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그인

  • 목록
  • 아래로
  • 위로
  • 쓰기
  • 검색

설교 나의 소망은 주께 있나이다 (시 39:5-7)

  • 잡초 잡초
  • 385
  • 0

첨부 1


이 세상 어느 누구를 막론하고 어려움 없이 세상을 사는 사람은 없습니다. 다른 사람에게는 아무리 훌륭해 보이는 사람일지라도 나름대로 가지고 있는 말 못할 진실과 과거의 어려웠던 때가 있을 것입니다. 이제까지 살아오면서 정말 삶의 소망을 잃어버렸던 때도 있을 것이고 뿐만 아니라 삶에 대한 모든 기대를 상실했던 때도 있을 것입니다. 사람에 대한 기대를 접었을 때도 있을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수많은 사람들이 살아가고 있는 이유는 무엇일까요? 그것은 다름이 아니라 사람의 마음에 소망이 있기 때문입니다. 비 오는 날 장마의 지경 속에서도 장마 그치고 희끗한 하늘에 햇빛 비취어 맑게 개일 날을 소망하고 믿기에 사람들은 살아갑니다. 우리 인생에 아무리 햇빛이 비취지 않는 음습한 지하 곰팡이 나는 이와 같은 곤혹한 지경 속에서도 왠지 모르게 소망이 있고 왠지 모르게 현재의 아픔을 딛고 일어설 기대가 있기 때문에 우리는 살아가게 되는 것입니다.

요즘 많은 사람들은 다른 사람들이 이러저러해서 잘됐다 하는 얘기를 듣고 그렇게 감동받지는 않습니다. 왜냐하면 나와는 너무 멀리 있다고 생각이 들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어떤 사람이 이러저러한 어려움을 겪고 어려움 가운데서 현재도 어렵지만 또 그 어려움을 극복하고 나아가고 있다던가 아니면 여러 가지 어려움이 있는데 이러저러하게 그 어려움을 극복하고 지금 번듯하게 서있다라는 것들을 사람들은 더 귀담아 들으려고 합니다. 말하자면 미담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우리 인생들은 항상 생각하기를 나는 매우 힘들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어릴 적부터 모든 것을 다 갖추고 진행과정도 좋고 결과도 좋다하면 나하고는 너무 거리가 멀어 보입니다. 하지만 어떤 어려움도 있고 과정의 슬픔과 아픔도 있고 실패도 있었을 지라도 그 어려운 과정을 극복해가는 과정을 보게 되면 왠지 모르게 나하고 비슷한 동료의식을 느끼게 됩니다. 그리고 그 극복의 과정을 보면서 나도 어떤 일을 할 수 있다는 마음속에 격려를 받게 됩니다. 따라서 세간의 사람들은 적어도 지도자만은 어려움을 극복한 사람들의 경우를 더 좋아합니다. 왜냐하면 그래야 자신도 소망을 가질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대부분 정치 지도자들을 보면 하나같이 자신의 어렸을 적의 얘기 그리고 어려웠을 때의 이야기와 그것을 극복한 이야기들을 미담화시켜서 나누는 경우가 보통입니다. 그것은 훨씬 정서적 공감을 쉽게 얻기 때문입니다. 물론 이것이 잘못된 것은 아닙니다. 오히려 많은 사람에게 소망을 주는 좋은 경우일 것입니다. 결국 이 모든 경우를 생각해 볼 때 결국 우리 인생이라는 것은 만만치도 않고 또한 고난과 아픔이 있는 어려운 지경이라는 것을 우리는 알게 됩니다.

오늘 성경을 쓴 시편의 기자 다윗은 자신의 소망은 주께 있다라고 고백합니다. 그런데 다윗의 이런 고백이 그냥 나온 고백은 아닙니다. 그는 어렸을 때 이미 하나님께 점지되어서 왕으로서 세움을 받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께 왕으로 기름부음을 받은 이후에 그가 실제적인 삶의 왕으로 등극하기까지는 많은 과정이 필요했고 그 과정이라는 것은 큰 어려움의 역사였습니다. 특별히 다윗은 물매 돌 하나를 가지고 거대한 장성 골리앗을 넘어뜨리는 큰 역사를 이루었지만 바로 그 역사 때문에 사울 왕에게 시기를 받게 됩니다. 그리고 그것을 통하여서 결국 그의 평생에서 긴 기간을 쫓기며 이리저리 방황하고 이리저리 고통을 당하며 도망치는 생활을 하게 됩니다. 그와 같은 고통의 세월 끝에 그는 왕위에 오르고 왕위에 오른 이후에도 그는 또 자기의 사랑하는 아들 압살롬에게 반역을 받아서 그는 변경까지 쫓겨 가는 어려움을 겪습니다. 또 뿐만 아니라 스스로 잘못한 것 때문에 그는 큰 어려움을 겪기도 하고 이리저리 방황하고 헤매다 결국 그가 마음속에 가지게 되는 것, 고통 중에 깨달은 것이 있으니 소망이 주님께 있다는 것을 깨닫게 되는 것입니다. 결국 이와 같이 그의 인생의 모든 길을 살펴볼 때 하잘것없는 인생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분주하게 내일을 모르고 살아가는 인생인데 그 가운데 결국 주님께 소망이 있음을 발견하고 새로운 삶의 출발을 이룸을 고백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제 오늘 본문을 보면서 우리는 우리가 살아가는 삶에 대해서 잠시 생각해 보려고 합니다.

첫 번째 우리가 생각해 보는 것은 하잘것없는 우리 인생의 모습을 오늘 성경은 말씀하고 있습니다.
주께서 나의 삶 나날을 손 넓이만큼 되게 하시고 그저 나의 삶의 기한이 이 손바닥 넓이만 하다 하는 것입니다. 나의 일생이 주님 앞에는 없는 것 같사오니 사람마다 그 든든히 선 때도 진실로 허사뿐이다라고 고백하고 있습니다. 요 손바닥만큼 제한된 삶 연약한 삶, 그리고 그만큼 작은 우리의 꿈과 소망과 기대를 생각해봅니다. 정말 우리의 삶이 매우 제한된 삶이라는 것을 우리는 늘 느끼고 있습니다. 아무리 원해도 우리의 생명의 호흡을 하루인들 더 연장할 수가 없습니다. 아무리 원해도 하나님이 허락하지 않으면 우리 삶의 영역을 한 치라도 더 넓힐 수 없음을 봅니다. 아무리 애써도 결국 우리 인간의 능력은 한계가 있음을 봅니다. 아무리 농부가 열심히 농사를 지어도 태풍이 불어오면 그 모든 것이 다 날아가 버리게 됩니다. 그러면 우리가 열심을 내서 최선을 다해서 산다는 것은 무엇일까요? 열심을 다해서 최선을 다해서 산다는 것은 태풍으로 날아가 버린 그 뒤에 또다시 일어나서 낙망하지 않고 씨를 뿌리고 가꾸는 것이 우리 삶에 열심입니다. 우리 삶에 열심은 태풍이 오는 것을 막을 수는 없고, 태풍에 다 날려 보냈어도 그 자리에 또 씨를 뿌리는 이와 같은 애틋한 열심이 우리 삶의 열심일 뿐입니다. 그러니 우리는 손바닥만한 삶으로서 한계를 가지고 살고 있습니다. 우리의 한계라는 것이 우리에게 소망이 없다는 것이 아니라 이와 같은 우리의 한계가 하나님께 대한 소망이 있는 우리의 삶의 모습을 가르쳐 주고 있는 것입니다.

저는 목사로서 성도들에게 여러 가지 모습을 살펴볼 수 있습니다. 비교적 한계상황 속에서 많은 성도들을 만나게 됩니다. 목사를 개별적으로 만나는 성도들은 대부분 어려운 경우가 많습니다. 정말 아무리 원해도 어쩔 수 없어 하나님이 정해놓으신 삶의 시간과 계획 속에 진행되는 인생의 모습을 보며 마음에 안타까워 할 때가 있습니다. 마지막 숨을 몰아쉬는 지경을 향해 가는 인간들을 보며 정말 우리의 인생은 손바닥 넓이밖에 되지 않는구나 하는 생각을 합니다.

저도 분당에 와서 이 강단에서 설교한지 벌써 15년이 되었습니다. 이제까지 사역의 길이를 생각해보면 별 것 같지 않은데 벌써 15년이라는 시간이 지났습니다. 제가 30대 초반에 왔는데 벌써 내년이면 한국 나이로 50이 됩니다. 어떻게 그렇게 시간이 되었을까하고 상당히 의아하게 생각이 됩니다. 이제 앞으로 남은 시간들이 도대체 얼마나 될까하는 이런 생각들을 해보면서 우리의 삶의 나날이 결코 그렇게 긴 것이 아니라는 생각이 듭니다. 요즘은 무슨 생각이 드는가 하면 이제 별로 시간이 그렇게 많은 것 같지 않은데 실수하지 말아야겠다는 생각이 듭니다. 왜냐하면 이제는 실수를 회복할 수 있는 기회가 늘 있는 것 같지 않습니다. 그리고 다른 이들에게 손해나 어려움 끼치지 말고 될 수 있으면 마음 상하게 하지 말고 그저 기쁨만 줄 수 있게 해야겠다라는 배려의 마음이 드는 것을 봅니다. 이제 마음 상하게 하고 그 마음을 위로할 수 있는 기회가 그렇게 흔하지 않을 것 같습니다. 때로는 배려의 심정이 드는 것을 보면서 오히려 다른 사람을 배려하는 제 마음을 보면서 이제 그렇다면 해 그림자가 오전에서 오후로 가 있구나라는 것을 느끼게 됩니다. 요즘에는 부목사님들 많지 않습니까? 부목사님들을 보면 제가 나은 면도 한두 가지 있겠지만 오히려 저보다 훨씬 나은 면을 우리 목사님들로부터 많이 발견을 합니다. 열심도 저보다 낫고 여러 면에서 제가 도움을 받아야할 면이 있음을 느낍니다. 또 제가 그 분들을 도와드려서 어떤 일을 이루는 것이 훨씬 더 효과적이겠다는 생각을 많이 가지게 됩니다. 정말 우리 인생이라는 것은 언제든지 흘러가고 있고 흘러가는 인생 중에서 우리 삶이라는 것은 나도 모르게 저만치 가 있는 것입니다.

살펴보면 우리의 인생이 정말 손바닥만큼 남아 있다라는 것을 느끼게 됩니다. 또한 성경에서는 손바닥만한 인생인데 우리의 일생이 주 앞에는 없는 것 같다고까지 말씀하고 있습니다. 우리 인생이 주님의 은혜 앞에 생각해 보면 손바닥만한 것이라도 그것조차도 없는 것처럼 미미 하다라는 것입니다. 이사야 40장 12절을 보면 이렇게 말씀합니다. 누가 손바닥으로 바닷물을 헤아렸으며 누가 하늘을 뼘으로 재어서 그 넓이와 그 길이를 재어 봤느냐 누가 이 세상에 있는 모든 티끌, 이 흙을 다 되로 담아서 헤아려 보았느냐 아니면 누가 이 산들의 무게를 저울로 달아보았느냐. 하나님이 한순간에 말씀으로 창조하신 이 모든 천하 만민 세계가 우리 인간으로서는 헤아리지도 못한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 인간들이 과연 하나님 앞에 무엇인가? 이사야 40장 17절에 이렇게 말합니다. 이세상의 모든 나라가 아무것도 아니고 없는 것 같이 빈 것 같이 작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주님의 큰 능력과 은혜를 깨달음으로 우리의 누추함을 보는 것 곧 주님의 발견과 우리의 발견이 우리 인생의 깨달음과 새로운 출발의 시작이라는 것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욥기를 보면 욥이라는 사람은 동방의 의인이라고 불렸습니다. 정말 그는 믿음이 좋았고 정의로웠고 또 뿐만 아니라 그는 바른 생활을 하고 있었습니다. 하나님의 축복도 많이 받아서 큰 부를 누리고 있었고 자녀들도 잘 자라고 있었습니다. 어느 날 사단이 하나님께 와서 얘기합니다. 하나님께 욥이 축복을 받았으니까 하나님을 잘 섬기는 것이지 욥이 그의 모든 것을 빼앗겨도 하나님을 잘 섬기겠습니까? 하면서 욥에게 있는 모든 것을 한번 빼앗아 보겠다고 하나님께 얘기합니다. 하나님은 사단의 시험을 허락하셨습니다. 그러나 욥의 목숨에 대해서 네가 건드리지 말라라고 말씀하십니다. 이것은 우리들에게 이루어진 모든 사단의 작용도 역시 하나님의 한계 속에 이루어지는 것이지 사단이 자기 마음대로 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하는 것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사단이 시험을 걸어서 욥의 모든 것을 빼앗아 갑니다. 재물이 무너지고 자녀들을 일거에 다 잃어버리게 됩니다. 심지어는 사랑하는 아내까지 그를 떠나가게 됩니다. 뿐만 아니라 그의 몸은 병들게 됩니다. 기왓장을 가지고 홀로 길거리에 서서 그는 정말 온몸을 긁어대는 가장 처참한 지경에 이르게 되는 것입니다. 가장 추앙받을 수 있는 위치에 있는 사람이 가장 처참한 자의 모습으로 떨어지게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거기다 그를 사랑하던 이전의 친구들까지 와서 이와 같이 모든 외적인 조건을 완전히 상실한 욥에게 그의 심적인 상태까지도 공격하고 있는 것입니다. ‘욥아 네가 하나님께 무슨 죄를 지었기에 이렇게 큰 재앙을 당하는 것 아니냐 그러니 네가 하나님께 진 죄를 너는 회개해야하지 않겠느냐’ 그런데 욥은 그 어려움 가운데에도 하나님을 욕하거나 한탄하거나 원망하지는 않았습니다. 그렇지만 자기가 불의했다는 부분에서 욥은 자기의 자존심을 내세우고 있는 것입니다. 내가 뭐 잘못한 게 있느냐 나는 의롭게 살았고 나는 주장할 수 있다며 자기의 주장에 대해서 변론을 하게 됩니다.

그런데 이와 같은 공방을 거치고 난 후에 어느 날 하나님께서 자연 속에 나타나십니다. 대 자연속의 신비함과 하나님의 역사와 섭리의 오묘함을 보여주실 때 욥은 기가 탁 막혀 버리는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 앞에 이렇게 고백하지요. 욥기 40장 4절을 보면 “나는 미천하오니 무엇이라 주께 대답하오리까 손으로 내 입을 가릴 뿐이로소이다” 내가 이제까지 말하고 사는 것이 정말 부끄러워서 내가 내 이 손으로 내 입을 가리워야지 내가 이제까지 말한 바가 너무너무 부끄러워서 나는 하나님 앞에 정말 얼굴을 들 수 없다고 고백하고 있는 것입니다. 의롭다고 했던 것 우리의 의는 더러운 옷과 같습니다. 정말 우리가 아무리 자랑하는 의라도 더러운 옷과 같을 뿐이고 우리가 하나님 앞에 내려놓을 것도 없고 우리가 변론하는 것 자체가 하나님 앞에 너무나 누추한 부끄러움일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차라리 손으로 내 입을 가리겠습니다.

우리 살아가면서 이런 적 없나요? 내 손으로 내 입술을 가리고 내 생각을 가리고 내 손을 가지고 정말 나의 부끄러운 과거에 나의 교만함과 나의 어리석음을 가리워야 될 부분들이 우리들에게 왜 없겠습니까? 정말 우리의 삶이라는 것은 손바닥만하며 그 손바닥만 한 것도 하나님의 은혜를 생각하면 정말 미미하여 없는 것 같고 그리고 든든히 선 때도 진실로 허사뿐이라고 얘기하고 있습니다. 여러분 우리가 든든히 섰다고 생각하는 때가 있지요? 그때도 보면 허사라는 것입니다. 여러분 우리 이렇게 서있는데 어느 날 문득 밑받침이 쑥 빠져요. 그러면 우리는 어떻게 되지요? 아래로 추락하게 되는 것입니다. 예기치 못하게 추락합니다. 세계 재앙의 그물이 홀연히 덮침과 같이 우리 인생에게 재앙이 덮친다고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어느 날 갑자기 우리는 밑으로 뚝 떨어지게 된다는 것입니다. 아무것도 보장받을 수 있는 것은 없습니다. 우리가 누리고 있었던 모든 지위, 우리가 이루었던 모든 성취와 업적 우리가 갖추었던 모든 지식과 힘, 우리의 모든 주변 여건능력, 그 모든 것도 어느 날 우리들에게 하루아침에 무너지게 된다는 것입니다. 나를 지켜주는 사람들이요? 사람가운데 끝까지 우리를 지켜줄 수 있는 사람이 어디 있겠습니까? 여러분 생각해 보세요. 여러분 우리 인간들에게 가장 끝까지 우리를 지켜줄 수 있는 사람이 누구 같아요? 부모가 아니겠습니까? 아니면 사랑하는 많은 사람이겠지요. 그런데 근본적으로 인생은 능력이 안됩니다. 우리를 지켜줄 능력이 안됩니다. 마음이 바뀌어 질 수 있습니다. 마음도 안 바뀌고 능력도 있어도 언젠가는 세상을 떠나게 됩니다. 그러니 우리 곁에서 영원히 우리를 지켜줄 있다고 아무도 말할 수 없습니다.

내가 이룬 모든 것도 마찬가지입니다. 내가 모든 것을 이뤄놓았고 어떤 것을 성취했고 모든 것을 누릴 수 있는 여건과 능력이 된다고 할지라도 그것도 내게 주어진 주변 환경과 여건이 바뀌지 않아야 합니다. 그러니 내가 모든 능력이 있는데 이렇게 생각해 본다고 합시다. 어느 날 내가 갑자기 전혀 알지 못하는 외딴나라에 우리가 뚝 떨어졌다고 합시다. 내가 말도 모르고 글도 모르고 풍습도 모르고 문화도 모르고 모든 것이 낯설어요. 거기서 할 수 있는 것들이 무엇이 있겠습니까? 우리는 가장 무능한 사람이 되는 것 아니겠습니까? 여러분 우리 삶의 환경이라는 것이 수시로 바뀝니다. 나는 가만히 있어도 삶의 환경이 바뀌는 것입니다. 우리는 늘 분주히 움직이고 삶의 변화를 능가하는 능력을 갖추기 위해서 애를 쓰며 힘들게 살아갈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어제의 성공이 오늘의 성공을 보장하지 못해요. 어제의 이룸이 오늘의 이룸을 보장하지 못해요. 여러분 어제 세수하셨지요? 여러분 어제 세수 했는데 오늘 또 세수하고 오셨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어제 세수한 게 오늘을 유지 시켜주지 못하니까요. 마찬가지입니다. 제 얘기해 드릴까요? 지난 주일에 열심히 설교 준비해서 설교를 잘 했다고 합시다. 그게 이번 주에 아무 소용이 없어요. 이번 주에 새로이 빈칸을 채워놓아야 합니다. 그 빈칸 채운 것을 가지고 정말 또 잘해서 여러분에게 말씀을 전해 드려야만 되잖아요. 다음주일에 또 새로 시작해야 합니다. 여기서 15년 설교했으면 몇 번이나 설교 했겠습니까? 매번 새로 시작하는 것입니다. 시간이 가면서 점점 더 어려워지는 것 같습니다. 우리의 과거의 삶이 우리를 보장해주지 못합니다. 우리가 과거에 무엇을 이루었다고 해서 그것이 개입되어서 해결해주지 못합니다. 사람의 자신만만함과 교만함도 그 한계를 생각하면 한낱 바람에 날리는 겨와 같습니다. 그러니 우리가 자랑하는 것도 사실 밑이 빠져있는 허공에 있는 것과 같이 불안한 경우가 있습니다.

베드로가 어느 날 물위를 걷습니다. 예수님이 물위를 저벅저벅 걸어오시니까 ‘예수님 저도 걷게 해주십시오.’ 그러자 예수님께서 ‘오라’라고 하셨고 베드로가 물위로 풍덩 뛰어들어서 물위를 걸어갔습니다. 그러더니 바람을 보고 무서워하여 풍덩 물속에 빠졌습니다. 여러분 생각해 보세요. 우리 인생이라는 것이 물위를 저벅저벅 걷는 것 같이 씩씩하게 달려가다가 어느 날 갑자기 삶의 장애가 생겨서 그냥 풍덩 물속으로 빠지는 것과 같은 것입니다. 그런데 이러한 내 인생의 허망함을 깨닫는 것은 내 인생의 연약함과 무능함을 인정함으로 말미암아 이제는 주님의 은혜로 우리의 동력의 공급원을 바꾸라는 뜻입니다. 내 인생이 주님 앞에서 없다는 것이 인생에 대한 부정이 아니라 주님의 은혜가 그만큼 크다는 것과 이제는 주님의 은혜로 인해 살게 되리라는 기대가 동시에 있다는 것을 의미하고 있습니다.

두 번째 생각해 봅니다. 이러한 지경 중에 있는데도 불구하고 우리 인간들은 헛된 일에 분주하게 살아가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진실로 사람은 그림자 같이 다니고 헛된 일에 분요하며 재물을 쌓으나 누가 취할는지 모른다고 말씀합니다. 여기 사람은 그림자 같이 다닌다고 얘기하고 있습니다. 그림자가 무엇입니까? 실제가 아닌 허상입니다. 그림자는 빛이 있어야 생깁니다. 어떤 물체가 있는데 빛이 있는데 그 빛이 물체를 투과하지 못하면 반대편에 그림자가 생깁니다. 햇빛이 됐건 달빛이 됐건, 전등 불빛이 됐건, 여하튼 빛이 있어야 그림자가 생깁니다. 그림자는 실제가 아니라 실제의 허상입니다. 그런데 우리 인생은 그림자같이 다닌다는 것입니다. 뭔가 열심히 하는 것 같은데 그것이 의미없는 것입니다. 뭔가 부지런히 하고 수고하는 것 같은데 그것이 아무것도 아니라 말입니다. 가끔가다 우리 인생이 그림자같이 살고 있다라는 생각을 가질 때 있지 않습니까? 어리석은 판단, 쓸데없는 집착, 우리는 그림자 같은 인기, 혹은 휘두를 수 있는 권력, 아니면 어리석은 인생의 정욕, 받아 치면 다 쓰러질 모래성과 같은 이와 같은 것들을 쌓고 있는 것은 아닌가 생각합니다.

여러분 인생의 어떤 위업을 이룬 사람이 많습니다. 여러분 인생에 영웅이 많지 않습니까? 그 중에 오늘 한 분을 생각해 봅시다. 여러분 알렉산더라는 사람 알죠? 대단한 사람입니다. 기원전에 살았던 사람으로 정말 대단한 사람입니다. 기원전 230년쯤에 유럽, 아프리카, 아시아, 인도까지도 가서 점령하고 자신의 대 제국을 건설한 사람이었습니다. 그런데 이 알렉산더 대왕이 나이가 몇 살인지 아세요? 20살 때 왕이 되어서 33살에 죽었습니다. 20살에 왕이 되서 12년 8개월 동안 재위하고 33살에 죽었습니다. 그러니까 13년 동안 이 어린 나이에 그는 대업을 이루었습니다. 그가 가진 것은 전 세계가 하나의 제국이 되고 전 세계가 연결되어 위대한 제국을 건설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는 20살에 왕이 되서 13년 만인 33살에 죽었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 알렉산더가 그의 삶에 있어서 그가 가장 고민 한 것은 그가 앞에 있는 나라를 정복하지 못할까 이런 걱정이 아니었습니다. 그는 16살 때 아리스토텔리스를 통해서 많은 것들을 배우게 되었습니다. 문학이나 철학이나 윤리나 정치나 모든 것을 배웠습니다. 제대로 된 삶의 기초를 갖춘 사람입니다. 어린 나이에 왕이 돼서 그는 정복을 하고 대 제국을 거느린 이와 같은 큰 대왕이 됐습니다. 그런데 그에게 있어서 가장 큰 고민은 자기 자신에 대한 정당성이었습니다. 내가 과연 대 제국을 건설하기 위해서 이와 같이 나라를 점령하고 승리하지만 그 과정 가운데서 죽어가는 수많은 사람들을 볼 때 과연 내가 하는 일이 옳으냐 하는 것입니다. 내 군사들이 죽어가고 그들의 식솔들이 눈물과 비탄에 빠지게 될 것이며 또 상대 적국의 사람들이 죽고 수많은 사람들이 눈물을 흘리게 될 것인데 과연 그것이 옳으냐가 그에게 있어서 큰 갈등이었던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는 정상적인 사고를 가지고 있었습니다. 만약에 정복의 야욕에만 불타 있었다면 그는 그런 생각조차 가질 수 없었을 것입니다. 여러분 많은 정복자들이 결국 환상 속에 시달리다가 마지막에 괴로워하는 것은 무엇입니까? 내가 과연 옳은가 하는 것입니다.

우리의 삶이 과연 실상을 따르고 있는가? 아니면 허상을 따르고 있는가 하는 것은 매우 중요한 것입니다. 우리 인생은 그림자 같이 다닐 때가 있습니다. 쓸데없는 집착, 의미없는 정욕에 휘둘림, 그리고 우리 마음속에 언제나 이와 같이 시달리고 있는 삶의 역사들을 생각해볼 때 갑자기 헛된 일에 분요할 때가 있죠? 참됨이 없을 때 아무리 애써도 소용이 없습니다. 우리 인생에 왜 이런 헛된 일에 분주한 것일까요? 우리 인생은 무엇인가를 하게 되어있습니다. 자전거는 달리지 않으면 넘어집니다. 자전거는 달려야 넘어지지 않습니다. 그러니까 끊임없이 우리는 가는 것입니다. 우리는 시간이라는 움직이는 벨트는 타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우리는 그 움직이는 벨트 위에서 넘어지지 않기 위해서 애를 쓰면서 가고 있는 것입니다.

때로는 우리의 분주함이 마치 무엇을 이룬 것처럼 착각하게 하지만 우리의 분주함이 어떤 것을 이룰 수는 없습니다. 여러분 죄라는 것이 무엇입니까? 죄의 원뜻이 무엇입니까? 화살이 과녁을 벗어났다는 것입니다. 그러니 우리 인생에 있어서 화살이 과녁을 벗어나니 가도 가도 결국 힘이 떨어지면 떨어질 뿐이고 어느 목적지에 도달해도 그것은 아무 의미가 없는 것입니다. 인생이 잘못됐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하나님이 그의 형상을 따라 우리를 의와 진리와 거룩으로 만드셨습니다. 우리는 의롭고 거룩하고 진리를 추구하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인간이 하나님을 벗어나기 위해서 결국 하나님의 뜻을 깨뜨리는 죄를 범했습니다. 그러니까 죄라는 것은 하나님의 뜻을 어기는 것입니다. 과녁에서 벗어나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 다음에 온 것이 무엇입니까? 인간에게는 영원한 죽음이었습니다. 하나님과 영적인 분리라는 것은 인생의 죽음이었습니다. 전에는 죽음이라는 것이 없었습니다. 이 죽음은 육신적인 죽음뿐 아니라 우리의 영혼의 죽음이었습니다. 그러니 우리 인생이라는 것이 얼마나 곤고한 삶을 살아갑니까? 그러니 우리는 비틀어진 구조를 가지고 있기 때문에 우리는 자연스럽게 맡겨놓으면 비틀어진 채로 간다는 것입니다. 따라서 우리는 뭔가 부지런히 애쓰는 것 같아도 그 애쓰는 것이 헛된 일이 되는 경우가 많습니다.

재물을 쌓으나 누가 취하나 알지 못합니다. 우리는 내일 일을 알지 못합니다. 과연 이것이 누구를 위한 수고인지 알지 못합니다. 문득 우리 이런 생각이 들 수 있지 않습니까? 열심히 무엇인가 하는데 문득 내가 이 일이 싫어지면 어떡하지? 이것이 의미없는 일이라고 생각되면 어떡하지 하는 때가 있지 않습니까? 아무리 집착하고 애쓰면서 하는 일이라도 문득 ‘이거 아니야, 손 놓자.’라고 생각될 때가 있지 않습니까? 우리는 어리석은 부자 비유를 압니다. 들판에 소출이 가득합니다. 그런데 어리석은 부자는 그것가지고 가난한 사람에게 나눠줄 생각은 하지 못하고 창고 더 지어서 내가 그냥 평생동안 먹고 마시고 누리자라고 밖에 생각하지 못합니다. 그때 어떤 일이 일어납니까? 그날 밤에 하나님께서 그 영혼을 데리고 가면 이 모든 것이 누구 것이 되겠느냐? 하고 반문하십니다. 우리 인생에는 지혜로운 반응이 필요합니다.

저는 요즘 곰곰이 생각하는 것이 있습니다. 우리 인생에는 내일이 있고 내일을 대비해서 살아가기 때문에 의미가 있습니다. 우리 인생에 내일이 없다고 생각하면 그저 오늘 마음껏 먹고 마시고 즐기고 살면 그만일 것입니다. 그렇지만 우리 인생에는 내일이 있기 때문에 우리는 내일을 바라보고 준비하는 것이 우리 인생의 삶입니다. 내일을 위해서 실망하지 말고 열심히 우리는 준비하고 애써서 무슨 일을 이루어야 됩니다. 그런데 또 한 가지 잊지 말아야 할 것이 있습니다. 우리는 내일을 위해서 열심히 준비하지만 한편으로는 내일이 없을 수도 있습니다. 여러분 내일 나는 꼭 있을 것이다라고 누가 주장 할 수 있겠습니까? 좀 오래 전 일이지만 주일 저녁에 저하고 악수하고 헤어졌습니다. 예배 끝나고. 나이도 저보다 한살밖에 많지 않으셨습니다. 그런데 그날 밤에 심장마비로 세상을 떠나셔서 월요일 날 제가 장례를 했습니다. 우리 인생이라는 것은 정말 모르겠더라고요. 우리에게 내일이 없다라는 것을 또 한편 생각해야 합니다. 이 말이 뭐죠? 우리는 내일을 위해서 열심히 애쓰고 준비하고 무엇인가를 쌓아두어야 하지만 우리는 또 내일이 없을 수도 있다는 생각을 해서 오늘 주어진 지금도 충실해야 된다 이 말입니다. 내일을 위해서 모든 사람의 마음을 상하게 해서는 안 됩니다. 내일을 위해서 모든 사람에게 상처를 주고 어려움을 끼치고 손해를 끼쳐서는 안 됩니다. 내일을 위해서 우리는 최선을 다하되 오늘 내게 주어진 현상 가운데서도 우리는 모든 일에 최선을 다해야 되는 것입니다. 내일 잘 되서 갚지. 이것은 안 됩니다. 내일이 없을 수도 있으니까요. 그러니 우리는 내일을 위해서 준비하되 내일의 모든 것을 맡기고 현재를 되는대로 살아서는 안된다라는 뜻입니다. 내일도 중요하고 지금 현재도 중요한 이와 같은 삶이 중요합니다. 우리는 하루하루를 마감해가고 하루하루를 완성해가는 삶을 통해서 삶의 긴 끈을 연결해 가는 것입니다.

마지막 세 번째 입니다. 결국 손바닥만한 인생으로 모든 것이 허사인 우리 삶이지만 그림자 같이 다니는 우리 삶이고 정말 인생의 누가 취할지 모르는 재물을 위하여 분요롭게 다니는 어리석은 인생이지만 결국 우리 인생에 회복의 길이 있다는 것입니다. 그것이 무엇입니까? “주여 내가 무엇을 바라리요 나의 소망은 주께 있나이다.” 주님께 소망을 둘 때 우리들에게 하나님의 놀라운 은혜의 삶이 열려지게 되는 것입니다. 다른 것을 바라볼 것이 없다는 것은 주여 내가 무엇을 바라리요 나의 소망은 주께 있다라는 것은 우리 인생의 참된 길과 진리를 비로소 회복하고 찾았다라는 뜻입니다. 우리가 정해진 바른 목표를 확신했다면 흔들리지 말고 우리의 목표를 향해서 가야 합니다. 결국 이 세상의 모든 일들은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으로 영원한 생명을 얻는 것에서 시작되는 것입니다. 여러분 우리 인간들이 죄로 말미암아 하나님과 분리되고 그것이 영적인 죽음이 되었습니다. 그러면 우리들에게 죽음의 상태에 있는 우리들을 불쌍히 여기시는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를 십자가에 못박아 죽게 하심으로 말미암아 우리의 죄를 대신 짊어지시고 죽으심으로 인하여 그것을 믿는 자들에게 우리의 죄를 용서해 주시고 우리에게 영원한 생명을 다시 보여주셨습니다. 그러니까 우리는 우리 삶 가운데 우리 하나님께 소망을 품고 우리 주 예수님께 소망을 품을 때 우리에게 새로운 삶의 길이 열리게 되는 것입니다.

여러분 우리 인생에게는 이런 육신과 육신 안에 거하는 영혼이 있습니다. 영혼과 육신이 결합되어서 우리 인생이 구성되는데 우리 인생에 있어서 만약에 영혼이 육신을 떠나가면 우리 육신은 세상에서는 죽었다고 합니다. 이 육신이 썩어져서 흙이 되는 것입니다. 썩어져서 흙이 되죠. 그러면 그 영혼은 어디로 가는가 하면 하나님께서 예비하신 영원한 집, 곧 손으로 지은 것이 아니요, 하나님께서 예비하신 하늘의 집으로 갑니다. 그런데 이것은 구원 받은 백성입니다. 만약에 하나님께 구원받지 못한 예수님을 믿어 구원받지 못한 사람들이라면 어디 갈 데가 없습니다. 어둠 가운데 고통과 어둠의 세계를 떠돌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그러니 우리는 우리의 삶 속에서 하나님이 주시는 은혜의 세계를 누릴 수 있기 위하여 우리는 영혼이 구원을 받아야 합니다. 우리 삶의 소망이 주님 앞에 있고 우리 영혼이 갈 곳이 주님 앞에 있어야 합니다. 우리 삶의 세계를 찾을 때 우리는 이 지상에서 삶도 하나님께 소망을 가지고 사는 사람답게 새롭게 변화되며 우리가 이 지상에서 떠날 때 무엇인가 우리는 가야할, 하나님이 예비해 주신 곳으로 가야 합니다. 여러분 이런 생각이 들지요. 내가 이 세상 떠나면 그것으로 내 인생이 끝일까? 적어도 그것은 아니죠? 우리 인생이 살다가 끝나면 그것으로 끝입니까? 그러면 우리 인생 최대한으로 즐겁게 살아야죠. 그리고 하고 싶은 것 모든 것 다 해야죠. 그리고 딱 끝나면 그것으로 끝이잖아요. 그런데 우리 인생은 그렇지 않습니다. 세상이 끝나면 뭔가 또 다른 세계가 있다는 것을 우리 막연히 생각하잖아요. 성경에서는 하나님이 예비하신 영원한 집이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여러분 우리는 새로운 삶의 소망을 찾아야 합니다. 우리 도스토예프스키의 죄와 벌이라는 소설을 보면 거기에 라스콜리니코프라는 청년이 나오는데 전당포 노파를 살해를 합니다. 왜냐하면 그 사람은 그와 같은 것을 누릴 자격이 없는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리고 전혀 자격이 없는 사람이 남의 돈을 갈취해서 버는 것이라면 그것은 내가 그 사람을 죽여도 정당하다고 생각한 것입니다. 그러나 그가 잡혀서 감옥에 갑니다. 그런데 그가 회심을 하게 됩니다. 구원의 소망을 보게 됩니다. 하나님의 은혜를 체험하게 됩니다. 그는 땅바닥에 입을 맞춥니다. 하나님이 만드신 대지 위에 입을 맞춥니다. 그는 마음에 감격하고 새로운 삶의 소망을 비로소 찾기 시작한 것입니다.
사도 바울이라는 사람은 예수 믿는 사람을 핍박했습니다. 예수 믿는 사람을 잡아서 감옥에 가두고 고문하고 또 뿐만 아니라 예수 믿는 사람들을 데려다가 죽이는 것에 동참하는 이런 일을 했습니다. 그런데 그가 예수님을 만난 이후에 그의 삶이 온전히 변화되어 평생을 빚진 자의 심정으로 주의 복음을 위해서 살아가게 된 것입니다. 삶의 소망을 찾은 사람들을 그의 삶이 달라집니다. 주여 내가 무엇을 바라리요. 나의 소망이 주께 있나이다.

삶의 소망이 생기면 그때부터 우리는 달라지는 것입니다. 우리 인생의 소망은 주께 있어야 합니다. 그때 우리는 가야할 바른 길을 가게 되는 것입니다. 오늘 주님을 사랑하는 성도님들 소망이 어디에 있습니까? 세상에 헛된 일 위에 있습니까? 아니면 우리 주님께 소망이 있습니까? 오늘도 이 자리에 있는 모든 성도님들 이 자리에 함께한 형제, 자매들에게 주님께 소망을 두는 그것으로 말미암아 영원한 생명을 얻는 아름다운 은혜가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드립니다. (최종천 목사)

이런 글도 찾아보세요!

공유

facebooktwitterpinterestbandkakao story
퍼머링크

댓글 0

권한이 없습니다. 로그인

신고

"님의 댓글"

이 댓글을 신고 하시겠습니까?

삭제

"님의 댓글"

이 댓글을 삭제하시겠습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