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그인

  • 목록
  • 아래로
  • 위로
  • 쓰기
  • 검색

설교 코드(code)를 맞춥시다 (시 119:17-24)

  • 잡초 잡초
  • 257
  • 0

첨부 1


“주의 종을 후대하여 살게 하소서. 그리하시면 주의 말씀을 지키리이다. 내 눈을 열어서 주의 율법에서 놀라운 것을 보게 하소서. 나는 땅에서 나그네가 되었사오니 주의 계명들을 내게 숨기지 마소서. 주의 규례들을 항상 사모함으로 내 마음이 상하나이다. 교만하여 저주를 받으며, 주의 계명들에서 떠나는 자들을 주께서 꾸짖으셨나이다. 내가 주의 교훈들을 지켰사오니 비방과 멸시를 내게서 떠나게 하소서. 고관들도 앉아서 나를 비방하였사오나 주의 종은 주의 율례들을 작은 소리로 읊조렸나이다. 주의 증거들은 나의 즐거움이요. 나의 충고자니이다.”

본문 17절에서 "주의 종을 후대하여 살게 하소서."에서 특별한 단어 "후대하여(* , 게몰)"라는 이 동사는 '어떤 상대에게 선이나 악을 행하는 것을, 혹은 상을 주거나 벌을 내리는 것을 가리킬 때 사용됩니다.' 여기서는 시편 기자가 하나님께서 은총을 베풀어 달라는 의미로 사용하고 있습니다(13:6; 116: ; 142:7). 그러나 시편 저자가 자신의 어떤 공로에 근거하여 그 같은 요구나 주장을 하지는 않습니다. 시편기자는 단지 하나님께서 은총을 내리시고, 그분과의 교제가 계속될 때 그리고 시시 때때로 그분이 간섭하실 때 땅 위에서 복된 삶을 영위할 수 있다는 것이 저자의 믿음이며, 저는 이것을 '하나님과 우리 성도들이 사랑의 코드를 맞추는 행위'로 표현하여 오늘 본문을 중심으로 "코드(code)를 맞춥시다."라는 주제로 말씀을 증거하려고 합니다.

듣는 귀와 보는 눈은 참으로 중요합니다. 잠시 동안만 눈을 가리고, 귀를 가려 보십시오. 얼마나 답답합니까? 월드비전 영등포지회에서 1년 전에 '서남아 지역주민을 위한 지진과 해일로 피해를 입은 분들을 돕기 위한 음악회를 개최한 적이 있습니다. 성악가와 여러 교회의 합창단이 부른 찬양들도 박수를 받았고, CCM 복음송가를 부른 가수의 찬양 후에 앵콜을 요청해 앵콜송을 부른 적이 있습니다. 끝나자 드디어 우뢰와 같은 박수가 터져 나왔습니다. 음악회가 모두 끝나고 여러 사람이 하는 말이 앵콜로 부른 찬양이 최고로 은혜로웠다고 말을 했습니다. 이 말을 들으면서 저는 마음속으로 말했습니다. ‘음악적 깊이로 치면 성가대와 성악가가 부른 곡이 훨씬 더 은혜로운 곡이지…’라고 아쉬워 한 적이 있습니다. '군선교를 위한 열린 음악회'를 두 번이나 기획하고, 진행하면서 느낀 공통점은 성악가들의 어려운 곡을 소화해서 부르는 것보다 CCM 복음송가를 부른 가수들이 항상 인기가 더 있었습니다. 죄송하지만 물론 그런 분들을 비하해서 하는 말이 아닙니다. 곡이 제아무리 음악성이 있어도 이해하지 못하는 사람들에게는 의미가 없기 때문에 수준이 높은 음악을 이해하지 못함이 아쉬워서 드리는 말씀입니다. 그러므로 사람에게는 깊은 의미를 찾아내고 듣는 귀가 있어야 합니다.

또한 보는 사물을 바로 보는 눈도 열려 있어야 합니다. 시편기자는 본문 18절에서 "내 눈을 열어서 주의 법의 기이한 것을 보게 하소서."라고 기도하였습니다. 제가 미국에 갔다가 오는 길에 로마와 유럽을 거쳐 오면서 여러 나라의 박물관을 관람하고 온 적이 있습니다. 루브르 박물관을 관람할 때, 레오나르도 다 빈치의 ‘모나리자’를 보기 위해서 찾아갔습니다. 유독 모나리자의 전시관 앞에만 관람객들이 빈틈없이 몰려 있었습니다. 오랜 시간을 기다린 끝에 가까이서 그 그림을 보았습니다. 하지만 미술 교과서에서 본 것이나 똑 같은 그림이었습니다. 사실 모나리자가 웃고 있는지 조차도 잘 알 수가 없을 뿐더러, 그 그림이 왜 그렇게 유명한지 알 수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찾아본 '백과사전'에는 '모나리자'를 다음과 같이 설명하고 있었습니다. “이탈리아 화가 레오나르도 다 빈치의 대표작. 이탈리아 전성기 르네상스 양식의 한 정점을 이룰 뿐 아니라 서양 고전회화의 상징으로도 간주된다. 제작연도는 1503∼1510년경으로 짐작된다. 화면 전경(前景)에는 흉벽(胸壁) 앞에 검은 옷과 베일을 걸친 반신의 젊은 여인이 약간 비스듬히 의자에 앉아 있고, 중성적인 표정에는 다의적이고, 수수께끼 같은 미소를 띠고 있다. 배경으로는 무한한 깊이를 느끼게 하는 상상적인 산악 풍경이 레오나르도 특유의 미묘한 바림기법으로 그려져 있다.”라고 적혀 있습니다.

가짜나 잘못된 그림을 보았기 때문에 혹은 제가 그림의 가치를 모르기 때문입니까? 제가 그림의 중요성에 무지하였기 때문일까요? 아닙니다. 문제는 저의 이해력이 문제였습니다. 저에게는 미술에 대한 안목이 부족하고, 아름다움을 감상할 줄 아는 예술을 평가하고 느끼는 안목과 예술적 가치를 발견하는 안목이 전혀 없었습니다. 그러므로 그림의 가치를 극대화하기 위해서는 저에게는 미술의 깊은 세계를 이해하고, 볼 줄 아는 예술적인 눈이 필요합니다. 그런 안목을 가지고 그림을 본다면 더욱 의미 있는 감상이 될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성도가 하나님과 코드(code)를 맞추기위해 노력이 필요합니다.(본문 이해: Meaning & Significance). 그러므로


첫 번째 먼저 신령한 세계를 보아야 합니다.

그래야 하나님의 뜻을 이해하고 따를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신령한 귀와 신령한 눈이 열려지도록 하나님께 기도해야 합니다.

사람들과 만나서 대화를 하다 보면 명쾌히 내용이 보이는 일들은 쉽게 결론을 내고, 대안을 제시할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전문적 지식이 필요할 때는 전문가에게 의뢰하면 가장 속 시원한 해답을 얻고, 해결할 수 있는 방법을 찾아낼 수 있습니다. 그러나 대부분의 세상일들이 그렇게 단순하지는 않습니다. 그래서 목회자인 저도 대화하다가 더 이상 방법을 찾지 못할 때 사용하는 말 가운데 “기도해 봅시다. 기도하겠습니다.”라는 말로 끝을 맺을 때가 많습니다. 사실 상담자들과 그렇게 약속을 했지만 그 일만을 위해서 몇 시간씩 기도하기는 쉽지 않습니다. 물론 목사가 기도를 해 주지만, 본인에게 어려움과 고민에 있어서 더 중요한 태도는 당사자가 더욱 절실하게 기도해야 하기 때문에 안타까울 때가 많은 것이 사실입니다. 그러면 목회자가 왜 ‘기도합시다.’라는 말이 대화의 마지막 결론으로 마무리하는 것 같습니까? 기도의 의미와 역할에 대해서 너무나 잘 알고 있기 때문입니다.

기도는 영혼의 호흡입니다. 호흡 없는 몸이 죽은 것처럼 기도 없는 영혼은 죽은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어떤 식으로 기도의 호흡을 하고 있습니까? 호흡은 숨을 들이마시고 내쉬어야 하는데, 기도의 호흡을 내 쉬는 호흡만 하는 사람들이 많이 있습니다. 어떤 분은 하루에 4시간씩 기도한다고 하는데, 정말로 4 시간 동안 쉬지 않고, 소리를 내어 기도하는 것을 보았습니다. 어떤 분들은 많이 기도해서 하나님께 압력을 넣는 것으로 생각합니다. 우리가 너무나 열심히 기도해서 하나님께 필요한 것도 사실입니다.

하지만 저는 이런 식의 기도는 자주 하지 않습니다. 만약 계속 소리 내어서 일방적으로 나의 소원만 구하는 기도를 해야만 한다면 제가 왜 그렇게 하지 않겠습니까? 그러나 저는 때때로 큰 소리로 기도하기도 하지만 소리 내지 않는 기도도 많이 합니다. 저는 말하는 기도더 하지만 동시에 하나님의 음성을 듣는 기도도 즐겨합니다. 하나님께서 제게 말씀하시도록 하는 기도는 사실 더 오래 할 수 있습니다. 듣는 기도는 어느 장소에도 할 수 있습니다. 언제라도 할 수 있습니다. 걸으면서도 할 수 있습니다. 버스에서나 지하철에서도 할 수 있습니다. 운전 중에도 할 수 있습니다. 저는 기도 중에 하나님의 말씀을 잘 듣습니다. 하나님께서 때를 따라 얼마나 많은 말씀을 해주시는지 항상 감사와 기쁨이 가득합니다.

기도 중에는 하나님께서 주시는 지혜가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주시는 지혜는 우리 인간이 전혀 생각할 수 없는 지혜를 주십니다. 때로는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결단을 위한 용기를 주십니다. ‘너는 왜 그것을 하지 않느냐? 바로 그 일이 네가 할 일이다. 너는 왜 남이 하기만 기다리고 있느냐? 그냥 네가 시작하면 될 일을 자꾸만 나보고 해달라. 그러면 어떡하느냐?’ 때로는 그러한 음성을 들려주기도 합니다. 사람들은 자신의 일을 놓고 기도하면서 동시에 하나님의 음성을 듣고, 하나님의 선한 이도하심과 뜻을 알아가는 하나님과 코드를 맞추는 일을 해야 합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하나님, 용서해 주세요. 도와주세요. 이것도 주시고, 저것도 주세요. 인도해 주세요.” 라는 기도로 바쁘면서도 정작 하나님과 정다운 대화를 나누지 못하고, 심지어 하나님께서 주시는 말씀을 잘 듣지 못하여 사람이 하나님과 올바르게 코드를 맞추지 못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 이유는 무엇입니까?

그것은 사람들마다 영혼의 주파수가 하나님의 주파수와 즉, 코드가 다르기 때문입니다. 이 세상의 통신기기는 대부분 전파를 이용합니다. 라디오, TV, 휴대폰, 무선 인터넷, 네비게이션에 이르기까지 끊임없이 엄청난 양의 전파가 공중에 가득 차 있습니다. 이 수많은 전자파들이 공중을 채우고 있는데도 혼선이 생기지 않고, 송수신을 할 수 있는 것은 각각의 주파수가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원하는 주파수의 전파를 얻기 위해서 수신기의 주파수를 잘 맞추어야 합니다.

기도는 '영혼의 수신기를 사랑의 하나님께 주파수를 맞추는 행위입니다. 다시 말하면 하나님과 사랑의 코드를 맞추는 행위입니다. 그래서 자구 성도 여러분들에게 기도하라고 권면하는 것입니다. 지난 주일에 임직을 받으신 장로님, 권사님, 안수집사님들께서는 기도의 사명자, 즉, 기도에 앞장서는 충성된 하나님의 일꾼들이 되시기 바랍니다. 과거에 기도들 열심히 하셨지만 이제는 더욱 앞장서서 기도의 불을 붙이는 충성된 일꾼들이 되시기를 복 빌어 드립니다.

미국 수영선수권대회에서 한 젊은이가 금메달을 차지하고 기뻐서 집으로 달려갔습니다. "어머니 저 톰이에요. 금메달을 땄어요. 이것 보세요." 어머니가 말씀합니다. "참 잘했구나, 그런데 엄마는 그것보다 네가 꼭 예수님을 믿기를 원한다." 톰은 짜증이 났습니다. "아휴, 다른 어머니들은 상을 못 받아 걱정인데, 어머닌 왜 꼭 그러세요?" 그러나 엄마는 "얘야, 1등도 좋지만 더 중요한 것은 네가 예수님을 믿는 것이야! 엄마는 이것을 놓고 늘 기도하고 있단다."라고 이야기 합니다.

서운한 마음에 젊은이는 밖으로 뛰쳐나갔습니다. 한참 배회하다보니 연습하던 수영장에 와 있었습니다. 평소 때처럼 다이빙연습을 하려고 수영장 높은 곳에 올라갔습니다. 그런데 막 뛰어내리려는 순간 아래를 보니 물속에 커다란 십자가 형상의 그림자가 비치는 것이었습니다.

"제기랄, 저놈의 십자가, 이번에 아예 물속에까지 나타나는군." 그는 기분이 상해 다이빙을 포기하고 내려와 버렸습니다. 그러다가 지나면서 무심코 수영장 안을 들여다보았는데 깜짝 놀라고 말았습니다. 수영장 안에는 물이 하나도 없었던 것이었습니다. 아차! 싶어 시계를 보니 수영장에 고여 있던 물을 뺄 시간이 지나 있었던 것입니다. 젊은이는 그제야 무릎을 꿇고 울며 기도하기 시작했습니다.

"하나님! 어머니의 기도로 날 살려 주시니 감사합니다. 어머니의 기도와 그 십자가가 아니면 전 벌써 죽었을 겁니다."라고 회개하고 진실한 신자가 되었답니다.

찬송가 333장 에도 보면 "1절 .날마다 주와 버성겨 그 크신 사랑 버리고 방탕한길로 가다가 어머니기도 못 잊어, 2절. 메마른 들과 험한 산 갈 바를 몰라 헤메며, 영 죽게 된 지경에서 어머니기도 못 잊어 나 집에 돌아갑니다. 어머니기도 못 잊어 새사람 되어 살려고 나 집에 돌아갑니다." 라는 가사가 있습니다. 어머니의 기도 때문에 자녀가 살게 된 간증이었습니다.

자녀들의 기억속에 기도하는 어머니, 젊은 성도들의 기억 속에 기도하는 장로님! 권사님!! 안수집사님!, 기도하는 성도들로 남아있기를 바랍니다. 다니엘과 같이 기도하시기 바랍니다.

에스더<(=별을 의미하는 페르시야어 '스타라'의 히브리어 음역인 듯)는 바사의 왕후가 된 유대인 고아였습니다. 그의 히브리 이름은 하닷사(=신부, 화석류 혹은 도금양(桃金孃) 나무>로 민족 구원을 위한 기도운동에 앞장섰습니다.

에더 4:16절에 "당신은 가서 수산에 있는 유다인을 다 모으고 나를 위하여 금식하되 밤낮 삼 일을 먹지도 말고 마시지도 마소서. 나도 나의 시녀로 더불어 이렇게 금식한 후에 규례를 어기고, 왕에게 나아가리니 죽으면 죽으리이다."고 금식기도를 전개했고 결국 하만의 계책에서 구원받아 아달월(2-3월)의 14,15일에 거행된 유대인의 부림절 절기를 만들엇습니다. 사악한 하만의 음모에서 히브리인들이 구원받은 것을 기념하는 날이 된 것입니다.(에3:7, 9:26)

또한 성경의 훌륭한 인물이 많지만 기도하여서 낳고, 기도로 기른 훌륭한 사사 사무엘이 있습니다. 그를 낳아 기른 훌륭한 어머니는 한나였습니다. 그는 기도의 어머니였고, 그의 기도는 자녀를 훌륭한 하나님의 종으로 살게 하였고, 많은 사람들의 표상이 되었습니다. 우리 모든 그리스도인들이 본받아야 할 기도의 사람입니다. 한나와 같이 서원하며 기도하고, 술에 취한 듯 기도하는 모든 성도 여러분들이 되시기를 부탁합니다.

우리의 마음이 하나님께로 향하여 있으면 하나님께서 얼마나 많은 말씀을 해주시는지 모릅니다. 그래서 우리는 마음의 채널을 하나님께로 섬세하게 맞추는 훈련이 필요합니다. 수신기에서 전파를 받아들인다고 해서 저절로 전파의 내용을 알 수 있는 것은 아닙니다. 전파나 전기 신호 속에 들어있는 내용을 풀어내야 하는 것입니다. TV의 예를 들면, 음성과 화상 신호를 엔코딩하여서 전파에 담아서 송신을 하면 주파수를 맞추어서 이 신호를 받아들인 다음에 디코딩을 하여야 TV를 볼 수 있습니다. '기도는 하나님과 사랑의 코드를 맞추는 시간임을 잊지 마시기 바랍니다.'' 할렐루야!

렘브란트와 루벤스의 작품은 첫 눈에 감동을 줍니다. 그리고 자세히 들여다 보고 있노라면 숨겨진 내용들이 자꾸 눈에 띄곤 합니다. 저 역시 이미 말씀을 드린 것처럼 미술에 대해서는 문외한이지만 제가 작품을 보는 눈은 목사이기에 보는 눈이 다릅니다. 다시 말하면 신학적이기 때문에 그림이 담고 있는 신학적인 면이 계속 발견됩니다. 전시회가 열려서 미술 전문가와 함께 간 적이 있었습니다. 처음에는 피카소의 그림이 습작 같기도 하고 학생들이 그린 그림 같이 생각되기도 했습니다. 그런데 전문가의 해설을 듣고 보니 그 그림이 보통 화가들이 그릴 수 없는 특별한 것임을 알 수 있었습니다. 소위 작가의 코드를 읽는 법을 알려줬기 때문입니다.

음악에도 들을 줄 아는 귀가 필요하듯이, 그림에도 안목이 필요합니다. 사람이 하나를 알면 그 아는 것을 더욱 잘 알게 되고 모르는 것은 계속 모르게 되는 것입니다. 아는 사람은 알게 되고, 모르는 사람은 모르는 상태로 놓여있게 됩니다. 마찬가지로 기도생활을 하여야 하나님을 사랑하는 방법을 알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마음을 알고, 뜻을 알고, 사명을 깨닫고, 진리 안에 거하게 됩니다.


두 번째로 심령한 세계를 이해해야 합니다.

보는 것이 전부가 아닙니다. 의미를 알고, 참된 뜻을 알아야 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말씀을 깨닫는 귀와 믿음으로 보는 눈이 되도록 기도해야 합니다.

눈에 보이지도 않고, 만져지지도 않는 하나님과 대화를 하려고 하면 하나님을 만나기가 쉽지 않습니다. 귀에 들리지도 않는 하나님의 말씀을 들으려고 하면 특별한 조건이 필요한 것입니다. 우리는 기도 할 때만이 아니라, 조용히 성경을 읽으면서 하나님께서 주시는 말씀을 들을 수 있습니다. 우리가 성경 속에서 말씀하시는 하나님의 음성을 들을 수 있다면 성경 한 장을 읽고 하루를 넘게 계속해서 묵상해도 언제나 시간이 부족합니다.

예수님은 사람들에게 비유로 말씀하셨습니다. “한 사람이 씨를 뿌리는 자가 뿌리러 나가서 씨를 뿌렸는데, 어떤 것들은 길 가에 떨어져서 새들이 와서 먹어버렸고, 어떤 것들은 흙이 얕은 돌밭에 떨어져서 흙이 깊지 아니하므로 곧 싹이 나왔지만 해가 돋은 후에 타서 뿌리가 없으므로 말라버렀고, 또 다른 것들은 가시떨기 위에 떨어져서 가시가 자라서 기운을 막았고, 다른 것들은 좋은 땅에 떨어져서 어떤 것은 백 배, 어떤 것은 육십 배, 어떤 것은 삼십 배의 결실을 하였다. 귀 있는 자는 들으라.”고 하셨습니다.

이 비유는 농사에서 지극히 당연한 이야기입니다. 비유는 해석을 요구합니다. 비유는 직설적인 가르침이 결코 아닙니다. 주관적인 해석의 능력이 있어야 합니다. 비유를 듣는 사람이 해석을 할 수 있느냐 없느냐에 따라서 비유의 기능이 두 가지로 나누어집니다. 드러내는 기능과 감추는 기능입니다. 드러내는 기능이란 감추어 졌던 비유의 의미가 적절한 해석을 통하여 알려지는 것입니다. 감춘다고 함은 예수님께서 의도적으로 감추는 것이 아닙니다. 뜻이 감추어져 있는데, 청중이 해석의 잘못으로 그 뜻을 알지 못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씨 뿌리는 비유의 의미를 다시 설명해 주십니다. “아무나 천국 말씀을 듣고 깨닫지 못할 때는 악한 자가 와서 그 마음에 뿌려진 것을 빼앗나니 이는 곧 길 가에 뿌려진 자요. 돌밭에 뿌려졌다는 것은 말씀을 듣고 즉시 기쁨으로 받되 그 속에 뿌리가 없어 잠시 견디다가 말씀으로 말미암아 환난이나 박해가 일어날 때에는 곧 넘어지는 자요. 가시떨기에 뿌려졌다는 것은 말씀을 들으나 세상의 염려와 재물의 유혹에 말씀이 막혀 결실하지 못하는 자요. 좋은 땅에 뿌려졌다는 것은 말씀을 듣고 깨닫는 자니 결실하여 어떤 것은 백 배, 어떤 것은 육십 배, 어떤 것은 삼십 배가 되느니라.”

깨닫는 자는 더욱 많은 깨달음을 받을 것이요. 깨닫지 못하는 자는 여전히 무지 가운데 있을 것이며, 그 무지의 정도가 더 심해질 것이며 결국 멸망에 이르게 될 것입니다. 깨닫지 못하는 사람들에게 하나님의 말씀은 감추어진 진리입니다. 완악한 인간들, 깨달은 마음이 없는 완고한 마음을 가진 사람들, 세속적인 사고에 노예가 되어서 세속적인 기준을 가진 사람들은 하나님의 말씀을 결코 이해할 수 없을 것이며, 결국 멸망을 받게되는 쌍한 영혼이 되고맙니다. 그 마음의 수신기를 세상에 맞추어 놓은 사람은 하나님의 뜻을 알 수가 없습니다. 코드가 다르기 때문입니다.

신앙 생활을 오래 했는데, 성경도 많이 아는 것 같고, 설교를 들어도 그렇고 그런 것 같은데 마음 속에 감격이 없는 분들의 문제는 하나님을 향한 영혼의 주파수가 잘 맞지 않았기 때문에 하나님 말씀의 특별한 코드를 읽어내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내적인 깨달음의 깊이가 부족한 것입니다. 미스바교회 성도 여러분! 말씀에서 오는 진정한 힘을 느껴보신 적이 있습니까? 진정한 생명을 느껴보신 적이 있습니까? 주파수가 안 맞고, 코드를 맞추지 못하는 사람에게 하나님의 말씀은 비밀로 있게 됩니다.

우리가 외부 세계의 시각적 자극을 받거나 청각적 자극을 받고도 그 자극을 제대로 알아 차리지 못한다면 시각 장애인 또는 청각 장애인입니다. 이처럼 하나님의 계시를 보고 듣고도 하나님의 계시로 인식하지 못하는 것을 인간의 영적 장애라 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의 병 고치는 기사 중 귀머거리와 소경은 영적인 귀머거리와 영적인 소경의 영적인 장애를 비유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없어서 모르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들리지 않아서 못 듣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말씀해 주시지 않아서 못 듣는 것이 아닙니다. 지금 하나님께서 말씀하시지 않는다면 내 삶의 주파수가 하나님과 맞지 않아서 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에 감동이 없다면 내 마음의 코드가 하나님과 맞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렇지만 성령님께서 여러분에게 찾아 오시고 감화 감동과 역사해 주시어 진리가운데 이끌어 주시면 그 때부터는 하늘 나라의 비밀이 여러분의 삶에서 발견될 것입니다. 그러므로 말씀의 비빌을 깨닫는 귀와 눈을 가지도록 기도하시기 바랍니다, '어떻게 하면 하나님과 주님이 기뻐하시고, 목회자와 협력하여 하나님의 마음을 시원케 해 드릴 것인가?' 신령한 분별력으로 쓰임받기 위해서 하나님과 사랑의 주파수를 기도로 마추어 나가시는 하나님의 뜻을 이해하고 따르며, 헌신하는 모든 성도 여러분들이 되시기를 복 빌어 드립니다.


세 번째 하나님과 코드(code)가 맞게되 받는 복은 무엇입니까?

노무현 대통령과 코드가 맞는 분은 장관이나 총리를 할 수 있었습니다. 아마 지금 총리 후보로 거론되는 한명숙씨도 그런 분 중에 한 분일 것입니다. 대통령과 코드가 맞으니 수지맞는 일이 생기는 것입니다. 하물며 하나님과 코드(code)가 맞으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지혜 있는 신앙인이 되시기 바랍니다.

신앙에는 7 단계가 정도 구분해서 생각할 수 있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음성을 들을 수 있고, 그 뜻을 알 수 있는 조건을 ‘신앙’ 또는 ‘믿음’ 이라고 표현 합니다. 그 단계를 정리해 보았습니다.


1) 신앙의 초보일 때는 하나님의 존재에 대한 단순한 긍정의 단계에 머물러 있습니다. 신앙을 도덕적 수양정도로 여기는 단계에 불과합니다. 그래서 교회를 들날 날락 합니다.

2) 그러다가 은혜를 받으면 하나님의 현존을 주관적으로 인식하는 단계에 이릅니다. 이때부터는 종교인이 됩니다.

3) 그러다가 하나님의 절대적 권능을 알게 되는 단계가 시작되면 기도하기 시작합니다. 이때에 비로서 은혜를 아는 단계에 이르게 됩니다.

4) 그러다가 기도로 응답을 받게 되고, 진리를 깨닫는 신령한 은혜를 받으면 하나님의 사랑을 발견하는 단계가 됩니다. 기도로 한님과 코드를 맞추는 일에 재미를 느끼는 단계가 됩니다.

5) 하나님과 자꾸 코드를 기도로 맞추다 보면 하나님을 사랑하는 단계로 발전합니다. 십자가를 질 수 있는 헌신의 단계로 발전합니다.

6) 성령의 손에 사로잡히게 되면 자신의 뜻보다는 하나님의 뜻을 우선하여??믿음으로 행하는 단계로 신앙이 성숙하게 됩니다.

7) 이제는 마지막 단계로 성령께서 인도하시는 대로 항상 사랑의 코드를 하나님과 맞추게 되어 신령한 하나님과 언제나 동행하는 단계가 됩니다. 이 상태를 저는 '성령 충만한 상태'라고 말씀드릴 수 있습니다.


하나님을 향하여 그 마음의 주파수가 언제나 맞아 있으면 밥을 먹을 때나 길을 걸어 갈 때나, 공부를 할 때나 일을 할 때, 그 무엇을 할 때도 우리가 혼자 외롭게 세상에 살아가는 것이 아니라, 나의 등 뒤에서 도우시는 은혜를 느끼게 됩니다. 초막이나 궁궐이나 천국으로 바뀝니다. 하나님께서 함께 하시는 임마누엘의 내적인 증거가 분명하여 하나님께서 동행하심을 확실히 알게 됩니다. 하나님께서 말씀으로 언제나 우리의 영혼을 깨우고 격려해 주심을 느끼게 됩니다.

세계 2차 세계대전 때에 영국군이 독일군에게 밀려 어느 반도에 35만명이 갇히고 말았습니다. 영국 국왕은 독일군을 이길 방법이 없어서 전 국민에게 하나님께 회개와 금식을 선포하고 하나님께 부르짖었습니다. 이때 영국군은 하나님의 도우심으로 무사히 탈출할 수 있었습니다. 그 이후 영국은 이날을 기도의 날을 정해서 지키고 있습니다. 기도가 길을 엽니다. 기도는 하나님의 역사를 가지고 오는 철로입니다. 철로가 없으면 기차가 올 수 없듯이 기도가 없으면 하나님의 역사가 없습니다. 기도는 하나님의 철로입니다. 하나님은 하나님의 뜻이라고 하는 철로를 통해서만 움직이십니다. 아무리 막히고 답답해도 기도하면 원래 있던 길이 보입니다. 아무리 어렵다고 할지라도 기도하면 하늘 문이 열립니다.

아르헨티나는 금광으로 유명한 나라입니다. 아르헨티나의 어느 마을에 믿음이 좋은 사람이 있었습니다. 그 마을에도 금이 많이 있었는데 사람들이 너무 많이 모여 금을 파내므로 금이 고갈되었습니다. 모두들 그 마을을 떠나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믿음이 좋은 사람도 하나님에게 금이 고갈된 마을을 떠나겠다고 기도를 합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하나님만 믿고 머물라고 하십니다. 그래서 그 믿음이 좋은 사람은 그 마을에 남아서 마을을 개간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런데 농사를 위해 땅을 파고 있는데 엄청난 금을 발견하게 되었습니다. 기도를 하여 순종했을 때 이런 일이 일어났던 것입니다. 성도여러분 기도를 통해서 하나님의 크신 역사를 이루시길 바랍니다.

선지자 요나가 물고기 뱃속에 들어갔을 때 금식하며 기도를 시작했습니다. '요나가 물고기 뱃속에서 그 하나님 여호와께 기도하여 가로되 내가 받는 고난을 인하여 여호와께 불러 아뢰었삽더니 주께서 내게 대답하셨고 내가 스올의 뱃속에서 부르짖었삽더니 주께서 나의 음성을 들으셨나이다.'(요2:1~2) 요나는 물고기 뱃속에서 기도했을 때 물고기 배에서 나올 수 있게 되었습니다.

소경 바디메오는 부르짖어 간구하여 문제를 해결 받지 않았습니까? 그의 간절한 소원대로 앞을 보게 되었습니다. 바로 이것이 기도하는 사람이 누릴 수 있는 기도로 체험된 신령한 맛입니다.

가나안 여인은 귀신 들린 딸을 고치기 위하여 "주 다윗의 자손 예수여"라고 부르짖었습니다. 그 여인도 많은 장애가 있었지만 결국 기도하고 문제를 해결 받았습니다. 이처럼 주님은 부르짖는 자의 기도에 귀를 기울여 주셨습니다. 놀라운 응답으로 채워주신 것입니다.

이스라엘 민족의 영도자였던 모세와 이스라엘 백성이 출애굽 할 때 앞에는 홍해바다, 뒤에는 바로의 군대가 쫓아옵니다. 그 때 온 백성은 하나님께 기도를 합니다. '모세가 백성에게 이르되 너희는 두려워 말고 가만히 서서 여호와께서 오늘날 너희를 위하여 행하시는 구원을 보라 너희가 오늘 본 애굽 사람을 또 다시는 영원히 보지 못하리라'(출 14:13) 홍해가 갈라졌습니다. 바다에도 길이 있습니다. 기도하면 길이 보입니다. 기도하면 왜 길이 보이게 됩니까? 이유는 간단합니다. 기도는 하나님의 역사와 동행하는 인간의 축복의 방편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역사를 동반할 수 있는 무기가 바로 기도입니다. 기도는 하나님의 역사를 끌어들입니다.

미스바교회 성도 여러분! 기도를 통하여 하나님과 코드를 맞추어 나가시기 바랍니다. 기도로 신령한 세계가 열기고, 이해가 되어지고, 세상을 이길 지혜를 얻어 분별력있는 신앙생활로 승리하는 삶을 사시기를 축복합니다. 기도는 곧 그리스도인의 삶을 하나님과 코드(code)를 맞추어 나가는 행위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자녀는 어떠한 상황에서도 기도하는 삶을 살아가야 합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을 믿고 기도하면 분명히 응답을 받게 됩니다.

이스라엘이 기도할 때마다 하나님은 위기에서 나라를 구원해 주셨습니다. 아말렉과 싸울 때 기도로 이겼습니다. 블레셋과 싸울 때도 기도로 이겼습니다. 아람과 싸울 때도, 앗수르와 싸울 때도 기도로 이겼습니다. 기도하면 이기고 기도 안 하면 졌습니다. 기도하면 일어서고 기도 안 하면 주저앉습니다. 기도하면 되고 기도 안 하면 안 되고 기도하면 흥하고 안 하면 망하고. 기도로 이긴 것입니다. 이것이 우리의 승리 비결, 잘되는 비결, 응답 받는 비결, 잘사는 비결입니다.

하루하루를 기도하며 살아가는 중에 하나님과 코드(code)를 맞추어 도우시는 은혜를 입으시기 바랍니다. 세상을 이기고, 기도의 맛을 크게 알고 사는 성도들 되시기 바랍니다. 하나님과 사랑의 코드(code)를 맞추는 기도생활을 통해 세상의 고난과 마귀의 유혹과 험난한 세상의 모든 염려, 걱정, 근심, 실패, 고난, 질병, 고통마저도 넉넉히 믿음으로 이기는 힘을 하늘로 부터 공급받게 되시기를 복 빌어 드립니다. 기도의 코드로 하나님의 능력을 직접 공급 받아 범사에 승리하시는 축복된 신앙생활을 하시기를 예수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박광현 목사)

이런 글도 찾아보세요!

공유

facebooktwitterpinterestbandkakao story
퍼머링크

댓글 0

권한이 없습니다. 로그인

신고

"님의 댓글"

이 댓글을 신고 하시겠습니까?

삭제

"님의 댓글"

이 댓글을 삭제하시겠습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