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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가물 땐 구름이 끼어야 비가 옵니다 (대하 31:20-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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윌리엄 번스타인은 그의 책 "부의 탄생"에서 부의 탄생과 축적에는 꼭 필요한 네 가지 요소가 있어야 한다고 주장하고 있습니다. 그는 이 네가지 요소가 없으면 절대로 부가 쌓일 수 없고 이 네가지 요소를 갖춘 곳에서는 반드시 놀랄 만한 성장이 일어났다고 합니다.

그는 첫째 요소가 재산권이라고 말합니다. 번영의 네 가지 기초 중 가장 중요한 요소라고 말합니다. 개인의 재산이 국가나 범죄 혹은 독점가들로부터 지켜질 수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북한은 99%의 문해율(文解率)을 자랑하는 훈련되고 열심히 일하는 사회지만 일인당 GDP가 9백 달러에 지나지 않다고 합니다. 모로코는 문해율이 43.7%밖에 되지 않고 하루종인 커피만 마시며 관광객들에게 양탄자를 팔지만 일인당 GDP가 3,260달러나 된다는 것입니다. 이런 차이가 나는 이유는 재산권의 문제라는 것입니다. 재산권을 인정하지 않으면 부자 나라는 될 수 없다는 것입니다.

둘째 요인은 과학적 합리주의라고 합니다. 과학적 합리주의는 기술의 발전을 가져오게 하고 기술의 발전은 곧 부로 연결된다고 합니다.

셋째 요인은 자본시장의 활성화라고 합니다. 기술이 부로 연결되려면 자본시장이 활성화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에디슨은 백열전구를 만들었지만 자기 자본만으로는 백열전구를 시장에 공급시킬 수 없었다는 것입니다. 공장을 짓고 노동자를 고용하며 대량의 원재료를 구입하기 위해서는 많은 자본과 기업과 투자자를 연계시켜줄 자본 시장이 필수적이라는 것입니다.

넷째 요인은 통신과 수송이 필요하다는 것입니다. 기업이 재산권과 지적 도구 그리고 충분한 자본을 확보해 좋은 제품을 만들었다고 해도 자신의 제품을 소비자에게 신속하게 전달할 수 없다면 그 혁신제품은 잠식되고 만다는 것입니다.
그는 말하기를 이 네 가지 요인이 모두 정착되기 전까지는 어떤 나라도 번영을 누릴 수 없다고 합니다. 예를 들어 이 네 가지 요인이 처음으로 일어났던 네덜란드는 16세기부터 1세기 정도는 번영을 누렸지만, 18세기 영국의 해상 봉쇄로 인해 수송을 잃게 되면서 그 번영이 무너지고 말았다는 것입니다. 공산권에서는 재산권의 결여로, 중동의 여러 곳은 자본과 과학적 합리성의 부재로 인해 번영을 누리지 못하고 있고 사하라 이남 아프리카는 이 네 가지 요인 모두를 전혀 확보하지 못해 가난한 나라로 남아 있다는 것입니다.

그가 강조하는 것은 부(富)를 탄생시키기 위해서는 제도(制度)가 갖춰져야 한다는 것입니다. 결국 국가의 번영을 결정짓는 요인은 물질이 아닌 제도적인 부분에 있다는 것입니다. 한 나라의 장기적인 번영을 결정하는 것은 그 나라의 천연자원도 아니고 문화적 자산도 아니며, 권력의식이나 군사적 용기도 아닌 제도(制度)에 있다는 점입니다. 제도가 갖춰져야 혁신이 무성하게 일어나고 국부(國富)가 창출될 수 있다고 그는 말하고 있습니다. 일리있는 진단이라고 생각이 됩니다. 예나 지금이나 나라가 부강하려면 부자가 될 수밖에 없는 제도를 갖추어야 합니다.

히스기야는 이 사실을 잘 안 통치자였습니다. 나라가 부강하는 길이 무엇인지를 알고 있었습니다. 모세를 통해 “내가 오늘날 명하는 모든 명령을 너희는 지켜 행하라 그리하면 너희가 살고 번성하고 여호와께서 너희의 열조에게 맹세하신 땅에 들어가서 그것을 얻으리라 (신 8:1)”라고 주신 말씀을 잘 알고 있는 사람이었습니다. 자신의 아버지는 복받을 만한 그릇을 준비하지 못하여 나라가 빈약해졌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그는 나라를 부강한 나라를 만들기 위해 제도개선을 하였습니다. 복을 받을 수밖에 없는 그릇을 만들었습니다. 성전을 정결케 하고 성전 예배를 회복시켰습니다. 그리고 유월절 제도를 부활시켰습니다. 그리고 오늘 본문을 통해 무엇을 합니까?

그릇 만들기
2절을 보십시오. 나라를 부강하게 하기 위하여 히스기야 왕이 무엇을 합니까? 유월절을 14일 동안 지키고 백성들이 다 자기 성읍에 돌아가 우상을 다 제거하였습니다. 그 때 히스기야 왕은 성전 제사를 담당한 제사장과 레위인의 조직 정상화합니다. 한 번의 부흥운동으로 끝내는 것이 아니라 제도적으로 하나님께 예배드리도록 하는 것입니다. 예배 담당자인 제사장들과 레위인들의 순서를 정합니다. 각각 직임을 맡깁니다. 번제와 화목제를 드리며 성전에서 하나님을 섬기며 감사하며 찬송하게 하였습니다. 왕이 스스로 헌금을 하여 제사드리는데 지장이 없도록 하였습니다(3). 그 후에 무엇을 합니까? 백성들이 십일조 헌금을 하도록 하였습니다. 이 내용이 오늘 히스기야 왕이 복을 받는 그릇을 만드는 비법이었습니다(4-10). 나라가 부강하게 만들고 번성하게 만드는 제도를 갖추는 것이었습니다. 큰 물을 담으려면 큰 댐이 필요한 것입니다. 큰 고기를 튀기려면 큰 프라이팬이 필요한 것입니다. 히스기야는 백성들이 진정 복받는 그릇이 십일조에 있다는 사실을 알았습니다. 그래서 히스기야는 백성들에게 십일조를 하라고 했습니다. 지금 나라 경제가 어려울 때였습니다. 북 이스라엘은 망하였고 아직 전쟁의 폐허에서 일어나지 못할 때입니다. 앗시리아의 위협이 지속적으로 있을 때입니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히스기야기 이 말을 하자 사업 다 망하였는데 무슨 십일조냐고 불평하지 않고 백성들이 십일조에 참여합니다.

5절을 보십시오. “왕이 명령을 내리자 곧 이스라엘 자손이 곡식과 포도주와 기름과 꿀과 밭의 모든 소산의 처음 것을 하나님께 풍성히 드렸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아무것도 없이 노예 생활하던 이스라엘 사람들은 가나안 땅에 들어가 살게 하였습니다. 그 때 12지파가 있었는데 레위 지파를 택하여 성전을 맡아 전적으로 일하는 사람들을 만들었습니다. 그래서 12지파에게 땅을 분배할 때 레위 지파를 제외하고 11지파에게 공평하게 땅을 분배하였습니다. 레위 지파는 땅이 없으므로 11지파가 땅에서 거둔 소득의 1/10을 내게 하여 레위지파에게 주었습니다. 이것이 십일조입니다. 하나님은 말씀합니다. “땅의 십분 일 곧 땅의 곡식이나 나무의 과실이나 그 십분 일은 여호와의 것이니 여호와께 성물이라 (레 27:30)”

이 제도는 하나님의 창조 질서의 법칙 중에 속한 것이었습니다. 레위기 이전부터 있었던 것입니다. 믿음의 조상 아브라함이 전쟁에서 승리하고 멜기세덱에게 1/10을 드렸습니다.(창14;20, 히7:2, 6) 야곱은 벧엘에서 환상을 본 후에 자기가 안전하게 고향으로 돌아오게 되면, 그의 모든 소유의 10분의 1을 하나님께 드리겠노라고 서약했습니다.(창29:22)
고대의 이교 민족들, 즉 로마인들, 카르타고인들, 아라비아인들 가운데서도 전체 소유 또는 노획물, 징발한 재산, 상업적 이익으로부터의 10분의 1을 거룩한 일과 그와 유사한 일을 위하여, 또한 국가를 위하여 드린 무수한 사례들이 발견되고 있습니다. 이미 아담 때부터 하나님께서 가르친 것으로 추측할 수 있습니다. 가인과 아벨도 제물을 드린 것을 우리는 성경에서 볼 수 있습니다. 십일조는 인간이 진정 행복하게 사는 삶의 그릇으로 하나님께서 주신 것입니다. 함께 더불어 사는 삶의 원리로 주신 것입니다. 진정 부강한 나라로 사는 삶의 제도로 주신 창조 질서의 원리입니다.

하나님은 열방의 제사장 나라로 택한 이스라엘 백성을 통하여 경제적으로 진정한 부를 이루는 삶의 기본 제도를 보여주신 것입니다. 그런데 그들은 이것을 지키지 않습니다. 십일조 생활을 통하여 모든 것이 하나님의 것이다는 것을 인정하고 그 은혜를 감사로 사는 것입니다. 하나님 제일주의의 신앙을 물질로 드러내는 것입니다. 시간의 1/7을 주일로 지킴으로 시간의 주인되신 하나님 제일 주의 신앙을 고백하는 것처럼 물질의 1/10을 통해 모든 것이 하나님의 것이라는 하나님의 소유권을 인정하는 청지기적 삶을 고백하는 것입니다. 적신으로 왔다가 적신으로 가는 것이 인생인데 지금 내가 소유하고 있는 가정, 물질, 돈, 기타 모든 것은 다 하나님이 나에게 주신 축복이요, 하나님의 소유라는 것을 고백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선택한 하나님의 백성을 향하여 오직 죄의 문제를 담당하여 제사를 드리는 레위인과 제사장을 위해 레위인을 위한 십일조(민18:21-24)를 드려라고 했습니다. 민족 절기 때 감사의 축제용으로 축제의 십일조(신14:23-27)를 드리라고 했습니다. 매 안식년을 기준으로 제 제3년과 6년에는 그것을 축제용으로 사용치 말고 성(城) 중의 고아, 과부, 나그네, 가난한 자들을 돌보고 구제하는 데 사용하라고 했습니다.

그런데 오늘날 교인 가운데는 이 십일조에 대하여 거부감을 가지고 부담으로 생각하시는 분이 있습니다. 나의 것을 빼앗기는 것으로 생각을 하시는 분이 있습니다. 그래서 이유를 만들어 냅니다. 유대인들의 잔재고 율법의 소산물이고 십일조 시대는 지나갔고 율법은 폐기되었으니 율법에서 해방된 그리스도인들과는 관계가 없다고 하시는 분들이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성경을 잘못 해석한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친히 말씀했습니다.
“화 있을진저 외식하는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여 너희가 박하와 회향과 근채의 십일조를 드리되 율법의 더 중한 바 의와 인과 신은 버렸도다 그러나 이것도 행하고 저것도 버리지 말아야 할지니라 (마 23:23)”
우리가 구원받기 위해 십일조는 드리는 것이 아닙니다. 구원받았기 때문에 십일조 생활을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아들 딸 다운 삶을 누리기 위해서입니다. 모든 것이 하나님의 것인데 그 중 9/10를 가져다 쓰는 것입니다. 1/10은 하나님의 것, 하나님의 성물인 것으로 알고 손을 대지 않고 최소한 하나님의 뜻을 성취하는데 쓰임받는 물질로 남겨 놓는 것입니다. 그것으로 질병으로, 홀로되어, 구조적인 가난으로 고통받는 사람에게, 직분상 생업을 포기하고 하나님의 일에 전무하는 사람에게 주어 함께 더불어 행복한 삶을 살기 위한 가장 기본적인 경제적 분배 정의를 실현하기 위한 행복 구조를 만드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스라엘 사람들은 이것을 시행하지 않았습니다. 모든 것을 자신의 것으로 알고 움켜 쥐려고 했습니다. 하나님께서 그렇게도 움켜쥐고 싶어했던 모든 것을 잃게 만들었습니다. 결국 바벨론에게 멸망하여 가나안 땅을 잃어버리고 집도 농토도 잃었습니다. 하나님은 모든 것을 잃어 버린 후 포로 생활하는 그들을 향해 너무나 답답하여 말라기 선지자를 통하여 말씀합니다.

구약 성경의 맨 마지막 성경인 말라기 3장 7절 이하를 보십시오. 모든 것을 잃어 버린 그들을 향하여 진정 복받는 길 나라가 재건되고 부강해지는 길로 돌아오라는 것입니다. 어떻게 돌아갑니까? 8절에 보십시오. 하나님의 것을 도적질하고 있는데 그것을 하나님께 돌려 주라는 것입니다. 곧 그것이 무엇입니까? 십일조와 헌물이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9절 보세요. 왜 이들이 이렇게 나라가 망하고 부강한 나라가 되지 못했다는 것입니까? 온 나라가 나의 것을 도둑질했다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하나님이 시험을 해 보라고 합니다. 얼마나 우리 하나님 답답하셨으면 이렇게까지 말씀하시겠어요. 10절 같이 크게 읽어보겠습니다. 온전한 십일조를 드려 시험을 해 보라고 합니다. 억지헌금, 기분헌금, 말 많은 헌금, 찌꺼기 헌금, 눈치 헌금, 생생 헌금 드리지 말고 온전한 십일조 생활을 해 보라는 것입니다. 탐심은 우상숭배(골3:5)입니다. 고양이 밥주듯이, 개밥주듯이 헌금 생활하지 말아야 합니다. 펌프질 하듯 헌금 생활하지 말아야 합니다. 풍성한 지하수가 있는데도 가끔 필요할 때만 펌푸질 해 자기만 먹습니다. 옹달샘 헌금 생활을 해야 합니다. 작은 것 같지만 꾸준이 솟아나 나그네의 갈증을 해소해줍니다.

그러면 어떻게 한다는 것입니까? 하늘 문을 열고 너희에게 복을 쌓을 곳이 없도록 부어 주시겠다는 말씀입니다. 11절을 보십시오. 황충을 금하여 주신다고 했습니다. 토지의 소산을 멸하지 않게 해 주신다고 했습니다. 포도나무의 과실로 기한 전에 떨어지지 않게 해 주신다고 했습니다. 12절을 보십시오. 땅이 아름다워지므로 열방이 너희를 보고 복되다라고 말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통치권이 미치는 행복한 나라가 되는 것입니다. 복스러운 하나님의 나라 공동체가 되는 것입니다. 십일조를 하면 적극적으로는 복을 쌓을 곳이 없도록 부어 주시고(말 3: 10), 소극적으로는 재난이 없어지고(말 3: 11), 대외적으로는 열방이 인정할 만큼 복을 받게 된다는 것입니다(말.3: 12).

그런데 포로 생활하기 전 한 때 히스기야 왕 때 이 일이 회복된 것입니다. 그래서 역대하 31장을 사람들은 십일조 장이라고 말합니다.

히스기야 때 어떻게 백성들이 십일조를 하였는가를 살펴보십시오.
풍성히 드렸습니다(5절), 많이 드렸습니다(5절). 6절에 보십시오. 쌓아 더미를 이루었다고 했습니다. 7절을 보십시오. 그래서 그것을 쌓는데만 5개월이 걸렸다고 했습니다(7절). 이같은 기적적인 일을 보고 히스기야와 방백들이 하나님을 송축하고 백성을 위해 축복기도를 했습니다. 인색함으로 드린 것이 아닙니다. 즐거이 드렸습니다(14절) 계산적으로 드린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과 거래하면서 드린 것이 아닙니다. “이것 드리면 얼마나 주나”라고 계산하면서 드린 것이 아닙니다. 모두가 참여하였습니다. 왕도(3), 예루살렘 백성도(4-5), 이스라엘 자손도(6) 모두가 참여하였습니다. 하나님께 나와 유월절 예배를 14일 동안 지키고 이제까지 해보지 않은 혁명적인 일이 벌어진 것입니다.

그릇에 담긴 축복
그래서 이 나라가 어떻게 되었습니까?
10절을 보십시오. 백성이 십일조를 여호와의 전에 드리기 시작할 때부터 무슨 일이 시작되었습니까?

다른 사람과 자신이 속한 공동체가 행복해 지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창조 질서가 구현되는 것입니다.
대제사장 아사랴가 말합니다. 우리가 족히 먹고 남은 것이 많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통치 질서가 회복된 것입니다. 온전히 제사만 드리던 사람들이 먹을 것이 없어 일을 해야 했는데 이제 전적으로 하나님의 일만 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어려운 사람들이 행복을 누리게 되는 것입니다. 모든 구성원들이 더불어 행복을 누리는 강한 나라가 되는 것입니다. 분배 정의가 실현된 것입니다. 내가 십일조를 하면 그것으로 하나님의 백성들이 행복해 집니다. 생명이 살아납니다.

중앙 성전에 있는 사람만 만족한 생활을 한 것이 아닙니다. 대형 교회 목사님들만 넘치는 삶을 살고 시골 교회 목사님과 도시 개척교회 목사님은 굶주림에 허덕인 것이 아닙니다.
11절 이하를 보십시오. 히스기야가 십일조를 관리하는 사람들 세웁니다. 십일조 장관으로 레위 사람 고나냐와 차관으로 시므리를 세웁니다. 13절을 보십시오. 10명의 십일조 관리 전담 직원을 임명합니다.
회사를 하는 분들은 회사가 잘 되어 십일조 관리 전담 직원이 있다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9/10까지를 드린 록펠러는 십일조만 관리하기 위해 직원이 40여명이나 되었다고 하지 않아요.
14절 이하에 보니 분배하는 사람을 세웁니다. 15절 하반절에 보십시오. 제사장의 성읍들에서 무론 대소하고 나누어 주었습니다. 16절 보십시오. 삼세 이상 족보에 기록된 남자 외에 모두에게 나누어 주었습니다. 그저 레위 지파 족보에 기록 된 것만으로 베품을 당하였습니다. 대형 교회 유능한 목사님만 좋은 차를 타고 좋은 집에서 넘치도록 산 것이 아닙니다. 시골 산골에 계신 목사님, 먼 이국 땅 오지에서 선교하시는 목사님, 가난한 도시 개척 교회 목사님 모두가 함께 더불어 산 것입니다. 18절을 보십시오. 족보에 기록된 온 회중의 어린아이와 아내와 자녀들에게 나누어 주었습니다. 성물의 분배는 능력이 아니라 가족의 수에 맞게 나누어주었다는 말입니다. 오늘날로 말하면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교회에 모이느냐가 문제가 아니라 얼마나 많은 경력을 가지고 있느냐가 문제가 아닙니다. 얼마나 많이 배워 능력이 있느냐가 문제가 아닙니다. 얼마나 많은 부양 가족이 있느냐에 따라 사례금을 주었다는 말입니다. 저는 아이들이 어릴 때 한 4년 동안 한 달에 100만원 일년 사례 1200만원 받고 생활하였습니다. 그러다 아이들이 크고 빗만 늘어나서 조금 사례를 올려 받았습니다. 그런데 어떤 분이 목사님 초심을 잃었다고 말한다고 해요. 부목사님 식구가 여섯명이나 되어 내가 적게 받으면 부목사님 생활이 되지 않을 것같아 제가 처음으로 제정부원들과 장로님에게 사례금을 생활할 수 있도록 해달라고 부탁을 드렸습니다. 그리고 부목사님이 선교사님으로 나가 올해는 제 사례금을 내려 달라고 부탁을 했습니다. 세상은 오르기만 하고 내리지 않지만 교회는 그렇지 않습니다. 필요에 따라 생활할 수 있도록 해 주면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 목회자가 자신의 직무를 충실히 수행할 수 있도록 하면 되는 것입니다.

여기서 그친 것이 아닙니다.
19절을 보십시오. 성읍 외에 거주하는 제사장과 레위인들에게도 동일하게 성물을 나누어 주었습니다. 농촌과 외딴 섬에서 사역하시는 목회자에게도 성물을 주었다는 이야기입니다.
이것이 바로 십일조로 주어지는 축복이었습니다. 오늘날 자본이 왕노릇하는 자본주의의 병폐를 닮아가는 교회는 십일조는 강조하지만 십일조 정신의 축복을 나누지 못하는 경향을 봅니다. 십일조는 그 돈으로 8백억짜리 교회를 지어 교인 마케팅을 하라고 하나님께 드리는 것이 아닙니다. 전적으로 하나님 나라를 위해 사역하는 사람들이 이 사역에 매진할 수 있도록 드려지는 것입니다. 오늘날도 역시 십일조 정신이 회복되어야 합니다. 저는 깨어 있는 성도들이라면 십일조 정신을 구현하는 교회 생활을 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교인은 교회 선택의 자유가 있습니다. 그것을 부정할 수 없습니다. 자신이 맡은 곳에 가서 신앙 생활하고 봉사하는 것 당연합니다. 그러나 그것이 자유가 되지 못하고 방종이 되고 오히려 하나님이 이 땅에 교회를 세워 놓으신 기본 목적을 상실하는 선택일 수도 있습니다. 교회는 극장이 아닙니다. 공연장이 아닙니다. 단순히 설교 들으러 가고 자녀 교육을 시키러 가는 곳이 아닙니다. 일류 기업 다니듯 일류 교회 다닌다는 폼잡기 위해 다니는 곳이 아닙니다. 이 땅에서 하나님의 나라, 구속사를 성취하며 이스라엘을 열방을 위한 제사장 나라로 삼았듯이 이 땅에 하나님의 살아계심을 증거해야할 곳입니다. 교회가 자본의 종이 된 세상을 그대로 닮아가서는 아닙니다. 능력 있는 자가 잘 살고 능력 있는 자가 지배하는 세상과 달리 교회는 하나님이 통치하고 능력 있는 자나 능력 없는 자나 더불어 살아가는 공통체를 이 땅에 실현해야 하는 곳입니다. 하나님이 통치하는 공동체의 복된 삶의 모델을 시대 속에서 제시해야 할 공동체입니다. 말라기에 나온 십일조 정신에서 나왔듯이 모든 사람들이 복을 받고 있는 공동체라는 사실을 증거해 주어야 합니다.

이것은 구약의 제도 문제나 율법 문제가 아닙니다. 우리는 신약의 헌금에서도 그 정신을 분명하게 알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창조원리의 문제입니다. 하나님께서 인간이 행복하게 살기 위해서 그런 법칙을 만들어 놓으신 것입니다. 그 법칙에 순종할 때 인간은 행복하다는 것입니다. 모든 만물이 하나님의 창조 법칙을 어기면 불행해지고 파괴되는 것입니다.

고린도 후서 8장을 보십시오. 사도 바울 때 마게도니아 교회가 참 어려웠습니다. 환난도 많고 시련도 많았습니다. 그런데 그들은 “환난의 많은 시련 가운데서 저희 넘치는 기쁨과 극한 가난이 저희로 풍성한 연보를 넘치도록 하게 하였습니다(고후 8:2)” 힘대로 할 뿐 아니라 힘에 지나도록 자원하여 하였습니다(고후 8:3). 그런데 그렇게 헌금하여서 어떻게 되었습니까? 13절 이하를 보십시오.

“이는 다른 사람들은 평안하게 하고 너희는 곤고하게 하려는 것이 아니요 평균케 하려 함이니 이제 너희의 유여한 것으로 저희 부족한 것을 보충함은 후에 저희 유여한 것으로 너희 부족한 것을 보충하여 평균하게 하려 함이라 기록한 것같이 많이 거둔 자도 남지 아니하였고 적게 거둔 자도 모자라지 아니하였느니라 (고후 8:13-15)”

함께 행복해지는 공동체를 만드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작은 교회 지만 매달 500여만원씩을 이웃들을 섬기는데 사용하고 있습니다. 만명의 어린이를 양육하기 위한 목표를 가지고 나아가고 있습니다. 해외에 100개의 교회를 짓기 위해 노력하고 있습니다. 소년 소녀 가장들의 장학금을 마련하기 위해 노력하고 있습니다. 장애인과 농어촌 교회, 선교사를 섬기기 위해 힘에 지나도록 힘쓰고 있습니다. 앞으로는 독거 노인 등 우리의 헌금이 바르게 쓰이도록 우리의 지경을 넓혀야 합니다.

돈으로 행복을 살수 있다는 것은 상대적인 의미입니다. 모든 사람은 주로 친구와 이웃의 부에 비추어 자신들의 부를 측정합니다. 이것을 이웃효과(neighbors effect)라고 합니다. 한 나라의 총량적 부의 증대가 그 나라를 더 행복하게 만들지 못하는 것입니다. 나라가 부유해진다고 해서 나라 전체가 부유해지는 것은 아닙니다. 부(富)의 차이를 줄어들어야 합니다. 나라도 심각한 부의 불균형이 초래되면 다수의 국민의 행복을 위해 일정한 한계 안에서 소득의 강제 수평화를 통해 부가 재분배되도록 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복지 국가입니다. 세금을 통해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나라는 하나님의 법에 의해 소득이 재분배되게 하여 모두가 행복한 삶을 살 수 있는 원리를 만들어 놓으신 것입니다.

그렇다고 십일조 한다고 개인인 불행해 집니까?
자신이 복을 받습니다. 10절 하반절을 보십시오. 여호와께서 그들에게 복을 주었습니다. 지금 이 시대에 북쪽 이스라엘은 이미 앗수르에게 망해 버렸습니다. 자신의 나라도 언제 위기기 닦쳐 올지 모릅니다. 나라가 망해 버리면 자신에게 있는 것 모든 것을 잃어 버립니다. 그런데 아직까지 나라가 안정되고 십일조를 낼 수 있다는 사실이 얼마나 복이 됩니까? 십일조를 낼 수 있는 직장이 있고 벌이가 있다는 사실 그 자체가 복이라고 생각됩니다. 제가 언젠가 어는 사업하는 집사님 집에 심방을 가니까 한 달에 십일조 1억을 할 수 있었으면 좋겠다고 말하시는 것을 들었습니다. 어떻게 보면 허황되게 들릴지 모르지만 좋은 비전이라고 생각이 듭니다. 저는 그 일을 위해 기도하고 있습니다. 어느 집사님이 저에게 헌금 이야기를 해서 “그렇게 헌금을 부담으로 생각하지 마십시오. 오히려 적극적으로 접근하십시오. 드릴 수 있다는 것이 얼마나 행복합니까? 사업할 때 목표를 한 달에 천만원씩 십일조를 하는 기업이 되게 해달라고 기도하면서 일해 보십시오. 사업이 보람이 있고 하나님이 허락하시면 사업이 번창될 것입니다.”라고 말한 적이 있습니다. 그 집사님 즐겁게 일하면서 뚜렷한 목표를 가지고 400여만원까지 십일조 생활을 하는 것을 지켜보았습니다. 십일조 생활을 부담으로 손해로 생각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십일조 하면 가난해진다고 생각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의식을 바꾸시기 바랍니다. 돈에 대한 태도를 바꾸시기 바랍니다. 자식에게는 그렇게 투자하면서 부모에게 인색한 사람을 보면 어떤 생각이 듭니까?

실제로 학자가 조사를 해보았습니다. 신앙 생활이 영혼의 문제로 만 끝나는가 아니면 경제 생활에도 영향이 있는가를 미국 매사추세츠 공과대학(MIT) 경제학과의 조너선 그루버가 조사를 해보았답니다. "예배 출석률이 2배가 되면 가계소득이 9.1% 증가하거나 복지지원금 수혜가 16% 감소하고 이혼확률이 4% 줄어든다"고 밝혔습니다. 예배 참석 빈도가 높을수록 학력과 소득도 높아진다는 것입니다. 영혼만 살찌는 것이 아니라 지갑도 두둑해진다는 것입니다.

맨소래담의 창업자 미국의 하이드(Albert Alexander Hyde)라는 분이 계십니다. 서점을 경영하여 거부가 되었는데 1887년에 밀어닥친 경제공황으로 빚만 10만 달러를 지고 사업은 다 살아져 버렸답니다. 그러나 그는 실망하지 않고 오히려 가족의 보금자리인 집을 팔아 이미 YMCA에 기부하기로 약속했던 기부금을 내고 십일조를 하였답니다. 그 때 사람들은 그를 비웃으며 제 정신이 아니다고 했답니다. “헌금은 나중에 돈을 많이 벌었을 때나 하고, 먼저 빚부터 갚아야 되지 않겠는가?”라고 했답니다. 인간적으로 본다면 지당하고 옳은 말이었습니다. 그러나 하이드의 생각은 달랐답니다. 하나님께 진 빚을 먼저 갚으려고 했답니다. 그는 사람의 빚보다 하나님께 빚진 것을 더 두려워했답니다. 그는 결국 3년 후 맨소래담 회사를 창립하고, 이전에 받았던 축복보다 더욱 놀라운 축복을 받아 수입의 구(9/10)를 하나님께 바치는 풍요로운 헌금 생활을 하였답니다.

십일조 축복론을 강의하고 다니는 기업인이 있습니다. 참존화장품의 김광석 회장입니다. 부도나고 도피 생활하다가 절에서 예수님 영접하여 신앙생활하시는 분입니다. 매주 월요일이면 그의 비서실은 단체, 개척교회 등 20여 군데나 넘는 곳에 후원금을 보내는 일로 분주하다고 합니다. 이일은 벌써 10년째 계속되고 있다고 합니다. 매주 월요일이면 기도회와 성경공부로 일주일을 시작한다고 합니다. 그분의 고백은 신앙생활을 하면서 한가지 경험한 것은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면 반드시 축복이 내려온다는 사실이라고 고백하고 있습니다.

왕이지만 십일조 생활을 모범적으로 하면서 백성들에게 십일조를 하라고 한 히스기야의 삶을 보시시오. 오늘 성경은 31장은 이렇게 결론적인 말씀을 해 주고 있습니다. 20절 21절 같이 읽어 보겠습니다. 그 하나님 보시기에 선과 정의 진실함으로 행하였습니다. 그 행한 모든 일에 하나님을 구하였습니다. 그리하여 어떻게 되었다는 말입니까? 형통하였다는 말씀입니다. 가난안 땅에 들어가기 전 모세를 통하여 신명기에 약속한 말씀이 그대로 성취된 것입니다. “그 해 소산의 십분 일을 다 내어 네 성읍에 저축하여 너희 중에 분깃이나 기업이 없는 레위인과 네 성중에 우거하는 객과 및 고아와 과부들로 와서 먹어 배부르게 하라 그리하면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너의 손으로 하는 범사에 네게 복을 주시리라 (신 14:28-29)”

십일조를 하면 망하는 것이 아닙니다. 손해되는 것이 아닙니다. 물질 생활의 진정한 축복을 누리게 됩니다. 돈이 많아 축복이 아닙니다. 진정 만족하는 삶을 살기 때문에 진정한 부자가 되는 것입니다. 가정과 자녀들이 축복을 받습니다. 영적 신앙 생활이 윤택해 집니다. 영적 전쟁에서 승리할 수 있습니다.

미국의 유명한 억만장자인 록펠러는 어렸을 때, 어머니로부터 십일조 교육을 받았다고 합니다. 두 개의 주머니를 만들어 주어 하나는 하나님의 것에 아홉 개는 자신의 주머니에 넣게 하였다고 합니다. 그는 8살 때 자기가 받은 20센트에서 2센트를 십일조로 드리기 시작하여나중에 부자가 되어 9/10까지 하답니다. 뉴욕시민이 수도세를 지불하지 않도록 물 값을 영원히 지불하였습니다. 12개의 대학을 세웠습니다. 4,000여개의 교회를 지원하고 교회를 세웠다고 합니다. 그는 이 세상을 떠났지만 록펠러 재단을 만들어 살아 있을 때보다 더 많은 일을 하고 있습니다. 카네기재단․포드재단과 함께 미국 최대의 재단으로 지금도 기아 근절, 인구문제, 대학의 발전, 개발도상국 원조 등을 위해 수많은 일을 하고 있습니다. 그도 신앙인이었지만 돈에 미쳐 노동자의 살해 위협을 당한 사람입니다. 그의 회사에서 파업을 할 때 무려 여자와 어린이를 포함해 50여명이 죽는 미국 노동운동사에서 가장 참혹한 러드로의 학살이 록펠러의 탄광에서 일어났습니다. 1870년대엔 클리블랜드의 대학살도 그의 석유 회사에서 일어나 록펠러는 악의 화신으로 꼽혀 침대 곁에 권총을 둬야 했을 만큼 생명의 위협을 받은 사람입니다. 그러나 그는 프레드릭 게이츠목사님을 만나 인생이 바뀌었습니다. 록펠러 재단을 만들게 하였습니다. “회장님의 재산은 눈덩이처럼 불고 있습니다. 불어나는 것보다 더 빨리 나눠줘야 합니다. 그러지 않으면 회장님은 물론, 자녀 모두가 그 눈덩이에 깔려 죽을 것입니다.”라고 말했다고 합니다. 그는 진정한 하나님의 사람이 되었습니다.
그가 노년이 되었을 때 어떤 사람이 이 석유왕을 찾아와서 어떻게 해서 그토록 큰 부자가 되었느냐고 묻자 그는 서슴치 않고 "나는 십일조를 바칩니다. 십일조를 바치는 사람은 가난하게 사는 법이 없죠. 하나님은 십일조를 바치는 자에게 쌓을 곳이 없도록 복을 내려 주시겠다고 약속하시지 않았습니까?"라고 대답하였습니다

미국의 기독 실업가인 아더 미다스 장로는 미국의 10대 재벌 중 한 사람이었습니다. 미다스 장로는 많은 재산을 선교 사업을 위하여 사용했습니다. 선교 재단을 설립하기 위하여 7억 달러를 헌금했고, 또 한국의 대학생 선교단체에 50만 달러를 기증하기도 했습니다. 어느 날 한 기자가 그에게 성공적인 인생을 살게 된 비결을 묻자 그는 이렇게 대답했습니다.

"나는 다섯 가지 인생 철학을 가지고 있습니다. 첫째는 주일 성수요, 둘째는 온전한 십일조 생활이요, 셋째는 하루의 첫 시간을 기도로 시작하는 것이요, 넷째는 가정의 주인을 예수님으로 모시는 것이요, 그리고 다섯째는 시간과 돈을 선한 사업에 사용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뜻입니다. 하나님은 우리 모두가 성공적인 인생을 살기 원하시는데, 우리가 그 뜻에 순종하지 않기 때문에 풍요로운 삶을 누리지 못하는 것입니다."

부강하기를 원하십니까? 형통하기를 원하십니까? 내가 사는 곳에서 복을 받기를 원하십니까? “나는 신앙 생활하는데도 왜 이렇게 힘들게 살까?”라고 비관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부강하고 형통하고 복을 받으려면 하나님께서 그렇게 될 수밖에 없도록 만들어 놓으신 제도의 틀 속으로 기쁨 마음으로 자원하여 들어오시면 됩니다.
그물로 바람을 잡을 수는 없습니다. 가물 땐 구름이 끼어야 비가 옵니다.(김필곤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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