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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구름을 타고 오시리라 (계 1:7-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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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스도 안에서 사랑하는 형제, 자매 여러분, 그리고 예배의 자리에 찾아오신 사랑하는 이웃 여러분, 우리는 예수님의 제자 요한이 쓴 책을 살피고 있는 중입니다. 지금 요한은 그가 환상 가운데 보고 들은 것을 편지로 써서 소아시아 일곱 교회에 보내고 있습니다.

맨 먼저 성 삼위 하나님의 이름으로 문안합니다. 은혜와 평강을 복되신 하나님의 이름으로 선언합니다. 복되신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문안할 때에 그는 그 이름을 찬양하지 않고 지나갈 수 없었습니다.

“우리를 사랑하사 그의 피로 우리 죄에서 우리를 해방하시고 그 아버지 하나님을 위하여 우리를 나라와 제사장으로 삼으신 그에게 영광과 능력이 세세토록 있기를 원하노라 아멘” (5b-6절)

그 복되신 이름으로 하는 문안은 그 이름을 향한 찬양을 유도하며, 그 찬양은 찬양 받으시기에 합당하신 주 예수님이 오시는 것을 사모하게 만듭니다. 찬양만으로 도무지 아쉬운 성도의 심정은 그 분의 오심을 대망케 됩니다.

“볼찌어다 구름을 타고 오시리라”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여기에 인류 대망의 소식이 있습니다. 요한은 지금 인류 역사의 마지막 사건을 선언합니다. 태초에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신 이후에 일어난 모든 사건의 완성으로 요한은 예수님께서 다시 오심을 선언합니다. 인류 역사에 남아있는 유일한 큰 사건을 알리고 있습니다. “볼찌어다 구름을 타고 오시리라”

우선 이 부분을 한 자 한자 살펴보기 전에 사도 요한의 사상과 문체의 특징을 언급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의 문안, 그의 찬양, 그의 주제 선언 가운데 한 마디 한 마디가 그의 독자적인 생각이라기보다는 그가 아는 성경의 인용입니다. 그의 탁월한 영성의 근원이 바로 성경 자체에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그는 정말 한 권의 책의 사람입니다. 그는 기록된 하나님의 말씀에 깊이 젖어든 신앙인입니다. 계시록 첫 부분에서 우리가 볼 수 있는 요한의 면모는 성경에 탁월하다는 점입니다. 그의 탁월한 경건과 영성은 독자적 사고의 결론이 아닙니다. 그의 탁월한 경건과 영성은 기록된, 주어진 계시 의존적 사고의 귀결입니다.

기록된, 우리에게 주어진 계시를 우리가 잘 생각하고 계시의 말씀에 의존하느냐 하는 것이 영적 성숙도를 측정합니다. 그가 본 환상과 그가 들은 영음은 그가 아는 성경을 기반으로 주어졌음을 잊어버리지 마십시오. 하나님께서는 밧모에서 요한을 감동시키셔서 장차 속히 될 일을 보이셨지만 그것은 요한이 익히 아는 구약 예언의 배경에서 주어진 환상임을 기억하십시오.

전혀 새로운 계시라기보다는 이미 약속된 예언의 기반에서 주어졌습니다. 여러분이 요한처럼 뛰어난 영성의 사람이 되기 원한다면 기록된 하나님의 말씀을 잘 알아야만 합니다. 기록된 하나님의 말씀에 깊이 잠기게 될 때에 여러분의 생각이 바뀌게 될 것입니다. 여러분의 행동이 바뀌게 될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말씀을 사랑하는 분들이 되기를 바랍니다. 기록된 말씀을 즐겨 읽고 자주 듣기를 바랍니다. 그것이 바로 여러분의 영성의 수준을 결정합니다. 하나님은 하나님의 말씀과 주 예수 그리스도의 증거에 신실한 요한을 사용하셔서 말세에 속히 될 일을 지금 나타내십니다.

새해에는 기록된 하나님의 말씀을 읽으십시오. 새해에는 복되신 하나님의 신실한 말씀을 묵상하십시오. 지금쯤 창세기의 말씀 읽기를 끝내신 분이 있습니까? 아니면 아직도 30장쯤 읽고 있습니까? 아니면 시작한지 사흘 만에 접고 말았습니까? 하나님께서 우리 배달겨레를 참 사랑 하셔서 설을 두 번씩이나 주셨잖습니까? 조금 있으면 한번 더 “새해 복 많이 받으십시오”라고 인사 할 때에 이제는 새해에 다시 한번 성경을 읽기로 결심할 수 있는 기회가 됩니다. 무엇을 보아도 말씀에 근거하고 무엇을 말해도 말씀에 근거해서 말할 수 있는 탁월한 신앙인들이 우리 울산교회에서 많이 배출되기를 바랍니다.

“볼지어다 구름을 타고 오시리라” 남아있는 인류역사의 최대의 이벤트입니다. 많은 사건이 앞으로도 일어날 것입니다. 요즈음 일간지는 16면이 모자라서 32면으로 증면을 하고 있습니다. 그것도 모자라서 또 특집들을 넣고 있습니다. 많은 사건들이 계속 일어나니까 정작 가장 중요한 것이 무엇인지를 잊어버리게 됩니다. 인류사의 가장 큰 이벤트는 그의 재림사건입니다. 역사를 마감하며 완성할 사건을 말하면서 요한은 지금도 그 마음이 구약에 가있습니다.

요한의 환상은 종종 다니엘의 이상에 그 뿌리를 두고 있습니다. 다니엘이 밤에 보았던 그 환상을 요한은 주의 날에 보았습니다. “인자 같은 이가 하늘 구름을 타고 와서” 라고 다니엘서에는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계시록에서 요한은 “볼찌어다 구름을 타고 오시리라”고 선언합니다. 여기 다니엘의 환상 중에서는 “인자 같은 이가 구름을 타고 와서 옛적부터 계신 이에게 나아와서 그에게 인도되매 그에게 권세와 영광과 나라를 주고 모든 백성과 나라들과 각 방언하는 자로 그를 섬기게 하였음이라 그 권세는 영원한 권세라. 옮겨지지 아니할 것이며 그 나라는 폐하지 아니할 것이니라”

다니엘서를 비롯한 성경은 세계 제국을 일컬어서 그 본성을 짐승으로서 계시하고 있습니다. 세상의 나라는 그 권력의 핵심이 야수적인 힘에 근거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권력이 백성에게서부터 나온다고 헌법에는 되어 있습니다.

조선인민 민주주의 공화국이나 대한민국 헌법은 그럴듯하게 써놓았습니다.  둘 다 주권은 인민으로부터, 또 백성들로부터 나온다고 하지마는 실상은 총칼로 대통령의 자리를 빼앗고 정권을 쟁취하는 것이 한 때 남한의 현실이고 지금도 북한의 실상인 것을 아무도 부인할 수 없을 것입니다.

사실은 남북한만의 이야기가 아니라 인류 역사의 모습입니다. 어떤 세계 제국들도 세상나라의 본성은 짐승이라는 것을 성경은 일관되게 진술하고 있습니다. 다니엘서에서 그렇게 말하고 있고 계시록에서 그 사실을 다시 한 번 입증하고 있습니다.

성경은 세상 나라의 본성은 짐승이라고 하는 것이 성경의 계시입니다. 거기에 어떤 공의를 찾는다고 하는 것, 거기에 어떤 정의를 찾는다고 하는 것, 거기에 어떤 인간다운 면모를 찾는다고 하는 것은 한갓 신기루에 불가합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그 성격상 어떤 정부는 독수리 날개를 가진 사자와 같을 수가 있고 잔인한 곰 같을 수도 있고 날개를 가진 표범일 수도 있고 철 이빨을 가진 짐승일 수도 있습니다. 그 양상은 달리할 수 있을지 모르지만 그 본성에 있어서는 짐승입니다.

여러분이 이 세상 정부에 대해서 무엇을 기대하면서 살고 있습니까? 어떤 기대를 가지고 50년, 60년의 인생을 살아왔습니까? 어떤 세상 정부도 그 본성이 야수적인 힘에 근거하고 있다는 것을 잊어서는 안 됩니다. 때로는 관용을 베풀 수도 있습니다. 다만 내게 위협이 되지 않는 한 관용할 수 있습니다.

이상하게 독재자들치고 아이들을 좋아하지 않는 사람들은 잘 없습니다. 아이들은 그의 권력에 절대 위협이 되지 않기 때문입니다. 아이를 안고 쓰다듬어 주고 포즈를 취하면 국민들에게 자기가 아주 인간적인 지도자라고 어필할 수 있는 좋은 홍보의 기회이기 때문이기도 합니다.

그러나 그 본성은 야수적인 힘에 근거하고 있다는 것을 아셔야 합니다. 자기에게 대해서 대적할 세력이 되면 가차없이 파괴하고 삼키는 것이 세상 나라의 본성입니다. 그러나 그것이 인류 역사의 마지막 이야기가 아닙니다.

인류의 역사는, 그 마지막 통치권은 반드시 인자 같으신 분에게로 돌아갈 것이라고 성경이 약속하고 있습니다. 짐승 같은 자들이 가지는 통치권이 아니라 인자 같으신 분, 사람의 아들 같으신 그 분에게 나라와 권세가 옮겨져 갈 것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이 세상에 살았던 사람들이 흘렸던 모든 눈물을 씻겨주며 그들의 모든 한숨을 잠재울 것입니다. 그것이 성경이 가지고 있는 마지막에 관한 예언입니다. 야수적인 비인간적인 제국은 종말을 고할 것입니다. 권세와 나라가 인자 같은 이에게 영원히 주어질 것입니다.

의와 공평으로 다스릴 때가 도래하고 있습니다. 인간미가 넘치는 새로운 통치가 이 땅에 임할 것입니다. 의가 거하는 바, 의가 보금자리를 트는 새 하늘과 새 땅을 기다리며 사는 사람들이 여기 모여 있습니다. 우리는 궁극적으로 이 세상 나라가 우리에게 보장할 복지에 대해서 마지막 희망을 거는 사람들이 아닙니다. 우리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 그분께서 다스리는 그 나라가 오면 세상이, 만물이 새로워 질 것을 희망하는 사람들입니다.

“볼찌어다 구름을 타고 오시리라” 이는 다니엘의 예언뿐 아니라 사도 바울이 직접 주님으로부터 들었던 것입니다. 산헤드린에서 마지막 취후 진술을 할 때에 “네가 찬송을 받으실 자의 아들이냐고” 대 제사장이 물었습니다.

주님은 자기의 생명을 걸고 “내가 그니라 장차 너희가 구름을 타고 오는 것을 볼 것이라”고 증언했습니다. 요한은 이 증언의 현장에 있었던 사람입니다. 

“볼찌어다 구름을 타고 오시리라” 이 구절의 핵심 메시지는 그의 재림은 초림과 같지 아니할 것을 말하고 있습니다. 초림은 소수의 사람들에게만 알려진 사건이었습니다. 이 세상에서 버림받고 인정받지 못하던 목자들에게 알려졌던 사건입니다. 그 이후에 하나님의 아들을 신앙의 눈으로 바라볼 수 있었던 사람에게만 알려진 사건입니다. 아버지의 아들의 독생자의 영광이 사람들의 눈에 가리워진 채로 예수께서는 처음 오셨습니다.

여느 아이와 마찬가지로 세상에 태어났고 여느 아이보다 더 비천한 자리에서, 말구유에서 태어났습니다. 여러분이 부모로서 어릴 때에 그 자식을 제대로 먹이고 입히고 키우지 못하고 공부시키지 못하면 마음에 늘 한을 가지고 있잖습니까? 아이들 볼 때마다 죄 지은 것처럼, 그런 사람은 성모 마리아를 기억하셔야 합니다. 성모 마리아는 태어나는 아기, 오늘 유아세례를 받은 아이, 두달, 석달된 아이들을 보면 얼마나....

그 아이가 누울 자리조차도 없었던 것입니다. 밀려드는 인파에 의해서 베들레헴에는 더 이상 가난한 부부가 자리할 방이 없었습니다. 그들은 얹어줄 만한 웃돈도 없었을지 모릅니다.

어쨌든 말구유에서 그 아이는 태어났습니다. 어머니 마리아는 이 아들에 대해서 어떤 어머니가 자기 아들에 대해서 가지고 있는 한보다 더 큰 한을 가지고 살았을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여러분 자식만이 자식이 아닙니다. 마리아도 그렇게 자식을 낳아서 키웠습니다. 그가 자라면서 들었던 소리는 나사렛 사람이라는 것입니다. 이스라엘에서는 나사렛 사람이라고 하면 항상 모욕적인 이야기였습니다.

예수님은 그렇게 세상을 사셨던 분입니다. 초림의 주님은 초라하셨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는 초림하신 주님을 뒤 따르는 백성들인 것을 기억하셔야 합니다. 우리가 따라가는 주님은 초림하신 주님이고, 그분의 수모를 몸에 채워가면서 사는 자들이 주님의 백성들입니다.

하지만 그런 자들에게는 영광스러운 내일이 보장되어 있습니다. 지금 우리가 재림의 주님을 대망하고 살고 있지만 오늘 우리가 걸어가는 길에는 주님의 발자취가 놓여있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의 남은 고난을 자기 몸에 채우면서 사는 자, 그가 그 이름에 합당한 성도입니다.

많은 성도들이 일찍 배불러 버렸습니다. 이미 그 영광에 도취되어 버리고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그리스도인으로 부름 받은 것은 그리스도의 몸 된 교회를 위해서 우리 몸에 그 고난을 채워가도록 부름 받았습니다.

희년의 기쁨을 나누기 위해서 여러분이 확보한 것을 여러분이 고수하면 나눌 수 있는 기쁨은 그렇게 많지 못할 것입니다. 여러분이 마땅히 누릴 수 있는 것들을 이웃을 위해서 포기할 때에 이웃은 우리가 나누는 사랑으로서 풍성해질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초림의 주님의 모습은 너무나 초라했기 때문에 “내가 그로라”고 말하는데도 불구하고 사람들이 믿어주지 않았습니다.

하늘 영광을 포기하고 세상에 오셨기 때문에 내가 그라고 증언 했는데도 믿지 아니했습니다. 믿기는커녕 그렇게 말하는 것을 빌미삼아서 그를 십자가로 내몰아갔습니다. 사람과 사람이 말이 통하지 아니하면 그 답답함을 어떻게 표현할 수 있겠습니까?

찬송 받을실 자의 아들이 맞느냐고 했을 때 “내가 그”라고 말하고 “너희가 장차 구름을 타고 오는 것을 볼 것이라”고 말하는데도 목숨을 건 그의 증언은 사람들에게 먹혀들지 아니했습니다. 우리가 이런 이야기를 듣고도 살려둘 수 있나? 예수님의 증언을 짓밟고 그를 십자가에 처형해 버렸습니다.

그래서 신앙의 시인은 이 때의 주님의 상황을 시로서 이렇게 고백하고 있습니다. “내가 바산의 황소들에게 둘러싸였습니다.” “개들이 나의 존귀한 것을 빼앗으려고 합니다.”사람이 진심을 말하는데 받아들이지 아니하고 죽이려고 달려들려면 그것은 사람이 아니라 바산의 황소요, 그것은 개들에 불과합니다.

사랑하는 젊은이 여러분, 여러분이 살아나가는 동안에 예수 이름에 신실하기 위해서 무시당할 수도 있을 것입니다. 조롱당할 수도 있을 것입니다. 어쩌면 젊은이들뿐만 아니라 이 자리에 참석한 여러분의 곧 가까운 내일에 그리스도 이름 때문에 삶의 터전이 흔들릴 수도 있습니다.

마지막 때면 예수 믿는다는 단 하나의 이유로 여러분이 공무원이 될 수 있는 기회가 박탈될 수도 있습니다. 지금 적그리스도의 나라에서 이루어지고 있는 것처럼. 어쩌면 여러분에게 날 수 있는 허가가 여러분에게 주어지지 아니할 수도 있습니다. 그 때에 세상에 오셔서, 불의한 세상에 오셔서 사셨던 주님을 기억하셔야 합니다. 그가 남기신 고난의 발자취를 여러분이 기억하셔야 합니다.

“볼찌어다 구름을 타고 오시리라”요한이 그렇게 증언을 합니다. 그러나 사람들은 반응합니다. 어떻게 구름을 타고 올 수 있느냐? 솜털보다 가벼운 증기의 모임인데, 어떻게 모든 눈이 동시에 볼수있나? 지구는 둥근데... 이런 반론들을 길게 반박할 가치가 없습니다.

오시는 그분은 온 세상의 창조주이십니다. 온 세상의 심판주이십니다. 그는 모든 사람이 알도록 오실 것입니다. 반드시 모든 사람이 보도록 오실 것입니다. “볼찌어다 구름을 타고 오시리라”

지금은 믿음의 눈을 가진 사람만이 그를 주로서 고백합니다. 그 날에는 모든 무릎이 그분 앞에 꿇게 될 것입니다. 모든 입술이 그분을 향해서 “주”라고 고백하게 될 것입니다. 온 세상이 피할 수 없는 자명한 사실이 될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한 개인의 삶이 그분 오심으로 마감되듯이 온 인류의 운명이 그분의 오심으로 완성되는 그 날은 모든 육체가 주의 영광을, 주의 심판을 볼 것입니다.

천사장의 나팔소리와 함께 구름을 타고 오시는 주님을 뵙게 될 것입니다. 천상의 오디오 시스템과 비디오 시스템이 다 동원될 그 영광의 날이 다가오고 있습니다.

온 세상의 심판주로 오시는 그분이 최후 심판을 받을 모든 인류가 보는 가운데 공적으로 오실 것입니다. 시간과 공간의 줄은 그 때 풀려질 것입니다.

시공은 지금 우리가 사는 존재 형식에서 중요한, 우리를 결정하고 구속하는 양식이지만 그 날에는 더 이상 유효하지 않습니다. “각인의 눈이 그를 보겠고 그를 찌른 자들도 볼 터이요 땅에 있는 모든 족속이 그를 인하여 애곡하리니 그러하리라 아멘”

사도 요한은 다시 한 번 구약 예언 속에 그 환상의 근거를 갖고 있습니다. 다니엘서만큼이나 스가랴서가 요한의 예언의 요람이기도 합니다. “내가 다윗의 집과 예루살렘 거민에게 은총과 간구하는 심령을 불어주리니 그들이 찌른 바 그를 바라보고 그를 위하여 애통하기를 독자를 위하여 애통하듯 하며 그를 위하여 통곡하기를 장래를 위하여 통곡하듯 하리로다.”

초림의 주님은 몇몇 신앙인들만 알아보았습니다.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시매 우리가 그 영광을 보니 아버지의 독생자의 영광이요 은혜와 진리가 충만하더라”

재림의 영광은 모든 눈이 목도할 것입니다. “볼찌어다 구름을 타고 오시리라 각인의 눈이 그를 보겠고 그를 찌른 자들도 볼 터이요 땅에 있는 모든 족속이 그를 인하여 애곡하리니 그러하리라 아멘”

누가 그를 찌른 자입니까? 십자가 처형의 현장에서 그의 죽음을 확인한 군병만의 일입니까? 시대마다 영광의 주님께 무관심한 자들입니다. 나라마다 그를 무시하고 사는 사람들입니다. 곳곳마다 그를 대적한 인생들입니다. 그들의 무관심과 그들의 무시와 그들의 대적 속에 감취인 악의가 주님의 마음을 아프게 찌르는 행위입니다.

그 행위 배후에 있는 악한 적의를 가진 모든 이들이 영광의 주님을 그날 자기의 눈으로 보게 될 것입니다. 그리하여 온 세상이 순식간에 절망과 공포와 후회의 도가니가 될 것입니다. 채찍을 맞고 찔림을 당한 그 분이 세상의 왕이요 심판주라는 사실을 백일하에 보게 될 것입니다.

바로 내가 배척한 그분이 영광의 구주라는 사실을 알게 될 것입니다. 더 이상 설명이 필요치 않게 될 것입니다. 그 찌른 현장에 그 사건의 공모자임을 알게 될 것입니다. 그들의 절망과 슬픔은 극에 달할 것입니다. “땅에 있는 모든 족속이 그를 인하여 애곡하리니 그러하리라 아멘”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여러분이 이 사실을 믿습니까? 저리로서 산자와 죽은 자를 심판하러 오실 그분을 믿습니까? 여러분이 사랑하는 이들, 여러분이 관심을 가지고 있는 이들, 여러분과 이웃하여 사는 사람들, 아래 위 층에 사는 사람들이 그 날 여러분을 향해서 뭐라고 이야기 하겠습니까? 왜 그처럼 자주 만났는데 내게 이 사실을 알려주지 아니했느냐고, 당신은 알고 있었으면서 왜 나한테 이 이야기를 전해주지 않았느냐고 여러분에게 이야기 할 때 여러분은 뭐라고 답하시겠습니까?

우리는 세상을 신실하게 살아야 합니다. 사람들의 존경을 받도록 살아야 합니다. 사람들에게 믿음직한 삶을 살아야 합니다. 관계를 맺어야 합니다. 믿을만한 관계가 될 때에 우리는 진지하게 물어야 합니다. 역사가 어떻게 끝날 것인지에 대해서 알고 있는지를 물어야 합니다. 대답하지 못하면 “볼찌어다 구름을 타고 오시리라”는 사실에 대해서 이야기 해주어야 합니다.

요한은 이 선언에 대해서 “그러하리라 아멘”을 덧붙이고 있습니다. 그는 밧모섬에 귀양가 살면서 주님을 대망하고 살았기 때문에 주님이 오신다는 소식을 들을 때 “그러하리라 아멘”이라고 답하고 있습니다. 요한이 살던 시대를 기억해 보십시오. 예수 믿는 것은 모든 것의 박탈을 의미하는 시대입니다. 신자가 되는 것은 바로 순교자가 된다는 것과 거의 동의어로 쓰여지던 시대입니다. 핍박의 순간에 그들이 들었던 주님의 이름을 향한 수없는 말들을 기억하십시오.

그들의 충성을 조롱하며 비웃던 웃음을 아는 요한은 결코 무관심한 방관자로서 “볼찌어다 구름을 타고 오시리라 각인의 눈이 그를 보겠고 그를 찌른 자들도 볼 터이요 땅에 있는 모든 족속이 그를 인하여 애곡하리니”라고 할 때 “그러하리라 아멘”이라고 붙일 수밖에 없었던 것입니다.

요한은 오늘 고난에 동참한 성도이기 때문에 주님 오심이 그에게는 감동스런 사건이요 오신다는 이야기를 듣는 순간에 “그러하리라 아멘 반드시 오셔야만 합니다”라고 이야기를 하고 있습니다. 그를 찌르고 비웃던 온 세상이  통곡하는 바로 그 순간이 주님의 승리의 순간이거든 어떻게 “그러하리라 아멘”을 소리치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요한은 그 날 그 시간을 내다보고 기뻐하고 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만약 여러분이 예수 이름 때문에 받은 모욕과 조소를 알고 있다면 요한의 심정을 이해할 것입니다. 만약 여러분이 예수 이름 때문에 더 나은 직장과 더 나은 조건을 포기해 본 적이 있다면 요한의 심정을 이해할 수 있을 것입니다.

만약 여러분이 그리스도의 백성과 함께 고난 받기를 애굽의 모든 보화를 포기하던 모세의 걸음을 걸어보았다고 하면 “그러하리라 아멘”이라고 여러분도 고백하게 될 것입니다.  영광을 누리면서 “내로라” 하면서 살 수 있는 기회를 포기해본 적이 있습니까? 그런 사람이라면 주님이 오신다는 말을 그냥 듣고 지나갈 수는 없습니다.

한 마디 말이면 타협이 이루어질 수 있고, 아니 말하지 않고 눈짓만 해도 한 자리가 약속 되는데도 불구하고 여러분조차 그렇게 살면 많은 신앙의 사람들이 실망한다는 사실 때문에 끝까지 충성하는 자리에 섰고 이로인해 고달픈 삶을 살았다고 하면 “그러하리라 아멘”이라고 소리치지 아니할 수 없을 것입니다.

만약 여러분이 그 나라를 위하여 받은 핍박과 흘린 눈물이 있다면 온 세상에 임하는 최후의 날에 대해서 그 소식을 듣고 그냥 무덤덤하게 지나갈 수는 없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지금은 어두운 시대입니다. 소위 신학자들조차도 요한의 열광적 제창을 이해하지 못하는 시대입니다. 어떻게 온 세상이 심판받는데 “그러하리라 아멘”할 수 있느냐 그것은 사랑의 기독교가 아니라고 합니다. 천만에요. 신학을 하면서도 세상에서는 포도주를 들이키고 살면 이해가 되지 않습니다. 신실하게 살아가는 성도들에게 있어서는 이 소식만큼 귀중한 소식이 없는 것입니다.

요한은 악인이 심판 받는 것을 기뻐해서 외치는 말이 아닙니다. 요한은 그리스도를 위해서 자신의 목숨을 걸고 교회를 위한 고난을 그 몸에 채워가던 성도입니다. 그러기에 주님이 오신다는 것이 그를 열광하게 만듭니다.

지금 우는 자들이 그 눈물을 씻음 받을 것입니다. 생사를 알 수 없는 성도의 억울함을 푸는 날입니다. 세상은 애통하지만 그러기에 그는 “아멘”이라고 확언하고 있습니다.

진리를 증언하던 사람들을, 그 증언 때문에 죽었던 성도들을 하나님께서 신원해 주실 것입니다. 하나님은 간곡히 믿기를 요청하지만 끝까지 거부한 그들을 심판하실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증거 되었는데도 끝까지 무시했다면 마지막 심판은 회피할 수 없습니다. 하나님의 사랑의 한계때문이 아니라 그들의 죄악의 극악함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여러 번 여러 번 부르셨습니다.

아들을 십자가에 내어주시고 호소하셨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끝까지 부인했습니다. 오히려 진리를 말한 사람들을 죽이기까지 했으면 그들을 심판하는 것은 불의일 수 없습니다.

“볼찌어다 구름을 타고 오시리라 각인의 눈이 그를 보겠고 그를 찌른 자들도 볼 터이요 땅에 있는 모든 족속이 그를 인하여 애곡하리니 그러하리라 아멘!”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이 인류의 종말에 관한 증언은 그것을 전하는 요한만이 아멘으로 확인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러하리라 아멘” 요한만이 보증하는 것이 아닙니다. 8절에 보십시오. “주 하나님이 가라사대 나는 알파와 오메가라 이제도 있고 전에도 있었고 장차 올 자요 전능한 자라 하시더라”

이 사건의 비중 때문에 하나님 자신이 알파와 오메가요, 이제도 있고 전에도 있었고 장차 올 자요 전능한 자라는 자기의 이름으로 싸인 하고 있습니다. 반드시, 반드시 세상의 모든 약속들은 수포로 돌아가도 이 말만은 반드시 이루어 질 것이라고 하나님이 확인의 도장을 찍고 있습니다. “나는 알파와 오메가라. 이제도 있고 전에도 있었고 장차 올 자요 전능한 자라”

자신을 전능한 자라고 소개합니다. 만물의 주권자, 역사의 주관자로서 소개합니다. 하나님은 만사를 주관하시며 만물을 그 손에 가지신 자이십니다.

전능한 자라는 말은 신약에 모두 일곱 번, 한 번의 예외(고후 6:18) 말고는 모두 계시록에서 하나님을 가리키는 말로 사용되고 있습니다. 계시록은 권력의 문제를 다루고 있습니다. 동시에 그가 오심으로 누가 실권자인지 드러날 것임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아무도 저지할 수 없는 전능자 하나님이 역사의 종말을 선언하십니다. “볼찌어다 구름을 타고 오시리라” 전능한 통치자의 권위로서 이 사실을 입증합니다. 전능자께서 자신의 권위로서 역사의 종장에 관한 보증을 주십니다.

사랑하는 울산교회 성도 여러분, 여러분의 삶은 이 엄숙한 진리에 의해서 살펴보아야 합니다. “볼찌어다 구름을 타고 오시리라”는 선언이 여러분을 불안하게 합니까? 그러면 여러분의 삶은 반드시 바뀌어야 합니다. “볼찌어다 구름을 타고 오시리라”는 말씀이 여러분에게 한 가닥 희망이 됩니까? 그러면 그 희망을 끝까지 붙잡으십시오. 그 날 영광의 면류관을 쓰게 될 것입니다. 역사는 이 마지막을 향해서 달려가고 있습니다. 그리고 우리는 마지막 때에 이미 있습니다. 아멘. (정근두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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