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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하나님 안에서 즐거워하자 (롬 5:1-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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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세기에 많은 사람들에게 영향을 미쳤던 독일의 신학자 본 회퍼는 그리스도의 제자에 대하여 이렇게 정의를 하였습니다. "그리스도의 제자란 예수처럼 사는 것이다" 예수처럼 산다고 하는 말이 우리에게는 무척이나 어렵게 느껴지는 것이 사실입니다만 본 회퍼의 의도는 제자란 믿음으로 사는 것을 의미한다고 설명하고 있습니다. 믿음이라는 용어를 좀더 구체적으로 적용해 보면 그 말은 곧 말씀을 따라 사는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말씀이라고 하면 우리에게는 좀 더 구체적이고 현실적으로 다가오는 것을 느낍니다. 믿음은 들음에서 나며, 들음은 하나님의 말씀으로 말미암는다고 로마서는 선언하고 있습니다. 말씀을 들음에서 믿음이 오기 때문에 말씀을 듣는 생활을 외면하거나 소홀히 하면 믿음의 성장을 기대하기 어렵습니다. 우리가 하나님 앞에서 믿음으로 산다고 하는 것, 곧 예수처럼 산다고 하는 것은 하나님의 말씀 안에서 그 말씀을 듣는 일에서부터 시작되는 줄로 믿습니다.

초대교회가 시작된 이후, 사도들의 시대가 끝나고 교부시대가 열렸습니다. 교부시대에는 사도들의 전승을 그대로 이어오면서도 나름대로 훌륭한 인격과 믿음을 가진 교부들에 의하여 새로운 전통이 세워지게 되었습니다. 특히 교부 오리겐은 "그리스도인이 된다고 하는 것은 무엇일까"를 이야기하면서 그것은 곧 그리스도의 제자가 되는 것이라고 하였습니다.

많은 세월이 흐르고 나서 본 회퍼가 그 정신을 이어받아 다시금 그리스도의 제자가 되는 것이 무엇인가를 이야기했습니다. 그는 "그리스도의 제자란 예수의 삶을 사는 것"이라고 했습니다. 결국 우리의 신앙의 제일 기본적인 출발은 말씀에서 비롯된다는 것이요, 믿음은 그 말씀을 들음에서 나온다는 것입니다. 지금 이자리에 계신 어느 누구도 처음부터 믿음이 있어서 이 자리에 온 사람은 하나도 없습니다. 어느 누구도 믿음을 가지고 태어난 사람은 없습니다. 그러므로 궁극적으로 그리스도인이 된다고 하는 것은 그리스도인의 제자가 되는 것인데, 처음부터 믿음을 가지고 난 사람이 없는 것처럼 제자 역시 태어나는 것이 아니라 끊임없이 훈련되어지고 다듬어지는 것인 줄로 믿습니다.

마치 저 백두산의 장맥산맥을 뒤덮고 있는 수많은 소나무, 잣나무, 전나무들이 탐날 만큼 아름드리이긴 하지만 그것은 어디가지나 재목감일 뿐입니다. 그것이 삶의 자리에서 귀한 재목으로 쓰이기 위해서는 먼저 있는 자리에서 베어짐을 당해야 하고, 또한 필요로 하는 곳까지 운반되어져야 하며, 두터운 껍질이 벗겨져야 하고, 수 많은 가지들이 다듬어졌을 때 비로소 서까래도 되고 대들보도 되는 줄로 믿습니다.

우리 성도들도 보면 항상 하나님의 성전에 기둥감으로 보여지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러나 아쉬운 것은 작년에도 기둥감이었고 지금도 여전히 그저 기둥감이라는 것이지요. 무슨 말입니까? 베임을 당하지 않았다는 말입니다. 주님이 원하시는 곳으로 운반되어지지 못했다는 것입니다. 지금까지 울타리 처럼 겹겹이 쳤던 두터운 껍질이 벗겨지지 못했다는 것입니다. 더 나아가 잔 가지들도 다듬어지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중요한 것은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대로 언제든지, 어디에서나 쓰임 받을 수 있는 재목으로 다듬어졌을 때 비로소 기둥이 되는 줄로 믿습니다.

"하나님 안에서 즐거워하자" 사순절에 다소 어울리지 않을 것 같습니다만, 사순절이라고 해서 성도의 얼굴이 마냥 수심에 잠겨 있어야 하고, 발걸음도 구들도 꺼질세라 무겁게 걷는 것이 사순절 정신은 아닌줄로 생각됩니다. 좀 더 우리가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우리에게 허락하신 하나님의 은혜와 은총을 인하여 즐거워 할 수 있기를 축원합니다.

오늘 본문 1절을 보겠습니다. "우리가 믿음으로 의롭다 하심을 얻었은즉..." 로마서의 전체적인 주제가 바로 이것입니다. 우리가 믿음으로 말미암아 의롭다 하심을 얻었다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으로 더불어 화평을 누리자는 것입니다. 누린다고 하는 것은 enjoy 하자는 말인데 이 단어는 우리에게는 조금 부정적인 이미지를 가지고 있어서 그다음 2절을 연결하여 적용하면 좋겠습니다. "그로 말미암아 우리가 믿음으로 서 있는 이 은혜에 들어감을 얻었으며 하나님의 영광을 바라고 즐거워하느니라" 영어성경은 즐거워한다를 rejoice라고 했습니다.

중요한 것은 우리가 예수로 인하여 즐거워하고, 하나님의 은혜로 말미암아 또한 즐거워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놀랍게도 이 즐거워 하는 일이 십자가의 죽음과 연결되어져 있습니다. 6절을 보겠습니다. "우리가 아직 연약할 때에 그리스도께서 경건치 않은 자들을 위하여 죽으셨도다" 율법이 없어도 살만한 사람들을 위하여 그리스도께서 죽으신 것이 아니라 경건치 않은 사람을 위하여 십자가에서 죽으셨다는 말씀입니다.

8절입니다. "우리가 아직 죄인되었을 때에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심으로 하나님의 사랑을 확증하셨느니라" 요즘 말로 하면 하나님의 사랑이 공증되었다는 말입니다. 그냥 말로 하거나 문서로 한것이 아니라 공증까지 받았다는 의미이지요. 언젠가 모 대학교에 많은 돈을 기부한 분이 계셨는데 방송은 그분을 아주 큰 선행을 한 사람으로 뉴스의 촛점이 되기도 했습니다만, 그분의 자녀가 반환소송을 하여 결국 대학측이 돌려주게 되었던 해프닝이 있었습니다. 장학금으로 기부한 돈을 반환하게된 가장 큰 이유는 기증자의 친필 사인이 없었다는 것입니다.

사랑의 하나님께서 우리를 향하여 "내가 너희를 사랑한다"라고 말씀만 하신 것이 아니라, 아들을 이 땅에 보내셔서 십자가에서 당신의 사랑을 확증하셨기에 우리는 그 사랑을 확인하고 감격하는 것입니다. 경건치 않은 자들 까지 사랑하신다는 말씀이 십자가에서 모든 이들을 위하여 피 흘리심으로서 확증된줄로 믿습니다. 그러므로 우리 기독교는 추상적인 종교가 아닙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사건으로 인하여 가장 구체적으로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에게 다가온 인격적인 종교인줄로 믿습니다.

세 번째 10절입니다. "우리가 원수 되었을 때에 그 아들의 죽으심으로 말미암아..." 주님의 십자가가 또 연관이 됩니다. 우리가 경건치 못할 때에도, 우리가 육신의 정욕으로 인하여 세상 유혹을 따라 살았을 때에도, 더 나아가서 우리가 하나님과 대적하여 원수가 되었을 때에도 여전히 하나님은 우리를 위하여 십자가의 죽으심으로 사랑을 확증하신 것입니다. 할렐루야!

우리의 하나님을 향한 그 사랑의 범위가 얼마나 큰지 그래서 우리가 연약할 때에, 우리가 죄인 되었을 때에, 우리가 원수 되었을 때에 언제나 그 원수됨이 화목됨으로, 그 연약함이 강건함으로, 죄인됨이 경건한 하나님의 자녀와 의인 때문에 연결되는 것이 무엇이냐 하면 십자가의 죽으심, 그 십자가가 오늘 우리를 강건케 하고, 오늘 우리를 경건케 하고, 우리를 의롭다 하고, 주님과 화목하게 한 줄로 믿습니다.

십자가입니다. 그 십자가가 우리를 새롭게 한다고 하는 거예요. 날마다 술에 찌들어 사는 한 가장이 있었습니다. 이 사람은 술이 없으면 살 수 없어요. 옛날에 그런 말 있지요. 마누라 없이는 살아도 술 없이는 못 산다.

제가 아주 비가 많이 와서 장화가 꼭 필요한 동네에서 살 때가 있었는데, 그 때는 어른들이 농담삼아 이런 이야기를 주로 했어요. 마누라 없이는 살아도 장화 없이는 못 산다. 그리고 보니까 왜 부인들이 비교가 되는 입방아에 올라야 하는지 자존심이 상하는 이야기지요. 그만큼 강조하는 이야기이겠습니다만, 이 사람은 정말 술이 없이는 살 수 없는 사람이었어요.

가장으로서의 역할을 하지 못합니다. 당연히 수입도 없고, 집안에 있는 것을 축내는 사람입니다. 아내가 삯바느질로 생활을 꾸려갑니다. 늘 아내의 옷은 정장을 입은 적이 없고, 늘 삯바늘 하기에 편리하도록 항상 행주치마 같은 것을 두르고, 그리고 늘 일을 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남편은 술만 먹으면 또 들어와서는 아내의 행주치마 속에 그 담겨져 있는 푼돈을 빼앗아 가서 또 술을 마시곤 했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인생에 대해서 깊은 회의를 느낍니다.

산다고 한다고 하는 것이 무엇입니까? 이렇게 사는 것도 사는 건가? 깊은 고민에 빠지고, 고통 속에 빠졌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그 집을 지나가던 한 교회의 전도자가 그에게 성경 한 권을 주면서 힘들 때 읽어보세요. 그러면서 성경을 선물로 주었어요.

그 때는 별 생각없이 성경을 받았는데, 어느 날 바느질을 하다가 생각에 깊이 담겨있는 그의 눈에 얼마 전에 받은 성경책이 눈에 들어왔어요. 생각 없이 성경을 펴서 읽으면서 그는 점점 성경 속에 깊은 은혜를 느끼기 시작을 했습니다. 이제는 틈만 나면 성경을 보기 시작을 했습니다.

사실 우리가 성경을 읽으라고 하지만 잘 안 되지요. 속회시간에 몇 장 읽었냐고 물어볼 때마다 쥐구멍 찾고 싶은 분들 많으시죠? 그래도 내가 집산데, 내가 그래도 일주일에 10장은 읽어야 되는 건데, 거짓말 할 수는 없고, 몇 장은 읽었냐고 속장님은 물어보고 참 그래서 어떤 분들은 피해 다닐 수도 있을 거예요.

성경 참 쉽지 않아요. 한 술 더 떠서 성경을 쓰시는 필사하시는 분들이 있습니다. 눈으로 읽고, 그리고 입으로 한 번 더 읽으면서 노트에 옮겨 씁니다. 성경 옮겨 쓰는 거 쉽지 않아요. 저희 아내도 지난 1년 동안 분주한 가운데 틈틈이 30분, 혹은 10분, 저녁에 10시에 자기 전에 잠깐 일년 동안 겨우 1권, 모세 오경을 썼어요.

그것만 붙잡고서 그것만 쓴다면야 일년에 다 쓸 수 있겠지만, 분주한 생활 속에 틈틈이 시간을 내서 쓰는 것은 쉽지가 않습니다. 그러나 그 성경을 쓰시는 분들은 늘 말씀에 연결되어져 있어서 그 생각과 그 삶이 말씀과 함께 움직이는 은혜가 있는 줄로 믿습니다.

성경을 쓰는 분들이 샤론꽃예술선교회 중심으로 지금 확산되고 있는 너도 나도 성경을 쓰시는 분들이 늘어나는 아름다운 소식을 제가 듣습니다. 한 3년 쯤 되면 성경이 다 씌어질 것 같은데, 제가 그 분들에게는 아주 깜짝 놀랄 선물을 하려고 그래요.

어떤 분들은 궁금해서 물어봐요. 어떤 선물인가요? 그것은 아무도 모릅니다. 그 날과 그 시가 되어야 압니다. 하지만 안 쓴 사람들이 약이 오를 만큼 선물을 준비할 거예요. 상상을 초월하는 선물을 준비할 것입니다.

제가 원래 허풍 떠는 사람이 아니잖아요. 손해가 나도 약속한 것은 지키는 사람입니다. 제가 여러분들에게 동기부여를 해 드리는데, 그걸 써서 선물을 받겠다고 쓴다면 그 쓰는 일이 얼마나 지루하고 힘들겠어요. 그러나 그것을 수고하고 은혜 받으면 썼을 때에 생각지도 못한 선물을 받으면 이름 그대로 선물이 될 줄로 믿습니다.

성경을 점점 읽어 갑니다. 그 성경이라고 하는 것은 정말 하나님이 도와주셔야합니다. 그리고 성경읽는 것은 오늘 몇 시부터 몇 시까지 성경을 읽겠다. 그렇게 작정을 하고 성경을 읽으면 읽어지지도 않고 그렇게 시간이 우리를 놔두지도 않아요.

그래서 여러분들은 항상 성경을 여러분 차 안에도 놔 두시고, 여러분 안방에도 놓으시고, 여러분 서재에도 한 권 놓으시고, 죄송하지만 여러분 화장실에도 하나 놔 두세요. 그래서 아침에 식사 준비하고, 한 10분- 15분 끓을 동안에 잠깐도 보시고, 아침에 청소하시고 커피 한 잔 하시면서도 잠깐 보시고, 차를 타고 갈 때 남편이 운전하면 아내는 성경을 보던지, 아내가 운전하면 남편이 성경을 잠깐 보던지, 그리고 화장실에서 힘 줄 때도 성경을 좀 보시면 어때요?

무슨 이야기입니까? 성경책을 거룩하다고 어떻게 화장실을 가지고 들어가느냐? 그 정도로 제가 꽉 막힌 사람은 아닙니다. 저도 그런 면에서는 꽤 모던한 사람입니다. 중요한 것은 우리의 삶의 내용이잖아요. 정말 말씀을 가까이 하겠다고 하는 그런 열정이 있다면 우리가 못 이룰 것이 뭐가 있고, 안 될 것이 뭐가 있겠어요?

그러나 그렇지 않은 사람들은 그런 것들은 고사하고, 예배 때에도 성경을 가지고 오는 것조차 어려운 사람들도 있습니다. 한 걸음 한 걸음 나아가서 우리의 삶 속에서도 말씀이 가까이 여러분들에게 있어지기를 간절히 부탁을 드립니다.

그 여성에게 성경을 선물로 준 전도자, 그 날 앉아서 예수는 무엇이고, 교회는 무엇이고, 믿음으로 구원은 무엇이고, 그런 한 마디 하지 않았지만 그저 선물로 준 그 성경이 어느 날 그에게 다가왔어요. 성경을 피면서 어느 날 마음 속에 하나님의 말씀은 살아서 운동력이 있어서 마음의 생각과 계획과 우리의 뜻을 감찰하시나니... 히브리서 4장의 말씀처럼 그 자매의 마음을 사로잡기 시작을 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남편이 술에 취해서 뛰어 들어 옵니다. 더 술을 먹어야 하는데 돈이 모자라는 거예요. 술값을 꿔달라고 부인에게 행패를 하는데, 이제는 더 이상 돈이 없어요. 돈도 못 번다고 행패를 부리다가 보니까 부인 옆에 성경책이 보였어요.

어, 너 성경책 읽느라고 돈벌이 안 했구나? 일은 안 하고 쓸데없이 이런 책만 읽고 있으니까 어디서 돈이 생기냐? 호통 치면서 난로 조그마한 방에 추위를 피해서 피워놓은 난로에다가 성경책을 넣었습니다.

그리고 남편은 골아 떨어졌어요. 난로도 넉넉한 그 석탄을 넣지 못한 그 난로가 그 두꺼운 성경책에 2/3정도를 태우고서 꺼졌습니다. 그 다음날 일어난 남편이 웬 일인지 어제 자기가 난로 속에 성경을 쳐 넣었는데, 그 난로 속에 물끄러미 들여다 보다가 거기에 보이는 글을 읽기 시작을 했어요.

놀랍게도 성경책에 2/3가 구약이고, 1/3이 신약인데, 마태목음 24장이 눈에 띱니다. 천지는 없어지겠으나 내 말은 없어지지 아니하리라. 화로 속에 성경을 쳐 넣었는데, 마치 그 부분에서 불이 꺼졌어요.

이 남자는 이 말씀에 굉장한 충격을 받았습니다. 천지는 없어지려니와 내 말은 없어지지 아니하리라. 자기 아내가 붙잡힌 것도 그 없어지지 아니할 영원한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술에 취해서 늘 아내를 괴롭히고, 술에 찌들어서 결국 자신이 화로에 집어 넣었던 그 성경책에 마태복음 24장의 말씀에 그는 새롭게 눈을 뜨기 시작을 했어요. 그래, 영원히 없어지지 아니할 하나님의 말씀이 결국 그는 아내와 더불어서 신앙생활을 시작하게 된 줄로 믿습니다.

저는 어제 우리 친구의 개업예배를 오후에 다녀왔는데 여의도에서 오피스텔에 있다가 이제 집이 일산이라 집 가까운 굿모닝시티라는 아주 큰 대형 오피스텔에 40평을 분양을 받아서 개업예배를 드렸습니다. 정확하게 말하면 이전 개업예배가 되겠지요.

그 집은 원래 김포의 부잣집이고, 그리고 가족들이 다 신앙생활과는 거리가 먼 가정이었습니다. 당연히 돼지 잡아놓고, 고사를 지내야하는 그런 가정입니다. 그런데 그 가정의 아들이 제 친구인데, 그 친구와 중고등학교를 같이 나왔는데, 그 친구가 이제 저와 같이 생활 하면서 조금씩 영향을 받기 시작을 했어요.

그런데 그 친구의 영향도 제가 많은 영향을 주지 못해서 저 자신으로도 늘 부끄럽게 생각을 했습니다. 술을 하도 좋아하니까 소주를 4,5병 먹어도 얼굴이 빨개지지 않아요. 저는 포도주를 조금만 마셔도 얼굴이 벌개져가지고 어디 가서 술을 몰래 먹을 수가 없어요.

그래서 야, 나는 천상 나실인으로 만드셨나보다. 술은 고사하고 포도주는 마실 수도 없으니, 한편으로는 저렇게 소주를 몇 병씩 마셔도 표가 안 나는 사람은 처음에는 그런 생각도 했었어요.

주변에는 술 좋아하는 친구들이 많이 모이고, 인생을 정말 한국적인 이미지에 enjoy하는 사람들이 많이 모였어요. 다 끼리끼리 모이는 것 아닙니까? 그런데 그에게 중매가 들어와서 선을 보게 되었는데 감사하게도 믿음이 좋은 아가씨가 그의 선에 상대가 된 줄로 믿습니다.

너무 맘에 들어서 약혼식을 하게 되었어요. 70년대에 약혼식을 한다는 것, 70년대 말에 대단한 거거든요. 큰 갈비집에서 아주 부자집 약혼식처럼 했어요. 그런데 그 약혼식을 친구인 제가 주례를 했습니다. 친구인 제가 평안의교회를 개척하고 전도사로 있을 때 제게 약혼식 주례를 부탁을 했어요.

전 참 감사를 했어요. 친구가 전도사인데, 전도사인 친구의 존재를 그래도 알아주니 고마웠어요. 약혼식 주례를 제가 했습니다. 근데 결혼식 주례는 할 수 없잖아요. 그래서 약혼식을 결혼식 주례처럼 했어요. 똑같이 예식서 가지고 거기에 보면 신랑신부 서약하는 거 있잖아요. 그것도 약혼식에 다 해버렸어요. 신랑 손 들라고 하고 기쁠 때나 즐거울 때나 건강할 때나 다 했어요. 왜냐하면 저에게 결혼 주례하라는 소리는 안 할 테니까 이때가 그 때라. 하면서 다 했어요.

그 때 약혼식을 하면서 성경책에 손을 얹고 그 결혼식 서약하듯이 서약하는데 그 두 사람이 눈물로 감동을 받았어요. 함께 하는 분들도 세상에 약혼식을 이렇게 멋있게 한 적이 없었다고 다들 은혜를 받고 좋아했어요. 그러고 나서 결혼을 했습니다.

한 여성, 정말 연약한 여성입니다. 그 집안으로 보면 너무나 큰 집안이고, 한 여성의 존재는 너무나도 작아보였어요. 그런데 성경의 말씀처럼 작은 누룩 하나 가루 서말을 부풀리게 한다는 말씀처럼 겨자씨 하나가 새가 깃들만큼 자라게 한다는 것처럼 그 여성이 며느리로써 살아가면서 조금씩 조금씩 영향력을 끼치며 살아가기 시작합니다.

결국은 주변에 고모도 전도하고, 자기 자녀들도 교회생활을 하게 하고, 결국은 남편도 교회를 나가게 해서 제가 그 목사님을 모시고, 개업예배를 드리는데, 그 친구가 이제 직분이 있어야 할텐데요. 그러니까 집사가 됐어요. 그래요. 그래서 너 집사냐? 나 집사됐어. 참 기적적인 일이예요.

그 한 여성의 소리 없이 그 가정을 섬기면서 그 가정을 신앙적으로 변화시켜 나가는 어제도 예배는 드렸잖아요. 그런 집안에서 그런 큰 행사에 목사님을 모시고 예배를 드린다는 것은 상상도 할 수 없는 일이예요. 한 여성의 신앙적인 아름다운 헌신으로 온 가정을 믿음의 길로 인도한 줄로 믿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에게 있어서 중요한 것은 무엇입니까? 죽는 일입니다. 우리가 연약할 때에, 우리가 죄인 되었을 때 아니 우리가 하나님과 원수 되었을 때 해결할 수 있는 방법은 주님께서 죽으신 것입니다.

여러분, 여러분의 가정이 무엇이 문제입니까? 여러분들 공동체에 여러분이 사역하는 그 사역의 장소에 뭐가 문제입니까? 결국 알고 보면 내가 죽지 않아서 아닙니까? 내 성질이 죽지 않아서 관계가 깨지고, 내 이기심이 죽지 않아서 늘 무엇을 얻어야 성이 차는데, 그게 이루어지지 않으니까 문제가 뭐였습니까? 한꺼풀 벗겨보면 결국 문제는 내게 있는 것입니다.

주님의 십자가에 죽으심이 어느 때보다도 우리에게 가까이 다가오는 사순절입니다. 이 사순절에 주님께서 십자가에 죽으심으로 우리의 연약함을 강건케 하시고, 죄인됨을 의롭다 하셨고, 하나님과의 원수됨을 화목케 하심이 주님의 십자가에 죽으심이라는 사실, 그가 죽으심으로 이제 나도 십자가에서 죽기를 원한다고 하는 그래서 제자들이 고백합니다. 우리도 죽으러 가자.

이 사순절에 우리 모든 평안의 성도들이 십자가의 능력에 붙잡혀서 ‘주님, 이제 죽기 원합니다. 죽지 않아서 생겼던 생각들, 죽지 않아서 생겼던 그 갈등들, 죽지 않아서 생겼던 그 어려운 악순환들 주님 내가 죽음으로써 살기 원합니다.’

주님은 말씀합니다. 너희가 나를 위해서 죽고자 하면 살고... 죽는 일이 사는 일인 줄 믿습니다. 주님이 십자가에서 그 달리신 일이 끝장난 일이 아니라 부활의 소망으로 연결되어져서 모든 믿는 자들의 첫 열매가 되신 줄로 믿습니다. 죽으심은 사랑의 확증이고, 죽으심은 화목케 하심입니다.

이제 그 화목케 하심과 우리를 살리심에 대한 은혜를 이제 우리가 알았으니 이제 그 우리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 안에서 즐기자라고 하는 것입니다. 거룩한 성도의 엔조이, 우리의 정서에 맞는 단어를 쓴다면 그리스도인들의 이 땅에 살면서 리조이스하는 그런 성도의 삶, 오늘 하나님 안에서 다시 한번 십자가의 사랑을 확인하면서 즐거워 하기를 요청하시는 말씀이 여러분의 삶을 움직이는 동력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간절히 축원합니다.

기도하겠습니다.
이제 우리로 화목을 얻게 하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 안에서 또한 즐거워 하느니라. 회복케 하신 하나님, 감사합니다. 고난과 좌절과 시기와 번민 속에서 아버지 하나님 고통 받았던 우리들, 연약함과 원수됨과 죄인 됨으로 하나님과 멀리 떠났던 우리들 십자가의 죽으심으로 우리를 화목케 하셨고, 의롭다 하셨고, 강건케 하셨으니 감사를 드립니다. 이제 십자가의 그 놀라운 능력을 기억하며 즐거워 하는 성도의 삶을 살기를 원합니다. 어떤 환란 속에서도 즐거워 하게 하시고, 어떤 고난 속에서도 인내하게 하시고, 어떤 역경 속에서도 연단되게 하셔서 마침내 주님으로 소망을 삼게 하여 주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 (황요한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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