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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한 알의 밀 (요 12:20~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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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우리 곁을 스쳐 지나가는 많은 사람들 가운데 익숙한 얼굴이 있는가 하면 그렇지 못한 얼굴도 있습니다. 익숙한 얼굴은 자주 만나거나 아니면 편안한 얼굴이기 때문에 그렇게 느낄 것입니다. 그리고 생소하게 느끼는 얼굴은 전혀 만난 적이 없거나 편안하지 못한 얼굴인 경우에 대체로 그럴 것입니다. 그러나 익숙하지만 거리감이 느껴지는 그런 경우도 있습니다. 단지 사람만 그런 것이 아니라 우리가 사용하는 말도 그렇습니다. 아주 친숙하게 느껴지는 말이 있는가 하면 어떤 말은 아주 생소하게 느껴지기도 한다는 말입니다.

  성경에 많이 등장하면서 우리에게 가장 친숙한 말을 대라고 하면 아마 ‘영광’이라는 말일 것입니다. 그러나 그 의미를 물으면 쉽게 대답하기가 어렵습니다. 아주 친숙한 것 같으면서도 설명하기 어려운, 그래서 때로는 생소하게 느껴지는 말이 바로 ‘영광’이라는 말입니다. 사실 이 말은 우리의 삶의 현장에서는 그리 자주 사용되는 말은 아닙니다. 대부분의 경우 교회 안에서 사용되고 있습니다.

  ‘영광’이라는 말은 교회 안에서도 특히 찬송가에 많이 사용되고 있는 것 같습니다. 하나님의 능력과 같은 것을 노래할 때 많이 사용되고 있지 않습니까? 찬송가 245장은 ‘시온 성과 같은 교회 그의 영광 한없다’라고 하고 있고 찬송가 13장은 ‘기뻐하며 경배하세 영광의 주 하나님’이라고 하고 있습니다. 찬송가 31장은 ‘영광의 왕께 다 경배하라’고 외치고 있고 찬송가 155장은 다시 사신 ‘주님께 영광’을 돌릴 것을 요구하고 있습니다. 여기서 우리는 ‘영광’이라는 말이 대체로 어떤 경우에 사용되는가 하는 것은 짐작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오늘 봉독한 본문 말씀에 사용된 ‘영광’이라는 말은 조금 다른 의미로 사용되고 있는 것 같습니다. 여기서 ‘영광’이라는 말의 의미는 힘들고 거친 싸움 후에 주어지는 그 무엇이 아니라 싸움 그 자체로 묘사되고 있습니다. 예수님은 자신의 수난과 죽음에 대해서 전에는 별로 언급하지 않으셨습니다. 그런데 요한복음 12장에 와서 갑자기 자신의 죽음을 언급하기 시작하셨습니다. 예수님은 한 알의 밀을 예로 들어 말씀하셨습니다. 밀알이 새 생명으로 태어나기 위해서는 반드시 죽어야 한다고... 세상의 생명을 위해서 예수님이 죽어야 할 것을 비로소 말씀하기 시작하셨던 것입니다.

  그러나 이어지는 말씀에서 예수님은 비참하게 죽임을 당하겠지만 결국은 영광의 승리를 쟁취하게 될 것이라는 사실을 분명히 말씀하셨습니다. 다시 말해서 비참한 죽음을 승리와 연결시키셨습니다. 십자가 죽음을 영광과 연결시키셨습니다. 십자가 죽음은 처절한 패배처럼 보이는 것이 사실입니다. 그러나 그 십자가 죽음이야말로 진정한 의미의 승리이며 또한 영광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오늘 우리는 예수님의 부활 사건을 믿고 또 믿는 자들의 부활도 믿기 때문에 고개를 끄덕거리면서 예수님의 말씀을 들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정작 우리 앞에 죽음이 닥쳐왔을 때도 그렇게 끄덕거릴 수 있을 것인가 하는 것은 의문이 아닐 수 없습니다. 죽음은 실제로 우리를 패배시키는 것을 의미하는 말로 사용되고 있지 않습니까? 우리를 억누르고 압박하는 그 어떤 힘으로 사용되고 있는 것이 죽음 아닙니까? 암과 싸워서 이기고 그 암의 재발 위험으로부터 완전히 벗어났을 때 비로소 우리는 승리했다고 말합니다. 전신에 암세포가 퍼져서 죽게 되었을 때는 결코 승리했다고 말하지 않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뭐라고 말씀하셨습니까? 십자가 죽음을 승리요 또한 영광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학자들은 인간이 가장 두려워하는 것은 죽음이라고 말합니다. 때문에 그 죽음을 피하기 위해서라면 아무리 귀한 것일지라도 아낌없이 투자합니다. 시간도, 돈도, 그 무엇도 아깝지 않습니다. 죽음을 피할 수만 있다면... 죽지 않기 위해서 하루에 몇 킬로씩 걷기도 하고 또 뛰기도 하지 않습니까? 그렇게 하다가 갑자기 죽는 사람들도 간혹 있지만... 또 건강식을 찾아 다니기도 하고 생식을 하기도 합니다. 때로는 비싼 값을 주고 유기농 식품을 사 먹기도 합니다.

  그러나 잘 생각해 보면 육체적인 죽음만 두려워할 것은 아닌 것 같습니다. 어떤 사람들은 사는 것이 죽는 것보다 더 힘들어하기 때문에 하는 말입니다. 불의의 사고로 자식을 먼저 묻은 부모의 심정이 그렇지 않겠습니까? 중풍으로 반신불수가 되어서 스스로 아무 것도 할 수 없게 되었을 때 겪게 되는 마음의 고통은 죽는 것보다 더 고통스러울 수도 있습니다. 평생 일하던 직장에서 쫓겨나서 당장 끼니 걱정을 해야 하고 또 병까지 들었다면 무슨 낙이 있겠습니까? 그렇습니다! 때로는 죽는 것이 더 편할 수도 있습니다.

  예수님은 이 세상에 생명을 주기 위해서 오셨습니다. 하늘의 영광스러운 보좌를 버리고 이 세상에 오신 주님은 오직 십자가 죽음만이 세상에 생명을 줄 수 있는 유일한 길이라는 사실을 알고 그 길로 나아가셨습니다. “인자가 영광을 얻을 때가 왔도다.” 그러나 오해하지 말기 바랍니다. 주님이 말씀하시는 영광 얻을 때가 왔다는 것은 죽을 때가 되었다는 것입니다. 주님은 철저히 하나님의 뜻을 따라 사셨습니다. 오직 주어진 길만을 걸으셨습니다. 주어진 그 길은 십자가를 지고 죽는 것이었고 바로 그 길이 세상에 생명을 주는 하나님의 방식이었던 것입니다.

  물론 주님도 십자가를 앞에 두고 고민하셨습니다. 자신의 고민을 솔직하게 털어놓지 않으셨습니까? 요한복음 12장 27절 말씀입니다. “지금 내 마음이 괴로우니 무슨 말을 하리요 아버지여 나를 구원하여 이 때를 면하게 하여 주옵소서!” 그러나 고민 끝에 주님이 구하신 것은 하나님의 영광이었습니다. “아버지여, 아버지의 이름을 영광스럽게 하옵소서!”(요 12:28상반절) 그 때 어떤 음성이 들려왔습니까? “내가 이미 영광스럽게 하였고 또다시 영광스럽게 하리라.”(요 12:28하반절) 하나님의 뜻을 따라 순종하고 있는 것을 통해서 하나님은 이미 영광을 받으셨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마침내 십자가 죽음을 통해서 하나님은 영광을 받으실 것이라고 분명히 말씀하셨습니다.

  영광의 대가는 언제나 혹독합니다. 화려한 무대에서 우아하게 피아노를 연주하고 있는 피아니스트의 영광 뒤에는 손가락 관절마다 염증이 생길 정도의 피나는 연습 시간들이 있습니다. 그라운드를 화려하게 누비는 운동 선수의 영광도 피눈물 나는 훈련을 거듭한 결과입니다. 영광의 대가는 언제나 죽음과 같이 혹독한 것이지만 그 대가를 통해서 새 생명의 역사가 시작되는 것입니다. 때문에 사도 바울은 그리스도 안에서 날마다 죽는다고 고백하기를 주저하지 않았던 것입니다.

  오늘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가 되어 새 생명을 얻고 하나님 앞에 나아와 예배할 수 있게 된 것도 다 십자가 죽음이라는 대가를 치르신 주님 때문이라는 사실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이제 주님은 그 십자가 고난에 동참하려고 하는 우리에게도 한 알의 밀로 떨어져 죽을 것을 요구하고 계십니다. 그리하여 우리의 가정에, 우리의 일터에, 우리의 삶의 자리에, 그리고 이 세상에 새 생명의 역사를 이루어 가라고 지시하십니다.

  우리도 주님처럼 한 알의 밀로 살고 또 죽을 때 우리를 통해서 하나님은 영광을 받으실 것입니다. 주님은 우리의 삶의 모든 순간 우리와 함께하십니다. 밀알이 떨어져 죽어 이제 다 끝났다고 할 때 바로 거기서 새 생명을 싹트게 하십니다. 길을 찾을 수 없다고 포기하려고 할 때 우리 앞에 새 길을 열어 주실 것이라는 말입니다. 특별히 우리가 살면서 견딜 수 없는 심한 고통을 당할 때 주님은 우리에게 그 모든 고통을 이길 수 있게 하십니다. 그 때 우리는 하나님께 영광을 돌릴 수 있게 될 것입니다.

  다시 한 번 강조하지만 우리는 죽어야 합니다. 주님의 말씀은 우리가 죽어야 살 수 있다는 것입니다. 한 알의 밀이 확실하게 떨어져 죽어야 풍성한 수확을 기대할 수 있지 않겠습니까? 그러나 우리는 여러 가지 이유를 대면서 죽기를 거부합니다. 학교를 졸업하고 나면, 보다 좋은 직장을 얻고 나면, 아이들이 다 크고 나면, 빚을 다 갚고 나면 등등 지금 가지고 있는 문제들이 해결되고 나면 기꺼이 죽을 수 있는 것처럼 핑계를 대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렇게 미루다 보면 결코 죽을 수 없다는 사실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밀알처럼 죽는다는 것은 과연 무엇을 의미합니까?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주님을 따르는 것을 의미합니다. 다시 말해서 십자가를 지신 주님의 사랑을 가지고 세상을 섬길 수 있어야 한다는 말입니다. 이것이 개인에게 있어서 사실이라면 공동체에게 있어서도 역시 사실일 것입니다. 주님의 몸된 교회에 있어서도 마찬가지라는 말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오늘 많은 교회들이 단지 영광만을 구하고 있습니다. 영광의 부활을 구하는 것이 나쁘다는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그 영광을 얻기 위해서는 먼저 요구되는 것이 있다는 사실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먼저 죽어야 합니다! 한 알의 밀이 떨어져 죽어야 많은 열매를 맺을 수 있지 않습니까? 교회가 세상에서 죽어야 합니다! 교회의 지체들이 세상에서 죽어야 합니다! 주님처럼 십자가를 지고 죽어야 합니다! 그 때 비로소 새 생명의 역사가 시작될 수 있기 때문에 하는 말입니다. 주님의 말씀에 순종하여 자기를 죽이고, 자기 몫에 태인 십자가를 달게 지고, 주님이 가신 그 길을 찬송하며 따르기로 다짐하고 결단하는 여러분 모두의 삶의 현장에 주님이 주시는 은혜와 평강이 항상 넘칠 수 있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강석공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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