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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지혜의 목적이 이끄는 판단 (마 7: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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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비판을 받지 아니하려거든 비판하지 말라

우리의 인생은 매 순간의 선택의 결과이며, 그 선택은 우리의 판단의 결과입니다. 그 판단은 우리의 판단 척도에 의한 것입니다. 그 판단 척도는 나의 경험이나 세상 지식일 수도 있으며, 세상의 압력일 수도 있고, 하나님의 말씀일 수도 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을 찾는 자들의 마음에 가장 많이 자리하고 있는 부분이 이러한 판단 척도의 이중성입니다. 내적으로는 자신의 욕심이 판단척도이면서도 외적으로는 하나님의 말씀을 기준으로 하려고 합니다. 성경은 이러한 자를 외식하는 자라고 합니다.

오직 하나님만을 의식하며 살아가는 온전한 성도는 온전한 판단을 통하여 하나님 나라 백성의 복을 누리는 판단과 선택의 삶을 살아가지만 세상을 의식하며 두 마음을 품은 가운데 외식하는 마음으로 판단하고 선택하며 살아가는 자는 자신과 공동체와 세상을 파괴하는 저주받은 삶을 살아갑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마 5:48에서 “그러므로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의 온전하심과 같이 너희도 온전하라”라고 하셨고, 마태복음 6장 전체에서 오직 한 주인이신 하나님만 의식하는 삶을 요구하셨습니다.

그리고 두 마음을 품고 외식하는 자들을 향하여 경고하십니다. 이들의 외식하는 삶의 근본은 판단에서 출발합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이들의 판단하는 삶에 나타나는 두 마음을 품은 외식하는 자들의 근본 문제들을 치료해 주시고자 마 7:1-6에서 판단에 대한 성도의 자세를 말씀하셨습니다. 마 7:1-2에서 판단의 정의와 목적을 알려주십니다. 마 7:3-5에서 판단의 척도 문제를 해결해 주시고, 마 7:6에서 그 판단의 정상적인 적용 원리를 말씀해 주십니다. 성도의 삶의 승리는 판단의 승리에 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 당시와 마찬가지로 오늘날의 성도들이 가장 애매한 태도를 취하는 부분이 판단 부분입니다. 성도들의 삶이 실패하며 하나님의 백성의 특권과 축복을 누리지 못하는 이유도 판단 문제의 실패 때문입니다. 판단의 실패는 곧 당시 책망 받은 바리새인들처럼 외식하는 자와 동일한 삶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증거입니다. 어떤 성도는 적극적으로 판단하고 선택하며 도전해 갑니다. 그러나 어떤 성도는 마 7:1-6의 말씀을 온전하게 이해하지 못하여 마음의 판단을 거부하며, 애매하게 살아갑니다.

마 7:1의 “비판을 받지 아니하려거든 비판하지 말라”라는 말씀은 분명히 명령문입니다. “비판하지 말라”는 명령입니다. 하지만 그 목적은 “비판을 받지 아니하려거든”입니다. 이 명령은 마 7:5의 “외식하는 자”들을 향한 명령입니다. 반면에 마 7:6은 하나님 나라 백성들에게 “거룩한 것, 개, 진주, 돼지”등을 판단하고 선택하여 온전하게 반응하도록 명령하십니다. 그러므로 “비판하지 말라”는 명령은 마 7:1-6의 전체 문맥 속에서 이해해야 하며, 더 나아가 산상수훈 전체 속에서 받아들여야 합니다.

마 5:1-7:29의 산상수훈 전체는 예수님께서 당대의 바리새인들과 같은 외식하는 자들을 판단하시며 하나님 나라 백성들이 그들과 어떻게 다른지를 가르치시는 말씀이십니다. 하나님 나라 백성들이 그들과 비교하여 어떻게 살아야 하나님의 기쁨이 되는 온전한 삶인지 알려주시는 말씀입니다. 또한 성경 전체 흐름은 성도들에게 세상을 온전히 판단하며 분별하고 선택하여 지혜롭게 살아가도록 요구하는 명령으로 가득합니다. 그러므로 판단의 포기나 실패는 하나님 나라 백성의 삶의 실패입니다.

판단하는 삶에 실패한 유대인들은 예수님을 판단하고 정죄하여 고난의 길로 몰아갔고, 십자가에 못 박아 죽이기까지 하였습니다. 예수님의 고난의 길과 십자가의 길은 외식하는 자들의 판단의 실패를 적나라하게 보여주는 역사적인 증거입니다. 그들의 판단 척도가 틀렸습니다. 그들의 판단 목적이 틀렸습니다. 그들의 판단 후의 선택이 틀렸습니다. 결국 그들은 메시아로 오신 예수님을 못 박아 죽게 하였고, 그 쓰라린 열매를 오늘날까지 먹으며 고통 속에 살아갑니다. 외식하는 자의 판단은 멸망입니다.

외식하는 자들의 판단은 자신의 외식을 감추기 위한 정죄에 목적을 둔 판단입니다. 우리말은 정죄를 위한 “판단”을 “비판”이라고 부릅니다. “크리노”라는 단어가 용법에 따라 달리 해석되어지는데, 이곳의 판단은 “비판”의 표현이 정확한 표현입니다. 이들의 판단은 정죄를 위한 판단으로서 비판입니다. 판단 후에 드러나는 악을 피하기 위한 판단은 “분별”이지만, 이들은 악을 제거하기 위한 “판단”이 아닌 “정죄”를 위한 “판단”이며 성도가 피해야 할 죄악입니다. 온전한 판단의 목적은 “지혜”입니다.

2. 너희의 비판하는 그 비판으로 너희가 비판을 받을 것이요

온전한 판단을 포기하는 삶은 “지혜”를 포기하는 삶입니다. “지혜의 목적이 이끄는 판단”은 성도의 기본입니다. 하지만 “정죄의 목적을 위한 판단”은 외식하는 자의 기본입니다. 마 7:1에서 “비판을 받지 아니하려거든 비판하지 말라”라는 명령은 정죄의 목적을 위한 판단을 하지 말라는 명령입니다. 상대방을 판단하여 정죄하고 악평을 할 뿐만 아니라 그 정죄를 통하여 자신의 세상적인 이득을 취하려는 판단은 하나님의 심판에 해당하는 죄악입니다. 우리의 판단 목적은 회복의 지혜를 위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성령 안에서 우리의 마음을 살펴야 합니다. 우리 마음에 정죄를 위한 판단이 일어난다면 신속히 그 악을 회개하고 돌아서야 합니다. 악한 죄악들을 제거하고자 하는 열망과 죄인을 향한 주님의 마음을 품지 않았다면 그 판단은 거짓이며 죄악입니다. 근본적으로 원수를 사랑함으로써 잃은 양을 찾고자 하는 열심이 없이는 판단할 수 없습니다. 예수님은 우리가 아직 죄인 되었을 때에 우리를 판단하시고 우리를 위하여 십자가를 지실 것을 선택하셨습니다. 사랑에 의한 판단입니다.

오직 하나님 안에서 자신과 공동체의 회복을 소망하는 사랑의 마음에서 출발하는 하나의 마음의 판단이 지혜의 목적에 이끌리는 판단의 삶을 살아가게 합니다. 그 사랑과 회복에의 소망이 있는 하나님 나라의 백성들은 지혜의 목적을 위한 판단에 열심을 품고, 헌신합니다. 반면에 외식하는 마음으로 세상을 의식하며 세상 속에서 승리를 원하는 자들은 정죄 목적의 비판에 열심을 품습니다. 그러나 이웃을 사랑하는 마음이 없는 성도들은 외식하는 마음속에서 판단을 포기하고 애매하게 살아갑니다.

마 7:2에서 “너희의 비판하는 그 비판으로 너희가 비판을 받을 것이요 너희의 헤아리는 그 헤아림으로 너희가 헤아림을 받을 것이니라”라는 말씀은 외식하는 마음을 위해서 정죄의 목적으로 판단하는 자들이 하나님의 심판을 받는 정죄의 판단을 받는다는 말씀입니다. 여기서 “헤아림(메트론)”이라는 단어는 “측정 도구”를 의미합니다. 그러므로 내가 정죄의 측정 도구로 측정할 때 그와 동일한 정죄의 도구로 측정 받는다는 것입니다. 따라서 우리가 어떤 목적으로 판단하는가의 목적이 중요합니다.

이러한 판단 문제는 유대인 사회에서 전통적으로 흘러오는 영적 흐름의 하나였습니다. 어떤 목적의 판단을 지니고 살아가는 백성이 되느냐 하는 것이 이스라엘의 흥망성쇠와 연결되어 있었습니다. 구약의 역사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타락해 갈 때마다 지혜의 목적을 위한 판단을 거부하고 정죄의 목적을 위한 판단을 하며 공동체를 이끌고 감으로써 이방인들에게 그러한 정죄를 받아 멸망의 길을 가게 되었습니다. 이들은 자신의 유익을 위해 적극적으로 지혜를 위한 판단을 방해하고 가로막았습니다.

그 대표적인 예가 예레미야 선지자의 활동 속에 가장 잘 나타납니다. 예레미야는 이스라엘을 향하여 하나님의 지혜를 찾는 온전한 판단의 길로 돌아오도록 외쳤지만 이스라엘 백성들은 그 외침에 귀를 막을 뿐만 아니라 그 선지자를 핍박하며 더 이상 그러한 선포를 할 수 없게 가로막았습니다. 그들은 하나님의 백성으로서의 온전한 판단의 길을 적극적으로 포기하며 자신들의 눈에 보이는 현실적인 만족을 위하여 세상적인 판단 척도로 판단하며 하나님과 말씀을 떠나다가 멸망당하게 되었습니다.

렘 18:18에 보면, “그들이 말하기를 오라 우리가 꾀를 내어 예레미야를 치자 제사장에게서 율법이, 지혜로운 자에게서 모략이, 선지자에게서 말씀이 끊어지지 아니할 것이니 오라 우리가 혀로 그를 치고 그의 아무 말에도 주의치 말자 하나이다”라고 외치며 예레미야 선지자를 잡으러 다녔습니다. 오늘날 우리들이 대충 듣기에도 한심한 외침이었습니다. 그들은 예레미야를 통한 지혜의 판단을 거부하고, 다른 거짓 선지자들을 통한 정죄의 판단을 요구하며 예레미야를 죽이기 위해 찾아 다녔습니다.

이것이 외식하는 자들의 비판과 헤아림입니다. 서로를 죽이며 자신과 공동체까지도 멸망의 길로 가게 하는 판단입니다. 이들은 “율법”과 “선지자”와 “지혜자”의 목적을 잘 알면서도 그 목적으로 나아가는 회복의 길을 포기하고, 외식하는 마음을 따라 세상의 거짓 선지자에게 그 기능을 넘겨주었습니다. 결국 율법과 선지자와 지혜자의 목적은 입술로만 표현되는 목적이었고, 실질적으로는 그 목적을 가로막고 자신들의 육적인 판단에 의한 안목으로 움직이려는 정죄의 목적이었습니다.

예레미야는 율법과 지혜자와 선지자를 통하여 사랑과 지혜의 판단을 하고, 그에 따라서 회복의 소망 가운데 바벨론의 지배를 받아들이자고 외쳤습니다. 그러나 거짓 선지자들은 그 율법과 지혜자와 선지자를 통하여 정죄의 판단을 하여 바벨론을 정죄하고, 애굽의 힘을 빌어서 바벨론에 대적하여 싸우자고 외쳤습니다. 회복을 향한 하나님의 지혜를 거부하고 정죄를 통한 전쟁을 택함으로써 죽임 당하는 실패를 경험하였습니다. 사랑과 지혜 목적의 판단을 하지 못한 삶의 처절한 결과들이었습니다.


3. 너희의 헤아리는 그 헤아림으로 너희가 헤아림을 받을 것이니라

그러므로 우리는 “헤아림”을 온전케 하여야 합니다. “정죄”라는 헤아림을 버리고 “지혜”라는 헤아림의 측정도구를 지녀야 합니다. “정죄”를 위한 비판을 하지 말아야 합니다. 우리가 세상과 하나님으로부터 정죄의 판단을 받지 않으려면 예수님의 명령대로 정죄의 비판을 하지 말아야 합니다. 우리가 정죄의 비판을 할 때 우리들도 정죄의 비판을 받아 하나님의 지혜를 잃어버린 자의 고통스런 인생을 살아갑니다. 우리가 정죄의 측정도구를 사용할 때 우리의 인생도 정죄의 측정도구 앞에 버려집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외식하는 바리새인들이 듣는 자리에서 제자들에게 “비판을 받지 아니하려거든 비판하지 말라 너희의 비판하는 그 비판으로 너희가 비판을 받을 것이요 너희의 헤아리는 그 헤아림으로 너희가 헤아림을 받을 것이니라”라고 선포하십니다. 우리는 온전한 측정 도구를 지닌 자로서 온전한 판단을 하여 하나님의 백성의 특권을 누릴 뿐만 아니라, 지혜를 잃고 방황하는 세상 영혼들에게 예수님의 사랑을 전하며,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회복의 길로 돌아오게 해야 합니다.

렘 18:18은 외식하는 바리새인들도, 예수님을 따르는 하나님의 백성들도 인정하고 받아들이는 공통적인 판단의 목적과 방법입니다. 그들은 첫째로 “제사장”이 “율법(토라)”을 통해 하나님의 마음과 뜻을 드러냄을 알았습니다. 둘째로 “선지자”의 “말씀”을 통하여 율법에서 멀어져 잘못된 자신들의 삶이 깨어질 것을 알았습니다. 셋째로 “지혜로운 자”의 “충고, 조언(모략)”을 통하여 지혜로운 판단과 선택을 할 것을 알았습니다. 율법을 통한 원칙과 선지자를 통한 회개와 지혜자를 통한 지혜입니다.

외식하는 자들은 그것을 잘 알기 때문에 그것을 거부하고 가로막았습니다. 온전한 성도들은 그것을 잘 알기 때문에 그러한 삶을 위하여 믿음으로 반응합니다. 모세오경의 율법이 정죄의 측정도구로도 지혜의 목적지로도 사용됩니다. 구약 선지서들의 외침들이 정죄의 도구로도 쓰이며 우리로 율법을 향해 회개케 할 수도 있습니다. 시편이나 잠언 등의 지혜서들도 정죄의 도구로도 쓰이며 우리에게 선택을 위한 지혜를 주기도 합니다. 이러한 차이는 우리 마음에 두는 헤아림의 측정 도구에 있습니다.

예수님은 하나님 나라의 백성이 된 자들에게 율법을 통한 하나님의 뜻이 드러나기를 원하십니다. 그들이 선자지들의 외침을 듣고 죄악 중에 있던 마음이 깨어져서 회개에 이르기를 원하십니다. 지혜자의 말씀들을 통해 그 드러나고 깨어진 것들 중에서 온전한 것을 선택할 수 있는 지혜의 능력을 나타나기를 원하십니다. 구약의 모든 성경은 지금도 우리에게 그러한 기능을 다하고 있으며, 신약에서 구체화 되고 있습니다. 성령 안에서 한 주인을 모신 하나님의 백성들은 이러한 삶을 살아갑니다.

성령의 이끌림을 받는 성도들의 판단은 이러한 지혜의 목적이 이끄는 판단입니다. 지혜의 목적이 이끄는 판단을 하는 하나님 나라의 새로운 백성들은 모든 대상을 판단할 때마다 율법을 통한 하나님의 뜻과 마음을 깨닫습니다. 그들을 통하여 말씀하시는 선지자적인 말씀을 듣고 회개하여 죄악에 굳어진 마음을 갈아엎습니다. 그들을 통하여 보여주시는 지혜자의 지혜를 깨달아 온전한 판단과 선택을 하여 하나님 나라 백성의 축복을 누립니다. 이러한 판단이 우리의 분별하는 온전한 판단입니다.

우리의 이러한 온전한 판단이 정죄함으로 판단하는 세상을 향한 빛이며 소금입니다. 이러한 삶이 그들 앞에 빛을 비추어 주는 착한 행실입니다. 정죄의 목적이 이끄는 판단을 하는 세상 사람들이나 외식하는 자들은 우리의 착한 행실의 빛 아래서 하나님의 지혜를 얻는 참된 판단의 길로 들어오거나 하나님의 심판의 판단을 받으며 하나님의 정죄의 헤아림을 받는 자들로 나타나게 됩니다. 그러므로 판단하는 삶의 모습은 하나님 나라의 백성과 세상 사람들을 구분할 수 있는 삶의 표식입니다.

하나님의 백성들이 지니고 있어야 할 헤아림의 측정 도구는 하나님의 율법이며, 선지자의 말씀이고, 지혜자의 지혜입니다. 언제나 이 세 가지를 통해 인도하시는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목적으로 판단을 할 줄 알아야 합니다. 자신의 욕심과 외식과 정죄가 그 헤아림의 측정 도구로 자리 잡을 때마다 우리의 성도로서의 삶은 실패합니다. 지혜의 목적에 이끌리는 판단은 예수님의 고난과 십자가의 길을 통해 구원의 은혜와 축복을 누리지만 정죄에 이끌리는 판단은 영원한 죽음을 향해 가게 합니다.

우리에게 성령의 인도하심을 받는 사랑으로서 원수를 사랑하는 사랑의 능력이 임재 해 있을 때 우리의 판단은 지혜의 목적이 이끄는 판단으로서 하나님 나라 백성들의 아름다운 삶을 만들어갈 수 있습니다. 자신뿐만 아니라 공동체 전체가 하나님의 뜻과 회개와 지혜의 통합된 은혜의 역사를 통하여 하나님의 기쁨과 즐거움에 함께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정죄의 목적이 이끄는 판단은 자신과 공동체 모두를 멸망의 길로 이끌어 갑니다. 그러므로 비판과 헤아림이 지혜로 나타나게 해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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