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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죽었다가 살아나신 이가 가라사대 (계 2:8-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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엊그제 심방을 하면서 아파트 화단에 눈에 보일 듯 말뜻 피어있는 작은 보라 빛 꽃을 보았습니다. 얼마나 아름다운지 잠시 드려다 보다가 발길을 돌렸습니다.
장미꽃만 아름다운 것이 아니라 이름 없는 들꽃들도 참 아름답습니다.
화려한 것에 도취되어 쉽게 지나쳐 버리거나 무시되어 버릴 수 있는 작은 것들의 아름다움을 우리는 기억해야 할 것입니다.

지금도 제 기억에 잊혀지지 않는 길이 있습니다.
어린 시절 제가 살던 고향길입니다. 원주 시내 한복판이 되어 버렸지만 제가 살던 집은 참 아름다운 길 옆에 있었습니다. 4월이 되면 노란 개나리가 내리워져 온통 노란 물결을 이루는 기독병원 옆길 미 선교부가 있었던 작은 동산 울타리였습니다.
개나리는 혼자 피어있으면 참 볼품이 없습니다. 그런데 함께 무리지어 피어있으면 환상적인 아름다움을 표현해 냅니다.
혼자서는 보잘 것 없어도 함께하면 아름다운 것들이 세상에는 참 많이 있습니다.

지난 한 주간 동안 장동주감독님을 통해 귀한 말씀의 은혜를 받았습니다. 그분에게서 풍겨나오는 깊은 영성을 느끼면서 그것은 하루 아침에 만들어진 것이 아님을 깨달을 수 있었습니다.
깊은 영성의 사람이 되고 싶습니다. 작은 물방울 하나에서도 하나님의 숨결을 느끼고 스치는 바람소리에서도 하나님의 음성을 들을 수 있는 영성의 사람으로 살고 싶습니다.
그저 막 바쁘게만 살아가면서 보아야 할 것 보지 못하고, 들어야 할 음성 듣지 못하고, 느껴야 할 아름다운 것들을 느끼지 못하고 지나쳐버리는 것들이 너무 안타깝고 이제는 그것들을 느끼며 살기를 원합니다.
그러나 이와 같은 영성은 깊은 말씀의 묵상과 기도에서 나오는 것을 간과해서는 안 될 것입니다. 그래서 제 스스로에게 다시금 다짐합니다. 말씀과 기도로 영성의 삶을 살리라.

오늘은 칭찬만 받은 서머나 교회에 대하여 말씀을 나누며 은혜를 받고자 합니다.
서머나 교회에 말씀하시는 분은 처음과 나중이시며 죽었다가 다시 살아나신 분이십니다.
그분은 바로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예수그리스도는 하나님과 동등됨을 취하지 아니하시고 자기를 비어 종의 형체를 가지시고 이 땅에 오신 하나님이십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창조 때부터 하나님과 같이 계셨으며 온 땅의 섭리자요 주관자이신 분이십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십자가에서 죽으셨다가 다시 살아나신 부활의 주님이십니다. 

하나님이신 예수께서 왜 사람이 되시어 십자가에 죽으셨을까요?
모든 사람을 죄와 사망에서 구원하시기 위해서 대신 죽으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누구든지 예수를 주라 시인하면 그는 구원을 받고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죽으심은 가장 위대한 하나님의 사랑을 보여주신 것입니다. 하나님이 친히 하시는 내가 너를 사랑한단다. 라는 말씀이 말로만이 아니라 진실한 것임을 보여주신 것입니다.
예수께서 십자가에 달려 물 한 방울 피한방울 남김없이 다 쏟으시고 죽으심으로 우리가 구원을 받을 수 있는 길이 되셨고 진리와 생명이 되셨습니다.
예수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죽으심이 없다면 우리에게 죄 사함의 은총도 구원도 없습니다.

그렇게 죽으셨던 예수님은 죽은지 사흘 만에 다시 살아나셨습니다. 무덤 문을 여시고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 부활의 첫 열매가 되셨습니다. 제자들은 예수님의 죽음 앞에 모두가 절망하고 두려워하였습니다. 그때 부활하신 주님은 그들을 찾아와 위로하시고 평안을 빌어주셨습니다.

사람들에게 가장 큰 절망이 무엇입니까?  죽음입니다. 죽음보다 더 큰 절망은 없습니다.
죽음의 두려움에 있는 이들에게 가장 큰 소망은 무엇일까요? 사는 것입니다. 죽음을 이기고 다시 살 수 있다는 것, 그보다 더 큰 가장 확실한 위로와 소망이 어디있겠습니까? 다시 살아 생명을 누릴 수 있다는 것은 큰 위로와 소망이 될 수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가장 큰 위로와 소망을 주시는 분이십니다. 왜냐하면 그분은 죽음을 이기시고 다시 살아나셨기 때문입니다. 죽었다가 다시 살아나신 그분을 만나다면 두려워할 것이 없습니다. 우리도 그분처럼 살수 있기 때문입니다.

서머나 교회에 찾아오신 주님은 죽음의 두려움속에 있는 그들에게 큰 위로와 소망이 되었습니다. 온 땅을 다스리시는 처음과 나중이신 분으로 인해 그들은 새 힘을 얻을 수 있었습니다.

서머나 교회는 많은 환란과 핍박이 있었습니다. 당시 서머나 지역은 교통이 좋아 상업중심지로 잘 사는 지역이었습니다. 인구도 많았습니다. 현재도 이즈밀이라는 도시로 형성되어 있으며 터키의 3대 도시(이스탄불, 앙카라, 이즈밀) 중에 꼽히는 지역입니다.
그런데 그곳에 많은 환란과 핍박이 있었기 때문에 기독교인들은 도시에서 쫓겨나 은신처를 마련하고 살아야 만 했습니다. 그들에게는 항상 죽음의 위협이 따라다녔습니다.

성지 순례객들은 지금도 그들이 숨어 살았던 동굴들을 볼 수 있습니다. 산기슭에 토굴을 파서 숨어 살아야 만 했습니다. 그러니 그들의 생활이라는 것은 말이 아니었습니다. 정상적인 생활은 불가능 했습니다. 환란과 핍박은 그들의 생활을 궁핍하게 했습니다.

그러니 죽었다가 다시 살아나신 이의 말씀은 그들에게 정말 큰 위로였고 소망이 될 수 있었던 것입니다. 죽음의 위기에 있는 저들에게 영원한 생명을 믿을 수 있게 해주셨기 때문입니다. 그들에게 죽음을 이긴다는 것은 큰 위로였습니다.

환란과 고통의 문제를 가지고 힘들어 하는 사람들에게 위로를 주는 사람들을 보면 지난날 자신도 큰 고통과 환란을 경험했으나 그것을 극복하고 보람있게 삶을 사는 사람들입니다. 그들의 말은 큰 위로가 되고 힘이 되는 것을 봅니다.
고통을 당해보지 않은 사람은 모릅니다. 그러나 고통을 당해 본 사람은 그 심정을 알고 그에게 자신을 보여줌으로 충분히 위로가 될 수 있는 것입니다.

고난과 어려움이 있습니까? 죽음의 위기를 맞아 두려워하십니까?
이 시간 죽었다가 살아나신 예수께서 여러분들을 만나주시고 위로해 주시기를 축원합니다.

여러분이 당하는 고통이 십자가의 고통만큼이나 되겠습니까? 여러분이 두려워하는 죽음이 십자가에서 서서히 죽어가야만 했던 죽음보다 더 두려운 것이겠습니까?

예수님은 그 모든 것을 경험하시고 알고 계십니다. 그분이 지금 여러분을 부르시고 계십니다. “무거운 짐을 진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 내가 너를 결코 버리지 아니하리라 떠나지도 아니하리라 두려워말라 놀라지 말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러니 그 주님으로 인해 위로받으시기 바랍니다. 절망을 이기고 소망을 가지시기 바랍니다. 십자가를 지신 주님의 손길이 여러분을 만져주시고 힘을 얻게 하시기를 축원합니다.

서머나 교회를 향하여 주님은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내가 네 환란과 궁핍을 아노니 실상은 네가 부요한자니라.”

서머나 교회 성도들의 생활은 찢어지게 가난한 생활이었습니다. 핍박과 환란을 피해 동굴을 파고 지내야 하는 그들에게 화려하거나 부요한 생활은 상상할 수 도 없는 것이었습니다.
서머나 교회 성도들이 예수를 믿는 것은 모든 경제적인 활동을 제안당할 수 밖에 없는 일이었습니다. 유대인들은 그리스도인들을 받아드리지 않았기에 그들은 제대로 된 일자리를 구할 수도 없었습니다. 그러니 그 생활이라는 것은 뻔합니다. 근근히 입에 풀칠이나하면 다행스러운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주님은 실상은 부요한 자니라고 칭찬하고 계신 것입니다.

어느 마을에 아주 구두쇠 영감이 살고 있었습니다. 그가 가진 땅은 사방 100리안에 들어오는 것이었습니다. 그 부자는 악착같이 돈을 벌었습니다. 돈이 되는 일은 무엇이든지 다 했습니다. 그는 돈을 아끼기 위해서 자식들에게 잘 입히지도 먹이지도 교육을 시키지도 않았습니다. 자신은 그저 한 벌 옷으로 족했습니다. 반찬을 3가지를 넘지 못하게 했습니다. 그는 아주 인색했습니다. 사람들은 그를 구두쇠 영감이라고 불렀습니다. 그는 부자일까요?

감독님 말씀 중에 많이 가진 것이 부자가 아니고 가진 것을 제가 잘 쓰는 사람이 진짜 부자라는 말씀이 생각납니다. 좋은 일에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일에 사람 대접하고 나누는 일에 많이 쓰는 사람이 진정 부자입니다. 이 땅에 쌓아 둔 제물은 좀 과 동록이 해하고 구멍을 뚫습니다. 쓰지 않은 재물은 제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내게 주신 제물을 자기가 사용해야 진정 부자로 사는 것입니다.

여러분, 물질의 축복을 받아 부자가 되시기를 바랍니다. 그리고 그 부요함를 사용하여 진짜 부자로 사시기를 바랍니다. 쌓아놓고 사는 어리석은 부자가 아니라 하나님이 주신 축복을 잘 사용하는 부자가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서머나 교회에 있었던 부요함은 무엇일까요?
주님은 무엇을 보고 그들에게 실상은 네가 진짜 부자라고 말씀하신 것일까요?
믿음의 부요입니다. 마음의 부요입니다. 행위의 부요입니다.

여러분 가운데는 "여자의 일생"을 쓴 프랑스 작가 모파상(1850-1893)이라는 이름을 기억하실 분들이 많이 계실 것입니다. 그는 본래 신학교에 들어갔다가 퇴학당한 청년이었습니다. 그는 신앙과 결별하기로 하고 자신이 주인이 된 인생을 살겠다고 결심합니다. 그 후 문학에 뜻을 두고 정진하여 10년만에 유명작가가 되고 돈을 많이 모으게 되었습니다. 
그는 지중해에 요트를 가지고 있었고(1800년대 말) 노르망디에 대 저택을, 파리에는 호화 아파트를 갖고 쉴 새 없이 애인을 바꾸며 살았습니다. 비평가들은 그에게 찬사를 보냈고 군중들은 그를 흠모했고 그의 은행에는 쓸 수 있는 여유로운 돈이 항상 넉넉했지만 그는 안질병과 불면증에 시달리기 시작합니다.
1892년 1월 1일 새해가 밝았지만 인생의 의미를 잃은 그는 종이칼로 자신의 목을 찔러 자살을 기도합니다. 간신히 목숨을 구했지만 정신이 파탄난 그는 정신 병동에서 몇 달을 알 수 없는 소리로 허공을 향해 절규하다가 43세를 일기로 세상을 떠납니다.
그의 무덤 묘비명에는 그가 말년에 자주 외친 삶의 독백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나는 모든 것을 소유하고자 했지만 결국 아무것도 갖지 못했다"고. 그는 부자의 꿈을 이룬 것 같았으나 실상은 가장 처절하게 가난한 인생을 살게 된 것입니다.

여러분, 지금 우리에게 믿음의 부요가 있어야 합니다. 마음이 부요하고 행위에 부요함이 있어야 합니다. 인색함으로나 억지로 하지 말지니 하나님은 즐겨 내는 자를 사랑하시느니라.
하나님 앞에 인색하지 말고 믿음의 부요함으로 풍성한 헌신의 삶을 살아야 합니다.
믿음이 부자가 되고 마음이 부자가 되어서 더욱 많은 섬김과 나눔으로 사랑하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딤전6:18-19 “선한 일을 행하고 선한 사업에 부하고 나뉘주기를 좋아하며 동정하는 자가 되게 하라 이것이 장래에 자기를 위하여 좋은 터를 쌓아 참된 생명을 취하는 것이니라.”

서머나 교회의 성도들이 가난하지만 환란과 궁핍가운데서도 실상은 부요한 자들로 살 수 있었던 이유가 있습니다. 
그들이 이렇게 살 수 있었던 것은 생명의 면류관을 바라보았기 때문입니다.
히11:6 “믿음이 없이는 기쁘시게 못하나니 하나님께 나아가는 자는 반드시 그가 계신 것과 또한 그가 자기를 찾는 자들에게 상 주시는 이심을 믿어야 할지니라.”

부활하신 주님은 서머나 교회에게 두자지 권면의 말씀을 하십니다.
첫째는 장차 받을 고난을 두려워말라는 것입니다.
둘째는 네가 죽도록 충성하라는 것입니다.

고난을 두려워하지 않을 수 있는 것, 죽도록 충성할 수 있는 것은 생명의 면류관이 있기 때문입니다. 지금 우리에게 당장 주어지는 풍요가 아닙니다. 영원한 풍요, 사랑, 생명입니다.
약1:12 “시험을 참는 자는 복이 있도다. 이것에 옳다 인정함을 받은 후에 주께서 자기를 사랑하는 자들에게 약속하신 생명의 면류관을 얻을 것임이니라.”
서머나 교회를 향해 책망할 것은 없었지만 여전히 권면은 필요했습니다. 다가오는 얼마동안의 고난(10일은 길지 않은 일정한 기간을 나타냄)을 예언하시며 주어진 유명한 권면이 "죽도록 충성하라"는 것입니다.(10절)
이 예언은 적중했고 주후156년 2월 2일 사도요한의 제자로서 이 서머나 교회의 영적인 지도자가 된 폴리캅이 순교하는 사건이 일어났습니다. 당시 로마 황제의 신상을 참배하기를 거절했던 폴리캅과 성도들 11명이 유대인들의 밀고로 체포됩니다.

그러나 폴리캅의 인격과 덕망을 흠모하던 총독은 "예수를 욕하고 황제의 신상에 절하면. 당장에 풀어 주겠다"고 말합니다.
그는 이렇게 대답합니다."86년동안 내가 섬겨온 주님, 그분은 언제나 나를 인자로 대하셨습니다. 내가 어찌 그분을 모독할 수 있단 말입니까."
총독이 다시 "네 목숨이 아깝지 않은가? 너를 야수의 밥이 되게 하겠다"고 말하자
폴리캅은 조용히 "어서 맹수를 부르시오"합니다. 총독은 다시 "네가 맹수를 두려워 않으니 너를 불태우겠다"고 위협합니다. "총독이여, 잠시 있다가 꺼질 이 불보다 장차 심판을 위해 예비된 하나님의 영원한 진노의 불을 두려워하시오" 그의 육신이 불로 얼른 태워지지 않자 그는 칼에 찔리워 순교하게 됩니다.

오늘날의 서머나인 도시 이즈밀을 방문하는 분들은 어김없이 폴리캅 기념 교회를 방문하게 됩니다. 이 교회당 벽에는 유명한 화가 레이몽 페레가 그린 폴리캅 순교화가 부착되어 있습니다. 이 그림의 구석에는 손이 포승줄에 묶인 채로 폴리캅의 순교 장면을 지켜보며 자신의 순교차례를 기다리는 한 사내의 모습이 그려져 있습니다. 이것은 화가 자신의 그림이었다고 합니다.
순교는 믿음으로 살고자 하는 성도-누구에게도 경험될 수 있는 사건임을 그리고자 한 것입니다. 사실 오늘 본문에 "죽도록 충성하라"는 말은 "죽을 수 있을 정도로 충성하라"는 말입니다. 우리가 예수 믿는다고 다 순교할 필요는 없지만 순교적 신앙으로 하루 하루를 사는 것은 매우 중요한 일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부자가 되십시오. 그러나 어리석은 부자가 되지 마십시오. 어리석은 부자는 이 땅에 재물을 쌓아두지만 결국 자기는 아무것도 쓰지 못합니다.
진짜 부자가 되십시오. 후히 베풀고 나누며 가진 재물을 잘 사용하여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부자가 되십시오. 그는 하늘에 재물을 쌓는 지혜로운 사람입니다.
가난해도 어려워도 믿음의 부요자로 사시기를 바랍니다.

장차 받을 고난을 두려워하지 마십시오. 사는 날 동안 만나게 될 많은 고난과 두려움들이 있지만 하나님이 나와 함께 하심을 기억하십시오. 결코 버리지 아니하시고 떠나지 아니하시며 나를 사랑하시고 힘과 능력을 주시는 하나님이 함께하십니다.
오히려 더욱 충성하는 성도가 되십시오. 죽도록 충성하라 그리하면 내가 생명의 면류관을 네게 주리라 약속하셨습니다. 생명의 면류관을 얻기까지 충성하는 저와 여러분들이 될 수 있기를 바랍니다. 


“이기는 자는 둘째 사망의 해를 받지 아니하리라.”
이기는 자는 10절에서 언급된 생명의 면류관과 연결된 것으로 승리자에게 주어진 약속을 나타냅니다.
그리고 둘째 사망은 탈굼에서 유래한 것으로 유대인에게는 아주 친숙한 용어인데(Johnson) 이 사망은 육체적 사망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불신자가 당할 하나님과의 영원한 분리 곧 영원한 죽음을 가리키는 말입니다.
그러니까 첫째 사망은 육체적인 것이고 둘째 사망은 영적인 것으로서 신앙인들은 최후에 불신자가 당할 불못 즉 영원한 사망의 해는 결코 당하지 않습니다.

계 19:20 짐승이 잡히고 그 앞에서 이적을 행하던 거짓 선지자도 함께 잡혔으니 이는 짐승의 표를 받고 그의 우상에게 경배하던 자들을 이적으로 미혹하던 자라 이 둘이 산채로 유황불 붙는 못에 던지우고
계 20:14 사망과 음부도 불못에 던지우니 이것은 둘째 사망 곧 불못이라.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영원한 불못에 던져지는 둘째사망의 해를 받지 않아야 합니다.
영원한 생명의 면류관을 얻는 복된 성도들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이광호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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