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그인

  • 목록
  • 아래로
  • 위로
  • 쓰기
  • 검색

설교 은혜에 잠겨 사는 사람들 (겔 47:1-12)

  • 잡초 잡초
  • 371
  • 0

첨부 1


은혜에 잠겨 사는 사람들

오늘부터 우리 교회에서 부흥 성회가 열리게 됩니다. 부흥성회는 우리 신앙의 부족한 부분들을 점검하고 더욱 새로운 모습으로 신앙 생활을 하고자 결단하는 시간이 아닙니까? 그래서 부흥회를 교회의 영적인 잔치라고 합니다. 어떤 부흥사가 부흥회를 인도할 때였습니다. 새벽예배를 인도하려고 단상에 서자마자 사람들이 웃기 시작했습니다. 그래서 그 목사님은 '내가 어제 재미있는 유머를 많이 했더니 사람들이 내 얼굴을 보기만 해도 웃고 은혜를 받는구나'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사람들이 처음부터 끝까지 계속 웃는 것이 심상치 않았답니다. 새벽예배를 마치고 집에 와서 보니까 파자마에다 넥타이를 매고 갔더랍니다. 거울을 보았으면 그러한 실수를 범하지 않았을 텐데 거울을 안본 것이 문제였습니다. 어쩌면 이 부흥회는 지금까지 보지 못하던 거울을 꺼내어 보는 일입니다. 내 잘못을, 내 충성의 모습을 부흥강사 목사님의 말씀의 거울로 비추어 보면서 재정비하는 시간인 것입니다.

부흥이라는 말을 사전에서 찾아보면 "한번 쇠퇴한 것이 다시 성하여 일어남"이라고 설명하고 있습니다. 부흥은 '소생하다. 부활한다, 재생한다' 는 뜻을 지니고 있습니다. 영어로 부흥(revival)이란 단어는 라틴어의 두 단어에서 온 복합어입니다. 하나는, '다시'라는 의미이며, 또 하나는 '산다'라는 두 단어로 되어 있어서. 즉 '다시 한번 살아나게 되었다'는 뜻입니다. 사람이 한 평생을 살아가는 동안에 여러 가지 우여곡절과 환경의 굴곡을 접하며 살아가지만 그 때마다 낙심하거나 주저앉지 말아야 합니다. 다시 일어나고 부흥하므로 말미암아 지난날의 실패가 성공하는 현재와 미래로 바뀌어 져야 합니다. 떨어졌던 믿음이 다시 회복하여 큰 믿음 가운데 있게 해야 합니다. 열심이 식어졌던 것이 다시 열심을 내서 행해야 합니다. 실패했던 것, 포기했던 것을 다시 시작하여 일을 이루어야 합니다.

기도를 멈추었던 사람이 다시 기도해야 합니다. 성경과 닮을 쌓았던 사람들이 하나님의 말씀을 가까이 하여 읽고, 듣고, 배워야 합니다. 교회를 다니다가 만 사람들을 다시 다니게 해야 하고, 예수님을 믿도록 해야 합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올 해 이런 부흥의 역사가 일어나기를 축복합니다. 아니 일어나게 합시다. 일어날 줄 믿습니다.

지금 우리가 살펴보는 본문은 지금으로부터 2600년 전 일입니다. 바벨론 왕이 예루살렘을 침략해 왔습니다. 많은 문물을 약탈해 갔고 1만명의 젊은이들은 포로로 끌고 갔습니다. 그 포로 가운데 25세의 젊은이 에스겔도 함께 끌려갔습니다. 그의 나이 30이 되던 해, 그는 이방 땅이지만, 그곳에서 선지자로 부름을 받습니다. 노예생활에 시달리는 백성들을 위로하고 격려했습니다. 용기와 희망을 선포했습니다. 예레미야가 눈물의 선지자였다면, 아모스가 정의의 선지자였다면, 에스겔은 소망의 선지자였습니다.

그런데 비극적인 일들이 벌어졌습니다. 바벨론 군대가 또 다시 예루살렘을 침공해 성을 초토화 시켰습니다. 성전은 불타고 유대의 왕인 시드기야를 잡아 두 눈을 뽑고 손발을 묶고 말에 매달아 끌고 다녔습니다. 비참하게 끌고 다니다 처참히 죽도록 내버려둡니다. 이제 조국도 없어졌습니다. 돌아갈 땅도 없습니다. 그리하여 백성들은 울고 또 울었습니다. 설상가상으로 이 무렵 에스겔의 아내가 세상을 떠납니다. 그러니 소망을 선포하던 에스겔의 꼴이 어떻게 되었겠습니까? 그러나 에스겔은 이런 아픔 가운데서도 좌절하지 아니하고 백성들을 위로했습니다. "이럴 때 일수록 우리는 소망을 가져야 합니다. 서로가 서로를 붙들어 주어야 합니다. 용기를 가지고 희망을 버리지 말고 우리는 살아야 합니다. 이럴 때 일수록 전능하신 여호와 하나님을 의지하고 살아야 됩니다." 그동안 귀를 막고 있던 백성들이 상처받은 치유자 에스겔의 설교를 듣기 시작했습니다. 에스겔의 위로와 격려 희망의 메시지 가운데 하나가 바로 오늘 본문의 환상입니다.

하루는 에스겔이 하나님의 사자에게 이끌려 성전에 들어갔습니다. 성전에서 물이 펑펑 쏟아지기 시작하는 것입니다. 그러더니 성전에 물이 그득히 고이며 한번 걸어보라고. 그래서 걸어갔더니 발목까지 물이 찰랑 찰랑 흘러 넘쳤습니다. 사방에서 물이 쏟아져 내리기 시작했습니다. 조금 있다가 다시 한번 걸어보라고. 물이 무릎까지 차 올랐습니다. 다시 물은 점점 차 올라 허리까지. 급기야 이 물은 헤엄하지 않고서는 능히 건널 수 없는 강물이 되었습니다. 그리고 이 물은 성전을 한바퀴 휘감아 돌더니 사막을 향하여 흘러가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그리고 사해 바다에 도착하자 죽었던 사해 바다가 살아나고 고기들이 펄떡거리며 뛰어 노는 것 아니겠습니까? 또한 물이 흐르는 곳, 주변에 보니 사방에 숲이 우거졌습니다. 진귀한 열매들이 주렁주렁 매달려 있었습니다. 이 하나님이 보여 주신 비전 앞에 에스겔은 외칩니다. "우리가 지금은 고난을 당하고 있지만 우리는 반드시 다시 일어나고야 말 것이다. 지금 어두운 터널을 걸어가고 있지만 반드시 찬란한 아침 태양은 우리를 향하여 찾아오게 될 것이다. 비춰지게 될 것이다. 우리민족은 넘어졌지만 다시 일어나게 될 것이다. 지금은 실패했지만 반드시 성공하고 승리하고야 말 것이다. 이럴 때일수록 우리는 현실을 바라보지 말고, 전능한 하나님을 의지해야 될 것이다. 믿음을 버리지 아니하고 기도한다면, 하나님께서 반드시 우리민족을 치료해 주시고 새롭게 일으켜 주실 것이다." 그런데 이 비전은 성전에서부터 시작하고 있습니다. 1절을 보시기 바랍니다. "그가 나를 데리고 전 문에 이르시니 전의 전면이 동을 향하였는데 그 문지방 밑에서 물이 나와서 동으로 흐르다가 전 우편 제단 남편으로 흘러내리더라."

여기에서 전이란 문자적으로는 '예루살렘 성전'을 의미합니다. 그 성전으로부터 생수의 강이 시작되었다는 말입니다. 그 생수가 성전 주변을 가득 채울 뿐 아니라 사해 바다에 이르기까지 모든 사막을 채우게 됩니다. 그리고 마침내 사해 바다에 들어가서 죽어있는 바다를 살려냅니다. 그런데 실제로는 예루살렘 지역에는 강이 없습니다. 고원지대이기 때문에 강이 존재할 수 없습니다. 하늘에서 내리는 비를 저장해서 그것을 사용할 수는 있지만, 예루살렘 도시 자체에는 어떤 강도 있을 수 없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1절에서 언급한 '전'이란 눈에 보이는 예루살렘 성전을 의미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러면 생수가 넘쳐 나오는 '전'이란 어떤 곳을 말할까요? 그 대답을 예수님께서 요한복음7장 38절에서 해주셨습니다. "나를 믿는 자는 성경에 이름과 같이 그 배에서 생수의 강이 흘러 나리라." 예수 그리스도로부터 생수가 흘러나옵니다. 좀 더 정확히 말하면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때문에 생수가 흘러나온다는 것입니다. 어떻게 이러한 사실을 알 수 있습니까? 본문 1절 하반절의 '제단'이라는 단어에서 찾을 수 있습니다. "그 문지방 밑에서 물이 나와서 동으로 흐르다가 전 우편 제단 남편으로 흘러내리더라"

여러분, 제단이 무엇을 하는 곳입니까? 제사 지내는 곳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친히 제물이 되어 주셔서 갈보리 산 위에서 인류를 위해 못 박혀 죽으신 십자가가 바로 제단입니다. 생명을 살리는 생수는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로부터 출발합니다. 그러면 생수는 무엇을 말할까요? 성령을 의미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요한복음 7장 38절에서 "나를 믿는 자는 성경에 이름과 같이 그 배에서 생수의 강이 흘러 나리라"고 말씀하신 후에 39절에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이는 믿는 자의 받을 성령을 가리켜 말씀하신 것이라." 그러니까 생수는 성령을 의미합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때문에 우리는 생수가 넘치는, 성령이 넘치는 삶을 살 수 있게 되었습니다. 다시 말하면 예수께서 십자가에서 우리 죄를 담당하시고 죄의 값을 지불하시고 장사한지 사흘만에 부활하심으로, 우리가 하나님 앞에 나갈 수 있는 길이 열렸습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 보내주신 성령으로 말미암아 우리가 십자가를 의지하고 주님 앞에 나아갈 수 있게 되었습니다. 결국 우리는 예수님의 십자가와 성령으로 말미암아 영혼의 갈증을 해결할 수 있게 되었고, 풍성한 삶을 살 수 있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우리 주위를 보면 세상의 방법으로 영혼의 갈증을 해결하려고 하는 사람들이 많이 있습니다. 그 중에 대표적인 사례가 점쟁이를 찾아다니는 것입니다. 어떤 통계에 의하면 대한민국의 점쟁이가 50만 명을 넘었다고 합니다. 인구 100명당 1명이 점쟁이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한국에서 가장 잘되는 비즈니스 중의 하나는 '점집'이라고 합니다. 그런데 사람들에게 점쟁이를 찾아가는 이유를 물어보면, 답답해서 찾아간다고 합니다. 다시 말해서 영혼의 두려움과 답답함을 해소하려고 점집을 가는 것입니다. 또 한국처럼 술장사가 잘 되는 나라도 없다고 합니다. 월 평균 수입의 20퍼센트 가까이를 술값으로 지불하는 나라가 또 어디에 있습니까? 1인당 술 소비량은 세계최대라고 합니다. 그런데 술 마시는 사람에게 "왜 술 마십니까?"라고 술 마시는 이유를 물어보면 대답이 이렇습니다. "제 정신으로 어떻게 이 험한 세상을 살아갈 수 있습니까? 견딜 수 없어서 마십니다." 무엇을 말하고 있습니까? 영혼의 갈증을 술로라도 해갈해 보려고 몸부림을 친다는 것입니다. 젊은이들이 나이트 클럽에서, 락카페에서 밤새도록 몸을 흔들어돼는 이유도 알고 보면, 그렇게 하지 않으면 견딜 수 없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도박도 마찬가지입니다. 러시아의 대문호 도스토예프스키가 도박에 관한 글을 쓴 적이 있는데, 그는 사람들이 왜 도박을 하는지 곰곰히 생각해 보았습니다. 생각해보니까 도박의 목적이 돈이 아니더랍니다. 돈이 목적인 사람은 돈을 주면 더 이상 도박을 하지 말아야 하는데, 돈이 생기면 여전히 도박장으로 달려간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도스토예프스키가 내린 결론은 "도박을 왜 하느냐? 그것은 돈 때문이 아니라, 깊은 목마름 때문이다."라고 주장했습니다. 그의 주장을 100% 수용하기는 어렵지만, 그 나름대로 맞는 말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점으로, 술로, 춤으로, 도박으로 영혼의 갈증을 해결하려고 합니다. 그러나 그렇게 한다고 영혼의 갈증을 해결할 수 없습니다. 공허한 마음을 채울 수 없습니다. 만약 세상의 방법으로 갈증을 해결할 수 있었다면 술집이 점점 줄어야 합니다. 점집이 폐업신고를 내며 문을 닫아야 합니다. 나이트 클럽이, 카지노가 망해야 합니다. 그러나 그러한 사업장이 망하기는커녕, 오히려 성업중이 아닙니까?

요한복음 4장에는 영혼의 갈증을 해갈하기 위해, 남편을 다섯이나 바꾸어가며 살았지만, 영혼의 갈증이 해갈되기는커녕, 더 심해져 여섯 번째 또 다른 남자와 같이 사는 한 여자가 등장합니다. 수가성 우물가 여인입니다. 그 여인에게 예수님께서 말씀합니다. "이 물을 먹는 자마다 다시 목마르려니와 내가 주는 물을 먹는 자는 영원히 목마르지 아니하리니, 나의 주는 물은 그 속에서 영생하도록 솟아나는 샘물이 되리라." 타는 목마름은 세상의 그 어떠한 것으로도 해결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이 주는 이 물을 먹은 여인은 자신의 저주스러운 인생을 축복을 유통하는 역전의 인생으로 바꾸었습니다. 예수님은 요7:37에서 "누구든지 목마르거든 내게로 와서 마시라."고 분명히 말씀하셨습니다. 여러분, 세상의 방법으로 여러분들의 갈증을 해결하려고 하지 마시고 예수님을 믿음으로, 예수님 안에서 갈증을 해결하시기 바랍니다. 성령의 생수로 영혼의 갈증을 해결하시기 바랍니다. 영원히 변하지 않는 생수, 어떠한 갈증도 해결할 수 있는 생수, 죽은 생명도 살리는 성령의 생수는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로부터 시작됩니다.

이제 우리 모두 십자가 앞에 나의 삶을 내려놓고, 이번 집회에 부어주시는 말씀들을 내가 소홀히 여기지 않고 그 말씀을 붙잡고 사는 은혜에 잠긴 인생이 되게 해달라는 사모함이 있어야 하겠습니다. 성전 문지방에서부터 흘러나온 생수는 제단을 한바퀴 돈 다음, 그 제단을 통과해서 남쪽으로 흘러가는데, 물은 점점 깊어지고 있습니다. 3절을 보겠습니다. 천사가 줄을 잡고 동으로 나아가며 물의 깊이를 재고 있습니다. "그 사람이 손에 줄을 잡고 동으로 나아가며 일천 척을 척량한 후에 나로 그 물을 건너게 하시니 물이 발목에 오르더니" 성전에서부터 흘러나온 생수의 강물이 계속 불어나기 시작합니다. 홍수처럼 불어납니다. 천사가 일천척 오늘날로 말하면 500미터 가량을 동으로 나아간 후에 물을 척량해서 보니 발목까지 찼습니다. 계속해서 4절과 5절을 보겠습니다. "다시 일천 척을 척량하고 나로 물을 건너게 하시니 물이 무릎에 오르고, 다시 일천 척을 척량하고 나로 물을 건너게 하시니 물이 허리에 오르고, 다시 일천 척을 척량하시니 물이 내가 건너지 못할 강이 된지라. 그 물이 창일하여 헤엄할 물이요 사람이 능히 건너지 못할 강이더라." 성전 문지방에서부터 흘러나온 물이 발목에 차더니 무릎에 차더니 허리에 차더니 마침내 사람이 건너지 못할 정도로 물이 넘실거리게 되었다고 합니다. 그런데 이것은 영적인 의미가 있습니다. 성전에서부터 시작된 생수가 우리의 발목만 살짝 적시는 강이 아니라, 우리가 헤엄쳐야만 건널 수 있을 만큼 풍성하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의 생수, 성령의 생수는 우리가 겨우 혀에 살짝 찍어 발라 맛만 보는 물이 아닙니다. 헤엄쳐야만 할 물, 우리를 능히 잠기게 하는 물, 넘치는 강이라는 것입니다. 성령의 생수는 우리가 충만하게 체험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아 새로운 존재가 되었음에도 풍성한 삶을 누리지 못하고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아 영생을 얻었지만, 이 땅에서 주님께서 준비하신 풍성한 삶을 누리지 못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요한복음 10장 10절에서 "내가 온 것은 양으로 생명을 얻게 하고 더 풍성히 얻게 하려는 것이라"고 분명히 말씀하셨습니다. 주님은 우리가 생명만 얻기를 원하지 않으십니다. 주님은 우리가 더 풍성한 삶을 살아가는 것을 원하고 계십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저 은혜의 강가에서 발목만 담그고 있는 그리스도인들이 있습니다. 더 깊은 성령의 생수를 맛보지 못하고 살아가고 있는 그리스도인들이 있습니다.

그런데 보세요. 이 물이 흐르는 곳마다 소성하는 역사가 일어납니다. 6-10절입니다. "그가 내게 이르시되 인자야 네가 이것을 보았느냐 하시고 나를 인도하여 강가로 돌아가게 하시기로 내가 돌아간즉 강 좌우편에 나무가 심히 많더라 그가 내게 이르시되 이 물이 동방으로 향하여 흘러 아라바로 내려가서 바다에 이르리니 이 흘러내리는 물로 그 바다의 물이 소성함을 얻을찌라 이 강물이 이르는 곳마다 번성하는 모든 생물이 살고 또 고기가 심히 많으리 이 물이 흘러 들어가므로 바닷물이 소성함을 얻겠고 이 강이 이르는 각처에 모든 것이 살 것이며 또 이 강 가에 어부가 설 것이니 엔게디에서부터 에네글라임까지 그물 치는 곳이 될 것이라 그 고기가 각기 종류를 따라 큰 바다의 고기 같이 심히 많으려니와 "

창일한 강물을 쳐다보면서 놀라고 있는 에스겔에게 천사가 물었습니다. ‘네가 이것을 보느냐?’ ‘예 보았습니다.’ 하자 ‘그러면 나를 따라 오너라’ 따라갔더니 강 주변을 돌아가는데 강 좌우에 나무가 심히 많았습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은혜로 구원 얻을 자가 심히 많을 것과 그들에게 주시는 하나님의 은혜가 풍성할 것을 상징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천사가 말합니다. ‘이 물이 동방으로 흘러 아라바로 내려가 바다에 이를 것인데 바닷물이 살 것이다.’ 여기 낯선 지명이 나옵니다. 10절에 "엔게디에서부터 에네글라임까지 그물 치는 곳이 될 것이라" 이 지역은 요즘 말하면, 사해입니다. 죽은 바다입니다. 여기엔 고기도 그 어떤 생물도 살지 않는 죽은 바다입니다. 바다만 죽은 게 아닙니다. 주변 땅에 모든 것이 다 죽어있는 저주받은 이 지역에 생수가 흐르니까 사해가 살아납니다.

여러분! 죽은 바다라는 의미를 가진 사해바다에 성전에서 흘러나온 강물이 들어감에 따라 바다가 되살아나리라는 예언은 하나님의 복음의 말씀이 닫는 곳마다 영적으로 죽은 인간들이 구원받고 새 생명을 얻게 될 것을 말씀하는 것입니다. 강물이 이르는 곳마다 생물이 살게 되고 고기가 심히 많아지게 되었습니다. 고기가 많아지니 강가에 자연히 어부들이 등장하게 되었습니다. 이 풍요를 세상에 증거 해야 할 사명이 바로 교회에 있습니다.

교회는 사람을 세울 뿐 아니라 그 사람을 세워 세상을 살리는 일에 부름 받은 곳입니다. 요즘 세상도 '인재 경영'에 발을 벗고 사람에게 투자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기업에서는 '인재경영'을 표방하고 있습니다. 인재를 확보하고 키우는 것이 기업경영에 제일 중요한 과제라고 생각하게 된 것입니다. 그래서 S급 인재를 확보하기 위해 국내뿐만 아니라 해외로 눈을 돌리고 있습니다. S급 인재란 Super인재라는 말인데 이런 인재를 발굴하면 사장보다 몇 배의 월급을 보장하고 데리고 옵니다. 예를 들면 줄기 세포 허브를 만든 황우석교수를 한때 미국에서 몇 천억을 들여서라도 데려가려고 하지 않았습니까? 그래도 애국심하나로 국내에서 연구 활동을 하겠다고 하니까 우리나라에서도 수백 억의 연구자금을 들여 연구를 지원하고 경호원을 붙여 신변을 보호하는 등 국빈급으로 예우를 하다가 줄기세포가 없다는 결론이 나자 모두가 망연자실한 것입니다. 인재 한 명이 만 명을 먹여 살리고 국가를 살릴 수 있기 때문에 이런 일을 하게 되는 것입니다.

교회도 마찬가지입니다. 인재를 양성하고 발굴하고 과감하게 등용해야 합니다. 교회의 전통과 함께 새로운 인재들이 갖고 있는 은사와 능력을 최대한 발휘할 수 있도록 무대를 만들어주어야 합니다. 인재 한 명이 만 명을 먹여 살리는 시대에 깊숙이 들어와 있습니다. 세상은 하루가 다르게 변화해 갑니다. 그 부름 앞에 우리가 가져야 할 일이 무엇인가를 깊이 생각해 보아야 합니다. 지금 우리의 경쟁국인 중국은 인공위성을 만들어 미래를 개척해 나가는데 요즘 우리의 미래의 동력인 이공 계열에 사람이 안 갑니다. 돈 되고 편한 길에 인생을 겁니다.

교회는 하나님의 은혜로 모든 것이 이루어집니다. 은혜는 선물입니다. 주는 자가 아무 조건도 없이 일방적으로 베푸는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사랑을 입은 것으로부터 시작해서 은혜 아닌 것은 하나도 없습니다. 우리 모두 이 은혜에 깊이 잠겨야 할 것입니다. 그런데 이 은혜를 받기 위해 할 일이 무엇입니까? 지금 에스겔은 일 천척씩 물을 재었다고 합니다. 저는 생각해 보았습니다. 조국은 무너졌고, 자신은 포로로 끌려와 그발 강가에서 소망 없이 살아갑니다. 이제 나이도 30세입니다. 무엇인가를 해보고 싶어도,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절망의 한 복판에 주님이 오셔서 말씀하시는데 성전에서 옹달샘처럼 솟는 그 물을 일천척씩 재라고 하니까 처음에 쉽게 동의가 되겠습니까? 절망이 앞을 가린 사람 앞에 눈에 보이는 것도 아닌 일에 선뜻 일어나 그 일을 할 수가 있겠는냐는 말입니다. 그러나 그는 절망의 자리에서 일어섭니다. 이것이 은혜 앞에 자신이 감당해야 할 수고가 아닙니까? 은혜를 늘 유지하기 위해서는 우리의 헌신과 희생이 필요합니다.

우리가 희생하지 않으면 다음세대가 축복을 누릴 수가 없습니다. 어쩌면 이번에 우리가 힘을 모두와 준비하는 우리의 헌신과 헌금의 결과는 우리자신보다도 다음세대가 하나님을 알고, 그 은혜 안에 자라, 이 민족과 한국교회의 지도자로 자라 가는 일에 더 큰 유익과 영향으로 나타날 것입니다. 그러나 이것이야말로 우리가 살아가는 보람이요, 존재의 이유가 아니겠습니까! 그것이 바로 예수님이 보여주신 삶의 모습이 아닙니까! 십자가가 주님 앞에 다가오는 것을 느끼셨을 때 그는 내게 고통이 오고 있다고 말씀하지 않으셨습니다. 오히려 "인자가 영광 얻을 때가 왔도다"고 말씀하셨습니다. 그 다음에 무엇이라고 하셨는지 기억하시나요?--"한알의 밀알이 땅에 떨어져 죽지 아니하면 한알 그대로 있고, 죽으면 많은 열매를 맺느니라" 그는 자신의 죽음과 희생으로 열매 맺게될 수많은 구원받을 영혼의 환상을 바라보시며 기쁨으로 영광스럽게 자신을 희생의 제물로 던지신 것입니다. 그렇다면 우리도 부담이 아닌 기쁨과 감사로 영광스러운 마음으로 이 역사에 동참하게 되시기를 기대 합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여러분은 이번 부흥회를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이 은혜가 임해도 그 은혜를 갈망하지 않는다면, 이는 참 비참한 것이 아닙니까? 이렇게 성소로 말미암아 흘러나오는 생수가 살리는 역사를 일으키지만 소성 되지 못할 땅도 있을 것을 오늘 본문은 보여줍니다. 11절을 봅시다."그 진펄과 개펄은 소성되지 못하고 소금 땅이 될 것이며"'진펄'은 '진흙 수렁'을, '개펄'은 '물웅덩이'를 각각 의미하는 것입니다. 모두 사해 주변의 언덕에 위치한 진흙 웅덩이를 가리키는 것입니다. 곧 우기에 바닷물이 넘치면 그 넘친 물이 계속 이 웅덩이 속에 고여 있게 됩니다. 따라서 그 고인 물들은 곧 증발하게 되며 그 지역은 남아 있는 소금기로 두텁게 덮이게 됩니다.

하나님의 성령은 살리는 영입니다. 성령의 생수가 부어질 때 죽은 것들이 살아납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역사는 언제나 강제적이지 않습니다. 주님은 문밖에서 문을 두드리십니다. 문을 열어야 우리 가운데 들어오십니다. 진펄과 개펄과 같은 마치 소금구덩이와 같이 강퍅한 심령이 있습니다. 그런 마음을 우리는 녹여야 합니다. 그래야 소성하며 새 생명을 얻을 수 있습니다. 저는 우리 교회가 날마다 기적을 유통하는 축복의 통로가 되기를 소원합니다. 사람이 건강하게 살려면 숨이 통해야 하고 식물이 잘 자라기 위해서도 바람이 잘 통해야 합니다. 어느 단체든지 성장하고 목표에 도달하기 위해서는 의사소통이 잘 돼야 합니다. 교회도 마찬가지입니다. 오늘 본문에서도 성전에서 스며 나온 물은 고여 있지 않고 흘렀습니다.

2절에 '스미어 나오더라' 는 단어의 뜻도 그렇습니다. (히) 파하즈 - '마구 솟구쳐 오른다' 고여 있는 물이 아니라 솟구치는 역동적인 물입니다. 교회는 생명이 약동하는 교회가 되어야 합니다. 날마다 기적이 일어나야 합니다. 작은 그릇이 큰 그릇되고 더러운 그릇이 깨끗한 그릇되고, 질그릇이 보배로운 그릇이 되고, 천한 그릇이 귀한 그릇이 되는 변화의 역사가 일어나야 합니다. 자기중심적인 사람이 형제를 배려할 줄 아는 사람이 되고, 스쿠르지가 변하여 자선사업가가 되어야 합니다. 탕자가 성자가 되고, 위로 받기만을 바라던 사람이 변하여 위로자가 되고, 이해 받기를 원하던 사람이 변하여 이해하는 사람이 되고, 사랑 받기를 원하던 사람이 변하여 사랑을 나누어주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이뿐 아니라 병든 자가 고침 받아 건강하게 되고, 가난한자가 복을 받아 부자가 되고, 불평불만 원망에 가득 차 있던 심령이 변하여 감사와 찬송이 넘치는 입술로 거듭나야 합니다. 성령과 말씀의 생수가 심령에 닿을 때 이런 변화가 일어나게 됨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기도하십시다. 아-멘.

이런 글도 찾아보세요!

공유

facebooktwitterpinterestbandkakao story
퍼머링크

댓글 0

권한이 없습니다. 로그인

신고

"님의 댓글"

이 댓글을 신고 하시겠습니까?

삭제

"님의 댓글"

이 댓글을 삭제하시겠습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