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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금식의 원리 II (사 58:1~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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크게 외치라. 아끼지 말라. 네 목소리를 나팔같이 날려 내 백성에게 그 허물을, 야곱 집에 그 죄를 고하라.... 나의 기뻐하는 금식은 흉악의 결박을 풀어 주며 멍에의 줄을 끌러주며 압제 당하는 자를 자유케 하며 모든 멍에를 꺾는 것이 아니겠느냐. 또 주린 자에게 네 식물을 나눠주며 유리하는 빈민을 네 집에 들이며 벗은 자를 보면 입히며 또 네 골육을 피하여 스스로 숨지 아니하는 것이 아니겠느냐. 그리하면 네 빛이 아침 같이 비췰 것이며 네 치료가 급속할 것이며 네 의가 네 앞에 행하고 여호와의 영광이 네 뒤에 호위하리니 네가 부를 때에는 나 여호와가 응답하겠고 네가 부르짖을 때에는 말하기를 내가 여기 있다 하리라. 만일 네가 너희 중에서 멍에와 손가락질과 허망한 말을 제하여 버리고 주린 자에게 네 심정을 동하며 괴로워하는 자의 마음을 만족케 하면 네 빛이 흑암 중에서 발하여 네 어두움이 낮과 같이 될 것이며 나 여호와가 너를 항상 인도하여 마른 곳에서도 네 영혼을 만족케 하며 네 뼈를 견고케 하리니 너는 물 댄 동산 같겠고 물이 끊어지지 아니하는 샘 같을 것이라. 이사야 58:1-12

  사순절을 지내면서 우리는 우리를 위하여 고난 받으시고 십자가에 달리신 하나님의 어린 양, 그분을 묵상하며 40일 연속금식을 하고 있습니다. 교회에서 금식에 대해 설교할 시간이 별로 많지 않았는데 이번 기회에 금식의 원리에 대해 좀 더 생각해 보는 것이 유익할 것 같습니다.

  첫째로, 금식은 언제나 유익합니다. 금식을 해서 해가 되는 법이 없습니다. 금식을 적절히 하면 몸이 건강해지고 마음이 바르게 되고 영혼이 경건해지면서 삶에 많은 유익이 있습니다. 소돔과 고모라가 타락해서 먹고 마실 때 아브라함은 소돔과 고모라를 위해 금식하며 기도했습니다. 그 결과가 가문의 축복으로 나타났습니다. 롯이 살아난 것입니다. 롯과 그 가족이 아브라함의 금식과 기도 덕을 본 것입니다.

  역대하 20장 3절 이하를 보면 이스라엘 민족이 타락하여 외국의 침공을 받고 전멸될 위기를 맞자 유다 왕 여호사밧이 온 국민에게 금식을 선포하고 하나님 앞에 겸손하게 엎드려 도움을 구했을 때 구원의 손길을 체험하였습니다.

  에스라 8장 22절 이하에서 에스라는 “우리 하나님의 손은 자기를 찾는 모든 자에게 선을 베푸시고 자기를 배반하는 모든 자에게는 권능과 진노를 베푸신다”고 하면서 금식을 선포했습니다. 이에 하나님의 손이 그의 일행을 도우사 대적과 길에 매복한 자들의 손에서 건져주셨습니다.

  사도 요한도 밧모 섬에 귀양 가서 금식을 했습니다. 그 동안에 하나님께서 그에게 종말의 역사를 환상으로 보여주셨습니다. 그래서 오늘 우리가 그 계시를 읽을 수 있게 된 것입니다. 종말에 우리가 어떻게 될 것인가는 이제 믿는 사람들에게는 숨겨진 비밀이 아니요, 열린 비밀이 됐습니다. 이렇게 금식은 우리에게 많은 유익을 가져다줍니다.

  둘째로,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금식과 싫어하시는 금식이 있습니다. 어떤 금식은 하나님께서 싫어하셔서 기뻐 받지 않으십니다. 하나님께서는 “그런 금식은 내가 받을 수 없다. 아무 유익이 없다. 그런 금식은 하지 말라”고 하십니다. 외형적 종교행위만 있고 그 속에 경건한 삶이 빠진 금식입니다. 매일 하나님을 부르며 찾아도 단순한 종교적 행위에 지나지 않는다면 하나님은 쳐다보지도 않으십니다. “그들이 날마다 나를 찾아 나의 길 알기를 즐거워함이 마치 의를 행하여 그 하나님의 규례를 폐하지 아니하는 나라 같아서 의로운 판단을 내게 구하며 하나님과 가까이 하기를 즐겨하며...”(2절). 이 말은 겉으로만 그렇게 보인다는 것입니다. 그들은 모든 종교적인 행위를 다 했습니다. 정기적으로 기도하고 성경 읽고 예배드리고 십일조 드리고 금식기도를 합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는 인정해 주시지 않습니다. “우리가 금식하되 주께서 보지 아니하심은 어찜이오며 우리가 마음을 괴롭게 하되 주께서 알아주지 아니하심은 어찜이니이까?”(3절). 활발한 종교생활을 열심히 하는데 하나님께서는 본 척도 안하시고 “난 너희들이 하는 금식은 필요 없다” 하십니다.

  우리 민족은 유난히 종교심이 많습니다. 우리 역사를 살펴보면 천년간 불교가 왕성했고 그 후 500년간은 유교가 왕성했습니다. 그리고 기독교가 들어왔습니다. 온 국민이 얼마나 종교심이 많은가 하면, 한국의 종교인 수를 다 합한 것이 총 인구 수보다도 많다는 통계가 나왔습니다. 이 절 저 절에 등록하거나, 서너 교회에 등록해놓고 주일아침에는 이 교회, 저녁에는 저 교회, 수요일에는 다른 교회, 금요철야는 또 다른 교회에 가기 때문입니다. 그만큼 우리 국민은 종교생활이 왕성합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그런 종교적인 모습, 종교적인 활동, 종교적인 의식, 그거 중요하지 않다!”고 하십니다. “식상하다. 너희 재물 바치는 거 그거 도무지 재미없다.” 하나님은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금식을 하며 하나님을 찾으나 하나님께서 쳐다보지도, 알아주지도 않으시는 그런 종류의 금식이 있다는 것입니다.

  그 이유가 무엇입니까? 악이 많기 때문입니다. 종교의식 속에 경건한 삶이 빠졌기 때문입니다. 금식을 하면서도 제멋대로 사는 이 위선을 하나님은 싫어하십니다. “보라 너희가 금식하면서 다투며 싸우며 악한 주먹으로 치는도다!”(4절). ‘금식을 하면 뭐하냐? 그런 금식은 다 쓸데없다. 보라. 좀 돌이켜 보라. 네 자신을 살펴보라’는 것입니다. 신앙생활과 금식은 있는데 경건한 삶은 빠져있으니 돌이켜 보라는 것입니다. 그런 상태로 금식기도를 할 때 하나님께서 들어주시고 만나주시고 은혜를 주시겠느냐는 것입니다. “이것이 어찌 나의 기뻐하는 금식이 되겠으며 이것이 어찌 사람이 그 마음을 괴롭게 하는 날이 되겠느냐. 그 머리를 갈대 같이 숙이고 굵은 베와 재를 펴는 것을 어찌 금식이라 하겠으며 여호와께 열납될 날이라 하겠느냐!”(5절). ‘껍데기만 있고 알맹이가 빠진 금식, 경건한 삶이 빠진 금식을 어디에 쓰겠냐? 이런 것이 어찌 하나님 앞에 받아지겠느냐? 생각해 보라’고 하십니다. 여기에서 “보라”는 말이 두 번이나 나옵니다. 보라, 돌이켜 보라, 검토해보라, 내 삶을 한 번 들여다보라는 것입니다. 나의 신앙은 말뿐이고 겉모습뿐인지, 아니면 내 삶 속에서 실질적으로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일을 하고 사는지 돌이켜보라는 것입니다.

  그러면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금식은 무엇입니까? 사회적 정의와 사랑의 돌봄이 있는 금식, 서로를 향해 입을 깨끗이 해서 비방과 중상모략을 중지하는 금식입니다. “나의 기뻐하는 금식은 흉악의 결박을 풀어 주며 멍에의 줄을 끌러주며 압제 당하는 자를 자유케 하며 모든 멍에를 꺾는 것이 아니겠느냐. 또 주린 자에게 네 식물을 나눠 주며 유리하는 빈민을 네 집에 들이며 벗은 자를 보면 입히며 또 네 골육을 피하여 스스로 숨지 아니하는 것이 아니겠느냐.”(6-7절). 하나님께서 금식을 재평가하신 것입니다. 다른 사람들에게 무거운 멍에를 씌워 어렵게 만들고 마음에 상처를 주며 사는 사람들의 금식은 받지 않겠다고 하십니다. 오늘 아침 2부 예배 후 어느 분이 다가오셔서 “목사님, 저를 위해서 기도해 주십시오.” “무엇을 위해 기도해 드릴까요?” “제가 너무나 많은 상처를 받아서 도저히 감당할 수가 없습니다.” 자세한 이야기는 하지 않았으나 누군가가 그에게 상처를 준 것입니다. 내 입술과 행동으로 다른 사람들에게 상처를 주고 무거운 짐을 지우고 힘들게 하고 괴롭히면서 하는 금식과 기도는 도무지 쓸 데가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좋아하시는 금식은 흉악의 결박을 풀어주고 멍에의 줄을 끌러주고 압제 당하는 자를 자유롭게 해주고 모든 멍에를 꺾는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또한 주린 자에게 먹을 것을 주고 갈 곳 없는 자에게 잠자리를 주고 헐벗은 자에게 옷을 주고 내 혈육에게서 등을 돌리지 않는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우리는 사순절 연속 금식기도를 하면서 할 수 있는 대로 선을 베풀기 원합니다. 내 따뜻한 사랑의 손길과 미소가 필요한 사람들, 나의 중보기도가 필요한 사람들에게 작은 선이라도 베풉시다. 지난주일 우리 교회 두 가정이 필요한 사람들에게 나눠주라고 쌀 114포대를 가져와서 참 감사했습니다. 나눔위원회는 이번에는 이 쌀을 성남시에서 필요한 사람들에게 나눠주자고 결정하고 성남시청을 찾아갔습니다. 성남시는 며칠 내로 쌀이 필요한 주민의 명단을 만들어 주겠다고 했습니다. 얼마나 좋습니까!

  금식을 하되 헐벗은 자에게 입을 것을 주고 굶주린 자에게 먹을 것을 주고 방황하는 자를 따뜻하게 맞아줄 줄 아는 금식이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금식입니다. 하나님과 이웃을 사랑하고 내 삶이 복의 근원과 채널이 되면서 하는 금식은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금식입니다. 선행이 포함된 신앙생활을 하나님이 기뻐하십니다. 여러분과 제가 하나님의 은총 가운데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금식과 신앙생활을 하기를 바랍니다. 그러면 두 가지 큰 결과가 나타납니다.

  그러면 먼저 나 자신에게 축복이 임합니다. 어떤 축복입니까? “그리하면 네 빛이 아침 같이 비췰 것이라”(8절). “그리하면”이란 결과를 말합니다. 우리 믿는 사람들은 빛과 소금이 되자고 하지요? 신앙의 형태와 사랑의 실천이 함께 갈 때 가능합니다. 또한 “네 치료가 급속할 것이라”(8절). 이런 사람들은 “주여, 나의 육체의 연약함을 고쳐 주시옵소서.” 기도하면 금방 치유해주신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신앙생활과 금식을 하면 몸에 질병이 와도 우리의 기도에 빨리 응답하시는 하나님으로 인해 건강을 회복할 수 있습니다. “네 의가 네 앞에 행하고 여호와의 영광이 네 뒤에 호위하리라”(8절). 하나님께서 나를 둘러싸셔서 나의 모습을 영광스럽게 드러내주신다는 것입니다.

  “너희는 세상의 빛이라. 산 위에 있는 동네가 숨기우지 못할 것이요”(마5:14). 우리가 예수 믿는 것을 다 알고 있습니다. 내 가족은 물론 동네, 직장, 동창회에서도 다 알고 있는데 막상 나는 예수 믿는 사람처럼 보이지 않고 행동하지 않고 있다면, 하나님께서 기뻐하시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베푸는 삶과 함께 신앙생활을 하십시오. 그것을 하나님께서 기뻐하십니다. 이 아침에 하나님께서 이 말씀으로 우리에게 도전하십니다.

  “네가 부를 때에는 나 여호와가 응답하리라”(9절). 내가 “오! 하나님!” 하고 부르면 “무슨 일이냐?” 하고 바로 응답하시겠다는 겁니다. “네가 부르짖을 때에는 말하기를 내가 여기 있다 하리라”(9절). 우리의 부르짖음에 바로 나타나시겠다고 합니다. 하나님께서 여러분을 만나주시고 여러분의 간구와 기도에 응답하시고 여러분의 삶에 은총을 베풀어 주시겠다고 말씀하십니다.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금식,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신앙생활을 함으로써 우리 모두에게 주의 은총이 풍성히 나타나기를 원합니다.

  “너희 중에서 멍에와 손가락질과 허망한 말을 제하여 버리라”(9절). 허망한 말, 쓸데없는 말, 상처와 해를 끼치는 말을 버리고 입술을 깨끗이 해야 그 입술로 하는 기도에 응답해 주시겠다는 것입니다. 더러운 입술로 기도하는 것은 하나님께서 듣지 않으신다고 하십니다. 깨끗한 입술로 기도드릴 때 “네 빛이 흑암 중에서 발하여 네 어두움이 낮과 같이 될 것이며 나 여호와가 너를 항상 인도하여 마른 곳에서도 네 영혼을 만족케 하며 네 뼈를 견고케 하리라”(10-11절).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우리의 모습, 내 마음과 내 손발이 하나님을 사랑하고, 어렵고 힘든 사람들에게 무거운 짐들을 덜어주며 이웃에게 축복이 되는 삶을 살면 하나님께서 우리를 항상 인도해 주십니다.

  그 다음 구절은 제가 참 좋아하는 표현입니다. “너는 물 댄 동산 같겠고 물이 끊어지지 아니하는 샘 같을 것이라”(11절). 동산에 물이 풍성해서 파란 초목과 꽃들이 만발하고 산천초목이 풍성하고 아름다운 물댄 동산과 같은 인생이 될 것이라는 말씀입니다. "하나님이여, 사순절 중에 우리가 금식하며 기도하는 가운데 우리 영혼과 삶을 살피게 하셔서 우리의 인생이 물댄 동산 같게 해 주옵소서." 여러분 모두가 보기만 해도 창창하고 아름답고 나무에 열매가 많은 물댄 동산 같은 인생이 되길 원합니다.

  그러면 내 후손에게도 축복이 임합니다. 경건한 삶과 경건한 모습이 함께 있는 사람, 속과 겉이 동일한 사람, 말과 행실이 같은 사람, 하나님과 이웃을 사랑하며 베푸는 사람들의 후손이 받을 축복을 봅시다. “네게서 날 자들이”(12절). 우리의 대대손손 후손들을 말합니다. “황폐된 곳들을 다시 세울 것이라.” 다른 사람들이 황폐하게 만들어 놓은 것을 하나님의 축복을 받은 우리 후손들이 일어나서 세운다는 것입니다. 우리의 후손은 망가뜨리는 사람들이 아니라 세우는 사람들이 될 것입니다. “너는 역대의 파괴된 기초를 쌓으리니 너를 일컬어 무너진 데를 수보하는 자라 할 것이라”(12절). 나는 비록 죄로 인하여 가정을 파괴하고 직장을 파괴하고 사회를 파괴하고 인간을 파괴하며 살았지만 후손들은 파괴된 기초를 쌓아 올리는 자들이 된다는 것입니다. 우리 주위에는 죄로 인해 무너진 곳이 얼마나 많습니까! 도덕적, 경제적, 사회적, 인간적, 성격적으로 무너진 곳들이 참 많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금식을 하는 사람들은 그 무너진 데를 보수하는 자가 된다고 하십니다. 또한 “길을 수축하여 거할 곳이 되게 하는 자라 하리라”(12절) 하셨습니다. 그저 말라붙고 아무것도 없는 길도 사람이 사는 곳으로 만든다는 것입니다. 사회를 변화시키고 가정을 복되게 하고 가문을 번창시키고 교회에 축복이 되는 종류의 사람들이 될 수가 있다는 것입니다. 아! 하나님의 축복입니다.

  하나님께서 싫어하시는 금식이 있습니다. 형식만 있을 뿐 알맹이가 빠진 금식입니다.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금식이 있습니다. 어려운 사람들을 돕고 힘들어하는 사람들을 격려하고 쓰러진 사람들을 일으키고 무너진 곳을 수리해 주며 경건한 신앙과 경건한 삶이 함께 하는 사람들의 금식입니다.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금식을 함으로써 우리 자신은 물론 우리 후손들에게 하나님의 축복이 나타나기를 간절히 소망합니다. 
(김상복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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