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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나는 가인이 아닌가? (창 4:1~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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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본문은 우리가 잘 알고 있는 가인의 이야기입니다.
가인은 아담의 첫째 아들이었는데 하나님이 자기의 제물은 받지 않으시고 동생의 제물은 받으신 것 때문에 화가 나서 아벨을 죽인 사람입니다.
가인은 인류 역사에 나오는 최초의 살인자입니다. 그것도 동생을 죽인 끔찍한 범죄자입니다.
아담과 하와가 선악과를 따먹지 말라는 하나님의 명령을 어겼기 때문에 사람과 하나님과의 관계, 종적인 관계, 수직적인 관계가 단절되었습니다.
가인이 동생을 죽이는 죄를 범했기 때문에 사람과 사람의 관계, 이웃과의 관계, 횡적인 관계, 수평적인 관계가 단절되었습니다.
가인은 아담에 이어 또 한 종류 죄의 기원을 이룬 사람입니다.
신약성경 유다서 1장 11절에는 무조건 비방하는 사람들, 이성 없는 짐승과 같이 본능으로 아는 것 그것으로 멸망하는 사람들이 나옵니다.
그 가운데 제일 먼저 나오는 사람이 바로 가인입니다.

회 있을진저 이 사람들이여,  가인의 길에 행하였으며 삯을 위하여 발람의 어그러진 길로 몰려갔으며 고라의 패역을 따라 멸망을 받았도다

성경과 관련 있는 내용들, 또 성경을 해석한  고대 문헌들이 많이 있었습니다.
그런 문헌들 가운데 ‘가인은 하와가 아담과 동침해서 낳은 아들이 아니다. 가인은 하와가 뱀과 동침해서 낳은 아들이다.’라는 내용을 여러 군데에서 발견할 수 있습니다.
가인이 너무나 나쁜 사람이기 때문에 이런 전승이 생긴 것입니다.

그러면  가인 혼자만 나쁜 사람입니까?
가인의 이야기는 나와 상관이 없습니까?
아닙니다. 성경에 기록된 말씀들 가운데 나와 관계없는 이야기는 하나도 없습니다.

성경에 악인들의 이야기가 많이 나옵니다.
그들을 무조건 비난하는 것이 아니라 나를 그들에게 비춰보며 교훈을 얻는 사람이 성숙한 사람입니다.
사도신경의 예수님에 대한 고백 가운데 “본디오 빌라도에게 고난을 받으사  십자가에 못박혀 죽으시고”라는 대목이 있습니다.
이것을 보면 사도신경이 제정될 당시에 교회에서는 성경에 나오는 나쁜 인물들 가운데  빌라도를 제일 나쁜 사람으로 여겼던 것 같습니다.
그리고 그것이 교회의 전통이  되었습니다.
그런데 내가 빌라도와 같은 위치에 있었다면 어떻게 하였을 것 같습니까?
사도신경으로 신앙을 고백할 때마다 이것을 생각해 보아야합니다.
예수를 끌고 온 무리들이 예수에게 사형을 언도할 것을 요구합니다.
빌라도는 처음에는 예수를 놓으려고 힘썼습니다.
그랬더니 무리들이 빌라도에게 압력을 가합니다.
‘이 사람은 자기를 왕이라고 했는데, 로마 황제 가이사에게 반역하는 사람인데, 이 사람을 놓으면 총독, 당신은 가이사의 충신이 아니오!‘ 합니다(요19: 12).
교묘하고 무서운 협박입니다.
이런 압력 때문에 빌라도는 예수님에게 사형을 언도했습니다.
오늘날에도 많은 정치가들이, 또는 행정당국이 민원 때문에, 선거가 다가오면 표 때문에 일을 제대로 처리하지 못하는 것을 우리는 많이 보고 있습니다.
이들도 빌라도적인 사람들입니다.
내가 빌라도였다면 그런 가운데에서 담대하게 ‘이 사람은 무죄다! 석방해라!’ 할 수 있었을 까요?

타산지석(他山之石)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원래의 뜻은 ‘다른 산에서 나는 나쁜 돌도 자기의 구슬을 가는데 소용이 된다.’입니다.
이 말은 다른 사람의 하찮은 언행이라도 자기의 지덕을 연마하는데 도움이 된다는 뜻으로 쓰입니다.
여러분, 성경에 나오는 이른 바 악한 사람들, 실패한 사람들을 타산지석으로 삼으시기 바랍니다.
오늘은 가인을 타산지석으로 삼으려고 합니다.

가인의 이야기를 통해, 첫째, 나에게도 가인과 비슷한 모습이 있는 것을 알아야합니다.

‘아니, 아니, 목사님, 목사님, 가인은 살인자인데, 그것도 동생을 죽인 사람인데 나에게 어떻게 가인과 비슷한 모습이 있다고 하시는 것입니까? 나는 벌레 한 마리 제대로 죽이지 못하는 착한 사람이란 말입니다!’
많은 분들이 이렇게 항의하실 것입니다.

그러나 여러분, 살인의 범위는 형법에서 말하는 것보다 훨씬 넓습니다.
식품안전업무에 종사하는 분들은 유해식품을 생산하는 것도 살인으로 간주해야 한다고 말합니다.
낙태반대운동을 하는 분들, 환경운동을 하는 분들은 그들이 하는 일과 관련해서 살인의 범위를 확대합니다.
우리가 지난 번 남선교회대회 때 생명윤리와 기독교에 대한 말씀을 들었는데 그 날 강사는 배아세포연구도 살인행위라고 말하면서 성체세포연구를 강조했습니다.
말로 사람을 죽이는 경우도 있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상대방에게 깊은 상처를 주는 말을 얼마나 많이 합니까?
사람의 목숨을 빼앗는 것이 생물학적 살인이라면, 사람의 인격을 무시하고 인격을 말살하는 것은 인격적인 살인입니다.
저 사람이 저리로 가면 틀림없이 죽는데 모른 척하고 있다면 그 사람의 죽음과 내가 무관하다고 할 수 없습니다. 
여기에서 우리는 전도의 엄숙한 의미를 다시 한 번 깨닫습니다.
생명 경시, 간접살인, 넓은 의미의 살인, 이런 것들을 생각하면 나에게 가인과 비슷한 모습이 없다고 부인할 수가 없습니다.

가인의 잘못은 동생을 죽인 것, 한 가지만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가인의 제물을 받지 않으시고 아벨의 제물은 받으셨습니다.
왜 그러셨을까?
성경은 여기에 대해 꼭 한 구절, 히브리서 11장 4절에서 ‘믿음으로 아벨은 가인보다 더 나은 제사를 하나님께 드렸다.’ 라고만 말하고 있습니다.
여기에 근거를 두고 ‘아, 가인은 아벨보다 못한 제물을 드렸기 때문에 하나님은 가인의 제물을 받지 않으셨구나!’ 이렇게 짐작합니다.
또 ‘제사에는 피흘림이 있어야 하는데 땅의 소산으로 제물을 드리는 것에는 피흘림이 없었고 양의 첫 새끼를 제물로 드리는 것은 피흘림이 있었기 때문이다.’라고 말하기도 합니다. ‘아, 그것은 유목문화와 농경문화의 갈등 때문이다. 유목문화권에서 농경문화를 비난하기 위해서 농경문화의 소산을 제물로 드린 것은 받지 않은 것으로 기록한 것이다.’라고 말하기도 합니다.

자, 하나님이 가인의 제물을 받지 않은 이유는 어느 것이라도 좋습니다.
그것은 전적으로 하나님의 권한입니다.

더 중요한 것은 그 이후입니다.
하나님이 제물을 받지 않았으면 가인은 어떻게 해야 합니까?
‘하나님이 왜 내 제물을 받지 않으셨을까? 내가 무엇을 잘못했나?’ 생각해야 합니다.
하나님께 조심스럽게 여쭤보아야 합니다.
‘하나님, 대단히 죄송합니다만, 어찌하여 저의 제물은 받지 않으셨나요?’
하나님도 그런 것을 기대하셨을 것입니다. 
가인이 물어보면 친절하게 그 이유를 알려주셨을 것입니다.

오늘 본문은 성경에서 제물에 대해 말하고 있는 최초의 기록입니다.
만일 가인이 ‘하나님이 어찌하여 내 제물을 받지 않으셨을까?’ 진지하게 생각하고 그 답을 찾았다면 오늘 본문은 형제살인의 비극적인 기사가 아니라 제물에 대한 좋은, 원초적인 교훈이 되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가인은 어떻게 하였습니까?
몹시 분하여 안색이 변했다고 5절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여기에서 문제가 시작되었습니다.
하나님이 나의 기도를 들어주시지 않을 때 그 원인을 찾지 않고, 나의 잘못을 생각하지 않고 원망하고 화를 낸다면 나도 가인과 비슷한 사람입니다.

보니까 하나님이 다른 사람의 기도는 들어주셨습니다.
그 사람을 시기하고 미워한다면 내게도 가인의 유전인자가 있다고 해야 합니다.

소설가 황순원(黃順元)씨가  1954년에「카인의 후예」라는 잘 알려진 장편소설을 발표했습니다. 해방 후 북한에서 벌어진 이른바 토지개혁운동을 배경으로 한 소설입니다.
이 소설의 제목이 말하는 가인의 후예는 공산당입니다.
공산당이야 대표적인 가인의 후예이지요.
나의 잘못을 깨닫지 못하면 우리 모두가 가인의 후예라고 할 수밖에 없습니다.

성도 여러분, 가인의 이야기를 읽으면서 ‘나는 나의 몸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거룩한 산 제물로 드리고 있는가? 나의 예배는 과연 영적 예배인가?(롬12: 1)’ ‘영과 진리로 드리는 예배인가?(요4: 24)’ 살피시기 바랍니다.
‘내가 드리는 제물은 하나님께서 받으시기에 합당한 것인가?’ 살피시기 바랍니다.
혈기, 분노, 억제하기 위해 힘쓰시기 바랍니다.
모든 생명을 존중히 여기시기 바랍니다.

그렇게 하지 않는다면 ‘나는 가인이 아니다.’ ‘가인의 이야기는 나와 아무런 관계가 없다.’ 할 수가 없습니다!

나에게도 가인과 같은 모습이 있는 것을 발견하고, 가인이 저지른 잘못을 반복하지 않기 위해서 힘쓰는 여러분이 되고 제가 되기를 부탁드립니다.

가인의 이야기를 통해 둘째, 보혈의 공로를 깨달아야합니다.

10절 뒷부분을 보세요.
하나님은 “네 아우의 핏소리가 땅에서부터 내게 호소하느니라”고 했습니다.
아벨의 피가 ‘하나님, 내가 형님에게 억울한 죽음을 당했습니다.’ 이렇게 호소한다는 뜻입니다.

9절을 보세요.  하나님이 가인에게 “네 아우 아벨이 어디 있느냐” 물으셨습니다.
‘네가 관심을 가지고 보살펴야 할 네 동생이 어디 있느냐?’ 하신 것입니다.
오늘 본문에는 아벨이 가인의 동생이라는 점이 유난히 자주 나옵니다.
2절을 보세요. “그가 또 가인의 아우 아벨을 낳았는데”라고 하였습니다.
‘그가 아담의 둘째 아들 아벨을 낳았는데’ 하지 않았습니다.
8절을 보세요.

가인이 그의 아우 아벨에게 말하고 그들이 들에 있을 때에 가인이 그의 아우 아벨을 쳐죽이니라

“가인이 그의 아우 아벨에게” “가인이 그의 아우 아벨을” 이렇게 반복됩니다.
9절에서도 “아벨이 어디 있느냐” 하지 않고 “네 아우 아벨이 어디 있느냐” 했습니다.

아벨이 가인의 아우이기 때문에 당연히 그렇게 한 것이지만 한 번만 그래도 될 것을 왜 이렇게 여러 번 같은 말을 하고 있을까요?
‘가인이 책임지고 돌보아 주어야 할 아벨’ 이것을 강조하기 위해서입니다..
가인은 그 책임을 다하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그 반대로 했습니다.
요한1서 3장은 10절에서 “그 형제를 사랑하지 아니하는 자는 하나님께 속하지 아니하니라”고 하고서 12절에서 “가인 같이 하지 말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이 가인에게 “네 아우 아벨이 어디 있느냐” 물으시자 가인은 무엇이라고 대답합니까?
먼저 “내가 알지 못하나이다” 했습니다.  거짓말입니다.
가인은 살인자이면서 동시에 거짓말쟁이였습니다.
한걸음 더 나가서 “내가 내 아우를 지키는 자니이까” 합니다.
이 말에는 ‘하나님, 하나님이 아벨을 지켜야 할 것이 아닙니까?’ 이런 뜻도 있습니다.
자기의 책임을 회피하고 나가서 하나님께 책임을 전가하는 것입니다.
경찰이 살인강도를 체포해서 심문합니다. ‘당신, 왜 그 사람을 죽이고 물품을 뺐었소?’ 하니까 이 강도가 ‘경찰관인 당신이 그를 잘 지켜야 할 테인데 당신이 잘 지켜주지 않아서 그랬소!’라고 대답하는 것이나 마찬가지입니다.

그래서 아벨의 핏소리는 ‘하나님, 나를 돌보아야 할 형님이 나를 돌보지 않고 오히려 나를 죽였습니다.’ 호소한 것입니다.

오늘 우리는 하나님께 호소하는 또 하나의 핏소리가 있는 것을 알아야합니다.
십자가에서 흘리신 그리스도의 피가 우리를 위해서 하나님께 호소하고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 내가 이 사람들을 위해서 이렇게 피를 아낌없이, 남김없이 흘렸습니다. 이 사람들을 용서하여 주세요.’
그 핏소리는 이렇게 호소하고 있습니다.

마태복음 23장 35절에는 아벨의 피를 의로운 피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의인 아벨의 피로부터 성전과 제단 사이에서 너희가 죽인 바라갸의 아들 사가랴의 피까지 땅 위에서 흘린 의로운 피가 다 너희에게 돌아가리라

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여기에 나오는 바라갸의 아들 사가랴가 어떤 사람인지는 잘 알지 못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이 하나님은 아벨의 피를 비롯해서 의로운 피에 대해 외면하지 않으십니다.

요한계시록 6장 10절에는 믿음 때문에 죽임을 당한 영혼들이 제단 아래에서 ‘언제까지 우리 피를 갚아주지 않으실 것입니까?’ 호소하는 장면이 나옵니다.
하나님은 ‘나는 모른다.’ ‘나는 거기에 대해 아무런 계획이 없다.’ 하시지 않으셨습니다.
하나님은 ‘순교자들의 숫자가 찰 때까지 아직 잠시 동안 쉬어라.’ 대답하셨습니다.

우리는 우리나라가 이렇게 보호받고 있는 것도 순국선열들, 국군장병들, 그리고 순교자들이 흘린 의로운 피 때문인 것을 알아야합니다.
특히 ‘좌파’라고 불리는 사람들이 이 사실을 꼭 알아야 합니다.

그리스도의 피는 아벨의 피보다 더 값진 것입니다.
히브리서 12장 24절은

  새 언약의 중보자이신 예수와 및 아벨의 피보다 더 나은 것을 말하는 뿌린 피니라

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그리스도의 피는 우리의 죄를 씻어주는 힘을 가진 피입니다.
요한1서 1장 7절은

그가 빛 가운데 계신 것 같이 우리도 빛 가운데 행하면 우리가 서로 사귐이 있고 그 아들 예수의 피가 우리를 모든 죄에서 깨끗하게 하실 것이요

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그리스도의 피는 아담, 가인에게서 시작된 죄의 전통에서 우리를 벗어나게 하는 피입니다.
베드로전서 1장 18절과 19절은

너희가 알거니와 너희 조상이 물려준 헛된 행실에서 대속함을 받은 것은 은이나 금 같이 없어질 것으로 된 것이 아니요 오직 흠 없고 점 없는 어린 양 같은 그리스도의 보배로운 피로 된 것이니라

말하고 있습니다.
아벨의 핏소리가 호소하는 것을 외면하지 않으신 하나님은 그리스도의 보혈이 호소하는 것을 외면하지 않고 우리의 죄를 사해 주시는 것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찬송가 202장의 가사입니다.

죄에서 자유를 얻게 함은 보혈의 능력
주의 보혈  시험을 이기는 승리되니
참 놀라운 능력이로다
주의 보혈 능력 있도다 주의 피 믿으오
주의 보혈 그 어린양의 매우 귀중한 피로다

이 찬송은 이어서 육체의 정욕을 이길 힘도 보혈의 능력이고, 정결한 마음을 얻게 하는 것도 보혈의 능력이고, 눈보다 더 희게 맑히는 것도 보혈의 능력이고, 부정한 모든 것 밝히시는 것도 보혈의 능력이고, 구주의 복음을 전할 제목도 보혈의 능력이고, 날마다 나에게 찬송 주는 것도 보혈의 참 놀라운 능력이라고 노래하고 있습니다.

찬송가 213장은

먹보다도 더 검은 죄로 물든 이 마음
흰눈보다 더 희게 깨끗하게 씻었네
주의 보혈 흐르는데 믿고 뛰어 나아가
주의 은혜 내가 믿어 깨끗하게 되었네

라고 노래하고 있습니다.

저는 오늘 ‘어떤 넥타이를 맬까?’ 하다가 설교 가운데 보혈 이야기가 있는 것을 생각하고 제가 가진 넥타이들 가운데서 제일 빨간 것을 골라 매고 나왔습니다.

보혈의 능력을 믿고 주의 보혈 흐르는데 믿고 뛰어들어 깨끗함을 얻는 여러분이 되고 제가 되기를 바랍니다.

가인의 이야기를 통해 셋째, 하나님의 은총을 깨달아야합니다.

하나님은 가인에게 그가 받을 벌을 말씀하셨습니다.
네가 땅에서 저주 받을 것이라고 했습니다.
네가 밭을 갈아도 땅이 다시는 그 효력을 네게 주지 아니할 것이라고 했습니다.
이런 이야기를 하고 있는 고대문헌이 있습니다.

‘가인은 하나님께 항의하기 위해서 일부러 보잘 것 없는 제물을 드렸다. 창세기 3장을 보면 땅이 가시덤불과 엉겅퀴를 낼 것이라고 했고 얼굴에 땀을 흘려야 먹을 것을 먹겠다고 했는데 그것 때문에 첫 농사꾼인 가인이 농사를 짓는데 아주 힘이 들었다. 그래서 가인이 ’하나님, 이게 뭡니까? 그 때문에 이런 것만 거둘 수 있었습니다.‘하고 보잘 것 없는 것들을 제물로 드렸다.’

오늘은 고대문헌 이야기를 자주 하는데 십여 년 전에 저희 교회에서 부담임목사로 수고하다가 지금 미국에서 목회하고 있는 이진희 목사님이 이 분야의 전문가입니다.
그 분이 「유대인과 함께 읽는 창세기」라는 책을 썼는데 거기에 가인과 아벨의 이야기에 대한 고대문헌들의 기록을 자세하게 정리해 놓았습니다.

그렇다면 하나님이 “네가 밭을 갈아도 땅이 다시는 그 효력을 네게 주지 아니할 것이요 너는 땅에서 피하며 유리하는 자가 되리라” 하신 것은 가인이 부모의 죄는 생각하지 않고 자기 힘든 것만 원망하며 항의한 것에 대한 벌이라고 할 수도 있습니다.
여러분, 하나님께 함부로 데모하지 마세요.
본전도 못 건지는 수가 있습니다.

하나님은 “너는 땅에서 피하며 유리하는 자가 되리라” 하셨습니다.
가인은 에덴 동쪽 놋 땅에 거주하였는데  그가 거주한  땅 놋은 “유리함” 이라는 뜻을 가지고 있습니다.

가인은 그 죄가  너무 무겁다고 하면서 14절 끝에서 “무릇 나를 만나는 자마다 나를 죽이겠나이다”라고 하였습니다.
성경을 부정적인 시각으로 보는 사람들은 여기에 와서 ‘아, 여기 크게 틀린 것이 있다!’ 하지요.
‘그 때 사람이라고는 아담과 하와, 가인 셋밖에 없었는데  어떻게 “무릇 나를 만나는 자마다”라고 다른 사람들이 있다고 한단 말이냐?’ 합니다.
그 때 이미 많은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우선 본문 다음의 17절을 보면 가인이 아내와 동침하여 아들을 낳은 이야기가 있습니다.
가인의 아내, 또는 아내가 될 여자도 있었습니다.
성경은 그 가운데에서 가인과 아벨의 이야기가 우리의 구원에 필요해서 기록한 것입니다.
이것을 신학적인 말로 ‘구원사적 필요에 따라서 선택된 기록’이라고 합니다.

하나님은 가인의 호소를 들으시고 가인을 보호해 주실 것을 약속하셨습니다.
비록 살인을 해서 유리하며 살아야 하는 벌을 주셨지만 목숨을 살려 주셨습니다.

사실 가인의 죄는 가벼운 것이 아닙니다.
가인은 죄에 대한 하나님의 경고를 무시했습니다.
7절 중간 이후의 말씀입니다.

선을 행하지 아니하면 죄가 문에 엎드려 있느니라 죄가 너를 원하나 너는 죄를 다스릴지니라

하나님께서 이렇게 경고했음에도 가인은 아벨을 죽였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은 가인을 죽이지 않으셨습니다.

죄는 문밖에 엎드려 있다가 우리가 문을 나서면 우리를 유혹하는 것을 알아야합니다.
우리를 끌고 가려고 합니다. 우리를 다스리려고 합니다.
우리를 자기의 종으로 삼으려고 합니다.
우리는 그 죄를 물리치기 위해서 힘써야 합니다.
공격이 최선의 방어라고 했으니 선을 행하기에 힘써야 합니다.
문에 엎드려 있는 죄를 향해 ‘예수의 이름으로 명하노니 죄야, 물러가라!’ 해야 합니다.

우리는 죄에 대한 경고를 수없이 듣습니다.
예수님은 요한복음 8장 34절에서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죄를 범하는 자마다 죄의 종이라” 죄에 대해서 이렇게 경고하셨습니다.
“죄의 삯은 사망이요 하나님의 은사는 그리스도 예수 우리 주 안에 있는 영생이니라”
로마서 6장 23절의  말씀입니다.
“죄의 삯은 사망이요” 얼마나 단정적이고 무서운 경고입니까?
아무도 이것을 부정할 수 없고 여기에 대해 이의를 제기할 수 없습니다.
“욕심이 잉태한즉 죄를 낳고 죄가 장성한즉 사망을 낳느니라”
야고보서 5장 14절의 말씀, 역시 죄에 대한 강한 경고입니다.

이런 경고가 지금도 우리에게 주어지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죄를 짓는다면 나도 제2의 가인입니다. 
가인의 전통을 이어 받은 사람입니다.

가인은 동생 아벨을 죽였는데 우발적으로, 충동적으로 그렇게 한 것이 아니라 계획적으로 그렇게 했습니다.
8절을 보면 “가인이 그의 아우 아벨에게 말하고”라고 하였는데 성경의 다른 사본에는 “우리가 들로 나가자”라고 말했다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범죄 하기 좋은 장소로 유인해서 동생을 죽였습니다. 
고살죄(故殺罪), 고의로 살인한 죄를 지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은 가인을 죽이지 않으셨습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주권적인 자비입니다.
가인을 죽이는 자는 벌을 칠 배나 받을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하나님이 살려주신 가인을 사람이 죽이려고 하는 사람이 있었다면 그는 가인보다 더 나쁜 죄를 짓는 것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판단에 대해 이러쿵저러쿵해서는 안 됩니다.

하나님은 가인에게 표를 주셔서 만나는 모든 사람에게서 죽임을 면하게 하셨습니다.
하나님은 가인이 나병에 걸리게 해서 사람들이 접근하지 못하게 하셨다고 기록된 고대문헌도 있고, 뿔이 돋게 해서 만나는 사람들이 ‘저것은 사람이 아니다. 괴물이다.’ 하면서 피하도록 했다고 기록된 고대문헌도 있습니다.

여하튼 하나님은 가인을 보호해주셨습니다.
16절 이하는 그가 결혼을 하고 후손들이 이어지는 이야기입니다.

우리에게도 가인과 같은 모습이 있습니다.
‘나는 가인이 아닌가?’ 했을 때 ‘아니다!’ 할 수가 없습니다.
그러나 여러분, 절망하지 마세요.
가인에게 자비를 베푸신 하나님께서는 오늘 우리에게도 자비를 베푸십니다.
아니 베푸셨습니다. ‘그리스도의 보혈로 인한 사죄’라는 자비를 베푸셨습니다.

하나님이 가인에게 준 표는 ‘이 사람은 죄가 있다. 그러나 죽여서는 안 된다.’는 것이었습니다.
면살표(免殺票)라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이 사람은 죄가 없다. 죄가 있었으나 십자가 보혈 밑에 나아와 그 죄를 깨끗하게 씻었다.’는 표를 주셨습니다.
면죄표(免罪票)를 주신 것입니다.
면죄표는 면살표보다 급이 높습니다.
면살표가 임시통과증이라면 면죄표는 여권입니다.
이 자리에 나온 분들은 모두 면죄표를 받은 분들입니다.
놀라운 은총입니다!

이제 말씀을 정리합니다.

여러분 가인의 이야기를 대하면서 하나님이 기뻐 받으시는 제물이 어떤 것인지 깊이 생각하시기 바랍니다.
정당하지 못한 분노가 얼마나 부끄러운 것인지 아시기 바랍니다.
죄를 철저하게 경계하시기 바랍니다.
죄에 대한 경고에 귀를 기울이시기 바랍니다.
죄에게 다스림을 받는 것이 아니라 죄를 다스리기 위해서 힘쓰시기 바랍니다.
내가 책임지고 돌보아야할 이웃들을 발견하고 정성껏 돌보기 바랍니다.
내가 돌보아야 할 사람들, 내가 지켜야 할 사람들, 나의 아벨을 힘써 지키시기 바랍니다.
사회적인 약자들, 나의 아벨입니다.
죄가 얼마나 무서운지 모르고 사망의 길을 걷고 있는 사람들, 나의 아벨입니다.
생명이 얼마나 소중한 것인지 깨달으시기 바랍니다.
참된 회개, 용기 있는 회개가 얼마나 중요한지 아시기 바랍니다.

주님께서 우리를 위해 흘리신 보혈의 능력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큰 죄에 빠진 나에게 베푸시는 하나님의 은총에 감사하시기 바랍니다.
가인의 이야기에서 많은 교훈을 얻고, 보혈의 능력을 찬양하며, 하나님의 은총에 젖어 사는 여러분이 되고 제가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유관지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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