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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놀라운 구원의 드라마 (엡 2:1-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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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지난 주간에 저는 목포 연동교회에 가서 이틀 동안 집회를 인도하고 수요일에 돌아왔습니다. 목사님도 참 훌륭하셨고, 교인들도 분위기가 참 좋아 보였습니다.
  그 교회는 사실 저와 좀 관련이 있습니다. 제 동기 목사님이 목회하는 교회이고, 그 목사님 아들이 김지선 군인데, 우리 교회학교에 와서 신학생으로 봉사하고 있습니다. 끝나고 인사할 때 보니, 어느 권사님 한 분이 오셔서 “제가 영신교회에 있는 이은혜 전도사 이모입니다.”하셔서 반갑게 인사를 나누었습니다. 참 세상은 넓고도 좁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집회를 인도하는 가운데 특별한 은혜가 있었습니다. 저희 교회 원로장로님들도 다 훌륭하시지만 그 교회도 훌륭한 원로장로님 한분이 계셨습니다. 박정준 장로님이라는 분이신데, 올해 연세가 여든 넷이셨습니다. 이 분은 신체의 모든 기능이 다 약화되어서 더 이상 살 수 없다는 선고를 받고, 모든 의료 행위를 중단한 상황에 계셨습니다.
  그런데 그 분이 얼마나 예배를 사모하시는지... 스스로는 소변을 볼 수 없기에 몸에 병을 차고, 가족의 부축을 받아 예배에 참석하셨습니다. 이틀동안의 집회에도 모두 참석하셨습니다. 그 분의 얼굴에서는 얼마나 예배를 사모하는지 역력히 알 수 있었습니다. 흐트러진 모습 없이 넥타이 메고 양복 입고 오셔서 예배드리고 돌아가시는 모습이 참 훌륭하셨습니다.

  식사 중에 어떤 분의 설명을 들으니, 그 분이 바로 이 랜드 그룹 박성수 장로님의 아버님이시라고 했습니다. 역시 훌륭한 아버지에 그 아들이구나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부연해서 들려주는 이야기를 들으니, 박정준 장로님이 젊은 시절에 간척사업을 크게 하셨답니다. 그 사업이 잘 되면 거기서 얻는 이익의 상당한 땅을 교회에 드리기로 약속했는데, 그만 간척사업이 잘 안 되어 부도가 났고 은행에 몽땅 차압을 당했답니다. 많이 가슴아파하시고 그것으로 염려하시는 중에 아드님 박성수 회장님이 그 땅을 은행에서 다시 찾아서 교회에 약속대로 드리기로 했답니다. 그 교회가 원래 목포 구 시가지에 있었는데 신시가지로 옮겨 오면서 그 장로님이 드린 헌물이 굉장히 유익하게 쓰일 수 있었다는 설명을 해 주셨습니다.

  저는 그 장로님을 뵈면서, 정말 오늘 예배가 마지막 예배라는 심정으로 참여하는 장로님, 그러면서 하나님과의 교제를 가장 큰 기쁨으로 여기는 장로님의 모습을 보면서, 참으로 하나님께서 저에게 주신 인생의 목적에 충실한 삶을 살아가고 계시는구나 하는 것을 느낄 수 있었기에 제 자신이 은혜를 받고 돌아왔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 인생의 모습에는 여러 단계가 있습니다.

  먼저는 생존 단계에 머무는 분들이 있습니다. 그 분들의 관심은 먹고, 입고, 생활하는 데에 있습니다. 오늘 어떻게 한 끼를 해결할까, 어디 가서 공짜로 밥 한 끼 얻어먹으면 그 날은 매우 기분 좋은 날입니다. 이 단계가 생존 단계입니다. 의식주의 만족 상태에 머무는 단계입니다. 다르게는 오늘 또 어디 좋은 찜질방에 가서 하루를 그저 시간 보내면서 육체를 즐겁게 할까 하는 관심을 가진 분들도 마찬가지의 단계입니다. 가장 낮은 단계입니다.

  두 번째 단계는 성공단계입니다. 조금 더 안락한 삶을 누리는 것입니다. 다른 삶보다 조금 더 여유가 있습니다. 조금 살만합니다. 먹고 입고 생활하는 건 걱정 안합니다. 남들에 비하면 나는 그래도 성공한 사람이라고 생각하면서 살아갑니다. 그렇지만 인생의 분명한 목적과 사명이 결여되어 있습니다. 그가 가진 여건이나 환경이 그의 인생의 가치를 말해주지는 못합니다.

  한 단계 더 올라가면, 세 번째로 의미단계가 있습니다. 이 사람들은 진정한 삶의 목적과 사명을 깨달은 사람들입니다. 그 목적 안에서 살기 때문에 날마다의 삶이 의미요, 가치요, 기쁨인 것입니다. 자기에 대한 하나님의 계획을 발견한 사람들입니다. 그들은 하나님의 자녀라는 확신 가운데서 살아가고 있습니다. 세계 70억 인구가 있지만 그 중에 나는 하나님의 창조물이라는 사실을 확인하면서 살아갑니다. 수많은 사람들과 뭔가 구별된 자신을 특별한 사람이라고 여기면서 자부심을 가지고 살아갑니다. 왜냐하면 그들에게는 하나님이 주신 분명한 사명과 목적이 있기 때문입니다. 의미단계에 살아가는 사람들이 아주 귀합니다.

  우리는 성경에서 목적이 이끌어가는 삶을 살았던 사람들을 볼 수 있습니다.

  구약에서는 다윗과 같은 인물입니다. 사도행전 13장 36절은 다윗에 대해서 이렇게 표현하고 있습니다. “다윗은 당시에 하나님의 뜻을 좇아 섬기다가 잠들었노라”라고 했습니다.    그는 일생동안 하나님의 뜻에 합당한 삶을 살았습니다. 그에게 주신 하나님의 선한 목적을 좇아 살다가 무덤에 잠든 인물이라는 것입니다.
  여러분의 비석에 그와 같은 비문이 쓰여지길 원하지 않습니까? 하나님은 다윗을 가리켜서 왜 ‘내 마음에 합한 자’라고 불렀을까요? 그는 하나님의 의도에 합당한 삶을 살았기 때문입니다.
  다윗은 하나님의 영광을 위한 삶을 살았습니다. 그래서 그의 생의 마지막은 성전을 건축하는 소망하는 것이었습니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 성전을 건축하길 그토록 소망하고 사모했던 인물입니다.

  또한 신약에서는 바울사도를 소개합니다. 바울은 위대한 목적의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하나님이 주신 거룩한 복음의 목표에 지배받는 삶을 살았습니다. 그가 복음 전도자로 살아갈 때 수많은 고난과 박해, 핍박, 위협, 풍랑이 있었지만 그는 조금도 흔들리지 않았습니다. 그의 인생의 목적이 분명했기 때문입니다.
  그는 사도행전 20장 24절에서 이렇게 고백합니다. “나의 달려갈 길과 주 예수께 받은 사명 곧 하나님의 은혜의 복음 전하는 일을 마치려함에는 나의 생명을 조금도 귀한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노라” 아멘. 인생의 목적이 분명하면 자신의 생명까지도 아깝지 않게 그 목적을 위해서 드릴 수 있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오늘 우리가 읽은 에베소서 2장 10절에서는 하나님이 우리를 향한 각자의 아름다운 선한 목적을 가지고 계심을 말씀해 주고 있습니다. “우리는 그의 만드신 바라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선한 일을 위하여 지으심을 받은 자니 이 일은 하나님이 전에 예비하사 우리로 그 가운데서 행하게 하려 하심이니라” 아멘. 그의 만드신바라고 했을 때, 공동번역이나 새 번역은 ‘우리는 하나님의 작품’이라고 했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작품입니다. 상품이 아니고 작품입니다. 상품은 공장에서 막 찍어내는 것이고 작품이란 것은 일생에 하나정도 나올까말까 한 것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위대한 창조물입니다. 하나님의 예술품입니다.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어떤 일을 위하여 지으심을 받았다구요? 선하신 일을 위하여 지으심을 받았다고 했습니다.
  하나님은 선한 목적을 위하여 우리를 창조하신 것입니다. 그러니 우리 각자 한 사람에게는 하나님의 계획과 목적이 다 있다는 것입니다. 이 목적을 발견하는 사람은 그 목적에 합당한 아름답고 유익한 삶을 살아갈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 인생의 목적을 발견하지 못하는 사람은 방황하며 좌절하며 시간을 낭비하며 살아갈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특별히 하나님께서는 선한 일을 위해서 우리를 예비하셨다고 했습니다. 10절 후반절에 보니, 하나님이 전에 예비하사 우리로 그 가운데서 행하게 하려 하심이니라고 했습니다. 새번역으로 읽어보면, “하나님이 이렇게 준비하신 것은 우리가 선한 일을 하면서 살아가게”라고 합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준비시켜 주셨습니다. 어떻게 준비시켜 주셨을까요? 선한 목적을 위해 살도록 우리를 준비시켜 주셨습니다.

  오늘 이 에베소서 2장 1절부터 10절까지의 말씀 중 우리는 우리가 선한 일에 쓰임 받도록 하나님이 우리를 어떻게 예비하셨는가, 어떻게 준비하셨는가를 발견할 수 가 있습니다.

  첫째로, 하나님은 허물과 죄로 죽었던 우리를 살리셨습니다.

  우리가 선한 목적에 합당한 사람이 되도록, 선한 일에 우리가 쓰임 받는 도구가 되도록 하나님은 허물과 죄로 죽었던 우리를 살려내셨습니다. 사람이 죽어있으면 쓸데가 없습니다. 사람을 살려 내야만 무언가, 어떤 도구로 쓸 수 있는 것입니다.

  오늘의 말씀 1절, 2절을 읽습니다. “너희의 허물과 죄로 죽었던 너희를 살리셨도다 그 때에 너희가 그 가운데서 행하여 이 세상 풍속을 좇고 공중의 권세 잡은 자를 따랐으니 곧 지금 불순종의 아들들 가운데서 역사하는 영이라” 아멘.

  허물은 탈선했다는 것입니다. 죄라는 것은 원어로 ‘하마르티아’라고 합니다. ‘과녁에서 빗나가다’는 뜻입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계획하신 그 아름다운 목적에 마땅한 삶에서 우리가 빗나간 삶입니다. 이것이 바로 허물과 죄입니다. 우리는 아담의 범죄 안에서 우리 영혼이 다 죽었습니다.
  우리가 종종 그런 기도를 하는 분들이 계십니다. ‘죽을 수 밖에 없는 저희들을 사랑하셔서...’ 죽을 수 밖에 없는 우리 입니까? 이미 죽었던 우리 입니까? 우리는 이미 죽었습니다. 허물과 죄로 죽었던, 이미 시신이 된 우리를 다시 살려내신 것입니다. 여러분, 이 은혜가 너무나 큰 것을 감사하시기 바랍니다. 우리는 아담 안에서 이미 다 죽었습니다. 죽은 사람입니다. 그런데 우리에게 새로운 생기를 불어넣어주셔서 우리를 살려내 셨습니다. 누구 안에서?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입니다.
  오늘의 말씀 5절에 보니, ‘허물로 죽은 우리를 그리스도와 함께 살리셨고’라고 했습니다. 우린 다시 살아난 사람입니다. 그러니 죽었다가 살아나면 얼마나 감격이 크겠습니까? 우리는 보통 사람들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선한 일에 쓰임 받게 하시려고 우리를 죽은 자리에서 다시 일으키셨습니다.

  샴쌍둥이라고 들어보셨습니까? 샴쌍둥이를 분리 수술하는데에 성공한 뱅 카슨이란 유명한 의사가 있습니다. 이 사람은 아주 가난하게 자랐습니다. 그런데 어머니가 늘 어릴 때부터 “넌 하나님의 선물이야, 넌 하나님의 도구야!”라는 말로 아이를 키웠습니다. 그는 훌륭한 의사가 되어서 하나님의 도구가 되기를 원했고, 샴쌍둥이를 분리하는 어려운 수술을 성공적으로 이끌어 내어서 세계적인 의사가 되었습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선한 도구로 쓰임 받게 하시려고 죽은 자리에서 살려주신 것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우리가 지금은 하나님의 자녀요 축복가운데 살아가지만 과거를 돌아보면 이력서가 복잡합니다. 우리는 허물과 죄로 죽었던 사람입니다. 2절에 보니, 공중 권세 잡은 자들의 영향아래서 노예로 살던 사람들입니다. 뿐만 아니라 3절에 보니, 본질상 우리는 진노의 자녀였습니다. 우리는 무서운 심판을 받을 대상들이었습니다. 그런데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우리를 다시 살려내셨습니다. 왜 살려내셨지요? “선한 일에 쓰임 받게 하시려고!”입니다.

  두 번째로, 우리가 선한 일에 쓰임받도록 무엇을 예비하셨습니까?

  큰 사랑을 부어주셨습니다.

  4절과 5절 읽습니다. “긍휼에 풍성하신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신 그 큰 사랑을 인하여 허물로 죽은 우리를 그리스도와 함께 살리셨고 (너희가 은혜로 구원을 얻은 것이라)” 아멘.

  우리를 사랑하신 그 큰 사랑을 인하여 그리스도와 함께 살리셨습니다. 우리에게 엄청난 사랑을 부어 주신 것입니다. 우리를 살리신 그리스도의 사랑은 큰 사랑입니다. 큰 사랑은 최고의 사랑입니다. 그 최고의 사랑은 당신의 외아들까지 내어주신 사랑입니다. 우리가 만약 누구를 사랑해서 그에게 뭘 주고 싶다고 할 때 내 생명을 주든 내 하나밖에 없는 아들을 내어준다면 그것처럼 큰 것이 어디 있겠습니까? 하나님은 우리를 위해서 하나밖에 없는 아들을 십자가에서 내어 주셨습니다. 우리가 달려야 할 십자가에 바로 예수 그리스도 그 분이 달리셨습니다. 우리가 맞을 채찍에 그 분이 대신 맞으셨습니다. 우리가 당해야 할 모욕을 그 분이 대신 감당하셨습니다. 큰 사랑을 부어 주셨습니다. 우리는 큰 사랑을 받은 사람입니다. 가정에서 사랑받지 못한다고 생각하지 마십시오. 우리는 이미 하나님으로부터 큰 사랑을 받은 사람들입니다. 찬송가 404장에도 보면, ‘그 크신 하나님의 사랑’이라고 하지 않습니까? ‘하늘보다 넓고 바다보다 깊은 큰 사랑’을 이미 받은 사람들입니다. 찬송가 414장에 보니, ‘주의 사랑 비췰 때에 기쁨 오네 그 큰 사랑 내 맘속에 명랑하게 비췰 때에 찬송 하네’ 그 큰사랑이 이미 우리 마음속에 비쳐졌습니다. 우리는 시시한 사람들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큰 사랑을 받은 사람들입니다. 왜 우리에게 큰 사랑을 부어주셨나요? 선한 일에 쓰임받게 하기 위해서입니다. 하나님의 선한 목적에 합당한 도구가 되게 하기 위해서입니다.

  세 번째로, 선한 일에 쓰임 받도록 하나님은 무엇을 예비해 주셨습니까? 은혜로 구원받게 하셨습니다.

  8절, 9절 말씀을 읽습니다. “너희가 그 은혜를 인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얻었나니 이것이 너희에게서 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선물이라 행위에서 난 것이 아니니 이는 누구든지 자랑치 못하게 함이니라” 아멘.
  우리가 너무나 잘 아는 말씀입니다. 우리를 선한 도구로 쓰임 받게 하시려고 하나님은 은혜로 인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받게 하셨습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선물이라고 했습니다. 여러분, 선물은 대가를 주는 게 아닙니다. 어떤 사람이 하루 종일 일하고 나서 무언가를 받는다면 그것은 급료입니다. 하루 일당입니다. 일 하고 받는 것은 일당이지 선물이 아닙니다.
  선물은 아무런 조건 없이 주는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은혜란 말로 설명할 수 있습니다. 

  은혜란 무엇입니까? 받을 자격이 없는 사람에게 일방적으로 주시는 하나님의 호의, 그것이 바로 은혜입니다. 우리는 은혜 받을 자격이 없습니다. 잘난 것도 없고, 선한 것도 없고, 의로운 것도 없고, 업적도 없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우리에게 값없이 그 분의 긍휼 때문에 부어주시는 사랑이 바로 은혜입니다. 거저 주시는 것입니다.
  이렇듯 우리에게 용서라는, 구원이라는 엄청난 선물을 주시는데 인간이 그것을 받아야 하는데 무엇으로 받습니까? 바로, 믿음으로 받는 것입니다. 그 은혜로 인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아!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얻었나니! 하나님이 아무리 우리에게 주시고자해도 우리가 믿음으로 받지 않으면 그것은 불가능한 것입니다. 우리가 믿음으로 받을 때 구원의 축복이 주어지는 것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하나님이 은혜로 주시는 사랑을 받아야 온전한 구원받은 백성으로서 선한 일에 쓰임 받을 수 있습니다.

  미국 서부에서 한 젊은이가 실수로 사람을 죽이게 되었습니다. 그는 감옥에 수감되었고 사형집행을 당하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그 젊은이의 성실함을 안타깝게 여긴 이웃 사람들이 사면 운동을 펼쳤습니다. 장래가 촉망되는 이 젊은이를 선처해달라는 의미에서 도장을 받아 주지사에게 청원을 했습니다. 주지사가 마침 크리스찬이었는데 이웃 사람들의 청원서를 보고는 감동을 받아서 이 젊은이를 구제해 주기로 생각했습니다. 주지사는 대통령처럼 사람을 살릴 수 있는 사면권을 가지고 있습니다.
  주지사가 성직자의 복장을 하고 사면장을 가지고 그 감옥에 찾아갔습니다. 그런데 이 젊은이는 신경이 매우 날카로와졌던 차였던지 이 성직자 만나기를 거절했습니다. “나는 이미 당신 같은 사람 여덞 명이나 만났습니다. 귀찮소. 이제 죽을 사람이 뭐 만날 필요가 있소!” 하고 거절해 버렸습니다. 주지사는 “나는 당신에게 좋은 선물을 가지고 왔습니다. 나는 당신에게 참으로 귀한 선물을 가지고 왔습니다. 나랑 잠깐만 만납시다.”하고 사정했지만 거절해버렸습니다. 간수를 불러 데려가라고 했습니다.
  결국 주지사는 사면장을 전달하지 못하고 면박을 당하고 돌아올 수밖에 없었습니다. 이후에 간수가 얘기했습니다. “당신에게 찾아왔던 사람은 주지사인데, 당신에게 사면장을 가지고 왔었습니다.”
  뒤늦게 알고 통곡했지만 이미 시간이 지난 뒤였습니다. 그는 계획대로 사형집행을 당했습니다. 그는 마지막으로 이렇게 말했습니다. “제가 죽는 것은 제 죄 때문에 죽는 것이 아닙니다. 주지사의 사면장을 거절했기 때문입니다.” 라고. 

  우리가 죽는 것은 죄 때문에 죽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용서의 사면장을 거절했기 때문에 죽을 수 밖에 없는 것입니다. 600만의 유태인을 학살한 히틀러가 구원받을 수 있습니까? 구원받을 수 있음을 믿습니다. 아무리 많은 사람을 죽였어도 그가 그리스도의 용서의 사면장을 받아들이기만 한다면, 믿기만 한다면 그에게도 구원이 주어지는 것입니다. 선한 일에 쓰임 받도록 은혜로 구원받게 하셨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를 왜 죽은 자의 자리에서 살리셨습니까? 왜 우리에게 어마어마한 큰 사랑을 부어주셨습니까? 왜 우리로 은혜로 하여금 구원받도록 하셨습니까? 선한 목적에 합당한 사람이 되라고 주님은 그렇게 하신 것입니다. 이제 우리 인생에 중요한 문제는, 우리 인생에 목적을 발견하는 일입니다. 목적을 발견하고 살아가는 삶에는 많은 유익이 있습니다. 그는 좌절하거나 절망하지 않습니다. 인생의 목적이 분명한 사람은 시간을 낭비하지 않습니다. 그는 헛된 삶을 살지 않습니다. 이사야 49장 1절에 보니까 내가 헛되이 수고하였으며 무익히 공연히 내 힘을 다하였도다 라고 이사야 기자는 노래하고 있습니다. 헛된 일에 수많은 시간을 낭비하며 살아왔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목적이 분명한 사람은 결코 좌절하거나 포기하지 않습니다.

  또한 분명한 목적은 우리 삶의 동기를 부여해 줍니다. 예레미야 29장 11절에 보니, “나 여호와가 말하노라 너희를 향한 나의 생각은 내가 아나니 재앙이 아니라 곧 평안이요 너희 장래의 소망을 주려 함이니라”고 했습니다.
  하나님의 선한 계획과 목적을 아는 사람은 늘 미래가 밝고 아름다운 것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성경은 절망의 책이 아닙니다. 성경은 늘 희망으로 가득 차 있습니다. 어떤 사람에게도 성경은 희망의 선물을 주고 있습니다. 여러분을 향한 하나님의 계획을 발견할 수만 있다면 우리의 삶은 날마다 희망가운데 이어질 수 있습니다.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목적을 아는 사람은 집중적인 삶을 살아갈 수 있습니다. 대개 사람들은 비슷하게 60-80년을 삽니다. 어떤 사람들은 일생에 많은 업적을 남기기도 하고, 어떤 이들은 별로 남길 것이 없습니다. 이리 저리 분주하게는 했지만 드러낼 것이 없습니다. 왜 그럴까요? 집중적인 삶을 살았느냐는 차이입니다. 우리가 초등학교 다닐 때 경험을 떠올려 보면 과학시간에 오목렌즈, 볼록렌즈를 가지고 와서 창가에서 햇빛을 받아 종이에 비춥니다. 그러면 렌즈를 통해서 햇빛이 초점을 하나로 모아질 때 한 5분 지나면 종이가 탑니다. 구명이 뚫립ㄴ디ㅏ. 헝겊에다 빛을 모아서 레이저처럼 쏘면 헝겊에 연기가 나고 타 버립니다. 바로 그것입니다. 목적을 아는 사람은 집중적인 삶을 살 수 있습니다. 오늘 내 인생이 정말 하나님이 원하는 일을 위해서 내 삶을 온전히 드릴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에베소서 5장 15절은 우리에게 권면합니다. “그런즉 너희가 어떻게 행할것을 자세히 주의하여 지혜 없는 자 같이 말고 지혜 있는 자 같이 하여 세월을 아끼라, 하루하루의 주어진 시간을 귀중한 목적을 위하여 사용하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 각자에 대한 아름다운 계획을 갖고 계십니다. 이러한 그 계획을 발견해 가는 과정이 목적이 이끄는 40일 캠페인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진정한 자신의 목적을 발견한 사람은 가치 있는 인생을 살 것입니다.

  미국 캘리포니아에서 오랫동안 장마가 온 적이 있습니다. 1979년 2월에 그 장마로 인해서 산사태가 났는데 산 정상에 있던 큰 바위가 굴러 내려와서 산 중턱에 걸렸습니다. 그랬는데 산 아래에는 고속도로가 지나가고 있었는데 저 위험한 큰 바위가 언제든지 굴러 내리면 고속도로에 지나가는 차가 큰 위험에 빠질 수 있었습니다. 그래서 그 중턱에 있는 큰 바위를 치우려고 보니 9만 2천불의 돈이 필요했다고 합니다. 그런데 어떤 젊은이가 와서 사겠다고 하며 단돈 100불, 10만원에 사갔습니다. 그리고 그 돌을 자기 작업장으로 옮기는데 2500불이 들었습니다. 250만원이 든 거지요. 이 스물 여섯 살의 호주 출신의 조각가의 이름은 브레트 리빙스턴 스트롱이란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바위를 조각하기 시작했습니다. 모두에게 고물단지였던, 골칫덩어리였던 그 바위, 쓸모없는 그 바위를 조각칼을 대고 정을 가지고 조각하기 시작했습니다. 8주 후에, 미국의 유명한 영화배우인 존 웨인의 얼굴이 서서히 드러나기 시작했습니다. 그 당시에 서부영화로 유명한 존 웨인은 투병중에 있었습니다. 그는 존 웨인을 격려하기 위해 바위에 그 얼굴을 조각하기 시작했습니다. 전국의 수많은 사람들이 관심을 갖고 관람하고 격려해 주었습니다. 바위는 8주 후에 완성되었지만 불행하게도 존 웨인은 완성된 자기 얼굴을 보지 못하고 세상을 떠났습니다.
  놀랍게도 100불을 주고 산 이 존 웨인의 얼굴이 담긴 바위가 얼마에 팔렸는지 아십니까? 100만불! 약 10억원이 넘는 돈으로 경매되었다고 합니다. 모두가 쓸모없게 여긴 골칫덩어리 바위가 한 조각가의 손에 붙들릴 때, 100만불의 가치가 있는 아주 귀한 바위로 바뀌어졌다는 것입니다.

  우리 인생도 그렇습니다.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목적을 발견할 때 우리 인생은 달라질 수 있습니다. 가치가 달라집니다. 그러나 그것을 알지 못하고 이리저리 살아간다면 우리는 그저 쓸모없는 시간 낭비의 연속을 이어갈 뿐입니다.

  여러분, 물건을 살 때 제품 설명서가 있습니다. 텔레비전이나 냉장고, 선풍기 등의 모든 제품엔 설명서가 있습니다. 그 설명서를 잘 읽어보고 써야 오래 쓰고 잘 쓸 수 있습니다. 어떤 것은 불에 넣으면 안 되고, 물에 넣으면 안 되고, 110V에 꽂으면 고장 나고 등등... 그런 조건을 지키지 않으면 쉬이 망가져서 쓸 수 없을 것입니다.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은 우리 각자에 대한 제품 설명서를 다 주셨습니다. 이런 목적으로 살아가야 한다고 하나님이 다 계획해 놓으셨습니다. 그것을 발견하는 사람은 아름다운 인생을 살지만 그것을 읽어보고 깨닫지 못하는 사람은 고장 난 인생이 될 수 밖에 없습니다. 제 기능을 다하지 못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땅의 풀 한포기도 다 목적이 있어 만들어 놓으셨습니다. 장미 한 송이도 다 목적이 있어 만드셨습니다. 우리는 다 귀합니다. 그런데 그 목적을 깨닫지 못하는 사람은 비참한 삶을 살아갈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영신교회 교우 여러분, 우리 영신교회 교우들이 목적이 이끄는 40일 캠페인을 통해서 여러분의 하나님이 주신 인생의 목적을 다 발견하고 가치 있고 보람되고 열매 맺는 삶을 살아갈 수 있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이영무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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