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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존귀한 일군이 됩시다 (빌 2:25-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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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9절에 “너희가 주안에서 모든 기쁨으로 저를 영접하고 또 이와 같은 자들을 존귀히 여기라” 한 말씀이 있습니다. 여기 교회 중에서 존귀히 여겨야 할 사람이 나옵니다. 그 이름은 에바브로디도라는 사람입니다. 이젠 이 “에바브로디도”라는 이름 대신 우리 자신의 이름이 들어가야 할 차례인 줄 믿습니다. 그래서 교회에서 보배와 같은 성도가 되어야 합니다. 그럼 에바브로디도는 어떤 사람이기에 하나님과 사람 앞에서 존귀히 여김을 받게 되었을까요?

본문을 통해서 몇 가지로 살펴보고자 합니다.

1. 하나님의 일에 함께 할 줄 아는 사람이었기 때문입니다.

바울은 25절에 에바브로디도를 가리켜 “그는 나의 형제요 함께 수고하고 함께 군사된 자요. 너희 사자로 나의 쓸 것을 돕는 자라”(25절) 고 했습니다.
에바브로디도는 사도 바울과 함께 하고 빌립보 교회와 함께 하며 그리스도를 위한 모든 일에 함께 하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바울이 로마의 옥에 갇혔을 때나, 빌립보 교인들의 정성어린 헌금을 전하는 일에나(빌4:18), 빌립보 교인들을 대표해서 옥중에 있는 바울을 돕는 일에도 고난을 함께 자청했습니다. 이렇게 하나님의 일에 기도로 물질로 마음으로 적극적으로 후원하는 사람은 참으로 존귀한 사람입니다.

어떤 사람이 강철왕 ‘엔드류 카아네기’의 강연회 중 그에게 “만약 당신의 왕국을 잃어버린다면 어떻게 하겠느냐?”고 물었습니다. 그 때 그는 회중을 향해서 “여러분, 당신들은 내 건물을 취할 수 있고 내 공장들을 불사를 수도 있습니다. 그리고 내 재산도 빼앗아 갈 수 있습니다. 그러나 나에게 나의 중요한 참모들을 남겨준다면 잃어버린 왕국을 재건하겠습니다.” 고 대답했습니다. 이것은 함께 하는 일군이 얼마나 중요한 것인가를 단적으로 증명해 주는 말입니다. 우리들도 예수님의 그런 참모진이 될 수 있습니다. 우리가 하지 않으면 누가 하든지 하나님의 일을 합니다. 그러나 분명히 알 것은 하나님 나라의 상은 빼앗깁니다.

좀 극단적인 경우이지만 그러나 큰일을 하다보면 별 사람이 다 생겨납니다. 그 때 그런 사람에게 이 말씀을 하고 싶습니다. 먼저 마음을 주세요. 그러나 마음을 주기 싫다면 하나님의 일에 가만히 만이라도 있어주세요. 물질로 후원해 주세요. 그러나 드릴 마음이 없다면 헌금 안 해도 좋습니다. 가만히만 있어 주세요. 그 다음은 기도해 주세요. 그러나 싫다면 안 해주어도 좋아요. 그러나 부탁드리는데 하나님의 일에 방해하지 말고 가만히만 있어 달라고 하는 것입니다. 이런 사람에게는 가만히만 있는 것이 돕는 것입니다.

왜 그럴까요? 믿음도 꿈도 없는 사람은 하나님의 일에 도움이 될 수 없기 때문입니다. 또 왜 그럴까요? 미래를 내다보고 하는 하나님의 일은 언제나 무리하게만 보이고 헛되게만 보이고 이해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지나놓고 발등을 찍으며 후회하는 때가 얼마나 많습니까? 바울이 그랬습니다. 바울이 로마 옥에 잡혀가면서까지 전도할 때 많은 사람들은 바울에게서 돌아섰습니다. 그들은 바울의 그 전도가 장차 로마복음화의 기폭제가 될 줄은 아무도 몰랐습니다.

그러므로 가장 힘든 것이 교인들 설복시켜 일하는 것입니다. 특히 장로교는 안정적인 일은 좋지만 꿈의 목회는 아주 힘든 구조입니다. 꿈 있는 사람이 꿈 없는 사람과 같이 사는 고통을 아십니까? 그것은 인생이 아깝고 가슴이 터질 만큼 답답해지고 영혼이 그만 질식사해 죽을 것만 같습니다. 하나님께서 율법에 소와 나귀를 한 멍에로 겨리하여 갈지 말라고 한 말씀도 그 때문입니다. 얼마나 고통스럽겠습니까? 특히 하나님의 비전을 받는 사람은 이해하지 못하는 사람과 하나님 사이에서 그 심정은 쓸개가 녹고 간이 녹고 장이 녹는 고통인 것입니다. 그래서 선지자들이 눈물을 흘렸습니다. 핍박을 받았습니다. 박해를 받았습니다. 내어침과 쫓김을 받았습니다. 그러나 에바브로디도는 주의 일에 함께해 주는 사람이었기에 보배 중의 보배였습니다. 이런 사람이 몇 사람만 되어도 교회가 하지 못할 일이 아무 것도 없습니다.

2. 에바브로디도는 사랑의 사람이었습니다.

26-27절에 “그가 너희 무리를 간절히 사모하고 자기 병든 것을 너희가 들은 줄을 알고 심히 근심한지라 저가 병들어 죽게 되었으나 하나님이 저를 긍휼히 여기셨고 저뿐 아니라 또 나를 긍휼히 여기사 내 근심 위에 근심을 면하게 하셨느니라” 했습니다.

에바브로디도가 얼마나 사랑했으면 자기도 병들어 죽을 뻔했을까요? 로마의 감옥에 있는 바울을 찾아서 돕다가 병이 들어 거의 죽게 되었습니다. 이 소식으로 빌립보 교인들이 크게 근심할 때 하나님께서 긍휼히 여기셔서 에바브로디도를 다시 살려 주셨습니다. 바울은 그를 급히 빌립보에 돌려보냄으로 빌립보 교인들의 근심을 덜어주고 기쁨을 나누도록 했습니다. 이렇게 에바브로디도는 사랑의 사람으로 살았습니다. 그래서 그는 빌립보 교회에 큰 기쁨이었습니다.

어떤 사람이 하나님과 인터뷰하는 꿈을 꾸었습니다. 하나님이 물으셨습니다. “그래 내게 뭘 묻고 싶니?” “예 하나님은 우리 아버지로서 자녀들이 삶에서 어떤 교훈들을 배우기 원하시나요?” 하나님께서 대답하셨습니다. “먼저 사랑해야 하지만 혹 억지로 사랑할 수는 없을지라도 베푸는 사랑만은 받아드릴 줄 알아야지.” “다음은 자신을 남들과 비교하는 것은 좋지 않아. 모두 각자가 타인과 비교할 수 없는 귀한 창조물이니까” “다음은 용서할 줄도 알아야지.” “다음은 사랑하는 사람에게 상처를 주는 데는 몇 초밖에 걸리지 않지만 치유하는 데는 여러 해가 걸릴 수 있음도 알아야 해.” “그리고 진정한 부자란 많이 가진 사람이 아니라 필요한 것이 가장 적은 사람이란다.” 그렇지요. 돈은 벌었는데 병들어 혹은 사고 나서 혹은 무슨 일로 돈 들어가면 어찌 부자라고 하겠어요? 그러나 약을 사먹으려고 해도 건강해서 약 사먹을 돈이 필요 없을 정도로 돈 쓸 일이 없으면 그 사람은 부자입니다. “그리고 너를 매우 사랑하지만 그 감정을 표현할 줄 모르는 사람들이 있음도 알아야지.” “그리고 두 사람이 똑같은 것을 보면서도 다르게 볼 수 있음도 알아야 해.” “그리고 서로 용서해야 하지만 자기 자신도 용서해야 한단다.” 이런 인터뷰 꿈 이야기입니다. 이 인터뷰를 한 마디로 말하면 하나님 아버지의 마음이니 사랑 아니겠어요? 사랑이면 다 됩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일군으로서 하나님의 일을 어떻게 하는지 알아야 합니다. 살전1:3에 “믿음의 역사”라고 했습니다. 그런데 좀 더 알아야 합니다. 갈5:6에 “사랑으로 역사하는 믿음뿐이니라” 하신 말씀입니다. 모든 것 위에 사랑을 더해야 합니다. 교회 부흥도 에베소 교회에 주신 말씀을 뒤집어보면 그 방법을 알 수 있습니다. 사랑하면 부흥 됩니다. 교회 개척도 어렵다고 하지만 사랑하면 성공합니다. 선교사역도 어렵지만 역시 사랑하면 성공합니다. 사랑하면 누구든지 우리를 돕고 싶어 합니다. 철광석보다 더 완악한 마음도 사랑하면 협력자가 됩니다. 사랑의 은사만 있으면 못할 일이 없습니다. 그래서 말세에 성도들이 무장해야 할 비장의 무기가 바로 사랑입니다.

우리가 바른말도 해야 하나 사랑이 더 앞서야 합니다. 지난 한일월드컵 때 붉은악마 응원단이 생겨났습니다. 이름만 붉은악마이지 얼마나 질서 있고 국위를 선양하고 착합니까? 돈을 준다고 누가 그런 일을 하겠습니까? 그런데 우리 기독교를 대표하는 중요기관에서 이름 바꾸라고 성명을 발표하고 하얀 천사응원단을 만들어 비교하고 이것은 성숙한 자세가 아닙니다. 그래 가지고 얼마나 축구를 좋아하는 젊은이들이 교회와 돌아섰습니까? 우리는 그 이름은 좋아하지 않지만 ‘그래 이름은 맘에 안 든다만 마음만은 천사여라. 수고 한다. 잘한다. 훌륭하다. 대한의 아들딸답다. 돕지 못해 미안하다. 우리 청년들 화이팅!!’ 하면서 격려해 주고 빵이라도 갖다 주며 다독거려 주었다면 그들이 반감을 갖지 않고 기독교로 개종하고 혹 이름까지 바꾸었을지도 몰라요. 제가 말씀드리는 요지는 사랑하자는 말입니다. 이처럼 에바브로디도도 바나바도 사랑했기에 존귀한 사람입니다.

3. 그는 또한 수고하는 사람이었습니다.

25절에 “함께 수고하고” 그랬습니다. 에바브로디도는 바울의 동역자로서 복음사역에 수고를 아끼지 않았습니다. 수고 없는 결과란 없습니다. 우리가 맛있게 먹은 음식도 우리 성도들의 사랑의 수고 덕분 아닙니까? 그래서 한문에 문화(文化)가 무엇입니까? 한문으로 본다면 글월 文 즉 이론이 노동을 통해서 실제화 될 때 그것이 문화입니다. 수고 없이 되지 않는다는 말입니다.

어느 학교에 여 음악교사가 부임했습니다. 그 교사는 부임하자 말자 관악부를 조직했습니다. 제가 뺀드부를 했기에 알지만 관악대가 제 소리만 내려고 해도 1-2년은 필요합니다. 1년 불어도 나팔이 코 먹은 소리가 나오고 쉽지 않습니다. 그래서 후배들은 화음만 넣는다든지 나팔에 입만 대고 있기 일쑤입니다. 그런데 그런 일에 문외한이던 교장 선생님은 피리 부는 것인 줄 알고 일방적으로 첫 연주회를 결정해 버렸습니다. 모두 당황했지만 열심히 준비해서 연주회가 시작되는 날이 되었습니다. 연주회가 시작되기 전 교사는 긴장하는 학생들에게 “만약 자신이 없는 사람은 연주를 하는 척만 하라”고 했습니다. 그런데 여교사가 지휘봉을 힘 있게 흔들었을 때 놀랍게도 아무 소리도 나지 않는 것이었습니다. 모두들 척만 했을 뿐 소리를 내지 않았던 것입니다. 이런 척하는 사람은 수백 명이 있어도 어떤 화음도 만들 수 없습니다.

바울의 선교가 어떻게 위대할 수 있었습니까? 아무도 척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바울을 따라가 옥살이를 자처하며 병들어 죽기까지 수고를 아끼지 아니한 에바브로디도가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30절에 “저가 그리스도의 일을 위하여 죽기에 이르러도 자기 목숨을 돌아보지 아니하였다”(30절)고 했습니다. 빌립보 교회 역시 주의 일에 여러 면에서 협력하며 고난을 함께 나누었습니다.

예수 믿고 은혜를 받으면 세 가지 ‘뻐’ 자가 들어가는 삶을 경험한다고 합니다. “기뻐지고, 예뻐지고, 바뻐진다.”는 것입니다. 척만 하는 사람은 기쁨이 없습니다. 주의 참 평안을 누리지 못합니다. 척만 하는 신자는 예뻐지지 않습니다. 척만 하는 신자는 바빠지지 않습니다. 교회에도 수고하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구경꾼도 있습니다. 구경만 하면 좋은데 훼방까지 놓습니다. 그러나 척조차 못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수고하는 사람이 존귀합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예수님은 서머나 교회에 “죽도록 충성하라 그리하면 내가 생명의 면류관을 네게 주리라”(계 2:10) 하셨습니다. 우리 모두 하나님의 일에 함께 하며 사랑하며 수고하는 일군이 되십시다. 그래서 에바브로디도와 같이 하나님과 교회로부터 존귀히 여김을 받아 하늘의 상으로 넘치는 성도들이 다 되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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