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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은혜 받은 후의 생활! (고전 14:26~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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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작하는 말

어떤 여집사가 은혜를 받고 집에 가니 남편이 술을 마시고 앉았는데 마귀같이 보이더라는 말을 했습니다. 그가 은혜를 못 받은 것은 아닙니다. 은혜를 받으면 그런 시험이 옵니다. 계속하여 기도하고 그 영혼을 불쌍히 여기는 마음을 가지고 보니 천사와 같이 보여 그 영혼을 위해 작정기도를 하여 구원했다는 간증을 들어 보았습니다.

오순절에 모인 무리들이 은혜를 받고 사도들에게 “형제들아 어찌할꼬?”(행2:37)라고 질문했습니다. 은혜를 받으면 어찌 할바를 모릅니다. 그때에는 성경적인 지도를 받아야 합니다.

그 때에 베드로가 “너희가 회개하고 각각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고 죄 사함을 얻으라 그리하면 성령을 선물로 받으리라”(행2:38)고 일러 주었습니다. 은혜받으면 지속적인 회개와, 연속적인 기도생활과, 충성스러운 봉사생활이 더욱 필요합니다.

고린도 교회가 큰 은혜를 받았습니다. 고린도 교회에 하나님의 은혜와 은사가 쏟아졌습니다. 은혜생활이 정돈이 되지 않았습니다. 사도 바울이 볼 때에 큰 걱정이 생겼습니다.

사도 바울은 “그런즉 형제들아 어찌할꼬?”라고 질문을 했습니다. 고린도 교회는 은혜 받고 매우 혼란스러웠습니다. 질문과 동시에 해답을 주었습니다.

1. 모든 것을 덕을 세우기 위하여 하라 !

사도 바울은 고린도 전서 14:26절에“그런즉 형제들아 어찌할꼬 너희가 모일 때에 각각 찬송시도 있으며 가르치는 말씀도 있으며 계시도 있으며 방언도 있으며 통역함도 있나니 모든 것을 덕을 세우기 위하여 하라”고 말했습니다.

찬송을 부를 때, 말씀을 가르칠 때, 계시를 받을 때, 방언을 할 때, 방언을 통역할 때 덕을 세울 것을 권면했습니다.

찬송하는 일은 교회가 존재하는 날까지 있습니다. 찬송 없는 교회는 있을 수 없습니다. 찬송은 곡조 있는 기도요, 하나님의 영광을 선포하는 신령한 노래입니다.

할 수 있으면 찬송의 곡대로, 즐겁고, 힘차게, 기도하는 마음으로, 하나님의 영광을 선포하는 모습으로 강하고 담대하게 불러야 합니다. 

한국 전쟁이 낳은 일화 중에 “노래하는 헌병”이 있습니다. 주인공은 미해병 제5연대 F중대의 “셜츠”하사입니다.

그는 수시로 찬송을 불렀습니다. 노래를 썩 잘 부르는 편은 아니었으나 그의 찬송을 듣는 군인들은 깊은 감명을 받았습니다.

어느 날 밤 개인참호에서 보초를 보다가 유격대의 습격을 받아 총을 맞았습니다. 갑자기 조용하던 밤이 사나운 총소리로 깨졌습니다. 그 한가운데에 조용한 찬송이 울려나오고 있었습니다.

셜츠 하사가 죽어가며 부르는 찬송은 135장“갈보리산 위에 십자가가 섰으니 주가 고난을 당한 표라...빛난 면류관 받기까지 험한 십가가 붙들겠네 !”였습니다.

놀라운 것은 침입했던 적군이 이 노래가 끝나기 전에 모두 도망쳤고 오히려 습격 받은 해병들은 용기백배하여 적을 물리쳤다는 것입니다.

5연대의 군목이 셜츠 하사를 회상하여 이렇게 말했습니다. “그의 찬송은 정말 신비한 힘이 있었다. 목청은 과히 좋지 않았으나 정성을 다해 간절히 부르는 그의 찬송을 들으며 무한한 용기와 위로를 받았었다.”라고 말했습니다.

오늘날 한국교회가 하나님을 노래하는 찬송을 가지고 지나치게 장난을 많이 합니다. 지나친 각색으로 찬송의  의미를 훼손하고 파괴합니다. 부르는 사람들이 제대로 소화를 못합니다. 듣는 자들이 은혜를 받을 리 없습니다.

복음송도 1회성으로 폐기처분 되는 것보다는 오래 오래 익혀서 부를 수 있는 좋은 노래가 필요합니다. 특히 예배시간에는 모든 이들이 부를 수 있는 익숙한 찬송이 필요합니다. 찬송에 은혜를 듬뿍 받아야 합니다.

찬양을 할 때도 그렇습니다. 찬양을 부르는 자신들이 은혜를 받지 못하고, 어떻게 듣는 이들에게 은혜를 끼칠 수 있습니까? 그러므로 신곡 같은 것은 몇 개월 연습이 반드시 필요합니다.

신곡을 더듬거리는 것보다는 구곡을 은혜스럽고, 덕스럽게 부르는 것을 교인들은 듣고 싶어 합니다. 찬양은 교인들 듣고 은혜받으라고 부르는 것이지, 예배중 하나의 순서로 부르는 자들도, 듣는 자들도 별 감동이 없다면 은혜를 받지도 못하고, 덕도 되지 않으리라 생각합니다.

가끔 보면은 성수주일 제대로 하지 않다가 어쩌다 교회나오면 서슴없이 찬양대석에 올라가는데 앞으로는 삼가는게 좋습니다. 찬양대는 가장 모범적인 교인들이 앉아야 할 자리입니다.

하나님의 특별계시와 계시의 말씀을 가르치는 일도 마찬가지입니다. 당시는 하나님의 계시가 완성되지 않았습니다. 하나님의 계시가 진행 중이었습니다. 고린도 교회에 하나님의 계시의 역사가 많았습니다.

고린도 교회 안에는 하나님의 계시도 있었고, 단순한 체험도 있었습니다. 단순한 체험을 하나님의 계시로 말하는 이들도 있었습니다. 지나고 보면은 주관적인 체험에 불과했습니다.  주관적인 체험을 하나님의 계시라고 말하여  교회에 덕이 되지 못하기도 했습니다.

지금은 계시 시대가 아닙니다. 계시 완성시대입니다. 하나님의 계시는 끝났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은 성경을 통하여 나에게, 우리에게 필요한 계시를 주십니다. 하나님이 성경을 제외하고 나에게 계시를 주시는 일은 절대 없습니다. 하나님이 지금도 직접 특별계시를 주신다면 하나님의 말씀 성경(Canon)이 무용지물이 됩니다.

가끔 우리는 “기도할 때 하나님이 나에게 이렇게 말씀하시더라”, “하나님이 나에게 이렇게 하라고 하시더라”, “하나님이 당신에게 이렇게 전해 주라고 나에게 말씀하시더라”는 말을 할 때가 있습니다. 신학을 몰라서 그런 말을 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앞으로는 그런 실수를 하지 말아야 합니다. 

우리는 절대 선지자가 아닙니다. 하나님의 계시를 직접 받는 자가 아닙니다. 우리는 선지, 사도들이 받은 계시를 전하고 가르치는 사명을 가지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계시의 말씀에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라고 전하고 가르쳐야 합니다.

방언과 방언을 통역 할 때도 마찬가지입니다. 성경에 나타난 방언은 두 가지가 있습니다. 오순절의 방언은 각 나라와 지방의 방언입니다. 사도들이 방언을 할 때 자기 나라의 말로 알아들었습니다.

고린도 교회의 방언은 세상나라의 방언이 아닌 하늘나라의 방언이었습니다. 천사들의 방언이었습니다. 천사들의 방언은 어느 누구도 알아들을 수 없습니다. 통역의 은사를 받은 자만이 알아들을 수 있습니다. 통역할 수 있습니다.

바울은 “만일 통역하는 자가 없거든 교회에서는 잠잠하고 자기와 및 하나님께 말할 것이요”(28)라고 말했습니다.

고린도 교회에서는 계시를 받은 자가 방언으로 말을 하면 통역사가 통역을 했습니다 . 통역사가 없으면 방언으로 하나님께 기도만 할 것이라는 것을 권면했습니다.

현실 교회는 주로 방언으로 하나님께 말씀드리는 기도로만 활용합니다. 하나님께 기도드리는 데만 활용하기 때문에 통역이 필요 없습니다. 방언하는 자기는 무슨 말인지 알고 있기 때문입니다. 방언기도는 내 속의 기도의 내용과 생각이 입에서는  방언으로 나오기 때문입니다.

사도 바울은 신령한 은사의 생활에 덕을 강조했습니다. 은사가 덕을 상실하면 하나님의 은사로서의 가치를 상실하기 때문입니다.

찬송을 부르고, 하나님의 계시의 말씀을 듣고,  세상 방언이든지, 천상 방언이든지 방언을 말하는 것은 하나님의 엄청난 은사입니다.

특히 방언은 기도하는데 가장 좋은 방편입니다. 이 모든 은사는 그것을 가지고 하나님께 영광을 돌려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좋은 은사를 받았으니 덕을 잃지 않고 잘 활용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2. 모든 것을 평화스럽고 화평하게 하라 !

사도 바울은 “하나님은 어지러움의 하나님이 아니시오 오직 화평의 하나님이시니라”(33)고 말했습니다.

하나님은 어지러움의 하나님이 아니십니다. “어지럽다.”는 말은 헬라어로 “불안정하다. 변덕스럽다. 무질서하다.”라는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셨을 때 “땅이 혼돈하고 공허하며 흑암이 깊음 위에 있고 하나님의 신은 수면에 운행하시니라”(창1:2)고 말했습니다.

혼돈과 공허, 그리고 무질서는 하나님이 원하시는 바가 아니었습니다. 하나님의 신이 말씀으로 역사하셔서 어지러운 우주를 평온스럽게 만드셨습니다.

에덴에 동산을 창설하시고 아담의 가정을 거기에 살도록 허락하셨습니다. 아담의 가정은 참으로 아름다운, 평온한, 평화스러운 가정이었습니다. 사탄의 화신인 뱀이 들어옴으로 에덴은 완전히 무질서해 졌습니다.

사탄은 변덕이 죽 끓듯 합니다. 변덕이 죽 끓듯 한다는 말은 믿을 수 없다는 말입니다. 어지럽다는 말입니다. 하와를 꾀일 때는 하나님처럼 만들어 줄듯 했습니다. 그러나 나중에는 자기 처신도 감당  못했습니다. 아담의 가정만 손해를 보았습니다.

사람들 중에는 혼자 똑똑한 척 하면서 변덕이 죽 끓듯 하는 자들이 있습니다. 이런 자들을 믿을 수도 없고 , 안 믿을 수도 없습니다. 믿으면 언젠가는 낭패를 보게 되고, 안 믿자니 그렇고 말입니다. 언제 변덕이 도질는지 모르기 때문입니다.

열 자녀를 둔 어머니가 열 명의 아들, 딸을 앉혀 놓고 훈계를 하고 있었습니다.

“죄를 지을 때는 나처럼 아무도 모르게 해라. 너희들 중에 한 명만 아버지 아들이고 나머지는 다 아버지 자녀가 아니야.”...

남편이 우연히 이 말을 들었습니다. 남편이 세상을 떠날 때 유서에는 이렇게 적혀 있었습니다. “열 명 중 유일한 내 아들에게 내 재산 모두를 준다.”라고...

모두들 어리둥절하여 랍비에게 가서 물었습니다. 랍비가 곰곰이 생각하더니 말했습니다. “아버지 무덤에 가서 누가 유일한 아들인지 알려 줄 때까지 울어라.”...

모두가 재산을 탐하여 울었습니다. 그런데 한 아들만 가지 않았습니다. “차라리 재산을 안 받는 것이 낫다. 한 아들만 진정한 아들이라고 아버지가 말한다면 아버지 얼굴에 먹칠하는 것이다.”...

나중에 랍비가 결론을 내렸습니다. “무덤에 가지 않은 아들이 진짜 아들이다.”...가짜 자녀들은 자기 입장만 생각했습니다. 진짜 아들은 아버지의 입장을 생각했습니다.

하나님은 화평의 하나님이십니다. 사도 바울은 “그러므로 우리가 믿음으로 의롭다 하심을 얻었은즉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으로 더불어 화평을 누리자”(롬5:1)라고 말했습니다.

사도 바울은 “이러므로 우리가 화평의 일과 서로 덕을 세우는 일을 힘쓰나니”(롬14:19)라고 말했습니다.

하나님과 화평을 누리는 것이 곧 사람과 평화롭게 지내는 것입니다.  은혜받으면 하나님의 입장, 남의 입장을 먼저 생각해야 한다는 말씀입니다.

야고보 선생은 “화평케 하는 자들은 화평으로 심어 의의 열매를 거두느니라 너희 중에 싸움이 어디로, 다툼이 어디로 좇아 나느뇨 너희 지체 중에서 싸우는 정욕으로 좇아 난 것이 아니냐”(약3:18-4:1)라고 말했습니다.

교회일은 화평과 평화를 우선적으로 해야 합니다. 예수님도 “화평케 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하나님의 아들이라 일컬음을 받을 것임이요”(마5:9)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 말씀을 역으로 생각하면 “불화케 하는 자는 복이 없나니 저희가 마귀의 자식이라 일컬음을 받을 것임이요”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성경은 언제나 순리와 역리로 응용이 됩니다.

3. 모든 것을 적당하고 질서대로 하라 !

사도 바울은 “모든 것을 적당하게 하고 질서대로 하라”(40)고 말했습니다.

모든 것을 적당하게 해야 합니다. “적당하게”라는 말은 헬라어“euschemonos”라는  말입니다.  이 말의 뜻은 “예절 있게, 타당하게, 은혜스럽게”라는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남을 사랑하고 아끼는 부자가 아들을 낳아 잔치를 하려고 했습니다. 잔치는 아들을 위한 것이 아니라 동네 사람들을 대접하고 싶었습니다.

큰 아들이 “아버지 우리는 가난한 자들을 사랑합니다. 이번 잔치에는 가난한 자들을 상석에 앉혀 보지요.”...

아버지가 “우리는 이번에 가난한 자, 부자를 다 초청한다. 가난한 자가 오는 것은 잘 먹으러 오는 것이다. 그들은 골방에 자리를 마련하여 눈치 보지 말고 마음껏 먹게 하라. 부자가 오는 것은 대우 받으러 오는 것이다.  보이는 자리에 상석을 마련하여라. 그래서 돌아 갈 때는 둘 다 만족하게 하여라.”고 했다고 합니다. 모두에게 적당하게 대접했다는 이야기입니다. 

하나님의 일은 타당성이 있어야 하고, 일하는 태도가 예의가 있어야 합니다. 예절 바르게 행동해야 합니다. 은혜스러워야 합니다. 아무리 옳고, 바르다 할지라도 예의를 벗어나거나, 거친 행동은 하나님의 교회 정서와는 맞지 않습니다. 교인들의 정서와도 맞지 않습니다.

은혜 받은 후에는 신사와 숙녀를 벗어나서 성남 성녀다워야 합니다. 깨끗한 비둘기같이 행동해야 하며, 순한 양같은 행동을 해야 합니다.

모든 것을 질서 있게 해야 합니다. 행동이나, 생활이 짜임새가 있어야 한다는 말입니다. 그림이나, 사진은 구도(frame)가 굉장히 중요합니다. 모든 물건은 진열(setting)이 잘 되어 있어야 합니다.

교회생활도 질서가 있어야 합니다. 교회도 Setting이 잘 돼 있어야 합니다. 모든 직분 자들은 자기 위치를 잘 지켜야 합니다.

유다서 1:6절에 “또 자기 지위를 지키지 아니하고 자기 처소를 떠난 천사들을 큰 날의 심판까지 영원한 결박으로 흑암에 가두셨으며”라고 말했습니다.

교회는 각자의 위치와 자리가 있습니다. 자기 위치를 떠나면 혼란이 옵니다. 자리를 지키지 않으면 나중에 내 자리가 없어집니다. 위치와 자리를 지켜 가면서 봉사하고, 충성할 때 은혜스러운 봉사와 충성이 됩니다. 

끝맺는 말

은혜 받은 후의 생활은 더욱 조심하지 않으면 안 됩니다. 사탄이 더욱 역사하기 때문입니다. 성령도 강하게 역사하시기 때문입니다.

바울 사도의 이 서신은 고린도 교회를 은혜스러운 교회로 탈바꿈했습니다
(신삼철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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