뜻을 헤아릴 수 있어야 합니다. 그래야 섬기라고 강조하신 이유를 알고 섬겨야 할 이유를 알게 됩니다. 그래서 우리 그리스도인은 언제나 십자가의 자기 희생의 정신을 회복해야 합니다. 십자가의 희생의 정신이 없이는 진정한 그리스도인으로 섬김의 삶을 살아가기가 어렵습니다. 십자가는 섬김의 표현이고 사랑의 최고의 표현입니다. 자기 희생이 있고 섬김이 있는 곳에 가정이 바로 서고 교회도 바로 서고 세상도 바로 서게 됩니다.

역사를 보면 이 사랑의 희생이 여러 곳에서 나타났었습니다. 가까이는 양화진 선교사들의 묘지만 가 보아도 그런 모습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헐버트라는 감리교 선교사는 을사보호 조약 이후 한국민의 비참한 실상을 목격하고 독립을 위해서 뛰어다니다가 순교했습니다. 그래서 그의 묘비에 “나는 웨스트민스터 사원 보다 한국 땅에 묻히기를 원하노라”고 쓰여 있습니다. 최초의 선교사인 아펜젤러 목사는 배로 여행하던 중 바다에 빠진 한국 소녀를 구하다가 익사해서 시신도 찾지 못한 채 양화진 공동묘지에 묘비만 세워져 있습니다. 내 민족도 아니고 내 나라도 아닌 이 땅을 사랑했던 그들의 사랑이 곧 십자가의 사랑입니다. 한국교회는 그런 분들의 사랑의 기초 위에 세워졌습니다. 그들은 한결같이 저 높은 주님의 나라를 보았고 체험하였기 때문에 그런 높은 안목을 가졌고 섬김과 순종의 삶을 살 수 있었습니다. 그리스도인의 삶은 생각하면 이렇게 위대한 삶일 수 있습니다. 이것이 진정한 그리스도인의 삶입니다. 그런 삶에 부부간에 아옹다옹하고 교회 안에서 갈등하고 조금 가졌다고 교만 떠는 그런 어설픈 차원의 삶이 있겠습니까.

오늘 우리들의 삶을 되돌아보면 참 죄송하기 그지없습니다. 그리고 지극히 유아적이고 내 앞만 바라보고 살아가는 초등학생 수준의 삶입니다. 우리는 오늘 본문에서 말씀하신 “주어진 자유로 육체의 기회를 삼지 말고 오직 사랑으로 서로 종노릇하라“고 당부하신 말씀의 뜻을 이해할 수 있어야 합니다. 그때 주님 당부의 말씀처럼 진정 사랑으로 섬기고 세우고 헌신하고 받드는 삶을 살아가게 될 것이라고 믿습니다.  (이정익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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