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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하나님의 사람들이 품어야 할 마음 (빌 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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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빌 2:3) 어떤 일을 하든지, 다툼이나 허영으로 하지 말고, 겸손한 마음으로 하고, 서로 자기보다 남을 낫게 여기십시오.
(빌 2:4) 또한 여러분은 자기 일만 돌보지 말고 서로 다른 사람들의 일도 돌보아 주십시오.
(빌 2:5) a여러분은 이런 태도를 가지십시오. 그것은 곧 그리스도 예수께서 보여 주신 태도입니다. (a. 또는 여러분은 이런 마음을 품으십시오. 그것은 곧 그리스도 예수의 마음입니다)
(빌 2:6) 그분은 하나님의 모습을 지니셨으나, 하나님과 동등함을 당연하게 생각하지 않으시고,
(빌 2:7) 오히려 자기를 비워서 종의 모습을 취하시고 사람과 같이 되셨습니다. 그는 사람의 모양으로 나타나셔서,
(빌 2:8) 자기를 낮추시고 죽기까지 순종하셨으니, 곧 십자가에 죽기까지 하셨습니다.

전쟁중에 한 신부가 동부에서 군인인 남편을 따라 캘리포니아 사막끝까지 왔습니다. 그곳 생활조건은 아무리 좋게 되어도 원시적이었습니다. 그래서 남편은 아내가 오는 것을 말렸습니다. 하지만 아내는 남편과 함께 있고 싶어했습니다. 그들이 얻을 수 있었던 집은 인디언 마을 근처의 다 쓰러져 가는 오두막이었습니다. 낮에는 그늘에서도 온도가 40도가 넘었습니다. 바람은 쉴새 없이 불었으며 어느 곳이든 먼지며 모래가 수북히 싸였습니다. 하루하루가 길고 지루하기만 했습니다. 이웃이라야 인디언뿐이었고 그들은 영어를 한 마디도 하지 못했습니다. 남편이 작전 명령을 받고 2주동안 사막 깊숙히 들어가는 바람에 아내의 외로움과 비참한 생활 여건으로 그녀에게서 좋은 것까지 빼앗아가 버렸습니다. 그녀는 더이상 견딜 수 없어 어머니에게 집으로 돌아가겠다고 편지를 썼습니다.

얼마 후 두 줄짜리 답장을 받았습니다. "두 사람이 감옥 창살을 통해 바깥을 보고 있었다. 한 사람은 땅을 보고, 다른 사람은 별을 보았단다." 아내는 편지를 읽고 또 읽었습니다. 마침내 무슨 뜻인지 깨닫고는 자신이 몹시 부끄럽게 느껴졌습니다. 그래서 결심했습니다. 별을 바라보기로 했습니다. 그리고는 인디언 친구들을 사귀기 시작했습니다. 인디언들에게 옷감 짜는 법, 도자기 굽는 법 등을 배웠습니다. 인디언들의 문화와 역사 그리고 생활에 친숙해졌습니다. 그리고 그녀는 사막을 연구하기 시작했습니다. 어머니에게 책을 보내달라고 부탁했습니다. 선인장과 유카와 조수아나무를 연구했습니다. 그러면서 사막은 황량하고 쓸쓸한 곳에서 아름답고 기묘한 곳으로 바뀌어졌습니다. 이 여인은 이 분야의 전문가가 되어 책까지 펴냈습니다.

무엇이 변했습니까? 사막은 변하지 않았습니다. 인디언들도 변하지 않았습니다. 오로지 이 여인이 마음을 바꾸자 세상이 바뀐 것입니다. 마음을 바꾸니 운명이 바뀐 것입니다. 오늘 우리가 어떤 마음을 먹느냐에 따라 우리 인생은 크게 바뀌기 시작할 것입니다. 하나님은 하나님의 사람들이 어떤 마음을 품고 살아가기를 원하실까요? '너희 안에 이 마음을 품으라 곧 그리스도 예수의 마음이니..' 그렇습니다. 예수님의 마음을 품고 살아가기를 원하십니다. 그렇다면 예수님의 마음은 어떤 마음일까요?

1. 다른 사람을 중요하게 여기는 마음(3)

이유없이 이사를 자주 하는 유대인이 하루는 랍비를 찾아와 물었습니다. "랍비님, 저는 이사를 자주 다니는데 이번에는 어느 동네로 가면 좋겠습니까?" 랍비가 되물었습니다. "지금 자네가 사는 동네가 어떤가?" "말도 마십시오. 못된 인간들이 우글거리는, 질이 낮은 동네입니다." "그러면 자네가 특별히 가고자 하는 동네가 있는가?" "예, 제가 알기로는 저 윗동네가 참 좋다고 들었습니다." 그 말이 떨어지기 무섭게 랍비가 소리쳤습니다. "자네! 그 동네로 이사가지 말게. 그 동네 형편없는 동네야." "아니 랍비님, 그 동네를 잘 알고 계십니까?" "잘 알지, 자네가 살 동네니까. 아마도 곧 형편없는 동네가 될 거야."

우리는 자기보다 못한 사람, 어린 사람, 낮은 위치에 있는 사람을 가볍게 여기기 쉽습니다. 그리고 불친절하게 대하기 일쑤입니다. 그러나 성경은 말슴하기를 무슨 일을 하든지 겸손함 마음으로 하고 자기보다 남을 낫게 여기라고 명령합니다. 낫게 여긴다는 말씀은 중요하게 여기라는 말씀입니다. 서로 존경하라는 말씀입니다. 서로 귀히 여기고 마음을 다하여 대하라는 말씀입니다. 서로 책임을 전가하지 말고 좋은 점을 발견하여 인정해 주라는 말씀입니다.

남을 낫게 여기는 사람은 "다툼", 즉 이기적 태도가 있어서는 안됩니다.
남을 낫게 여기는 사람은 "허영", 즉 근거없는 생각을 고집하거나 관철하려 해서는 안됩니다.
남을 낫게 여기는 사람은 "겸손" 즉 자신의 마음이 낮아져야 합니다.

왜 인간관계에서 갈등이 생깁니까? 왜 인간관계가 깨어지고 상처를 입습니까? 왜 주변의 사람을 통하여 축복을 경험하지 못하고 불행을 느끼게 되는 것입니까? 무슨 일이든지 다툼이나 허영으로 하기 때문입니다. 이기적인 태도와 고집스런 자세를 버리지 못하고 대하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겸손한 마음을 품지 못하고 자신을 남보다 낫다고 생각하며 함부로 대하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인간관계를 통해 하나님의 뜻을 이루고 축복을 누리려면 겉으로 보기에 하찮게 여겨지는 사람들을 중요하게 여겨야 합니다. 마음을 낮추고 피차 존경해야 합니다. 사랑하는 마음을 품고 귀하게 대해야 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어린아이도 소중하게 여겼습니다. 유대인뿐 아니라 이방인, 세리와 죄인들, 심지어 창녀까지도 외면하지 않고 소중한 사람으로 대했습니다. 모든 이들이 예수님을 존경하게 되었습니다.

몇 년 전에 예일대학의 총장이 오하이오 주지사였던 분에게 이런 조언을 하였습니다. "A학점과 B학점을 받는 학생들에게 어제나 친절하십시오. 그러면 언젠가 그들은 훌륭한 교수가 되어 캠퍼스로 돌아올 것입니다. 그리고 C학점을 받는 학생들에게도 친절하십시오. 그러면 언젠가 그들은 캠퍼스로 돌아와 2백만 달러짜리 실험실을 지어줄 것입니다."

2. 다른 사람에게 관심을 보이는 마음(4)

테레메트릭스 인터내셔널이라는 회사에서 중역의 자리에까지 승진한 16,000명의 회사 간부들을 대상으로 조사를 했더니 높은 성취를 이루는 사람과 낮은 성취를 이루는 사람들 사이에 다음과 같은 차이점이 발견되었습니다.
높은 성취자들은 이익뿐 아니라 사람들에게도 관심이 있었습니다.
낮은 성취자들은 자신들의 안전에만 정신이 팔려 있었습니다.
높은 성취자들은 부하 직원들을 낙관적으로 보았습니다.
낮은 성취자들은 부하직원들의 능력을 기본적으로 불신했습니다.
높은 성취자들은 부하직원들에게 조언을 구하나 낮은 성취자들은 그렇지 않았습니다.
높은 성취자들은 사람들의 말을 귀담아 들으나 낮은 상취자들은 대화를 피하고 정책 매뉴얼을 의지하였습니다.

1)우리 자신의 일을 돌아보아야 합니다.(자기 가족 포함)
2)그러나 관심이 자신에게만 국한해서는 안됩니다. 갈6:2 "너희가 짐을 서로 지라 그리하여 그리스도의 법을 성취하라"

다른 사람들의 관심도 살펴야 합니다. 다른 사람의 짐도 관심을 가져야 합니다. 예수님은 자신보다는 늘 다른 사람에게 관심을 보였습니다. 다른 사람의 질병, 상처, 귀신에게 시달림 받는 것, 가난, 배고픔, 외로움 등 관심사가 다른 사람을 향해 집중되었습니다. 그래서 언제나 사람들을 적절하게 도우셨습니다. 그러나 오늘 그리스도인들중에는 오로지 자신에게만 모든 관심이 집중되었을 뿐 다른 사람에게는 아무런 관심도 보이지 않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바로 옆집에 사는 이웃이 굶어죽어도 모릅니다. 교회에 처음 나온 사람이 옆자리에 앉아있어도 신경쓰지 않습니다. 셀원이 상처를 받고 울고 있어도 아무도 신경을 써주지 않습니다. 오직 자신의 문제에만 매달려 살고 자신의 관심사만을 위하여 기도하고 있습니다. 자신의 시간을 다른 사람을 위하여 사용하려고 하지 않습니다.

'늑대와 양치기 소년'의 이야기 중 소년은 여러번 거짓말을 해 마을 사람들에게 신뢰를 잃고 외면당합니다. 소년은 왜 그런 행동을 계속 해야 했는지요. 혼자서 양을 지켜야만 했던 소년의 외로움에 마을 사람들이 조금만 관심을 기울여 주었다면 거짓말은 계속되지 않았을지도 모릅니다.

어느날 톨스토이가 거리를 산책하고 있으니 거지가 손을 내밀며 '한푼 적선하시오' 했습니다. 톨스토이가 거지의 손을 잡고 악수를 하며 '친구여! 내가 지갑을 가지고 나오지 아니하여 미안하오' 했습니다. 거지가 만면에 희색을 띠고 '감사합니다' 하였답니다. 세상의 무관심 속에서 심한 소외감에 젖어 있던 그 거지는 돈보다도 톨스토이의 다정한 악수가 더 고마웠던 것입니다. 현대인들은 서로의 무관심 속에서 모래알 같이 윤기없는 존재로 전락해 가고 있습니다. 그러나 예수께서는 '너희에게는 머리털까지 다 세신 바 되었나니 두려워 하지 말라' (마 10:30~31)하시어 하나님께서는 이렇게 우리들을 세밀하게 돌보시며 끝없이 관심을 기울이신다는 것을 강조하셨습니다. 여러분도 에수님의 마음을 본받아 서로 관심을 기울이고 표현하는 일에 더 적극적이 되어 하나님의 기쁨을 충만케하는 주인공이 되시기 바랍니다.

3. 다른 사람을 겸손히 섬기려는 마음(6)

에수님은 자기를 비우셨습니다. 순종하는 태도를 나타내셨습니다. 하나님의 목적을 성취하고자 했습니다. 이 모든 것은 겸손한 마음을 품었기에 가능한 것입니다. 예수님은 오히려 자기를 비어 종의 형체를 가져 사람들과 같이 되었습니다(빌2:7). 예수님은 인자가 온 것은 섬김을 받으려 함이 아니요, 오히려 섬기려 하고 자기 목숨을 많은 사람의 대속물로 주려함이라고 하였습니다(마20:28). 세상이 존경하고 사랑하는 이들은 남을 섬긴 사람들입니다. 집사의 직분 즉 섬기는 일들을 잘한 자들은 아름다운 지위를 얻습니다(딤전3:12). 인류역사상 가장 아름다운 지위는 섬기는 자가 얻은 것이요, 죽은 후에도 길이 존경하고 추앙하는 인물은 섬기며 산자들이었습니다. 보람은 남을 섬기는 희생의 대가로 얻어진 정신적 보상입니다. 그러므로 섬김으로 보람을 얻은 사람은 후회가 없습니다. 보람은 인격이 가산된 고귀한 가치요, 인내와 사랑과 희생을 치루고 얻은 결실입니다. 인간의 보람은 행복의 요소이며 이는 섬김으로만 얻는 비밀입니다.

아시시의 성자 프란시스가 구원받고 예수 믿은 후 얼마 되지 않아서 길을 지나다가 나환자를 만났습니다. 가서 기도해주고 싶은 충동이 있었는데 또 한편 마음속에서 '전염되면 어쩌나! 더러운 걸' 하고 그냥 지나갔습니다. 그런데 성령님이 계속 마음속에 부담을 주셨습니다. 그래서 기도를 시작했습니다. "주님, 제가 나환자를 그냥 지나친 것이 잘못된 것입니까?" 그러자 주님께서 "너 왜 그냥 지나갔느냐?" 고 물으셨습니다. 그는 솔직하게 "더럽게 느껴져서 그랬습니다"고 대답했습니다. 그때 프란시스는 이런 음성을 듣습니다. "너는 나환자보다 나으냐? 너는 그 나환자보다 더 더럽혀진 죄인이었어. 그런데 내가 너를 있는 모습 그대로 받아주고 사랑했단 말이지."
그 순간 자신의 모습을 그대로 받으신 주님의 사랑을 깨닫자마자 그는 발걸음을 돌이켜 쫓아가서 나환자의 손을 붙잡고 키스하고 그를 축복했습니다.
이때부터 프란시스의 기막힌 사랑의 순례가 시작되었던 것입니다. 그는 알베르나의 산록에서 마지막 숨을 거두던 그 순간, 있는 힘을 다해서 "나의 사랑, 나의 전부이신 예수여!"라는 고백을 드렸습니다. 그는 그리스도를 만났고, 평생 사랑할 주님을 만났으며, 그분의 사랑을 알았습니다. 넘치는 성령님의 사랑 속에 그리스도의 사랑에 취해서 드린 그의 마지막 고백은 그의 평생의 삶을 정리하는 결산이었습니다.

여러분 예수님이 종의 모습으로 오셔서 저와 여러분을 섬겨주셨다면 십자가에 죽기까지 희생적으로 섬기셨다는 사실이 감동적이지 않습니까? 우리가 사랑으로 다른 사람의 종이 되는 것이 자존심 상하는 일이 아닙니다. 섬길 수 있는 기회가 주어진 것을 영광으로 알아야 합니다. 겸손한 마음을 달라고 기도합시다. 그리스도를 섬기듯 지체들을 그리고 전도대상자들을 섬길 수 있는 끈기를 달라고 기도합시다. 무엇보다 우리안에 사랑으로 충만하게 해 달라고 간절히 기도합시다.

우리는 누가복음 15장에서 두 명의 탕자를 만나게 됩니다. 한 탕자는 아버지에게 불순종하고 멀리 떠나가 아버지의 재산을 낭비한 둘째 아들이고 또 다른 탕자는 아버지의 곁에서 지낸 큰 아들입니다. 왜 큰 아들이 탕자입니까? 큰 아들은 아버지의 마음을 이해하지 못했습니다. 아버지를 크게 섭섭하게 했습니다. 아버지는 동생이 돌아온 것으로 인해 크게 기뻐했으나 큰 아들의 마음은 못마땅했습니다. 아버지는 동생을 용서하고 영접했으나 큰 아들은 잘못한 동생을 용서하고 잔치를 베푸는 아버지가 야속하고 원망스러웠습니다. 아버지는 큰 아들에게 모든 것을 주었으나 큰 아들은 아무것도 갖지 못한 자처럼 불평하고 불공평하다고 화가 나 있었습니다. 아버지의 마음을 이해할 수 없었습니다. 아버지의 마음을 도저히 품을 수 없었습니다. 그 결과 형은 기쁨을 잃어버렸습니다. 축복을 누릴 수도 없었습니다. 아버지를 근심시켰습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은 '너희 안에 이 마음을 품으라 곧 그리스도 예수의 마음이니'라고 말씀하십니다. 예수님의 마음을 품고 사는 자가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수 있습니다. 자신도 기쁨이 충만하게 됩니다. 하나님은 약속하셨습니다. 하나님의 능하신 손아래서 겸손하라. 때가 되면 너희를 높이시리라. 스스로 높아지려 하지 말고 하나님이 높여주실 때까지 낮아져서 하나님의 손을 기다릴 수 있기를 축원합니다. (문기태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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