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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종려주일] 십자가의 능력 (사 53:1- 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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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 제 2차 대전 때 독일인들은 유태인을 600만 명이나 학살하였습니다. 말이 쉬워서 600만 명이지 사람을 600만 명이나 죽인다는 것은 생각처럼 쉬운 일이 아니었습니다. 가장 큰 문제 중의 하나는 저들을 죽여야만 하는 사람들의 양심이었습니다. 죄 없는 사람들을 죽이는 일에 대하여 사람은 누구나 다 양심의 가책을 받기 때문에 자연 학살의 진행이 원만하지 못하게 되기 때문입니다.

독일인들은 이와 같은 양심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하여 고도의 심리적인 전술을 사용하였습니다. 그것은 수용소에 화장실을 짓지 않는 것이었습니다. 수만 명이 수용되어 있는 수용소에 화장실을 단 하나 밖에 짓지 않는 식으로 저들은 그와 같은 문제를 해결하려 하였습니다.

수만 명이 수용되어 있는 수용소에 화장실은 하나 밖에 짓지 않았고 화장실에 가는 시간도 하루에 몇 번으로 제한하였습니다. 하루의 일과가 끝난 후 숙속에 갇히게 되면 저들은 즉시 배변의 고통에 시달려야만 했습니다. 결국 저들은 숙속에 배설을 할 수밖에 없었고 저들은 마치 돼지처럼 자신들의 배설물에 더렵혀졌습니다.

독일인들이 이와 같은 일을 통하여 노린 것은 인간의 자존심이었습니다. 배설물에 더렵혀진 사람들은 누구나 인간적인 긍지와 자존심을 상실할 수밖에 없게 되는데, 그와 같은 자존심과 긍지를 잃어버린 인간을 살해하는 것은 마치 개와 돼지를 죽이는 것과 여겨지게 되어 사람을 죽인다는 심리적인 가책이 적어지게 되기 때문이었습니다.

포로수용소에서 살아남는다는 것은 기적 중의 기적이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저들의 생존에는 기적만으로 이루어진 것이 아니었습니다. 생존하려고 하는 자는 반드시 지켜야만 하는 원칙이 있었습니다. 그 원칙을 지키는 사람들 중에 기적이 일어났습니다. 물론 그 원칙중의 하나는 빵의 원칙이었습니다. 빵 한 부스러기라도 더 먹기 위하여 필사의 노력을 해야만 했으며 생명의 에너지를 유지하기 위해 될 수 있는 한 팔 하나라도 덜 움직여야만 했습니다. 극도로 활동을 자제해야만 생존의 기적을 기다릴 수 있었습니다.

그것은 누구나 다 알 수 있는 상식적인 생존의 원칙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우리가 상상할 수 없는 생존의 원칙이 수용소 안에서 발견되었습니다. 그것은 생존하려고 하는 사람은 누구나를 막론하고 세수를 하여야만 한다는 원칙이었습니다. 세수를 거르는 사람은 그 누구도 생존할 수가 없었습니다. 다음은 오래전 어떤 책에서 읽은 내용으로 포로수용소에서 살아남은 생존자의 기록입니다.

“오후 4시가 되면 커피가 배급되었다. 말이 커피이지 악취가 나는 따뜻한 물에 불과하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추위에 에너지를 빼앗겨야만 하는, 그 때문에 생명의 위협을 받고 있는 저들에게 비록 악취가 나는 것이었지만 따뜻한 물 한 컵이란 생명을 의미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살아남으려고 하는 사람은 그 물을 다 마시면 안 된다는 것을 저들을 알게 되었다.

살아남으려고 하는 사람은 그 물을 반만 마시고 절반의 물로 세수를 하였다. 옷에 물을 적셔 먼저 이를 닦고 그 다음에 차례대로 온 몸을 닦아 나가곤 하였니다. 그러나 배설물로 더렵혀진 몸을 반 컵의 물로 닦는 다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었다. 그러므로 그와 같은 생존의 원칙을 전수받아 그와 같은 일을 하던 사람들은 누구나 다 곧 회의에 빠지게 되고 말았다. ‘도대체 이것이 무슨 의미가 있단 말인가? 이렇게 한다고 우리가 과연 깨끗해 질 수 있단 말인가? 괜히 귀한 물만 낭비하고 쓸데없이 에너지만 낭비하는 것이 아닌가? 차라리 씻는 것을 포기하고 따뜻한 물을 마저 마시는 것이 생존을 위하여 더 합리적인 것이 아닐까?’

그와 같은 생각 때문에 씻기를 포기하는 사람들이 생겨나곤 하였다. 그 때 우리는 모두 알았다. 그가 며칠 가지 못해 죽게 될 것이라는 것을. 그리고 실제로 저들은 며칠이 못가서 모두 죽었다.”

사람들은 반 컵의 물로 세수를 하는 것이 생존과 어떤 관계가 있는 것인지에 대하여 연구하였습니다. 연구 결과 그것은 인간의 자존심 때문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수용소의 사람들은 자기들을 향하여 총을 들고 서 있는 독일군을 향하여 반 컵의 물을 들고 이를 닦았습니다. 얼굴과 온 몸을 닦았습니다. 그것은 일종의 레지스탕스였습니다. 그것은 자신들에게서 인간의 존엄성을 박탈하려고 하는 독일인에 대하여 ‘우리는 인간이다. 우리는 짐승이 아니다.’라는 외침이었습니다. 함성이었습니다.

그 자존심이 생명의 힘이 되는 것이었습니다. 때문에 반 컵의 물로 세수를 한 사람만이 살아남을 수 있었던 것입니다. 기적은 씻기를 포기한 사람, 다시 말해 인간의 자존심을 포기한 사람들에게는 나타나지 않았던 것입니다.

포로수용소에서 살아남은 레빈스카라고 하는 사람의 고백을 기억합니다. 그는 그 책에서 이렇게 고백하고 있습니다.

“매일 반 컵의 물을 들고 ‘씻을 것인가?’ 아니면 ‘마저 다 마실 것인가?’를 고민하여야 했다. 그러나 나는 날마다 자신과 싸워 반 컵의 물을 들고 독일인에 대하여 무언의 함성을 지르고 있었다. 절대로 너희들의 의도대로 죽지 않겠다. 어떻게 하든지 살아남아 이 잔혹한 현실의 증인이 되겠다. 그러나 만일 살아남지 못하고 죽는다고 하여도 절대로 너희들은 의도대로 짐승으로 죽어주지는 않겠다. 끝까지 인간으로 살다가 인간답게 인간으로 죽겠다.”

그 글을 읽으면서 느꼈던 전율과 감동을 잊을 수 없습니다. 우리가 살아가는 세상은 마치 배설물로 더렵혀진 세상과 같습니다. 그와 같은 세상에서 깨끗하게 산다는 것은 불가능한 일임에 틀림이 없습니다. 그래도 나는 반 컵의 물을 가지고도 자신을 씻으려고 하였던 유태인들과 같은 정신을 가지고 살아가고 싶습니다. 그와 같은 프라이드를 가지고 살아가고 싶습니다.

저는 레빈스카의 말이 좋습니다. ‘어떻게 하든지 살아남아 이 잔혹한 현실의 증인이 되겠다. 그러나 만일 죽는다고 하여도 절대로 너희들의 뜻대로 짐승으로 죽어주지 않겠다. 끝까지 인간으로 살다가 인간답게 죽겠다.’는 그의 정신이 너무 너무 좋습니다.

저도 그렇게 살고 싶습니다. 정말 그렇게 살고 싶습니다. 인간적으로 유명한 목사가 되는 것, 경제적으로 여유 있는 부자가 되는 것 보다 중요한 것은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짐승이 되지 않는 것입니다. 끝까지 사람으로 살다가 인간답게 죽는 것입니다. 그와 같은 소원을 갖고 보니 제 문제는 레빈스카의 문제가 다르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습니다.

포로수용소의 유태인들과 레빈스카는 비록 자신들의 배설물로 더렵혀지기는 했으나 그것은 자신들의 뜻이 아니었습니다. 독일인들의 얄팍한 심리적인 전술 때문에 그렇게 된 것이었습니다. 그러므로 부끄러움 없이 당당하고 떳떳하게 독일인들 앞에 설 수 있었습니다. 떳떳하게 서서 반 컵의 물로 씻을 수 있었고 그와 같은 행위를 통하여 자신의 자존감을 세울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나의 문제는 그와 좀 다릅니다. 아니 많이 다릅니다. 근본부터 다릅니다. 나의 문제는 독일인과 같은 어떤 사람과 힘에 의해 나의 뜻과는 상관없이 더럽혀진 것이 아니라 스스로 더럽혔다는데 있습니다. 유태인과 레빈스카는 자신을 더럽힌 존재가 따로 있었습니다. 그러므로 비록 더럽혀지기는 했지만 자신을 더럽힌 존재 앞에 서는 것만으로도 당당해 질 수 있었습니다. 그런데 나에게는 그런 존재가 없다는 것이 문제입니다. 그런 존재가 타인이 아니라 바로 나 자신이라는데 문제가 있는 것입니다.

포로수용소의 유태인들과 레빈스카는 반 컵의 물을 들고 자신을 더럽힌 자들 앞에서 서서 이만 닦아도 인간다운 근사한 인간이 될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저의 더러움은, 그로 인한 자존감의 상실은, 인간됨의 상실은 그 어떤 것으로도 회복할 길이 없다는 데 저의 문제가 있는 것이고, 절망이 있는 것입니다.

죄의 오물로 더럽혀진 나 자신을 바라보면 나는 인간이 아닙니다. 나는 누구 앞에서 당당하게 설 수 없는 존재입니다. 여러분들 앞에는 물론이고, 제가 사랑하는 가족들 앞에도 당당하게 설 수 없는 존재입니다. 저는 죄의 삯이 사망이라는 말을 압니다. 상식으로 아는 것이 아니라 정말 실존적으로 압니다.

제 사랑하는 아들들은 저들이 김동호의 아들이라는 것을 부끄럽게 생각하지 않는 것 같습니다. 아니 오히려 자신들이 김동호의 아들이라는 것을 아마 자랑스럽게 생각하고 있을는지도 모릅니다. 제가 사랑하여 정신을 놓고 살다시피 하는 손녀 딸 민희도 조금만 크면 자신이 김동호의 손녀 딸이라는 것을 자랑스러워 할 겁니다. 제가 하도 설교 시간에 민희 이야기를 많이 하니까 제 설교를 듣는 사람들이 거의 다 민희를 압니다. 제가 민희를 안고 있으면 오셔서 ‘네가 그 유명한 민희냐?’며 말을 건넵니다.

제법 적지 않은 사람들이 제 아내를 부러워합니다. 제 아들들을 부러워합니다. 제 며느리를 부러워합니다. 제 손녀를 부러워합니다. 저들이 김동호의 아내요 아들이요 며느리요 손녀라는 것을 부러워합니다.

그러나 저는 압니다. 그 모든 것이 다 사실이 아니라는 것을 압니다. 허위라는 것을 압니다. 다른 사람들은 혹시 몰라도, 저는 제가 그런 인정과 존경을 받기에는 정말로 거리가 멀다는 사실을 압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런 인정과 존경을 받다보니 그와 같은 인정과 존경이 얼마나 소중하고 귀한 것인가를 알게 되었습니다. 가장 욕심내어야 할 것이 바로 그와 같은 ‘사람’이 되는 것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정말 그와 같은 사람이 되고 싶은데
저에게는 그와 같은 사람이 될 수 있는 길이 없습니다. 죄 때문입니다. 정말 죄의 삯은 사망입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저에게 그 길을 열어 주셨습니다. 아내와 자식들과 손주에게, 그리고 사랑하는 교우들과 사람들에게 인정받고 존경받을 수 있는 사람다운 사람이 될 수 있는 길을 하나님께서 열어 주셨습니다.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를 이 땅에 보내주시고, 그를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게 하심으로 그 십자가의 보혈로 말미암아 저의 그 모든 죄와 수치를 다 깨끗하게 씻어 주셨습니다. 완벽하게 씻어 주셨습니다. 그 죄와 사망의 권세에서 나를 해방시켜 주셨습니다.

<우리의 전한 것을 누가 믿었느뇨 여호와의 팔이 뉘게 나타났느뇨. 그는 주 앞에서 자라나기를 연한 순 같고 마른 땅에서 나온 줄기 같아서 고운 모양도 없고 풍채도 없은즉 우리의 보기에 흠모할 만한 아름다운 것이 없도다. 그는 멸시를 받아서 사람에게 싫어 버린바 되었으며 간고를 많이 겪었으며 질고를 아는 자라 마치 사람들에게 얼굴을 가리 우고 보지 않음을 받는 자 같아서 멸시를 당하였고 우리도 그를 귀히 여기지 아니하였도다. 그는 실로 우리의 질고를 지고 우리의 슬픔을 당하였거늘 우리는 생각하기를 그는 징벌을 받아서 하나님에게 맞으며 고난을 당한다 하였노라. 그가 찔림은 우리의 허물을 인함이요 그가 상함은 우리의 죄악을 인함이라 그가 징계를 받음으로 우리가 평화를 누리고 그가 채찍에 맞음으로 우리가 나음을 입었도다. 우리는 다 양 같아서 그릇 행하며 각기 제 길로 갔거늘 여호와께서는 우리 무리의 죄악을 그에게 담당시키셨도다. 그가 곤욕을 당하여 괴로울 때에도 그 입을 열지 아니하였음이여 마치 도수장으로 끌려가는 어린 양과 털 깎는 자 앞에 잠잠한 양같이 그 입을 열지 아니하였도다.> (사 53:1-7)

<모든 사람이 죄를 범하였으매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하더니,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구속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은혜로 값없이 의롭다 하심을 얻은 자 되었느니라.> (롬 3: 23-24)

<여호와께서 말씀하시되 오라 우리가 서로 변론하자 너희 죄가 주홍 같을지라도 눈과 같이 희어질 것이요 진홍같이 붉을지라도 양털같이 되리라.> (사 1:18)

<허물의 사함을 얻고 그 죄의 가리 움을 받은 자는 복이 있도다.> (시 32:1)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저를 믿는 자마다 멸망치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니라. 하나님이 그 아들을 세상에 보내신 것은 세상을 심판하려 하심이 아니요 저로 말미암아 세상이 구원을 받게 하려 하심이라.> (요3:16-17)

<저가 빛 가운데 계신 것같이 우리도 빛 가운데 행하면 우리가 서로 사귐이 있고 그 아들 예수의 피가 우리를 모든 죄에서 깨끗하게 하실 것이요. 만일 우리가 죄 없다 하면 스스로 속이고 또 진리가 우리 속에 있지 아니할 것이요, 만일 우리가 우리 죄를 자백하면 저는 미쁘시고 의로 우사 우리 죄를 사하시며 모든 불의에서 우리를 깨끗케 하실 것이요, 만일 우리가 범죄 하지 아니하였다 하면 하나님을 거짓말하는 자로 만드는 것이니 또한 그의 말씀이 우리 속에 있지 아니하니라.> (요일 1:7-10)

<영접하는 자 곧 그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으니, 이는 혈통으로나 육정으로나 사람의 뜻으로 나지 아니하고 오직 하나님께로서 난 자들이니라.> (요 1:12)

저는 찬송가 202장이 좋습니다. 저는 그 찬송을 작사한 작사자의 마음을 압니다. 제 마음도 그 마음과 똑 같습니다. 그래서 찬송가 202장이 좋습니다.


죄에서 자유를 얻게 함은 보혈의 능력 주의 보혈, 시험을 이기는 승리되니 참 놀라운 능력이로다. 주의 보혈 능력 있도다. 주의 피 믿으오. 주의 보혈 그 어린양의 매우 귀중한 피로다.

육체의 정욕을 이길 힘은 보혈의 능력, 주의 보혈. 정결한 마음을 얻게 하니 참 놀라운 능력이로다. 주의 보혈 능력 있도다. 주의 피 믿으오. 주의 보혈 그 어린양의 매우 귀중한 피로다.

눈보다 더 희게 맑히는 것 보혈의 능력, 주의 보혈. 부정한 모든 것 맑히시니 참 놀라운 능력이로다. 주의 보혈 능력 있도다. 주의 피 믿으오. 주의 보혈 그 어린양의 매우 귀중한 피로다.

구주의 복음을 전할 제목 보혈의 능력, 주의 보혈. 날마다 나에게 찬송주니 참 놀라운 능력이로다. 주의 보혈 능력 있도다. 주의 피 믿으오. 주의 보혈 그 어린양의 매우 귀중한 피로다. 아멘.

말씀을 마치려고 합니다. 저는 십자가의 능력, 보혈의 능력을 믿습니다. 오늘의 나는 은혜의 나입니다. 나 아닌 나입니다. 감당할 수 없는 영광과 축복의 나입니다. 그러나 이 모든 것이 나로 말미암은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은혜로 말미암은 것임을 압니다. 그러므로 저는 바울이 고린도전서 15장 10절에서 한 고백 <그러나 나의 나 된 것은 하나님의 은혜로 된 것이니 내게 주신 그의 은혜가 헛되지 아니하여 내가 모든 사도보다 더 많이 수고하였으나 내가 아니요 오직 나와 함께 하신 하나님의 은혜로라.>는 고백을 압니다.

그리고 저는 그 하나님의 은혜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통하여 나타났음을 압니다. 그러므로 저는 반 컵의 물대신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붙들고 수치스러운 자신 앞에 섭니다. 그리고 평생 그 십자가를 자랑하며, 감사하며 살고 싶습니다. 그래서 저는 바울이 갈라디아서 6장 14절에서 한 유명한 고백 <그러나 내게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외에 결코 자랑할 것이 없으니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세상이 나를 대하여 십자가에 못 박히고 내가 또한 세상을 대하여 그러하니라.>는 말씀도 이해합니다.

우리의 죄가 비록 주홍 같이 붉을지라도, 진홍같이 붉을지라도, 그리하여 감히 하나님은 물론이고, 자신과 사랑하는 사람들 앞에 설 수 없는 수치스러운 존재들이라고 하여도,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그의 보혈을 들고 서면 우리의 모든 죄와 수치는 다 사라지고 영광스러운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누리게 될 줄을 저는 믿습니다.

세상 그 어떤 것으로도 죄의 문제는 해결할 수 없습니다. 구원의 문제는 해결할 수 없습니다. 십자가는 저를 사람 되게 하셨습니다. 사랑하는 아내의 사랑받는 남편이 되게 하셨습니다. 사랑하는 자녀들에게 존경받는 아비가 되게 하셨습니다. 교인들에게 사랑받는 목사가 되게 하셨습니다. 무엇보다도 하나님의 자녀가 되게 하셨습니다. 십자가 때문에 사람으로 사람답게 살다가 사람답게 죽을 수 있게 되었습니다. 할렐루야.

십자가를 붙들고 사람답게 살다가 하나님 앞에 서시는 저와 여러분들이 다 되실 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아멘. (김동호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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