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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깊은 계속에서는 메아리가 더 크게 울립니다 (대하 32:24-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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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지금 계속해서 히스기야에 대하여 기록한 말씀을 통해 몇 주 동안 은혜를 나누었습니다. 오늘 히스기야 마지막 부분을 보면서 은혜를 받고자 합니다. 이제까지 살펴 보았듯이 히스기야는 그의 아비 아하스 왕과는 달리 다윗의 길로 행하여 여호와 보시기에 정직하게 행했습니다. 유다의 역대 왕들 중에 다윗과 같이 정직했다는 평가를 받은 왕은 히스기야 외에 아사와 요시야 밖에 없습니다. 하나님 마음에 합한 왕이었다고 칭찬을 받은 사람입니다.

이스라엘과 유다를 통치했던 왕이 무려 42명 중에 하나님의 마음에 합한 왕이라는 칭찬을 받은 사람은 다윗과 히스기야 밖에는 없었습니다. 성경 왕하 18장 3절에서 이렇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히스기야가 그 조상 다윗의 모든 행위와 같이 여호와 보시기에 정직히 행하여(왕하18:3)...히스기야가 이스라엘 하나님 여호와를 의지하였는데 그의 전후 유다 여러 왕 중에 그러한 자가 없었으니, 곧 저가 여호와께 연합하여 떠나지 아니하고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명하신 계명을 지켰더라,"(왕하18:5-6)

“여호와께서 저와 함께 하시매 저가 어디로 가든지 형통하였더라(왕하18:7)” 얼마나 신실한 왕입니까? 성전의 모든 우상을 제거하여 예배를 회복시켰습니다. 유월절을 통해 기쁨을 회복시켰습니다. 십일조 제도를 정착시켜 범사에 형통한 삶을 살도록 했습니다. 당시 최대 강국인 앗수르를 이김으로 존대한 사람이 되었습니다. 그런데 오늘 성경을 보니 그 때에 어떤 일이 일어났습니까? 자기 육신에 병이 걸린 것입니다. 감기 정도가 아닙니다. 죽을 병입니다. 5,6년 후에 죽을 병도 아닙니다. 당장 죽는다는 것입니다. 바로 유언하라는 것입니다. 정치문제도 아니고 경제 문제도 아니고 종교 문제도 아닙니다. 유일하게 하나 밖에 없는 자신의 생명문제입니다. 이것이 인생의 최대의 문제입니다. 죽어 버리면 자신에게 있던 그 모든 것이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까? 이제 39살 중년의 나이입니다. 한 참 일할 나이입니다. 이제 나라가 안정되고 정치 경제 종교적으로 살만한 때입니다. 많은 사람들에게 존경을 방을 때입니다. 이런 질병에 걸리면 어떤 반응을 합니까? 갑자기 고난이 다가 오면 어떤 반응을 합니까?

신앙인에게도 다가오는 고난
의로운 사람에게도 고난이 다가옵니다.
의로운 사람도, 신앙인에게도, 능력의 사람에게도, 기도의 사람에게도, 심각한 질병은 다가올 수 있습니다. 폭풍이 불면 믿음의 사람의 집의 비닐 하우스가 날라 갈 수 있고 차가 부딪치면 기도의 사람도 죽을 수 있습니다.

히스기야에게 고난이 나가 올 때가 언제입니까?(24)
24절을 보십시오. 그 때 히스기야가 병이 들었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오늘 성경 순서로 보면 그 때는 히스기야가 앗수르 왕 산헤립을 기도로 물리친 후의 사건으로 보입니다. 특히 또 이적을 보이셨다는 말을 볼 때 2차 전쟁에서 이적으로 앗수르 군대 185,000명을 섬멸하고 승리한 후의 일인 것을 볼 수 있습니다. 히스기야가 나이 25살에 왕이 되어 29년을 왕으로 통치하였습니다. 그러면 15년 동안 생명을 연장받았으니까 29년에서 15년을 빼면 히스기야가 병든 때는 히스기야가 왕이 된지 14년 째이고 나이는 39살 때인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왕이 된지 14년 되던 해가 어떤 해였습니까? 바로 앗수르 왕 산헤립이 유다를 처음 처들어 온 때입니다(왕하18:13). “히스기야 왕 14년에 앗스르 왕 산헤립이 올라와서 유다 모든 견고한 성읍들을 쳐서 취하매”라고 되어 있습니다. 히스기야가 질병에 걸린 해는 바로 산헤립이 유다를 첫 번 째로 쳐들어 온 해인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러면 그 해에 첫 번 전쟁과 두 번 째 전쟁이 시간차를 얼마 두지 않고 이루어졌고 두 번 째 전쟁 때 크게 승리하여 그가 열방의 존대한 자로 존경받을 때 질병에 걸렸다는 이야기입니다. 분명 1차 전쟁 때에는 병에 걸리지 않은 것같습니다. 왜냐하면 2차 전쟁 때 이사야 선지자에게 기도를 요청할 때 질병에 대한 이야기는 나오지 않기 때문입니다. (물론 이사야서 38장 6절을 보면 앗수르와 2차 전쟁 전에 병에 걸린 것처럼 보이는데 38장 1절에 그 즈음에라고 기록한 것은 2차 전쟁 때 병이 든 것처럼 보입니다.) 앗수르와 2차 전쟁 후에 병이 들었다면 그가 병든 때는 범죄하고 타락한 때가 아니라 수많은 유혹을 물리치고 기도의 능력으로 전쟁에서 승리하여 하나님께는 영광을 돌리고 하나님께서 앗수르의 손과 모든 적국의 손에서 구원하여 주시고 보호해 주실 때입니다(대하32:22-23). 신앙의 사람에게도 고난은 언제 어디서든 우리에게 갑자기 다가올 수 있습니다.
그리스도인이 당하는 고난은 대강 4가지로 정리할 수 있습니다.

첫째가 죄 때문에 당하는 고난입니다.
먼저는 자신의 죄, 자신의 잘못, 자신의 부주의 때문에 징계로 당하는 고난입니다.
아간의 범죄하여 죽임을 당하였습니다. 아나니아와 삽비라 부부는 거짓말 하다가 부부가 동시에 죽임을 당하였습니다. 요나도 하나님의 말씀을 거역하다고 죽음같은 고난을 당하였습니다. 이런 고난은 수치스러운 것입니다. 바람피우다 에이즈 걸린 것이나 자신의 건강 잘 관리하지 못하고 담배 골초 되었다가 폐암 걸리는 것과 같은 경우입니다.

둘째는 자연적인 고난입니다. 늙으면 자연적으로 기력이 쇠하고 질병이 걸리게 되어 있습니다. 눈이 쇠하여 성경을 잘 볼 수 없습니다. 귀가 어두워 남의 말을 알아 들을 수 없습니다. 여러 가지 불편한 것들이 다가옵니다. 자연적인 것입니다. 이것 부끄러워할 것이 아닙니다.

셋째로 훈련으로 다가오는 고난입니다. 요셉이 노예로 팔려가고 감옥에 갇히는 것이나 욥이 하루 아침에 자식들과 재산을 잃어 버리고 자신까지 심각한 질병에 걸리는 것과 같은 경우입니다. 하나님이 더 귀한 인물로 쓰시기 위하여 훈련을 시키는 과정에 있는 것입니다. 이것 역시 부끄러워할 고난이 아닙니다. 주님이 사랑하는 나사로가 질병에 걸린 것과 같습니다. 주님의 영광을 나타내기 위한 질병이었습니다. .

넷째로 사명 때문에 스스로 당하는 고난입니다. 스데반이나 예레미야, 에스겔, 모세, 다니엘과 같은 경우입니다. 얼마든지 편하게 살려면 살 수 있습니다. 그러나 주님의 사명을 이루기 위해 고난의 길 순교의 길을 자처한 것입니다.

고난에 대한 반응
우리는 어떻게 고난에 반응해야 합니까?

1. 고난을 당할 때 먼저 하나님의 의도를 알아야 합니다(17).

왕하 20장 7절에 보니 종처(부스럼이 난 자리)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이 질병이 어떤 병인지는 정확이 모르나 죽을 병이었습니다. 살지 못하고 죽는다는 것입니다. 이런 말을 들으면 어떤 반응을 합니까? 죽음에 대한 공포가 찾아옵니다. 원망을 합니다. 왜 나에게 이런 병이 걸리냐고 원망합니다. 걱정과 염려가 생깁니다. “내가 죽은 후에 아이들은 어떻게 할 것인가?” 염려합니다. 평안이 없어집니다. 불안합니다. 일이 손에 잡히지 않습니다.

그런데 우리가 갑자기 고난을 당하면 먼저 해야 할 것은 이 고난이 왜 나에게 다가왔는지 하나님의 의도를 알아야 합니다. 그래야 정확하게 대처할 수 있습니다.
오늘 히스기야는 왜 이런 질병에 걸렸겠습니까?
히스기야는 앗수르와의 첫 번째 전쟁 때 엄청난 충격을 받았을 것입니다. 영적으로 정신적으로 육체적으로 심각한 충격을 받았을 것입니다. 그것으로 불치의 질병이 발생했을 수도 있습니다. 그 원인이 그 질병의 병명이 무엇인지 우리는 정확히 모르지만 성경은 히스기야가 질병에 걸린 이유를 정확하게 알고 있다는 사실을 알려 주고 있습니다. 이사야서 38장 17절을 보십시오. 히스기야가 질병에서 치료받은 후 기록한 말씀입니다. 큰 고통을 히스기야에게 주신 이유는 무엇입니까? 내게 평안을 주려 하심이라고 했습니다. 이 평안은 살롬의 복입니다. 이러한 신앙의 경험을 통해 죽음의 두려움이 살아집니다. 하나님의 살아계심을 진정 믿게 됩니다. 어떤 어려움도 문제가 되지 않습니다. 나사로가 죽음에서 살아 나보니까 이제 죽음이 문제가 되지 않는 것입니다.

"끝나지 않은 길"에서 M. 스콧 펙은 "우리는 문제를 통해서만 지적으로나 영적으로 성장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대부분의 사람들은 그렇게 현명하지 못합니다. 뒤따르는 고통을 두려워하므로 우리들은 대부분이 다소간에 문제를 회피하려고 합니다. 우리는 문제를 무시하고 잊어버리려 하며 그것이 존재하지 않는 것처럼 생각하려 합니다." 칼 G. 융은 “모든 신경증은 정당한 고통을 회피한 대가다. 고통을 회피한 대가는 회피하고자 했던 고통보다 결국에는 더 고통스러운 것이 되고 만다”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아이가 나오기 위해서는 고통의 과정을 거쳐야 합니다. 어떤 고난도 하나님이 우리를 지옥에 넣기 위해서 주는 것이 아닙니다. 그 고난을 통해 성장하고 그 고난을 통해 하나님과 가까이 하고 그 고난을 통해 훈련되기를 원하십니다.
그 무수한 고난의 강을 건넜던 다윗은 "고난당하기 전에는 내가 그릇 행하였더니 이제는 주의 말씀을 지키나이다 (시 119:67)" "고난당한 것이 내게 유익이라 이로 인하여 내가 주의 율례를 배우게 되었나이다 (시 119:71)"라고 고백하고 있습니다.

우리 인생길을 모형적으로 보여주는 이스라엘 사람들의 광야 생활을 보면 우리가 그것을 분명하게 알 수 있습니다. 이스라엘 민족이 광야를 걷게 하신 이유가 무엇이라고 말씀합니까? 신8:1-10에 보면 세가지입니다. 첫째가 그들을 겸손하게 만들기 위해서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2). 둘째가 믿음과 순종의 훈련을 위해서입니다(2). 너를 시험하사 네 마음이 어떠한지 즉 하나님의 명령을 지키는 지 아니 지키는 지 알아 보기 위해서입니다. 셋째가 마침내 복을 주기 위해서입니다(16). 성경은 이렇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네 열조도 알지 못하던 만나를 광야에서 네게 먹이셨나니 이는 다 너를 낮추시며 너를 시험하사 마침내 네게 복을 주려 하심이었느니라 (신 8:16)”

고난을 통해 인간을 인간되게 하기 위해서입니다. 자기 주제를 파악하게 하기 위해서입니다. 자신이 하나님이 아니다는 사실을 알게 하기 위해서입니다. 모든 것이 내 마음대로 되는 것이 아니다는 사실을 알게 하기 위해서입니다. 모든 것이 잘되면 사람은 끝없이 교만하게 되어 있습니다. 이 교만이야 말로 인간의 최고의 문제입니다. 교만한 사람은 어떻게 해 볼 방법이 없습니다. 내가 모든 것을 할 수 있다고 생각하게 되어 있습니다. 하나님의 필요성을 느끼지도 못하고 하나님을 찾지도 않습니다. 자기 자신에 몰입되게 되어 있습니다. 자신의 쾌 괜찮은 사람으로 생각합니다. 잘 났다고 생각합니다. 자신은 믿을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어려움을 당하면 그 때 자신의 한계를 느끼게 됩니다. "아 내 힘으로 모든 것을 할 수 없구나!, 인생이란 내 힘으로 살 수 없구나. 나는 지극히 연약한 존재이구나" 이것이 인간입니다. 광야의 과정을 통과하지 않으면 인간이 인간답게 되지 않습니다. 하나님을 인정하지 않습니다. 고난의 과정을 통하여 자기 우상을 깨뜨리고 하나님 앞에 무릎을 끓게 되는 것입니다. 고난의 강을 건너고 광야를 길을 통과한 사람은 사도 바울처럼 죄인 중의 괴수로구나라는 고백을 할 수밖에 없습니다. 모세처럼 입술이 둔한 자라고 고백합니다. "사람이 떡으로만 사는 것이 아니라 여호와의 말씀으로 사는 줄을 알게"됩니다. 그래서 광야 학교를 통하여 세상적인 생각, 인생관, 습관, 철학, 문화를 깨끗이 청소하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마침내 근본적으로 복을 주기 위한 것입니다. 부모들이 이빨 빼는 고통을 감수하고 아이들의 이빨을 빼주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아름다운 이를 가지고 행복하게 살게 만들기 위해서입니다. 의사가 병든 사람들을 그 쓰라린 고통을 받는데도 불구하고 수술하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잠시 고통이 있더라도 질병에서 고침받아 행복하게 살게 하기 위해서입니다. 이런 사실을 깨달은 베드로 사도는 고난 받는 것을 복이 있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의를 위하여 고난을 받으면 복 있는 자니 (벧전 3:14)" 그래서 "환난 중에도 즐거워하나니 (롬 5:2-4)"라고 고백하고 있습니다.

아브라함은 25년 동안, 야곱은 30여 년을 광야에서, 모세는 미디안 광야에서 40년 시나이 광야에서 40년을 다윗은 17여년을 광야에서 유리하며 혹독한 훈련을 받았습니다. 바울은 3년 반 동안이나 아라비아 사막에서 외로운 광야 훈련을 받았습니다. 이런 과정을 통해 그들은 여호와 하나님을 알게 됩니다. 오직 하나님만 바라보게 됩니다. 하나님을 아는 것이 진정한 행복입니다. 그래서 호세아 선지자는 "나는 인애를 원하고 제사를 원치 아니하며 번제보다 하나님을 아는 것을 원하노라 (호 6:6)"라고 말씀했습니다.

2. 고난에 대한 하나님의 뜻을 안 사람들은 기도해야 합니다.

히스기야는 자신의 죽음 문제 앞에 무엇을 합니까? 병들어 죽게 된 고로 여호와께 기도했다고 했습니다. 오늘 본문에는 단순하게 기도했다고 기록되어 있지만 이사야서와 열왕기 하를 보면 그 때 히스기야가 기도한 내용과 방법이 자세히 기록이 되어 있습니다.
1)전심 전력을 다하여 기도하였습니다.
이사야 38장 2절을 보면 얼굴을 벽을 향하고 여호와께 기도하였습니다. 오직 하나님께 집중하고 기도하는 것입니다. 오직 여호와만 바라본다는 말입니다. 당시 그는 왕이었습니다. 존대한 사람으로 인정받고 있었습니다. 당시로도 그 당대의 의술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가 당하는 고통이 무엇인지를 알았기 때문에 먼저 하나님께 매어달렸습니다. 하나님께서 자신의 질병을 낳게 해 주실 수 있다는 믿음을 가진 것입니다. 얼마나 큰 고통입니까? 13절을 보십시오. 뼈가 꺽인 것같은 고통입니다. 아침에 일어나 죽을 것같다는 말입니다. 하나님께 전심 전력하여 기도 드리는 것입니다. 물론 약을 쓰지 않은 것이 아닙니다. 왕하20:7절을 보십시오. 이사야 선지자가 무화과 반죽을 가져다 종처에 발라 주었습니다. 극단적으로 인간의 과학이나 지식, 의학을 무시하고 기도하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을 나의 경험의 한계에 나의 이성의 한계에 가두어 버리면 안됩니다. 모든 다양성을 하나님이 주신 축복으로 받아들이며 최대한 사용하며 기도하는 것입니다. 기도는 벽 뒤에 계시는 하나님을 만나게 합니다. 죽음의 벽, 질병의 벽, 낙심의 벽, 의심의 벽, 절대 절망의 벽들을 만날 때 그 벽 앞에 좌절하고 원망하며 포기할 것이 아니라 그 벽 뒤에 계시는 하나님을 만나 하나님의 능력으로 그 벽을 헐어 버려야 합니다.

2)통곡하며 기도하였습니다.
이사야 38장 11절 이하를 보십시오. 그 당시의 기도 내용이 자세히 기록이 되어 있습니다. 죽음에 대한 공포가 밀려 옵니다. 모든 뼈를 꺽음같은 고통을 느낍니다. 밤새로록 시달립니다. 사자가 뼈를 꺾는 것 같은 고통느낍니다(13). 아침 저녁으로 생명이 끝나는 것 같다는 말입니다. 제비같이 학같이 비둘기같이 슬피 울며 눈이 쇠하도록 하나님을 앙망하였습니다. 영적 고통이 있습니다. 이렇게 하나님 말씀 대로 살았는데 이런 질병으로 죽는 모습을 보며 사람들이 얼마나 하나님을 우습게 보고 하나님을 조롱하겠습니까? 이런 상황에서 눈물을 흐리면 하나님께 기도드립니다. 남들을 향하여 우는 눈물은 별로 값이 없습니다. 여호와를 향하여 흘리는 눈물이 값진 눈물입니다. 신세 타령하는 눈물이 아닙니다, 원망의 눈물이 아닙니다. 눈물의 기도는 하늘 보좌를 움직입니다. “울고 있는 형제에 왜 기도를 모르는가 ...”

3)행함이 있는 삶을 근거하여 기도를 드렸습니다. 자신의 과거 하나님과의 관계를 가지고 매달린 것입니다.(이사야38:3).
전심 전력으로 행한 것을 추억하며 기도하였습니다. 그래도 하나님 앞에서 바르게 살려고 애를 쓰지 않았습니까? “불쌍히 여겨 주십시오.” 히스기야는 이미 앗수르와의 전쟁에서 기도의 큰 체험이 있는 사람입니다. 기도의 능력을 아는 사람입니다.
이 때 하나님께서 어떻게 응답해 주십니까?
이사야 38장 5절을 보십시오. 이사야 선지자를 통해 응답해 주십니다.
“내가 네 기도를 들었고 네 눈물을 보았노라 내가 네 수한에 십오년을 더해” 주겠다고 합니다. 그리고 이 성을 앗수르 손에서 건져 내겠고 보호하겠다고 말씀합니다. 더 많은 것으로 응답해 주셨습니다.
기도는 효율성이 있습니다. 우리가 눈물을 흘려 기도하면 하나님은 우리 눈에서 눈물을 제거시켜 주십니다.
고난의 이유가 어디에 있던지 간에 우리는 기도해야 합니다. 죄로 인한 고난이든, 훈련으로 인한 고난이든, 자신의 부주의로 인한 자연적인 고난이든, 사명을 위한 고난이든 어떤 고난이든 고난이 다가 오며 하나님께 무릎을 꿇는 것입니다.

죄로 인하여 고난이 다가오면 회개하고 그 문제를 해결받으면 됩니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 앞에 나오면 용서받지 못할 죄가 없습니다. 요나가 잘못된 길로 가던 길을 바꾸면 사는 길이 생깁니다. 그러나 경고를 무시하고 계속가면 그 길은 죽음의 길입니다.
훈련으로 다가오는 고난은 인내로 참고 견디며 훈련과정을 마쳐야 합니다. 모세가 당시는 이해할 수 없었지만 40년의 훈련과정이 마치자 새로운 세계가 준비되어 있는 것을 발견하게 됩니다.
사명 때문에 다가온 고난이면 회피하지 말고 그 사명을 감당하며 그 고난을 통해 더욱 성숙하고 더욱 큰 인물되면 됩니다.

자연적인 현상으로 다가 오는 고난은 그 고난을 통해 교훈을 배우며 더욱 영이 새로워지면 됩니다. 육신은 날로 후폐해지나 그것을 통해 영이 새로워지고 하나님을 더욱 의지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러한 모든 고난을 극복하는데 극복하는 방법의 한 가지 공통점이 있습니다. 그것은 기도하는 것입니다. 어떤 고난인지 우리는 잘 구별하지 못하는 경우가 많이 있습니다. 어떤 어려움이 오면 하나님께서 더욱 기도하라는 신호를 보내는 것으로 알고 기도하는 것입니다. 기도는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형통의 통로이며 문제 해결의 열쇠입니다. 히스기야는 그것을 알았습니다. 자신은 왕입니다. 치료받을 만한 충분한 부와 권력이 있습니다. 자신에게는 당대의 최고 의사들이 있습니다. 자기 나라에서 고침받지 못하면 다른 나라에도 갈 수 있는 사람입니다. 그러나 히스기야는 의사를 부르는 것보다 먼저 하나님께 부르짖어 기도드렸습니다. 기도하면 영혼도 마음도 육체도 싱싱해 집니다.

3. 고난의 과정을 통하여 주신 축복을 하나님 자랑의 도구로 삼아야 합니다.

히스기야는 질병에서 나음으로 하나님께 감사와 찬양을 드렸습니다(19-20). 하나님을 바라보면 이렇게 될 수밖에 없습니다.
그런데 그 후 어떻게 되었습니까?
대하 32장 27절을 보십시오. 부와 영광이 극에 달했습니다. 30절을 보십시오. 모든 일에 형통하였습니다. 그 때 어떤 일이 생겼습니까? 31절을 보십시오. 바벨론 왕이 사신을 보내었습니다. 그 땅에 나타난 이적을 물었습니다. 어떻게 그렇게 강력한 나라 앗수르를 이겼냐는 것입니다. 어떻게 그런 죽을 병에서 고침받았냐는 것입니다. 이 작은 나라가 어떻게 부와 영광이 극에 달라고 어떻게 모든 일이 형통하느냐는 것입니다. 이 때 상황이 열왕기 하 20장과 이사야서 39장에 잘 기록이 되어 있습니다. 이사야서 39장을 보시기 바랍니다. 바벨론 왕이 히스기야가 병에서 나았다는 소문을 듣고 편지와 예물을 보냅니다. 그 때 히스기야가 어떻게 합니까? 궁중의 보물을 보여 줍니다. 전국내 소유를 다 보여 줍니다. 전략무기를 보여 줍니다. 전략 식량을 다 보여 줍니다. 과시욕입니다. 자랑입니다. 내가 이만큼 되었다는 것입니다.

그들은 사실 신흥 바벨론으로 앞으로 전략을 위해 유다를 방문한 사람들입니다. 첩자들이고 정보 수집가들입니다. 유다를 정탐하고 점령계획을 세우기 위한 자들입니다. 당시 작은 나라가 최대 국가이 앗수르를 이겼으니 그들의 지형과 군사력을 파악한 후 점령하기 위한 첩자들입니다. 금은 보화는 그들에게 약탈하려는 마음을 더 자극한다는 사실을 히스기야는 몰랐습니다. 이사야는 이것을 잘 알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히스기야는 교만하여 마음이 어두워졌습니다. 그것에 대하여 대하 32장 31절은 하나님이 히스기야를 떠나시고 그 심중에 있는 것을 다 알고자 하사 시험하셨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이미 히스기야 마음이 교만해지니까 그 마음 속에 하나님이 없는 사람처럼 되어 버린 것입니다. 오히려 받은 은혜와 축복이 시험거리가 되어 버린 것입니다.
고난 중에는 더 하나님께로 가까이 갈 수 있었는데 축복을 받으니까 오히려 그것이 시험거리가 되어 교만해서 패망의 선봉에 서 버린 것입니다.

그것을 25절에서는 어떻게 말씀하고 있습니까?
히스기야가 마음이 교만하여 그 받은 은혜를 보답지 아니하였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가 앗수르를 이기게 된 것이 누구의 힘에 의한 것입니까?
선지자 이사야와 함께 하나님께 부르짖을 때 하나님께서 해 주신 것입니다(20).
22절을 보십시오. 그를 존대케 해 주신 분이 누구십니까? 여호와 하나님이십니다. 히스기야의 부귀와 영화가 극에 달한 것이 누구의 은혜입니까? 29절을 보십시오. 하나님이 심이 많이 주었기 때문입니다. 그가 범사에 형통한 것은 하나님께서 은혜를 베풀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히스기야는 하나님을 자랑하지 않고 자기를 자랑합니다. 이것을 성경은 교만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승리를 주고, 건강을 주고, 성공케 하고, 물질을 줄 때 축복의 결과만을 자랑하면 안됩니다. 축복해 주신 하나님을 자랑해야 합니다. 히스기야가 만약 “최강의 앗수를 물리친 것은 하나님께서 천사를 동원하여 18만 5천을 단숨에 쓸어 버린 것이다. 내가 이렇게 불치의 병에서 나은 것은 기도할 때 여호와 하나님께서 일영표를 옮기면서까지 나를 치유해 주신 것이다. 하나님은 전능하신 분이시고 살아계신 분이시다.”이런 식으로 자랑했다면 바벨론 사신들이 정신이 오싹했을 것입니다. 감히 하나님의 사람들을 건드리면 안되겠구나 우리도 앗수르 꼴이 되겠구나라고 생각했을 것입니다.

그런데 히스기야는 그렇게 하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어떻게 되었습니까?
25절을 보십시오. 진노가 저와 예루살렘과 유다에 임합니다. 구체적으로 이사야 선지자가 무엇이라고 말씀합니까? “여호와의 말씀이 날이 이르리니 무릇 왕궁의 모든 것과 왕의 열조가 오늘까지 쌓아 두었던 것을 바벨론으로 옮긴 바 되고 하나도 남지 아니할 것이요 또 왕의 몸에서 날 아들 중에서 사로 잡혀 바벨론 왕궁의 환관이 되리라 하셨나이다.(왕하20:17-18)”

이 예언은 역사적으로 그대로 성취가 되었습니다. 유다는 주전 586년에 바벨론에 멸망을 당하였습니다. 성전은 불에 태워지고 성전의 기구와 왕궁에 있는 모든 것들이 다 바벨론으로 옮겨졌습니다. 그리고 히스기야의 아들인 므낫세왕은 바벨론에 포로로 끌려갔습니다. 하나님을 자랑하지 않고 자신의 교만을 드러냈던 결과 엄청난 비극이 찾아 왓습니다. 자랑했던 모든 것을 잃어 버렸습니다. 주신 지식, 주신 물질, 주신 건강, 주신 지혜를 가지고 하나님을 자랑해야 합니다.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를 만나 새로운 삶을 살게 된 바울은 자기의 모든 것을 분토처럼 버리고 오직 예수님의 십자가만을 자랑하며 살았습니다.

“그러나 내게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외에 결코 자랑할 것이 없으니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세상이 나를 대하여 십자가에 못박히고 내가 또한 세상을 대하여 그러하니라(갈6:14)” 바울은 베냐민 지파 가문의 가람입니다. 가말레엘 문하생입니다. 가문도 학벌도 자랑할 수 있습니다. 로마의 시민권을 자랑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십자가만 자랑하였습니다.

우리가 죽는 순간까지 받아야 할 훈련입니다. 하나님은 죽는 순간까지 부하든 가난하든 승리하던 실패하던 이 하나님의 은혜를 드러내며 살기를 원하십니다. 하나님이 우리의 왕이라는 사실을 선포하기를 원하십니다. 우리에게 복을 주시고 그 복을 주신 분이 우리의 왕 하나님이라는 사실을 열방 가운데 선포하기를 원하십니다. 히스기야가 왕이 아니라 하나님이 왕이며 히스기야는 하나님의 대리 통치자에 불과하다는 사실을 세계 열방에 알리기를 원하십니다. 그런데 그는 모든 것이 자기 힘으로 된 것처럼 과시합니다. 자기가 왕이라는 것입니다. 주신 분은 무시하고 잊어버리고 받은 것만 가지고 교만해져 버립니다. 히스기야의 마지막 삶까지 지배했던 자기 자랑 자기 교만의 끝없는 욕망은 우리 인생에서도 마지막 까지 남겨 놓고 우리를 넘어뜨려는 사탄의 도구입니다. 조금 교회 커지면 자기 자랑하기 시작합니다. 목사면 족하지 주보에 박사 시인 소설가 무슨 별다른 경력을 붙여 놓습니다. 조금 기업이 커지만 사람 무시하기 시작합니다. 조금 말 잘하면 헤롯처럼 됩니다. 헤롯은 교만하여 충 먹어 죽었습니다. 아담과 하와처럼 자유 의식을 주면 그것으로 교만하여 마음대로 해도 되는 줄 압니다. 결국 하나님의 징계를 당합니다.

진노 앞에 히스기야가 회개합니다만 그 뉘우침에는 흔적이 따랐습니다. 26절을 보십시오. 교만을 뉘우치니까 하나님께서는 잠시 징계를 거두십니다. 그러나 죄의 결과는 흔적으로 남습니다. 이것으로 히스기야 대한 기록은 마감합니다. 히스기야기는 인생 마지막까지 겸손의 훈련, 하나님 자랑의 훈련을 받은 것처럼 우리 인생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는 마지막 숨을 멈추는 순간까지 오직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며 하나님 자랑으로 살아야 하겠습니다. 그것이 우리에게 주신 복을 가장 잘 누리는 방법입니다. (김필곤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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