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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오직 예수님만을 추구합시다 (빌 3:1-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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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땅에서 삶을 살아가는 사람들은 가치를 따라 살아갑니다.
이땅에서 삶을 살아가는 사람들은 돈이 가 있다고 합니다. 그래서 돈에 가치를 두는 사람은 돈을 추구하면서 살아갑니다. 이땅에 사람들은 공부에 가치가 있다고 합니다. 공부에 가치를 두는 사람은 공부를 추구하면서 살아갑니다. 이땅에 사람들은 운동에 가치가 있다고 합니다. 운동에 가치를 두는 사람은 운동을 추구하면서 살아갑니다. 이 세상 사람들이 가치있게 여기는 것들은 대부분 눈에 보이는 것들을 가치있게 여깁니다. 이 가치있는 것들을 이루기 위해서 모든 시간을 바칩니다. 모든 정성을 바칩니다. 모든 수고와 노력을 바칩니다. 그리고 그 가치를 이룰때 성공했다고 합니다. 돈의 가치를 둔 사람은 돈을 많이 번 것을 성공이라고 합니다. 지식을 가치있게 여기는 사람은 지식을 많이 얻으면 성공했다고 합니다. 운동에 가치를 두는 사람은 좋은 선수가 되면 성공했다고 합니다.

그러나 이런 세상의 가치가 진짜 가장 가치있는 것일까요?
하나님께서는 이런 세상의 사람들이 가치있게 여기는 것은 진짜 가치가 아니라고 합니다.
성경에서는 우리에게 이런 눈에 보이는 가치보다 더 가치있는 것을 말씀합니다. 오늘 본문에 바울은 진짜 가장 고상한 가치를 발견했습니다.바울은 이 세상에서 가장 고상한 것을 돈이라고 하지 않습니다. 지식이라고 하지 않습니다. 세상의 그 어떤 것보다도 가장 고상한 지식을 예수 그리스도라고합니다. 바울은 가장 고상한 가치 예수 그리스도 때문에 인생의 최고의 행복한 사람이었습니다. 헬런켈러는 “행복은 자기만족에서 얻어지는 것이 아니라 가치있는 일에 충실할 때 얻어지는 것이다”라고 했습니다. 우리 인생의 행복은 진짜 가치를 바로 발견하고 바로 추구하면서 살아갈 때 행복합니다.

오늘 저와 여러분들이 바울이 추구했던 가장 고상한 지식 예수 그리스도를 추구하는 삶을 살기를 소원합니다. 오늘 본문은 예수님 안에서 참가치를 발견한 바울의 행복한 모습이 우리에게 소개됩니다. 바울의 모습은 이땅에서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어떻게 예수님을 추구하면서 살아가야 할지를 말씀합니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가장 고상한 지식인 예수님을 어떻게 추구해야 할까요?

1. 기뻐하면서 주님을 추구합시다.

1절 종말로 나의 형제들아 주안에서 기뻐하라 너희에게 같은 말을 쓰는 것이 내게는 수고로움이 없고 너희에게는 안전하니라
여기 주님을 추구하는 삶을 살았던 바울은 기쁨의 삶을 당연시합니다. 종말에 주님의 백성들은 기뻐하는 삶을 순종하셔야 합니다. 먼저 바울은 그리스도안에서 기뻐하라 기쁨을 명령하고 있습니다. 그리스도인들은 기뻐하셔야 합니다. 또 기뻐해야 합니다. 이 기쁨을 명령하는 이유는 그리스도인들은 당연히 기뻐해야 할 백성이기 때문입니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바로 주안에 있기 때문에 기뻐해야 합니다.
우리가 알아야 할 것은 주님 안에서 기쁨은 환경을 초월한 기쁨입니다.
여러분 바울이 기뻐한 이유가 환경이 편해서 좋아서 기뻐합니까? 지금 바울은 로마 감옥에 있습니다. 그런데 기뻐합니다. 이것은 오늘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이 세상의 조건과 환경으로 기뻐하는 사람이 아닙니다. 고린도후서 4장을 보십시오.
“우리가 사방으로 우겨쌈을 당하여도 싸이지 아니하며 답답한 일을 당하여도 낙심하지 아니하며 핍박을 받아도 버린바 되지 아니하며 거꾸러 뜨림을 당하여도 망하지 아니하고”라고 합니다.
어떻게 이렇게 우겨쌈을 당하고 답답한 일을 만나고 핍박을 받고 거꾸러 뜨림을 당하는 가운데서 그리스도인들은 싸이지 않고 낙심하지 않고 망하지 않는 일이 가능합니까? 바로 보배되신 예수님때문이십니다. 여러분 우리는 질그릇같아서 깨어지기 쉽습니다. 순간 순간 낙심하고 절망하는 것이 사실입니다. 그러나 우리 안에 계신 우리 주님께서는 우리에게 그 순간에도 다시 하나님을 바라게 하시고 다시 주님을 소망하게 하십니다. 그래서 우리에게 소망을 주시고 기쁨을 주시고 우리 속에 새힘을 주시는 줄로 믿습니다.

그런데 여러분 나쁜 환경 힘든 상황에서 어떻게 기뻐할 수 있습니까?
중요한 것은 바로 생각입니다. 조용기 목사님이 지은 책 중에 4차원의 영성이 있습니다.
우리가 살고 있는 지금 여기의 세상은 3차원입니다. 하나님이 계신 곳은 4차원입니다. 3차원은 4차원에 속해 있는 것입니다. 4차원에 속한 하나님이 3차원의 세상을 만드시고 우리를 만드셨습니다. 그런데 우리 그리스도인은 예수님의 보혈로 3차원에서 4차원으로 건짐받은 존재입니다. 세상 사람들은 여전히 3차원에 살고 잇지만 우리는 4차원에 속해 살아가는 것입니다. 이제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4차원을 움직이면서 살 수 있는 존재들입니다. 어떻게 4차원의 하나님을 움직일 수 있습니까? 4가지 요소입니다. 생각,믿음,꿈, 말입니다. 여기에서 먼저 중요한 것은 생각입니다. 비록 지금 힘들지만 4차원의 하나님의 언어는 ‘나는 기쁘다’입니다. 그 4차원의 생각으로 3차원을 사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기뻐하라고 하니까 3차원에 생각대로 하지 않고 하나님의 뜻대로 기뻐하면서 사는 것입니다. 여러분 그런데 그렇게 기뻐하면 자꾸 기뻐할 일이 생깁니다.

여러분 사업이 안됩니까? 안된다고 울상을 하고 죽는 소리를 하지 말고 먼저 얼굴을 펴고 기뻐하시기 바랍니다. 가정에 어려움이 있습니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기뻐하고 밝은 모습으로 살아가보십시오. 얼마나 주님이 기뻐하시겠습니까?

오늘 여기에서 우리가 그리스도를 추구하면서 삶을 살아갈 때 어떤 지경에서든지 자신에게 기쁨을 선언하십시오. 구약에 시편은 스스로의 영혼을 향해서 이렇게 선언합니다. “내영혼아 기뻐하라” “내속에 있는 것들아 다 기뻐할지어다”
우리는 소유로 기뻐하고 환경으로 인하여 기뻐하고 즐거워할 존재가 아닙니다. 우리는 주님 때문에 기뻐할 존재들입니다. 복음으로 말미암은 우리의 축복을 생각하시기 바랍니다. 여러분 자신에 대해서 이렇게 선언하시기 바랍니다.
“나는 용서받고 의롭게 된 사람이다. 나는 거룩하고 성령받은 사람이다. 나는 고침받은 사람이다. 나는 저주에서 해방된 사람이다. 나는 영생을 얻은 사람이다” .우리는 하나님으로 인해서 그의 백성된 것으로 인해서 그래서 날마다 항상 나의 주가 되시는 그 분 때문에 기뻐해야 할 줄 믿습니다.

우리의 영혼이 병들었는가? 그렇지 않는가? 스스로 자가진단할 수 있는 바로미터기가 있습니다. 무엇입니까? 바로 기쁨이 없다면 내 영혼은 병이 들은 것입니다. 여러분 우리의 몸이 명이 들면 힘이 없고 만사가 귀찮고 의욕이 없습니다. 우리의 영혼도 마찬가지입니다. 영혼이 병이 들면 하나님 앞에 나와도 만사가 귀찮고 의욕이 없고 부정적이고 짜증스럽습니다. 혹시 우리 중에 기쁨을 잃은 분이 있습니까?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뻐하시기를 바랍니다. 기쁨의 성령을 순종하시기를 바랍니다. 오늘도 기쁨으로 우리 주님을 추구하는 삶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2. 분별력을 갖고 예수님을 추구해야 합니다.

오늘 2절에서 헛된 것을 추구하는 자들을 경계해야 한다고 하십니다.
2절“개들을 삼가고 행악하는 자들을 삼가고 손할례당을 삼가라”
“개들”“행악하는 자들”“손할례당”을 삼가야 합니다.
먼저 그리스도인들은 헛된 것을 추구하는 자들에게서 자신을 잘 지켜야 합니다. 삼가고 삼가고 삼가야 합니다. 여기 개들은 누구입니까?
그당시에 율법주의자들이었습니다.그들은 “개”라고 주의를 줍니다. 이 개라는 말은 애완용 개가 아닙니다. 몸집이 흉악스럽고 커다랗고 잔인하고 살기가 있는 들개를 가리키고 있습니다.썩은 고개를 먹으며 버려진 음식쓰레기 주변을 어슬렁거리면서 배를 채우는 개같은 율법주의자들을 조심하라는 것입니다.
율법주의자들의 주장이 무엇입니까? 행위를 통하여 구원을 얻을 수 있다는 것이었습니다.
여기 특별히 강조하는 것이 할례입니다. 믿음으로 구원받는 것이 아니고 할례를 받음으로 구원에 이를 수 있다고 주장했습니다.
그런데 이들의 주장으로 말미암아 빌립보교회 안에 믿음으로 구원받는다는 복음의 자유함을 얻는 사람들이 헛된 가르침 때문에 흔들렸습니다. 이런 위험한 이단인 “율법주의자”들을 향해서 바울은 “삼가고 삼가고 삼가라” 반복해서 강조하고 있습니다.

오늘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그리스도를 추구하기 이전에 그리스도를 흉내내는 가짜들을 경계해야 합니다. 이미 초대교회때부터 그리스도인들에게는 긴장을 늦출 수 없는 수많은 적들이 있어왔습니다. 그리고 말세에 가까울수록 더욱 심하게 될 것입니다.

미국의 죤맥아더라는 유명한 목사님은 현대 기독교의 내부의 적 3가지를 강조합니다.
율법주의와 신비주의 금욕주의입니다.
이 3가지는 교묘하게 위장되어져서 나타납니다. 겉으로 보기에는 경건한 것같습니다. 그러나 사실은 경건을 가장한 위선의 행동인 것입니다.
율법주의는 행위를 통하여 구원을 이룰 수 있다고 주장하는 행동파들입니다. 그래서 이들은 교회 속에서 갖가기 규칙과 규범을 통하여 구원을 이루어가야 한다고 주장합니다.
신비주의는 하나님의 말씀보다는 개인적이고 주관적인 직관이나 꿈에 의존하여 그것을 절대적인 것으로 해석하고 의지하는 것입니다.
금욕주의는 참된 영성을 얻기 위해서는 예수님처럼 궁핍한 삶을 살아야 한다고 주장합니다.
인간은 스스로 아무리 선행을 하고 노력을 한다해도 하나님 앞에 의로와 질 수 없습니다. 오직 예수님의 피를 믿어야 하나님의 의를 얻을 수 있습니다.

여러분 우리나라의 경우 예수님과 복음을 가장한 많은 이단들이 우리 주변에서 우리를 속이면서 유혹하고 있습니다.그런데 그들을 보면 너무 비슷한 면이 많습니다. 그러나 가만히 들어보면 결국에 끝은 다릅니다. 우리가 살고 있는 강릉에도 많은 이단들이 있습니다. 이단들의 몇가지 중요한 특징이 있습니다.
첫째 기독교의 기존의 권위와 전통을 무시한다.
둘째 성경이외의 다른 책을 강조하고 가르친다.
셋째 돈을 사랑하고 경제적으로 착취한다.
넷째 정욕적이고 호색적이다.
다섯째 강력하고 권위주의적인 지도자에 의해서 운영이 된다.
여섯째 특별한 열심이 있다.

그런데 여러분 왜 이런 이단에 사람들이 속을까요?
이단의 미혹에 빠지는 이유는 우선 이단의 배후에 역사하는 악한 역이 있기 때문입니다. 이단들의 유혹은 하와를 유혹했던 마귀처럼 아주 교묘하게 우리를 유혹합니다. 그래서 속는 경우가 있습니다.
그러나 더욱 중요한 이유는 무엇일까요?

복음에 대한 분명한 이해와 확신이 없기 때문입니다. 여러분 우리가 알아야 할 것은 복음보다 율법을 앞세우면 이단입니다.예수님보다 날이나 음식을 앞세우면 이단입니다.예수님보다 사람을 앞세우면 이단입니다. 성경보다 인간의 말을 앞세우면 이단입니다.이런 이단들은 우리를 어렵게 합니다. 우리를 어둡게 합니다.우리는 어긋난 삶을 살게 합니다. 조화를 깨뜨리고 헛된 방향으로 삶을 살게 합니다.그러나 복음은 그렇지 않습니다. 복음은 우리를 자유하게 하십니다. 복음은 우리를 참으로 하나님 앞에서 사람 앞에서 우리를 만족하게 합니다.
복음이 살아움직이는 교회가 되시기를 바랍니다.복음은 우리에게 오직 예수님을 강조합니다. 복음은 우리에게 오직 믿음을 강조합니다. 오직 에수님 오직 믿음으로 살아가시기를 바랍니다.
어떻게 왜곡된 가치 앞에서 우리는 반응해야 합니까? 왜곡된 가르침에 대해서 단호하시기 바랍니다. “삼가고 삼가고 삼가라”는 것입니다. 어쩌면 이 복음을 지키고 믿음을 지키는 일은 우리의 생명을 걸어야 할수도 있습니다.

우리는 복음과 말씀을 파수하기 위해 목숨을 걸었던 위대한 종교개혁자 마틴 루터를 기억합니다. 루터가 비텐베르크 교회 정문에 95개조를 내걸고 카톨릭의 오류를 지적했습니다. 당시에 카톨릭은 면죄부를 발행하면서 그것이 우리의 죄를 사하여준다고 하였고 비싼 돈을 받고 그것을 팔아 성당을 짓고 했습니다. 그때 루터는 오직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하신 복음의 깨달음과 확신을 갖고 카톨릭의 율법주의에 대항했습니다. 루터가 95개조를 걸고 난뒤에 그 글을 철회하라는 명령을 받고 로마의 고위 성직자들과 왕자들과 귀족들로 구성된 200인의 모임에 불려 오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루터에게 명령했습니다. “철회하겠는가.철회하지 않겠는가? 질문을 받았습니다.

루터는 서슴없이 대답했습니다. “폐하와 전하께서 제게 단순 명쾌하고 직설적인 대답을 요구하시므로 대답하겠습니다. 저는 제신앙을 교황이나 공의회들에게 굴복하지 않겠습니다. 왜냐하면 당신들이 오류에 빠졌고 모순에 빠졌기 때문입니다. 제 주장이 하나님의 말씀에 복속되지 못한다면 저는 어떤 것도 철회할 것도 없고 철회할 의지가 없습니다.” 라고 당당하게 선언하엿습니다.

여러분 오늘 여기에서 거짓진리에 대해서는 담대하시기를 바랍니다.
하나님의 편에서 진리의 사람으로 주님을 좇으시기를 바랍니다.
진리의 문제에 있어서는 인간적인 동정의 여지없이 결단의 의지가 있어야 합니다.
만일 교회가 이 부분에 있어서 거짓을 허용하면 결국 교회 건강에 적신호가 오고 결국은 주님 앞에서 책망을 받습니다.요한계시록에 버가모 교회가 그렇습니다.니골라당의 교훈을 허용하였습니다. 두아디라 교회의 경우 거짓 선지자를 허용하였습니다.이단의 가르침에 속거나넘어가지 않도록 조심해야 합니다. 항상 거짓된 교훈이 역사하지 못하도록 주의해야 합니다.
복음을 복음되게 하시기 위해서 진리로 무장하시기 바랍니다. 복음을 복음으로 누리기 위해서 진리로 깨어 있기를 바랍니다. 무장된 진리가 우리의 마음을 지켜줍니다. 깨어있는 복음의 사람이 진리를 위해 살게 합니다.

3. 육체를 신뢰하지 말고 예수님을 추구해야 합니다.

4절 "그러나 나도 육체를 신뢰할만하니 만일 누구든지 다른 이가 육체를 신뢰
할 것이 있는 줄로 생각하면 나는 더욱 그러하니라"
그리스도인들은 육체를 추구해서는 안됩니다.
바울의 육체가 무엇입니까? 바울이 그리스도 밖에 있을 때 추구했던 것은 그의 육체이었습니다.그는 육신을 신뢰할만한 조건의 사람이었습니다. 5-6절을 보면 그 구체적인 바울의 이력서가 소개되고 있습니다. 빌립보에 있는 유대인들이 얼마나 육체적인 것들을 자랑하면서 살고있는데 내가 과거에 그런 사람이었다는 것입니다.
바울이 이전에 추구하였던 삶이5-6절에 열거되고 있습니다.

1) 바울은 8 일만에 할례를 받았습니다.
할례는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명령한 것입니다.(창17;12) 난지 8일만에 할례를 받는 일은 아브라함의 전통적인 가문의 일입니다. 이것은 바울이 아브라함의 피를 받은 순수한 이스라엘 사람이라는 것입니다.할례는 이방인의 경우 유대교로 개종을 했더라도 할례는 개종할 때 받기 때문에 8일만에 할례를 받을 수 없습니다. 또 이스마엘의 후예들도 할례를 행하기는 행했으나 그들은 성년의 표시로 행했기에 전통적인 8일만의 할례가 아니었습니다.

2)바울은 이스라엘의 족속이었습니다.
창25;2절에 보면 아브라함에게는 아들 여덟명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아브라함을 대표할 수 있는 아들은 이삭이었습니다. 그 이삭의 혈통이 곧 이스라엘인 것입니다. 이는 하나님의 약속의 자손인 동시에 축복의 자손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3)바울은 베냐민 지파입니다.
베냐민 지파는 명문의 지파라 할 수 있습니다. 베냐민은 그의 아비 야곱이 특별한 사랑을 주었던 아들입니다. 베냐민은 요셉과 함께 라헬의 소생이었으면서도 열두 아들의 막내였기
때문에 더 야곱의 사랑을 독차지 했었습니다. 또 베냐민은 약속의 땅 가나안에서 출생을 했습니다(창35;17-18) 라헬이 베냐민을 낳고 일직 죽었기 때문에 야곱이 그를 더 사랑했었습니다. 또 요셉을 잊어버렸기 대문에 더 사랑을 받았었습니다. 이스라엘의 초대 왕 사울도 바로 이 베냐민 지파에서 나왔던 것입니다.(삼9;1,2). 베냐민 지파는 이스라엘이 양분될 때 열 지파를 따라 북으로 가지 않고 유대와함께 나라를 세운 지조가 있는 지파입니다.
그만큼 베냐민 지파는 이방인의 피가 섞이지 않았습니다. 그러므로 그만큼 당당한 것입니다.

4)바울은 히브리인 중 히브리인입니다.
히브리인이라고 말할때는 타 민족과 구분할 때 사용하는 말입니다. 이는 대대로 타 종족과 혈연의 관계를 가지지 않은 순수한 혈통을 말할 때 흔히 이런 표현들을 사용했었습니다.즉 바울은 “순수한 이스라엘 민족의 족속중에 가장 순수한 자”라고 합니다.

5)바울은 율법으로는 바리새인입니다.
바리새파는 "분리된 자들"이란 의미를 가진 사람들로 당시 사두개파와 에세네파와 함께 유대인의 3대 당파중에 하나였습니다.

일반적으로 바리새파는 율법의 엄격한 준수 특히 모세 5경에 기록되어 있는 레위의 정결을 엄수함이 그 특징이었습니다. 예수님 당시 약6,000명 정도의 당원을 가지고 있었는데 이들은 이스라엘의 정신적 지주가 되었었습니다.특히 바울은 바리새인 중에서도 가장 뛰어난 학자인 가말리엘 밑에서 수학한 사람입니다.이스라엘에서 바리새파는 이미 출세길이 열린 것입니다. 그리고 실세요 유명한 사부를 둔 바울은 종교학자로서 그 앞길이 보장된 것입니다.
결국 바울은 “율법의 의로는 흠이 없는 자입니다”.그만큼 완벽한 조건을 갖춘 사람인 것입니다. 육체적인 완벽한 조건을 갖추고 율법을 추구하던 사람이 바울이었습니다.

그런데 바울은 진정한 그리스도인이 되고나서 이런 것들에 대해서 무엇을 고백합니까?
7절 “그러나 무엇이든지 내게 유익하던 것을 내가 그리스도를 위하여 다 해로 여길뿐더러”
라고 하고 있습니다. 바울이 가치로 여겼던 것들이 예수님 앞에서 다 “해로 여긴다”고 고백합니다. 8절에 보십시오, 여기서는 ‘배설물’로 여긴다고 합니다.

8절 “또한 모든 것을 해로 여김은 내 주 그리스도 예수를 아는 지식이 가장 고상함을 인함이라 내가 그를 위하여 모든 것을 잃어버리고 배설물로 여김은 그리스도를 얻고”라고 합니다.
바울은 예수님에 대해서 알고부터 세상 것들은 “배설물”로 여기게 되었습니다.
배설물이란 똥을 의미하고 음식물의 찌꺼기,쓰레기를 의미합니다. 예수님이전에는 멋있고 좋아보이던 것들이 예수님을 알고부터는 다 쓰레기장에 버리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그만큼 가치가 없어졌다는 것입니다.

이땅의 많은 사람들이 구하고 찾고 추구하는 것이 무엇입니까?
육체의 자랑을 좇습니다. 어떻게 하든지 내가 세상에서 내육체를 자랑할만한 이력과 경력을 쌓기를 추구합니다. 그래서 공부도 합니다. 운동도 합니다. 많은 수고와 노력을 아끼지 않습니다. 물론 우리 육체의 필요를 부인하지 않습니다.
혹시 우리가 세상에서 “그리스도인들은 공부하지 않아도 된다 ”“그리스도인들은 집안도 필요없다”“그리스도인들은 세상의 이력과 경력이 필요없다” 이것이 아닙니다.
우리가 즐겨찾는 보석을 보십시오.

지금 여러분 앞에서 다이아몬드가 있다고 할때 금이나 은이나 동은 자연히 가치가 낮습니다. 이왕이면 다이아몬드를 선택합니다. 왜 그렇습니까? 더 귀하고 값진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렇다고 금이나 은이나 동이 필요없는 것은 아닙니다. 그 용도에 따라서 필요합니다. 그러나 다이아몬드와 비교할때에는 가치가 낮습니다. 우리가 세상을 살아갈때에 세상의 가치를 완전히 부정하지는 않습니다. 진짜 보석이신 그리스도 앞에서 그것들은 가치가 낮은 것들입니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진짜 보물을 발견한 사람들입니다.
썩지 않고 쇠하지 않고 영원한 하늘의 보물 예수님을 안 사람들입니다. 여러분 그 보물을 소유하심을 기뻐하시기를 바랍니다. 그 보물 예수님을 나의 것으로 삼으심을 행복해하시기를 바랍니다. 날마다 그 보물이신 예수님을 자랑하시기를 바랍니다. 예수님을 선전하시기를 바랍니다.우리 그리스도인들은 모두가 예수님을위해서 홍보맨 선전꾼이 되어야 합니다.

우리는 엄청난 상품의 홍보시대 선전과 광고시대에 살고 있습니다.
기업들마다 광고를 위해서 엄청난 투자를 합니다. 왜냐하면 광고를 해야 팔리기 때문입니다. 광고를 해야 홍보가 되기 때문입니다. 여러분 교회도 그렇고 우리 그리스도인들도 그렇습니다.
어제 저희 교회에서 처음으로 거리에서 찬양을 하면서 전도했습니다. 청년들과 전도팀이 농협 앞 사거리에서 떡과 차와 전도지를 나누어주면서 전도를 했는데 아주 반응이 좋았습니다. 교회를 알리는 띠를 두르고 기타를 치고 찬양하면서 떡과 음료수를 전도지와 함께 나누어줄 때 여러분 얼마나 주님이 기뻐하시겠습니까?

그런데 이런 모습을 세상 사람들이 보고는 무엇이라고 할까요?
아니 그리스도인이면서도 육신적인 관점에 있는 분들은 어떻게 바라볼까요? 혹시 잘못되고 미친게 아니야 그렇게 바라볼 수 있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육신적으로 바라볼때에는 그것은 미친짓이고 어리석고 미련한 짓입니다.

여러분 그리스도를 추구하고 복음을 선전하고 우리 주님을 따라가는 것은 세상적으로보면 어리석고 미련하고 헛된 짓입니다. 왜냐하면 육신을 따라 하는 일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육체를 따라 사는 사람이 아닙니다. 우리는 그리스도를 따라 사는 사람들입니다. 그리스도를 따르기 위해서 세상적으로는 육체적으로는 고난받으면서도 손해보면서도 고생이 되어도 주님을 좇게 되는 줄로 믿습니다.

나가는 말 )
우리의 삶에서 우리 주님을 참으로 추구하는 삶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기쁨으로 우리 주님을 좇아갑시다. 분별력을 갖고 영적순결함으로 우리 주님을 좇아가시기를 바랍니다. 세상의 육체를 신뢰하지 말고 오직 주님을 자랑함으로 우리 주님을 좇아가는 삶이 되어서 날마다 행복한 그리스도인의 삶을 살아가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깅동수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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