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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종려주일] 칼, 목자, 흩어진 양 떼 (슥 13:7-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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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천주교는 칼의 수난사>
저는 한국 천주교의 수난사에 대해서 관심을 갖고 공부한 적이 있습니다.
천주교는 개신교보다 한 백년 정도 앞서 들어왔습니다.
1784년에 이승훈이 영세를 받고 입교한 이후 시작된 천주교는
수난과 순교의 가시밭길 위해서 자라났습니다.
천주교가 처음 들어왔을 때 그 박해는 정말 무서운 것이었습니다.
무명의 신자들까지 합칠 경우 줄잡아 8천명 이상이 순교를 당했다는 통계가 있습니다.
신해박해니 을묘박해니 신유박해니 병오박해니 해서 수많은 신자들이
서소문 밖 절두산 새남터 등지에서 참수형을 당했습니다. 

이러다 보니 천주교 초대 교인들은 산간 벽지 깊은 곳에 들어가
교우촌을 형성해서 옹기나 숯을 구어 생계를 이어갔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당국에 체포당하는 일을 두려워하지 않았으며
고문대나 형틀 위에서도 담대히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했다고 합니다.

그런데 아직 성직 안수를 받은 사제, 즉 신부님이 없었던 초기에는
평신도 지도자들이 천주교회를 이끌어 갔습니다.
이 때를 '가성직(假聖職) 시대'라고 부릅니다.
천주교는 유난히 위계질서를 존중하기에 정식으로 안수 받은 신부님을
모시는 것이 초대 교인들의 한결같은 소원이었습니다. 

이와 같은 숙원이 마침내 이루어져 충청도 내포 출신의 김대건이 마카오에 가서
신학을 공부하고 1845년 8월에 한국 최초의 신부로서 사제서품을 받게 됩니다.
그 이후 관원들은 어떻게 해서든지 신부님부터 먼저 체포하려고 눈이 벌겠습니다.
왜냐하면 목자인 신부님만 제거하면 양떼들은 금방 흩어질 것이라고 믿었기 때문이지요.
결국 김대건 신부님은 체포되어 1846년 9월, 26세의 일기로 순교를 당했습니다.
한강 새남터에서 12명의 망나니들이 돌아가며 치는
여덟 번째의 칼날에 절명하고 말았던 것이지요.

이렇게 목자가 칼에 목숨을 잃으니 양떼들은 금방 흩어지고 말았습니다.
그 후 수많은 교우들이 잡혀서 곳곳에 순교의 피바람이 일었습니다.
간신히 살아남은 사람들은 산간벽지로 깊숙이 숨어들어 믿음을 지켜나갔습니다.

<'칼'과 '목자'와 '흩어진 양'으로 푸는 예수님의 수난사>
저는 오늘 봉독한 본문 말씀을 읽다가 한국 천주교의 순교사를 떠올리게 되었습니다.
'칼'과 '목자'와 '흩어진 양떼'라고 하는 이 세 마디가 기막히게도
천주교의 수난사를 설명해 줄 수 있는 코드라고 생각했습니다. 
"칼로 목자의 목을 치니 그를 따르던 양떼들이 산지사방으로 흩어진다."
아마 한국 천주교뿐만 아니라 개신교회를 비롯한 전세계
모든 교회의 수난사가 이러한 패턴으로 이루어졌을 것입니다. 

예수님의 수난사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칼로 목자되신 예수님을 쳤더니 목자를 따르던 양떼들이 다 흩어지고 말았습니다.
사실 오늘 봉독한 슥 13: 7은 예수님께서 십자가의 수난을
당하시기 전에 직접 인용하신 말씀으로 유명합니다.

우리 마 26: 31절 말씀을 다같이 찾아 읽겠습니다.
"때에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오늘밤에 너희가 다 나를 버리리라
기록된 바 내가 목자를 치리니 양의 떼가 흩어지리라 하였느니라."

자, 여기 보세요.
오늘 밤 예수님께서 체포당하실 터인데 그 때
제자들이 다 주님을 버리게 될 것이라는 말씀입니다. 
그것은 슥 13: 7의 말씀 그대로 하나님께서 목자를 칼로 치시니
양떼가 흩어지리라는 예언이 이루어질 것이라는 말씀입니다.
막 14: 27에도 이와 똑같은 말씀이 나옵니다. 

여러분, 오늘은 종려주일입니다.
사순절의 클라이맥스가 종려주일이요, 오늘부터 성금요일까지 계속되는 고난주간입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를 지기 위해 예루살렘에 입성하신 날을 기념하는 날이 종려주일입니다.
공관복음서를 보면 예수님은 주로 갈릴리 지역에서 활동하시다가
마지막 1주일 동안 예루살렘에서 심문을 당하시고 처형을 당하십니다. 
이 1주일 동안 예루살렘에서 말할 수 없는 치욕과 고난을 당하시고
마침내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신 사건을 기념하는 절기가 고난주간입니다. 
이번 고난주간이 여러분 모두에게 의미 있고 소중한 시간이 되기를 바랍니다.

자, 그렇다면 고난주간에는 도대체 어떤 일이 일어났을까요?
저는 고난주간에 일어난 풍경을 해석하기 위해
슥 13: 7이 굉장히 좋은 도구가 된다고 믿습니다.

우리 다같이 7절 말씀을 다시 한번 읽겠습니다.
"만군의 여호와가 말하노라 칼아 깨어서 내 목자, 내 짝된 자를 치라
목자를 치면 양이 흩어지려니와 작은 자들 위에는 내가 내 손을 드리우리라."

이 말씀을 표준 새번역 성경은 이렇게 번역해놓았습니다.
"칼아, 깨어 일어나서, 내 목자를 쳐라.
나와 사이가 가까운 그 사람을 쳐라.
나 만군의 주가 하는 말이다. 목자를 쳐라.
그러면 양 떼가 흩어질 것이다. 나 또한 그 어린것들을 칠 것이다." 

이 말씀이 예수님의 수난과 어떤 관계가 있을까요?

① 칼은 예수님이 당하실 수난을 의미합니다.
그 옛날 한국 천주교회에 대대적인 순교의 피바람이 불 때
신자들은 대개 참수형을 당했습니다.
망나니가 공중 높이 휘두르는 시퍼런 칼날에 목숨을 잃었습니다.

순교에 얽힌 감동적인 일화가 수없이 많은데 최필공의 이야기가 특히 감동적입니다.
최필공이 새남터에서 순교를 당할 때 망나니가 아직 미숙해서
그의 머리를 단번에 치지 못했습니다.
그 때 최필공은 목에 난 상처에 자기 손을 갖다댔다가 피가 흥건히 젖은 손을
다시 떼어 주의 깊게 들여다보며 "보배로운 피"라고 외쳤다고 합니다. 

이렇게 수난과 순교의 역사는 칼의 역사였습니다.
오늘 하나님께서 내 목자, 나와 사이가 가까운 그 사람을
칼로 치신다는 말씀은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박는다는 말씀입니다.

예수님이 예루살렘에 들어가신 것은 영광의 길이 아니었습니다.
수치와 고난과 순교의 가시밭길이었습니다.
하나님께서 하나밖에 없는 외아들의 목에 칼을 겨누신 것은 우리의 죄 때문이었습니다.
우리가 하나님과 원수가 되어서 다 그릇된 길을 걸어갈 때
우리가 하나님과 화목하고 바른 길을 갈 수 있도록 예수님의 목에 칼을 대신 것입니다.

그리하여 사 53: 4-6은 이렇게 말씀합니다.
"그는 실로 우리의 질고를 지고 우리의 슬픔을 당하였거늘
우리는 생각하기를 그는 징벌을 받아서 하나님에게 맞으며 고난을 당한다 하였노라
그가 찔림은 우리의 허물을 인함이요 그가 상함은 우리의 죄악을 인함이라
그가 징계를 받음으로 우리가 평화를 누리고 그가 채찍에 맞음으로 우리가 나음을 입었도다 우리는 다 양 같아서 그릇 행하며 각기 제 길로 갔거늘 여호와께서는
우리 무리의 죄악을 그에게 담당시키셨도다."

그렇습니다.
예수님께서 하나님의 칼을 받으신 것은 우리의 죄 때문이었습니다.
우리가 지은 모든 죄악을 주님의 어깨에 지우시기 위하여 칼을 주신 것입니다.
이번 고난주간에 우리 대신에 칼을 받으신 주님의 은혜에 감사하시기 바랍니다.

② 목자는 예수님을 의미합니다.
성경에서 목자의 이미지는 하나님과 우리 사이를 알려주는 대표적인 이미지입니다.
하나님은 목자요, 우리는 목자의 음성을 듣고 따르는 양이라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귀하게 들어 쓰신 사람들 중에 목자 출신이 적지 않습니다.
모세도 미디안 광야에서 양을 치는 목자였고, 다윗도 목자였습니다.
하나님은 이들이 양을 치는 모습을 보시고선 저렇게 훌륭한 목자라면 틀림없이
내 백성도 잘 돌볼 것이라 믿으시고 이스라엘 백성의 목자로 삼아주셨습니다.

우리는 모든 목자들 중에 가장 좋은 목자가 우리 예수님이라고 믿습니다.
예수님은 요 10: 14에서 "나는 선한 목자라 나는
내 양을 알고 양도 나를 안다."고 말씀하십니다.
히 13: 20도 말씀합니다. 
"양의 큰 목자이신 우리 주 예수를 영원한 언약의 피로
죽은 자 가운데서 이끌어 내신 평강의 하나님이."

벧전 2: 25도 말씀합니다.
"너희가 전에는 양과 같이 길을 잃었더니 이제는
너희 영혼의 목자와 감독되신 이에게 돌아왔느니라."
그리고 또한 계 7: 17도 말씀합니다.
"이는 보좌 가운데 계신 어린 양이 저희의 목자가 되사 생명수 샘으로
인도하시고 하나님께서 저희 눈에서 모든 눈물을 씻어 주실 것임이러라."

여러분은 오늘 예수님께서 여러분을 이끄시고 돌보는 목자이심을 믿습니까?
어리석고도 겁 많은 양들을 푸른 초장으로 쉴만한 물가로 인도하는 목자이심을 믿습니까?
오늘 그 목자가 바로 우리의 죄악 때문에
십자가의 매서운 칼날을 받으신다는 사실도 믿습니까? 
믿으신다면 여러분은 선한 목자되신 주님의 은혜에 감사하십시오!
이번 고난 주간 내내 저와 여러분을 위해 그 날선 칼을 받게 되실
목자의 은혜에 감사하십시오!

③ 양 떼는 제자들과 오늘 우리들을 의미합니다.
양떼는 두말 할 필요도 없이 예수님을 따랐던 제자들을 의미합니다.
목자되신 예수님을 칼로 쳤더니, 즉 수난이 찾아왔을 때
양들인 제자들이 어떻게 되었습니까?
사방팔방으로 제 목숨 구하기 위하여 흩어지고 말았습니다.
어느 하나 예외 없이 다 도망치고 말았습니다.

가룟 유다는 은 삼십 냥에 눈이 멀어서 스승을 배신하고 팔아 넘겼습니다.
수제자인 베드로는 다른 사람들이 다 예수님을 버린다고 할지라도
자기는 절대로 그렇게 하지 않겠다고 장담했습니다.
그런데 어떻게 되었습니까?
예수께서 잡히시던 날 밤 현장에 함께 있던 베드로에게 한 하녀가 다가와 다그쳤습니다.
"당신도 저 갈릴리 사람과 함께 다닌 사람이 맞지요?"
"나는 네가 무슨 말을 하는지 모르겠다."며 부인했습니다.

그리고 나서 대문 쪽으로 나갔는데 다른 하녀가 또 다그쳤습니다.
"이 사람은 나사렛 예수와 함께 다니던 사람입니다."
"나는 그 사람을 알지 못하오." 두 번째 부인했습니다.

조금 뒤 거기에 서 있는 여러 사람들이 한꺼번에 몰려와 다그쳤습니다.
"당신은 틀림없이 그들과 한 패요. 당신의 말씨를 보니 당신은 예수의 제자임이 분명하오."
그 때 베드로는 저주하며 맹세하며 울부짖었습니다.
"나는 그 사람을 도무지 알지 못하오."
그러자 새벽닭이 울기 시작했습니다.
예수님께서 닭 울기 전, 세 번 부인하리라고 예언했던 말씀이 그대로 이루어졌던 것이지요!

여러분, 그랬습니다.
베드로를 비롯한 모든 제자들이 다 자기 살길 찾아서 뿔뿔이 흩어졌습니다.
슥 13: 7의 말씀이 정확하게 이루어졌던 것이지요!

이번 고난 주간에 하나님께서 우리의 목자이신 예수님을 칼로 치실 때
여러분은 어떻게 하실 것입니까?
끝까지 예수님과 더불어 의리와 믿음의 지조를 지킬 것입니까?
아니면 나 하나 살기 위하여 사방으로 흩어져 도망칠 것입니까?
천주교회에 무서운 박해가 불어닥쳤을 때 모두가 순교의 반열에 선 것은 아니었습니다.
순교 당한 사람들의 숫자보다 훨씬 더 많은 사람들이 두려움과 겁에 질려서 배교했습니다.
당국의 고문과 회유에 못 이겨 동료 교우들을 밀고한 사람들 또한 부지기수였습니다.

오늘 종려주일을 맞으면서 우리는 우리 자신에게 조용히 물어봐야 할 것입니다.
우리의 목자가 고난을 당할 때 우리는 과연 어떻게 할 것인가?
예수님의 제자들처럼 흩어질 것입니까?
아니면 예수님과 더불어 결연히 고난받을 것입니까? 

<남은 자를 연단하시는 하나님>
이제 결론을 맺기 위해 8-9절 말씀을 다같이 읽겠습니다.
"여호와가 말하노라 이 온 땅에서 삼분지 이는 멸절하고 삼분지 일은 거기 남으리니
내가 그 삼분지 일을 불 가운데 던져 은같이 연단하며 금 같이 시험할 것이라
그들이 내 이름을 부르리니 내가 들을 것이며 나는 말하기를 이는 내 백성이라 할 것이요 그들은 말하기를 여호와는 내 하나님이시라 하리라."

자, 이게 도대체 무슨 말씀일까요?
저는 이 말씀을 교회사적인 시각에서 이해했습니다.
하나님께서 예수님 위에 십자가라는 칼을 내치셨을 때
예수님 따르던 양떼들은 다 흩어졌습니다.
그 후 초대 교회에 엄청난 핍박과 환란이 시작되었습니다.
정말 온 땅에 있는 사람들 2/3가 멸망하여 죽고
1/3만 살아남은 것 같은 비극이 도처에서 일어났습니다.
그러나 그 가운데에서도 하나님은 남은 자를 살려두신다는 것입니다.

중요한 것은 하나님께서 이 남은 자를 어떻게 들어 쓰시는가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그 남은 자 1/3을 불 속에 집어넣어서 은을 단련하듯이 단련하시고,
금을 시험하듯이 시험하시겠다는 것입니다.
한마디로 철저히 연단 시키겠다는 말씀입니다!

여러분, 여러분은 어떤 환난과 역경이 찾아와도
끝까지 흩어지지 않는 남은 자들이 되시길 바랍니다.
하나님께서 칼을 칼집에 다시 꽂으시고 긍휼과 자비를 베풀어주실 것입니다.
정금과 같이 순은과 같이 연단 시키셔서 주님이 쓰실만한 그릇으로 다듬어주실 것입니다.

이제 모든 고난과 시련의 세월을 통과하여 하나님이
쓰실만한 그릇이 될 때 하나님과 우리는 하나가 될 것입니다.
9절 후반부의 말씀처럼 우리가 하나님의 이름을 부르고
하나님은 우리의 부르짖는 소리에 응답하실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하나님의 백성이라고 부르고
우리는 하나님을 '우리 하나님'이라고 부르게 될 것입니다. 

박완서라고 하는 여류작가가 쓴 『한 말씀만 하소서』라는 소설을 읽은 적이 있습니다.
박완서씨가 4녀 1남 중 독자이자 막내인 아들을 잃은 뒤 쓴 글이었습니다.
그러므로 이 책은 소설이 아니라 생생한 실화라고 봐야 옳을 것입니다.
딸 많은 집에 외아들이자 늦둥이로 자랐으니 어머니와 가족들이 얼마나 사랑했겠습니까?
아들은 머리도 좋아서 서울대학교 의과대학생이 되었습니다.
박완서씨 집안은 하나 남부러울 것 없이 언제나 행복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아들이 교통 사고로 죽고 맙니다.
참척(慘慽)과 천붕(天崩)의 고통을 당한 박완서씨가
얼마나 슬퍼했을까는 충분히 상상할 수 있을 것입니다. 
박씨는 식음을 전폐하고 매일 미친 사람처럼 통곡하며 하루하루를 지냈습니다.
천주교 신자인 박씨는 생때같은 아들을 잃고 자기가 믿는
하나님에 대하여 항의도 해보고 불평도 해보고 별짓을 다합니다.

그렇게 정신 나간 사람처럼 지내던 박씨는 수도원에 들어가 수녀들과 함께 지내게 됩니다.
이 때 박완서씨는 자기의 외아들을 데려간 하나님과 맞대결을 하기로 작정합니다.
그리하여 방안을 데굴데굴 구르며 덤비고 쥐어뜯고 하면서
"왜 내 아들을 그토록 일찍 데려가셨는지 한 말씀만 해보시라!"고 울부짖습니다.
그러나 오랫동안 하나님은 한 말씀도 주시지 않았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하나님께서 박씨에게 하나의 깨달음을 주셨습니다.
"왜 하필 내 아들을 데려 가신단 말입니까?" 하는 생각을
"내 아들이라고 해서 데려가지 말라는 법이 어디 있나?"로 고쳐 생각하기 시작했습니다.
이와 같은 사고의 전환이 박완서씨에게는 하나의 구원으로 다가왔습니다.
그 후 그녀는 자신이 저주하고 부인했던 하나님을
더 겸손하고 순수하게 섬길 수 있게 되었습니다.
박씨는 용케도 이 슬픔을 잘 이겨냈고 예전보다 더 빛나고 감동적인 글을 쓰고 있습니다.

여러분, 우리에게는 누구나 다 견딜 수 없는 고난의 세월이 있습니다.
그 때 목자되신 주님을 따르는 양무리와 같은 우리는 흔들리지 말아야 합니다.
인고와 연단의 시간을 잘 이겨내면 하나님은 우리를 쓰실만한 그릇으로
더 성숙하고 아름답게 만들어주실 것입니다.
바로 그리할 때 하나님은 더 이상 추상적이고 관념적인 하나님이 아니라
우리 곁에 늘 함께 계시는 사랑과 긍휼과 자비와 은총의 하나님이 되실 것입니다.

이번 고난 주간에 우리는 우리의 목자되신
예수님을 치신 칼을 조용히 음미해봐야 할 것입니다.
그리고 그 옛날 예수님을 위해 목숨까지 바치겠다던
제자들이 흩어져 도망쳤던 사실도 생각해봐야 할 것입니다. 
그리하여 오늘 우리는 어떤 환난과 역경 속에서도 남은 자들이 되어서
하나님이 쓰실만한, 하나님의 진정한 자녀들이 되어야 할 것입니다. 아멘.
(김흥규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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