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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성도의 사회책임의 행복 (단 2:46-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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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도의 사회책임의 행복
말씀 : 단 2:46-49

(단 2:46) 이에 느부갓네살 왕이 엎드려 다니엘에게 절하고 명하여 예물과 향품을 그에게 드리게 하니라
(단 2:47) 왕이 대답하여 다니엘에게 이르되 너희 하나님은 참으로 모든 신의 신이시요 모든 왕의 주재시로다 네가 능히 이 은밀한 것을 나타내었으니 네 하나님은 또 은밀한 것을 나타내시는 자시로다
(단 2:48) 왕이 이에 다니엘을 높여 귀한 선물을 많이 주며 세워 바벨론 온 도를 다스리게 하며 또 바벨론 모든 박사의 어른을 삼았으며
(단 2:49) 왕이 또 다니엘의 청구대로 사드락과 메삭과 아벳느고를 세워 바벨론 도의 일을 다스리게 하였고 다니엘은 왕궁에 있었더라

1. 성도의 세상에 대한 사회책임은 신앙고백적인 삶으로 이루어진다.

그리스도인들에게 사람의 제일 되는 목적이 무엇이냐고 묻는다면, “하나님께 영광 돌리는 삶”이라고 답변할 것입니다. 이 답변은 성경을 요약한 소요리문답 중 제1문의 답변으로서 정확한 답변입니다. 제1문은 “사람의 제일 되는 목적이 무엇입니까?”이며, 그 답은 “사람의 제일 되는 목적은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는 것과 그를 영원토록 즐거워하는 것입니다.”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렇게 영광 돌리는 구체적인 방법에 대해서 추가로 질문하면 자신 있고, 힘 있는 답변을 하지 못합니다.

외적으로는 답변할 수 있지만, 그의 내면에서는 그것이 진정한 답이 아니라는 것을 잘 알기 때문입니다. 자신의 내면에 꼭꼭 숨겨진 욕심을 잘 알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아는 것과 믿는 것과 행하는 것이 일치되지 못한 세대를 살아갑니다. 사단은 이러한 부분을 통해서 우리들을 속이며, 헛된 영광 가운데로 몰아갑니다. 헛된 수고로 시간을 낭비하게 합니다. 헛된 욕망에 사로잡혀 살아가면서도 하나님의 영광을 위한 삶처럼 착각하게 합니다. 결국 하나님의 뜻과 멀어지는 인생을 살아가게 합니다.

오늘날 우리는 늘 그러한 매체를 접하며, 그러한 소식을 듣기 때문에 그것이 그리스도인의 바른 생활인 것처럼 착각합니다. 그래서 모두들 경기에서 승리하고자 하고, 좋은 대학에 들어가고자 하며, 돈을 많이 벌고자 하고, 건강하고자 하며, 높은 자리에 앉고자 합니다. 경기에서 승리한 성도들이 하나님께 영광 돌리는 목소리가 감사와 함께 압박으로 다가옵니다. 승자의 위치에서 간증하는 목소리가 감사와 함께 마음을 압박합니다. 세상에서 잘된 성도들의 영광 돌리는 소리가 압박으로 다가옵니다.

우리는 이제 그 영광의 목소리들을 깊이 생각해 보아야 합니다. 과연 하나님께 영광 돌리는 삶이 육적이며 외적인 승리와 잘나고 잘된 위치를 차지하는 것인지 하나님 앞에 물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받기 원하셨고, 기다리고 계셨던 하나님의 영광이 우리의 잘됨과 잘남에 있었는지 물어야 합니다. 우리의 마음은 그것이 아니라는 것을 외치고 있음에도 계속 그런 것처럼 따라가는 우리의 삶을 돌아보며 물어야 합니다. 우리의 양심은 그것이 얼마나 교묘한 욕심의 가면인지 잘 고발합니다.

우리는 조만간 그러한 슬픈 현실을 가장 잘 보여주는 큰 행사를 맞이합니다. 6월부터 진행될 월드컵 축구 경기에서 승자들의 신앙적 표현들, 득점자들의 기도 세리머니를 바라보며 하나님의 이름을 높이며 그 영광을 찬양할 것입니다. 경기장에서 고백되어지는 그리스도인의 신앙고백은 우리의 가슴을 벅차게 합니다. 하나님의 영광스런 이름이 세상에 선포되는 그 모습은 감격스러운 모습입니다. 또한 그렇게 공적으로 신앙을 고백하는 선수들의 신앙적 열심들도 존귀한 모습입니다.

그런데 감사와 영광 뒤에 숨어 있던 사단은 우리를 교묘하게 인도합니다. 사단은 그것을 바라보는 성도들에게 선수의 승리와 선수의 신앙고백을 일치시켜 받아들이게 합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영광 받으시는 것은 선수의 신앙 고백이 담긴 승리이지 승리 자체가 아닙니다. 선수의 신앙고백과 경기의 승리는 별개입니다. 승자의 세리머니는 우리의 자부심이고, 우리의 정치세력화한 힘의 크기이지, 그것 자체가 하나님께의 영광은 아닙니다. 하나님은 그 승리가 아닌 승리 중의 고백을 기다리셨습니다.

만일 승리 자체가 하나님께 영광 돌리는 삶이라면 그 순간 패자 측에 소속된 그리스도인들의 삶은 무엇일까요? 같은 승자에 속했을지라도 득점하지 못한 그리스도인들의 삶은 무엇일까요? 하나님께서 영광 받는 삶은 승리 자체가 아닙니다. 잘되고 잘남에 있지 않습니다. 성공 자체에 있지도 않습니다. 사단의 속임수는 참으로 교묘합니다. 물론 선수의 신앙적 표현은 선수 당사자의 바른 신앙에 의한 것일 수 있습니다. 하지만 하나님께 드리는 영광은 승리가 아닌 성도의 신앙고백적인 삶 자체입니다.

2. 성도의 세상에 대한 사회책임은 성도의 사랑과 섬김의 사역이다.

바벨론에 포로로 잡혀 갔던 다니엘의 삶은 오늘날 사단의 교묘한 논법에 넘어가는 우리의 신앙적 행위들을 온전한 길로 안내해 줍니다. 기독교의 역사가 세상의 잘 되고 잘난 승자들의 역사에 의해 이어져 오지 않았다는 사실은 우리들의 신앙적 모델이 얼마나 잘못된 모델들이었는지 알게 합니다. 기독교의 역사는 순교자의 피를 통해 이어져 온 역사입니다. 숨겨진 그리스도인들의 사랑과 섬김과 헌신을 통해 이어져 온 역사입니다. 승자들의 역사도 그 순교와 섬김 역사들 중의 일부일 뿐입니다.

단 2:46-49에 나타나는 다니엘의 승리의 역사는 우리의 가슴을 벅차게 하며 하나님께 영광 돌리게 하는 최고의 역사들 중 하나입니다. 단 2:46에 보면 “이에 느부갓네살 왕이 엎드려 다니엘에게 절하고 명하여 예물과 향품을 그에게 드리게 하니라”라고 알려줍니다. 노예에 불과한 다니엘 앞에 대적의 최고의 왕이 무릎을 꿇는 모습을 보며 감격해 하지 않을 성도가 없습니다. 막강한 제국인 바벨론의 느브갓네살 왕 앞에서 다니엘은 승리하셨습니다. 세상의 왕권을 그 발 앞에 굴복시켰습니다.

그러나 이것은 다니엘의 육신적인 승리가 아니었습니다. 다니엘이 잘되고 잘나서 이루어진 승리가 아닙니다. 다니엘의 성공으로 인한 열매가 아닙니다. 다니엘이 바벨론 다른 학자들보다 공부를 잘한 결과도 아닙니다. 다른 학자들보다 뛰어난 업적은 남긴 결과도 아닙니다. 이것은 다니엘의 승리가 아닌 하나님의 승리였습니다. 하나님께서 다니엘을 통하여 세상 왕권을 굴복시킨 사건입니다. 다니엘은 하나님의 그 사역에 순종한 것입니다. 자신의 목숨을 내어놓은 사랑의 순교적 순종의 결과입니다.

느브갓네살 왕이 다니엘 앞에 무릎 꿇은 것은 다니엘이라는 한 인간의 존재 앞에 무릎 꿇은 것이 아닙니다. 다니엘과 함께 계신 하나님께 무릎 꿇은 것입니다. 다니엘의 승리는 꿈 해몽가로서의 육적인 승리가 아니었습니다. 육적인 과정을 통한 영적인 승리였습니다. 느브갓네살 왕 또한 다니엘의 영적 승리를 인정하고 무릎 꿇은 것입니다. 이것이 하나님께의 영광입니다. 다니엘의 영적인 승리는 갑자기 이루어진 승리가 아닙니다. 바벨론에 끌려오는 그 첫 날부터 계속 이루어져 오던 승리입니다.

하나님은 성도들의 삶을 통하여 그러한 영적인 승리가 이루어지기를 기대하십니다. 경기의 승리를 통해서와 마찬가지로 패배를 통해서도 기대하십니다. 육체의 건강을 통해서와 마찬가지로 질병을 통해서도 기대하십니다. 각종 성공과 잘됨을 통해서와 마찬가지로 실패와 못됨을 통해서도 기대하십니다. 우리의 성공과 실패, 잘됨과 못됨은 모두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는 사역 현장입니다. 하나님은 오늘날 성도에게서도 그 하나님의 능력과 권세 앞에 무릎 꿇는 세상 군왕들을 보기 원하십니다.

빌 2:10에서 “하늘에 있는 자들과 땅에 있는 자들과 땅 아래 있는 자들로 모든 무릎을 예수의 이름에 끓게 하시고”라고 하십니다. 롬 14:11은 “기록되었으되 주께서 가라사대 내가 살았노니 모든 무릎이 내게 꿇을 것이요 모든 혀가 하나님께 자백하리라 하였느니라”라고 하십니다. 하나님은 성도들의 신앙고백적인 삶을 통하여 이러한 영적 승리의 역사가 세상 가운데 나타날 것을 기대하십니다. 인간적인 승리는 그 후에 하나님께서 주시는 선물입니다. 하나님께서 그를 세상 가운데 세워주십니다.

하나님은 다니엘을 통하여 느브갓네살로 하여금 인간의 능력과 의지처를 포기하게 하셨습니다. 다니엘은 느브갓네살 왕이 하나님 앞에 무릎 꿇을 때까지 세상 권세 앞에서 그 사역에 순종해 왔습니다. 하나님은 단 1:8에서처럼 하나님을 향한 “뜻을 정하여” 사는 성도들을 통하여, 그리고 하나님 앞에서 “자기를 더럽히지 아니하리라”라고 작정하고 살아가는 자들을 통하여 세상 변혁의 역사를 이루어 가십니다. 느브갓네살 왕은 다니엘의 섬김을 받아서 자기의 의지처를 포기할 결단을 한 것입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지혜와 총명”으로 담대하게 세상 군왕을 섬기는 자들을 통하여 일어나는 역사입니다. 두려움 속에 사는 세상 영혼들에게 보여지는 담대한 사랑의 섬김은 그들의 삶을 변화시킵니다. 결코 다니엘의 세상 지식과 지혜로 이룬 승리가 아닙니다. 다니엘의 잘되고 잘남을 통한 승리가 아닙니다. 다니엘의 하나님을 향한 사랑의 승리입니다. 바벨론의 느브갓네살 왕을 주님의 사랑으로 사랑하며 섬긴 십자가 사랑의 승리입니다. 결국 느브갓네살 왕은 그 섬김과 사랑에 굴복한 것입니다.

그래서 왕은 단 2:47에서 이렇게 세 가지의 신앙 고백을 합니다. 첫째로 “너희 하나님은 참으로 모든 신의 신이시오”라고 고백합니다. 다신론자인 느부갓네살 왕은 하나님을 모든 신의 신, 최고의 신으로 고백합니다. 둘째로 “모든 왕의 주재시로다”라고 고백합니다. 하나님은 세상 나라의 왕을 세우기도, 폐하기도 하시는 분임을 고백합니다. 셋째로 “네 하나님은 또 은밀한 것을 나타내시는 자시로다”라고 고백합니다. 은밀한 것을 나타내시는 분이라고 고백합니다. 승리가 아닌 섬김의 결과입니다.

3. 성도의 세상에 대한 사회 책임은 동역자와 함께 누리는 행복이다.

다니엘이 느브갓네살 왕을 정복한 것은 정치력도, 군사력도, 세상 힘도 아닙니다. 오직 하나님의 사랑의 열심과 그에 따른 위로자의 섬김입니다. 다니엘과 느브갓네살의 세상 위치는 변화가 없습니다. 여전히 왕과 노예인 신하입니다. 하지만 하나님은 다니엘의 손에 왕을 붙여 주셨습니다. 이것이 성도의 사회책임의 온전한 모습입니다. 하나님을 향하여 뜻을 정하고, 거룩한 자로 섰지만, 세상을 향하여 긍휼히 여김과 사랑의 마음으로, 그들의 세상 권위를 인정하며, 위로자로 다가가 섬긴 결과입니다.

하나님은 이렇게 사랑의 섬김으로 세상을 정복해 가는 사회책임의 행복을 위해 그의 섬김의 영역을 넓히시며, 그의 섬김의 수준을 높이기 위하여 그의 세상적인 위치 또한 높여 주십니다. 단 2:48에 보면, “왕이 이에 다니엘을 높여 귀한 선물을 많이 주며 세워 바벨론 온 도를 다스리게 하며 또 바벨론 모든 박사의 어른을 삼았으며”라고 알려줍니다. 이제는 왕 뿐만 아니라 왕의 손에 위임되었던 바벨론의 온 도를 다스리는 섬김의 영역 확장과 그에 필요한 모든 박사의 어른 위치로 세움 받았습니다.

이 세상에서 하나님의 이름과 우리의 이름이 높임 받는 것은 하나님께서 하시는 작업입니다. 세상의 모든 대적들과 세상 군왕들이 우리 앞에 무릎 꿇는 것은 세상 속에서 견고한 신앙을 유지하며 그들을 사랑으로 위로하며 섬길 때 이루어지는 역사입니다. 하나님은 우리들의 거룩과 성실한 사랑의 섬김을 통하여 세상이 하나님을 알게 되고, 그로 인하여 우리의 모든 삶도 세상 가운데 높임받기 원하십니다. 이것이 우리의 사회 책임이며, 하나님의 능력 안에서 세상을 누리는 사회책임의 행복입니다.

그러므로 다니엘의 신앙처럼 하나님 안에 머무는 겸손을 통하여 사랑으로 섬길 때 세상에서 존귀한 위치에 세움 받게 됨을 알아야 합니다. 인간의 능력을 믿는 교만은 멸망을 향하며, 하나님의 능력 믿는 겸손은 존귀를 향합니다. 잠 18:12는 “사람의 마음의 교만은 멸망의 선봉이요 겸손은 존귀의 앞잡이니라”라고 충고합니다. 그리고 잠 22:4는 “겸손과 여호와를 경외함의 보응은 재물과 영광과 생명이니라”라고 하셨습니다. 하나님과 이웃을 높이며 섬기는 사랑이 사회책임의 최고의 무기입니다.

성도들의 세상 능력이나 물질을 통한 승리나 성공은 결코 세상 열왕을 정복하지 못합니다. 우리들이 정복해야 할 세상은 사단이 교묘하게 이끌고 가는 육적이며 세상적인 승리를 통하여 이룰 수 없습니다. 과거 십자군 전쟁이나 다양한 서양 제국주의들의 실질적인 실패의 역사에 남아 있습니다. 그런데도 우리는 매 순간마다 세상의 능력으로 세상 권력과 세상 열왕들을 정복하려고 세상 사람들이 달려가는 곳으로 함께 달려갑니다. 우리의 승리는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사랑의 섬김의 승리입니다.

다니엘은 자신이 높아진 것이 하나님의 은혜의 역사임을 잘 알았습니다. 자신의 능력과 세상적인 힘에 의한 것이 아님을 잘 알았습니다. 오직 하나님을 향한 믿음으로 살아가며 그 사랑 가운데서 바벨론을 바라보고, 그 사랑 가운데서 느브갓네살 왕을 위로하며 섬긴 결과로 주신 하나님의 은혜임을 잘 알았습니다. 그 결과가 자신의 수고의 대가가 아닌 자신의 영적 공동체를 통한 하나님의 은혜였음을 알았기에 그 사회책임의 행복한 열매를 홀로 누리지 않고 공동체의 모든 동역자와 함께 누렸습니다.

단 2:49에 보면 “왕이 또 다니엘의 청구대로 사드락과 메삭과 아벳느고를 세워 바벨론 도의 일을 다스리게 하였고 다니엘은 왕궁에 있었더라”라고 알려줍니다. 다니엘은 믿음의 공동체를 통한 하나님의 은혜를 잊지 않고 동역자들과 함께 그 은혜를 누렸습니다. 단 2:17-18에 보면, 다니엘의 세 친구들이 다니엘의 위기 속에서 함께 기도하며 동역해 왔음을 보여줍니다. 다니엘의 기도 요청을 받고 함께 기도했던 세 친구들입니다. 다니엘은 이들과 함께 하겠다고 왕께 청구한 것입니다.

성도의 세상에 대한 사회 책임은 언제나 성도들이 동역자와 함께 누릴 수 있는 행복의 길로 인도합니다. 하나님의 긍휼을 함께 구했던 하나냐, 미사엘, 아사랴 등도 다니엘과 함께 바벨론의 온 도를 다스리며 세상 가운데 하나님의 능력을 선포할 수 있었습니다. 성도의 사회책임의 행복은 모든 성도가 함께 누릴 수 있는 행복입니다. 만일 개인의 세상적인 능력으로 승리를 통한 정복을 이루었다면 중세시대처럼 권력의 암투 속에서 불행한 열매를 맛보아야 했을 것입니다. 그것은 신앙적인 비극입니다.

그런데도 오늘날 성도들 중의 다수가 “하나님께 영광 돌린다”는 표면적 이유를 들어 세상적인 힘과 능력으로 세상 열왕들을 정복하고자 힘쓰며 살아갑니다. 자기 욕심의 충만함을 위한 것이라는 가면을 쓴 채로 각 분야의 성공과 승리를 위해 열심을 품습니다. 하나님은 그러한 모습을 영광으로 받지 않으십니다. 물론 성실함으로 세상의 모든 힘과 능력을 키워야 합니다. 다니엘도 유대인의 모든 학문과 기술, 바벨론의 모든 학문과 기술을 연마하였습니다.

그러나 그것으로 세상을 정복하지 않고, 그것을 통한 사랑의 섬김으로 정복했음을 알아야 합니다. 사회책임의 행복은 섬김에 의한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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