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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방관자 효과 (눅 10: 30-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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몇 칠전 뉴스에서 미국에서 한 건장한 남자가 한 아이를 강제로 끌고 가는데 지나가는 사람들이 어떻게 반응하가를 시험하여 방영한 적이 있습니다. 그런데 놀라운 것은 지나가는 사람들이 아무도 관심을 갖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아이가 소리를 지르면서 도와 달라고 하는데도 사람들은 아무도 반응하지 아니하고 쳐다보면서 그냥 지나치는 모습을 보여 주었습니다. 저는 그래도 몇 사람은 끌려가는 아이를 구하기 위해서 용감하게 나설 줄 알았습니다. 그런데 정말 무관심하게, 정말 매정하게 자기들의 갈 길을 가는 모습을 보았습니다.

다음 날인가 한국에서도 시험을 해보았습니다.
시험녀가 길을 가다가 배가 아프다고 하면서 쓰러졌습니다. 그랬더니 사람들이 지나가다가 걸음을 멈추고 배가 아프다고 쓰러지는 시험녀를 친절하게 돕는 것을 보았습니다. 또 다른 곳에서 시험을 했는데 거기서도 역시 지나가는 사람이 시험녀에게 다가와서 어디가 아프냐고 물으면서 도와주려는 모습을 보았습니다. 그래서 역시 한국 사람은 다르다고 생각하였습니다.

그런데 다른 시험을 했습니다. 남자가 여자를 강하게 끌고 가면서 위험을 가는 모습이었습니다. 그런데 거기서는 사람들이 아무도 도와주는 사람이 없었습니다. 모든 사람들이 쳐다만 보고 그냥 지나갔습니다. 그래서 리포터가 물었습니다. 왜 그냥 지나갔습니까? 그랬더니
“그들의 사생활인데 내가 사생활에 관여할 필요가 없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고 대답하는 것을 보았습니다.

심리학자들은 어떤 사건이 일어났을 때 구경꾼이 많으면 많을수록 방관자의 모습을 보인데 이것을 ‘방관자 효과’라고 한다고 합니다. 만약에 교통사고로 어떤 사람이 쓰러졌다면 그 사건을 목격한 사람이 많으면 신고하는 경우가 많을 것 같지만 신고하는 확률이 적어진다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내가 아니어도 다른 사람이 하겠지?” “누군가 하겠지!” 서로 생각하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여러분! 교회에 방관자 효과가 일어나면 교회는 제대로 설수 없습니다.
누군가 하겠지! 내가 아니어도 누군가가 하겠지 생각하면서 서로 미룬다면 결국 교회는 아무도 주인의식을 갖지 못하게 될 것이고 결국 교회는 역동적인 교회가 되지 못하고, 발전하지 못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만약에 나 하나쯤 오늘 교회에 안나가도 되겠지 생각하고 안나왔는데 그날따라 모두들 나 하나쯤이야 괜찮겠지 생각하고 안나왔다고 생각해 보십시오. 교회는 텅 비는 것입니다. 그런데 나라도 지켜야지 나만이라도 더 열심히 해야지 하기 시작하면 그곳에 부흥의 역사가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내가 아니면 안된다는 주인의식이 필요합니다. 내가 먼저 해야지 하는 솔선수범의 모습이 있는 교회가 바로 발전적인 교회가 되는 것입니다. 

방관자는 기적의 주인공이 될 수 없습니다. 방관자는 기적을 직접 맛볼 수 없습니다.
예수님이 물 위를 걸어 오셨습니다. 제자들은 유령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때 예수님께서 “안심하라 내니 두려워 말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때 베드로는 용감하게 말합니다. “주여! 나를 명하여 물 위로 오라 하소서.” 그때 예수님께서 “오라” 말씀하셨습니다. 베드로는 배에서 내려 물 위로 걸었습니다. 그때 그는 물 위를 걷는 기적을 맛보게 되었습니다. 베드로는 시험정신이 강한 사람입니다. 베드로는 방관자가 되기보다는 주인공이 되기를 원했습니다. 그런데 거기에 많은 제자들은 방관자이었습니다. 그들은 될 수 있을까? 생각하고 구경만 하였습니다. 그러므로 물 위를 걸어가는 지적을 직접 맛보지 못한 것입니다. 그러나 베드로는 비록 조금 후에 물에 빠져들어 가는 모습이 되었지만 그는 발을 물 위로 내딛었습니다. 그래서 베드로는 예수님과 함께 물 위를 걸은 최초의 사람이 되었던 것입니다. 

여러분 방관자는 기적의 중심에 있을 수 없습니다. 여러분이 교회가 부흥하기 원하고 교회가 정말 살아있기를 원한다면 참여자가 되십시오. 여러분의 몸을 던지십시오. 믿음을 가지고 발걸음을 내딛을 때에 다른 사람이 맛보지 못하는 삶의 분명한 증거들을 맛 볼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우리에 대해서 방관자가 아니셨습니다.
우리가 죄로 말미암아 사망에 이르는 것을 보시고 예수님은 보고만 있지 않으셨습니다. 그래서 빌립보서 2장 6절서부터의 말씀을 보면
(빌 2:6) 그는 근본 하나님의 본체시나 하나님과 동등됨을 취할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시고
(빌 2:7) 오히려 자기를 비어 종의 형체를 가져 사람들과 같이 되었고
(빌 2:8) 사람의 모양으로 나타나셨으매 자기를 낮추시고 죽기까지 복종하셨으니 곧 십자가에 죽으심이라
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만약 예수님이 방관자의 모습을 취하셨다면 어떻게 되었을까요?
“왜 죄 없는 내가 가야 합니까? 그들은 죄의 값을 응당히 받는 것인데 내가 굳이 내려 갈 필요가 있겠습니까? 내 버려두십시오.”했다면 우리의 구원은 이루어질 수 없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죄 지은 우리에 대해서 방관자로 있지 않았습니다. 죽어가는 우리에 대해서 무관심하지 않으셨습니다. 예수님은 동등 됨을 취할 것을 포기하셨습니다. 그리고 스스로 자기를 비웠습니다. 종의 형체를 가지고 이 땅 가운데 오셨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예수님을 높여 주셨습니다. 모든 이름 위에 뛰어난 이름을 주셨습니다. 그 이름 앞에 모두 무릎을 꿇게 하셨습니다.

우리가 성공적인 삶을 살기위해서는 절대 방관자가 되어서는 역사의 주인공, 성공의 주인공이 될 수 없습니다. 그러나 내가 먼저 적극적으로 행동을 취하는 태도가 있을 때는 성공적인 삶을 살 수 있을 것입니다.
구경꾼이 되지 마십시오. 방관자가 되지 마십시오. 주인이 되십시오. 주인공이 주십시오.

오늘 본문에도 방관자들이 있었습니다.
한 사람이 예루살렘에서 여리고로 내려가다가 강도를 만났습니다. 강도들은 그의 옷을 벗기고 죽도록 때렸습니다. 그래서 강도 만나 사람은 거반 죽게 되었습니다. 누가 도와주지 않으면 죽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그 길을 한 제사장이 지나가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강도를 만나 거반 죽게 된 사람을 발견했습니다. 그런데 그를 보고 피하여 지나갔습니다. 여러분 정말 종교인이 있었기 때문에 이 죽어가는 사람은 살았다고 생각했을 것입니다. 제사장은 사람을 살리는 사람이었기 때문에 그냥 지나치지 않으리라고 생각했을 것입니다. 그런데 제사장은 아랑곳하지 아니하고 그냥 지나갔습니다. 아니 제사장이었기 때문에 강도 만난 사람을 보면서 “믿음으로 살지 못하니까 이러한 일을 당하는 것 아니냐”고 정죄하며 그냥 지나쳤을 수도 있었을 것입니다. 

이번에는 레위인이 지나가게 되었습니다. 죽어 가는 사람은 간곡하게 도움을 요청했을 것입니다. 그런데 레위인도 그를 보고 피하여 지나갔습니다. 여러분 레위인은 하나님의 일을 봉사하는데 성별된 사람들입니다. 그런데 그도 죽어가는 사람을 보고 그냥 지나쳤습니다.

왜 그랬을까요? 자기만 살면 된다는 마음이 아니겠습니까? 혹시 내가 이 사람을 돕다가 나까지 낭패를 당하면 어떻게 하나? 하는 생각으로 그를 피한 것 아니겠습니까?
이들은 자기만 잘 먹고 자기만 잘 살면 다른 사람이 죽든지 말든지 상관없다는 것입니다.

정말 요즘 정말 많은 사람들이 자기만을 위해서 살아갑니다. 자기에만 피해가 오지 않으면 어떤 일이 일어나든지 상관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옆집에 도둑이 들어와서 “도둑이야!” 소리치면 내 집 문을 더 굳게 걸어 잠겨버리고 방관자가 됩니다. 

여러분 주님은 교회에서도 이렇다면 교회는 교회의 사명을 잃어버린 것입니다. 공동체로서의 사명을 포기한 것입니다. 나만 은혜 받으면, 나만 은사 받으면, 나만 성령 받으면 된다는 이기적인 신앙은 정말 잘못된 신앙이 아닐 수 없습니다. 함께 은혜 받고 함께 성령 받고 혹 넘어져 있는 사람이 있다면 함께 가서 일으켜 줄 수 있는 공동체가 하나님이 원하시는 공동체라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초대교회였습니다. 그들은 함께 성령을 받았습니다. 그리고 함께 먹고 함께 아파하고 함께 기뻐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한번 외칠 때에 5,000명이 회개하고 돌아오는 역사가 일어날 수 있었던 것입니다.

오늘 본문에 사마리아인이 나옵니다. 사마리아인은 예수님 당시에 유대인들에게 사람 취급도 받지 못한 사람들입니다. 유대인들은 사마리아인들이 순수한 혈통을 유지하지 못하고 혼혈된 사람들이라고 그들을 멸시했습니다. 그런데 그 사마리아인이 여행 중에 강도 만난 사람을 만났습니다. 그런데 그를 보고 불쌍히 여겼습니다. 그리고 가까이 가서 기름과 포도주를 그 상처에 붓고 싸매 주었습니다. 그리고 자기 짐승에 태워 주막에 데리고 가서 돌보아 주었습니다.
이튿날에 자기의 2 데나리온을 주막 주인에게 주며 말합니다. “이 사람을 돌보아 주라 비용이 더 들면 내가 돌아올 때에 갚아 주리라.”
예수님이 물으셨습니다. “네 의견에는 이 세사람 중에 강도 만난 자의 이웃이 되겠느냐?” 그때 “자비를 베푸는 자니이다.” 대답하였습니다.
예수님이 말씀하셨습니다. “가서 너도 이와 같이 하라.”

그렇습니다. 우리가 이와 같이 해야 합니다.
죽어도 같이 죽고 살아도 같이 사는 공동체 의식이 필요합니다.
여러분 사마리아인은 자기의 목숨이 귀하다고 생각하지 않았겠습니까? 죽어가는 사람을 살리는 일이 귀찮다고 생각하지 않았겠습니까? 혹 내가 이렇게 한다고 누가 알아주기나 할까? 하는 마음은 없었겠습니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마리아인은 죽은 자를 끝까지 인도해 주었습니다. 그렇습니다. 우리는 연약한 지체를 끝까지 인도해 주어야 합니다. 살아도 같이 살고 죽어도 같이 죽겠다는 공동체 의식으로 뭉쳐야 합니다. 그래야 함께 살 수 있는 것입니다.

여러분! 선한 사마리아인은 예수님이십니다.  선한 사마리아인은 하나님과 동등됨을 취할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시고 자기를 비어 종의 형체를 입고 우리 가운데 오신 예수님이십니다.  그리고 마지막 까지 우리를 살리시기 위해서 자기를 십자가에서 희생하셨습니다. 모든 피와 물과 살을 주셨습니다.

그분이 오늘 우리에게 말씀하십니다. “가서 너도 이와 같이 하라.”
남을 돕는다는 것은 참으로 보람된 일이고 여러분의 마음에 간절히 원하는 바라고 생각합니다. 여러분 안에는 정말 방관자가 아니라 돕는 자가 되기를 원하는 선한 마음이 있을 줄 믿습니다.

그런데 돕기 위해서는 자기희생이 필요합니다.
사마리아인은 자기의 기름과 포도주를 상처에 부었습니다. 그리고 그 상처를 싸매 주었습니다. 또 자기가 타고 갈 짐승에 죽어가는 사람을 태우고 자기는 걸었습니다. 그것뿐 아니라 자기의 돈을 주막 주인에게 주며 돈이 모자라면 돌아와서 주겠다고 말했습니다.
자기의 것을 희생해야 도울 수 있는 것입니다. 가지고 있는 것을 펼 때에 도울 수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성경도 말씀하십니다.
“자녀들아 우리가 말과 혀로만 사랑하지 말고 오직 행함과 진실함으로 하자” (요일 3:18)

야고보서 2장 15절에서 17절의 말씀에서는
“만일 형제나 자매가 헐벗고 일용할 양식이 없는데 너희 중에 누구든지 그에게 이르되 평안히 가라, 더웁게 하라, 배부르게 하라 하며 그 몸에 쓸 것을 주지 아니하면 무슨 이익이 있으리요 이와 같이 행함이 없는 믿음은 그 자체가 죽은 것이라”(약 2:15)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렇습니다. 이와 같이 하라는 것은 행동과 희생을 동반되어야 함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어떻게 버는 것도 중요합니다. 그러나 어떻게 쓰느냐도 중요합니다. 정당한 방법으로 벌어서 또한 구제하고 도와주고 사람을 살리는데 사용한다면 더욱 귀한 삶을 살게 될 줄 믿습니다. 우리의 재물은 하나님이 나만을 위해서 쓰라고 주신 것이 아니라 이미 우리에게 주신 재물의 일부는 다른 사람을 돕기 위한 물질이 포함되어 있음을 알고 우리에게 주신 귀한 물질 우리가 쓰고도 부족한 것 같지만 나눠주고 베풀면 더 풍성해 질 것입니다.

여러분 다른 사람을 돕는 것은 시간이 많이 걸리는 일도 있지만 그렇지 않고 우리가 조금만 관심을 가지면 선한 사마리아인이 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요즘 광고 중에 신문이 있는데 그 신문 대신 던져 주는데 몇 초, 할머니 건널목 건너는데 도와주는 시간 몇 초, 다른 사람 버스에서 대신해서 벨 눌러주는 것 몇 초 모두 1분만 사용하시면 가능합니다. 라는 광고가 있습니다.

그렇습니다. 우리가 마음만 먹으면 됩니다. 조금만 눈길을 돌리면 도울 수 있는 일들이 많습니다. 그러므로 오늘 본문의 말씀에서 방관자가 되지 맙시다. 먼저 교회에 대하여 방관자가 되지 마십시다. 여러분이 주인이십니다. 여러분이 주역이십니다. 또한 성도간에 서로 방관자가 되지 마십시다. 서로 위로하고 도와주며 일으켜 줄 수 있는 우리가 되십시다. 그리고 사회에 대해서 방관자가 되지 마십시다. 우리가 도와야할 사람이 있다면 우리의 시간과 우리의 재물과 우리의 몸을 드려서 도와 줄 수 있는 선한 사마리아인이 되십시다. (이덕만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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