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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주의 날에 성령에 감동하여 (계 1:9-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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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스도 안에서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그 주일날 요한은 밧모라 하는 섬에 있었습니다. 밧모섬은 소아시아 해안에서 멀리 떨어진 조그마한 섬입니다. 바다 가운데 바위들로 이뤄진 메마른 섬입니다. 전혀 그럴듯한 장소가 아닙니다. 끊임없는 파도만 밀려와서 해안의 바윗돌에 부서지는 그런 곳이지만 하나님이 그 종을 위해 선택한 장소임에 틀림없습니다.

“나 요한은 너희 형제요 예수의 환난과 나라와 참음에 동참하는 자라 하나님의 말씀과 예수의 증거를 인하여 밧모라 하는 섬에 있었더니”

요한은 하나님의 말씀을 사람들에게 전하고, 예수 그리스도를 그들에게 설교한 대가로 밧모라 하는 섬에 지금 유배되어 있습니다. 평소에 섬기던 성도들로부터 멀리 떨어진 곳에 지금 추방되어 있습니다. 여느 주일 같으면 그 시간쯤은 성도들과 함께 예배를 드릴 시간이었을지 모릅니다.

세상의 통치자는 요한을 외딴 섬에 귀양 보냈지만 온 우주의 통치자께서는 그와 함께 있었습니다. 세상은 연로한 하나님의 사역자의 입을 막으려고, 그의 신실한 증거를 침묵시키려고 파도소리, 갈매기 소리만 가득한 섬으로 귀양을 보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 밧모라 하는 섬에서 오고 오는 세대의 교회를 향한 격려와 위로의 말씀을 받아서 기록하게 합니다. 어쩌면 마지막 남은 사도의 입만 막으면 모든 것을 침묵시키리라고 여겼는지 모르지만 세상의 시도는 항상 하나님의 웃음거리에 지나지 않습니다.

보십시오. 밧모에서 받은 계시의 말씀은 핍박아래 있던 당대의 성도들을 위로하는 말씀이 되었고 오고 오는 세대 지난 이천년 동안의 핍박을 받는 성도들의 위로의 원천이 되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여러분도 주의 말씀 때문에 미움을 받아보셨습니까? 거부와 격리를 당해 보셨습니까? 세상은 여러분을 유배할 수 있지만 하나님은 거기서도 새로운 사역을 시작하실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성경은 우리에게 항상 기뻐하라고 명합니다. 쉬지 말고 기도하고, 범사에 감사하라고 명합니다. 그것이 여러분을 향한 하나님의 뜻이기 때문입니다.

외딴 섬 밧모야말로 세상이 선택한 유배의 장소인 동시에 하나님이 택한 계시의 장소입니다. 세상의 소란함과 북적됨을 떠나서 막힌데 없이 하늘을 우러러 볼 수 있는 대양 가운데 외딴 섬은 하나님의 계시를 받기 위한 더할 나위 없이 좋은 자연환경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지금 여러분이 처한 환경은 어떻습니까? 일을 하고 싶고 돈을 벌어야 하는 처지인데도 일할 데가 없습니까? 그 처지도 새로운 각도에서 바라보면 하나님이 여러분을 위한 좋은 환경일 수 있습니다. 신앙의 성숙을 위한 이상적인 환경으로 볼 수 있는 눈이 믿음의 사람들에게는 필요합니다.

“주의 날에 내가 성령에 감동하여” 그 날은 성도들에게 유별한 의미가 있는 날입니다. 안식 후 첫날 하나님의 백성들은 모였습니다. 매주 첫날마다 모여서 부활하신 주님을 기억하면서 예배했습니다.

사도 요한은 지금 밧모 섬에서 함께 주님을 찬양하고 말씀을 선포할 회중은 없었지만 여전히 그날이 주의 날임을 기억하고 성도들과 더불어 예배하던 영광스런 주님을 묵상하고 있었을 것입니다. 어쩌면 동료 성도들과의 교제를 무척이나 그리워하면서 예수의 환난과 나라와 참음을 묵상하고 있었을 것입니다.

“나 요한은 너희 형제요 예수의 환난과 나라와 참음에 동참하는 자라” 자기가 누구인지 밝히는 것은 지금 자기가 보고 들은 이 계시의 말씀을 성도들로 하여금 믿도록 하는데 있어 필요한 일입니다. 그가 듣고 보고 기록한 환상을 전달받은 성도들이 신뢰하기 위해서는 자신을 밝혀야 할 필요가 있습니다.

그는 자신을 “너희 형제”라고 소개하고 있습니다. 사도로서가 아니라 형제로서 자신을 소개합니다. 사도로서, 사역자로서 설교를 할 수 있는 처지도 심방을 할 수 있는 처지도 지금은 아닙니다. 다만 하나의 예배자요 동료 성도들과의 교제를 갈망하는 신자이기에 “너희 형제”라고 자신을 소개합니다. 

사도 요한의 위대성은 여기에서 나타납니다. 그 의식 속에 자기는 성도들 가운데 하나라는 생각을 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직함으로 권위를 내세우는 것이 아니라 모든 환난과 나라와 참음에 동참하는 사실로서 동료 성도들의 신임을 얻는 자입니다.

모든 사역자들이 이 사실을 잊지 말아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어제밤에 우리가 중직자 수련회를 했지만 중직자가 되고 나면 평신도들과 서리집사들과 자리를 같이하지 않는다고 생각한다면 별 볼일 없는 중직자들입니다. 그래도 중직자라고 울산교회 담임목사가 발인예배를 드려줄 수는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 울산교회가 필요로 하는 중직자는 살아서 성도들을 섬길 수 있는 자이여야 합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나는 보통 성도들과는 함께 앉으면 안 된다고 생각하는 그런 의식은 배제되어야 합니다.

저는 저와 같이 동역하는 모든 교역자들에게도 부탁하고 싶습니다. “평신도가 목사한테..” 이런 식으로 반응하는 것은 저는 허용하지 않겠습니다. 울산 교회 말고도 그런 목회자들은 많이 있습니다. 우리 모두가 하늘에 계신 그분을 아버지라고 부르기 때문에 우리는 서로 간에 형제, 자매입니다. 전문적인 신학을 했으면 왜 그렇게 해야 되는지를 설명해야 되지 직함을 가지고 윽박지르는 것은 아주 나쁜 목회자들의 전형입니다. 사랑과 존경과 신뢰를 받기 위해서 모든 성도들이 앞장서서 봉사하고 섬기고 헌신하는데서 나가야 합니다.

사도 바울 역시 이 점에서는 사도 요한과 입장을 같이 합니다. 그는 자신이 사도됨을 다음과 같은 말로서 입증합니다. “내가 아무 것도 아니나 지극히 큰 사도들 보다 조금도 부족하지 아니하니라 사도의 표된 것은 내가 너희 가운데서 모든 참음과 표적과 기사와 능력을 행한 것이라.” (고후 12:11b-12) 사도 바울은 사도된 첫 번 표적으로 ‘모든 참음’을 들이대고 있습니다.

본문의 사도 요한은 이 사실을 좀 더 자세히 말합니다. “나 요한은 너희 형제요 예수의 환난과 나라와 참음에 동참하는 자라” 고난에 동참하는 교제는 초대교회 성도들이 보편적으로 처한 현실이었습니다.

당시 교회는 환난 가운데 처해 있었습니다. 핍박 가운데서 살아갔습니다. 계시록은 그래서 교회를 가리켜서 “핍박받는 존재”로서 그리고 있습니다. 내일 그리스도의 영광에 동참하기 위해서 오늘 환란에 동참하는 것은 불가피한 일입니다.

그러므로 “참음”은 모든 “환난”을 당한 자로 하여금 그 “나라”에 합당한 자로 만들어줍니다. 예수님이 주시는 능력으로 모든 환난을 능히 이겨낼 때 비로소 우리는 그 나라에 합당한 자로 빚어지게 됩니다. 모든 환난과 나라와 참음에 동참하는 것은 예수 믿는 우리들이 누리는 특권이요 목표입니다.

그리스도께 대한 신실한 증거 때문에 당하는 환난인 동시에 그리스도와 교제하므로 견디어 낼 수 있는 환난입니다. 환난 가운데서도 무너져 내리지 않고 그 나라가 즉시 임하지 않는다고 초조해하지 않는 힘은 예수 그리스도의 참음에 동참하기 때문입니다.

요한은 이렇게 자신을 고난 중에 있는 성도와 동일시하면서 그 날 영광 중에서 주님을 뵈온 사실을 증언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아는 대로 사도 요한은 오순절의 성령 강림의 현장에 있었던 자입니다. 변화산의 주님의 영광을 뵈올 때에 거기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 어느 주일 밧모섬에서 체험한 주님의 영광은 특별했습니다.

“주의 날에 내가 성령에 감동하여 내 뒤에서 나는 나팔소리 같은 큰 음성을 들으니 가로되 너 보는 것을 책에 써서 에베소 서머나 버가모 두아디라 사데 빌라델비아 라오디게아 일곱 교회에 보내라 하시기로”

주님이 부활하신 주일 성도들로부터 격리당해서 주일이니까 예배하기 위해서 홀로 무릎을 꿇었을 것입니다. 그리고 소아시아에 있는 일곱교회들의 형편을 생각하면서 그 교회들을 위해서 기도하고 있었을 수 있습니다. 그런 가운데서 다른 세계로 옮겨져 갔습니다. 보았습니다마는 육신의 눈으로 본 것이 아닙니다. 들었습니다마는 육신의 귀로 들은 것이 아닙니다.

시공간을 벗어나서 영계에서 직접 주님과 접촉을 하고 있습니다. 나팔 소리같이 크고 분명한 음성을 듣고서 누가 말하는지 뒤로 돌아보기 위해 몸을 돌렸습니다. 그 순간 영광 가운데 계신 구주께서 일곱 금촛대 사이에 다니시는 모습을 뵙게 됩니다.

요한이 본 주님의 모습은 어떠했습니까? 요한은 주님을 누구보다 더 가까이 했던 제자입니다. 열두제자가 주님과 다 함께 삼년을 보냈지만 요한은 제자들 가운데서도 가장 주님과 가까이 늘 지냈습니다. 마지막 만찬 석상에서도 누가 주님을 판다고 했을 때 베드로가 사인을 보내서 요한보고 누군지 알아보라고 이야기를 하고 있습니다. 왜요? 그것은 요한이 떡 먹던 자리에서 예수님의 바로 앞에, 그것도 예수님의 품에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그 어떤 제자보다도 예수님이 누구신지 잘 아는 제자임이 틀림이 없습니다. 그러나 그날 환상중에 뵌 주님의 모습은 너무나도 영광스러웠습니다. “그 얼굴은 해가 힘 있게 비취는 것 같았다”고 회상합니다.

맨 먼저 일곱 금촛대를 보고 그 촛대 사이에 서신 인자 같은 이를 보게 됩니다. 자기가 잘 아는 주님이 틀림없는데도 불구하고 지금까지 알아왔던 주님과는 또 다른 모습의 주님이셨습니다. 그래서 “인자 같은”이라는 칭호를 쓰고 있습니다. 주님은 삼년동안 세상에 계실때에 자신을 가리켜서 말할때는 언제나 “인자”라고 칭하기를 좋아했습니다. “사람의 아들”그런 뜻입니다. 당신이 인간의 몸을 입고 온 사람의 아들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러기에 하늘의 영광을 벗어 두고 사람 눈에는 별 볼품없는 인생의 모습으로 오시기에 자기 자신을 “인자”라고 소개하셨습니다. 그런데 요한은 그가 “인자 같은 분”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이 표현은 아마 다니엘 7장 13,14절에서 유래한 듯합니다. “내가 또 밤 이상 중에 보았는데 인자 같은 이가 하늘 구름을 타고 와서 옛적부터 항상 계신 자에게 나아와 그 앞에 인도되매 그에게 권세와 영광과 나라를 주고 모든 백성과 나라들과 각 방언하는 자로 그를 섬기게 하였으니 그 권세는 영원한 권세라 옮기지 아니할 것이요 그 나라는 폐하지 아니할 것이니라”

“인자 같은 이”라는 표현을 쓸 때는 그 분이 인자이지만 세상에 오셨을 때와 다른 무언가가 그분에게 풍기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세상에 왔을 때는 사람의 모습으로 고난의 종으로서 오셨습니다. 그러나 지금은 그가 왕권을 받으신 영광스러운 주님으로 자신을 나타내 보이고 있습니다.

우리 보기에 아무 흠모할만한 아름다움이 없는 초라한 구주가 더 이상 아니시고 이제는 영광 중에 존귀하신 주님의 모습으로서 나타나셨기에 “인자 같으신 분”라고 표현하고 있습니다.

세상에 계셨던 인자의 모습이 이제는 영광 가운데 나타나셨습니다. 더 이상 고난의 종 메시야의 모습이 아니라 이제는 심판의 주 영광스런 주님으로 나타나셨습니다. 사람 가운데 낮아지신 주님의 모습이 아니라 천사들 가운데 높아지신 주님의 모습으로 나타나셨습니다.

다니엘 예언이 증거 하는 대로 이 영광과 주권을 강조하기 위해서 “인자 같은 이”라고 표현합니다. 고난과 죽음을 통해서 부활과 영광 중에 존귀한 자리에 - 아버지 하나님의 우편에 - 앉으셨습니다. 옛적부터 계신 이로부터 나라와 권세를 받으셨고 이제는 심판주로서의 권위와 위엄을 갖추셨습니다.

위엄과 영광의 주님

주님의 이 영광스런 위엄의 모습을 요한은 환상가운데서 본대로 자세히 서술합니다. 13절에서 16절의 말씀입니다. 이 세세한 묘사는 모두 금촛대 사이에 서신 인자 같은 이의 권능과 존귀, 위엄과 영광을 서술하는 표현들입니다.

다시 한번 다니엘의 예언을 기억하십시오. “내가 보았는데 왕좌가 놓이고  옛적부터 항상 계신 이가 좌정하셨는데 그 옷은 희기가 눈 같고 그 머리털은 깨끗한 양의 털 같고 그 보좌는 불꽃이요 그 바퀴는 붙는 불이며”(단7:9)

촛대 사이에 인자 같은 이가 서셔서 아래는 끌리는 옷을 입고 가슴에는 금 띠를 띠고 그 머리와 털의 희기가 흰 양털 같고 하얀 눈 같으며 흰 양털 같고. 하얀 눈 같다는 표현은 다니엘서의 표현을 보면 그것은 하나님의 신성을 나타내는 말인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위엄과 영광의 긴 옷과 금띠를 띠신 그분의 눈은 불꽃같았다고 합니다. 전능하신 심판주께서는 인간 심령의 깊숙한 곳까지 살피시는 분이십니다.

불꽃같은 두 눈으로 모든 감취인 것을 꿰뚫어보십니다. 불꽃같은 그분 앞에 만물은 벌거벗은 것처럼 드러납니다. 여러분의 숨은 생각을 아시며 여러분의 감취인 동기를 익히 아십니다. 불꽃같은 그 눈은 인간의 모든 악한 생각과 행위를 꿰뚫어보시고 진노하시는 분이십니다.

그 전지하심 앞에서 인간의 모든 추악한 죄들은 낱낱이 드러날 것입니다. 풀무에 단련한 빛난 주석 같은 심판자의 발 앞에 짓밟힐 것입니다. 풀무에 단련한 빛난 주석 같다고 말하는 것은 심판하시는 그분의 발이 진흙으로 되어져있는 무력한 자가 아니라는 것을 보여주는 묘사입니다.

의로서 심판하실 그 위엄 앞에 어떤 인생이 가증한 변명을 할 수 있겠습니까? 그 입에서 나오는 양날선 검으로 모든 대적을 심판하십니다. 그분은 먼저 그의 교회를 당신의 말씀으로 깨끗게 하시고 이어서 온 세상을 그의 입의 검으로 정복하실 것입니다.

두려워 말라

이제 마지막으로 이 환상을 본 요한의 모습을 살펴봅시다. “내가 볼 때에 그 발 앞에 엎드러져 죽은 자같이 되매 그가 오른손을 내게 얹고 가라사대 두려워 말라...”  환상 중에 인자가 나타나신 것은 요한에게 두려움을 안겨주기 위해서가 아닙니다. 그러나 거룩하신 주님이 가까이 오시면 우리 모두가 두려움을 느끼는 것은 그건 자연스러운 반응입니다. 죄인인 인생은 거룩하신 하나님 앞에 서게 되면 무엇보다 먼저 두려움을 느끼게 되는 것은 정상적인 반응입니다.

밧모섬에 유배되어 성도의 교제를 박탈당한 그를 위로하고 그를 통해 핍박 아래 있는 교회들을 위로하기 위해서 지금 주님이 나타나셨습니다. 그러나 그 위엄 앞에 죽은 자같이 엎드러져 있을 때 손을 내밀어서 말씀하시며 그분이 바로 자신이 사모하던 주님인 것을 알아보았지만 감히 가까이 할 수 없는 위엄과 영광 때문에 엎드러진 것입니다. 한때는 주님의 품에서 남 다른 교제의 특권을 누렸지만 지금 자기 앞에 나타난 주님은 두려운 주님이었던 것을 기억합니다.

도무지 그 영광 앞에 자신을 추스르지 못하는 요한에게 오른손을 얹는 모습을 보고 있습니다. 자기의 모습을 찍은 비디오처럼 보고 있다는 말씀입니다.

처음 영광 중에 찾아오셨던 그때를 요한은 아직도 기억합니다. 엄청난 고기를 잡았던 베드로가 자기에게 손짓해서 그 고기를 나누어 싣자고 했던 그 날 그 엄청난 고기 앞에서 그는 놀랐던 것을 아직 기억하고 있습니다. 때로는 베드로와 야고보와 더불어서 변화산상에서 주님의 모습을 뵙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지금 주님의 모습은 정말 영광스런 위엄의 모습이었기 때문에 죽은 자같이 엎드러졌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그러한 요한을 향해서 손을 얹으면서 “두려워하지 말아라”고 주님은 말씀하십니다. 우리 주님은 우리에게 찾아오심은 우리를 심판하시려 하심이 아니라 우리를 구원하시려, 도와주시려 하심입니다.

지금 여기서 뿐 아니라 장차 영광 중에 주께서 오시는 순간에도 “두려워 말라”는 주님의 위로가 우리에게는 필요합니다. 생사 간에 유일한 위로는 예수 그리스도 그분에게 있습니다.

산 자요 전에 죽었던 그분의 사역만이 죄인인 우리의 위로의 원천입니다. 이제 살아있어 사망과 음부의 권세를 가지신 그분의 위로가 죄인인 우리의 삶에는 언제나 필요합니다.

인간이 가진 모든 두려움의 원천은 죽음에 대한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 그분은 죽음을 이기는 권세와 권능을 가지고 있습니다. 우리 죄를 위해서 죽으셨고 우리 구원을 위해 살아났습니다.

내가 전에 죽었지마는 이제 영원토록 살아있지 않느냐? 죽도록 충성하라 - 그리하면 너희에게도 생명의 면류관을 - 충만한 생명을 - 네게 주리라.

써서 보내라

그러면서 요한에게 그 사명이 무엇인지를 들려주고 있습니다. 예배의 시간 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말씀하시는 것은 예배의 시간이 끝나면 돌아가도록 하기 위함이 아닙니다. 평안히 집에 가도록 하기 위해서 설교의 말씀이 선포되는 것은 아닙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우리로 하여금 여기 세상에서 어떻게 살아야 할 것인지를 말씀합니다.

공동체를 세우는 40일 캠페인이 지금 다가와 있습니다. 우리는 왜 이 세상에 존재하는가 하는 질문은 우리가 언제나 물어야 할 질문입니다. “왜 우리는 세상에 살아야만 하는가” 하는 문제를 물어야만 합니다.

예배의 시간에는 한 주간 더 생명을 주신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어떤 소원을 가지고 있는지, 어떤 사명을 주시는지 듣기 위해서 우리가 나아 온 것입니다. 참석 했다가 그냥 집에 가기 위한 것이 아니라 한 주간 생명을 연장해 주시는 주님 앞에서 어떻게 살아야 할 것인지를 사명을 받기 위해서 우리가 말씀 앞에 나아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네 본 것과 이제 있는 일과 장차 될 일을 기록하라. 네 본 것은 내 오른 손의 일곱별의 비밀과 일곱 금촛대라 일곱별은 일곱 교회의 사자요. 일곱 촛대는 일곱 교회니라” 

“기록하라”는 요한의 사명은 11절에 이미 나온 것이지만 다시금 여기서 반복하여 강조합니다. “너 보는 것을 써서. . . 보내라.”오늘 예배하는 우리 성도들을 향해서 들은 말씀대로 살기 위해서 세상으로 나아가라고 주님은 말씀하십니다. 서교회 파송예배의 자리에 나아오는 성도들을 향해서는 주께서 말씀 하십니다. “가서 그리스도의 사랑을 증거하라”고 말합니다. 우리가 나누는 사랑이 우리가 만드는 세상을 결정하기 때문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주님의 영광 앞에 나아온 자는 주님의 음성을 듣는 자입니다. 누가 우리를 위하여 가며 누가 우리 대신에 세상에 나갈 것인지를 탄식 할 때 이사야는 말합니다. “주여 내가 여기 있습니다. 나를 보내소서”라고 말합니다.

사랑하는 성도여러분, 저는 여러분 중의 어떤 사람이 보기가 싫어서 서교회 재개척을 위해서 나가라고 말하지는 않습니다. 여러분의 상급이 크게 하기 위해서, 여러분이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자 되게 하기 위해서 입니다.

큰 교회에 숨어있으면 안전합니다.  이천수백명이 참석하는 교회에 있으면 아무도 여러분에게 귀찮은 일을 시키지 않아도 될 것입니다. 그러나 구름이 적어지면 여러분의 모습이 드러나기 시작할 것입니다. 여러분이 비춰야 할 영역이 있게 마련입니다. 제3울산교회에 파송된 성도들을 보고 있던 장로님이 그렇게 말씀하시는 것을 들었습니다. “전에 울산교회에 있을 때는 어디에 있는지 잘 보이지도 않던 분들이 거기 가서는 한 몫 잘 감당하고 있더라”고. 성장하기 위해서 성도다운 역할을 감당하기 위해서 우리는 사역의 장이 반드시 필요합니다.

성령에 감동한 요한의 사명은 써서 전달하는 것입니다. 주일마다 예배를 드리는 우리의 사명은 들은 말씀을 나아가서 증거 하는 것입니다. “네 본 것과 이제 있는 일과 장차 될 일을 기록하라 너 보는 것을 써서 에베소 서머나 버가모 두아디라 사데 빌라델비아 라오디게아 일곱 교회에 보내라”

요한은 섬에서 써서 보내는 것 외에는 설교할 기회도 없고 심방할 성도도 없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한 주일 설교한 것보다도 훨씬 더 큰 영향을 이천년 하나님의 교회를 위해서 수종들 수 있었습니다. 한번의 순종은 이천년의 시간 속에서 성도들을 복되게 합니다. 서동 서교회, 거기는 그럴듯한 곳이 아니라는 것은 저도 알고 있습니다. 2002년 광역시 울산에 대한 교회 개척을 위한 기초자료 조사를 했습니다. 그래서 어디가 더 적합한 곳인지 우리는 검토해보았습니다. 서동은 아닙니다. 그러나 때로는 밧모섬 같은 척박한 곳도 하나님의 역사의 현장이 될 수 있다는 것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그 본 것을 기록하여 증거 하는 사명, 그날 요한의 사명입니다. 오늘 예배를 드리는 여러분의 사명은 무엇일까요? 누군가가 저 일을 하겠지 하고 여러분은 생각하십니까? 지난 수요일까지 이름을 밝히라고 했으니까 이제는 더 이상 부담 가질 일 없다고 생각하십니까? 아직도 기회는 있습니다.

오늘 본문에는 일곱 금촛대를 말하고 있습니다. 여러분이 보았던 일곱 촛대 가지고 양쪽으로 세 개 나고 가운데 있는 일곱 금촛대 그림을 보았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여기서 말하는 일곱 금촛대는 일곱 개의 독립된 금촛대를 말하고 있습니다.

여러분 교회는 일곱 금촛대와 같습니다. 그 하나 하나가 하나님의 영광을 나타낼 등불이 되어야만 합니다. 교회의 위대성은 건물의 크기나 모이는 회중의 숫자로 결정되지 않습니다. 몇 명이 모여서 예배를 드리던 주님의 말씀에 순종하고 주님을 사랑하는 마음으로 살아가면 주님의 영광을 드러낼 수가 있습니다. 구약 이스라엘은 가시적인 공동체였습니다. 그러나 신약교회는 그 하나하나가 독립적으로 어디에 있든지 주님의 교회입니다.

눈에 보이는 연결은 거기 드러나지 않습니다. 그러나 일곱 교회, 일곱 촛대를 붙들고 계시는 손은 주님의 손입니다. 각 교회는 그 분의 오른손에 붙들린 사역자들을 통해서 그 역사를 감당합니다. 그 때 교회는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교회의 모습을 나타내 보일 수 있습니다. 교회에 관해서 주님이 가지신 비전을 공유하게 될 것입니다. 교회는 사람들의 숨는 곳으로 존재해서는 안 됩니다. 교회는 세상 가운데서 타오르는 횃불처럼 주의 영광을 드러내야 합니다.

그 일을 더 잘 감당하기 위해서는 많은 사람이 모인 교회가 아니라 오히려 백 명 미만의 숫자로 모이는 교회가 훨씬 더 열심히 교회 일들을 감당할 수가 있습니다.

세상에서의 여러분의 임무는 타오르는데 있습니다. 세상에서의 여러분의 임무는 빛을 비추이는데 있습니다. 이 기능을 다하지 못할 때 존재 이유가 사라지는 것입니다. “왜 우리는 이 세상에 존재하는가?” 일곱 금촛대 사이에 주님이 찾아오심은 교회를 정결케 하사 그 영향을 세상에 미치도록 하기 위해서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여러분의 사역자들이 주님의 오른손에 붙잡힌 일꾼이 되도록 기도하십시오. 그들을 통해 선포되는 말씀으로 날마다 정결케 되어 세상에 그리스도의 영광을 밝히 드러내도록 간구하십시오.

어떤 환난 가운데서도 그 나라에 합당한 자로 견딜 수 있도록 우리를 붙드시는 손은 전능하신 주님의 손이십니다. 그 영광스런 주님의 나라와 하나님의 말씀에 끝까지 신실한 자들, 주님의 비전을 공유하기 위해 거룩한 결단을 내리는 자들이 다 되기를 바랍니다. 아멘. (정근두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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