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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두려워하지 말고 내게 있으라 (삼상 22:11-23, 고전 3:4-9, 마 27: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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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이스라엘의 아합 왕 때는 열렬한 우상숭배자인 그 아내 이세벨로 인하여 여호와 신앙이 박해를 받게 되고 바알 숭배가 온 나라의 국교처럼 되었었습니다. 당시 엘리야의 말대로라면 “여호와의 선지자는 오직 나만 홀로 남았나이다”라고 할 정도였습니다. 그래서 온 나라에 3년 6개월간 무서운 흉년이 들어 심지어 사람이 자기 자녀들을 잡아먹기까지 하였습니다. 이럴 때 갈멜산상에서 바알과 앗세라 선지자 850명과 여호와의 선지자 엘리야와의 850:1의 내기가 벌어졌습니다. 그 내용은 하늘에서 불을 내려오게 하는 신이 참 신이라고 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때 엘리야가 산상에 몰려 온 백성들에게 한 말이 있습니다. “너희가 어찌하여 둘 사이에서 머뭇머뭇 하려느냐 여호와가 만일 하나님이면 그를 따를지니라”고 백성들에게 택일을 촉구했습니다. 그러나 이미 권력 앞에 기회주의자가 되어버린 백성들은 아직 경기가 진행되지도 않은 상태에서 결단을 주저할 뿐이었습니다. 

성경에는 이렇게 선택을 촉구하는 말씀들이 많이 있습니다. 여호수아가 세상을 떠나기 전 백성들을 세겜으로 불러 모으고 고별설교를 할 때 “너희 조상들이 강 저쪽에서 섬기던 신(우상)들이든지 또는 너희가 거주하는 아모리 족속의 신(우상)들이든지 너희가 섬길 자를 택하라 오직 나와 내 집은 여호와를 섬기겠노라” 했습니다. 그때 이스라엘 백성들은 “우리가 결단코 여호와를 버리고 다른 신들을 섬기지 아니하겠나이다”라고 오직 여호와 신앙을 결단하였습니다.

신앙은 “이것도 저것도”의 혼합이 아니라 “이것이냐 저것이냐?”의 양자택일의 선택사항입니다. 그리고 무엇을 선택하느냐에 따라 그 인생은 엄청나게 달라집니다.

예수께서 십자가에 못 박히시기 위하여 빌라도의 법정에 끌려가셨을 때 빌라도가 백성들에게 물었습니다. “내가 누구를 놓아주기를 원하느냐? 그리스도라 하는 예수냐 바라바 예수냐?” 당시 유대인들은 예수냐 바라바냐 라고 하는 양자택일의 중대한 선택의 기로에 놓이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불행하게도 그들은 “그리스도 예수”가 아니라 “바라바 예수”를 선택했습니다. 그 한번의 잘못된 선택이 그 후 유대인들에게 얼마나 엄청난 비극을 가져오게 되었는가는 우리가 그 후 역사를 보아 잘 알고 있습니다.

이런 일은 초대 기독교도들에게 매우 심각한 문제로 다가왔습니다. 당시에는 기독교 신앙은 국법을 범하는 일이었습니다. 수많은 그리스도인들이 체포되었습니다. 당국자들이 그리스도인들에게 물은 것은 단 한가지였습니다. “예수 퀴리오스냐 가이사 퀴리오스냐?”는 것이었습니다. 만일 “예수가 그리스도이십니다”라고 하면 그는 죽임을 당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수많은 그리스도인들이 그 신앙의 정절을 지켰습니다. 그들은 생명의 위협에도 불구하고 그리스도를 믿는 신앙을 선택했습니다. 그들이 순교자였습니다. 나중에 교회역사가들은 바로 그 “순교자들의 피가 교회의 씨앗이 되었다”고 했습니다. 목숨을 걸고 신앙을 선택한 사람들이 있었기에 오늘까지 복음이 전해져 내려왔으며 오늘 우리들이 이렇게 자유롭게 신앙생활을 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그러므로 오늘 우리는 하나님께 뿐만 아니라 우리 신앙의 선배들에게도 빚을 지고 있습니다.

2. 오늘 사무엘서 본문에서 사울왕은 베냐민 사람들에게 “너희가 누구를 선택하였느냐?”고 위협하였습니다. “어찌하여 왕인 나를 선택하지 않고 이새의 아들 다윗을 선택하였느냐”고 윽박질렀습니다.

우리는 일반적으로 편 가르기를 잘합니다. 조선조 5백년간의 당쟁의 역사란 다름 아니라 편 가르기 역사였습니다. 그것이 얼마나 심했으면 내 편이 아니면 3대 9족까지 멸할 정도로 피비린내 나는 역사로 점철되어 내려왔습니다. 이런 우리의 무서운 편 가르기 원죄는 아직도 우리 핏속에 흐르고 있습니다. 사회는 말할 것도 없거니와 교회 안에서도 네편 내편을 따집니다. 교회에 분규가 있다하면 그것은 진리나 정의를 위한 것이 아니라 네편 내편의 싸움이 되고 맙니다. 원로목사 담임목사로 편이 갈라서기도 합니다. 목사 장로 편으로 갈라서기도 합니다. 당회와 성도들이 서로 편을 가르기도 합니다. 옛날 고린도 교회가 그랬습니다. 바울은 교회 안에서 이런 일이 결코 합당하지 않다고 했습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우리는 모두는 어떤 경우에도 오직 예수님 편에 서야한다고 했습니다. 진리 편에 서야한다고 했습니다.

우리 찬송가 521장에 “어느 민족 누구게나 결단할 때 있나니 / 참과 거짓 싸울 때에 어느 편에 설건가”라고 했습니다.  과연 어느 편에 서야하겠습니까? 여러분은 항상 어느 편에 서고 있습니까? 그 자리가 하나님께 인정받을 수 있는 자리입니까? 나중에 우리 후배나 후손들이 볼 때 “우리 선배, 우리 부모들은 과연 바른 편에 서 있었노라”는 말을 들을 수 있습니까?

미국 남북 전쟁 때 이런 일화가 있습니다. 그때 북쪽 군인들도 자기들의 승리를 위해 기도했을 것입니다. 남쪽 군인들도 역시 자기들의 승리를 위하여 기도했습니다. 서로 싸우는 양쪽이 각각 자기들의 승리를 위하여 기도한다면 하나님은 누구의 기도를 들어주셔야 하겠습니까? 그때 링컨 대통령은 이런 말을 했다고 합니다. “하나님에게 우리 편이 되어 달라고 할 것이 아니라 우리가 하나님 편에 서야할 것이다.” 그렇습니다. 항상 주님 편에 서는 여러분이 되시기 바라니다. 진리 편에 서는 여러분 되시기 바랍니다. 항상 하나님 말씀이 명하는 편에 서시기 바랍니다. 바라바가 아니라 예수님을 선택하는 여러분 되시기 바랍니다.

지금은 사순절 막바지입니다. 적어도 우리가 사순절을 지키고 오늘부터 고난주간을 보내면서 다시 한번 주님 편에 서기를 결단하는 여러분이 되시기 바랍니다.

3. 제사장 아히멜렉은 다윗을 도왔습니다. 아무나 먹을 수 없는 진설병을 다윗에게 주었습니다. 그런데 복음서에 보면 예수님은 이 일을 긍정적으로 평가했습니다. 왜냐하면 당시 사울왕이 다윗 편에 서는 사람을 그냥두지 않겠다고 한 것을 알고도 다윗을 도운 것은 아히멜렉이 하나님 편에서 일을 처리했기 때문입니다. 당시 다윗은 도망가는 일이 너무 급해서 아무 무기도 가지고 나올 수가 없었습니다. 이런 다윗을 위하여 골리앗의 칼을 주었습니다. 사울 왕의 대적의 손에 무기를 들려준 것입니다. 이런 일이 어떻게 사울 왕에게 용납될 수 있었겠습니까? 그러나 아히멜렉은 전혀 이런저런 계산을 하지 않고 하나님의 사람 다윗을 도왔습니다.

지금 우리들은 예수 믿는다고 해서 어떤 박해도 받지 않습니다. 그러나 우리나라에서도 초기에는 예수 믿는 다는 것이 그렇게 호락호락한 일이 아니었습니다. 우리 교회 초대 목사님이신 이원영 목사님도 예수 믿고 나서 족보에서 제적 당하셨다고 하지 않습니까? 당시로서 이런 일을 당한다는 것은 목숨이 살아 있어서 산 것이지 완전히 매장 당하는 일이었습니다. 몰라서가 아니라 이런 위험을 다 알면서도 그분들은 과감하게 예수님을 영접하였고 예수님 편에 섰습니다. 이것이 순교적 신앙이 아니고 무엇입니까?

나중에 아히멜렉의 아들 아비아달이 다윗에게 왔을 때 다윗이 한 말이 무엇입니까? “두려워  하지 말고 내게 있으라 내 생명을 찾는 자가 네 생명도 찾는 자니 네가 나와 함께 있으면 안전하리라”고 했습니다. 오늘 우리가 주님 편에 설 때 주님은 우리를 책임져 주십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여러분은 어떤 경우에도 주님을 영접하십니까? 어떤 경우에도 주님을 시인하십니까? “너희가 사람들 앞에서 나를 아노라 시인하면 나도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 앞에서 너희를 아노라 시인 할 것이니라”고 하셨습니다.

사람들이 두려워서, 또는 이해관계 때문에 주님을 부인 한 일이 얼마나 많습니까? 일시적인 나의 편의나 이익 때문에 주님을 모른다고 한 일이 얼마나 많습니까? 그것이 우리 주님을 십자가에 못 박은 일이 아니고 무엇이겠습니까? 우리 주님을 십자가에 못 박은 무리들이 유대인들이나 로마 군인들이 아니라 바로 나 자신이었습니다. 이 사순절에 바로 주님을 부인한 이 죄를 회개하시기 바랍니다.

4. 여기 또 한 사람 에돔 사람 도엑이 있습니다. 그는 아마도 사울 왕의 경호대장이었을 것입니다. 그가 왜 놉 땅에 왔는지는 알 수 없으나 아마도 종교적인 의식을 위하여 거기 와 있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것이 그의 진실한 신앙에서 나온 것이 아니었습니다. 그는 종교마저도 출세를 위한 도구로 사용하는 사람이었습니다. 목적을 위하여 수단을 가리지 않는 사람이 바로 도엑이었습니다.

그는 아히멜렉이 다윗을 위하여 행하는 모든 것을 눈여겨보고 있었습니다. 다윗의 거짓말을 믿고 진설병을 준 것, 골리앗에게 노획한 칼을 준 것을 눈여겨보았습니다. 말하자면 한 건 단단히 올린다고 믿었기 때문이었습니다. 그에게 하나님은 전혀 관심 밖의 일이었습니다. 요새 말로하면 적당한 교인이었습니다. 종교를 순전히 자기 이익의 도구로 악용하는 사람이었습니다. 이런 사람을 정치적 기회주의자라고 합니다. 칼빈은 도엑이야말로 “최고의 악한”이라고 했습니다. 우리는 이 도엑에게서 가룟 유다의 모습을 보게 됩니다. 가룟 유다는 자기 유익을 위하여 결국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은 30에 원수들에게 넘겨주고 말았습니다. 이렇게 하여 가룟 유다는 제자였으면서도 선생을 자기 손으로 넘겨 준 장본인이 되고 말았습니다.

그런 일을 저지를 때 가룟 유다가 단 한번의 생각에 예수님을 넘겨주었다고 여겨지지 않습니다. 고민도 하고 갈등도 많았을 것입니다. 몇 번이나 주저했을 것입니다. 저울질을 많이 했을 것입니다. 결국 그는 예수님을 버렸습니다. 믿음을 버렸습니다. 양심도 버렸습니다. 결과적으로 자기 자신을 버렸습니다.

도엑도 역시 마찬가지였습니다. 도엑이라고 해서 왜 다윗에 대해 무지했겠습니까? 그러나 그는 다윗이 혹 자기 진로에 장애가 된다고 여겼을는지 모릅니다. 자기가 출세하기 위해서는 다윗을 제거해야 한다고 생각했을 것입니다. 그의 선택에서 신앙도 진리도 사랑도 없었습니다. 아니 자기 출세와 유이을 위해서라면 그런 거추장스러운 것은 헌신짝처럼 버렸습니다.

그런데 죄는 우리를 한 가지 행위로 끝내도록 내버려 두지 않습니다. “욕심이 잉태한 즉 죄를 낳는고 죄가 장성한즉 사망을 낳는다”고 했습니다. 죄는 장성합니다. 죄는 더 큰 죄를 짓도록 우리를 끌어넣습니다.

사울왕은 아히멜렉을 인하여 모든 제사장들에게 보복을 하게 됩니다. 히틀러처럼 완전히 정신이상자가 되어버렸습니다. 갈수록 큰 죄를 짓게 됩니다. 그리하여 제사장 학살이라고 하는 엄청난 죄를 짓게 됩니다. 그는 이 일을 신하들에게 명령했습니다. 그러나 정신이 온전한 사람치고 감히 칼을 들어 제사장을 학살할 사람은 없었습니다. 그러자 왕은 이 일을 도엑에게 시킵니다. 도엑은 결국 악역을 맡게 됩니다. 이것이 천벌이 아니고 무엇이겠습니까? 그는 에봇입은 제사장 85명과 수많은 놉땅 사람들을 학살했습니다. 도엑과 같은 사람이 바로 멸망의 자식들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오늘 여러분의 선 자리를 살펴보시기 바랍니다. 이 사순절의 막바지에 “그리스도라 하는 예수냐 바라바 예수냐”라는 질문 앞에서 어떻게 처신하십니까? “예수냐 가이사냐?”라는 질문 앞에 여러분은 어느 편을 택하겠습니까?

다윗도 그때 성소에 있었습니다. 아히멜렉도 역시 성소에 있었습니다. 그리고 도엑도 그때 바로 그 성소에 있었습니다. 그러나 다 각각 달랐습니다. 다윗은 하나님의 마음에 맞는 사람으로 악한 사울에게 쫓겨 도망 다니는 신세였습니다. 하나님은 마치 눈동자처럼 다윗을 지켜주십니다. 비록 악한 사람들이 다윗을 추격하기는 했지만 아무도 그 다윗을 해칠 수 없었습니다. 같이 성소에 있던 아히멜렉은 올바른 신앙과 양심으로 하나님의 사람 다윗을 도왔습니다. 그 때문에 엄청난 화를 입었지만 그는 신앙적 양심에 충실했습니다. 그는 우리 주님께 인정받았습니다. 하나님 앞에서 그의 이름은 궁창의 별처럼 빛날 것입니다. 그러나 같은 날 같은 시간 같은 장소에 있었지만 도엑은 사탄의 화신으로 악역을 도맡아 감당하게 됩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하나님 편에 서시기 바랍니다. 하나님의 도구로 쓰임 받게 되시기 바랍니다. 그리하여 하나님께서 영광 받으시고, 여러분을 통하여 그 크신 뜻을 이루시게 될 수 있기를 축원합니다.
(김오동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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