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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언제나 길은 있다 (단 3:13-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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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영국 런던에 있는 케이 미술관에 프레드릭 왈츠라는 유명한 화가가 그린 그림이 있습니다. 이 그림에는 한 여인이 참담한 모습으로 비파를 가슴에 안고 지붕 위에 혼자 외롭게 앉아 있습니다. 이 여인은 눈은 수건에 가려져 있어 아무 것도 볼 수 없습니다. 지붕의 위의 하늘은 해도 달도 없는 어두움 밤에 오직 하나의 별만이 그녀의 등 뒤에서 그녀를 비쳐주고 있습니다. 그녀가 가슴의 일곱 줄의 비파는 이미 여섯 줄이 끊겨져 있습니다. 그녀는 앞을 볼 수 없는 상태에서 외롭게 홀로 앉아  아직 남아 있는 한 줄로 연주를 하고 있습니다. 하늘에서 비추는 단 하나의 별빛과 단 하나의 비파 줄과 눈은 수건으로 가려져 앞을 보지 못하는 여인은 절망하지 않고 아름다운 노래를 부르는 그림입니다. 이 그림을 그린 프레드릭 왈츠는 이 그림의 제목을 무엇이라고 한 줄 아십니까? 여러분이라면 무엇이라고 하겠습니까? 이 그림을 그린 화가 프레드릭 왈츠는 그림의 제목을“소망”이라고 했습니다.

이 그림에서 말하듯이 우리는 인생에서 햇볕을 잃을 수도 있습니다. 달빛을 잃을 수도 있습니다. 인생의 음조를 맞추어 주는 비파의 줄들이 끊어지는 경험도 할 수 있습니다. 살다보면 사랑하던 아내나 남편 혹은 자녀의 줄이 갑자기 끊어질 수도 있습니다. 불의의 사고로 인생의 줄이 끊어지는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믿음의 사람들에게는 언제나 끊어지지 않는 단 하나의 줄이 있습니다. 영원이 꺼지지 않고 불타는 불씨가 있습니다. 그것이 바로 예수 그리스도 하나님의 사랑입니다. 바울 선생은 이렇게 말했습니다. “누가 우리를 그리스도의 사랑에서 끊으리요 환난이나 곤고나 박해나 기근이나 적신이나 위험이나 칼이랴 기록된 바 우리가 종일 주를 위하여 죽임을 당하게 되며 도살 당할 양 같이 여김을 받았나이다 함과 같으니라 그러나 이 모든 일에 우리를 사랑하시는 이로 말미암아 우리가 넉넉히 이기느니라 내가 확신하노니 사망이나 생명이나 천사들이나 권세자들이나 현재 일이나 장래 일이나 능력이나 높음이나 깊음이나 다른 어떤 피조물이라도 우리를 우리 주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하나님의 사랑에서 끊을 수 없으리라”(롬8:35-39)

바꿔 말하자면,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함으로 우리는 절망 속에서도 노래 할 수 있고, 하나님이 계심으로 우리는 십자가의 고통 중에서도 부활의 소망을 가지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 안에 있는 한 우리에게는 언제나 길이 있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예수님은 자신을 생명이요 길이라고 하셨습니다. 예수 믿는 사람들에게는 언제나 길이 있습니다.

본문을 보면 바벨론에서 자유를 잃어버린 식민지 백성으로 살고 있었던 사드락과 메삭과 아벳느고에게 최대의 위기가 찾아 왔습니다. 절대 국왕이며 그의 말이 곧 법인 바벨론의 제왕 느부갓네살 왕이 높이가 육십 규빗이요 넓이가 여섯 규빗이나 되는 금으로 된 우상을 두라 평지에 세우고, 총독과 각 고을의 수령과 행정관과 재무관과 재판관과 법률사와 모든 지방의 관리들을 우상의 낙성식에 초대한 것입니다. 왕의 잔치에 초대 받았다는 것은 큰 영광이 분명합니다. 청와대의 초대를 받으면 영광이 아니겠습니까? 그러나, 문제는 그 자리는 우상에게 절하는 자리요, 살아계신 여호와 하나님을 거부하고 마귀가 자신들의 통치자임을 선언하는 자리였던 것입니다. 느브갓네살 왕은 나팔과 피리와 수금과 삼현금과 양금과 생황과 및 모든 악기를 준비하고, 그 나팔 소리가 울려 퍼지게 되면 그 자리에 엎드려 모든 신하들은 그가 세운 금 신상에게 절하도록 한 것입니다. 만일 절하지 않는 사람은 맹렬히 타는 풀무불에 던져 태워 죽이겠다고 한 것입니다.

  누가 감히 느브갓네살의 명령을 거역할 수 있겠습니까? 어떤 어리석은 인간이 감히 생명을 내 놓고 절대 군주의 명령에 불순종할 수 있다는 말입니까? 그러나, 우리는 이미 잘 알고 있습니다. 본문에 기록된 사드락과 메삭과 아벳느고는 그 명령을 잘 알고 있었지만 모두 엎드리는 그 순간 고개를 들고, 그 자리에 서 있었다는 것입니다. 죽으면 죽었지 우상 앞에 절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바벨론의 국왕이 이 모습을 보았을 때 얼마나 기가 막혔겠습니까?

마귀는 자주 우리들 앞에 올무를 놓고 곤경에 빠지게 하곤 합니다. 자신들의 가진 세상의 권력과 세상의 힘으로 믿음의 사람들을 조롱하기 위해 시험합니다. 군대나 혹은 직장에 가면 믿음의 많은 형제들이 시험에 빠집니다. 계급이 높은 사람이 술을 돌립니다. 동료들은 다 받아먹는데 자신은 예수 믿는다고 해서 고참이 준 그 술을 거부해 보십시오. 군대 생활 2년여 동안 참 고달플 것이 아니겠습니까? 거부한 다음에 올 수 있는 불이익 때문에 우리는 굴욕적으로 때로 믿음의 고백을 저버릴 때가 있습니다.

  회사 경영을 하다보면 접대라는 것을 하게 되는데 룸살롱이나 혹은 부적절하지 못한 장소에서 접대를 바라면서 은근히 힘으로 압박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회사에서 진급하려고 하다보면 윗사람에게 잘 보여야 합니다. 잘 보이려고 하다보면 부정한 일에 참여해야 하고, 결국 죄와 동참하도록 압박이 들어옵니다. 지장의 상사나 힘을 가진 사람들은 하나님의 말씀이 아니라 내 말에 순종하고 따르라고 자신들의 가진 힘으로 압박해 옵니다.

어느 분이 쓴 글에 보니 이런 이야기가 있었습니다. 자신이 예수를 믿고부터 집안의 제사에 참여하지 않았습니다. 어느 날 일가친척들과 성묘를 갔다 오신 후 술에 취하신 아버지가 그를 불렀습니다. 아버지는 눈물을 흘리시면서 이제부터 아버지와 자식의 인연을 끝내자고 말씀하셨습니다. 유교의 풍습에 젖어 있던 그분의 아버지는 그가 제사를 거부하는 것을 도저히 받아들일 수 없었던 것입니다. 그분은 그곳에서 처음으로 아버지의 눈물을 보았고, 우시면서 너를 우리 가문의 호적에서 빼버리겠다고 말씀할 때에 너무나도 괴로웠습니다. 그는 분명히 아버지를 사랑했고, 아버지를 존경했습니다. 그러나, 아버지는 눈물을 흘리면서 제사를 요구하신 것입니다. 만일 여러분이라면 이 때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나 하나가 아버지에게 순종하면 가정도 편안하고, 시끄럽지도 않을 수 있습니다. 반대로 그곳에서 내 자신이 계속해서 예수를 믿고, 제사에는 참여하지 않겠다고 하면 아버지와 가족들은 모두 상처를 받고, 내 자신도 고통을 받게 될 것입니다.

  느브갓네살이 세 사람이 절하지 않는 것을 보았을 때 느브갓네살은 세 명의 인재를 잃어버리는 것을 원하지 않았습니다. 그는 세 사람을 불러 다시 기회를 줄 테니 우상에게 절하라고 설득하기 시작했습니다. “너희가 믿는 신은 너희를 망하게 하지 않았느냐? 너희의 신이 내가 믿는 신보다 강하다면 왜 이스라엘이 망했겠느냐? 이렇게 나라를 망하게 한 신이 어떻게 너희를 그 뜨거운 풀무불에서 너희를 구할 수 있겠느냐? 너희는 어리석은 너희 신을 의지하지 말고, 내 말에 순종해서 나와 함께 평안을 누리고 너희의 생명도 구하고, 내가 너희에게 준 명예와 부와 권력도 지키는 것이 지혜롭지 않겠느냐?”

이런 말을 들으면 참으로 괴롭습니다. 그러나, 사드락과 메삭과 아벳느고는 전혀 괴롭지 않았습니다. 주저함도 없었습니다. 16절 말씀에 보면 그들은 왕에게 이렇게 말합니다. “느부갓네살 왕이여, 우리가 이 일에 대하여 왕에게 대답할 필요가 없습니다. 왕이여, 우리가 섬기는 하나님이 계시다면 우리를 맹렬히 타는 풀무불 가운데에서 능히 건져내시겠고, 왕의 손에서도 건져 내실 것입니다. 비록 내가 섬기는 하나님께서 그렇게 하지 아니하실지라도 왕이여 우리는 왕의 신을 결코 섬길 수가 없고, 절하지도 않을 것입니다. 왕은 그렇게 아십시오”

이 얼마가 기막힌 말입니까? 여러분이 왕이 되어 이 말을 들었다고 생각해 보십시오. 당장에 그 자리에서 사지를 찢어 죽이는 극형에 처할 것입니다. 우리는 이 사람들이 어떻게 되었는지 그 결과를 잘 알고 있습니다.

  극도로 분노한 왕은 얼굴빛을 바꾸고 풀무불을 평소보다 일곱배나 뜨겁게 했고, 드디어 그들은 온 몸이 묶여진 채로 맹렬히 타는 풀무불 가운데로 던져졌습니다. 그런데, 아주 이상한 일이 일어났습니다. 왕과 신하들이 풀무불을 바라보았더니, 그곳에는 네 사람이 그 뜨거운 불 가운데 여유 있게 걸어다는 것이 아닙니까? 분명히 불에 던져진 사람은 세 사람이었는데 불 가운데 있는 사람은 네 사람이었습니다. 너무나도 놀란 왕은 급히 “사드락아 메삭아 아벳느고야 이리로 나아오라”고 외쳤습니다. 그들이 그 풀무불에서 올라왔을 때 그들의 머리털로 시작해서 겉옷에 이르기까지 불 탄 곳이 하나도 없었습니다. 할렐루야!

  예수 믿다보면 이런 불같은 시험을 당할 때가 있습니다. 때문에 많은 사람들이  잠시 우상에게 절하고, 핍박의 소나기를 피하려고 합니다. 그러나, 잠시 동안 핍박의 비를 피할 수는 있을지 모르지만, 그 때부터는 빠져 나올 수 없는 더 큰 올무가 그의 목덜미를 조여 오게 될 것입니다. 세 사람은 계속해서 우상에게 절해야하고, 느브갓네살의 말에 절대적으로 순종해야 하는 인생이 되는 것입니다.

  고린도전서 10:13절의 말씀에 보면 “사람이 감당할 시험 밖에는 너희가 당한 것이 없나니 오직 하나님은 미쁘사 너희가 감당하지 못할 시험 당함을 허락하지 아니하시고 시험 당할 즈음에 또한 피할 길을 내사 너희로 능히 감당하게 하시느니라”고 했습니다. 에스더가 죽으면 죽으리라고 결단했을 때 그에게 살 길이 열렸습니다. 예수님은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누구든지 나를 따라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를 것이니라 누구든지 제 목숨을 구원하고자 하면 잃을 것이요 누구든지 나를 위하여 제 목숨을 잃으면 찾으리라 사람이 만일 온 천하를 얻고도 제 목숨을 잃으면 무엇이 유익하리요 사람이 무엇을 주고 제 목숨과 바꾸겠느냐 인자가 아버지의 영광으로 그 천사들과 함께 오리니 그 때에 각 사람이 행한 대로 갚으리라”(마16:24-27)

  사랑하는 여러분, 믿음의 사람들에게는 반드시 길이 있습니다. 살려고 하기 때문에 두려움이 오고, 공포에 붙들리게 됩니다. 내가 살려고 하기 때문에 시험이 오고 타협하게 되고, 신앙에서 벗어나는 유혹을 받게 되는 것입니다. 내가 주님을 위해 죽어야 하겠다고 결단해 보십시오. 반드시 길이 열리고 축복의 자리에 서게 될 것입니다. 믿음의 사람들이 자꾸 세상과 벗하고, 세상에 속해서 영화를 누리고, 세상에 속해서 무엇인가 인간적인 명예와 소득을 얻으려고 하기 때문에 문제가 일어나는 것입니다. 명예를 주시는 분이 누굽니까? 인생의 화와 복을 주관하시는 분이 누구입니까? 성경은 우리에게 “너는 마음을 다하여 여호와를 신뢰하고 네 명철을 의지하지 말라 너는 범사에 그를 인정하라 그리하면 네 길을 지도하시리라”(잠3:5-6)고 말씀하십니다.

  사드락과 메삭과 아벳느고는 오직 하나님을 의지하기로 결심했습니다. 그분께서 비록 자신들을 살려 주지 않으시고, 풀무불 가운데 자신들이 타 죽는 한이 있어도 하나님을 버릴 수 없다는 결단을 내렸습니다. 세상과 타협하지 않는 믿음은 놀라운 믿음이며, 세상이 감당할 수 없는 믿음이 있기 때문에 하나님은 그들에게 복을 주시는 것입니다.

  세상과 벗하여 살기 시작하면 영적 능력이 떨어지고, 죄악에 양심이 단단해 지게 되어 아픔과 죄악을 느끼지 못하게 됩니다. 삼손을 생각해 보십시오. 그가 하나님의 뜻에 따라 순종하면서 살 때 그에게 하나님은 큰 능력을 부어 주셨습니다. 그러나, 그가 세상과 어울려 함께 먹고 마시고 이방여인과 동침하는 삶을 살면서 그는 눈도 잃고 생명도 잃어버렸습니다. 함께 살면 생명을 구할 수 없습니다. 다르게 살아야 생명을 구원할 수 있습니다.

  야고보서 1:2-4절 말씀에 보면 “내 형제들아 너희가 여러 가지 시험을 당하거든 온전히 기쁘게 여기라 이는 너희 믿음의 시련이 인내를 만들어 내는 줄 너희가 앎이라 인내를 온전히 이루라 이는 너희로 온전하고 구비하여 조금도 부족함이 없게 하려 함이라”고 했습니다. 시험은 우리를 온전하게 만드는 것이요 더욱 강한 그리스도인이 되어 하나님 앞에서 온전하고 구비하여 조금도 부족함이 없는 사람이 되게 하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모든 시험은 감당할 수 있는 것이며, 피할 길이 있습니다. 그리고, 감당할 수 없는 시험은 하나님께서 행하시지도 않으십니다. 세 명의 사람들이 단호하게 자신들의 목숨을 걸고 믿음의 고백을 통해 믿음을 지켰을 때 어떤 결과가 나왔습니까?

우선 그들은 죽을 줄 알았던 그 자리에서 하나님의 보호하심을 받는 체험의 신앙인이 되었습니다. 자신들의 생명을 구했을 뿐만 아니라 자신들을 핍박하고 미워했던 그 느부갓네살 왕조차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게 하는 놀라운 일이 일어났습니다.

생각해보십시오. 우리는 때로 하나님께서 풀무 불에 던지는 시험을 하지 않으셨으면 이런 일이 일어나지 않았을 것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풀무 불에 들어가지 않고 살리는 것이 쉽습니까? 풀무 불에 들어간 사람을 살리는 것이 쉽습니까? 그러나 하나님의 생각은 우리들의 생각과 엄연히 달랐습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생각보다 더 크고 위대한 일을 행하시는 분이십니다. 그분은 오히려 평소보다 풀무 불을 평소보다 7배나 더 뜨겁게 하셨습니다.

  그것은 무엇을 의미합니까? 하나님이 아니면 할 수 없다는 것을 보여 주시기 위한 하나님의 작전이었던 것입니다. 요셉이 이집트에 노예로 가기 전에, 혹은 감옥에 가기 전에 모든 문제를 해결해 주시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그러나, 하나님은 그렇지가 않습니다. 오직 하나님만이 하실 수 있다는 것을 시련을 이기 본인과 주위 사람들에게 알려주시고, 그곳에 있는 사람들이 하나님께만 오직 영광을 돌리기를 원하신다는 것입니다. 분명한 사실은 믿음의 사람들에게는 반드시 살 길이 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허락이 없이는 어떻게 사탄이 사람의 생명에 손을 대겠습니까? 어떻게 사명을 마치기전에 사명자가 죽을 수 있겠습니까? 믿음의 사람은 모든 인생의 풍랑을 잠잠하게 하며, 풀무 불의 뜨거움에서도 하나님의 보호하심을 받는 것입니다. 주위 사람들이 다시는 그를 비난하거나 조롱하지 못하도록 그들의 입을 막아 버리는 것입니다.

마귀는 오늘도 우리 앞에 물질만능주의, 하나님을 부인하는 인본주의, 세속주의 등 다양한 금 신상을 세우고 우리에게 절하라고 말합니다. 우리는 세상의 어떤 힘에도 두려움을 가져서는 안됩니다. 세상은 무너질 힘에 불과하며, 자시 그들이 누리는 것에 불과한 것입니다. 오직 영원한 권세와 영원한 나라는 하나님의 나라 외에는 없습니다. 결국, 세 사람은 이 핍박을 믿음으로 이겨냄으로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동시에 그들의 지위는 더욱 견고하게 되었고, 세상 사람들에게 하나님이 살아 계시다는 확신을 심어주는 놀라운 역사의 주인공들이 되었습니다.

  이런 점에서 신앙의 핍박과 위기는 결국 또다시 축복을 받을 수 있는 기회라는 것입니다. 여러분들은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타협하시겠습니까? 아니면, 죽음을 각오하고 주님을 고백하시겠습니까? 이것은 여러분들의 선택입니다. 그러나, 나는 여러분들이 믿음의 시련 속에서 더욱 전능하신 하나님을 의지하여 놀라운 기적을 체험하고, 능력의 사람들이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한용근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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